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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 존재 이유에 의문이 생기는 까닭

유엔사 존재 이유에 의문이 생기는 까닭
▲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공군 오산기지에서 지난 8월 열린 한국전 참전 미군 유해 송환식 기자회견에서 웨인 에어 유엔군 사령부 부사령관이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지난 65년간 존재감 없던 유엔군사령부가 최근 다시 ‘뜨고’ 있다.

지난 8월 남북철도 연결 시범운행차 방북하는 남측 점검단을 유엔사가 불허하면서부터다. 이때도 한미연합사나 주한미군사령부가 아닌 유엔사가 왜 나서는지 의아해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지난달 28일엔 리용호 북 외무상이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유엔사를 거론했다. 리 외무상은 유엔사가 “미국의 지휘에만 복종”하면서 “신성한 유엔의 명칭을 도용하고 있다”며 해체를 주장했다.

유엔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3일 비무장지대(DMZ) 내 지뢰제거 작업을 유엔사가 승인했다는 보도를 통해서다. 남측 DMZ의 관리권이 유엔사에 있음을 재확인한 것.

‘9월 평양공동선언’ 군사부속합의서에 따라 남과 북이 공동으로 DMZ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에 유엔사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도 의아하지만 1975년 9월 유엔총회에서 이미 해산 결정이 내려진 유엔사가 40년 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다.

유엔사는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24일 일본 도쿄에서 창설돼, 전쟁이 끝난 1957년 미8군과 함께 용산 주한미군기지로 이전했다.

유엔 창설 이래 최초로 결성된 미국 주도 연합군인 유엔사는 탄생에서부터 위법성 논란에 휘말렸다. 유엔헌장이 군사기구 창설의 전제조건으로 규정한 ‘특별협정’을 미국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

그래선지 1975년 30차 유엔총회에서 주한 유엔사 해체를 결의했고, 키신저 당시 미 국무장관은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1976년 1월1일부로 유엔사 해체를 약속했다. 그러나 43년이 지난 오늘까지 미국은 유엔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미국은 유엔사를 해체하는 대신 19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해 유엔사의 작전통제권을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한편 한미합동군사훈련 팀스프리트를 시작한다.

▲ 육군은 비무장지대 내 전사자 유해발굴을 위한 지뢰제거작업을 2일 강원도 철원군 일대에서 개시했다. [사진 : 뉴시스]

철도·도로 연결과 DMZ 지뢰 재거에 유엔사는 개입할 권한이 있을까, 없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선 이미 선례가 있다.

6.15공동선언 발표 직후인 지난 2000년 11월 조선인민군과 유엔사 간에 동·서해지구 철도 연결을 위한 ‘남북관리구역’에 대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이 합의서에 의해 철도와 도로가 통과하는 비무장지대 구역은 남측이 관리(Administration)한다고 명시됐으나, 2002년 남북지뢰검증단 교환을 둘러싸고 유엔사가 억지를 썼다. 유엔사가 돌연 관리권은 우리 정부에 있지만 관할권(Jurisdiction)은 자기네에 있다고 강변한 것. 그러나 합의서에 ‘정전협정에 따라 처리한다’고 명시(정전협정문엔 관리권만 있고 관할권은 따로 언급되지 않음)됨에 따라 미국의 억지는 결국 통하지 않았다.

9월 평양공동선언 군사부속합의서에 따라 DMZ 내 유해 발굴을 위한 지뢰제거 작업이 시작됐다. 또 DMZ 내 역사유적 조사까지 진행되면 사실상 남쪽 DMZ 전 구역의 관리권이 우리 정부에 이양되는 셈이다.

9월 평양공동선언 군사부속합의서는 유엔사의 존재 이유에 강한 의문을 던진다.

합의서에서 오는 11월1일 이후 ‘상대방을 겨냥한 군사훈련을 중지’하기로 함에 따라 군사분계선 일대 한미합동군사훈련에 한국군은 참가하지 않는다. 한미합동이 아니라 미군 단독훈련만 가능하다.

아울러 남과 북은 “상대방을 겨냥한 대규모 군사훈련 및 무력증강 문제, 다양한 형태의 봉쇄 차단 및 항행 방해, 정찰행위 중지 등에 대해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긴밀히 협의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지금까지 유엔사와 한미연합사가 한미군사위원회를 통해 협의하던 주요 군사 현안 역시 이제 ‘남북공동군사위원회’에서 다루게 됐다.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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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을 강조했던 손석희 사장마저도 똑같았다.

언론의 보도 방식에 따라 시민들의 반응도 여론도 달라질 수 있다
 
임병도 | 2018-10-10 09:14:2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10월 8일 고양 저유소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언론은 앞다퉈 속보를 내놓았고, 관련 기사만 수백 건이 넘게 보도됐습니다.

뉴스타파 박대용 기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연합뉴스와 한국일보 기사 이미지와 함께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같은 사건 다른 제목
– 외국인 국적을 부각한 연합뉴스
– 부실한 관리를 부각한 한국일보

박대용 기자의 글처럼 연합뉴스와 한국일보의 고양 저유소 화재 보도는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연합뉴스가 제목에서 강조했듯이 누가 불을 냈느냐를 중심으로 보도했다면, 한국일보는 왜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지 못했는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언론이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을 어떻게 보도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실화가 아닌 고의적 방화처럼 보도한 ‘연합뉴스’

▲연합뉴스는 속보를 통해 고양저유소 화재 용의자가 저유소 불을 지켜봤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용의자는 불이 난 것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연합뉴스는 속보라며 ‘경찰 “스리랑카인, 풍등 쫓아가다 되돌아가…저유소 불 지켜봐”‘라는 제목으로 편집한 CCTV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CCTV를 보면 용의자 A씨가 풍등을 쫓아가다 서 있는 장소 주변에는 높은 나무와 담장이 있었습니다. 좌측에 화재 모습이 보이지만, A씨 편에서는 나무 때문에 가려진 상태였습니다. 화재 현장에 접근하고 싶어도 높은 담장 때문에 불가능해 보입니다.

Q. 피의자가 풍등을 날린 경위는.

A. 10월 6일 오후 8시쯤 인근 초등학교에서 진행된 아버지 캠프 행사에서 풍등 날리는 행사가 있었다. 산 뒤에서 풍등 2개가 날아왔는데, 피의자가 호기심에 풍등 1개에 불을 붙였고 순식간에 그게 올라가는 바람에 벌어진 그런 상황이었다.

Q. 이후 상황은.

A. 풍등이 날아가는 걸 보고 쫓아가다가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놀라서 도망간 것은 아니고 날아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제지를 하려고 했다가 못한 것이다. 잔디에 떨어지는 장면은 못 봤어도, 떨어지는 건 확인했다.

서울신문이 보도한 고양경찰서 형사과장의 질의응답을 보면 용의자 A씨는 풍등을 쫓아가 떨어지는 것은 확인했지만, 불이 난 사실은 몰랐던 것으로 추정됩니다.(용의자 A씨는 경찰 조사에서 불이 난 사실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연합뉴스의 기사 제목을 보면 화재 현장을 지켜본 것처럼 묘사됩니다. 기사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해할 수 있는 보도입니다.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연달아 보도한 ‘국제신문’

▲국제신문 이승륜 기자가 20분 간격으로 송고한 기사. 기자의 억지스러운 주장이 제목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국제신문 이승륜 기자는 10월 10일 00:34분에 ‘저유소 화재 불 낸 스리랑카인 낼 돈 1700만 원+43억 원?…”평생 귀향 못할 수도”‘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이승륜 기자는 소방기본법 제12조 1항을 언급하며 스리랑카인이 불법 풍등 날리기 혐의로 벌금형을 피하기 어렵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자는 소방기본법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작성한 듯 보입니다.

제12조(화재의 예방조치 등) ① 소방본부장이나 소방서장은 화재의 예방상 위험하다고 인정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나 소화(消火) 활동에 지장이 있다고 인정되는 물건의 소유자ㆍ관리자 또는 점유자에게 다음 각 호의 명령을 할 수 있다. <개정 2017. 12. 26.>

1. 불장난, 모닥불, 흡연, 화기(火氣) 취급, 풍등 등 소형 열기구 날리기, 그 밖에 화재예방상 위험하다고 인정되는 행위의 금지 또는 제한

소방기본법 제12조를 보면 위험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풍등 날리기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했지, 풍등 자체를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용의자 A씨가 실화 혐의와 손해를 책임질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평생 귀향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자의 예상이지 법의 판결은 아닙니다. 마치 기자가 판사처럼 법적 처벌까지 내린 셈입니다.

국제신문 이승륜 기자는 20여분 뒤에 ‘스리랑카인 지른 저유소 화재 원인은 풍등…”동남아 부처님 오신 날 인기라는데 왜?”‘라는 제목으로 관련 기사를 또다시 송고했습니다.

관련 기사를 20분 간격으로 송고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동남아 부처님 오신 날 인기’라는 문장이 굳이 필요했을까라는 의문도 듭니다.

언론사가 사건만 터지면 관련 기사를 여러 개 보도하는 이유는 포털사이트에서 클릭수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포털 뉴스를 보면 언론은 이번에도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비슷하거나 억지스러운 기사를 여러 차례 송고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널리즘을 강조했던 손석희 사장마저도 똑같았다.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는 1부와 2부에서 용의자를 다르게 표현했다. 그러나 자막은 여전히 국적을 표기했다.

10월 8일 JTBC 뉴스룸 1부에서 손석희 앵커는 고양 저유소 폭발 화재를 보도하면서 ‘경찰은 용의자로 27살 스리랑카인 남성을 긴급 체포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손석희 앵커는 2부에서는 ‘인근 공사장에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1부의 보도와는 다른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막에서는 여전히 국적을 표기했습니다.

“풍등 날리다 고양 저유소 화재 유발 혐의 스리랑카인 체포”
“풍등 날리다 고양 저유소 화재 유발 혐의 용의자 체포”

이주민 지원센터 ‘친구’라는 비영리 민간단체에서 활동하는 조영관 변호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제목에서 꼭 국적을 밝히지 않아도 보도에 있어서 큰 문제는 없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은 국적을 표기했고, 댓글에는 ‘테러’라는 단어와 함께 외국인 혐오 발언들이 줄줄이 달렸습니다.

‘난민, 불법체류자들 제대로 관리 안하더니 드디어 우리나라도 테러 발생했네. ㅉㅉㅉ 갈수록 더 심각한 테러들 많이 일어날거다.’
‘이러고도 난민들 더 수용할거냐???’
‘외노자 아웃’
‘외국인들 함부로 들이지마라 다문화니 뭐니 하면서 이래저래 혜택만 주고있으니’
‘국가시설에 어떻게 스리랑카인이 들어갈수가 있나요? 이해가 않되네요.테러가능성도 조사해야할듯.’

조영관 변호사는 ‘ 독일언론협회의 보도준칙에 따르면 소수자 보호와 선입견 방지를 위해 범죄 용의자의 국적과 종교는 보도금지를 원칙으로 한다’며 ‘우리나라의 범죄 관련 보도에서는 국적, 종교가 제일 먼저 등장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조 변호사는 ‘외국인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외국인이 증가하면 범죄율이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게 조사되는 데는 이런 언론의 보도 태도에도 책임이 있다’라며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언론의 보도 방식에 따라 시민들의 반응도 여론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백 건의 고양 저유소 화재 기사를 보면, 대한민국 언론이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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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에 전하는 '통일 선배'의 조언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④] 슈타지 역사기록소의 리히터 씨

 

 

독재 정권은 필연적으로 경찰국가 체제를 완성한다. 공권력이 시민을 위협함으로써 독재 체제는 민주주의의 적이 된다. 민주화 전 한국이 그랬다. 현재 북한도 그렇다. 과거 동독이 그랬다. 
 
슈타지(STASI, 국가안전부)가 동독 일당 독재 체제를 떠받쳤다. '당의 방패와 검'이라는 구호로 1950년 2월 출범한 방첩기관 슈타지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직후인 1989년 12월 14일 해체되기 전까지 동독 인민 1450여만 명을 철저히 감시했다. 1950년 2700여 명이었던 슈타지 공식 요원은 1989년 8만8897명까지 늘어났다.  
 
슈타지 요원들은 민간인 비공식 협력자(IM, 민간인 비밀정보원)를 활용해 극단적인 시민 감시 활동을 벌였다. 1989년 당시 IM은 무려 18만여 명에 달했다. 그 중에는 동독 포환던지기 대표선수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우도 바이어(Udo Beyer, IM 코드명 캡틴)도 있다. 펑크 밴드의 베이시스트, 동구권 국가의 관광객 등으로 위장한 IM들이 동독 사회 곳곳에서 시민을 감시하고, 이른바 반체제 인사들을 슈타지 교도소(Stasi-Untersuchungshaftanstalt)로 보냈다. 동독 시절, 25만 명 이상의 시민이 슈타지에 의해 정치범으로 몰려 고통 받았다. 이들 중 수천 명은 시베리아 수용소로 추방됐다. 당시 슈타지 감시망은 인구 175명 중 한 명 꼴에 달할 정도였다. 슈타지의 모델이었던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보다 훨씬 강력한 감시 체제였다.  
 
재통일 후 독일 정부는 동독 시절 슈타지를 포함한 당국의 반인권 범죄 약 7만5000건을 조사했다. 조사를 통해 10만여 명의 혐의대상자가 추려졌고, 이들 중 1737명이 피고인으로 확정, 1021명이 재판을 받았다. 이 중 유죄판결을 받은 이는 756명이었는데, 이들 중 92%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소개할 칼 하인츠 리히터(Karl-Heinz Richter) 씨는 청소년 시절 슈타지 교도소에 끌려갔다. 서독으로 몰래 탈출하려했다는 이유였다. 이때부터 리히터 씨의 평생에 걸친 동독 독재 정부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는 슈타지와 갈등한 자기 삶을 기록한 책을 자비로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본업인 건축업을 하는 한편, 자신이 수감 생활을 했던 베를린 북부 판코우(Pankow) 인근 역사박물관에서 가이드로 활동한다. 독일 언론과도 자신의 경험을 인터뷰한 바 있다.  
 

▲ 베를린 슈타지의 옛 본부를 개조한 슈타지 박물관에 KGB(왼쪽)와 슈타지(오른쪽) 문양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슈타지는 동독 독재 체제를 떠받치는 기구였다. ⓒ특별취재팀

그의 삶을 정리하자면 자연스럽게 '북한 과거사 청산'이라는, 현재 해빙 분위기의 한반도에서는 거론하기 매우 힘든 주제가 떠오르게 된다. 작은 희망도 소중한 지금의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국가안전보위부(북한의 방첩기관) 문제를 다룰 수는 없다. 가장 바람직한 건 긴 시간을 두고 북한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여러 통일 전문가들이 남북 통일을 긴 호흡으로 보되, 디테일한 문제까지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며, 북한의 문제는 북한 스스로 풀도록 남한이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한국이 북한의 인권 문제를 주도적으로 들고 나온다면, 자칫 한국은 북한 위에 군림하려는 하는 모습으로 오인될 수 있다. 현재 통일 담론에서 한국은 강자고 북한은 약자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해 군림했다는 비판은 지금도 구 동독 지역에서 강하게 나오는 불만의 이유다.  
 
여러 이유로, 어쩌면 리히터 씨 인터뷰는 여럿에게 불편함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체제와 불화한 이의 목소리 역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특히 리히터 씨의 남북 관계에 관한 관점은 이역만리 외국인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체계적이고, 진지했다. 다음은 리히터 씨의 목소리로 재구성한 그의 이야기다. 
 
탈출 실패...슈타지에게 끌려가다 
 
난 1946년 7월 31일, 브란덴부르크 주 동쪽의 슈바르츠하이데(Schwarzheide)에서 태어났어요. 베를린에서 120㎞가량 떨어진 곳이지. 어릴 적부터 난 동독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독재 시스템이 일상에 영향을 미쳤으니까. 이웃끼리, 친구끼리 서로를 평가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이웃 중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그 사람이 서쪽으로 도망친 건지, 감옥에 끌려간 건지 알 수가 있나.  
 
학교에 다닐 때 사회주의 체제를 찬양하고, 자본주의를 악마화하는 수업을 필수적으로 들어야 했어요. 난 그 따위 수업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래서 1963년, 10학년까지만 마치고 김나지움(Gymnasium, 독일의 중고등학교)을 그만뒀어요. 체제에 신물이 나서 친구 17명과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모색했죠. 탈출 방법은 간단해. 다리에서 서베를린행 기차로 뛰어내리는 거지. 탈출 시도가 흥미로웠는지, 요즘에도 가끔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와요. 첩보영화 같다 생각들 하나봐.  
 
부모님 생각 안 했느냐고? 물론 마음의 짐이 됐죠. 사회 분위기와 달리 우리 집 분위기는 좋았거든. 그래서 탈출계획을 짤 때 친구들과 이 문제를 많이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어쨌든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하잖아요. 탈출하기로 했지.  
 
재수가 없었어. 탈출에 나만 실패했어요. 기차에서 떨어져서 팔뼈과 갈비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죠. 이 상태로 슈타지에게 발각됐어요. 동베를린 북부 판코우(Pankow)의 교도소로 끌려갔어요. 6개월 간 수감됐죠. 슈타지가 도망가려던 건방진 젊은 놈을 치료할 필요 없다고 봤는지, 제대로 치료해주지도 않더군요. 그대로 죽을 운명이었죠. 
 
다행히, 서독으로 도망에 성공한 친구가 기자회견에서 내 얘길 했어요. 나중에야 알았는데, 서독 언론이 엄청나게 몰렸죠. 다른 나라 언론사도 취재 올 정도였어요. 이 기자회견 덕분이었는지, 시간이 좀 지나자 슈타지도 나에게 어느 정도 의료 지원을 해 줬어요. 그래도 수감 초반에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아서 출옥 후 18개월 간 병원 신세를 졌어요. 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이상하게 붙어버렸거든. 골절 부위를 다시 절개하고 새로 붙이는 수술을 했죠. 나이 드니 상처 부위가 쑤셔.  
 
출옥 후에는 엔지니어 직업 교육을 받았고 기계공으로 일했어요. 1968년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1970년에 결혼했죠. 그러다 친구 소개로 국영 정유회사 미놀(VEB Minol)의 주유소 직원으로 일했는데, 이 때 주유 가격을 조작해 뒷돈을 좀 벌었지. 나쁘다고? 그렇긴 한데, 당시 경제 형편이 다들 어려우니 이런 일이 흔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집단적, 도덕적 타락을 정부에 대한 불신이라는 핑계로 위안'한 거지(인용구는 리히터 씨가 직접 쓴 책의 내용). 대체로 한동안은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죠.  
 

▲ 칼 하인츠 리히터 씨. 젊은 시절 권투에 빠지기도 했다는 그는 고령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었다. ⓒ특별취재팀

동독과의 싸움 
 
하지만 난 여전히 체제가 싫었거든. 1974년부터 정부에 서독으로의 출국 허가 요청서를 계속 올렸어요. 나 이 체제 싫으니 서독으로 보내달라고. 그런데, 이번에는 슈타지가 내 아내를 잡아가버렸어요. 내가 주유소에서 부당하게 챙긴 이익을 부인의 혐의라며 잡아간 거예요. 다행히 부인은 6개월 간 수감 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이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어? 
 
결국 1975년 8월 13일, 난 아내, 딸과 함께 합법적으로 동독에서 '제명'되었고, 서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됐어요. 타이밍이 잘 맞았지. 나 같은 사람이 1975년에 서베를린으로 많이 추방됐어요. 아마 그때 무슨 협약이 있어서 가능했지 싶은데? (1975년 7월 30일부터 사흘간 열린 헬싱키 협정으로, 미국을 포함해 동서방 체제 35개국이 모여 주권존중·전쟁방지·인권보호를 핵심으로 체결한 협정이다. 동독도 이 협정에 서명했다.) 
 
부모님을 남겨두고 떠났느냐고? 그래, 맞아요. 당시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께는 함께 이주를 권유했지만 당신이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 겁난다며 거부하셨어요. 다행히 당시 어머니는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나고 계셔서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죠. 
 
