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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청산’ 제대로 됐더라면 박근혜, 대통령 못됐을 것”

 

[이영광의 발로GO 인터뷰 83] 심인보 뉴스타파 기자이영광 기자  |  kwang3830@hanmail.net
 

지난해 독립언론 <뉴스타파>에서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친일파 후손들의 삶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4부작 ‘친일과 망각’을 방송했다. 당시 유튜브 조회 수 13만 회를 넘길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이에 부응해서일까? 1년이 지난 8월 7일 이 다큐멘터리가 책으로 출간되었다.

책에는 방송에서 담지 못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다큐멘터리가 평면적이었다면 책은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출간 뒷이야기가 궁금하여 지난 22일 서울 정동에 위치한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심인보 기자를 만났다.

심 기자는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기대 이상으로 책이 잘 팔리고 있다”면서 “지난해 방송을 했을 때 상당히 많은 분이 보셨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못 보신 분이 많은 것 같고 방송을 보셨던 분이라도 책과 다큐멘터리는 다르다고 생각하셔서 책을 사시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고 반응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

다큐멘터리가 책으로 출간되는 건 이례적이다. 이에 심 기자는 “뉴스타파는 초창기부터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취재나 작업을 여러 번 해왔는데 그것들을 제대로 기록으로 남겨두지 못했다는 생각이 있었다. ‘친일과 망각’을 할 때는 처음부터 출판을 염두에 두고 기록을 충실히 하자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출간 배경을 설명했다.

더불어 심 기자는 “과거 70년 전에 역사가 뒤틀렸고 그로 인해 우리 사회에 셀 수 없이 많은 부정적인 효과가 누적되고, 그게 누적되어 만들어진 구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고통 받고 있다”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70년 전으로 돌아가 그걸 바로잡을 수는 물론 없지만 적어도 잊지는 말자”는 메시지를 책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다음은 심 기자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했다.

   
▲ <뉴스타파> 심인보 기자 ⓒ 이영광

- 지난해 방송된 다큐멘터리 ‘친일과 망각’을 1년이 지난 8월에 책으로 출간하셨어요. 열흘 정도 지났는데 반응은 어때요?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기대 이상으로 책이 잘 팔리고 있어요. 대형 온라인 서점에서 정치 사회 분야 5위권에 들어가는 정도입니다. 지난해 방송을 했을 때 상당히 많은 분이 보셨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못 보신 분이 많은가 봐요. 그리고 방송을 보셨던 분이라도 책과 다큐멘터리는 다르다고 생각하셔서 책을 사시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친일’은 일부 엘리트가.. ‘망각’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 주위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자영업 하는 제 중학교 동창이 책을 사서 읽고 하는 말이 이래요. ‘제목의 뜻을 생각해 봤는데 친일은 그걸 할 기회조차 엘리트들만 가져서 일부 엘리트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망각은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 같다.’고 해요. 제목을 지을 때 그런 의미까지 담은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면 저 자신보다 더 의미심장한 해석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책을 읽고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지 물어요.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에 후원하라고 했어요. 다음 날 물어보니 후원을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가 지난해에도 방송을 통해 그런 메시지를 내보내긴 했지만,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아 역사가 비뚤어지고 가치가 전도된 것에 대한 분노나 울분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고 그런 부분 때문에 저희 책에 반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책은 처음부터 생각한 건가요?

“뉴스타파는 초창기부터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취재나 작업을 여러 번 해왔는데 그것들을 제대로 기록으로 남겨두지 못했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2013년과 올해 보도했던 조세도피처 연속 보도나 2014년에 했던 원전 마피아 같은 보도요. 이런 것들을 책으로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동안은 취재할 때 너무 힘들기도 하고 취재가 끝나면 곧이어 다른 프로젝트를 해야 하니까 못했어요. 그래서 ‘친일과 망각’을 할 때는 처음부터 출판을 염두에 두고 기록을 충실히 하자는 공감대가 저희 사이에 있었어요. 사실 책은 지난해 말까지 출간하는 게 목표였어요. 그러나 1년이 지나 나오게 됐는데 그건 김용진 대표의 책임이 큽니다(웃음),”

- 그냥 취재하는 것과 출간을 염두에 두고 취재하는 건 다를 것 같아요.

“많이 다르더라고요. 저는 처음부터 방송기자였고 그렇기 때문에 취재를 할 때 항상 화면을 먼저 생각하거든요. 방송에서는 아무리 팩트가 의미 있어도 그림이 약한 부분은 비중이 줄어들고 팩트는 덜 중요해도 그림이 좋으면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책은 그림에 구애받음이 없잖아요.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충분히 쓸 수 있고 제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부분은 그에 맞춰 쓸 수 있죠. 책을 쓴다는 게 훨씬 제약이 적고 자유롭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겠더라고요. 처음이라 아쉬움이 있는데 다음에 한 번 더 책을 쓰면 더 잘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다큐멘터리와 책의 차이점 중 하나는 책엔 배경까지 설명할 수 있다는 것 같아요.

“맞아요. 다큐멘터리는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과 소리를 먼저 생각하거든요. 책은 그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게 하나 있죠. 또 하나 다큐멘터리, 동영상을 만들 때는 시청자를 상당히 수동적인 존재로 가정해서 쉽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요. 저는 KBS 출신인데, KBS 같은 경우는 공영방송인 만큼 더더욱 그래요. 처음 입사해서 교육받을 때 ‘네 리포트를 중학교 2학년이 봐서 이해할 수 있겠냐 없겠냐? 만약에 이해를 못 한다면 네가 리포트를 잘못 쓴 거다.’라고 얘기할 정도거든요. 물론 뉴스타파에 온 뒤에는 그런 부분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졌지만 그래도 다큐멘터리는 수동적인 시청자를 전제로 만들기 때문에 제약이 많아요.

그러나 책은 그보다는 훨씬 더 능동적이고 배경지식이 많은 독자를 전제로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 정도 이야기를 해도 책의 독자들은 더 잘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책이라는 장르가 훨씬 더 표현의 범위가 넓고 제약이 적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 <친일과 망각> 표지

“‘친일청산’ 제대로 됐더라면 박근혜, 대통령 못됐을 것”
“재벌위주 경제구조‧보수일색 정치 구도.. 친일 미청산 산물”

- 들어가기를 보니 ‘만약’이란 가정에 대한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친일 청산이 안 된 나비효과가 지금까지도 있다는 것 다시금 느낄 수 있는 대목 같아요.

“그렇죠. 책에도 그 얘기가 나오지만,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었더라면 당장 현재 대통령은 박근혜 씨가 아니겠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만주군 경력이 있기 때문에 합당한 정도의 친일청산이 이뤄졌다면 사형까지는 아니겠지만, 공민권이 박탈되었든지 아니면 최소한 해방된 한국의 군대에서 고위 장교를 지낼 수는 없었겠죠.

그런데 이런 건 오히려 지엽 말단적인 얘기일 수 있어요. 가장 중요한 건 저희가 지난 프로그램에서도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가치가 전도된 것이죠. 민족과 사회 공동체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 이분들은 물론 당대에는 보상받기 어렵겠다는 걸 상당 부분 알고 감수했을 거라고 봐요, 하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자기 후손들이 제대로 못 배우고 못 먹고 못 입으며 어렵게 살리라고는 그분들도 생각 못 했을 거예요. 거꾸로 민족을 배신하고 외세에 빌 빌붙었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계속해서 잘 나가고 권력을 차지하고 있죠. 이런 현실에서 만약 우리 공동체가 미래에 다시 위기에 처한다면 누가 선뜻 희생하려고 나설까요.

현실적인 문제도 있어요. 지금 이 나라의 현실에서 누가 과연 권력을 가지고 있고 사회자원을 차지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 이것 역시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지금 형성돼있는 재벌 위주의 경제구조라든지 보수 일색의 정치 구조라든지 이 모든 것들이 친일 청산이라는 첫 단추가 잘 못 끼워지면서 여기까지 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친일청산 열망.. 반민특위 습격‧프락치 사건 일으켜 좌절시켜”

- 제헌 의회에서 제정되었던 ‘반민족 행위 처벌’의 과정과 그로 인한 반민특위 구성에서 해체까지가 책에 나오잖아요. 그걸 조사하시면서 느끼는 것도 있을 것 같아요.

“저희 책에 1948년 당시 의회 속기록에서 발췌한 의원들의 발언이 나옵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당시에야 친일파 청산에 대한 민중적인 의지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나 미군정 때문에 친일 청산이 되지 않았고 그 상태로 3년이 그냥 흘러가 버렸어요. 48년 의회 속기록을 보면 그 3년이라는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청산에 대한 열망이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또 한 가지 그 당시에 의회를 수립하기 위한 총선거가 있었는데 그 총선거에 지금으로 봤을 때 왼쪽에 있거나 중도에 있는 사람들이 대거 불참해서 보수 일색의 의회가 꾸려졌습니다. 그런데 그 보수 일색의 의회에서조차 친일청산이라는 대의에 대해서 그 누구도 딴지를 걸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던 거예요. 이건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친일파 청산에 대한 열망이 엄청 높았다는 걸 입증하는 거로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게 높았던 친일청산에 대한 열망을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프락치 사건을 일으키는 등 정치적으로 공격하면서 완전히 좌절시킨 것이잖아요, 정말로 저는 이 장면이, 이승만 대통령의 여러 가지 과오 가운데서도 민족사적으로 보면 한두 손가락에 안에 드는 과오가 아닐까 생각해요, 피눈물 나는 장면인 것 같아요.”

   

“친일파 청산, 역사적 책무 완수 못해.. 왜곡된 역사의식 키워”

- 후손들에게 편지를 보내셨잖아요.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했겠지만 실제로 답장을 받으셨을 땐 착잡하셨을 것 같아요.

“‘그렇게 오래된 일을 나에게 왜 묻느냐?’는 반응이 가장 많았어요. 그 정도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반응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서 ‘우리 할아버지 정말 훌륭한 분이다. 당신이 몰라서 그런 거고 우리 할아버지를 친일파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진보정권의 정치적인 의도에 따른 공격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앞서 하셨던 질문과 이어지는 건데 우리가 친일 청산을 해야 했던 시점에 못했기 때문에 이들이 왜곡된 역사의식을 가지고도 그동안 아무 문제없이 살아올 수 있었던 거죠. 아무도 그 사람에게 ‘너희 할아버지가 친일파로 민족을 배신한 사람이었어’라고 얘기를 안 해준 거예요. 제대로 된 사회였다면 그들에게 사회나 학교 혹은 정부가 공식적인 작업을 통해서라도 얘기를 해줬어야 해요. 그래서 그들도 그 사실을 깊이 알고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서, 물론 본인이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자신의 개인사와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어야 해요.

그런데 그런 고민 전혀 없이 ‘우리 조상은 훌륭한 분이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여기까지 왔고 모두 나와 내 집안이 잘나서 그런 거다’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너무 부끄러운 일이고 비극적인 일인 거죠. 우리 사회가 주어진 역사적인 책무를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서 씁쓸했어요.”

- 방송이 나간 후 연락이 온 경우도 있나요?

“네. 저희 책 에필로그에도 나오는데 의외로 취재 과정에서는 저희 취재에 반감을 표시했던 분들이 방송 전체를 보시고는 우호적인 반응으로 바뀐 분도 계세요. 자기들도 잘 몰랐고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 청산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방송을 보니 자기들도 그런 부분을 의식하고 역사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반응도 있었어요. 화를 낸 분은 없었어요. 왜냐면 화나신 분들은 아예 방송을 안 봤거나 봤어도 연락을 아예 안 하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여러 피드백을 받았는데 피드백만 놓고 보면 저희 방송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해 주지 않았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친일과 망각’으로 수상도 많이 하셨잖아요.

“네 감사하게도 여러 상을 받았습니다. 하나하나 모두 소중한 상이지만 특히 민족문제 연구소에서 주는 임종국 상을 받은 게 정말 기뻤어요. 임종국 선생은 아무도 감히 친일에 대해 얘기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깊은 망각의 어둠을 깨뜨린 분이에요. 혼자서 촛불 하나 들고서. 어찌 보면 우리 민족 전체가 해야 했을 일을 혼자서 감당하신 분이죠.

정부가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을 하거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임종국 선생의 선구적인 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고요, 비교하기는 민망하지만 저희가 지난해 했던 작업 같은 것 역시 임종국 선생님께 전적으로 빚지고 있죠. 그런 분의 이름을 걸고 주는 상을 받게 돼서 정말 기뻤습니다. 평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 얼마 전 문인협회가 친일파인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 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가 철회하는 일이 있었잖아요. 문인협회 이사장은 선대의 친일을 사죄한 문효치 씨잖아요, 심경이 복잡했을 것 같은데.

“문효치 이사장 같은 경우에 저희가 찾아가 인터뷰를 했을 때도 뭔가 내면세계가 복잡한 것 같더라고요, 시인이라서 그런지. 조상의 친일에 대해 그냥 심플하게 사죄하는 게 아니고 사죄가 나오기까지 이 분의 내면에서 굉장히 많은 고민과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지난해 저희 카메라 앞에서 사죄했는데 이 분이 갑자기 공인된 친일파인 춘원과 육당의 문학상을 제정한다고 해서 저희도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이걸 가지고 따로 문 이사장에게 연락을 해보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분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어요.