서베를린에서는 화물 운전사 일을 구했어요. 이대로 원하는 곳에 정착하고 자유를 얻었으니 좋게 풀렸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서야 아내가 슈타지에게 감금됐을 때 진실을 뒤늦게 알았어요. 성고문을 당했죠. 이후로 아내는 평생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어요(인터뷰 당일에도 리히터 씨의 아내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내가 보기엔, 이미 블랙리스트에 오른 나를 슈타지가 길들이려고 그렇게 한 것 같아요(실제 베를린의 슈타지박물관에는 슈타지가 블랙리스트 길들이기 수법으로 이 같은 방법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내의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어요? 우리 가족은 슈타지 때문에 망가졌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를 해야 했지. 장거리 화물차 뒤편에 운전수가 누워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죠? 그걸 개조해서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들을 서쪽으로 데려왔어요. 탈출하는 사람과 만날 지점을 정하면, 그곳을 지나다가 차를 잠시 정차해요. 그러면 풀숲에서 기다리고 있던 탈출자가 벼락같이 차에 뛰어들어서 숨어 들어가는 거죠. 동독 경찰이 검사 안 했느냐고? 나 이제 서독 사람이야. 국경 경찰이 서독 차량을 함부로 못 뒤졌죠.  
 
그렇게 21명을 동에서 서로 탈출시켰어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복수였죠. 당시 서독 화물차가 동독 내부로 진입은 불가능했지만, 동서독 교차 지역의 고속도로는 이용 가능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 슈타지 박물관은 슈타지에 협력한 주요 IM들의 실명과 얼굴을 모두 전시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슈타지의 IM이었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우도 바이어. ⓒ특별취재팀

외국 망명... 그리고 귀국 
 
그런데 일이 또 희한하게 진행되더군요. 이 일을 처음 나에게 제안한 동독 출신 동료가 있는데, 알고 보니 그 놈이 슈타지의 IM이었어. 이 탈출계획도 알고 보니 슈타지가 날 잡으려고 만든 함정이었더라고. 슈타지가 얼마나 무서운지, 요원 두 놈이 서독 경찰로 위장해 우리 집을 찾아오기도 했어요(슈타지는 동독 출신 서독인 약 700여 명을 동독으로 불법 납치했다.). 그 놈들 세계 곳곳에서 첩보 활동을 했어요. 결국, 서독 경찰이 서독을 떠나라고 권고하더군요. 나이지리아로 떠나게 됐어요. 1979년의 일이에요.  
 
가족이 나이지리아에 정착했지만, 아내와 딸이 지내기 힘들어했어요. 아내와 딸은 베를린과 나이지리아를 오가며 살았죠. 그런데 나이지리아도 안전하지 않았어요. 그곳에서도 슈타지의 납치 시도가 있었거든.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로 또 넘어갔죠.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예멘 등에서 일했어요. 그 나라들에서 위스키 밀수를 해서 돈 엄청 벌었지. 그쪽 나라에서 술 밀수하다 걸리면 사형이야. (웃음) 그러고 보니, 당신들 한국에서 왔죠? 나 중동에서 한국 건설노동자들과 함께 일한 적 있어요. 노예처럼 일하더군. 안타까웠어요. 
 
외국을 전전하면서도 난 꾸준히 서독 경찰과 연락했어요. 내가 슈타지의 납치 대상이다 보니, 서독 경찰이 정기적으로 연락했어요. 그러다 1989년이 왔어요. 운명의 해지. 
 
바깥에서도 뉴스로 고국 소식 꾸준히 봤죠. 동독이 심상치 않더라고. 서독 경찰에게 '이제 독일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이제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을 거라 하더군요. 그 말을 믿고 1989년에 고국행 비행기에 올랐어요. 운명처럼, 내가 서베를린 쪽 장벽 부근에 있을 때 장벽이 무너졌어요. 갑자기 사람들이 동쪽에서 마구 밀려들어왔죠.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에요.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두근해. 드디어 저 독재 체제가 무너졌다 싶었지.  
 

▲ 동독 정부는 사진에서 보듯 펑크 패션도 허용했지만, 그 메시지가 체제에 위협적이어선 안 되었다. 나쁜 메시지의 옷을 입어 슈타지 조사를 받은 당시 젊은이의 모습. 슈타지박물관에 전시. 슈타지는 서구 자본주의의 타락을 인민에게 선전했는데, 록 음악, 선정적 영화 등을 예로 들었다. ⓒ특별취재팀

난 동독과 불화했어요.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지. 나 말고도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문제는 체제 말기가 오기 전까진 용기 있는 사람들이 너무 적었다는 거예요. 더러운 체제에서 침묵한다면, 결국 그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침묵하는 이들이 소시민적인 평화, 나만의 평화를 추구한 걸 지나치게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침묵이 다른 이들에게 억압으로 돌아갔음을 알아야 해요. 
 
베를린 장벽이 왜 무너졌겠어요? 동독 말기에는 경제적 상황이 너무 안 좋았어요. 판이 바뀌었지. 그러다 보니 입 다물고 살던 사람들까지 목소리를 내게 된 거예요. 예전에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적으니 슈타지가 여러 심리 전략으로 체제를 통제할 수 있었지만, 그게 불가능해진 상황이 온 거죠.  
 
동독만 변해서 장벽이 무너진 게 아니에요.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면, 동독에서도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 당시 대학살이 일어났을 거예요. 결과적으로 장벽은 운이 좋았기에 무너졌어요.  
 

▲ 리히터 씨가 자신의 책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특별취재팀

남북한에 전하는 통일 선배의 조언 
 
아무래도 내가 독재 체제를 살아봐서 그런지, 남북한 소식에 관심이 많아요. 내가 당신들만큼 그 사회를 잘 알진 못하겠지만, 북한은 여러 독재 체제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독특한 사례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항하는 이들이 쉽게 나오지 않겠지. 아마 동독보다 훨씬 강하게 이데올로기 주입 교육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지난 4월의 남북 정상회담은 나도 아주 감동적으로 봤어요. 난 남북이 언젠가 꼭 통일국가를 만들기를 바라요. 헤어졌던 이들이 다시 하나가 된다는 건 아주 중요해요. 
 
내가 보기에 남북 통일에서 가장 힘든 건 남북한 경제적 격차가 아니에요. 경제적 격차가 있더라도 투자가 이어지면 경제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돼요. 정말 힘들고, 정말 중요한 건 북쪽의 민주화에요. 북한 사람들 사고방식이 남한 사람들과 아주 많이 다를 걸요? 
 
뭔가를 알아야 그리워할 수 있어요. 나는 베를린 장벽이 생기기 전을 알아서 자유가 뭔지 조금 알았어요. 그러니 자유를 그리워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북한 사람들이 과연 자유가 무엇인지 알까요?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자유를 그리워할 수 있어? 이런 상황에서 자유에 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가 (통일 후) 현실을 마주하면, 그 충격은 엄청나요. 남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 할 거야.  
 
북한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요. 통일 여건이 조성되면 남한에 기대하는 게 클 텐데, 그건 절대로 충족되지 않을 거예요. 이게 충족되지 않음을 알게 되면, 크게 상처받을 수 있어요. 주제넘긴 하지만, 동독 출신으로서 내 경험을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야 해요. 당이 도와주지 않아요. 동독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통일 후 매우 힘들었어요.  
 
남한의 젊은 세대도 내가 보기엔 통일의 변수가 될 것 같아요. 그들은 분단과 어떤 직접적 상관이 없잖아요? 그런데 통일 상황이 조성되면, 그들은 그 모든 변화가 자신들의 부담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향한 반발심이 강하게 일어날 수도 있지. 좋은 통일을 이루려면 그들을 잘 달래야 해요.  
 
통일 이후 대도시와 소도시의 격차, 빈부 격차로 인한 문제에도 주의해야 해요. 남한에서 대도시와 소도시 사람 간 삶의 질이 차이나지 않아요? 그런데 통일이 되면 북쪽 사람들이 많이 내려올 거 아니에요. 그러면 원래 가진 것 없던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을 더 미워하게 될 거예요.  
 
잘 본 것 같다고? 이런 일을 우리가 다 경험했어요. 재통일 후 독일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을'들의 싸움, 즉 약자가 다른 약자를 혐오하는 사회 현상이 일어났어요. 아마 남북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급박한 통일은 안 된다... 남북이 배워야 할 교훈 
 
맞아요. 내가 말한 '을들의 싸움'이란 게 극우화 현상이에요. 우리에겐 악몽과 같은 현상이지. 이 문제를 사람마다 다르게 볼 텐데, 난 특히 작센 주의 특수성에 주목해요. 
 
그 동네 사람들이 원래 좀 달라요. 작센 주 주도 드레스덴 근처에 프라이탈(Freital)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어요. 그 도시가 협곡에 위치했어요. 그래서 분단 시절에 서독 TV 전파가 안 닿았어요. 결국 그 사람들이 서독 미디어를 가장 적게 접했죠. 그런데 그 동네가 요즘 극우 문제로 가장 시끄러워요. 그 동네는 정말 '무 개념의 계곡'이라고. (웃음) (이 같은 지역 비하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인터뷰이의 생각을 되도록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한편, 독일 내에서 작센 주를 바라보는 일반적 시선을 전하고자 그대로 옮긴다. 상당수 독일인들이 작센 주를 경멸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기본적으로 동독 사람들이 외국인을 두려워해요.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 그래. 동독 시절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 쿠바나 에티오피아, 베트남 등에서 다양한 인종의 이주민이 오긴 했어요. 그런데 그 수가 굉장히 적었고, 대부분은 대도시에 살았어요. 그러니 그런 시골 동네 사람들은 외국인 자체를 접해보지 못했어요. 다르니 두려워하는 거야. 그 상황에서 통일 후 한꺼번에 변화가 닥치니, 그 분노를 생소한 외국인에게 표출하는 거지. 그게 극우가 잘 나가는 이유예요. 
 
그런 사람들, 어차피 동독 시절이었다 해도 자기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했을 거예요. 자본주의 체제로 세상이 바뀌니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더 잃어버린 것 같거든. 그러니 더 분노하는 거라고. 이제 그 동네 문제를 어떻게 손쓰기 어려운 지경이 돼 버렸어요. 안타까워.  
 
이런 문제 때문이라도 남북은 급박한 통일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당장 우리가 너무 급하게 통일했다가 통일 30년이 지나도록 이런 문제를 겪고 있잖아요. 일단 두 개의 정부 체제를 유지하고 천천히 통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한테서 배울 건 배우라고. 내가 너무 주제넘은 참견을 하나? (웃음) (통역: 추영롱) 
 
그간 재통일 당시 이미 장년이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전했다. 다음부터는 상대적으로 젊은 통일 세대의 이야기를 전한다. 20대부터 50대까지, 연령층은 다양하지만 이들은 동독 체제에서 경제적으로 자리잡기 이전에 재통일을 경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통일 독일에서 서독 사람과 동등한 조건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경험을 한 이들이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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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함식 참석하는 대통령님, 왜 우린 외면하시나요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10/10 14:07
  • 수정일
    2018/10/10 14:0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강정마을 평화이주민이 띄우는 편지] 오늘도 우리들의 길은 막히지만

18.10.10 10:45l최종 업데이트 18.10.10 11:41l

 

 10일 제주 국제관함식이 열릴 예정인 가운데 8일 오후 서귀포 앞바다에서 해군 함정과 헬리콥터 등이 해상사열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  10일 제주 국제관함식이 열릴 예정인 가운데 8일 오후 서귀포 앞바다에서 해군 함정과 헬리콥터 등이 해상사열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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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희들은 제주도 강정마을 지킴이 또는 평화이주민이라 불리는 이들입니다. 이곳에 온 시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이주해서 지금까지 해군기지반대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국제관함식이 열리는 오늘 10월 10일은 바로 강정 해군기지 반대활동을 한 지 4164일째 되는 날입니다. 강정마을 주민과 지킴이들에게 이 숫자는 하루하루 잊을 수 없는 고통의 날이었습니다. 잘못된 '국가사업'으로 평화로운 강정마을이 파괴되었습니다.

평생을 살아온 형제가, 이웃이 서로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구럼비 해변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이제는 다시 회복할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세월동안 60여 명이 구속되고 700여 명이 잡혀가고 수없이 재판정을 들락거리며 벌금을 내고 노역을 살았습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평화를 지키려는 노 사제가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수염이 뽑히는 조롱도 당했습니다.

 

지난 11년 동안 국가폭력으로 주민과 평화 지킴이의 인권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촛불의 힘으로 만들어진 정부 역시 강정마을 해군기지 강행의 절차적 문제와 국가폭력으로 가해진 피해에 공식적인 사과도 없었으며 진상규명 요구에 한 번도 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번 국제관함식 개최 여부를 두고 청와대가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취한 방식은 11년 전 강정마을에 대한 강압적이고 위선적인 정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더 비겁하고 야만적입니다.

손만 대지 않았지 서로 싸우도록 분위기를 조장하고, 결국 싸우는 사람들이 직접 결정하도록 했으니까요. 당사자가 되지 않고서도 문제를 참으로 손쉽게 해결한 꼴이 됐지요. 이런 방식의 뒤로 물러선 보이지 않는 힘의 행사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문 대통령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을 우선시하는 평화와는 어떻게 일맥상통할 수 있나요?  

문재인 대통령님.

어제는 70대 초반의 마을 삼촌이 '대통령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냐'며 저희에게 물으셨습니다. 그 삼촌의 친구는 '대통령을 만나면 그동안의 억울함을 토하려고 한다' 전해 주셨습니다. 저희들은 대통령께서 관함식에 참여하는 줄 알았지만 주민들을 만나러 마을 안까지 오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곳곳에 붙은 마을 공고문에는 2007년 4월 이전부터 거주하는 주민에 한해 참가자격이 제한되어 있더군요. 이번에는 마을 주민과 평화 이주민들을 가르고 있습니다.

이는 그동안 끈질기고도 치열했던 해군기지반대운동 저항의 역사와 그 시간을 함께 만들어간 사람들을 모조리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품고 자신의 삶과 꿈을 이 작은 마을을 지키는데 쏟아온 평화 이주민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제주 해군기지 강행은 한반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였습니다. 강정의 평화는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 누구나 지켜야 할 약속이며 권리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이러한 구별짓기는 참으로 비열한 행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문 대통령께서는 강정마을에 대해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지닌 고통의 역사와 평화와 정의를 향한 시민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그리고 이 모든 문제의 시작점 역시 제대로 알고 계십니다. 2011년 9월, '노무현 재단 제주 준비위' 발족식에 앞서 참여정부 당시의 과오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문제점을 바로 잡으셨지요. 

전북 부안 방폐장 건설 과정의 선례를 언급하며 주민들과의 충분한 대화가 빠진 절차상의 문제와 평화의 섬 제주도에 군사화를 한층 강화시킬 수 있는 해군기지입지 선정의 부적절함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셨습니다.

또 2017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로 동북아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전쟁의 기억과 상처는 뚜렷해지고 평화를 갈망하는 심장은 고통스럽게 박동치는 곳, 그곳이 2017년 9월, 오늘의 한반도 대한민국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매일같이 전쟁의 기억과 상처가 뚜렷해지고 평화를 갈망하는 심장이 고통스럽게 박동치는 곳이 바로 오늘의 강정입니다.
 
 지난 9월 27일 오후 서귀포시 강정동 제주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주민회가 국제관함식 즉각 취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지난 9월 27일 오후 서귀포시 강정동 제주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주민회가 국제관함식 즉각 취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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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해군기지 완공 후 미국의 핵잠수함을 비롯해 각국 군함이 제주에 모습을 드러내고 미 태평양 사령관은 제주해군기지에 줌월트급 스텔스 구축함을 배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제주가 평화의 섬이 아니라 군사기지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열리는 국제관함식은 군사기지를 정당화하는 절차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제주 해군기지에 수십 대의 군함들이 나타나 전투력을 뽐내고, 수만의 군인들이 용맹함을 과시하려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80대의 전투기를 탑재한다는 원자로를 갖춘 핵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가 입항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한 귀퉁이에 앉아있습니다. 한명의 몸뚱이로 차지하는 한평의 평화의 땅을 지키고자 밤 낮 할 것 없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줌 밖에 되지 않지만 대통령에게 지난 11년간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에도 버텨온 끈질긴 저항의 목소리와 평화의 갈망이 들리지 않으시는지요. 우리가 국제관함식을 반대하는 것은 제주해군기지가 동북아의 새로운 군사기지로 떠오른 것을 우려하는 것이며, 이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정착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최근 남북관계에서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청산하고 핵무장 포기를 통해 스스로 평화의 길을 선택하도록 하셨지요? 얼마 전에는 백두산 천지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손을 잡고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며, 한라산에도 언젠가 함께 오르고 싶다 하셨고요.

그런데 어떻게 제주 강정에서는 국제관함식을 개최하면서 군사력을 이용해 평화유지의 방법을 선택하려고 하시나요? 방위산업 전시와 해상 침투시범, 해상사열식 등의 활동을 통해 제주해군기지의 전쟁기지 활용가능성을 알리는 이 모순적인 태도에 대해 문 대통령께서는 어떤 설명을 하실 수 있으신가요? 

대통령은 '평화는 삶의 소명이자 역사적 책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한 국가의 최고 수장인 대통령 문재인에 앞서 사람 문재인에 대한 기대를 아직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추운 겨울, 서귀포에서 촛불을 들고 다시 한라산을 넘어 제주시로 가서 촛불을 들었던 그 힘과 열정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가 탄생됐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대통령이 만들어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문 대통령께서 꼭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강정마을의 해군기지반대운동은 단순히 지역적이고 지엽적인 평화운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마을에서 한 줌에 불과한 사람들이 일구어온 평화와 정의는 한국 사회 곳곳에 폭력에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기댈 수 있는 희망과 연대의 어깨가 되어 주었습니다. 또 전 세계에서 전쟁과 불의한 권력에 맞서 항거하는 다른 동료 사람들에게 멈추지 않고 함께 싸우는 동료들이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용기와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저희들이 가는 평화의 길은 또 다시 막힙니다. 해군들의 비열한 웃음에, 경찰들의 무관심에, 해군이 고용한 용역들의 과격한 행동에 밀쳐지고 내쳐집니다. 그러나 이들의 방해는 저희들을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외려 저희로 하여금 우리가 바라는 미래를 더 미루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살아내고자 하는 열망을 더 부추기게 할 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께 감히 말씀 드립니다. 강정마을은 대한민국의 평화운동의 중심지입니다. 이곳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모여 평화를 위한 길을 모색합니다. 대통령님께서 그토록 갈구하는 평화를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는 저희들의 움직임을 부디 막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순간에도 저희들의 저항의 몸짓은 평화와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역사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는 것도 꼭 기억해주십시오. 

저희들에게는 이번에 기지 내에서든 마을 안에서든 문 대통령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길이 모두 차단되어 아마도 얼굴을 직접 뵙기는 어렵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실을 담아 이 편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잘 다녀가시기 바랍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평화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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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주도 수리아 공격으로 3,000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

 
미국주도 국제연합군 수리아 공격 수많은 인명 살상
 
번역, 기사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10/09 [15:13]  최종편집: ⓒ 자주시보
 
 

미국 주도 수리아 공격으로 3,000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

 

9월 24일 자 이란국연 이르나통신(IRNA)의 보도에 따르면 2014년 이후부터 미국 주도의 연합군들의 대시(무장테러집단을 비하해서 부르는 말)를 상대로 폭격을 가하여 3,3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숨졌다통신은 미국 주도 수리아 공격으로 3,000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인권관측소라는 제목으로 관련 사실을 상세하게 전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국제연합군들이 수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2014년 여름 이후부터 어린이 826명을 포함하여 3,331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는 수리아인권관측소가 보고서를 냈다.

 

반면 수리아인권관측소의 발표와는 달리 국제연합이 월 말에 발표 한 가장 최근의 보고서에서 수리아와 이라크에 대한 미국 주도의 연합군들의 공격으로 총 1,061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인정하였다.

 

미국영국프랑스 등이 주축이 된 국제연합(실질적으로 서방제국주의연합세력들의 조직이다유엔 역시 예외 없이 그들의 꼭두각시 국제조직일 뿐이다.)들의 지난 8월 말의 발표와는 달리 수리아 사나이란 파르스통신이르나통신레바논 알 마스다르 러시아 스뿌뜨닉끄 등의 보도는 이와는 다르게 미국이 이끄는 소위 국제연합군이라는 모자를 뒤집어 쓴 서방제국주의연합세력들의 수리아 민간인 지대 폭격으로 수만 명의 민간인들이 숨졌으며수백만 명이 피난민이 되어 이 나라저 나라를 떠돌며 고통스러운 피난 살이를 하고 있다.