다만 문인협회 입장을 보면 ‘공과 과는 따로 얘기해야 하고 문학적인 공이 있기 때문에 상을 제정하는 것은 온당하다’인 것 같은데 그런 입장은 이미 이쪽 연구를 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오래전에 논박된 입장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 10대 궤변 가운데 두 번째가 바로 ‘공과론’이에요. 저는 당연히 문인협회의 결정이 원칙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 이사장이 사죄 이후 왜 그 같은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취재 보지 않아서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친일 미청산으로 인한 전도된 역사…취재 이어갈 것”

- ‘친일과 망각’에 대한 후속 보도를 계획하는 게 있나요?

“올해는 저희가 ‘훈장과 권력’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잖아요. 거기에 제가 참여한 건 아니지만, 박중석 선배는 참여했거든요. 박 선배 말로는 작년에 친일파 후손을 추적했던 작업과 이번에 훈장을 받은 친일파를 찾아내는 작업에서 겹치는 것도 상당히 많았고 새롭게 발견한 것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취재 결과들이 모두 친일파와 그 후손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로 뉴스타파 안에 쌓이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것을 바탕으로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해 전도된 역사, 뒤집힌 가치 등에 대한 취재는 앞으로도 계속해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친일과 망각’이 전하는 메시지.. 뒤틀린 역사 잊지 말자는 것”

-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잊지 말자는 거죠. 과거 70년 전에 역사가 뒤틀렸고 그로 인해 우리 사회에 셀 수 없이 많은 부정적인 효과가 누적되고, 그게 누적되어 만들어진 구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고통받고 있잖아요. 물론 타임머신을 타고 70년 전으로 돌아가 그걸 바로잡을 수는 물론 없어요. 그러나 적어도 잊지는 말아야죠. 기억하고 있어야만 바로 잡을 기회가 생기니까요.”

-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주세요.

“저희 뉴스타파가 ‘친일과 망각’, ‘훈장과 권력’ 등의 프로젝트를 계속 해왔잖아요. 그 이유는 우선 저희가 왜곡된 근현대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른 언론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 주신 것은 역시 후원회원들이세요. 진실의 수호자들이신 뉴스타파의 3만 9천 후원 회원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 앞으로도 뉴스타파가 근현대사를 바로잡기 위한 작업을 계속해 나갈 텐데 거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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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얘기에 울컥하던 당원들 집권 위해 '탄핵' 추미애도 끌어안다

 

당심·민심 압승으로 더민주 대표 당선, 대선 경선관리·중도층 공략이 숙제

16.08.27 21:41l최종 업데이트 16.08.27 21:49l
▲ "축하해요" "고마워요" 추미애의 인사법 27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2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신임 당대표로 선출된 추미애 후보가 축하인사 건넨 유은혜 후보를 와락 껴안고 있다. ⓒ 남소연
반전은 없었다.

더불어민주당 8.27전당대회에서 추미애 의원이 새 당대표로 당선됐다. 당 주류의 지원을 받은 추 신임대표는 대의원, 권리당원 득표에서 모두 과반 이상을 확보했고, 일반당원과 국민 여론조사에서도 45%의 지지를 받아 최종 54% 득표로 김상곤 후보(22%)와 이종걸 후보(24%)를 압도했다. 당심과 민심 모두의 선택을 받은 결과다.  

추 대표의 당선으로 당 주류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질 전망이다. 이날 당대표뿐 아니라 여성(양향자), 청년(김병관) 등 부분최고위원 역시 주류 측 인사가 당선됐고, 호선으로 뽑힌 5명의 권역별 최고위원 대부분 주류 측 인사로 채워졌다. 결과적으로 주류가 주도권을 확보하며 당은 안정되겠지만, 내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당의 역동성이 떨어지는 숙제를 안게 됐다. 

'주류 지도부', 대의원 압도한 권리당원 힘

애초 이번 전당대회는 뚜렷한 변수가 없는 경선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지난 총선에서 야권 분열로 참패할 것이라는 예측을 깨고 더민주가 원내 1당이 되면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안정됐고, 대다수 비주류 인사들이 국민의당으로 떠난 상태였다. 예비경선에서 유력 주자였던 송영길 의원이 컷오프 되며 파장이 일었지만 '추미애 대세론'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 경선에서 확인된 것은 권리당원의 '힘'이다. 모든 경선에서 다수의 권리당원 지지를 확보한 후보들이 당선됐고, 서울시당위원장과 여성최고위원의 경우 대의원 득표가 많았던 후보가 권리당원 득표에서 뒤처지며 종합득표에서 역전을 당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지난해 연말 대거 입당한 온라인 당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결정적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추 대표 역시 권리당원 투표에서 61.6%를 득표했다. 역시 당 주류 후보로 분류됐던 김상곤 후보는 20.2%, 비주류 결집을 노렸던 이종걸 후보는 18%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권리당원 가운데 문재인 전 대표 지지 성향이 뚜렷한 온라인 당원들이 당 주류와 보조를 맞춘 추 대표에게 확실한 지지를 보냈다는 게 당 안팎의 분석이다. 

하지만 이러한 온라인 당원의 선택은 추 대표의 이력을 살펴보면 쉽게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한 추 대표는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본부장'을 맡았다. 2003년 노 전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는 특사로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후 열린우리당이 창당하고 민주당에 남은 추 대표는 지난 2004년 3월 노 전 대통령 탄핵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하지만 탄핵안 가결 후 여론의 역풍이 불자 추 대표는 속죄 의미로 '삼보일배'를 했고, 그해 총선에서 민주당은 참패했다. 이로 인해 노 전 대통령 지지층과는 씻기 어려운 앙금이 생겼다.
▲ 5선 추미애, 더민주 당대표 당선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신임 대표가 27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2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추 대표는 2008년 18대 총선으로 국회에 복귀하기 전부터 이 부분에 대해 지속적으로 사과나 유감을 표명했지만, 이번 전대에서 다른 후보들은 이 지점을 적극 공략했다. 당시 탄핵에 반대하는 대학교수 모임을 이끌었던 김상곤 후보는 "당대표는 순간에 오판과 독선으로 당을 망칠 수 있다, 그런 전력을 가진 분이 당대표를 제대로 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고, 이종걸 후보도 "탄핵에 가담한 리더가 어찌 당대표를 맡을 수 있겠나"라고 공세를 폈다. 

그러나 지난해 문재인 대표가 추 대표를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기용하면서 이러한 약점을 상쇄할 기회를 얻게 됐다. 안철수 의원 등 비주류의 탈당 러시 속에서 추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문 전 대표 옆을 지켰고, 이후에도 국민의당을 겨냥해 "분열주의자"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대립각을 보였다. 당의 핵심관계자는 "추 의원의 당권 도전 준비는 최고위원 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추 대표는 경선 과정에서도 "노 전 대통령에게 진 빚, 당 대표가 돼 대선 승리로 갚겠다"라며 주류에 어필했고, 친노·친문 성향의 당원들도 그런 추 대표에게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었다. 추미애 캠프의 관계자는 "친노·친문이 추 대표를 선택한 게 아니라 당원들이 선택한 것"이라며 "경선 내내 친문이라는 공격을 받았지만, 경선을 통해 드러난 당심과 민심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당권은 안정됐지만 대선후보 경선은?

그러나 전대에서 표출된 다수 당원의 절대적 지지는 앞으로 추미애 지도부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당대표, 부문최고위원, 권역별최고위원 경선 모두에서 주류의 지지를 받은 후보들이 당선되면서 내년 대선 경선 결과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문재인 전 대표에 기운 당심이 확인된 상황에서 다른 후보들이 경선에 도전할 수 있겠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당의 한 관계자는 주류 중심의 지도부 구성을 놓고 "아무리 공정한 룰을 만들더라도 구도 자체가 너무 원사이드(일방적)하다는 것이 나타났기 때문에 유력 대선 주자들의 입지가 극도로 좁아졌다"며 "이런 측면에서 대선후보 경선의 '공정성'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문 후보에게 '경선 페널티'를 줘야 공정하다는 얘기가 나올 판"이라고 덧붙였다.

주류 내부에서도 추미애 지도부의 앞날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친문 성향의 한 초선의원은 "추 대표가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경선룰을 만들 리는 만무하지만, 어떤 룰을 내놓더라도 보수언론이나 당 밖에서 불공정 시비를 걸며 흔들 수 있다"라며 "그러면 문 전 대표가 경선을 통과하더라도 본선 경쟁력이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축하해요" "고마워요" 추미애의 인사법 27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2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신임 당대표로 선출된 추미애 후보가 축하인사 건넨 유은혜 후보를 와락 껴안고 있다. 오른쪽은 아쉽게 탈락한 김상곤 이종걸 후보. ⓒ 남소연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당이 또 한 번 갈라지는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한 비주류 의원은 "이 당에 조금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발붙일 수 없다는 걸 확인한 느낌"이라며 "대선후보 경선마저 이런 식으로 간다면 정권교체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정해진 패배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추 대표 역시 이러한 우려를 의식하는 모습이다. 그는 당대표 수락연설에서 김부겸, 박원순, 손학규, 문재인, 안희정, 이재명 등 당의 유력 대선후보들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공정한 대선경선, 반드시 중심잡고 지키겠다, 모두 함께 모셔서 공정하고 깨끗한 경선, 우리 정당사에 길이 남을 역동적인 경선을 우리 함께 만들어내자"라고 말했다. 

차가운 더민주, 뜨겁게 변할까?

추 대표가 '강한 야당'을 강조하면서 정부여당을 향한 더민주의 자세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그동안 김종인 대표는 여야가 충돌하는 각종 현안에서도 '중도 노선'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추 대표가 전대 캠페인에서 "2012년 대선은 국정원과 국군사이버사령부가 개입한 관권선거"라고 주장하며 '선명성'을 강조한 만큼 보다 강경한 대여투쟁 노선으로 돌아설 것으로 보인다. 

추 대표는 이날 수락연설에서도 "대통령이 국민이 가라는 길을 외면하고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호히 맞서겠다"라며 "고난과 어떠한 탄압이 있더라도 그 길을 가야 선명하고 강한 야당이 되는 것 아니냐, 그래야 수권정당 가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세월호 특별법 개정, 사드 배치,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청문회, 신임 장관 청문회 등에서 여야 대치가 날카로워질 전망이다.  

추 대표가 이러한 강경 기조로 나올 경우 기존의 중도 노선을 지켜야 한다는 당내 목소리와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물러난 김종인 대표는 전당대회 인사말에서 "종전의 낡은 정당문화를 버리고 민의를 수용하는 새로운 정당이 될 때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고, 집권의 길이 열릴 것"이라며 새 지도부의 강경 기조에 우회적인 반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한 핵심당직자는 "추 대표가 기존의 노선을 180도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각종 현안에는 이미 우상호 원내대표가 주도권을 쥐고 결정해 온 만큼 두 사람 사이의 의견 조율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추 대표 역시 강경 일변도로 갈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라며 "선명히 맞설 것은 맞서고 타협할 것은 타협하는 모습을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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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역사평화기행을 다녀와서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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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6/08/28 08:54
  • 수정일
    2016/08/28 08:5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동아시아 상생을 꿈꾸며<기행문> 백두산역사평화기행을 다녀와서
이재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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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26  1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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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부산 동아중학교 3학년)
 

모든 것이 만주에서 시작되었고 만주에서 끝을 맺었다

   
▲ 지난 19~23일 끝없이 펼쳐진 만주벌판을 버스를 이용해 달렸다. 사진은 백두산에서 내려다본 숲의 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우리가 여행을 떠난 곳은 중국 중에서도 동북3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지역이다. 대련을 시작으로 여순, 단동, 집안, 통화, 이도백하, 백두산, 용정, 화룡, 연길, 목단강에 이르는 이번 여행은 그야말로 남만주 지역을 횡단하는 대여정이었다.

우리 민족은 이곳을 만주땅, 그리운 만주벌판이라고 불러왔다. 바로 이 땅에서 단군이 조선을 세웠고,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것이다. 불과 백 년 전에는 독립군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만주에서 시작되었고 만주에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만주의 중요성은 오늘날 다시 부각되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옛 역사를 찾기 위해 만주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흘러간 역사를 통해 지금의 우리를 확인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얘기에 앞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해봐야 한다. 이것은 한민족만의 문제가 아니요,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 모든 국가들이 가져야 할 고민인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는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다. 그 분쟁은 단순한 영토분쟁이 아니라 역사분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선 서로의 이해관계도 중요하지만 역사에 대한 반성과 이해가 더더욱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는 전혀 이러한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 일본은 걸핏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교과서를 왜곡한다. 중국은 동북공정, 서남공정, 서북공정 등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역사의식은 매우 형편없는 수준이다.