 

또 관련 보도들을 보면 서방제국주의연합세력들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사회간접자본시설들이나 사회기반시설 그리고 산업시설들을 무자비하게 폭격하여 파괴를 시켰다그로인해 수많은 수리아 민간인들이 하루하루를 고통의 나날 속에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이에 대해 이르나통신도 “2014년 8월부터 워싱톤과 그들의 몇몇 동맹국들은 수많은 수리아 민간인들을 학살하였으며다에시 테러분자들과의 전쟁을 벌인다는 핑계를 대며 그 나라(수리아)의 사회기반시설들을 초토화 시켰다.”라고 관련 사실을 보도하였다.

 

위와 같이 보도한 이르나통신의 보도는 결코 서방제국주의연합세력들을 비난하기 위해 조작하여 전한 내용이 아니다그에 대해서는 그동안 본지에서 2016년 10말부터 지속적으로 관련 사실을 보도하여 주었다현재 수리아 인민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 심히 파괴가 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지대로 변하고 말았기에 자신들이 태어나고자랐으며살고 있던 정든 땅을 떠나 낮설고 물설은 이국땅 이곳저곳을 떠돌며 고달픈 피난민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수리아의 이 같은 참상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 대책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사고하여야 한다그건 곧 현재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그 어떤 민족 인민들도 예외가 될 수 없기에 그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이다바로 남과 북 해외의 8천만 우리민족의 문제이기도 하기에 더욱더 그렇다.

 

 

----- 번역문 전문 -----

 

미국 주도 수리아 공격으로 3,000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인권관측소

 

테헤란, 9월 24, IRNA(이슬람공화국통신)- 3,3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수리아의 다에시(ISIS) 테러분자들에 대한 미국 주도의 국제연합군들의 공격(폭격)으로 숨졌다고 수리아 인권관측소가 보고서를 내었다.

 

▲ 3,3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수리아의 다에시(ISIS) 테러분자들에 대한 미국 주도의 국제연합군들의 공격(폭격)으로 숨졌다고 수리아 인권관측소가 보고서를 내었다. 런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알-꾸드스 알-아라비는 수리아인권관측소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국제연합군들이 수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2014년 여름 이후부터 어린이 826명을 포함하여 3,331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일요일에 밝혔다.     © 이용섭 기자

 

런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알-꾸드스 알-아라비는 수리아인권관측소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국제연합군들이 수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2014년 여름 이후부터 어린이 826명을 포함하여 3,331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일요일에 밝혔다.

 

그렇지만 월 말에 발표 된 가장 최근의 보고서에서 국제연합은 수리아와 이라크에 대한 미국 주도의 연합군들의 공격으로 총 1061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인정하였다.

 

2014년 8월부터 워싱톤과 그들의 몇몇 동맹국들은 수많은 수리아 민간인들을 학살하였으며다에시 테러분자들과의 전쟁을 벌인다는 핑계를 대며 그 나라(수리아)의 사회기반시설들을 초토화 시켰다.

 

수리아정부는 지속적으로(원문-반복적으로유엔에 서신을 보내어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서방제국주의연합세력들의 불법적인 공격을 중지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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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전문 -----

 

Over 3000 civilians killed in US-led strikes in Syria: Rights monitor

 

Tehran, Sept 24, IRNA— More than 3,300 civilians have been kill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US-led international coalition's strikes against Daesh (ISIS) terrorists in Syria, according to a report by the Syrian Observatory for Human Rights.

 

▲ 3,3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수리아의 다에시(ISIS) 테러분자들에 대한 미국 주도의 국제연합군들의 공격(폭격)으로 숨졌다고 수리아 인권관측소가 보고서를 내었다. 런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알-꾸드스 알-아라비는 수리아인권관측소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국제연합군들이 수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2014년 여름 이후부터 어린이 826명을 포함하여 3,331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일요일에 밝혔다.     ©이용섭 기자

 

Citing the report by the Syrian Observatory for Human Rights, the London-based Al-Quds al-Arabi, reported Sunday that since summer 2014, when international coalition attacks began in Syria, 3,331 civilians, including 826 children, have been perished.

 

 

However in its in its most recent report released in late August, the International coalition admitted a total of 1061 civilians have lost their lives in the US-led coalition attacks on Syria and Iraq.

 

Since August 2014, Washington and some of its allies, have killed many Syrian civilians and razed the country's infrastructure into ground under the excuse of fighting the Daesh terrorist organization.

 

The Syrian government has repeatedly written letters to the United Nations and the Security Council, urging them to stop the coalition's illegal atta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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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서울시민과 ‘서울 정상회담’ 환영물결 만든다”

6.15서울본부, 다음달 4일 ‘서울평양시민마라톤대회’·김정은 국무위원장 환영사업 준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서울본부(6.15서울본부)가 8일 서울시청 앞에서 ‘4.27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 이행’, ‘서울 정상회담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회견 참가자들은 판문점선언 국회비준을 방해하는 자유한국당 등을 규탄하는 한편 “김정은 국무위원장 서울 방문 환영사업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4~6일 평양에서 열린 10.4선언발표 11주년 민족통일대회에 참가한 한충목 6.15서울본부 상임대표는 “북에서는 남북 두 정상의 선언을 이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고, 남쪽 진보진영에서도 선언 이행을 위한 실천을 잘 벌여달라고 요청했다”면서 “우리 천만 서울시민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에 화답하자”고 호소했다.

9월평양공동선언 6항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 초청에 따라 가까운 시일 내에 서울을 방문하겠다고 했다. 6.15서울본부는 “북측 지도자의 첫 방문이라는 역사적인 의의를 되새기며 천만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환영사업을 벌려 나갈 것”이라고 알렸다.

권순영 6.15서울본부 공동집행위원장도 “평양 시민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환영·환송하는 모습을 보면서 서울시민들은 양 정상이 합의한 ‘서울 정상회담’을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해야 할까 하는 많은 생각을 했다”고 상기하곤 “서울본부는 지난 70년 동안 우리의 상상력을 가로막았던 모든 장벽을 허물고, 환영위원회를 비롯해 풀뿌리단체들에서도 갖가지 형태의 축하와 환영의 행동이 진행되기를 바란다”면서 “그것이 한반도의 평화·번영·통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힘을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회견 참가자들은 또 “시대를 역행하는 세력과 평화통일의 분위기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면서 이를 규탄했다. 최은철 민주노총 서울본부 본부장은 “북측은 남북정상회담, 조미정상회담 이후 풍계리 핵시험장,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폐기하고, 미군 유해를 송환하는 등 성의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 “미국은 이에 상응하는 수준의 관계 정상화와 평화보장 조치로 대북제재를 즉각 해제하고, 종전을 선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인환 민중당 서울시당 위원장은 “자유한국당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새겨 듣고 있지 않고 4.27판문점선언 국회비준을 가로막고 있다”고 규탄했다. 오 위원장은 “많은 시민사회단체들과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면서 “수도 서울에서 앞장서고, 서울시의회부터 판문점선언 결의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6.15서울본부는 또 다음달 4일 열릴 서울평양시민마라톤대회를 준비 소식을 전했다. 이요상 마라톤대회 상임조직위원장은 “서울평양시민마라톤대회는 서울과 평양 간의 교류협력을 진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대회를 통해 더 많은 서울시민과 함께 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환영 분위기를 만들고,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 이행의 의지를 모아내겠다”고 밝혔다.

조직위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자 중 10km 1~3위 결승선 통과자(남녀 각각, 총6인)를 비롯해 추첨을 통해 선정된 시민들에게 내년 4월에 열릴 ‘평양국제마라톤대회’ 참가자격을 주는 것으로 대회를 추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회견 참가자들은 단일기를 들고 ‘4.27판문점선언·9월평양공동선언 이행’과 ‘서울 정상회담 환영’에 나서는 서울시민의 모습을 퍼포먼스로 선보였다.

 

[기자회견문]

천만 서울시민들과 함께 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실천과 서울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준비하자

지금 한반도는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평화에로 나아가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조성된 전쟁위기를 넘어 판문점과 평양에서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새로운 시대의 길목에 들어서고 있다. 또한 북미 간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로 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이번에 평양에서 개최된 10.4선언 민족통일대회는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10.4 선언이 채택된지 11년만에 처음으로 진행된 10.4기념 남북공동행사로서 다시한번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계승하고 획기적인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통일의 미래를 앞당길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실천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반도 분단과 전쟁위기 속에서 기득권을 유지할수 있는 자유한국당 등 분단적폐세력들은 평양정상회담을 폄하하고, 판문점선언 국회비준을 반대하면서 한반도 평화 번영, 통일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미국 호전세력들 또한 유엔사를 이용해 남북관계를 방해하고 있는가 하면, 대북제재 유지로 여전히 남북관계의 진전과 한반도 항구적 평화지대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15만 평양시민 앞에서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다시 한번 천명했으며, 남과 북의 두 정상은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 것을 확약했다.

이제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개선으로 갈 수 있는 공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어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만남으로 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이루어졌다. 평양공동선언에서 합의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방문 시간표 또한 더욱 빨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 지도자 최초의 서울방문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서 그랬던 것처럼,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 시민들과 악수를 나누고, 서울 시민 앞에서 연설을 한다면 70년 넘게 유지되어 왔던 분단체제가 허물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민족 단합의 기운은 더욱 고조될 것이고 남북의 관계는 더욱 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하기에 우리는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과 서울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다음과 같이 천만 서울시민들과 함께 할 것이다

1. 한반도 평화와 통일, 번영의 길을 가로막는 자유한국당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높여갈 것이다.

2. 판문점선언 등 남북의 양 정상이 합의한 통일의 이정표가 불가역적으로 이행될수 있도록 판문점선언 국회비준을 촉구할 것이다.

3. 남북 교류협력을 방해하는 대북제재 해제를 강력히 촉구하며,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종전선언이 하루빨리 이뤄지도록 촉구할 것이다.

4. 천만 시민들과 함께 서울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서울평양시민마라톤대회를 시민들의 많은 참여 속에서 벌여낼 것이다.

5. 서울을 방문하게 될 김정은 위원장을 뜨겁게 환영하며, 서울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되도록 천만 서울시민들과 함께 대대적인 환영준비를 벌여낼 것이다.

2018년 10월8일

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실천과
서울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기자회견 참가자

 

김지혜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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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민족통일대회, 남측 손님에 비친 평양

[포토뉴스] 10.4민족통일대회, 남측 손님에 비친 평양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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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08  13:4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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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만에 10.4민족통일대회가 평양에서 처음 열렸다. 지난 4일부터 6일까지 160명 방북단은 평양에 머물면서 10년 만에 바뀐 평양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함께 동행한 방북 취재단이 보내온 평양의 모습을 사진으로 전한다.

   
▲ 순안 평양국제비행장에서 평양 시내로 향하는 길.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 외곽 가을, 한가로이 소가 거닐고 있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 시내는 차들이 즐비했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북한 선전선동의 최고 산실. '노동신문사'.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 거리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지하도를 건너는 평양 시민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어디든지 갈 수있는 평양 궤도전차.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역 앞 평양 시민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시 학생들이 모여있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악기를 들고 열심히 공부하며 길을 걷는 평양 학생.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청량음료 매대에서는 무엇을 팔까.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인민극장 정류소에서 차를 기다리는 시민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인민문화궁전을 향하는 평양 궤도전차.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 보통문.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2016년 문을 연 뒤 남측 손님들이 처음으로 찾은 평양 과학기술전당.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과학기술전당 중앙에는 로켓 모형이 세워져 있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과학기술전당 한 쪽에서 아이들이 모니터류 테니스를 치고 있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과학기술전당에 설치된 컴퓨터로 학생들이 공무하고 있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컴퓨터 학습에 한창인 학생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과학기술전당 자료실 책장 앞에 있는 독특한 모습의 의자.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방북단은 4D영화를 관람했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 중앙동물원 입구.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동물원은 시민들로 북적였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동물원을 찾은 유아원생들과 선생님.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동물원의 물개쇼.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남측 손님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평양 시민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의 한 장면.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빛나는 조국'에는 9월 평양공동선언이 등장했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만수대창작사를 참관하는 방북단. 도자공예를 보고 있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한땀 한땀 자수를 놓는 만수대창작사 예술인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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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직 줄줄이 무죄 ‘직권남용’ 법원 판결의 함정

고위직 줄줄이 무죄 ‘직권남용’ 법원 판결의 함정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 2018-10-08 20:07:16
수정 2018-10-08 20:32:55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서울 서초구 법원청사 모습
서울 서초구 법원청사 모습ⓒ사진 = 뉴시스
 

지난 5일 이명박 전 대통령,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 청와대 고위공직자 9명이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국정농단뿐 아니라 사법농단 관련자들 역시 ‘직권남용’을 주요 혐의로 받는 만큼 적폐청산에 있어 법원의 직권남용 해석이 중요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정계선)는 이날 이 전 대통령을 다스 실소유주로 인정해 15년을 선고하면서도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이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선 무죄로 판단했다.

검찰은 대통령 재직 시절 다스의 미국 소송 지원과 자신의 차명재산 상속세 절감 방안 검토에 공무원들을 동원했다는 이유로 이 전 대통령에게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직권남용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같은 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 최병철) 역시 김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9명이 친정부 성격의 보수단체를 지원하는 등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사건에 가담한 사실은 인정했으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월권’이 아니라 ‘남용’일 때 직권남용 유죄  

두 재판부의 논리는 같다. 이들의 범죄 행위가 직무 권한을 ‘남용’한 것이 아니라 ‘월권’ 행위기 때문에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원은 ‘직권남용’을 “공무원이 자신의 일반적인 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관해 권한을 불법하게 행사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일반적 권한에 속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경우”인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와 구별했다.  

다시 말해 ‘직권남용’과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는 해당 행위가 공무원의 일반적인 직무 권한 범위 내에 해당하는지에 따라 갈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검사가 자신의 본래 업무인 수사·기소·공소 유지 등과 관련해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직권남용’에 해당한다. 하지만 인사 청탁 등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권한 범위 밖의 일을 했다면 이는 ‘월권’, 즉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

이를 앞선 재판에 적용해본다면 법원은 이 전 대통령과 김 전 실장 등이 대통령, 비서실장 등의 직권 범위를 넘는 ‘월권’ 행사를 통해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 형법은 권력자가 형벌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매우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형법 123조가 규정하는 직권남용죄가 공무원의 일반적 직무 권한을 남용한 경우만을 처벌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공무원의 일반적 직권을 넘는 ‘월권’ 행위는 개인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켰다면 ‘강요죄’, 돈을 갈취했다면 ‘공갈죄’ 등으로 처벌될 수 있다.  

대통령의 ‘직권’은 어디까지일까  

그렇다면 검찰이 이들에게 강요죄 등과 함께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한 이유는 뭘까? 법원과 검찰의 ‘직권’에 대한 해석차이다.  

법원은 직권을 일반적 직무 권한으로 좁게 해석했다. 반면 검찰은 직권남용으로 기소된 이들이 대통령과 청와대 고위공직자들이라는 점에 주목해 직권을 넓게 해석했다. 고위 공직자들은 직무 권한의 범위가 넓고 특히 대통령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직권’에 대한 넓은 해석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블랙리스트 사건 항소심에서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판사 김문석)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사상·표현·예술의 자유 등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헌법 수호를 위해 국민에게 부여받은 대통령의 권한이 오히려 헌법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데 사용됐다”고 밝혔다.  

법원이 직권을 좁게 해석하는 것에 대해 ‘제 식구 감싸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나온다. 검찰이 사법농단 사건 관련 법관들을 주요 혐의로 직권남용을 적용할 것을 예고한 가운데, 최근 법원의 해석대로라면 ‘재판 개입’은 부적절하나 법관의 직무 권한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직권남용 혐의에 무죄가 선고될 수 있는 것이다.  

판사 출신 박판규 변호사는 ‘재판 개입’이 법원행정처의 직무권한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평소 법원행정처가 국정감사나 정책 수립을 위한 현황조사를 하면서 재판 정보를 수집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법원행정처가 이 같은 직무를 수행하다 권한을 남용해 재판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는 판사 뒷조사나 개별 사건의 검토행위가 처음 드러났을 때 “(법원행정처가) 통상적인 업무일 뿐 위법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해명은 이런 업무들이 행정처의 일반적인 직무권한 내에서 이뤄졌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직권남용 혐의 무죄 판결이 검찰의 불성실한 수사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남근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 부회장은 “강요죄·공갈죄 등은 직무유기보다 처벌이 세다. 그런데 해당 혐의들이 적용되려면 ‘협박’ 사실을 증명해야 해서 수사가 힘들다”고 설명했다. 수사 과정에서 협박 사실 증명이 어려워 검찰이 직권남용이라는 쉬운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공무원의 ‘월권’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법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민의 법의식에 따라 (공무원의 ‘월권’ 행위에 대한) 새로운 구속 요건을 만들어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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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사람들 잘 사는 게 부러웠었냐고요? 전혀요!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②] "동독은 통일을 기대하지 않았다"

 

 

예나는 신연방주(옛 동독 지역이었던 5개주) 튀링엔(Thüringen) 주의 인구 11만 명 규모 중소도시다. 세계적 광학 기업인 칼 자이스(Carl Zeiss)의 의료장비사업부와 천문장비사업부가 이 도시에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칼 자이스의 기업 철학을 확고히 한 경영인이자 과학자 에른스트 아베가 교수로 머문 프리드리히 쉴러 대학(Friedrich Schiller University)도 유명하다. 신연방주 대부분이 침체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예나는 오랜 산학 협동 체제가 안착한 덕분에 인구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주거비용이 계속해서 오르는, 신연방주에서는 찾기 힘든 도시다.  
 
지난 달 9일과 10일, 이곳에서 평생을 보낸 크리스티안 플뤼겔(Christian Flugel, 이하 크리스티안, 1948년생)-카린 플뤼겔(Karin, 이하 카린, 1950년생) 부부와 이바 마리아 베어톨트(Eva Maria Berthold, 이하 베어톨트, 1953년생) 씨를 만났다. 이들은 아동기에 동독 체제를 경험했고, 청년기에 동독 체제에 적응했으며, 부모가 되어 동독 민주화 시위와 독일 재통일을 경험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새로운 사회에 적응했다. 플뤼겔 부부는 지금도 가끔 일하는 한편, 인근에 거주하는 자녀 부부와 교류하면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베어톨트 씨도 안정된 직업을 가진 자녀 부부를 가끔 만나며 큰 문제없는 노년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옛 시절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자유가 중요했다 
 
고등학교 졸업 파티에서 만난 플뤼겔 부부는 1971년 결혼했다. 첫 아이를 바로 얻었다. 크리스티안은 측량기 설계사로, 기계 설계사로 직업을 바꿔가며 일할 때였다. 카린은 육아를 위해 잠시 일을 쉬었다. 쉬다 보니 카린이 다시 전공인 회계업무자로 노동 현장에 나간 건 결혼 14년째였다. 지속적인 인구 유출로 인해 여성 노동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동독에서 여성이 이처럼 오래 집에 머무른 건 흔치 않은 사례다. 이들 부부는 동독 정부에 아이를 맡기길 원하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큰 아이가 졸업반이 되자, 부부는 체제와 본격적으로 불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동독에서는 당국이 허락한 학생만 아비투어(Abitur, 대학입시자격)를 볼 수 있었다. 한 반에 2~3명 정도로 한정됐다. 학생은 자유독일청년단(일명 유겐트, FDJ, Freie Deutsche Jugend)에 가입해야 입시 자격 취득에 유리했다. 부모가 당에 충성한다는 증거를 보여야 했고, 입시 자격을 얻어도 남성의 경우 병역을 잘 마쳐야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유럽 사회에서 기독교는 근본 문화이자, 삶의 방식이다. 유물론 국가가 되었다고 해서 이를 단숨에 탄압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교회는 당국에 껄끄러운 존재였다. 부부의 큰 아들은 반에서 1등을 도맡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아비투어를 받지 못했다. 부부는 자녀가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가 되기를 원했다. 1987년, 부부는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당시 국가평의회 의장에게 직접 탄원서를 써 자녀의 아비투어 응시 허락을 요청했다. 일은 풀리지 않았다. 당시 동독에서 시민이 당국에 무언가를 요청할 때 이처럼 의장 앞으로 된 편지를 쓰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결되는 일도 많지 않았다. 큰 문제없이 살던 부부는 체제의 문제점을 절감했다.  
 

▲ 이바 마리아 베어톨트 씨. 평생을 예나에서만 살아온 토박이다. 베어톨트 씨를 비롯해 많은 동독 출신이 통일 여파로 동독의 공동체 정신이 사라졌음을 안타까워한다. 실제 이동기 교수에 따르면, 동독은 가족의 유대 정도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곳이다. 정서적으로 서독보단 한국에 더 가까운 곳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별취재팀

베어톨트 씨도 체계화된 억압에 신음했다. 베어톨트 씨는 동독 유일의 공보험 회사에서 일했다. 동독사회주의통일당(SED, 동독의 독재정당) 당원 가입 압력이 회사에서 내려왔다. 회사 내에는 당연히 슈타지(STASI, 동독 국가보안부, 동독의 방첩기관이지만, 소련의 KGB처럼 사실상 시민 감시 역할까지 담당했다.)와 연결된 인사가 있었다. 베어톨트 씨는 체제에 조용히 저항하는 사람이었다. 가입을 거부해서 여러 차례 추궁을 당했다. 
 
그 사이 아이는 둘로 늘어났다. 회사를 옮겨야 했다. 보험사는 하루 8시간 근무를 요구했다. 젊은 나이였지만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루 6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줄이려니 이직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공 교통관리부로 이직해, 대중교통 계획을 짜는 업무를 했다. 당시에 일자리를 찾기란 쉬웠다. 사람이 모자라기도 했다. 더 중요하게는, 노동이 노동자의 권리이자 의무였다. 없는 일자리라도 만들어야 했다. 
 
이 두 가족에서 공통점이 하나 발견된다. 결혼을 일찍 했고, 아이를 일찍 낳았다는 점이다. 플뤼겔 부부는 23-21살에 결혼해 바로 아이를 가졌다. 베어톨트 씨는 스무 살인 1973년에 결혼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때는 다 결혼을 일찍 했어요. 나이 스물에 아이를 가진 사람이 흔했지요. 동독에서 집은 당국이 모든 인민에게 지급하는 의무의 대상이었고, 사적 거래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야 집을 주고, 아이가 많아야 더 큰 집을 줬으니까 결혼을 일찍 해야 할 수밖에 없었죠. 여자는 출산 몇 주가 지나면 바로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고 다시 일터로 나가곤 했죠." (베어톨트) 
 
아이가 늘어나자 베어톨트 씨는 문제에 부딪혔다. 예나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칼 자이스 (당시) 본사가 위치했다. 동독 전역에서 노동자가 모여들었다. 10만여 명 규모의 이 도시가, 동독 시절에는 6만여 명의 칼 자이스 노동자를 품었다(이들 중 약 5만여 명이 통일 직후 일자리를 잃는다). 체제가 한계에 다다르자 집 공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 아이가 많아도 방 2개짜리 집을 얻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동독 사람들이 일찍 결혼한 이유, 일찍 아이를 낳은 이유가 집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그마저도 힘들어진 것이다.  
 

▲ 베를린 슈타지 박물관에 보관된 1982년 예나의 평화 시위 모습. 1980년대 초부터 동독 전역에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이어졌다. ⓒ특별취재팀

시민 혁명 
 
베어톨트 씨는 체제가 무너지리라는 예감을 하기 시작했다. 실은 둘째를 얻기 전, 1981년에 한 아이를 더 얻었었다. 하지만 출산 닷새 만에 아이가 사망했다. 아이의 기형이 원인이었다. 영양 결핍 문제도 있지 않았나 싶었다. 임신 시절 음식 배급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빵이나 버터를 얻기도 점차 힘들어졌다. 집 문제가 생기고 배가 고파지니 참았던 사람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체제가 한계에 달했으니 계속 억누를 수는 없잖아요. 옛날에는 정년퇴직한 노인만 서독으로 이주를 요구하면 보내줬거든요. 그런데 서서히 나이 제한이 풀리더라고요. 서독으로 오가는 기준도 조금씩 완화되고. 서독에 가서 잘 사는 친척을 만나 선물이라도 얻어오면 사람들 기분이 풀릴 테니 그걸 노린건가 싶기도 해요." (베어톨트)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시민은 완전한 자유를 원했다.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시민 저항은 1989년 9월 25일, 마침내 라이프치히(Leipzig)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를 중심으로 시민 8000여 명이 집결한 역사적 민주화 운동 '월요 시위'로 폭발했다. 한 달 후 시위 인원은 7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실질적인 독일 재통일의 시작이다. 반체제 집회가 동독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예나에서도 성 미카엘 교회(Stadtkirche Sankt Michael) 앞 광장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팔을 교차해 원을 빙 둘러 조용히 침묵하는 시위였다. 플뤼겔 부부도 시위에 참석했다.  
 
흔히 한국에서는 동서독 통일을 '독일 통일'로 표기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잘못된 표기다. 독일에서 동서독 통일은 '재통일(Wiedervereinigung)'로 표기한다. '독일 통일'은 프로이센 제국에 의한 1871년의 독일 제국 성립을 뜻한다. 독일 재통일을 시간순으로 정리할 때, 서독의 동방 정책보다 먼저 거론해야 할 일이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민주화 혁명이다. 한국이 반독재 투쟁으로 민주정권을 쟁취하던 때와 비슷한 시기, 동독에서도 민주화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동독 인민이 시위에서 주로 쓴 구호가 "우리가 인민(Wir sind das volk)"이라는 말이다. 비록 이 구호가 최근 독일 극우의 인종차별 집회에 다시 쓰여 그 의미가 퇴색된 감은 있지만, 동독 민주화 투쟁 당시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민주화 투쟁은 실제 결실도 낳았다. SED는 독재를 포기하고, 자유 선거를 받아들이는 한편, 시민운동 대표자들과 함께 새 동독 헌법 논의를 위한 시민회의기구도 받아들였다. 시민의 힘으로 새로운 민주국가 동독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 5월 18일 동서 마르크화 통합이 이뤄짐에 따라 사실상 동서독은 재통일되었다.  
 

▲ 크리스티안 플뤼겔 씨. 통일은 그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플뤼겔 부부는 지금도 자녀들과 자주 교류한다. 교육열, 자녀에 관한 관심 등에서 한국의 부모 세대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크리스티안 씨는 스스로를 "예나 사람(Jenaer)"이라고 칭했다. ⓒ특별취재팀

"예나에도 슈타지 근무처가 있었어요. 교회에서 예배를 볼 때도 슈타지의 비밀정보원이 참석한다는 걸 모두가 알았지요. 그 사람들은 다 녹음기를 들고 다녔어요. 항상 당국이 감시하니까, 솔직히 말해 난 시위에 나갈 때 조금 무서웠어요." (크리스티안)
 
"이 양반은 무서웠다는데, 난 안 무서웠어요. (웃음) 성 미카엘 교회 앞에 조그마한 광장이 있는데, 여기가 시 중심가입니다. 그냥 사람들이 손잡고 원을 만들었죠. 무슨 플래카드 같은 걸 들고 있지도 않았어요. 주로 사람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한 번은 (당시 국영기업화한) 자이스 (당국이 임명한) 사장이 나와서 동독 정부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어요. 사람들이 다 거짓말쟁이라며 비난했던 게 기억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인상 깊은 장면이지요." (카린)
 
서쪽에서는 샴푸 향기가 났다 
 

▲ 동독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독일 재통일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됐다. ⓒ특별취재팀

분단 시절 동서 독일은 남북한처럼 완전히 교류를 닫지 않았다. 물론 분단 초기에는 이들도 냉전의 최전선 국가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1960년대 말까지 서독은 동독 수교국과는 국교를 단절한다는 '할슈타인 독트린(Hallstein Doctrine)'을 추진했다.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을 추진하면서 본격적으로 해빙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부 차원의 이야기다. 
 
민간 교류는 분단 초기부터 매우 활발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에는, 동독 한 가운데에 있던 베를린에서 동서 사람이 비교적 자유롭게 상대 영역을 오갈 수 있었다. 장벽이 세워진 후에도 상대 체제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다면 당국의 허가를 받아 왕래가 가능했다. 
 
동독 체제가 점차 흔들리며 복지 부담이 커지자 정년퇴직자, 연금생활자는 자유롭게 서쪽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다. 정치범이나 체제 부적응자 등은 서독 정부가 동독 정부에 일정액의 배상금을 내고 서쪽으로 데려오는 식의 이전도 있었다. 
 
이산가족의 일회성 상봉조차 힘겨운 남북의 분단 상황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에 따르면 "1963년부터 한 해에 가장 적게는 7000여 명, 가장 많게는 3만5000여 명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합법 이주했다. 1970년대와 80년대 동독을 이탈한 난민의 수는 매년 3000명에서 6000명이었지만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합법 이주민 수는 그것의 2배에서 5배나 많았다." (☞관련기사 : 독일 통일 새롭게 보기 "이제 평화능력을 기를 때"
 
물론 모든 이가 자유롭게 동서를 왕복한 건 아니다. 동독의 군인, 경찰, 교사 등 당국이 중요하게 생각한 노동자는 서독 방문이 어려웠다. 그렇더라도 인척 관계가 분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속됐다는 점은 분명 남북의 분단 상황과 비교될 만한 지점이다. 동서독 사람들이 인접 국가인 체코에서 상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훗날 동독 체제가 흔들리고 인근 국가에 자유화 바람이 불자, 체코와 헝가리 등 인접 국가는 동독인의 서독 탈출 경로가 됐다. 
 
베어톨트 씨도 분단 시절 서쪽 사람들과 교류했다. 친척들이 바이에른 주에 거주했다. 친척들은 자주 동쪽으로 찾아왔고, 베어톨트 씨 역시 가족 행사일에는 서쪽을 방문했다. 
 
"서쪽에 있는 친척 한 분이 페인트업자였어요. 예나에 오실 때마다 꼭 하는 말씀이 '왜 건물들이 다 회색이냐'는 거였어요. 그런 차이가 있다는 걸 당시는 몰랐지. 통일 후 예나에서 가장 먼저 바뀐 게 건물 벽 색깔과 지붕 색깔이에요.  
 
나도 서쪽에 다녀와 봤죠. 1986년 즈음이었는데, 서독 친척집에 가서 돌아올 때마다 친척들이 돈을 주머니에 넣어주곤 했었는데, 그래도 못 받아요. 서독에서 들어오는 기차는 도중에 경찰이 한 번 세운 후, 승객 신분증 검사를 하고 짐을 다 뒤졌거든요. 걸리면 큰일 나지요. 그러니 일정 액 이하 물건만 받았지, 돈은 안 됐어요.  
 
서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슈퍼마켓에 요거트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게 가장 안 잊혀. (웃음) 집 샤워실에 수압, 온도를 조절하는 장치가 있는데 그걸 사용할 줄 몰라서 다섯 살 조카에게 물어본 기억도 나요. 이때가 1987년이네. 
 
당시 동독에는 샤워 시설이나 욕조가 없는 집이 많았어요. 우리는 시부모님 댁 지하실에 수도를 연결해서 욕조에 물을 받아 샤워했는데, 그나마 사정이 괜찮았지요. 샤워실이 없는 집은 예나 시내의 수영장 샤워실을 이용했으니까." (베어톨트)
 

▲ 카린 플뤼겔 씨. 지금도 집에서 회계 관련 업무를 틈틈이 본다. 동독은 여성의 노동력을 중요시했기에, 이처럼 상당수 동독 여성은 평생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다. 여성을 가정에 두려한 문화는 서독의 것이었다. ⓒ특별취재팀

"20, 30, 40, 50세 등 뒷자리가 '0'으로 끝나는 생일을 크게 기념하는 게 독일의 문화에요. 서독에 사는 친척 중 이 나이 대 생일을 맞은 이가 있으면 동독에서도 비교적 쉽게 서쪽으로 갈 수 있었어요.  
 
크리스티안의 친척이 서쪽에 살아서 1985년에 이 양반이 뮌헨과 슈투트가르트 인근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완전히 낯선 사람이 되어서 돌아온 거야. 몸에서 샴푸 냄새가 나더라고. 너무 놀라서 난 그때 울었지 뭐야. (웃음)" (카린) 
 
통일을 원한 건 아니다 
 
서독의 우월한 문화는 분명 동독 사람을 놀라게 했다. 우리의 경우도 실제 많은 한류 드라마, 한류 스타가 북한 사회에서 알려지면서 새로운 충격을 경험하는 이들이 늘었으리라 예상된다. 분명 그 같은 효과가 동독에 있었다. 당시 튀링엔 주 일부를 제외하면, 동독 대부분 지역에서 서독 방송 전파가 잡혔다. 원하는 이라면 누구나 서독 방송을 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서독 방송을 통해 동독 젊은이들은 일찌감치 서구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서구의 자유로운 문화는 동독 젊은이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대표적인 아이콘이 청바지다. 청바지와 로큰롤은 당시 젊음과 자유의 상징이었다. 동독 젊은이들에게 리바이스 청바지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동독 국민의회 회장을 지낸 호르스트 진더만(Horst Sindermann)의 손자가 리바이스에 열광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동독은 내외의 자유 압력에 맞서기 위해 다른 공산국가보다 상대적으로 인민에게 더 자유로움을 주려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독 인민은 서방을 제외하면 자유롭게 해외여행이 가능했다. 정부는 자체적으로 청바지를 제작해 인민에게 보급했다. 펑크 밴드 활동도 가능했고, 염색 등의 소소한 일탈도 허용됐다. 그럼에도 약간의 자유로 인민의 근본적 열망을 짓누르기란 불가능했다.  
 
특히 체제 후반기가 되면 이 같은 열망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게 된다. 대표적 사례가 미국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1988년 동베를린 콘서트다. 동독 정부는 상대적으로 '반미적(?)'이면서 이미 공공연하게 동독 젊은이들 사이에 알려진 이 가수를 불러 인민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으나, 결과는 당혹스러웠다. 당시 동독 인구의 1%가 넘는 16만 명이 공연장에 모여 성조기를 흔들어댔다.  
 
그런데 이들이 '자유'와 '통일'을 동일시했으리라고 단언하기란 어렵다. 민주적 체제로의 전환과 통일은 완전히 다른 맥락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를 비롯해 우리가 현지에서 만난 이들 상당수도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인들이 원한 건 민주주의와 자유였지, 통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통일 구호는 장벽 붕괴 1년여가 가까워서야 나왔다는 평가가 사실상 정설이다.  
 
"서독으로 도망갈 생각을 안 했느냐고? 안 했어요. 그 사람들 잘 사는 것 부럽다거나, 배 아프다 생각하진 않았어요. 서독의 많은 물건들을 보니 ‘이런 게 꼭 필요한가’ 싶기도 하더라고. 물론 동독에서는 자동차를 구하기도 힘들고 물건도 부족했지만,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는 만족하며 사는 법을 배웠어요. 무엇보다, 모든 게 조금씩 부족하니 이웃과 교류가 잦았지요. 동독에는 상부상조 정신이 있었어요." (베어톨트)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재통일되리라 생각했느냐고? 전혀. 보통 동독 사람 중에 통일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 거에요. 물론 동독 독재 체제가 무너지리라 생각은 했지만, 통일을 생각한 건 아니야. 장벽이 무너진 후 서쪽으로 가고 싶었느냐고? 아니요. 이미 아이가 셋이나 되고, 집도 괜찮고 직장도 괜찮았는데 왜 옮겨요? 난 지금도 슈투트가르트나 뮌헨(함부르크와 함께 독일 최고 부자 지역) 같은 데서 살 생각 없어요. 예나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에요." (크리스티안) 
 
"물론 서독이 잘 사니까 그 체제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긴 했어. 그렇다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니 통일되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이제 정말 자유롭게 살겠다'는 생각 정도였지. 아무튼 장벽이 무너진 건 좋았어. 난 감격해서 막 울었어요." (카린)
 

▲ 베를린 DDR 박물관에 남아있는 1988년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동베를린 콘서트 모습. 당시 동독에서 자유를 향한 젊은이들의 갈망은 컸다. ⓒ특별취재팀

통일 사회에 적응하기 
 
이유야 어찌되었든, 역사는 '예정대로' 흘러 재통일이 완성됐다. 서독식 체제가 동독을 집어삼켰다. 동독인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 곧 서독인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숙제를 떠안게 됐다. 짧았던 판타지가 끝나고, 현실이 닥쳤다. 
 
"엄청나게 해고됐지. 슈타지와 관계있던 사람들부터 해고됐어요. 우리 회사에서도 이 회사 오래 못 갈 것 같다는 이야기들이 나왔어요. 그런데 우연찮게 서독의 알리안츠가 동독 공보험을 통째로 인수한다는 정보를 들었어요. 그걸 믿고 알리안츠에 지원해서, 다행히 일자리를 잡았지요. 실제로 1990년 2월 1일에 알리안츠가 동독 공보험을 인수했어요. 
 
당시 동독 사람들이 다 재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서쪽 체계와 동쪽 체계가 달랐으니까. 다행히 알리안츠 재교육은 며칠만 받으면 되는 수준이라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괜찮았어요. 돌이켜 보면 우리는 운이 좋았어요. 내 남편은 칼 자이스 측량 부서에서 일했는데, 이 부서는 서쪽에서도 필요로 해서 다행히 남편도 안 잘렸어요. 그때 자이스에서 엄청나게 잘렸지요.
 
통합되고 우리 회사에 서쪽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주로 고위직으로. 가족 전부가 잘 모르는 이 동네로 오진 않으려 할 것 아니에요? 주로 남자들만 오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동쪽 여자들은 일도 열심히 하고 가정에도 충실하다'고 좋아했지요. 동독에서는 여자도 다 일하는데, 당시 서독에서 여자들은 주로 집안에만 있었거든. 그래서 그런지, 서독 출신 상사 중에 이혼하고 동독 여자와 결혼하는 사례가 많았어요. 아무래도 주말 부부로 지낸 점도 문제가 됐겠지. 서독에서 온 내 직속 상사는 본인 비서와 결혼했지요. 
 
아무튼,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극도로 바뀌었지. 통일 후 가장 아쉬운 점이, 동독에 남아있던 공동체개념(Gemeinsinn)이 사라졌다는 거에요. 무엇보다 상황이 계속 급변하기만 하고 체제가 안정되지 않으니까 다들 불안해했어요. 실직자가 워낙 많으니 우울증 환자도 많았지요. 
 
그렇다고 통일을 나쁘게 보느냐고? 아니. 통일 좋았어요. 그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통일 당시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많이 안정됐지요. 동독 시절은 꼭 하지 않았어도 될 경험이야." (베어톨트) 
 
"걱정이 정말 많았지. 워낙 급변하니까. 서독 사람들이 동독 사람들보다 더 지위를 중시하더라고요. 사람을 보는데도 직업을 보고 선입견을 가져요. 그나마 예나는 사정이 나았지. 난 적응 잘 했어요. 정치인 생활도 해봤는데 뭘. 그 얘기 들려줄까?
 
장벽 붕괴 직후에 동독에서 첫 자유선거(1990년 3월 18일 열린 인민회의 자유선거)가 열렸어요. 드디어 SED가 독재를 포기하고, 자유선거가 열렸지요. 사실 이 선거가 지나고 나서야 통일이 민심으로 확 굳었어요. 이때 나는 조경회사 관리자로 일했는데, 기독민주당(CDU)에 입당해 의원 선거에 나갔습니다. 비록 떨어졌지만. (웃음) 이후 우연찮게 예나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인 도른부르크(Dornburg) 시에서 시장을 구한다는 공모가 나서, 거기 지원했는데 당선됐지요. 당시 이 시의 시장 선거는 시민 선거가 아니었고 의회 선거였어요. 나름 통일 후 다양한 일도 해 봤고, 삶도 잘 풀렸지요. 자식 셋은 다 대학에 보냈고, 여행도 자유롭게 다니고. 통일 덕분에 에어푸르트(Erfurt) 부근 집안 소유 땅도 사유재산으로 인정받아서 그 돈으로 아이들을 유학 보내기도 했지요. 통일로 큰 혜택을 받았어요." (크리스티안)
 
"돈을 조심해서 써야 한다는 게 통일 후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어요. 빵도 가장 싼 걸로, 식재료도 딱 버터와 햄 정도만으로. 그 정도로 절약해야 했어요. 걱정이 많았지요. 
 