자기네 역사를 기피하는 민족은 영원히 그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고로, 동아시아 3국(한ㆍ중ㆍ일)이 진정한 이웃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이러한 역사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첫날, 두 가지 분노를 느끼다

   
▲ 19일 대련에 도착한 기행단은 여순감옥을 첫 행선지로 택했다. 4박 5일동안 우리 일행을 안내해 준 이경옥 선생이 안중근 의사가 갇혀있던 독방을 가리키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우리가 처음 향한 곳은 여순감옥이었다. 여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 이회영 선생, 신채호 선생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수많은 항일투사들이 돌아가셨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관동법원에서 재판을 받으면서도 항상 떳떳했다. “나는 한 개인의 자격으로 이등박문을 쏜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국의 수상을 암살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테러범이 아닌 만국공법상의 전쟁포로로 대해져야 한다.” 안중근은 죽는 그 순간까지 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 안중근은 개인의 자격이 아닌 대한 독립군의 자격으로 전쟁을 한 것이다. 안중근의 재판을 지켜보던 기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안중근의 논리 정연한 언변에 이등박문이 한낱 파렴치한 늙은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 여순감옥은 안중근 의사의 감옥생활과 순국 장면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안중근이 감옥에서 집필하다가 빠른 사형집행으로 마저 쓰지 못한 <동양평화론>이란 책이 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동아시아의 평화, 한-중-일이 진정한 이웃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나는 이 서슬퍼런 여순감옥의 창살을 어루만지며 이제는 우리가, 그의 뜻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순감옥에서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우리는 일본관동법원으로 향했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은 역사적인 현장인 것이다.

일본은 만주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해왔다. 가장 먼저 한 것이 역사연구. 일본은 전문가들을 보내 이 지역의 역사를 철저히 연구했다. 그들이 주목했던 것은 발해사. 발해가 가장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유적은 물론이요, 수많은 유적을 답사했다.

우리는 기억한다. 일본이 조선을 병탄할 때, 조선과 일본은 하나이기 때문에 합쳐져야 한다는 내선일체론을 말이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할 때에도 똑같은 방법을 썼다. 그것이 바로 만선사관(滿鮮史觀)이다. 만주와 조선은 하나의 역사공동체라는 것이다. 물론 만주와 조선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그것이 침략의 용도로 쓰였다는 점에서 일본의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철저한 역사연구를 마친 뒤 만주를 침략한다. 만선사관을 내세우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만주사변’ 혹은 ‘9.18사변’이다. 아직도 만주는 이 비극을 기억하기 위해 9월 18일 9시 18분이 되면 사이렌을 울린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초콜릿을 사먹으면서 연인들에게 고백하는 그 밸런타인데이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밸런타인데이는 기억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망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대중의 자각이 절실히 필요하다.

첫날부터 나는 두 가지 분노를 느꼈다. 첫째는 일제의 만행에 대한 뼈저린 분노였으며 둘째는 한국의 무지와 망각에 대한 분노였다. 나는 이 두 가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는 한 동아시아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주의 해는 빨리 졌다. 나는 분노를 삭이며 잠에 들었다.

“태왕 할아버지, 평안하십니까?”

   
▲ 광개토호태왕비. 4면이 유리로 둘러쌓여 있고,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고구려 환도산성에서 기행단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제공 - 박종만]

우리가 둘째날 향한 곳은 고구려 유적지였다. 환도산성, 광개토태왕비, 태왕릉, 장군총을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환도산성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의 방어성이다. 평소에는 국내성에 머무르다가 국가적 위기가 생기면 환도산성으로 가서 항전하는 것이다. 환도산성(丸都山城)은 ‘알맹이도시’라는 뜻이다. 풀어 해석하면 중심도시, 그야말로 환도산성은 고구려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채 환도산성은 견고히 남아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를 따라 환도산성의 성벽이 줄을 이었다. 나는 산성의 성돌 하나하나를 소중히 살폈다. 고국원왕의 원한이 내 몸 속으로 밀려드는 듯했다.

솔직히 나는 환도산성 아래 산성하 고분군을 기대했으나 공사가 한창이어서 들어가보지 못했다. 환도산성을 포함한 집안 지역의 고구려 유적지들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광개토태왕비는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령스러운 비석이다. 414년에 세워졌으니까 1600년 동안 부서지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있는 것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우리의 민족성과 어찌 이리 닮았을꼬.

   
▲ 장군총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사진제공 - 박종만]
   
▲ 태왕릉은 많이 훼손됐지만 위엄은 여전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태왕비에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태왕의 무덤인 태왕릉이 있다. 시간이 흘러감에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태왕릉의 위엄은 여전했다. 한 변이 66m에 달하니 과연 광개토태왕의 무덤다웠다. 나는 태왕릉의 돌방 앞에서 말했다. “태왕 할아버지, 평안하십니까?” 그리고 조용히 돌아섰다.

장군총의 주인에 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장수왕의 무덤이라는 설, 시조묘라는 설, 고국원왕의 무덤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다. 장군총의 무덤이 정확히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구려의 신령스러운 곳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고구려 무덤 중 가장 잘 보존이 되어있는 장군총. 그만큼 공들여 쌓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나마 외침을 덜 받은 것일까?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장군총이 기리기리 보존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민족통일의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 나는 부디 천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산신령께 빌었다. 전날까지 내리던 비가 그쳐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높였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셋째날이 밝았다. 우리는 드디어 여행의 궁극적 목표, 백두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으로 향하는 것이다.

환웅이 내려왔다는 태백산이 바로 백두산일까? 단군과 백두산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 백두산에 호랑이가 살까? 나는 상상력을 발휘해가며 백두산의 모습을 상상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백두산의 천지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부디 천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산신령께 빌었다.

굽이굽이 길을 봉고차로 올라가는데 그 밑으로 펼쳐지는 절경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 짙은 안개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내심 천지를 못 볼까봐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우리가 올라가니 안개가 걷히는 것이 아닌가!

   
▲ 천지를 보는 순간 나는 3일 간의 여정으로 인한 피로가 모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사진 - 이재원]
   
▲ 장엄한 백두산을 배경으로 장백폭포가 흰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사진 - 이재원]

천지를 보는 순간 나는 3일 간의 여정으로 인한 피로가 모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또 다른 세계였다. 천지는 어머니같은 존재였고, 우주였고, 만물의 근원이었다.

천지 물이 유일하게 흘러들어가는 곳이 장백폭포다. 그 장백폭포가 흘러 흘러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 강들이 또 서해바다, 동해바다, 오호츠크 해로 흘러갈 것이다.

우리네 마음도 저 천지로부터 흘러내려오는 강물처럼 변치 않고 흘러가면 좋을 텐데……. 백두산은 말하고 있었다. 민족통일의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저 선 만 넘으면 바로 북한 땅인데

   
▲ 용정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는 잘 복원돼 관람객들을 맞고 있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어머님,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두만강을 건너면 윤동주가 그리워했던 북간도가 나온다. 다른 이들에게 두만강은 그저 보통의 강일 수 있겠지만 우리 민족에겐 슬픔과 애환이 섞인 역사적인 강이다. 우리는 그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만강 다리는 주황색 부분과 파란색 부분이 있는데, 주황색 부분은 중국 땅이고 파란 색 부분은 북한 땅이라고 한다. 국경이라는 것이 이렇게 우습던 것이었나? 고작 선 몇 개 긋고 국경선이라고 적어 놓은 걸 국경이라고 하다니……. 저 선 만 넘으면 바로 북한 땅인데. 나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도문대교가 가로놓여 있다. 왼쪽 주황색 부분은 중국 도문시에 속하고 먼쪽 파란색 부분은 북한 남양시에 속한다. 오른쪽 두 번째가 필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참 맑았다.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안중근 의사는 아직 춤추며 노래 부르지 않으셨다. 민족통일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대한독립을 이루는 길이다.”

4박 5일 백두산 평화기행은 나에겐 매우 큰 경험이 되었다. 그것은 인식의 변화, 사물을 바라보는 눈의 변화였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고구려의 기상과 자부심, 독립전쟁사의 위대함과 참혹함, 민족통일에 대한 염원, 민족의 의미 등 다양한 것들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알찬 여행이었다.

여행은 여행을 떠나기 전의 준비과정과 여행,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 정리하는 모든 과정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도 여행의 한부분이다.

내일의 하늘은 오늘의 하늘보다는 더욱 화창하기를

   
▲ 용정 시내에 자리한 간도일본총영사관 옛터. 지금은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간도일본총영사관 옛터의 지하고문실. 당시의 상태를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동아시아의 평화는 우리가 반드시 이뤄야 할 숙제이다. 갈등과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모색할 때인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한-중-일의 역사의식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한-중-일은 공동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패권주의를 버리고 대국이면 대국처럼 행동해야 한다. 더 이상 동북공정 같은 유치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은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진정어린 속죄를 해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인 문제 이전에 인간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철저한 역사교육을 통해 역사의식을 고취시켜야 한다. 이것은 국수주의가 아니다. 우리의 생존과 동아시아 평화가 달린 문제이다.(한국은 동아시아평화의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 남북통일이 동아시아 평회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부디 동아시아에 하루빨리 평화가 오기를 바란다. 내일의 하늘은 오늘의 하늘보다는 더욱 화창하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동아시아의 상생을 꿈꾸며 2016. 8. 25

* 여행을 함께한 분들, 그리고 저를 믿어준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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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어디에도 미국사드 필요없다”

‘성주촛불’ 50일 앞두고 전국 57곳에 펼쳐진 사드반대 평화촛불
▲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의 제안으로 진행된 50지역 촛불문화제 왼쪽부터 서울, 성주, 제주.

“성주에서 시작된 촛불이 전국으로 번져 서울과 제주까지 닿았습니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미국사드는 필요없다’는 성주의 외침이 별이 되어 빛나고 있습니다.” 이재동 성주촛불 진행자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성주에서 사드철회 촛불이 타오른 지 45일째, 전국으로 퍼진 촛불은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 울산, 광주를 거쳐 제주의 밤하늘까지 밝혔다.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의 제안에 따라 26일 57개 지역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린 것. 특히 이날 성주촛불 상황이 곳곳마다 생중계돼 성주의 외침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 성주 촛불문화제 [사진출처 성주투쟁위]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성주포대가 최적지라던 정부가 ‘제3부지’를 내세운 것은 스스로 자기 주장의 허구성을 드러낸 것”이라며 “오늘의 촛불은 한미 당국에 맞서 온몸을 던져 싸우고 있는 성주와 김천 주민들에게 힘을 주고, 사드 한국배치 반대행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겠다는 다짐의 촛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 서울을 비롯한 인천, 대전, 광주, 대전, 대구, 부산, 울산등 광역시에 촛불이 타올랐다.

제3지대로 거론된 김천에선 롯데골프장 아래 농소면사무소 앞에 500여명이 모였다. 대구와 영주, 안동, 포항, 구미, 고령 등 대구·경북의 8개 지역에서도 촛불이 타올랐다.

매주 촛불을 밝혀오던 부산과 울산은 이날도 촛불을 밝혔다. 창원을 비롯한 마산, 진해, 김해, 양산, 밀양, 진주, 남해, 통영, 사천, 거창, 거제까지 경남은 가장 많은 촛불이 빛났다.

광주를 정점으로 무안, 나주, 목포, 순천, 여수, 영암, 광양, 화순, 완도, 장흥, 보성까지 전남에 쏟아진 폭우도 사드반대의 촛불을 끄진 못했다.

미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으로 알려진 제주 강정마을에도 ‘사드 반대’의 봉화가 올랐다. 제주도에까지 사드반대 촛불문화제가 진행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성주군민들은 뜨겁게 환호했다.

▲ 강정마을이 있는 제주도에도 촛불이 밝혀졌다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icon김천으로 번지는 ‘사드반대’ 촛불icon성주군민들 “우리는 까아~딱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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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논란…‘박정희가 짱이다’ 결론 정하고 논리 만들어”

 

[이영광의 발로GO 인터뷰 82] 심용환 역사&교육연구소 소장

이영광 기자  |  kwang3830@hanmail.net

 

 

지난 15일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올해를 ‘광복 71주년이자 건국 68주년’이라고 발언해 논란이 일었다. 새누리당은 이에 더해 건국절 법제화를 추진하면서 논란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사실 건국절 논란이나 법 제정 발의는 처음이 아니다. 건국절 주장은 2006년부터 꾸준히 있었고 18대에서 법도 발의됐다. 그러나 번번이 여론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다. 더구나 20대 국회는 여소야대다. 야당의 찬성이 없으면 법 통과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건국절을 꺼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역사전쟁> 저자인 심용환 역사&교육연구소 소장을 지난 22일 분당선 한티역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다.

심 소장은 건국절을 꺼낸 이유를 “4.13총선 이후에 정부의 힘이 많이 빠진 상태에서 남은 동안 자신들의 이슈를 달성해야 하는데 하나하나가 걸리는 상황이다. 때문에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한 사회적 논쟁거리로 이슈를 옮겨 붙게 하려고 건국절을 들고 나왔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나라의 3요소는 국민, 주권, 영토인데 1948년에야 다 갖춰졌고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은 때도 이때다”라는 보수층의 주장에 심 소장은 “이들은 ‘박정희가 짱이다’는 결론을 정하고 결론을 지키기 위해 논리를 만드는 거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반대편에 진을 빼기 위해 그때그때 논리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독립운동을 한 것과 나라를 세운 건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전희경 새누리당 의원의 주장에 대해서 심 소장은 카이로 회담 전에 당시 임시정부의 주석과 외무상이었던 김구와 조소앙이 장제스를 만나 조선의 즉각 독립을 요청한 예를 들어 “구분이 안 된다. 충칭 임시정부가 없었으면 카이로 회담의 의결 사항이 나올 수 없고 그러면 포츠담이나 모스크바 의결 사항은 없는 건데 왜 독립운동사와 우리나라 정부수립의 연관성이 없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뤼순이 아닌 하얼빈으로 말해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에 심 소장은 “헷갈릴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발언하는 자리라면 그 발언에 대해 문장을 검토하는 팀들이 있을 텐데 이들이 얼마나 우리나라 역사에 무지하고 역사의식이 없으면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냐는 거다”라고 한탄했다.