서독 사람들이 군림하는 건 마음에 안 들었어요. 우리는 살아남으려고 밤낮으로 일했거든. 버터 한 조각, 바나나 하나를 사더라도 줄을 서서 샀어. 그런데 서독 사람들이 통일 후에 우리한테 보이는 태도가 '너희 아무 것도 모르니 우선 일하는 법부터 배워'라는 식이에요. 아주 기분 나빴지요. 사람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서독 사람 중에는 우리가 동독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좀 적응하니 괜찮아지더라고. 통일 전에는 막연히 서독 사람들은 다 똑똑하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요. 다만 확실히 다른 건, 서쪽 사람들은 혼자서 살아가는 개인주의 체제에 익숙했는데 우리는 달랐단 거에요. 동독 사람들이 요새도 농담 삼아 이야기해요. 서독 사람들은 오리처럼 뒤뚱거려서 밑창만 봐도 서독 사람인지, 동독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웃음)" (카린) 
 
이 인터뷰이들은 모두 통일에 잘 적응했다. 평온한 일상도 누린다. 물론 세대마다 통일을 바라보는 관점, 통일 경험은 다를 것이다. 우리는 플뤼겔 부부의 자녀, 베어톨트 씨의 사위와도 인터뷰했다. 하지만 이들의 경험은 이후 젊은층의 이야기를 전할 때로 미루고, 우선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삶을 산 이의 이야기를 다음 편에 전한다. (통역: 조경혜)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반독재 평화 시위가 열린 예나의 성 미카엘 교회 앞 광장.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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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미군 철수, 아베 반대” 오키나와 선거가 남긴 것들

“주일미군 철수, 아베 반대” 오키나와 선거가 남긴 것들
 
 
 
박명훈 주권연구소 연구원 
기사입력: 2018/10/09 [00:49]  최종편집: ⓒ 자주시보
 
 

 

이겼다!” “(미군기지 건설을 둘러싸고정부하고 대치하는 어려움은 생각하지 않는다우리들의 민의에 따라 (일본)정부가 판단하면 되기 때문이다.”

-10월 1일 오후 5시경류큐신보(琉球新報)발 호외로 스마트폰 화면에 전해진 오키나와현 지사선거 결과를 바라보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응 

일본열도 전체면적의 0.6%에 불과하지만 75%의 주일미군기지가 집중된 오키나와(沖繩). 미군과 연관된 흉악범죄가 계속되고 있는 이 땅에서 ‘미군·아베 반대’ 진영이 승리하자 여론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8일 오키나와 지역지 류큐신보는 ‘미군속사건의 형 확정 원흉은 기지, 발본(拔本근본원인을 뽑아내는)삭감을’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미군관계범죄의 원흉인 미군기지를 이상적인 방향(在り方아리카타)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근본적인 재발방지책은 되지 않는다”고 성토했다. 

여기서 이상적인 방향이란 미군기지 철수를 뜻한다. 위 사설은 “애초 기지가 없으면 미군관련 범죄는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최선의 재발방지책은 기지철거”라고 부연했다. 그를 위해 불평등한 주일미군지위협정을 개정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오키나와 전역은 지난 2016년 4월, 미 해병대 출신 군속(군무원) 케네스 프랭클린 신자토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로 분노했다. 케네스는 한 여성을 강간, 머리를 가격하고 목 부근을 나이프로 수십 번 난자질해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그러나 케네스는 재판 내내 묵비권을 행사하며 진술을 거부하는 등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 배경에는 “미군인 군속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미일지위협정의 구조적 결함”이 핵심이다. 미국 측은 케네스를 ‘간접고용’했다며 보상을 거부했고 미군기지 내 출입수사도 허용하지 않았다. 사설에 따르면 피해여성의 아버지는 “기지가 있기 때문에 (미군범죄가) 일어난다”며 한탄했다. 

“모든 권한을 구사해 (미군기지 건설을) 저지하겠다.” “신기지 건설의 반대와 후텐마기지의 폐쇄반환을 일본정부와 미국정부에 요구하고 싶다.”

-지난 1일 치러진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서 55.1%의 득표율로 승리해 취임한 타마키 데니(玉城デニー) 신임지사가 지지자들과 기자단을 향해 강조한 말

타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

타마키가 오키나와의 민의(40만 표에 달하는 역대 오키나와 지사선거 최다득표)를 발판으로 지사직에 취임하자 그 파장은 일본 정계를 넘어 미국까지 확산되고 있다. 후텐마(普天間) 미군기지를 대체할 헤노코(辺野古) 신기지의 조속한 건설을 추진하던 미국과 아베 정권의 공조는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미군 반대’로 계승된 오키나와 정신 

이번 선거는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반대여론을 무마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판단한 아베 정권과 미국으로선 ‘불의의 일격’이었다. 당초 오키나와현 지사선거는 오는 12월 열릴 예정이었지만 ‘미군기지 설립 반대’를 목소리 높인 오나가 타케시(翁長雄志) 전 지사가 암 투병 끝에 지난 8월 별세하면서 앞당겨졌다. 

류큐신보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봄부터 오나가 전 지사의 대항마(미군기지 찬성 후보)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이 신문이 인용한 미 정부관계자는 “오나가 전 지사가 어떻게 움직일지 특별한 관심은 없다”면서도 “(미군기지)대체시설에 반대하지 않는 후보자가 지사전도 이길 것이라고 일본정부는 전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정부가 선거 이전부터 아베 정권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하지만 “오나가의 후계자”를 자처한 타마키가 미군기지 반대 이전을 최우선 공약으로 앞세워 출마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주민들과 분열되어 있던 야권이 하나로 결집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타마키에게 힘을 더했다. 자민·공명 연립정권이 지지하는 사키마가 후보로 출마하면서 미군기지 찬반진영이 1대1로 맞붙는 양강 구도가 형성됐다. 

이와 관련 토쿄신문은 사키마 후보가 미군기지 찬성에 대한 반발여론을 우려해 쟁점을 숨기고 “어린이 지원 충실정책” 등을 내세운 것이 패배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일본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과 자민당 고위 간부 등 당정 고위관계자가 오키나와에 방문하는 등 이례적 지원을 펼쳤지만, 미군기지에 대한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사키마 후보가 무당파를 흡수하지 못해 패배했단 평가다. 

선거가 끝나자 스가 관방장관과 오노데라 이츠노리(小野寺五典) 당시 방위상은 “후텐마 미군기지의 조속한 이전방침에는 변함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여론을 예의주시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입장은 미묘했다. 

아베 총리는 “선거 결과는 정부로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오키나와의 진흥, 그리고 기지 부담 경감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당장 자민당 총재 3연임을 확정지은 뒤 장관 등 당정 고위직을 대거 교체하면서 평화헌법 개정에 박차를 내려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전쟁 가능한 정상국가 일본’구상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류큐신보는 미군기지 이전을 기정사실화하던 미국이 변화하고 있다고 5일 보도했다. 아베 정권이 전폭 지원한 사키마 아츠시(佐喜眞淳) 전 기노완(宜野湾)시 시장이 8만 표 이상의 큰 표 차로 무릎을 꿇자 미국 내부에서 미일동맹의 약화를 우려한 신중론이 제기되고 있단 것이다.

 

반미·반아베’ 내건 야권연대 위력발휘 

이번 선거를 통해 오키나와는 야권연대의 본격 무대로 떠올랐다. 야권이 단일대오로 뭉치면 아베 정권의 독주에 맞설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다.  

현재 일본의 야권은 입헌민주·국민민주·공산·사민·일본유신회 등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 결과를 계기로, 야권이 내년 예정된 지방선거와 참의원선거에서 뭉친다면 아베 정권이 참패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 것. 

지난 2017년 10월 24일 아베 총리가 “(북한의 핵위협에서) 국난돌파”를 앞세워 직권으로 의회 해산을 할 때 야권이 뭉치지 못하고 흩어져있는 틈을 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아베 정권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당시 각 1명을 뽑는 소선거구에서 자민·공명연립여당이 한 명의 후보를 낸 반면 야권은 대다수의 선거구에서 단일화를 이루지 못해 참패했단 분석이다. 

이번 선거와 관련해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헤노코의 (미군)기지건설은 노(NO)로 명확해졌다”며 “오키나와의 부담경감이나 진흥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문제제기가 아니라 미국에 상황을 설명하고 (기지건설) 재검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아베 정권을 겨냥했다. 

이어 “내년 참의원선거에서 후보자를 단일화하면 충분히 승기를 잡을 수 있다“면서 ”1인구 후보자의 단일화를 가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베정권에 대한 심판”을 주장한 국민민주당은 “헤노코의 신기지 건설과 일미지위협정의 재검토 항목을 정리해 내년 참의원선거 때 야당의 통일정책으로서 호소해 가고 싶다”며 미일동맹의 재조정과 야권연대의 불씨를 동시에 지폈다. 

관련된 미국의 반응도 주목해 볼만 하다. 미 국무부는 오키나와 선거 결과가 나오자 입장을 내고 “타마키 씨의 당선을 축복하며 함께 일을 해 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서 “미국정부는 미일동맹과 2국가 간 안전보장에 대한 오키나와의 공헌을 무척 중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선거결과에도 오키나와에 쏠린 주일미군정책을 변경할 없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반면 타마키 지사는 취임기자회견에서 “후텐마비행장의 하루라도 빠른 폐쇄와 반환, 헤노코 신기지건설 저지에 전신전력으로 몰두해 가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또 “(후텐마기지를 대체할 신기지 건설 부지인 헤노코 해안 매립을 금지한 오키나와 현의) “철회판단에 따르도록 정부에 요구해 국제사회에도 모든 수단을 통해서 오키나와의 민의를 넓혀가고 싶다”고 역설했다. 

‘미군기지 반대’를 최우선공약으로 선명하게 내건 타마키 데니 지사의 당선은 미군기지가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오키나와의 울분과 무관치 않다. 오키나와 출신 어머니와 미군 출신 해병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타마키는, 아버지가 떠난 뒤 ‘편모가정’에서 성장했고 고등교육도 받지 못했다. 

어쩌면 오키나와 비극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혼혈인 타마키는 방송인과 중의원(하원의원)을 거쳐 ‘오키나와의 민의에 따라’ 고향땅의 지도자로 선택됐다. 아울러 일본정치권의 가장 유력한 반아베·반미정치인으로 자리 잡았다. 미일 양 정부를 넘어 국제사회에도 호소를 넓혀가겠다는 그의 전략이 어떤 결실을 거두게 될까. ‘앞으로의 오키나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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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명 억대 소득인데…800만명은 최저임금도 못 번다

등록 :2018-10-08 04:59수정 :2018-10-08 11:17

 

[아시아미래포럼 기획] 1부 한국형 불평등을 말한다
① 격차에서 장벽으로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2016년 통합소득 분석 

상·하위 10% 격차 보니
근로소득만 따지면 46배
금융·부동산소득 합치면 68배

일부층에 편중된 자산소득 기회
상위 20%, 종합소득 70% 독식

“미국은 최상층이 지나치게 벌고
한국은 하위층 소득 너무 적어”
일해서 벌어들이는 소득보다, ‘돈’으로 불려나가는 자산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한국 사회 전반의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다. 7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뒤쪽으로 고가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일해서 벌어들이는 소득보다, ‘돈’으로 불려나가는 자산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한국 사회 전반의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다. 7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뒤쪽으로 고가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88만명과 800만명’.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입수·분석한 국세청의 세부 자료들을 보면, 2016년 한 해 동안 근로소득과 이자·배당·부동산임대소득 등을 합쳐 최소 1억원 이상을 번 사람은 88만명에 이른다. 같은 해 하위 37% 아래 집단에 포함되는 800만명은 최저임금 연 환산액(1512만3240원)만큼도 벌지 못했다. 격차가 장벽으로 굳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 불평등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숫자다.

 

 

■ 통합소득 지니계수 왜 높을까 불평등 정도를 숫자로 표현한 지니계수는 가구 소득을 기준으로 삼는 게 일반적이다. 통계청이 공식 발표하는 지니계수도 이런 방식으로 계산된다. 문제는 가구 소득을 설문 방식의 표본조사로 구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전체 소득자에 견줘 표본의 수가 매우 적을뿐더러, 특히 고소득 계층의 소득은 실제보다 상당히 축소 반영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에 반해 국세청의 통합소득 자료는 개인별 실제 과세행정 기초자료인데다 근로소득 이외에 다양한 재산 소득을 포함하고 있어 현실의 불평등 정도를 파악하는 데 훨씬 유용하다. 분위별 소득 집중도에서 차이는 잘 드러난다. 2016년 상위 1%의 통합소득은 78조7796억원으로 같은 해 통합소득 총액(721조3616억원)의 10.9%였다. 상위 10%는 36.9%의 몫을 챙겼다. 이에 반해 근로소득 상위 1%와 10%의 총액 대비 비중은 각각 7.3%, 32.1%로 이보다 적었다. 상·하위 10% 몫의 상대 비중을 뜻하는 10분위 배율 역시 통합소득(68.6배)이 근로소득(46.6배)을 크게 웃돌았다. 상·하위 10% 집단의 소득 격차가 통합소득에서 더 컸다는 얘기다. 이런 추세는 분석 대상 기간인 2013~2016년간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래픽을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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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율보다 분포에 주목하라 통합소득의 불평등이 더 심한 이유는 자산 보유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일부 계층에 편중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자·배당·부동산임대 등 종합소득 항목만을 따로 추렸을 때, 상위 1%와 10%의 소득 집중도는 각각 22.6%와 55.6%가 됐다. 범위를 상위 20%까지 넓히면 집중도는 70.7%로 높아진다. 전체 종합소득의 3분의 2 이상을 상위 20%가 독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단순 집중도에만 지나치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조언도 빼놓지 않는다. 예컨대 상위 10%의 집중도가 높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이 훨씬 많아서 일종의 ‘착시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2016년 귀속분 통합소득 2400만원은 상위 46%의 경계값에 해당하는 수치다. 뒤집어 말하면, 근로소득과 재산소득을 합쳐 한 해 소득이 2400만원에도 미치지 못한 사람이 54%(1175만2600명)에 이른다는 뜻도 된다.

 

박복영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경제학)는 “단순하게 말하면, 상·하위 배율이 공통적으로 높다 하더라도 미국은 최상위 집단이 지나치게 많이 벌어서, 한국은 하위 집단이 너무 못 벌어서 문제”라며 “단순 배율에만 그치지 말고 구체적인 소득 분포를 들여다봐야 상황에 걸맞은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소득 경계값 살펴보니 중앙에서 양극단으로 옮겨갈수록 구간(분위)별 평균값과 경계값의 차이는 크게 벌어지기 마련이다. 2016년 통합소득을 기준으로 상위 0.1%(2만1764명)를 가르는 경계값은 5억6672만원. 하지만 0.1%에 속한 개인들의 1인당 평균소득은 이보다 높은 12억9119만원이다. 근로소득도 마찬가지다. 상위 0.1%(1만7740명)의 경계값은 3억6637만원인 반면, 평균소득은 6억8451만원이다. 김공회 경상대 교수(경제학)는 “이른바 평균의 오류를 줄이고 불평등 해소 정책의 효과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서라도 정확한 경계값 정보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준을 ‘통합소득 상위 1만명’으로 고정시켰을 때, 경계값은 2013년 7억4142만원에서 2014년 7억8182만원, 2015년 8억3077만원, 2016년 8억7760만원으로 꾸준히 늘어났다.

 

우리나라 ‘월급쟁이’들의 구체적인 급여 분포는 어떨까? 국세청 자료를 보면, 2016년 상위 10%와 20%의 근로소득 경계값은 각각 7182만원과 5119만원이다. 같은 해 근로소득 연말정산 신고자 1774만98명 중 이보다 많은 소득을 올린 사람이 어림잡아 177만명과 354만명이라는 뜻이다. 급여소득 1억원은 상위 3.68%(‘65만2832등’)에 해당한다. 참고로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한국기업데이터(KED) 자료를 이용해 분석한 2017년 국내 1000대 기업의 직급별 평균 연봉을 보면, 부장급 7070만원, 차장급 5990만원, 과장급 5010만원이었다.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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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만에 50번째, 평양 사람들 얼굴엔 자신감이"

[인터뷰]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 펴낸 이기범 북민협 회장
2018.10.08 11:47:20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으로 2018년 한반도는 지난해와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남북 정상은 판문점 선언과 평양 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임을 천명한 것과 함께, 추후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물론 유엔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북한의 핵 문제 역시 아직 해결되지 않아 남북 간 협력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미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통해 공동 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2차 북미 정상회담도 조만간 열릴 것으로 관측돼 북미 관계가 대결적인 상황으로 되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북미 관계가 원만히 풀린다면 그에 맞춰 남북관계 역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으로 보인다. 남북 정부 간 협력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협력 사업도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지난 9월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북측 민화협 관계자들을 만난 데 이어 3차 남북 정상회담 수행원 자격으로 평양에 다녀온 이기범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회장을 만나 향후 남북 민간 협력의 방향을 들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기범 북민협 회장은 북측 민화협 관계자들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업을 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며 "구호 물품을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 인프라를 만들어가는 협력을 해나갔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구체적으로는 지역 단위의 기술 교육부터 각 지역 단위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 등을 협력하는 것"이라며 "2000년대 중반에 이러한 활동이 일부 진행됐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사실상 중단되면서 이러한 활동이 단절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측의 필요성이나 수요 등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개발 협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남북이 새로운 협력을 하게 된다면 이런 부분부터 먼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 수행원 자격으로 10여 년 만에 평양을 찾은 이 회장은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무엇이 달라졌냐는 질문에 "평양의 경우 도시 개발이 많이 이뤄졌다. '창전거리'와, 과학자들이 모여 사는 '미래 과학자거리', '여명거리' 등을 중심으로 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섰는데, 이 세 지역은 앞으로 평양의 발전 방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북한 사람들의 심적 자신감이 느껴졌다. 초기에는 제재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이후 제재가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해내고 인민들의 삶의 질을 어느 정도 향상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다는 희망, 자신감 등이 엿보였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이 회장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시민들을 상대로 한 연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며 "북쪽 시민들이 문 대통령 연설을 듣고 반응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넓은 의미에서 남북관계와 대남 이미지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인터뷰는 지난 4일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이기범 북민협 회장 ⓒ프레시안(이재호)


프레시안 : 1998년 11월 첫 방북 이후 그동안 49차례 북한에 다녀오셨다고 들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 계기 방문이 50번째였는데, 이번에는 북한 측과 어떤 논의를 했나? 

이기범 : 2009년 가을에 방문한 이후 거의 10년 만의 방북이었다. 공식 일정으로는 김영대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과 만나 인민문화궁전에서 회의를 가졌다. 김 부위원장은 2004년 6월에 만수대의사당에서 면담한 적이 있었는데 이 만남을 기억하고 있어서 서로 반가워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특별 수행원 약 50여 명 중에 시민사회 관계자가 총 4명 갔는데 저와 김덕룡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 부의장,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 염무웅 겨레말 큰사전 이사장이 함께 했다.  

남북이 민간 차원에서 협력하는 부분은 스포츠와 문화, 예술 등의 분야가 있는데 북한은 지금이 판문점 선언 이후인 만큼 판문점 시대에 맞게 새로운 방식으로 하자고 말했다. 다만 큰 틀에서 앞으로 잘 해보자는 정도 외에 구체적 합의를 이룬 자리는 아니었다. 

물론 내년에 전국체전 100주년과 3.1운동 100주년 등의 행사를 남북이 함께 추진해보자는 이야기는 나왔다. 이러한 행사들은 비교적 가닥이 잡혀가는 것 같다. 예술 공연과 스포츠 교류 등도 가닥이 잡혀가는 것 같은데 순수 민간 차원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남북 정부 모두 아직 구체적인 안이 정해진 것 같지 않다. 