   
▲ 심용환 역사&교육연구소 소장 ⓒ 이영광 기자

다음은 심용환 역사&교육연구소 소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박정희’ 결론 두고 거꾸로 이야기 만드니 ‘건국절’ 무리한 오류 등장”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광복절에서 건국절을 언급해서 다시 논란인데 어떻게 보고 계세요?

“저는 건국절 논란이 커지게 된 게 안 커졌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요. 왜냐면 이게 작년 국정교과서 때처럼 이 이슈가 전면에 다뤄지는 상황이면 좋겠는데 그것이라기보다는 사드 등 4.13총선 이후에 정부의 힘이 많이 빠진 상태에서 남은 기간 자신들의 이슈를 달성해야 하는데 하나하나가 걸리는 상황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한 사회적 논쟁거리로 이슈를 옮겨 붙게 하는 거죠. 그래서 건국절을 들고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모든 이슈에 대해 건별로 대응하며 자칫 사드 문제라든지 박근혜 정부가 하려는 일을 저지해야 하는 데 노선이 흐트러뜨리는 것 같아 조금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조만간 국정교과서가 나올 거고 건국절을 얘기하냐 아니냐의 말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문제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먼저 들어요.

의도예요. 너무 집요해요. 일련의 과정을 보면 어떻게 해서라도 이 얘기를 해 나아가고 관철시키고 싶은 거죠. 최소한 교과서를 못 뜯어고치더라도 자기 지지층만큼은 이렇게 사고하도록 하고 싶어 하는 전략적이고 의도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게 있어요. 보통 건국절 얘기라면 이들이 친일파기 때문에 한다거나 독재를 했기 때문이라는 게 틀린 얘기는 아니에요. 그러나 이 사람들 사고는 거꾸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들은 ‘박정희가 짱이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박정희 유산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려면 그전에 누군가가 자유민주주의 기초를 만들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이승만이 등장하는 거죠.

사실 이 사람들은 박정희라는 그들이 정해놓은 결론을 두고 거꾸로 이야기를 만드니 무리한 논리적 오류로서 건국절이 등장하게 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시점에 건국절이 나온 건 정치적이죠. 이들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집요하게 관철 시키려고 하는 사람이죠. 오직 자신들의 존립 근거를 얘기하기 위해서 거꾸로 가는 걸 이해해야죠.”

   
▲ 1975년 9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로서 모국을 방문한 브라질 동포 67명과 청와대에서 만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선물받은 브라질산 火石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뉴시스>

- 우병우 민정수석 사건도 포함된다고 보시는 거네요.

“네. 맞아요. 우 수석 외에도 논쟁점을 비틀기 위해 하는 거죠. 국정교과서는 만들어질 거고 그럼 관철하면 돼요. 근데 이 난국을 돌파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는 뭐가 있냐는 부분에서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당 대표, 그리고 8.15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건국 68주년’이라고 했잖아요. 전 의심이 된다는 거죠. 연말에 해도 되는 걸 왜 이 시점에 했냐면 논란이 가열화가 될 것은 뻔한 거고 야권은 이 문제에 대해 예민하잖아요. 그래서 이슈를 덮기 좋다는 거죠.”

“국민‧주권‧영토 다 갖춰야 건국? 일제 조선총독부 다 있었는데?”

- 건국절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나라의 3요소는 국민, 주권, 영토인데 1948년에야 다 갖춰졌고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은 때도 이때다”라는 주장인데.

“앞서도 말했지만, 이들은 결론을 정하고 결론을 지키기 위해 논리를 만드는 거예요. 이들은 애초 이렇게 주장한 적이 없어요. 첫째로 전제하고 싶은 건 건국절이라는 당위성을 밀어붙이기는 하는데 그때그때 논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것도 그럴싸하잖아요. 국민, 주권, 영토가 있는 게 국가라는 건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이 사람들이 건국절 이야기를 할 때 이런 주장을 한 게 아니에요, 그때마다 논란이 되면 그에 맞춰서 논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반대편의 진을 빼는 거죠. 왜냐면 이들은 자기들 논리를 주장하고 싶어서 하나 툭 던지지만, 여기에 맞서 싸우려면 몇 배의 논리로 공격해야 해요. 전형적인 지치게 하기 전략이죠.

일제시대를 예로 들어볼게요. 일제는 을사조약 전후에 한일 의정서나 정미 7조약 등 외견상으로 보면 적법한 절차를 통해 우리나라를 인수했어요. 그 이후 국민, 주권, 영토를 일본이 다 가지고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이 사람은 일제시대가 우리 역사의 정통적 시간이란 걸 보장해주는 말밖에 안 되잖아요.

왜냐면 조선왕조와 고려왕조가 존재했듯이 일제시대때는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우리나라의 국민, 주권 영토를 정하고 있었잖아요. 그럼 이들의 입장에서는 일제시대가 하나의 정통적 시간이고 독립운동은 아니라는 얘기밖에 더 되나요? 그리고 미국이 독립 혁명을 다 하고 나서 건국했잖아요, 그렇다고 우리가 미국의 건국 날짜부터 배우는 건 아니에요. 어떤 나라가 물리적으로 세워지기 전에 역사의 단계적 과정이 있죠, 이런 걸 보더라도 이게 다 있어야 건국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작위적인 주장이죠.”

   
▲ 17일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간담회에서 이정현 대표, 정진석 원내대표, 심재철 의원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 심재철 국회부의장은 이날 “우리나라의 생일은 1948년 8월 15일”이라며 건국절 법제화를 주장했다. <사진제공=뉴시스>

- 해방 이후 건국 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이 존재했는데.

“건준은 있어요. 1944년 여운형이 만든 건국동맹을 확대한 단체죠. 이 단체가 조선 총독부와 협상을 해서 일본이 물러난 다음에 어떻게 우리나라를 운영할 것인지 합의를 봤어요. 여기서 중요한 건 독립운동사를 보면 임시정부가 모든 역할을 다하지는 않았어요. 1919년 임시정부를 만들었고 1920년대 초반까지는 독립운동사의 최고 기관 노릇을 했고 다시 1940년대에 최고 기관 노릇을 했죠. 하지만 임시정부는 중국에 있었고 전체 독립운동을 총괄하지 않았고 지역마다 독립운동의 자율성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 해방이 되었을 때 김구 선생 등은 당연히 임시정부의 정통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의 귀환을 강조하지만, 임시정부에 속하지 않은 민족주의자들 혹은 좌파나 중도파들은 또 다른 형태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건준이 존재한 것 자체가 임시정부나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독립운동사가 넓고 컸다는 거예요. 보수층에서 말하는 건국과 관계없어요.

다만, 우리가 보통 임시정부를 얘기하는 이유는 3.1운동의 결과로 우린 대한민국을 세웠는데 ‘민’은 국민주권이잖아요. 그래서 임시정부가 정통성을 갖는 거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때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설명해야 되잖아요. 정통성이 두 가지인데 헌법 전문을 보면 ‘유구한 역사’라는 말이 나와요. 이건 1차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바뀐 거예요. 그게 뭐냐면 고조선 이래 우리 역사가 내려왔다는 자부심이에요. 그리고 기미 3.1운동을 계승하고 그 결과로 가장 확실히 표현되는 임시정부가 적합하니 헌법에서 임시정부를 쓰는 거죠.”

“임정 없었으면 카이로 회담 의결 못나와…독립운동사‧정부수립 직접적 연관성”

- 건국일을 1948년 8월 15일로 했을 때 문제가 되는 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이잖아요. 하지만 전희경 새누리당 의원은 “독립운동을 한 것과 나라를 세운 건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간단히 말할게요. 먼저 1943년 카이로 회담이 있어요. 그때 최초로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조선을 독립시키겠다’는 말이 나와요. 그러나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장제스에게 당시 주석과 외무상인 김구와 조소앙이 면담을 신청해서 조선의 즉각적 독립을 끌어내 달라는 강력한 요청을 해요. 아마 장제스 개인적 입장에서는 소위 말하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아시아 영향력을 계산했을 거예요. 장제스가 루스벨트, 처칠과 회담을 하죠. 루스벨트는 조선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처칠은 부정적이었어요. 그러나 설득해서 장제스의 원래 주장은 임시정부 주장처럼 즉각적 독립이었는데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키겠다고 타협을 본 거예요.

그럼 이 배경에 카이로 회담을 했기 때문에 1945년 포츠담회담 의결 사항을 확인해주고 해방 이후 12월에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를 통해서 정부수립을 구체화 시켜준 거예요. 충칭 임시정부가 없었으면 카이로 회담의 의결 사항이 나올 수 없고 그러면 포츠담이나 모스크바 의결 사항은 없는 거예요. 독립운동사와 우리나라 정부수립이 왜 연관성이 없어요? 직접적 연관성이 있는 거죠.

두 번째 우리나라 제헌 헌법 이후 내려오는 헌법이 있죠. 보통 사람들은 1948년 제헌 헌법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유진오 박사의 제헌헌법은 1919년 임시헌법, 1940년 충칭 임시정부가 얘기한 삼균주의 같은 것의 내용을 계승한 게 오늘날까지 쭉 온 거예요.”

   
▲ 전희경 새누리당 의원 <사진제공=뉴시스>

- 1919년을 건국으로 하면 5000년 역사가 유지되지만 1948년을 건국절로 할 경우 5천년 역사가 사라지고 신생국가가 된다던데.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할 때 아프리카 빈 땅 가서 깃발 꽂는 것처럼 한 게 아니에요.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아편전쟁에 의한 난징조약이라든지 일본 가서 빼리 제독이 총 쏜 다음에도 미·일 화친 조약과 미·일 통상조약을 맺어요. 이게 국제법적 전통이거든요. 왜냐면 전 세계열강이 경쟁을 하니 제국주의라도 절차와 형식을 만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를 일본이 식민지할 때 어떻게 했냐면 잘 알다시피 을사조약과 한일병합 조약이 유명한데 그전에도 많은 조약을 맺잖아요. 일본이 합법적으로 조선왕조를 먹었다는 걸 입증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3.1운동 전 1915년에 대동단결선언이라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베이징에 있는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이 모여서 주장한 게 1910년 우리나라가 말한 게 아니라 대한제국이 넘어간 건 민권의 시작이라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우리나라가 군주정이잖아요. 그러나 일본에 의해 조선이 망했어요. 그러면서 조선이 일본의 나라가 된 게 아니라 군 주권이 망하면서 이제 민권의 시대가 열렸다는 거예요. 독립운동가들이 아주 창의적인 생각을 한 거예요. 3.1운동 때 ‘대한제국 만세’나 ‘고종황제 만세’ 안 하잖아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건 충격적인 사건이에요. 그러면서 임시정부가 만들어져서 이어지는 거죠.

중요한 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우리나라가 먼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라고 일본을 미국이 국제사회에 데뷔시킬 때라는지. 그때 우리는 피해 받은 게 있으니 미국에 요구를 해서 받아낸다든지 혹은 우리가 일본과 국교 수립할 때에도 우리는 피해보상을 받아 내야잖아요. 그때 우리는 법률적 근거를 제시해야죠. 그때 제시했던 것이 ‘우리는 조선왕조가 망한 후 임시정부가 있었다’는 거예요. 때문에 임시정부의 법적 근거를 인정하라는 근거 속에서 임시정부를 계승한 정부기 때문에 우리가 정통 정부로서 일본에게 배상을 받으려고 한다는 협상을 이승만 정부가 계속했어요.

그리고 미국이나 일본과 협상할 때 신생국가가 아니라는 걸 증명 해야지 식민지 때나 2차 세계 대전의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잖아요, 최소 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보상받아야 할 것 아니에요. 법적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거냐는 거죠. 임시정부부터 이어진다는 법적 정통성을 이야기해야 이어지는 거고 그렇게 했거든요. 그걸 미국과 일본이 안 받아 주긴 했지만요. 이승만 정부는 일본의 배상이라든지 미국과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임시정부의 법적 근거성에 의존해서 설명했어요. 왜냐면 우리가 국제법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게 임시정부밖에 없어요. 임시정부는 국민당 정부가 공인을 해줬고 공인은 안 했지만 영국이나 미국이 조사하거든요. 그걸 토대로 이승만 정부가 밀어붙인 거죠.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 본인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고 김구 주석 때는 임시정부 특사였단 말이에요. 건국의 아버지께서 임시정부 인사였다는 사실을 무시하니 앞뒤가 안 맞는 거죠.”

“대통령 ‘하얼빈’ 발언…보좌진들 얼마나 역사 무지하면..”

- 헌법에 보면 우리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시죠. 그런데 1948년을 건국으로 하면 북한은 우리 영토가 아닌 게 되잖아요.

“맞아요. UN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를 결의해서 입국했지만, 북한은 못 가봐요. 남한만을 실사한 후 UN 소총을 열고 가능 지역에서 선거하는 걸로 해요. 가능 지역은 38선 이남 지역이죠. 지역에서 선거해서 정부가 수립됐고 그 결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상태에서 UN이 합법적 정부로 인정을 해주잖아요. 그것만 강조하면 38선 이남만 우리 땅이죠. 그럼 통일신라만큼도 못해요. 통일신라는 대동강 이남이거든요.”