다만 지난 9월 평양 공동선언에서 "남과 북은 전염성 질병의 유입 및 확산 방지를 위한 긴급조치를 비롯한 방역 및 보건‧의료 분야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하였다"고 한 만큼 정부든 민간이든 보건 의료 분야와 관련한 협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최근 북측 관계자들과 만나서 향후 협력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이기범 : 지난달 초에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 민화협 대표단을 1년 6개월 만에 만났다. 북측은 남북 정상 간 합의대로 움직이겠다고 밝혔다. 지난 4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민간교류나 인도적 개발 협력 분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으니 앞으로 추진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일단 우리끼리라도 시작할 수 있는 부분은 시작하자고 해서 협력 방향에 대해 합의한 부분은 있다.  

북측 민화협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업을 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구호 물품을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 인프라를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협력을 해나갔으면 좋겠다는 입장이다. 인도적 지원에서 개발 협력으로의 전환은 이미 2000년대 중반 정도에 시작된 바 있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이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고 난 뒤에는 식량과 물품 등 긴급구호적인 성격을 띤 지원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런 지원이 많았고 이후에는 어린이어깨동무와 같은 몇몇 단체들이 북과 힘을 합하여 병원이나 제약공장 등을 세우기도 했다. 개발협력은 여기서 좀 더 나아가서 사회 전반의 발전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을 만드는 일에 협력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지역 단위의 기술 교육부터 각 지역 단위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 등을 협력하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에 이러한 활동이 일부 진행됐다. 어린이어깨동무도 우리민족서로돕기본부 등 다른 단체와 함께 일부 지역에서 초보적인 형태의 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사실상 중단되면서 이러한 활동이 단절됐다. 

아무튼 지역단위의 개발 협력을 남북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도 딱 정형화된 의제로 북쪽이 제안한 것은 아니다. 북측의 필요성이나 수요 등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개발 협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협력이 필요한 부분으로 파악한 것이다. 즉, 남북이 새로운 협력을 하게 된다면 이런 부분부터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역단위의 개발 협력은 우선 인프라 구축이 전제돼야 한다. 도로망, 철도, 전기를 비롯한 에너지 등의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민간 차원에서 인도적 개발 협력을 할 수 있는 기반 구축은 남북 정부 간 협의해서 추진해야 할 사항이고 지역 개발이나 보건 의료, 식량 증산 등의 주체는 민간들이 되는 것으로, 통일부도 그런 식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것으로 협의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북쪽 사회도 그동안 변화가 있어서 협력의 내용과 방식에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의료나 보건 같은 경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투자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간의 지원이 이루었던 성과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다. 

북쪽의 보건의료 인프라가 얼마나 개선됐는지 확실하게 판단하기는 이르다. 물론 새로운 병원들이 생기긴 했다. 옥류 아동병원, 류경안과종합병원, 평양산원 유선종양연구소를 비롯해 제약회사 등등이 생겼는데 전반적인 보건 의료 상황이 달라져야 하기 때문에 투자도 더 많이 필요할 것이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으로 본다.  

프레시안 : 인프라 부분 외에 농업 부문은 우리가 북한과 함께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나? 

이기범 : 식량 문제와 관련해서 과거에 그 분야에서 활동하던 단체를 중심으로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에서 분과를 꾸려서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시민단체나 민간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일은 없다. 다만 지자체에서는 관심이 많으므로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민간단체와 지자체가 협력하면 좋겠다. 서울시는 산림녹화에 관심이 크고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같은 경우 농업 협력 단체별 기구를 따로 만들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농업 교류 협력이 재개된다면 지자체가 많이 참여할 것으로 본다.  

프레시안 : 북한이 관광 산업에 관심 많다고 하던데? 

이기범 : 관광 쪽이 아무래도 수익 측면에서 즉각적인 효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지난 판문점 정상회담 때 냉면이 상당히 주목받았는데, 북측에서도 이런 걸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양 정상이 백두산에 함께 올랐는데, 백두산 관광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홍보가 어디 있겠나.  

대북 제재, 비핵화와 함께 유연해져야 

프레시안 : 2009년 이후 거의 10년 만에 다시 북한에 방문했는데 실제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측면이 있었나? 

이기범 : 나름 경제발전도 이뤄지고 자신들의 국가적 목표도 정해졌다고 보인다. 그러다 보니 북측도 여기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업의 틀을 정하자고 이야기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보면 지역 개발과 과학기술협력인 것 같은데, 군이나 시 정도 규모의 개발에서 남북이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 평양 대극장 앞에서 정상회담 환영 예술 공연 관람을 기다리고 있는 이기범 회장 ⓒ이기범

평양의 경우에는 우선 도시 개발이 많이 이뤄졌다. 특히 '창전거리'와, 과학자들이 모여 사는 '미래 과학자거리', '여명거리' 등을 중심으로 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이 세 지역은 앞으로 평양의 발전 방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두 번째는 북한 사람들의 심적 자신감이 느껴졌다. 초기에는 제재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이후 제재가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해내고 인민들의 삶의 질을 어느 정도 향상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다는 희망, 자신감 등이 엿보였다. 

프레시안 : 그런데 지난 2014년 4월, 북한에서 모든 남한 민간 단체와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아직까지 이 방침은 유효한가? 

이기범 : 베이징에서 북측 민화협 관계자를 만나지 않았나. 이를 보더라도 북한의 그러한 방침은 변화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민간 차원의 남북 협력도 다시 시작하자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 측도 5.24조치 해제 등 평화와 번영을 지향하는 차원에서 정책을 재검토 해야 할 것이다.  

제가 북민협 회장 자격으로 이번 정상회담에 같이 갈 수 있었던 것도, 남북 정부가 민간 차원에서 과거에 했던 일에 대해 발전적인 길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또 실제 북측에서 김영대 부위원장과 민화협 등 관계자들이 나와서 우리 측과 면담을 진행했고 그러한 의지가 확인됐기 때문에, 인도 분야에서의 개발 협력을 재개하고 활성화하도록 노력하자는 원칙은 새로 세워진 것으로 본다. 민간 협력 재가동에 대한 원칙적 합의를 한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향후 어떤 협력 사업을 진행할 예정인가?  

이기범 : 북쪽에 새로운 수요가 있으니까 일단 거기에 맞추는 사업을 진행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사업은 아니고, 과거 진행했던 지역 개발 협력 사업의 규모를 더 키우고 지역에 자급 자족적인 기반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을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 분야는 그동안 쭉 했던 것처럼 보건 의료분야라든가 영양증진 분야인데, 이 역시 규모를 좀 더 키우고 평양의 수준을 우선 높이면서 이를 북측 전역으로 확산하는데 협력하는 일을 해야 할 것으로 본다.  

북민협 차원에서도 각 분야별로 소속 단체들이 원하는 분과에 들어가서 북측이랑 같이 할 수 있는 사업을 개발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본격적인 사업을 어렵게 하고 있는 상황이긴 하다.  

물론 제재가 있어도 인도적 물품은 반입시킬 수 있기 때문에 약품의 경우 통일부와 유엔 제재위원회, 필요한 경우에는 미국의 승인을 받아 보내려고 한다. 그런데 제재 예외를 신청하는 절차가 까다롭다. 예를 들어 북측에 비닐하우스를 세운다고 하면 비닐과 철제 프레임이 같이 들어가야 하는데 철제의 경우 제재 품목이다. 그렇다고 비닐만 제공하면 비닐하우스를 만들지 못한다. 제재 속에서 할 수 있는 부분은 있지만 절차 자체가 굉장히 힘들고 물품이 제한돼있다.  

이런 이유로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일단 할 수 있는 일은 시작해 나가자는 생각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제재 품목에 해당되더라도 인도적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유엔과 미국에 설득하고, 이를 통해 하나의 사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 남북 정상회담과 이어진 북미 정상회담으로 비핵화에 대한 진전과 한반도의 평화‧신뢰 구축이 동시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동시적 접근이 이뤄지고 있고, 유엔의 모든 제재 결의안에는 상황 변동이 있을 경우 제재를 강화할 수도 있지만 약화할 수도 있다는 항목이 들어있다. 또 사실 북한이 비핵화와 관련해 몇 가지 진전 및 가시적인 결과를 내놓고 있는데 반해 제재는 한 점의 변동도 없다. 이런 부분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 남북 정상회담 둘째날인 지난 9월 19일 평양 능라도에 있는 북한 최대 규모 종합체육경기장인 '5.1 경기장'에서 집단 체조 예술 공연이 열렸다. ⓒ이기범


냉면과 백두산에 관심 보이던 젊은 세대, 이들에게 기회를 줘야 

프레시안 : 지역 개발이나 교류 협력도 중요하지만 남북의 주민들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도 중요한 부분 같다. 어린이어깨동무에서는 인도적 차원의 협력 외에 평화교육도 진행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5만 명 정도 평화교육에 참여했던데 이 역시 남북 간 중요한 프로젝트로 가져가야 하는 것 아닌가?  

이기범 : 남북이 힘을 합해서 건물을 세우고 보건 의료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남북의 사람들이 만나야 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평화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6.15, 10.4 선언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남북의 해당 분야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게 됐다는 측면이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가 불필요한 적개심을 해소하고 대화를 통해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워크숍이나 교육을 같이 하는 것 외에 남북 주민들 간 이러한 의식의 저변이 확대되는 것이 중요한데, 이번 정상회담 때 평양시민들을 상대로 한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이 이런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그 성격은 정치적 사건이지만 이 연설 자체가 사회문화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북쪽 시민들이 문 대통령 연설을 듣고 반응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넓은 의미에서 남북관계와 대남 이미지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 

제가 당시 능라경기장에서 문 대통령의 연설을 듣는 시민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시민들의 얼굴에서 호기심과 놀라움 등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이건 저의 주관이 개입된 느낌에 불과하지만, 찍어온 사진도 다시 보면 시민들이 마지못해 앉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름의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는 구별된다.  

우리가 남측에서 했던 교육을 북측에서도 하려면 북측의 전문가와 함께 내용을 다듬고 자연스러운 교육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보다 넓은 의미의 사회교육 차원에서 사람과 만남을 통해 자연스러운 평화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건 의료 사업을 하러 북측에 방문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으로, 대화하는 가운데서 서로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변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앞으로도 이 부분이 중요할 것 같다.  

물론 현재 국면은 정부 주도로 비핵화를 진전시키고 남북협력에 필요한 기반과 제도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사회가 변하려면 역시 사람들 간의 만남이 중요하다. 민간 차원에서 특정한 현장에서 특정 분야의 사람들이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의논하고 부대끼기도 하는, 그런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프레시안 : 최근 출간한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에서 2008년부터 최근까지 초중고등학교를 보낸 학생들은 과거에 남북이 협력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저술했다. 남한 내에서도 남북 평화와 관련한 교육이 그만큼 필요하다는 증거 아닌가? 
 

▲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 이기범 지음, 보리 펴냄

이기범 : 이 책을 쓸 때 남북관계가 너무 어두웠고 학생들은 남북관계에 대한 기억조차도 많이 없었다. 그래도 과거에 남북이 힘을 합하면 결실이 맺어진 적이 있었다는 기억을 되살려야 남북관계를 변화시키자는 시민들의 공론이 모아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지난해부터 집필하기 시작했다.

말씀하신 평화 교육은 중등 교육 과정에 관련 내용이 일부 있는데 필수는 아니고 선택이다. 일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말을 들어보니까 2008년부터 10년 사이의 사회적 분위기가 평화, 특히 남북평화를 가르치기는 조심스러워서 교육을 하기가 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교육은 꼭 남북관계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성숙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여전히 남측에서는 북측에 대해 호혜적이거나 상호주의적인 인식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안상수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9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왜 평양에 태극기가 없었냐고 물어보자, 이낙연 국무총리가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에 오면 인공기를 휘날릴 수 있겠냐고 반문한 사례가 화제가 되었다. 이렇게 한 쪽으로 치우쳐 생각하시는 분들이 적잖이 있을 것 같다. 한 언론사 기자도 자기네 회사 지국을 평양에 만들어야 겠다고 하길래, 그럼 북측의 <로동신문> 지국을 서울에 만드는 건 괜찮냐고 하니까 그건 안된다고 하더라. (웃음) 

우리가 북쪽과 관계에서는 상당 부분 호혜적인, 상호주의적인 의식이 마비되는 측면이 있다. 무의식중에 특별히 북에 대해 적대적 생각을 가져서라기 보다는, 이런 상호적인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책에서 "한반도 평화는 단일국가를 이룬다는 바람보다는 삶의 질이 나아진다는 전망으로 협력해야 한다. 시민들의 활발한 참여가 중요하다. 평화공동체라는 집으로 들어갈 사람들이 스스로 집을 지어야 한다. 자기 삶을 누군가 대신하는 과정으로는 불평등과 불합리가 되풀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남북 관계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남한 시민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시다면?  

이기범 : 북한과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선과 부정적인 시선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우선 평창 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꾸리는 사안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공정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다. 이건 그만큼 현재 우리 사회의 공정성이 많이 흐트러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이 세대들은 순수한 측면에서의 호기심도 있다. 제가 이번에 정상회담을 갔다 왔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냉면 어땠냐, 백두산은 어떠냐 등등을 물어보더라. 과거에 평양냉면 이야기를 꺼냈다면 남북관계 같이 중요한 문제를 두고 냉면 이야기나 한다면서 경망스럽다고 했을텐데, 지금 젊은 세대들은 다르다. 본인들의 피부에 와닿는 흥미로운 것이나 변화가 있고 영향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진다.  
 

▲ 이기범 회장 ⓒ프레시안(이재호)


그런 점에서 젊은 세대가 미래의 남북관계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많이 만들어 줘야 한다. 예를 들어 이번에 10.4 남북정상선언 남북 공동 기념식이 평양에서 열린다고 할 때, 참석해야 할 분들이 많겠지만 젊은 세대들을 많이 참여시켰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북쪽에서도 여기에 맞춰서 젊은이들이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평화교육이 이뤄지는 것이 필요하다.  

또 남북 간 끊어진 도로와 철도 복원하는데 수십조 원이 든다는 주장이 있는데, 실제 철도와 도로를 복원하는 데 얼마나 비용이 드는지, 그리고 이걸 연결하면 어떤 이득이 있고 우리 삶에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알려줘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남한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로, 대륙으로 넓힐 수 있도록 사고의 패러다임을 밝혀주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 10, 20대에게 기회를 주면 잘 참여할 것이다. 본인에게 영향이 있는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이 젊은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잘 북돋을 수 있는 부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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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차방정식’ 해법이 있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8/10/08 12:59
  • 수정일
    2018/10/08 12:5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개벽예감 317] ‘고차방정식’ 해법이 있다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8/10/08 [09:29]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2. 오바마의 경고와 클래퍼의 조언, 1년 뒤에 일어난 변화

3. ‘고차방정식’ 푸는 해법이 있다

4. 평화협정과 철군, 핵동결과 이익대표부

5. 가슴 벅찬 전환시대의 흐름 속에서

 

 

1.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부쉬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를 두루 거치며 한때 미국 국가정보계를 주름잡았던 제임스 클래퍼(James R. Clapper)라는 퇴직관료가 있다. 1963년 6월 미국 공군 소위로 임관되어 군사정보기관에 들어간 이후 1991년 11월 공군 중장 군직에 오르기까지 줄곧 군사정보분야에서 근무해온 그는 1991년부터 1995년까지 국방정보국 국장, 2001년부터 2006년까지 국가지구공간정보국 국장, 2007년부터 2010년까지 국방부 정보담당 차관, 2010년부터 2017년까지 국가정보실장으로 재직하였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국가정보실장의 지위와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으나, 클래퍼가 국가정보실장으로 재직했던 오바마 행정부 시기에 국가정보실장은 16개 국가정보기관들이 분석한 정보를 종합하여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다. 

 

클래퍼가 쌓아온 경력을 보면, 그가 조미핵대결이 지속된 1993년부터 2017년까지 25년 동안 미국 군사정보기관들에서 고위관료로 근무하면서 조선의 핵문제에 관한 심층정보를 다루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미국 국가정보계통에서 클래퍼만큼 조미핵대결 25년 역사에 정통한 관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바마 행정부 임기가 끝나가고 있었던 2016년 10월 25일 당시 퇴임을 앞둔 국가정보실장 클래퍼는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외교자문기관으로 알려진, 뉴욕 맨해튼에 있는 대외관계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가 주최한 토론회에 단독발언자로 출연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가 내던진 ‘폭탄발언’은 당시 워싱턴 정가에 파문을 일으켰다. 워싱턴 정가의 기존관념을 뒤흔들어놓은 클래퍼의 ‘폭탄발언’은 다음과 같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3년 8월 9일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실장으로부터 국가정보를 보고받는 장면이다. 클래퍼는 조미핵대결 25년 동안 미국 군사정보기관들에서 고위관료로 근무하면서 조선의 핵문제에 관한 심층정보를 다룬 사람이다. 그런 그가 2016년 10월 25일 뉴욕 맨해튼에 있는 대외관계협의회가 주최한 토론회에 단독발언자로 출연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폭탄발언'을 던졌다. 그는 조선이 핵무기를 포기하기 않을 것이므로, 미국은 조선의 핵능력을 제거하려는 비핵화를 추구하지 말고, 조선의 핵능력을 제한하는 핵동결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도이며, 조선에게 핵동결을 요구하더라도 일방적으로 요구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핵동결에 상응하는 중대한 양보조치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그저 웃고 넘겼지만, 그 '폭탄발언'은 조미협상의 해법을 예고한 중대발언이었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폴 조미정상회담 이후 조미협상은 2년 전 클래퍼의 지론대로 전개되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나는 북조선의 비핵화가 가망 없는 생각이라고 본다. 북조선은 비핵화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핵능력을 포기하는 것은 북조선으로서는 고려할 가치가 없는 생각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그러면서 그는 “(비핵화과정에서 미국이 조선에게) 바랄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일종의 마개를 씌우는 것(some sort of a cap = 핵동결을 뜻함-옮긴이)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미국이 북조선에게 요구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요즈음 한국 언론매체들이 쓰는 말을 빌리면, 조선의 핵동결이란 현재 핵은 폐기하지 않고 미래 핵만 폐기한다는 뜻이다.

 

토론회 발언기록은 클래퍼가 그런 말을 하는 순간, 청중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전한다. 국가정보실장이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조미핵대결에 관해 심각한 발언을 하는 순간, 뜻밖에도 청중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 이 기괴한 장면은 미국의 외교전문가들이, 아니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조미핵대결에 대해 얼마나 무지몽매하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런 기괴한 분위기 속에서 클래퍼의 심각한 발언은 계속되었다. 그는 만일 미국이 조선에게 핵동결을 요구하려면, 핵동결에 상응하여 조선에게 내놓아야 할 “어떤 중대한 유인책들(some significant inducements)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위에 인용된 클래퍼의 ‘폭탄발언’을 좀 더 정확한 어법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미국은 조선의 핵능력을 제거하려는 비핵화를 추구하지 말고, 조선의 핵능력을 제한하는 핵동결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도이며, 조선에게 핵동결을 요구하더라도 일방적으로 요구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핵동결에 상응하는 중대한 양보조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클래퍼의 ‘폭탄발언’이다.

 

‘폭탄발언’의 충격파가 워싱턴 정가를 뒤흔들었던 2016년 10월 당시는 물론이고, 그로부터 오늘까지 2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조미핵대결이 조선의 승리로 종식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사변들이 줄이어 일어나는 조미협상국면에 들어왔는데도, 클래퍼의 ‘폭탄발언’은 워싱턴 정가에서 그 누구도 말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로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워싱턴 정가의 금기어 속에 조미협상의 해법이 들어있다. 클래퍼의 ‘폭탄발언’은 2018년 6월 12일 싱가폴 조미정상회담 이후 진행되고 있는 조미협상의 해법을 예고한 중대발언이었던 것이다.  

 

 

요즈음 미국에서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저명한 언론인 밥 우드워드(Robert U. Woodward)의 책 ‘두려움: 백악관의 트럼프(Fear: Trump in the White House)’를 펼치면, 클래퍼라는 이름을 또 다시 만날 수 있다. 그 책에 따르면, 오바마 행정부 시기에 국가정보실장으로 재직하던 클래퍼는 미국이 조선에게 협상조건으로 제시한 조선의 비핵화는 실현될 수 없으며, 미국이 조선에 대한 군사적 선택방안 같은 비현실적인 대책을 늘어놓을 게 아니라, 현실적인 대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조선이 미국에게 요구하는 것은 6.25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협정이며, 평양에 미국의 이익대표부가 설치되기 바란다는 지론을 폈다고 한다. 클래퍼는 당시 오바마 행정부가 은밀히 논의하고 있었던 군사적 선택방안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평화협정 체결과 이익대표부 설치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드워드의 책 ‘두려움’에 따르면, 클래퍼가 제시한 새로운 대안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고 한다.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 당시 대통령은 클래퍼가 제시한 새로운 대안을 철저히 외면하였고, 오바마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 각료들도 그것을 무시하였던 것이다. 

 

우드워드의 책 ‘두려움’에 따르면, 당시 오바마 행정부는 공연무대 위에서 그 무슨 ‘전략적 인내’라는 제목의 해괴한 요술을 벌여놓고, 무대 흑막 뒤에서는 조선의 미사일시험발사를 교란시키는 이른바 ‘특수접근프로그램(Special Access Program)’이라는 작전명칭의 싸이버공격기회를 노리다가 성공확률이 보이지 않자, 이전 행정부들이 이미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포기했던 대조선선제타격을 다시 검토해보라는 무모한 지시를 내리며 광분하고 있었다고 한다. 

 

 

2. 오바마의 경고와 클래퍼의 조언, 1년 뒤에 일어난 변화

 

클래퍼가 제시한 새로운 대안을 외면한 채, 조선을 공격하려는 군사적 선택방안들에 미련을 두면서 화약고 안에서 은밀한 불장난으로 허송세월했던 핵제국의 호전광 오바마는 백악관을 떠났고, 정치권과 거리가 먼 부동산재벌총수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가 그의 뒤를 이어 백악관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였다. 대통령선거일로부터 이틀 뒤인 2016년 11월 10일 대선승리도취감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대통령당선인 트럼프는 의기양양하게 백악관에 들어가 오바마를 만나 상견례를 하였다. 

 

그런데 백악관 상견례에서 트럼프는 대선승리도취감에서 깨어나 정신이 버쩍 드는 기이한 체험을 하였다. 우드워드의 책 ‘두려움’에 따르면, 트럼프는 오바마를 만나 10분 동안 상견례를 하려고 하였는데, 예정시간을 훌쩍 넘기며 무려 1시간 이상 회담하였다고 한다. 트럼프와 오바마는 측근들을 대통령집무실 밖으로 내보내고, 1시간 이상 단독회담을 진행한 것이다. 취재진 앞에서 악수하며 웃는 얼굴로 기념사진을 찍는 상견례가 뜻밖에 심각한 단독회담으로 바뀐 까닭은 정신이 버쩍 드는 매우 심각한 국가안보현안이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우드워드는 자신의 책 ‘두려움’에서 트럼프와 오바마가 심중하게 논의한 국가안보현안이 무엇이었는지를 오바마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서술해놓았다. 

 

“조선은 당신이 직면할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문제로 될 것이다. 오바마는 대통령당선인에게 말했다. 그 문제는 내게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후일 트럼프는 오바마가 자신에게 조선이 가장 큰 악몽으로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백악관 참모들에게 말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날 트럼프와 오바마가 단독회담에서 심중하게 논의한 것은 조미핵대결 심층정보와 대처문제였다. 하지만 그 심층정보와 대처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우드워드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우드워드는 자기 책에 위와 같이 간략한 서술만 남긴 것이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대통령선거일로부터 이틀이 지난 2016년 11월 10일 대선승리도취감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대통령당선인 트럼프가 의기양양하게 백악관에 들어가 오바마를 만나 상견례를 하는 장면이다. 취재기자들이 상견레 장면을 촬영하였다. 그런데 트럼프는 오바마를 만나 10분 동안 상견례를 하려고 하였지만, 예정시간을 훌쩍 넘기며 무려 1시간 이상 단독회담을 하였다. 그렇게 된 까닭은, 그 자리에서 매우 심각한 국가안보현안이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트럼프와 오바마가 단독회담에서 심중히 논의한 것은 조미핵대결 심층정보와 대처문제였다. 그로부터 12일이 지난 2016년 11월 22일 퇴임을 앞둔 국가정보실장 클래퍼는 대통령당선인 트럼프에게 국가정보를 보고하면서 이전에 오바마에게 제기하였으나 외면당했던 새로운 대안을 조언했다. 클래퍼의 새로운 대안이란 조선의 핵동결을 추진하고, 평화협정 체결과 이익대표부 설치를 추진하는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백악관에서 트럼프-오바마 단독회담이 진행된 날로부터 12일이 지난 2016년 11월 22일 퇴임을 앞둔 국가정보실장 클래퍼는 대통령당선인 트럼프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가정보를 해설했다. 그 자리에서 트럼프는 12일 전 오바마와 만난 단독회담에서 자기의 정신을 버쩍 들게 하였던 조미핵대결 심층정보를 클래퍼의 자세한 해설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했다. 조미핵대결 심층정보를 심중히 듣고 난 트럼프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클래퍼에게 조언을 구했다. 클래퍼는 이전에 오바마에게 제기하였으나 외면당했던 새로운 대안을 트럼프에게 조언했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클래퍼의 새로운 대안은 조선의 핵동결을 추진하고, 평화협정 체결과 이익대표부 설치를 추진하는 것이다.   

 

오바마와 달리, 트럼프는 클래퍼의 조언을 귀담아들었지만, 2017년 1월 20일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11월 29일까지 11개월 동안 클래퍼에게서 들었던 새로운 대안을 자기 정책에 반영하지 않았다. 우드워드의 책 ‘두려움’에 따르면, 2017년 11개월 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무대 위에서는 조선에게 적대발언을 늘어놓으면서, 무대 뒤에서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각료들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지속적으로 거론하고 철군을 반대하는 그들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2017년 11월 29일 조선이 미국 본토 전역을 핵타격사정권으로 끌어들인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여 국가핵무력을 완성하던 날, 트럼프 대통령은 1년 전에 들었던 오바마의 경고와 클래퍼의 조언을 상기하였다. 

 

트럼프가 대통령당선인 신분으로 클래퍼와 마주앉은 자리에서 들었던 새로운 대안, 트럼프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에서 충격을 받고 상기하였던 새로운 대안은 평화협정 체결과 이익대표부 설치였다. 오바마의 경고와 클래퍼의 조언을 상기한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1월 초부터 조선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어떻게 급변시키기 시작했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드워드의 책 ‘두려움’이 포괄하는 서술범위는 2017년 12월에 끝나기 때문에, 아쉽게도 그 책은 2018년 1월부터 조선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가 어떻게 급변하였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우드워드가 2018년 1월 이후 조선을 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에서 일어난 극적인 변화들을 새로운 책으로 엮어낸다면,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장면들이 수록될 것이다. 

 

제1장면 - 2018년 1월 1일 트럼프 대통령이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포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를 듣고 충격을 받는 장면.

제2장면 - 2018년 1월 16일 트럼프 대통령이 팜페오-서훈-김영철 연락선을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미정상회담을 제의하는 장면.

제3장면 - 2018년 1월 19일 트럼프 대통령이 새해에 처음 소집된 국가안보회의 각료회의에서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거론하는 장면. 

제4장면 - 2018년 1월 하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국방장관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명령을 하달하려고 하였으나, 존 켈리(John F. Kelly) 백악관 비서실장이 강하게 만류하는 바람에 명령하달을 보류하는 장면.

제5장면 - 2018년 4월 17일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신조(安培晋三) 일본 총리와 진행한 미일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사람들은 6.25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당시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었던 남측과 북측을 뜻함-옮긴이)은 종전문제를 논의하고 있는데, 나는 이 논의를 축복한다. 이 논의를 정말로 축복한다”고 말하고, 미일정상회담 중에 아베 총리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거론하는 장면.

제6장면 - 2018년 5월초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검토하라는 지시를 미국 국방부에 내리는 장면. 

제7장면 - 2018년 6월 12일 싱가폴 조미정상회담 중에 진행된 38분 간의 단독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중대현안들을 논의하는 장면. 

 

위에 열거한, 트럼프 대통령의 극적인 행동변화를 보여주는 일곱 장면들은 마음속으로 그려본 상상장면들이 아니라, 미국 언론매체들에 보도된 사실장면들이다. 그런 사실장면들을 살펴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대통령당선인 시절에 클래퍼에게서 들었던 조언을 1년 뒤에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클래퍼가 조언했던 평화협정 체결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구상에 주한미국군 철수로 반영되었고, 클래퍼가 조언했던 이익대표부 설치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구상에 조미관계정상화로 반영되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트럼프 대통령이 생각하는 평화협정 체결은 주한미국군 철수 이외에 다른 게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지금은 백악관 각료들의 반대를 물리칠 만한 정세가 아직 무르익지 않아서 철군결정을 보류하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철군의지는 변함없이 확고하다. 예컨대, 그는 자신의 철군의지를 싱가폴 조미정상회담 직후 현장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도 표명하였는데, 취재기자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약속한 안전담보에 주한미국군 감축도 포함되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변하였다. 

 

“아니다. 감축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나는 솔직해야 하는데, 나는 대선기간 중에 감축 이상의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나는 우리 군대가 철수되기 바란다. 나는 우리 군대를 철수하고 싶다. 지금 32,000명 병사들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데, 나는 그들을 철수하면 좋겠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당면문제가 아니다. 어느 시점에 가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때가 아니다.” 

 

둘째, 트럼프 대통령이 생각하는 조미관계정상화는 이익대표부를 설치하고 국교를 수립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게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의 온라인 매체 <액시오스(Axios)> 2018년 6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과 조선의 공식관계를 고려하고 있으며, 나중에는 평양에 미국 대사관을 개설하는 문제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만나 그의 철군의지와 관계개선의지를 확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미정상회담 직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주한미국군 철거문제를 협의하였다. 일본 <아사히신붕> 2018년 7월 5일 보도에 따르면, 2018년 6월 19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3차 조중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국가주석은 주한미국군 철거를 위해 전략적으로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한다. 

 

 

3. ‘고차방정식’ 푸는 해법이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주한미국군을 철거하고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전략적 목표를 추진하고 있고,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국군 철수와 조미국교수립이 불가피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략구상과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구상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그 공감대 위에서 상호신뢰를 유지하면서 제2차 조미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다. 백악관, 연방의회, 언론계에 우글거리는 잡다한 극우인사들이 공감대→상호신뢰→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진전과정을 일시적으로 지체시킬 수는 있어도 중단시킬 수는 없다. 제2차 조미정상회담이 일정에 오른 것은 그런 사실을 입증해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략구상과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구상 사이에 형성된 공감대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두 개의 외피개념 속에 담겨졌다. 그 외피개념을 문서화한 것이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조미공동성명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외피개념을 열어보면, 그 속에 들어있는 두 개의 내실개념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주한미국군 철수와 조미관계정상화다. 이 내실개념을 이해하면, 주한미국군이 철수하고 조선과 미국이 국교를 수립하는 ‘고차방정식’, 다시 말해서 한반도에서 완전한 비핵화가 실현되고, 한반도에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가 구축되는 ‘고차방정식’을 풀 수 있다. ‘고차방정식’을 푸는 해법은 다음과 같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8년 6월 12일 싱가폴공화국 쌘토사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진행한 역사적인 조미정상회담 장면이다. 클래퍼가 2016년 11월에 조언했던 평화협정 체결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2018년 전략구상에 주한미국군 철수로 반영되었고, 클래퍼가 2016년 11월에 조언했던 이익대표부 설치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2018년 전략구상에 조미관계정상화로 반영되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주한미국군을 철거하고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전략적 목표를 추진하고 있고,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국군 철수와 조미국교수립이 불가피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주한미국군 철수와 조미국교수립은 10년 뒤에 이루어질 전망목표가 아니라, 2~3년 안에 이루어질 중대하고 시급한 당면과업이다. 그 당면과업이 수행되는 2~3년 안에 8천만 겨레의 운명과 동아시아 정세에서 격동적이고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몇 주 뒤에 열릴 제2차 조미정상회담을 중시해야 하는 까닭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조미국교를 수립하는 ‘고차방정식’을 푸는 해법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차방정식’을 푸는 해법은 두말할 나위 없이 평화협정 체결이다. 종전선언 발표가 아니라 평화협정 체결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종전선언을 발표한 뒤에도 주한미국군을 철수하지 않을 수 있고, 조미관계정상화를 뒤로 미룰 수 있지만,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주한미국군을 이른 시일 안에 반드시 철수해야 하고 조선과 국교를 수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고차방정식’을 모르는 한국 언론매체들은 요즈음 종전선언을 집중적으로 거론하지만, 사실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몇몇 선행조치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더욱이 종전선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자발적으로 약속한 것이다. 미국의 온라인 매체 <박스(Vox)> 2018년 8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명을 받고 2018년 6월 1일 백악관을 방문한 김영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게 종전선언을 약속하였고, 그로부터 11일이 지난 뒤에 열린 조미정상회담 단독회담 중에 회담을 마친 뒤에 곧바로 종전선언문에 서명하겠다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약속하였는데, 존 볼턴(John R. Bolton) 국가안보보좌관과 제임스 매티스(James N. Mattis) 국방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선언문에 서명하려는 것을 가로막았다고 한다. 이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종전선언 서명을 보류해놓았으므로,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 발표문제를 합의하고 말고 할 것도 없고, 트럼프 대통령이 스스로 보류를 중지하고 서명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종전선언과 달리, 평화협정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수십 년 동안 조선은 미국에게 평화협정 체결을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예컨대, 조선외무성은 2015년 10월 17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미국이 먼저 용단을 내려야 할 문제이며, 조미 사이에 우선 원칙적 합의를 보아야 할 문제”라고 밝혔고, <조선중앙통신사>는 2015년 11월 11일에 발표한 ‘조속히 평화협정체결용단을 내려야 한다’는 제목의 논평에서 “조선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는 것은 현 시기 모든 문제해결의 관건이며 조선반도의 공고한 평화와 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단언하였다.  

 

남북미 3자가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남과 북이 군사대결을 중지하는 일련의 선행조치들을 취하면, 평화협정이 체결될 충분조건이 성숙되는 것이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국군이 철수되어야 하므로,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매우 꺼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언제까지나 묻어둘 수는 없다.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직전 일각에서 평화협정 체결문제가 거론되었다. 일본 <교도통신> 2018년 4월 1일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8년 3월 9일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남북미중 4자가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의하였다고 한다. 조선을 모독하는 도발망언으로 악명 높은 미국 연방상원의원 린지 그레이엄(Lindsey O. Graham)도 2018년 4월 1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팍스 뉴스>와 진행한 대담에서 남북미중 4자 평화협정 체결이 조미정상회담의 목표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이런 선례를 보면, 제2차 조미정상회담 이후 평화협정 체결문제가 공론화될 것임을 예견할 수 있다.   

 

 

4. 평화협정과 철군, 핵동결과 이익대표부 

 

2018년 5월 2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들에게 “주한미국군은 한미동맹의 문제이므로 평화협정 체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평화협정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말이다. 평화협정은 평화라는 두 글자를 써넣은 종잇장이 아니다. 2018년 4월 12일 미국 연방상원 외교위원회 인준청문회에 출석한 마익 팜페오(Michael R. Pompeo) 당시 국무장관 지명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선의 안전을 보장하는 종잇장 같은 약속만으로는 안 되고,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는데, 팜페오 국무장관이 말한 종잇장은 평화협정문을 뜻하고, 그가 말한 종잇장 이상의 것은 주한미국군 철수를 뜻한다. 

 

평화협정 체결은 평화를 실현하는 정책변화를 동반하며, 국제법적 구속력에 따른 규범적 행동을 요구한다. 그런 정책변화와 규범적 행동이 수렴되는 총결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주한미국군 철수명령이 내려지는 것이다. 조선은 주한미국군을 철거시키기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는 것이고,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미국은 주한미국군을 반드시, 전면적으로 철수해야 한다. 

 

베트남전쟁이 종식된 경험을 보면, 평화협정이 체결되기도 전에 미국군이 먼저 자발적으로 철수했음을 알 수 있다. 1973년 1월 17일 프랑스 빠리에서 체결된 ‘베트남에서의 전쟁종식과 평화회복에 관한 협정’에 따르면, 미국은 그 협정을 체결한 날로부터 60일 안에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모든 미국군과 군사장비를 전면 철수하고 남베트남에 설치한 모든 군사기지들을 해체하도록 규정되었다. 베트남 평화협정에 따르면, 미국은 1973년 3월 20일까지 철군을 완료하여야 하였는데, 미국은 1969년 7월 8일부터 15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972년 11월 30일에 철군을 완료하였다. 미국은 철군을 완료한 뒤에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정전협정을 체결하지 않았던 베트남의 경우와 달리 한반도에서는 정전협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해야 주한미국군을 철수할 수 있다. 정전협정에 철군문제가 명기되었으므로, 정전협정을 교체하는 평화협정에 철군문제가 명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정전협정은 제60항에서 철군문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조선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하여 쌍방 군사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조선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거 및 조선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 이 조항에 따르면, 1953년 10월 이전에 조선과 미국이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철군문제를 해결해야 하였지만, 미국은 정전협정이 규정한 철군문제를 외면하는 뻔뻔스러운 작태를 지난 65년 동안 버리지 못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들은 판문점 북측 지역에 있는 조선정전협정 조인장 외부와 내부를 각각 촬영한 것이다. 65년 전 조선인민군 공병들이 급조한 건물의 출입문 위쪽에는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하얀 비둘기 문양이 평화의 상징으로 새겨져있다. 그 건물 안에는 1953년 7월 27일 조선과 미국이 정전협정문을 조인하였던 탁자들이 원상대로 보관되어 있다. 조인탁자 위에 각각 놓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와 유엔기가 그 날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 장소에서 체결된 정전협정에는 철군문제가 명기되었는데, 미국은 지난 65년 동안 철군문제를 철저히 외면하는 뻔뻔스러운 작태를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뻔뻔스러운 작태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보류해둔 주한미국군 철수명령을 미국 국방장관에게 하달할 것이고, 조선과 미국은 국교수립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미국은 철군문제를 외면해왔지만, 조선은 철군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왔다. 2018년 4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언론사 사장들과 오찬간담회를 하면서 “북한은 주한미군철수라든지 미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오로지 적대정책의 종식, 안전보장을 말할 뿐”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조선에게 철군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모르는 말이다. 

 

지난 날 조선은 철군문제를 외면해온 미국을 철군협상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한 적도 있었다. 1998년 10월 21일부터 24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진행된 제3차 4자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한반도 긴장완화를 각각 논의하는 두 개의 분과위원회를 구성하는 문제가 합의되었다. 그런데 미국은 분과위원회에서 철군문제를 논의할 수는 있지만, 협상할 수는 없다고 미리 금지선을 그었다. 조선측과 미국측은 제3차 4자회담 기간 중 네 차례에 걸쳐 별도로 양자회담을 진행하면서 철군문제를 협상하였다. 제3차 4자회담이 끝난 뒤, 김계관 조선측 수석대표는 취재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질문 - 의제를 먼저 정해야 한다는 기존 방침을 북측이 양보했는데...

답변 - 의제를 먼저 정해야 한다는 우리의 기본방침에는 변함이 없다. 조미평화협정과 주한미군철수문제는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근본문제다. 우리는 이러한 자세로 앞으로의 협상에서 이를 반영시켜 나갈 것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4자회담에서 제기하겠다.

 

질문 - 주한미군문제는 어느 분과위원회에서 논의되는가?