- 헌법을 부정하는 거죠.

“맞아요. 헌법 1~9차 개정의 특징이 뭐냐면 3.1 운동만 얘기하는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이 꼭 있어요. 그게 뭐냐면 우리 민족은 고조선부터 시작해서 내려온 나라라는 거예요. 영어 의미로 우리나라 건국절은 개천절이에요. 즉 우리는 단군부터 개국 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이라는 건데 1948년을 건국으로 얘기하면 단군왕검을 무시하는 거죠. 고조선은 역사적으로 실존했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지만 단군은 신화라고 쳐도 주몽이나 이성계 등을 무시하는 거죠.

제가 왜 계속 1차부터 9차까지를 강조하냐면 중간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있었고 전두환도 있었고 그 앞에 이승만 대통령도 있었잖아요, 소위 말하는 독재정권 시절에도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라든지 기미 3.1운동을 건든 적이 없어요. 다만 거기에 ‘~와 5.16’이나 ‘~와 5공’이란 식으로 붙이죠. 그들은 그들이 강조하고 싶은 이승만, 박정희의 뜻조차도 위배라는 거예요. 왜냐면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한 사람이고 박정희는 그들의 식인 5.16군사 혁명의 정당성을 3.1운동과 4.19에서 찾았거든요. 그런데 오늘날 건국절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승만과 박정희하고도 상관없는 주장을 하는 거예요.”

   
▲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 보수층이 건국절을 주장하는 이유는 뭐라고 보세요?

“지금은 그때를 살아본 사람이 없어요. 무슨 얘기냐면 그때를 경험한 사람이 살아 있기 때문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이런 이야기 못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생존자들이 사라지고 기억에 의존하는 시대가 되었거든요. 이제는 기록과 기억이 중요하죠. 군대 가보면 매주 3시간씩 정신교육이라는 걸 시켜요. 한국전쟁 때 있었던 사건을 굉장히 극우적 입장으로 가르쳐요. 증언자들이 사라지는 시대에 기억을 조작해서 왜곡된 기억을 사실인 것처럼 만들려는 거죠.”

- 건국절 논란도 있지만, 박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뤼순이 아닌 하얼빈으로 말해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어요.

“좀 충격적이었어요. 하지만 헷갈릴 수 있어요. 근데 문제는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발언하는 자리라면 그 발언에 대해 문장을 검토하는 팀들이 있을 것 아니에요. 이들이 얼마나 우리나라 역사에 무지하고 역사의식이 없으면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냐는 거죠. 건국절도 마찬가지죠. 뭘 좀 알고 얘기하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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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

<홍암나철 100주기⑦> 만주로 망명한 대종교 총본사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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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25  22: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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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 100주기 연재에 부쳐

홍암 나철과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외에 우리 사회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민족종교지만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큰 인물과 중요한 종교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 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 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노골적 패권 재구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변의 시기에 홍암 나철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할 이유는 충분하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이 순례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아울러 이번 기획취재에 도움을 주신 국내외의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필자 주

<연재 기사>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홍암 나철 100주기 ①> 도제사언문을 찾아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몸통이 중요하다”
<홍암 나철 100주기 ②> [인터뷰]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제일 위대한, 제일 억울하게 묻혀 있는 인물”
<홍암 나철 100주기 ③> 기념관 준공 서두르는 벌교 생가

일본 황궁 앞에서 단식투쟁 벌인 조선 선비
<홍암 나철 100주기 ④> 일사와 도동기를 찾아서


“700년간 닫힌 신교의 교문이 다시 열리어”
<홍암 나철 100주기 ⑤> 을사5적 처단투쟁과 단군교 중광

“내가 신의가 없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홍암나철 100주기⑥> [인터뷰]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 원장

 

   
▲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태백산(백두산)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8월 21일 백두산 북파로 올라 마주한 천지.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망국과 맞물려 갓 출범한 대종교가 일제 무단통치의 등쌀에 베겨내지 못하고 1914년 5월 13일 총본사를 옮겨간 곳은 만주 백두산 북록(北麓)이다.

1909년 음력 정월 대보름 단군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은 1910년 7월 30일 대종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평양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까지 순례하고 일찌감치 백두산 북록 청파호(청호촌)를 점찍어 두었다.

홍암 나철은 당시 “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 이 산은 곧 우리 천조(天祖)산이시며 천산이시며 상산(上山)이시며 제석산이시며 삼신산이시오 이 산신령은 곧 한울을 열으신 큰 신령 임검이시라”라고 백두산을 예찬했다.

“화장해서 고래를 가져다가 여기다 모셨다”

   
▲ 청호촌에서 3종사 묘역 방향으로 바라볼 때 공장 굴뚝 인근에 대종교가 설립한 청일학교와 총본사 고경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최삼룡 문학평론가(왼쪽)가 이경선 청호촌 서기(오른쪽) 등 청호촌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조선족 문학평론가 최삼룡(78) 선생과 오랫동안 중국에서 취재해온 조천현 티브이조선 대표와 함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용성진 청호촌을 찾은 6월 22일은 비가 내렸다. 연길시에서 택시로 100위안(한화 약 1만 6천원)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화룡에서 10년간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최삼룡 선생은 청호촌 이경선 서기(촌장)와도 금방 말문을 텄다. 최 선생의 아들과 이 서기의 사위가 연변대 박사과정을 함께한 막역지우였던 것.

이경선 서기는 “역사연구소 강룡원 선생이 사망됐는데, 서일이라는 분을 찾아서 여기를 많이 다녔다”며 “서일의 묘지를 찾았다”고 회고했다. 대종교 3종사인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의 묘가 청호촌에서 바라보이는 청호종산에 모셔져 있다.

이경선 서기와 마을 주민들은 대종교 3종사 묘비가 새롭게 발견된 일, 단군 초상을 모신 집이 있었던 일 등을 회고했지만 정확한 연도와 구체적 사실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강룡원 선생과 한 직장에 근무하기도 했던 최삼룡 문학평론가는 “강룡원 선생이 초기에 고생 많았다. 반성문 숱하게 썼다”며 “문화대혁명 전에는 ‘종교’ 한 마디면 무조건 반동이다. 항일이고 뭐고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경선 서기도 “화룡 공안들이 여기 와서는 누구 왔나 암암리에 조사하고, 누구를 데려왔다면 그 사람 조사하고”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따라서 3종사묘역은 한동안 완전히 잊혀지다시피 했고, 지금은 비석과 묘비가 재단장됐지만 역시 구체적 사실들을 제대로 알고 있는 마을 주민은 없는 형편이다. 그나마 3종사묘역에 묻힌 유골함(고래함)을 민가에서 보관하다 이장했다는 증언은 주목된다.

“화장해서 고래(유골)를 가져다가 여기다 모셨다.”

“밀산도 가보니까 없지. (백포 서일의) 고래라도 찾겠다고 다녔는데 못 찾았다.”

“석문철이라고, 고래함이야 그 집에서 허근천이라고 이분이 여기에 있으면서 단군상을 모셨다. 초상화. 고래는 그런데 통해서 거기다 보관했다가. 딴 데다 어디 보관할 데 없으니 여기와 보관했다가 묻고...어디서 사망됐는지 그 고래를 여기 갖다고 보관했다가 저기다(3종사묘역에) 묻어.”

“나도 모르는데 우리 형님이 이런 걸 잘 아시는데, 울 할아버지가 말하는 게 라철 선생이랑 고래함 모실 때 한국 아들(사람들) 마차에다 하룻밤 싣고 와서 거기다 모셨다는 거다. 올림픽 횃불 들듯 인계해서 모셨다고 하더라.”

“청명날에 우리 갔다. 강룡권 선생이 편지 써서. 비석은 없고, 어간에 금이 갔더구만. 노인들 데리고 갔는데 그걸 두드려보니까 고래가 있다. 개인들이 비석 뽑아 집돌로 썼다. 맞추니 맞지. 와서 물로 씻고 먹으로 쓰고 하니까.”

“청파호라는 그런 게 적힌 게 있었다. 시 통전부에서 가져가 보라고 해서 찾은 거다. 그 거이 와서 서일의 묘지를 찾았다.”

“처음에는 비석문에다가 다 썼는디, 이전 사람들이 이런 걸 모르니까 비석인 줄 모르고 더러는 없어졌다.”

대략 종합해보면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이 마을에는 단군 천진(초상화)를 모신 가정이 있었고, 흩어진 비석들을 발견해 삼종사묘역을 재정비했지만 무원 김교헌 묘비는 찾지 못했다. 그리고 분명치 않지만 백포 서일로 추정되는 유골함(고래함)을 작고한 석문철 씨 집에 모셨다가 안장한 것으로 보인다.

‘올림픽 성화 봉송’ 방불케 한 홍암 장례식

   
▲ 홍암 나철 대종사 묘. 묘비에는 한자로 ‘대종교 대종사 홍암 라선생 신해지장’(大倧敎大宗師弘巖羅先生神骸之藏)이라 적혀있다. 한국 선양회가 사진과 안내문 등을 부착해뒀지만 최근 중국 당국에서 모두 철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의 경우는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뒤 ‘올림픽 성화 봉송’을 방불케 하는 과정을 거쳐 공개리에 안장했다. 1916년 음력 8월 15일(이하 음력 기준) 순교한 홍암 유해는 24일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해 25일 남도본사에서 영결식을 치른 뒤 9월 17일 남대문역에서 백두산으로 향했다. 22일 청진에 도착했고, 25일 용정촌에서 추모예식을 거행했다. 10월 6일 청호에 도착, 총본사 수도실에 모셔졌으며, 11월 19일 총본사 추모예식을 치른 뒤 11월 20일 봉장식(奉藏式)을 거행했다.

2대 도사교(교주)인 무원 김교헌은 1923년 11월 18일 영안 총본사 수도실에서 56세를 일기로 서거했고 “종사의 장례는 유촉(遺囑)에 의하여 영안현 황기둔에서 화장식을 거행한 후 홍암신형의 유해 봉장지인 화룡현 청파호에 유해를 봉장하고”라는 기록에서 보듯 역시 곧바로 안장된 것으로 보인다.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책임자인 백포 서일 종사는 1921년 9월 8일 밀산에서 서거해 그곳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묻혔다가 1927년 4월 3일 청파호에 이장, 안장됐다. “개천 4380년(1923년) 계해 정월 15일에...밀산현 대흥동에 있는 백포종사 묘소에 원, 방, 각의 목책을 건립하고 또한 제전(祭田)을 구입하여 향사비(享祀費) 에 충당케 하다”(대종교중광60년사)라는 기록도 있다.

   
▲ 원분옥 할머니가 유골함을 집에 모셨던 일을 증언하고 있다. 왼쪽은 원 할머니 아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스물 다섯살에 이 마을에 시집와서 살고 있다는 원분옥(85) 할머니는 “이 기(이 곳이) 석문철이 집”이라며 “저 우에 어드메에 모셨다가 또 떨겨 와서 여기를 가져다가 뒀다가 저기 갖다 모셨다”고 지금은 작고한 석문철 집에 유골함을 모셨다고 증언했다.

또한 “따로 따로 있는 것, 비석이 있더만. 비석이. 그래 그 비석이 번져져서 땅에 묻히고 어데 가고 그래 그 세 곳을 파서 한 군데다 모셨지”라며 “우리가 (산에)가서 열고 뼈를 봤지”라고 말했다. 아마도 비석을 발견해 묘역을 재정비할 때의 일로 추정된다.

2011~2012년 사이 현지조사를 진행한 임찬경 당시 국학연구소 연구원은 「대종교 성지 청파호 연구」를 통해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의 회오리 속에서 누구도 대종교를 거론할 수 없는 등의 시대적 상황에 묻혀 삼종사묘역조차도 무성한 수풀에 덮이고 말았다”고 기록했다.

특히 “구술에 의하면, 1989년 초 연변역사연구소(소장 강용권)에서 보낸 서신을 화룡현 통전부에서 받아 청호촌이 소속된 용성향으로 내려 보냈는데, 그 내용은 청호촌에 삼종사의 무덤이 있다는데 찾을 수 있겠는지를 문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며 이를 계기로 3종사 비석과 묘비를 재확인했다고 적었다.

“삼종사 무덤 근처에서 1개 그리고 근처 개인들의 묘지에서 제단으로 사용하던 비석 1개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비석의 문구를 확인하니, 하나는 홍암 나철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포 서일의 것이었다고 한다... 비석 기단의 아래를 들추니 그 밑에 화장하여 넣은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김교헌의 비석은...끝내 찾지 못하여, 연변주정부에서 새로 제작하여 보내와 세운 것이라고 한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대종교

   
▲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 이른바 '대종교 3종사'의 묘역. 화룡시인민정부가 1991년 9월 1일 ‘화룡시 문화유물 보호단위’로 공포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3종사 묘역에서 바라본 대종교 총본사터. 나무에 가려 굴뚝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같은 방향으로 백두산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은 1914년 왜 만주 화룡 청파호(청호촌)로 대종교 총본사를 옮기고 자신의 묘를 이곳에 쓰도록 했을까?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대종교 총본사를 청파호로 옮긴 이유에 대해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항일운동의 거점을 구축하며, △포교 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했다.

임찬경 인하대 교수는 “백두산과 불과 100㎞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지역이고, 동포들이 많은 연길, 용정과 가까우면서도 접근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지역”이라며 “용정에 일제의 간도총영사관이 있었고 두도구(頭道溝)에 분소가 있는데, 화룡지역까지는 (일제가) 안 들어갔다”고 지리적 이점을 설명했다.

홍암과 대종교 교우들의 백두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야 두말할 나위 없었을 것이고, 홍암에게 도를 전수해준 백봉신사 집단의 본거지가 백두산이라는 점도 염두에 둘만한 사안이다.

「삼일신고」와 「대종교포명서」 등을 전해준 백봉신사 집단은 백두산에서 우리 전통 천신교를 단군교로 중광했음을 발포했고, 포명서에서 “우형(愚兄) 등 13인이 태백산(지금 백두산) 대숭전에서 본교 대종사 백봉신형을 배알하고”라고 밝혀 백두산에 대숭전이 있었고, “태백산 대숭전 동무 고경각에서 13인이 같이 서명함”이라고 명시해 고경각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고경각은 대종교 도사교(교주)가 집무하는 곳이다.

   
▲ 백두산 소천지(은환호). 문화대혁명 시기 많은 종교시설들이 철거됐지만 지금도 도교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모든 종교시설이 철거된 가운데 백두산 소천지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약왕전.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한 전통수련 관계자는 백봉신사 집단이 백두산 소천지 일대를 근거지로 했을 것이란 추정을 전해줬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백두산 너머 첫 마을인 내도산에 자리잡은 ‘천불교’가 대종교라는 일부 전문가의 해석도 있다. ‘왜놈들에게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게는 복을 내려달라고 백두산천기에 빌면서 그것을 신앙으로 하는’ 천불교 신도들은 소천지에 ‘덩덕궁’이라는 99칸 절간을 지어놓고 1년에 두 번씩 찾아가 기도드렸다고 한다.

실제로 오랫동안 이 지역을 취재해온 조천현 대표는 “문화대혁명 시기 소천지 일대에 세워진 많은 종교시설들이 헐리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을 만나 증언을 들었다”고 확인했다. 소천지에는 많은 종교시설이 헐렸지만 지금도 도교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대종교가 처음으로 화룡 일대로 진출한 1910년 11월 무렵, 총본사에서 파견한 박창익(난파 박찬익의 이명) 시교사가 안중근 의사의 큰아버지인 안태진이 기부한 청호마을 가옥에 시교당을 마련해 포교에 나서고 있었던 상황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홍암 나철은 1911년 “7월 21일 고적 및 영적 답사차로 서울을 출발하여 강화.평양을 거쳐 천산 북록 청파호에 이르”(대종교중광60년사)렀고, 1912년 음력 10월 3일 개천절에는 청파호 시교당에 천여 명이 모여 개천대경절일을 지낼 정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조창용은 『백농실기』에서 “(10월) 3일 바람 불고 춥다. 이 날은 개천대경절일이다. 일직부터 시교당 안에 머물렀다. 천궁은 건축되고 수리되어 그 모습이 새로워졌다. 여러 곳의 교우 형재자매를 합하여 7백여 명이 모였다. 먼 곳으로부터 3백여 명이 와 있다....첫째 천진전, 둘째, 천궁, 셋째 수도실, 넷째 경배실, 다섯째 자매경배실, 여섯째 학도창가실, 일곱째 전강실, 여덟째 전무사무실, 아홉째 외교교접실 등이다. 교궁이 아주 넓고 확 트였다...그 날의 광경 중 기뻐하며 박수친 것을 헤아릴 수 없다. 그 자리에서 즉시 봉교한 사람이 백여 명이다. 밤에는 화등 천여 개를 높이 걸고 학생들의 노래 부름과 예원들 서로의 놀이와 오락에 밤을 새우다“라고 일기 형식으로 적었다.

실제로 1909년 음력 1월 15일 단군교가 중광한 뒤 총본사가 서울 북부 재동에서 원동, 중니동, 자문동, 상마동으로 한 해에만 네 차례나 옮겨다닐 정도로 상황은 열악했지만 이듬해인 1910년 6월 29일 교우실태 조사 결과 서울 2,748명, 지방 18,791명, 계 21,539명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일제는 탄압의 방법으로 박멸을 기도하여 소위 사내총독 암살의혹을 일으켜 수백명의 중진급 교도들을 불법 체포하여 악랄하게 고문, 악형을 가하고 심지어 사형 또 불구 폐인까지 만드는” 정도였고, “‘종교인은 자유가 없다’하고 교주이하 중요간부의 사생활과 출입 거조(擧措)를 물샐 틈 없이 감시하고 또 헌병․경찰을 미행시켜 자유를 속박하는가 하면 교우들의 가두검색이 혹심하고 특히 쟁송이 있을 시는 종교인은 불문곡직하고 패소처분하는 학대를 자행”했다.

따라서 1914년 5월 13일 마침내 총본사를 화룡 청호촌으로 옮기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4도교구를 설치했다. “대종사께서 교의 본거를 백두산록으로 옮겨 포교운동이 자못 활발하여서 지금까지 동북만주 일에 흩어져 있던 독립전선이 흡연히 이리로 귀일되어 종교는 그 정신적 지주와 구심점이”됐다는 것이다.(대종교중광60년사)

<1914년 설치한 대종교 교구>

 

교구

소재지

책임자

관할지역

총본사

화룡

홍암 나철

총괄

동도교구

왕청

백포 서일

동만 일대와 노령.연해주

서도교구

상해

신규식 이동영

남만부터 산해관까지

북도교구

소학령

이상설

북만주 일대

남도교구

경성

강우(호석)

한반도 전역

외도교구

 

 

중국 일본 구미

* 자료 - 『대종교중광60년사』를 근거로 재작성.

백두산과 발해 수도, 그리고 부여주족론

   
▲ 청호촌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가 옮겨간 발해의 수도였던 영안시 소재 '상경 용천부'(동경성). 대종교의 '대륙사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만주에서 급격히 교세를 불려가는 대종교를 일제가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 16일 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을 공포하고 그해 10월 1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 253호」를 발포해 대종교를 불법종교로 규정했다.

이에 홍암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대보름 많은 유서를 남긴 채 30만 교도들에게 호소하며 스스로 숨을 멈췄다. 홍암은 유언장 「유계장사칠조」(遺誡葬事七條)를 통해서도 “반도의 땅에 지금 이 몸을 묻을 곳이 없다”고 밝혔고, “타고 남은 유해를 거두어 싸서 반드시 조상(祖上)의 아래 즉 총본사 가까운 곳에 묻을 것”이라고 유언을 남겼다.

홍암을 비롯한 3종사 묘역은 서남쪽 아래 총본사터와 더 멀리는 백두산을 바라보도록 봉분의 방향이 자리잡았다.

또한 화룡 청파호에 멀지 않은 곳에 고려성으로 불리웠던 곳은 발해의 ‘중경 현덕부’가 있었던 곳으로 나중에 일제의 발굴조사로 드러났고, 이후 대종교 총본사는 영안의 발해 ‘상경 용천부’(동경성)터로 옮겨간다. 대종교의 대륙사관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후 북만주 독립운동단체들이 1925년 1월 목릉현에서 통합을 논의한 회의는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로 명명됐고, 그 결과 신민부가 탄생했다.

임찬경 교수는 “당시 대종교 역사관에 의하면 우리 민족을 단군에서 부여로 계승되고 고구려, 발해, 여진으로 계승됐고, 이같은 역사체계가 대륙사관”이라며 단재 신채호가 1908년 「독사신론」에서 부여주족론(夫餘主族論)을 폈다고 강조했다. 배달겨레의 주류가 부여족이라는 인식이다.

청일학교, 독립군 사관 양성 기지

   
▲ 청호촌에 있는 500년 이상 됐다는 비슬나무. 최근년에 벼락을 맞았지만 살아남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2000년에 '화룡시 룡성진 청호기독교활동점'이 들어서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지금도 조선족 가구만 거주하는 청호촌은 1937년 일제가 집단부락을 건설하면서 산재호(散在戶)들을 집단호로 이주시키고 바둑판 같은 정사각형 마을을 만들어 외부는 흙벽과 해자로 철저히 차단하고 네 방면으로 문을 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흙벽이 사라졌고, 해자 바깥 쪽으로도 집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 주민들이 500년 이상된 것으로 알고 있는 ‘비슬나무’는 최근년에 벼락을 맞기도 했지만 여전히 든든히 마을을 지키고 있다.

   
▲  청호촌의 역사를 정리한 31쪽 분량의 「청호촌 촌사」(이경식, 1999) 표지.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러나 이곳 역시 기독교의 바람은 피할 수 없는 듯 2000년에 ‘화룡시 용성진 청호기독교활동점’이 들어었고 여전도사는 마을 할머니들을 이곳에 불러모아 함께 점심을 나누고 있었다.

이경선 청호촌 서기는 청호촌의 역사를 정리한 31쪽 분량의 「청호촌 촌사」(이경식, 1999)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해 보여줬다.

이 자료에는 함북 길주에서 현주일 일가가 1895년 처음으로 청파호에 이주 정착했고 “1910년에는 현대 교육 체계를 갖춘 청일학교(淸一學校)가 건립 되었다. 이 학교는 형식상에서 단군교를 교수하는 학교인 것 같았으나 실질은 종교를 방패로 내세우고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는 기지였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또한 “이 학교 건립에 라철(羅喆) 선생의 역할이 컸었다고 한다...청일 학교 교장에는 라중식(羅仲植)(1910-1912), 교무에는 라철(羅喆), 서일(徐一 ), 계화(桂和), 박찬익(朴贊翊), 백순(白純), 박상환(朴尙煥), 김원시(金元時), 남세구(南世柩), 현천묵(玄天黙) 씨 였다(이 자료는 광산 김씨 김성수씨가 제공 하였음)”는 기록도 보인다. (朴尙煥은 朴祥煥의 오기-필자 주)

사드 여파로 한국 선양회가 세운 안내판 철거돼

   
▲ 3종사 묘역 입구.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3종사 묘역 입구에 한국 선양회에서 세운 안내판들. 사드 여파로 중국 당국에 의해 모두 철거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청일학교 자리는 청호촌에서 큰 도로 건너편 삼종사묘역 방향으로 바라볼 때 공장 굴뚝이 보이는 곳으로, 대종교 총본사 고경각도 바로 이곳에 함께 자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3종사묘역으로 가는 길은 질척거렸지만 입구에서 ‘대한민국 (사)나철선생(항일지사) 선양사업회’가 세운 안내판이 반겨주었고, 오는 11월 2일 벌교 기념관에서 열릴 ‘홍암나철선생100주년기념관 준공식 및 개천대제 추모문화행사’ 안내판도 눈에 띄었다.

‘화룡시 문화유물 보호단위’가 건립한 ‘반일지사무덤’ 표지석은 화룡시인민정부가 1991년 9월 1일 공포했음을 밝히고 있으며, 이들의 공적을 뒷면에 간략히 새겼다.

“반일지사 라철 서일 김교헌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지구에서 한때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반일계몽운동과 반일교육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민중의 반일의식을 높이고 인민의 반일사상각오를 높이기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으며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서일이 령도한 《북로군정서》소속의 반일무장부대와 《국민회》소속의 반일무장부대가 1920년 10월 화룡지구에서 협공작전을 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청산리전투》는 일본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반일운동이 깊이 있게 전개되도록 힘있게 추동하였다”

‘대종교 대종사 홍암 라선생 신해지장’(大倧敎大宗師弘巖羅先生神骸之藏)이라 한자로 적힌 비석 앞에서 3종사에 재배를 올리고 공장 굴뚝 방향으로 옛 총본사터를 더듬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 백두산 자락이 보일 것만 같아 두리번거렸지만 흐린 안개만 시야를 가릴 뿐이었다.

그러나 지난 8월 9일 3종사묘역을 다녀온 양현수 선양사업회 회장은 “지난 5월 25일 우리가 세운 안내판을 중국에서 싹 치워버렸고 영사문제가 생기면 골치 아프다고 ‘참배하지 말라’고 했다”며 “사드 문제가 한중관계의 큰 걸림돌이라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앞서, 보성군은 중국 화룡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사업비를 보내서 화룡시에서 3종사묘역으로 가는 도로를 확장하고 주차장까지 만들기로 협의됐지만 사드 문제로 보성군 부군수와 양현수 회장 등의 방중이 무산돼 7월 20일로 예정됐던 자매결연은 취소됐다.

만주의 겨울 돌위에서의 72일간 단식 기도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한 뒤 1914년 화룡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기고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하기까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홍암 나철의 종교적 수행이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해서 1916년 돌아가실 때까지 8년 동안을 수행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수행을 통해서 생을 마감했다”며 “중광 이전의 관료주의 모습에서 중광 이후의 모습은 철저하게 수행주의의 모습”이라고 규정했다.

   
▲ 1916년 음력 8월 초 닷새, 경성역을 출발해 구월산 삼성산으로 향하던 홍암은 사리원역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손에 단주를 쥐고 있다. [사진출처 - 대종교]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 소장은 “유서 중에 중광가에 보면 여러 정황상 수련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며 “남은 사진 3장 모두 단주를 쥐고 있는 모습인데 삼일신고독법에 나오는 수련법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짚었다.