답변 - 앞으로 계속 논의돼야 할 문제다. 분과위의 성격을 보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곁에 있었던 리근 조선측 차석대표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논의하는 분과위원회에서 철군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보류해둔 주한미국군 철수명령을 미국 국방장관에게 하달할 것이고, 조선과 미국은 국교수립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일본 <아사히신붕> 2018년 10월 7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보도 당일 네 번째로 평양을 방문한 팜페오 국무장관을 접견한 자리에서 녕변핵시설을 폐기하는 것에 맞춰 미국의 연락사무소 역할을 하는 시설을 평양에 설치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고 한다. 연락사무소(liaison office)라고 명시하지 않고, 연락사무소 역할을 하는 시설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 시설이 이익대표부(interest section)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조선이 녕변핵시설을 폐기하는 핵동결을 실행하면, 조선과 미국은 평양과 워싱턴에 각각 이익대표부를 설치한다는 말이다. <사진 5>

 

▲ <사진 5> 현재 미국과 이익대표부 수준의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나라는 이란이슬람공화국이다. 1979년 이란혁명으로 테헤란에 있는 미국대사관이 점거되자, 미국은 워싱턴에 있는 이란대사관을 압류하였다. 이란과 미국은 1981년 1월 19일 알제리에서 협정을 체결하고, 서로 이익대표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안전문제 때문에 이란 이익대표부는 워싱턴에 있는 파키스탄 대사관 안에 설치되었고, 미국 이익대표부는 테헤란에 있는 스위스 대사관 안에 설치되었다. 위의 사진은 이란 이익대표부가 들어있는 파키스탄 대사관 청사를 촬영한 것이다. 조선과 미국이 이익대표부를 각각 워싱턴과 평양에 설치하면, 다른 나라 대사관 안에 설치하지 않고 독자적인 청사를 갖게 될 것이다. 남홍색 오각별이 선명한 공화국기가 워싱턴에 휘날리고, 50개 별과 13개 붉은 줄이 그려진 성조기가 평양에 휘날리게 되는 것이다. 이란 이익대표부는 미국과 캐나다에 거주하는 이란국적자들을 위한 영사업무를 맡아보면서 이란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입국사증을 발급하는, 사실상 영사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조선 이익대표부가 워싱턴에 설치되면, 그런 영사관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2016년 11월 22일 클래퍼 국가정보실장은 트럼프 대통령당선인에게 국가정보를 해설하는 기회에 조선의 핵문제를 푸는 해법으로 평화협정 체결과 이익대표부 설치를 조언한 바 있었는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오늘 평화협정 체결과 이익대표부 설치가 제2차 조미정상회담 의제로 된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트럼프는 클래퍼의 조언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익대표부 설치는 국교수립 직전 단계의 조치다. 1973년 5월 연락사무소를 워싱턴과 베이징에 각각 설치한 미국과 중국은 연락사무소를 이익대표부로 격상시키지 않고 곧바로 1979년 1월 1일 국교를 수립하였다. 미국과 이익대표부 수준의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나라는 이란이슬람공화국이다. 

 

 

5. 가슴 벅찬 전환시대의 흐름 속에서

 

제2차 조미정상회담 이후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평양과 워싱턴에 이익대표부가 각각 설치되면, 주한미국군 철수가 일정에 오르게 될 것이다. 주한미국군이 철수되지 않은 평화협정은 있을 수 없고, 조미국교수립을 촉진시키지 않는 평화협정도 있을 수 없다.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주한미국군이 철수하고, 남북군비감축이 시작되고, 이익대표부가 설치되면, 적대관계가 불가역적으로 해소되고, 최종적이고 완전한 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 그런 상태를 한반도 평화체제라 한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국군은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게 반환하고 단계적으로 철수해야 한다. 지난 시기 조선은 미국에게 3단계 철군을 요구하였다. 

 

평화협정 체결은 주한미국군을 철거시킬 뿐 아니라, 남북군사대결도 중지시킬 것이다. 주한미국군이 철수하면, 남북군사대결이 격화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남북군사대결이 중지된다. 그렇게 예견하는 근거는,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부터 남북군사대결을 중지하기 위한 단계적 조치들이 이미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2018년 9월 19일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공동선언문에 서명한 직후, 그 자리에서 두 정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송영무 남측 국방장관과 노광철 북측 인민무력상이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합의서'에 서명하고, 합의문을 교환하는 장면이다. 군사분야합의서에는 남북군사대결을 중지하는 조치들이 담겼고,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설치하는 획기적인 조치도 담겼다. 남북군사대결이 중지되고 신뢰관계가 조성되는 가운데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군사대결을 완전히 중지하는 최종조치가 취해지게 될 것인데, 그것이 바로 남북군비감축이다. 2018년 10월 현재 종전선언 발표는 이미 예정되었고, 남과 북은 군사대결을 중지하는 일련의 조치를 이행하기 시작하였으니, 평화협정이 체결될 날도 멀지 않았다. 8천만 겨레는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역사적 전환을 2019년에 맞을 것이다. 조미관계는 평화공존으로, 남북관계는 통일실현으로 나아가는 위대한 전환이 다가오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018년 9월 19일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공동선언문에 서명한 직후, 그 자리에서 두 정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송영무 남측 국방장관과 노광철 북측 인민무력상이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합의서’에 서명하였다. 이 군사분야합의서에는 남북군사대결을 중지하는 조치들이 담겼고, 합의사항들을 이행하고 점검하고 평가하는 상설군사기구인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설치하는 획기적인 조치도 담겼다. 군사분야합의서에 담긴 조치들은 조선이 1990년 5월 31일에 발표한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한 군축제안’에 이미 명기된 조치들인데, 조선은 남북군사대결을 중지하는 과업을 무려 28년 만에 수행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남북군사대결이 중지되고 신뢰관계가 조성되는 가운데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군사대결을 완전히 중지하는 최종조치가 취해지게 될 것인데, 그것이 바로 남북군비감축이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것과 더불어 남북군축협상이 시작될 것이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한국군은 주한미국군으로부터 작전통제권을 반환받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한미국군사령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남북군축을 추진할 수 있다. 

 

2018년 10월 현재 종전선언 발표는 이미 예정되었고, 남과 북은 군사대결을 중지하는 일련의 조치들을 이행하기 시작하였으니, 평화협정이 체결될 날도 멀지 않았다. 8천만 겨레는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역사적 전환을 2019년에 맞을 것이다. 조미관계는 평화공존으로, 남북관계는 통일실현으로 나아가는 위대한 전환이 다가오고 있다. 가슴 벅찬 전환시대의 흐름 속에 우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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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제재 중단하고, 북미공동성명 이행하라!”

7차 반미월례집회, 6일 미대사관 앞에서 진행
이기영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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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08  11: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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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일 미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7차 반미월례집회는 ‘대북적대정책 철회! 경제제재 해제! 판문점선언 이행 방해·내정간섭 중단!’을 주요 구호로 제시했다. [사진제공-미국규탄대회 준비모임]

지난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서 제5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역사적인 ‘9월 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발표한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남과 북은 민족자주와 민족자결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남북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또한 남북관계 발전을 통일로 이어갈 것을 바라는 온 겨레의 지향과 여망을 정책적으로 실현하기위해 노력하기로 하였다.

   
▲ 평양정상회담 사흘째인 2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맞잡은 손을 들어올리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조명균 장관을 비롯한 남즉 대표단이 군 수송기를 타고 10.4 11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북길에 올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10월 5일, 평양에서는 10.4선언 발표 11돌을 맞아 ‘10.4선언발표 11돌 기념 민족통일대회’(이하 10.4기념대회)가 진행되었으며 공동호소문이 채택되었다.

이번 10.4기념대회는 10.4선언 이후 남북이 갖는 첫 남북공동 기념행사로서 무엇보다도 양 정상이 합의하고 발표한 ‘9월 평양공동선언’에 따라 열리된 것으로 역사적인 평양공동선언 이행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6.15남측위원회 이창복 상임대표의장,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조명균 통일부장관 등 남측의 민관방북단 160여명을 비롯하여 남·북·해외 대표 3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과적으로 개최된 10.4기념대회는 ‘4.27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의 이행을 적극적으로 추동하고 8천만 겨레에게 조국통일을 향한 필승의 신념과 낙관을 더욱 높여주었다.

우리 민족끼리 조국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 민족적인 대단합이 반드시 요구되며, 우리 민족문제에 미국의 개입과 간섭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민족자주를 철저히 실현하는 것이 선결과제이다.

대북제재를 극복하고 민족단합과 민족공조를 실현해 나가지 못한다면, 이번 ‘10.4기념대회’에 참가했던 방북단이 군수송기에 실려 평양으로 향하는 비정상적인 모습이 다시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와 번영, 자주통일 실현이 기대와 바람이 아닌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중대한 사변기인 지금 예속적인 한미관계를 청산하고 민족자주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 실천해 나가는 것은 민족구성원으로서의 당연한 일이다.

   
▲  6일 오후 맑은 날씨 속에 오후 4시부터 200여명의 참가자들은 지난 3월부터 매월 진행해온 일곱 번째 반미월례집회, ‘미군철수! 평화협정 실현!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 미국규탄대회’를 진행했다. [사진제공-미국규탄대회 준비모임]
   
▲ ‘미군철수! 평화협정 실현!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 미국규탄대회’ 참가자들. [사진제공-미국규탄대회 준비모임]

다행히 태풍 콩레이의 영향에서 벗어난 6일 오후 맑은 날씨 속에 오후 4시부터 200여명의 참가자들은 지난 3월부터 매월 진행해온 일곱 번째 반미월례집회, ‘미군철수! 평화협정 실현!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 미국규탄대회’를 진행했다.

‘대북적대정책 철회! 경제제재 해제! 판문점선언 이행 방해·내정간섭 중단!’을 주요 구호로 제시한 이번 대회에서 참가자들은 ‘4.27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적극 이행하고 민족자주를 실현하기 위해 미국의 개입과 간섭, 방해를 철저히 배격하고 반미자주 구호를 더욱 높이 들 것을 결의했다.

   
▲ 배종렬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은 ‘북을 고립·압살하려는 미국에 맞서 승리하는 길은 민족공조와 민족대단결에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제공-미국규탄대회 준비모임]
   
▲ 지창영 평화협정운동본부 집행위원장은 ‘민족의 밝은 미래를 위해 힘차게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사진제공-미국규탄대회 준비모임]

전농 전 의장을 역임한 범민련 남측본부 배종렬 고문은 첫 번째 발언에 나서 “북을 고립·압살하려는 미국에 맞서 승리하는 길은 민족공조와 민족대단결에 있다”며 “더 큰 단결을 위해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의 노동자 민중의 참여가 가장 우선”이라고 말하고, 미국규탄대회에 민주노총과 전농을 비롯한 각계의 참여를 호소했다.

이어 “휴전협정 제4조 60항의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해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내 대표를 파견, 고위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한반도에서 외국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을 협의할 것’이라는 조항을 지적한 뒤, 이를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은 미국이라며 미국은 지금 즉시 ‘평화협정 체결’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협정운동본부 지창영 집행위원장은 ‘우리 민족문제에 사사건건 방해와 훼방을 놓고 있는 미국의 행태’를 하나하나 지적하고, “양 정상이 백두산 정상에서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을 높이 치켜들고 민족의 밝은 미래를 제시한 모습이야말로 외세를 배제한 우리 민족의 완전한 민족자주의 실현”이라고 감격해했다.

“제국주의 나라가 스스로 대화에 나서는 경우는 없었다”고 일갈하고, “우리 민족의 통일의지와 노력이 불가항력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핵추진 엔진을 달고 자강이라는 철판을 두른 자주통일의 기관차가 힘차게 출발했기 때문”이라며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고 나온 힘의 원천은 바로 조선의 핵무력 완성에 있으며 작년 11월 29일 화성-15호 발사 성공과 핵무력완성이 이룩된 역사적인 날을 전후로 바뀐 미국의 태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백두산 정상에서 두 정상이 손을 맞잡은 것처럼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치면 못 해낼 일이 없다”며 “민족의 밝은 미래를 위해 힘차게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 참가자들은 구호판을 내세우며 요구사항을 외쳤다. [사진제공-미국규탄대회 준비모임]
   
▲ 노래극단 희망새를 비롯해 민중민주당 학생위원회, 민대협 소속 대학생들의 율동과 노래공연이 진행되었다. [사진제공-미국규탄대회 준비모임]

‘한미동맹 폐기! 주한미군 철수!’ 발언을 한 민대협 대학생은 “9월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로 채택한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에서 밝힌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고, 비무장지대 안에 감시초소(GP)를 전부 철수하기 위해 시범적 조치를 하기로한 우리 민족의 합의’에 미국은 어깃장을 놓고 있다”고 지적하고 “신임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내정된 로버트 에이브람스가 유엔사의 관할·판단하에 집행 및 감독하겠다는 망언은 미국의 허락을 받으라는 명령”이라며 “제 나라의 민족 문제를 제3자의 동의를 받아서 풀어나가는 주권국가는 없다”고 일갈했다.

이어 “미국이 우리 민족문제에 개입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며 “북미간의 문제를 남북관계와 억지로 연관시켜서 남북 상호간에 합의를 이행하는 문제에 개입하지 말고 북미간의 합의나 잘 이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참가자들은 미국 대사관을 향해 함성을 질렀다. [사진제공-미국규탄대회 준비모임]
   
▲ 평화협정운동본부 이적 상임대표, 범민련 서울연합 노수희 의장이 미대사관측에 서한을 전달했다. 경찰은 참가자들의 대사관 진입을 막았다. [사진제공-미국규탄대회 준비모임]

민중민주당 학생위원회, 민대협 소속 대학생들의 율동공연이 진행되었으며 노래극단 희망새도 북녘노래와 우리 민요를 부르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대회의 마지막 순서로 미국에게 보내는 서한이 낭독되었으며 평화협정운동본부 이적 상임대표와 범민련 서울연합 노수희 의장이 미대사관측에 서한을 전달했다.

대표단들과 참가자들이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미대사관 쪽으로 행진하자 경찰이 이를 제지하기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구호와 함성을 외치며 미국에 대한 규탄을 이어갔다.

참가자들은 8차 반미월례집회를 오는 11월 3일 오후 4시 미대사관 앞에서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7차 반미월례집회를 마무리했다.

 

[미국에게 보내는 서한(전문)]
미국은 대북제재 중단하고,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정착 실현을 위해 적극 나서라!!!

지난 9월 18-20일 평양에서 제5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9월 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번 평양공동선언에서는 남북관계를 더욱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고,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안전지대로 만들기로 하였다. 무엇보다 남북관계 발전을 통일로 실현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노력을 벌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경의선, 동해선 도로 철도연결과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정상화,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등 남북 교류협력사업을 전면적으로 벌여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번 유엔총회를 계기로 조미의 외교수장들의 접촉이 있었고, 귀국의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10월 7일 네 번째 방북이 예정되어 있으며, 조미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이렇듯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정착에 대한 조미 사이의 대화와 접촉이 다시금 활발해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종전선언 등 한반도 평화정착에 적극적인 의사를 보이고 있지 않으며, 조미 사이의 신뢰관계 구축의 우선적 조치인 대북제재를 해제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일방적으로 조선의 비핵화를 요구하거나, 여전히 대북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이 평양공동선언의 합의에 따라 남북관계 발전과 우리민족끼리 조국통일 실현에 방해하지 말고 내정간섭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조미 사이의 대화와 협상에 적극 나서 한반도를 평화의 땅으로 만들고 한반도 평화정착에 적극 나설 것을 요구한다. 우리 민족의 문제는 우리 민족이 주인이 되어 풀어갈 것이다. 우리는 민족자주권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 적극 투쟁할 것임을 천명하며 다음과 같이 미국에게 요구한다.

1. 미국은 우리 민족의 문제에 방해하지 말고, 내정간섭을 즉각 중단하라!

남북은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 또한 조미정상회담에서 판문점선언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남북관계 발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끊임없이 한반도에서 내정간섭을 벌이고 있다. 주한미군 사령관 지명자가 평양공동선언의 합의사항인 휴전선 내 GP 철수에 대해 문제를 걸고 드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제라도 미국은 우리 민족에 대한 부당한 개입과 간섭을 중단해야 한다.

2. 미국은 대조선적대정책과 경제제제를 완전 중단하라!

미국은 6.12 조미공동성명 합의에 위배되는 대조선 적대정책과 경제제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번 평양공동선언의 합의사항인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정상화는 미국이 대조선제제를 풀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다. 미국이 대조선 제재를 지속한다면 남북관계 발전에 중대한 장애가 조성될 수 밖에 없다. 또한 대조선제제가 지속된다면 조선과의 신뢰관계가 구축될 수 없으며, 한반도 비핵화가 성과적으로 진행되지 못할 것이다. 미국은 남북관계 발전과 조선과의 신뢰관계 구축을 위해 대조선 적대정책과 경제제제를 완전 중단해야 한다.

3. 미국은 종전선언을 시작으로 평화협정 체결 등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해 적극 나서라!

6.12 조미공동성명에서 미국은 조선과 전 세계에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해 적극 나서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이 예정되어 있으며 제2차 조미정상회담을 약속되어 있다. 이번 조선과의 대화와 접촉을 통해 반드시 종전선언을 시작으로 평화협정 체결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혀야 한다.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비핵화 실현을 위해서는 한반도 평화정착은 선결적 과제이다.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정착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대화와 접촉을 지속될 수 없으며, 언제든 한반도는 군사적 긴장이 다시 높아질 수 있다. 미국은 조선의 비핵화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정착을 즉각 나서야 한다.

4.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즉각 폐기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한다.

미국은 불평등한 한미동맹을 통해 한반도 이남에서 온갖 범죄와 패악질을 부리고 최상의 특권을 누리며, 동북아에서 정치군사적 영향력를 확대 강화해왔다. 예속적인 한미동맹으로 인해 한국은 자주국가로 설 수 없었으며, 미국의 부당한 요구를 조공 받치듯 모두 수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다. 이미, 6.12 조미공동성명이 발표되었고, 제2차 조미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한반도는 이제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한미관계는 여전히 냉전시대에 머물러 있고, 예속적 한미동맹이 지속되고 있다. 우리민족끼리 통일과 공동번영을 가로막고, 조미공동성명과도 공존할 수 없는 예속적 한미동맹은 반드시 청산되어야 한다. 이제 미국은 한미동맹의 근간이 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스스로 폐기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한다.

2018년 10월 6일
미국규탄대회 준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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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매우 생산적 담화, 서로 충분히 이해하고 의견 교환"

북한 매체 폼페이오 4차 방북 직후 긍정적 보도 내놔

18.10.08 08:39l최종 업데이트 18.10.08 10:07l

 

 북한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7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동 사실을 알렸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오후 5시20분께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김 위원장과의 만남을 담은 사진을 공개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평양을 잘 방문해 김 위원장과 만났다"며 "우리는 (올해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것들에 계속 진전을 이뤄갈 것"이라고 말했다. [폼페이오 장관 트위터 캡처]
▲  북한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7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동 사실을 알렸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오후 5시20분께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김 위원장과의 만남을 담은 사진을 공개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평양을 잘 방문해 김 위원장과 만났다"며 "우리는 (올해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것들에 계속 진전을 이뤄갈 것"이라고 말했다. [폼페이오 장관 트위터 캡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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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장관의 4차 방북 비핵화협상 결과에 대해 북한 쪽에서도 즉각 긍정적 평가가 나왔다. "매우 생산적이고 훌륭한 담화",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평가를 전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8일 오전 김 위원장이 폼페이오 장관을 접견한 소식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폼페이오 장관을 만난 김 위원장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김 위원장은 폼페이오 장관을 "역사적인 조미수뇌상봉(북미정상회담)과 두 나라 사이의 관계발전을 위하여 여러 차례 평양을 래왕(왕래)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대하여 높이 평가했다"고 이 보도는 전했다.

이어진 접견에서 김 위원장은 싱가포르 6.12 북미공동성명이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했고 "진심어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시했다. 이 보도는 김 위원장이 "예정된 제2차 조미수뇌회담을 계기로 전 세계의 초미의 관심사로 되는 문제해결과 지난 회담에서 제시한 목표달성에서 반드시 큰 전진이 이룩될 것이라는 의지와 확신을 표명"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과 폼페이오 장관은 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 방침뿐 아니라 그 절차와 방법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매우 생산적이고 훌륭한 담화를 진행하면서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게 된 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며 만족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이어 함께 오찬을 한 뒤 폼페이오 장관과 작별하면서 김 위원장은 "양국 최고 수뇌들 사이의 튼튼한 신뢰에 기초하고 있는 조미 사이의 대화와 협상이 앞으로도 계속 훌륭히 이어져나갈 것"이라며 "조만간 제2차 조미수뇌회담과 관련한 훌륭한 계획이 마련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 보도는 북한 매체로선 김 위원장과 폼페이오 장관의 만남을 상세히 보도한 편이고, 김 위원장의 긍정적인 평가를 반복해 실었다는 점에서 이번 협상에 대한 북한의 환영입장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난 8월 폼페이오 장관의 3차 방북 직후 북한 외무성은 미국이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 나왔다"고 담화를 냈고 북한 매체들은 비난 보도를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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