「삼일신고」에 부기된 ‘삼일신고독법’에는 “모든 사특한 생각을 끊고, 삼백 예순 여섯 알의 박달나무 단주를 쥐고 한 마음으로 읽되, 원문 삼백 예순 여섯 자로 된 진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주에 맞춰 일관할지니라”라고 명기돼 ‘단주’가 중요한 수행도구임을 알 수 있다.

신철호 전 대종교 삼일원장은 홍암 나철이 무송(撫松)의 산에서 “만주의 그 추운 겨울 눈 내리는 아래 돌위에 앉으시어 72일 간을 단식 기도”했다는 백강(白崗) 조경한(趙擎韓)의 증언을 『한국중흥종교 교조론: 홍암 나철 대종사』에 기록했다.

홍암의 72일 단식 기도는 예수의 광야에서의 40일 금식 기도에 비교하더라도 엄청난 고행이 아닐 수 없다. “도리어 홍암 선생은 불그레하신 얼굴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어서 마치 신령님이 눈 내리는 산에 내려와 앉아 계신 듯 하였다. 이 엄청난 광경이 소문으로 퍼지자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한국사람과 중국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앞에 죽 엎드려 백두산신령님이 내려오셨다고 절을 해대면서...”

또한 괴질로 죽어가는 단촌마을에서 ‘以身代命’ 네 글자를 집 문기둥마다 써붙여 하룻밤에 41명의 환자를 고친 이적(異蹟)은 홍암 자신이 중광가에서 확인하기도 했다.

물론, 대종교의 지감, 조식, 금촉 삼법수련과 홍암 나철의 수행, 이적 등에 대해서는 더 깊은 연구와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추가, 26일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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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증가만큼 생활여건도 최악으로 바뀌는 ‘제주’

‘땅값 상승률은 전국 최고, 그러나 도민 소득은 제자리’
 
임병도 | 2016-08-27 09:17: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제주도는 지난 2013년 인구 60만 명을 돌파했고, 제주도청 앞에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제주도청 방송 캡처

 

지난 2013년 8월 13일 제주도청에는 ‘제주 인구 60만 시대 개막’ 기념행사가 개최됐습니다. 당시 우근민 도지사는 “전문가들이 2020년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인구 60만 시대 개막이 7년 이상 앞당겨졌다”면서 “인구 60만 시대는 인구증가의 의미를 넘어 제주의 경제사회적 규모가 커지고 자립경제의 바탕이 확보되면서 앞으로 제주경제 성장에 필요한 밑거름이 마련됐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2021년 제주인구 70만 시대도 앞당겨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근민 지사의 말처럼 제주 인구는 2021년이면 70만 명이 넘을 듯합니다. 이미 2016년에 65만 명이 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 지사의 주장처럼 인구 증가가 경제 성장과 지역발전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고 있을까요?

인구가 늘어난 만큼 제주도민의 생활 여건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각종 통계로 살펴봤습니다.


‘인구가 증가했더니 쓰레기 발생량과 범죄율도 높아져’

제주인구증가에따른생활폐기물발생량및성폭력범죄발생건수

2005년 제주도 1일 생활폐기물 발생량은 643.6톤이었습니다. 2014년은 976.2톤으로 무려 51.7%가 증가했습니다. 전국 생활폐기물 발생증가율과 비교하면 제주도 증가율은 17배가 높습니다.

요새 제주도 마트에 가면 물건을 담아갈 수 있도록 비치된 빈 박스를 더는 제공하지 않겠다는 곳이 나옵니다. 쓰레기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2014년 전국의 쓰레기 매립률은 15.7%로 2005년과 비교해 12.5%P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고립된 섬인 제주는 오히려 매립률이 7.5%P 증가하면서 제주 전역이 쓰레기 처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범죄율도 높아졌습니다. 진선미 국회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인구 당 4대 강력범죄 발생건수’가 제일 높은 곳이 제주였습니다.

성폭력 범죄 발생 건수도 2011년 259건, 2012년 285건, 2013년 495건, 2014년 370건, 2015년 437건으로 최근 5년 사이 30% 넘게 증가했습니다.

‘만 13세 미만 아동 대상 성범죄 발생 비율 1위’, ‘만 15세 이하 청소년 성범죄 발생 비율 1위’, ‘성범죄 재범률 전국 2위’ 제주의 모습을 보면 아이들과 여성이 안전하게 살기 좋은 땅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인구 증가와 함께 교통 문제도 심각해져’

제주인구증간에따른자동차등록대수와교통사고

제주의 자동차 등록대수를 보면 2005년 21만 대, 2010년 25만 대였습니다. 5년 동안 4만 대가 증가했던 자동차는 2015년 43만 대로 2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렌터카도 2010년 1만4천 대에서 2016년 2만9천 대로 늘어났습니다.

자동차 등록대수가 늘어나면서 교통사고도 증가했습니다. 2010년 3,617건이었던 교통사고 발생건수는 2015년 4,645건이나 발생했습니다.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부상자를 보면 2010년 982.6명에서 2014년 1,145.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제주공항이나 우도 등 관광객이 몰리는 곳은 주말이나 연휴가 되면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으면서 이 지역 도민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시내 곳곳에는 주차장이 부족해 불법주차가 기승을 부리며, 출퇴근 시간이 아닌 평일 낮에도 교통 혼잡과 정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원희룡 도지사는 지난 7월 ‘△차량총량관리의 법제화 검토 △간선도로 일방통행제 검토 △대중교통 우선차로제 실시 △공영버스 공기업 전환 △도시형 신교통수단 도입 검토’ 등을 포함한 제주교통혁신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트램 도입은 2012년 우근민 도지사 시절 추진하다 포기했다는 점을 미루어 쉽게 도입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땅값 상승률은 전국 최고, 그러나 도민 소득은 제자리’

제주인구증가에따른표준공시지가변화

2015년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전국 표준지 공시지가를 보면 제주지역 땅값 상승률은 9.20%였고, 2016년은 서귀포시 19.63%, 제주시 19.15%로 전국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2010년 0.43%, 2011년 1.06%, 2012년 2.80%, 2013년 2.01%, 2014년 2.98%와 비교하면 10배 이상 급상승했습니다.

2016년 5월 제주지역 건축허가를 보면 1297동 50만7111㎡로 지난 해 같은 기간 975동 34만4649㎡ 대비 면적기준으로 47.1%가 증가했습니다. 지난 해에 대규모 아파트 분양이 완료됐지만,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 상업용 건축물의 건축허가는 계속 늘어나고 있어 제주의 땅값은 계속 오를 전망입니다.

제주 땅값이 올라 부동산 가격은 상승했지만, 제주도민들의 소득은 많이 증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제주도민의 1인당 개인 소득은 2005년 1,074만 원에서 2014년 1,567만 원으로 45% 증가했지만, 전국 증가율 47%보다 낮았습니다.

도민 소득의 증가율보다 제주 땅값이 높다는 말은 소득만으로는 집을 구입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제주 도내 청년들의 임금이 낮다는 점을 본다면 미래 세대의 주택 구입은 점점 힘들어질 것입니다.


‘통계의 위험보다 더 무서운 장밋빛 계획들’

연도별제주의주요통계-min

2013년 제주는 “2021년 상주인구 70만 시대”를 준비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발표했던 계획을 보면 이주민을 위한 지원 정책 등에 초점을 맞춰져 있습니다. 이주민들이 정착하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인구가 늘어나면서 발생하는 제주의 현실적인 여러 가지 문제점을 사전에 예측하고 대비했어야 합니다.

원희룡 도정은 인구 100만 명을 기준으로 정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주도가 인구 65만 명에도 각종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는데, 과연 인구 100만 명 시대를 대비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단순히 통계나 숫자만으로 제주에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통계가 말하고 있는 경고를 무시한다면 실제 체감하는 생활 여건은 더 나빠질 수가 있습니다. 지금 제주도는 발전과 증가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쉼을 가져야 할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주인구60만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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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씨, 당신이 물고기 씨를 말렸습니다

 
[4대강 청문회 열자] 빼앗긴 어부의 삶... 이제 낙동강 '저주'를 풀어주세요

16.08.27 11:39 | 글:정수근쪽지보내기|편집:손지은쪽지보내기

4대강 사업, 그 뒤 5년. 멀쩡했던 강이 죽고 있습니다. 1000만 명 식수원인 낙동강 죽은 물고기 뱃속에 기생충이 가득합니다. 비단결 금강 썩은 펄 속에 시궁창 깔따구와 실지렁이가 드글거립니다. 혈세 22조원을 들인 사업의 기막힌 진실. '4대강 청문회'가 열리도록 '좋은기사 원고료 주기'와 '서명운동'에 적극적인 동참을 바랍니다. 이번 탐사보도는 환경운동연합, 대한하천학회, 불교환경연대,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이 공동 주최하고 충남연구원이 후원합니다. 4대강 특별취재팀의 활동은 페이스북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말]
이명박씨, 어제(26일) 낙동강에서 한 어부의 배를 탔습니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녹색강. 당장 물속에서 녹색 괴물이 튀어나올 것같이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에게~ 대체 이게 뮙니까?"

김해 내수면어업회 회장인 어부 박남용씨(68)가 자망을 걷자 김종술 기자가 혀를 찼습니다. 3일전에 쳐놓은 자망에는 물고기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7개 한 묶음으로 이루어진 통발엔 새우 몇 마리와 동자개 치어 몇 마리만 올라올 뿐이었습니다. 

"이빨이 몽당 빠져버릴 것 같다니까..."
 
▲ 김해시 대동면 앞 낙동강에서 어민이 통발 7개를 건져 올렸다. 빈 통발에는 좁쌀만한 고기뿐이다. 어민은 "4대강 사업 후 물고기가 씨가 말랐다"고 말했다. ⓒ 정대희

통발을 걷어올리는 박남용씨의 어깨는 축 쳐져 있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 공주에서 이곳 김해 대동으로 와 50년 넘게 조업을 해온 베테랑 어부의 눈에 눈물인지 빗물인지, 물기가 맺혔습니다.  

"녹조가 말도 못하게 피고, 강바닥이 썩은 뻘로 뒤덮혀 있지. 고기가 살 수가 있겠나. 낙동강이 죽어버린 것이여. 4대강 사업 때문에. 이명박을 생각하면 이가 갈려서 이빨이 몽땅 빠져버릴 것 같다니까요. 나, 원 참~"  

4대강 탐사보도팀은 물고기 씨가 마른 낙동강의 모습을 어부의 배 위에서 생생하게 페이스북 라이브 생중계를 했습니다. 
 
▲ 김해시 대동면 앞 낙동강 배 위에서 <오마이뉴스> 4대강 현장 탐사보도팀이 페이스북 라이브를 하고 있는 모습. ⓒ 정대희

배를 몰고 있던 유점길씨(71)에게 마이크를 돌렸습니다. 

- 언제부터 물고기 수가 줄었나요? 
"4대강 사업 이후부터죠. 물이 썩어서 물고기도 살 수 없어요."

- 얼마나 줄었나요? 
"99%. 이젠 낙동강에 그물 던지는 어부가 거의 없어요. 기름값도 안나옵니다."

- 잡히는 어종도 변했나요? 
"잡히는 물고기가 있나요? 없어요, 없어... 변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이명박씨, 낙동강 어부의 탄식이 들리시나요? 

지역경제 살리기? 지역경제 죽이기!

부산경남 내수면어업회 어부들의 총 수는 488명이라 합니다. 이중 지금도 낙동강에서 물질을 하는 어부는 두 손으로 꼽을 정도랍니다. 4대강 사업으로 지역경제를 살리겠다는 당신의 약속은 휴지조각이었습니다. 아니, 강도 죽이고 몇 대째 이어온 삶의 터전도 앗아갔습니다.  

4대강 사업 이전에 이곳에서 잘 잡히던 물고기는 잉어, 붕어, 메기, 장어였답니다. 이걸 잡아서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고 집 사줘서 결혼도 시켰답니다. 하지만 물고기 씨가 마른 강에서 그나마 잡히는 어종은 베스나 블루길 같은 외래어종뿐이라고 합니다. 생계가 막막해진 것입니다. 

선착장으로 돌아온 어부들은 이구동성으로 4대강 사업을 성토했습니다. 4대강 사업 전의 기대는 물거품으로 돌아와 더욱 분노가 커진 것입니다. 

"4대강사업 기간부터 지난 7년 동안 정부가 해준 보상이라곤 4대강사업 기간 휴업 보상 390만원에 4대강사업 후 3년 회복기간 보상이라 해서 300만원 남짓 준 것이 전부입니다."

황금어장의 물고기 씨를 말렸다
 
▲ 김해시 대동면 앞 낙동강 배 위에서 어민이 3일 전 쳐놓은 통발 7개를 건져올렸으나 시장에 내다 팔 고기는 한 마리도 없었다. ⓒ 정대희

내수면어업회 한희섭 사무국장의 말입니다. 그 옆에서 어부 조형국씨(65)가 말을 보탭니다. 

"그 보상, 아무것도 아니지요. 4대강사업 전에는 한번 나가면 70~80만 원 벌이는 했는데, 그 돈은 몇 번만 조업을 나가도 벌 수 있는 돈인데 그걸 보상이라고 주니 참 기가 막혀 살 수가 없습니다. 이곳은 예전에는 황금어장이었어요. 재첩해도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섬진강 재첩, 그게 재첩입니까? 이곳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답답한 어민들은 이런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지 않은 수자원공사와 국토부를 향해 선상시위도 세 차례나 벌였답니다. 수자원공사와 국토부를 찾아간 것도 수십 번입니다. 

"찾아가도 만나주지고 않고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정말 막막합니다." 

이것이 낙동강의 현실입니다. 낙동강은 지금 거대한 물저장소일 뿐입니다. 그것도 녹조라떼 가득한 거대한 시궁창 말입니다. 강바닥은 썩은 펄입니다. 그 펄 속에는 실지렁이 같은 4급수 오염 지표종들만 득실거릴 뿐입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물고기를 비롯한 수생물이 살 수가 있겠습니까.  

"하루빨리 보를 없애야 합니다. 하굿둑도 터야 합니다. 그래야 물고기가 살고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방법뿐입니다. 안 그러면 모두 죽습니다. 우린 죽어요."

조씨는 손짓발짓을 해가며 절규했습니다.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이명박씨, 낙동강은 1300만 시도민의 식수원입니다. 맹독성물질이 창궐하는 녹조와 실지렁이 득실거리는 강바닥 무엇보다 물고기도 살 수 없는 이런 낙동강의 강물을 정수해서 우리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수치상 안전하다고 하지만, 물고기도 살 수 없는 강물이 과연 안전할까요?

어민들의 주장처럼 하루빨리 낙동강 보를 없애든가 보의 수문을 상시개방해야 합니다. 그래야 물고기도 살고, 어민들도 살고, 우리도 살 수 있습니다. 

이명박씨, 4대강에 울퍼지는 당신에 대한 저주
 
▲ 김해시 대동면 앞 낙동강 위에 배가 떠 있는 모습 ⓒ 정대희

이명박씨, 이날 빈 그물을 걷은 박남용 씨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습니다. 쇳소리가 났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목소리가 잠깐 쉰 게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래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은 4대강 사업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실 4대강 사업 초기에는 꿈에 부풀어 있었답니다. 4대강 공사 기간인 2년간의 휴업을 누구보다 잘 참고 견뎠답니다. 그러나 그건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답니다. 2012년 4대강 보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부터 잡히는 물고기가 점점 줄어들었답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동료 어부들과 함께 국토부를 찾아가 따졌습니다. 시위도 했습니다. 돌아오는 것은 냉대뿐이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2013년 10월 24일 스트레스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졌답니다. 다행히 뇌출혈은 치료는 했지만 그날부터 목소리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어부가 '4대강 독립군 특별취재단'을 만나 처음으로 내지른 말은 이명박, 당신에 대한 저주였습니다. 쇳소리는 비바람치는 녹조의 강으로 퍼졌습니다. 

이명박씨, 이제 당신이 낙동강에 쏟아부은 '저주'를 풀어주세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말씀 드립니다. 환경운동연합, 불교환경연대, 대한하천학회,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은 지난 23일부터 '4대강 청문회를 열자'는 제목의 탐사기획보도는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현장 탐사보도의 마지막 날입니다. 많은 분들이 4대강 독립군에게 '좋은 기사 원고료'로 응원을 해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서명운동에 동참을 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영주댐과 내성천의 현장 탐사 보도도 이어집니다. 9월 중순까지 기획 기사를 통해 4대강 사업의 폐해를 낱낱이 보여드리겠습니다. '좋은 기사 원고료 주기' 목표액 3000만원, '4대강 청문회 서명운동' 10만 명이 될 때까지 힘을 모아 주십시오. 지치지 않고 4대강 독립군들이 4대강을 회복시킬 수 있을 때까지 마음을 모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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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국뻥부’ SLBM 실전배치까지 3~4년 걸린다더니

‘전문가들은 수차례 경고했던 북한의 SLBM’
 
임병도 | 2016-08-26 09:14:1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북한이 8월 25일 공개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 발사 모습 ⓒ북한 조선중앙TV 캡처

 

지난 8월 25일 북한조선중앙TV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 발사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이날 영상은 24일 실시한 SLBM 시험 발사 장면이었습니다. 북한이 시험 발사 바로 다음 날 다각도로 촬영된 영상을 공개했다는 점은 SLBM 시험 발사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리겠다는 의도로 보입니다.

북한이 시험 발사에 성공한 SLBM을 보면 고도 50km 상공에서의 속도가 음속의 10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문가들은 한반도에 배치 예정인 사드는 SLBM 요격 시험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요격에 실패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헤럴드경제에 따르면 문근식 한국국방안보포럼 대외협력국장은 “재돌입전투부 명중 정확도가 작전적 요구에 완전히 도달했다는 것은 이번 발사시험에서 비행뿐 아니라 실제 잠수함 명중시험까지 했다는 의미인데, 북한 입장에서는 실전배치만 남은 단계”라며 “북한은 연내 SLBM 실전배치도 가능할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SLBM 실전배치까지 3~4년 걸린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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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당국은 2015년 5월에는 북한이 SLBM 실전 배치까지는 최소 5년이상 걸린다고 밝혔다. ⓒTV조선 캡처

 

2015년 5월 TV조선은 군 당국이 북한의 SLBM 발사 시험에 진전이 있었지만, 아직 초기 단계여서 실전 배치하려면 최소 5~6년은 걸린다고 보도했습니다.

2016년 4월 24일 문상균 국방부 대변인은 4월 23일 있었던 북한의 SLBM 시험발사에 대해 “북한은 현재 SLBM 개발을 서두르고 있으며 수중 사출능력 등에서 일부 기술적 진전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면서 “기존 SLBM 보유국 개발 경과를 감안할 때 북한이 SLBM 전력화에 3∼4년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문 대변인은 ‘북한이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경우 그보다 이른 시기에 전력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만에 북한이 SLBM을 연내 배치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국방부가 제대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큰소리 뻥뻥 쳤던 한민구 국방부 장관’
 

한민구SLMB시험우려할만한상황아니다

 

▲2015년 5월 한민구 국방부장관은 북한의 SLBM 시험이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고 밝혔다. ⓒ뉴시스 캡처

 

2015년 5월 11일 당시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는 당대표 회의실에서 한민구 국방부 장관을 만났습니다. 문 대표는 한 장관에게 “우리 군의 미사일 방어체계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보도에 국민들이 걱정이 크다”라며 북한의 SLBM 실전 배치 시간이나 군의 대응 체계 등을 질문했습니다.

한민구 국방부장관은 “우리 군의 킬체인(Kill Chain)이나 KAMD(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가 무력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지만 우리 군이 갖추고 있는 전력과 발전방향을 고려하면 국민들이 우려할 상황이 아니다”고 답변했습니다.

당시 한 장관은 “북한에 대해 도발을 즉각 중단할 것과 만약 도발하면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2016년 8월 북한의 SLBM 시험 발사 성공과 연내 실전 배치 가능성에 대해 ‘강력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수차례 경고했던 북한의 SL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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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북한전문매체 38노스에서 북한의 SLBM 시험 발사에 대해 성공적인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38노스 캡처

 

국방부는 북한의 SLBM 시험 발사가 있을 때마다 실패했다는 주장만 되풀이했습니다. 2016년 4월에는 비행거리가 최소 사거리에 미치지 못했다고 했으며 5월에도 공중폭발했다면서 북한의 SLBM 기술을 폄하했습니다.

국방부가 북한의 SLBM 기술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을 때 외국 전문가들은 북한의 기술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면서 오히려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한국은 SLBM을 장착할 대형 잠수함이 없기에 우려할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해외 매체들은 북한의 신형 잠수함 모습이 담긴 위성사진 등을 공개하면서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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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신포조선소의 잠수함 위성 사진 모습 ⓒ38north 캡처

 

한반도 사드 배치가 결정되면서 가장 이득을 본 곳은 북한입니다. 한국 국방연구원이 펴낸 ‘2015 안보전망 보고서’를 보면 ‘‘미국이 북한 위협을 근거로 MD 체제를 강화하거나 한반도 내 사드를 배치할 경우, 중국은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해 대북 지원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으며 한 · 미 · 일 남방 삼각 대 북 · 중 · 러 북방 삼각 간 갈등구도가 형성될 전망이다.’라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사드 배치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측이 내세우는 것이 확실한 ‘안보’입니다. 하지만 제대로된 북한의 정보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국방부와 박근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강력 대응하겠다’,‘우려할만한 상황이 아니다’라는 말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한국전쟁이 벌어지기 전 ‘점심은 개성에서 저녁은 평양에서 먹겠다’는 큰소리만 치는 국방 수뇌부의 무능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가 SLBM도 요격할 수 있다는 말도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북한SLBM발사영상-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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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8.24 잠수함탄도탄(SLBM)동영상 분석-완벽한 사출과 점화

북, 8.24 잠수함탄도탄(SLBM)동영상 분석-완벽한 사출과 점화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8/26 [01:38]  최종편집: ⓒ 자주시보
 
 

 

 

25일 낮 북은 24일 발사한 잠수함탄도탄(SLBM) 시험 발사 성공 동영상을 전격 공개하였다. 북이 전에도 동영상을 공개한 적은 있지만 몇 개월 후에 공개했었는데 이번에는 단 하루만에 공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잠수함 탄도탄 발사 장면은 방송인의 해설 없이 발사폭음 등을 그대로 들려주는 방식으로 동영상을 만들어 공개했다.

 

'한 번 직접 보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라는 의미로 공개한 영상이 아닌가 싶다.

 

이번 동영상에서는 북극성을 기중기를 이용해 잠수함에 탑재하는 모습도 공개하였다. 본지 추리대로  동영상에 등장하는 그 잠수함 마스트에 발사관을 설치하고 그 속으로 탑재하고 있었다. 크기를 보았을 때 3발은 좀 무리인 것으로 보였다. 한 발이나 두발 정도 탑재할 수 있는 잠수함이었다.

 

따라서 실전용 잠수함은 한호석 소장의 추리대로 따로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어렵게 개발한 잠수함 탄도탄을 달랑 한 두 발 탑재하고 가서 쏘고 오는 것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한발 쏘는 잠수함 기술이 있다면 잠수함 크기만 키우면 10발 스무발짜리는 쉽게 만들 수 있다. 잠수함 제작 기술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동영상을 보면 사출과 점화가 아주 매끄럽게 잘 연결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안정적인 자세를 보여주었으며 비상시에도 무시무시한 고체연료 불꽃을 마구 내뿜으며 팍팍 가속역을 높여 순식간에 구름을 뚫고 우주공간으로 비상하였다.

 

특히 고각발사를 위해 거의 수직으로 발사하였다. 중국의 잠수함 탄도탄 쥐랑이나 미국의 트라이던트 미사일의 경우 45도보도 약간 높은 각도로 발사한다. 이는 사출과 점화시 미사일 폭발할 경우 그 잔해로 잠수함이 손상되는 일을 최대한 피하자는 의도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북도 초기 북극성 1호 발사 때는 그렇게 사선 각도로 쏘았다. 하지만 최근 발사한 북극성 잠수함 탄도탄은 모두 거의 수직에 가깝게 쏘았다. 이는 폭발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자신감이 있거나 설령 폭발한다고 해도 폭발 잔해가 잠수함에 닿기 전에 피신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깊은 곳에서 발사할 기술이 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 일반적 탄도미사일 궤적     ©자주시보

 

▲ 요격 회피를 위해 변형 포물선 궤적을 그리는 최신 대륙간탄도미사일  궤적, 사진은 러시아의 SLBM 예이다. ©자주시보

 

그러면 수직 발사가 왜 필요한가.

상대의 요격을 피하고 최대한 빠른 시간에 상대를 타격하기 위해서라고 추정된다. 수직으로 쏘아야 최단거리로 우주공간에 진입하게 되어 초기 상승 단계 요격을 어렵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수직상승을 하게 되면 어느 방향으로 날아갈지를 위성으로도 계산하지 못해 어느 지역 요격 미사일을 가동할지 판단이 어려울 것이다.

 

▲ 탄도미사일 대기권 재돌입체 시험결과를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 재돌입체가 대기권과 마찰열로 녹아깎이면서 기화열을 이용하여 온도를 낮추는데 표면이 고르게 깎여야만 안정적인 비행이 가능하고 또 특정부분만 집중적으로 깎여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매우 고난도 기술이다.    ©자주시보

 

과거처럼 대칭형 포물선 비행을 하면 요격이 아주 쉽다. 올라가는 각도와 속도를 알면 언제 어디를 지나 어디로 떨어질지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신형 탄도미사일들은 일단 최대한 빨리 수직으로 우주공간으로 올라간 다음 불규칙한 카오스적 비행으로 상대 요격레이더를 교란 시킨 후 임으의 순간 방향을 잡고 목표로 돌진한다. 특히 가능한한 높이 올라 중력가속도도 최대한 활용하면서 내리꽂히기 때문에 그 목표돌진속도가 마하 30까지도 나온다. 당연히 대기권 재돌입시 총격과 발열이 극심하기 때문에 이 재돌입체를 잘 만드는 기술이 있어야만 이런 미사일을 개발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북이 지난번에 재돌입체 기술을 시험을 통해 공개한 것은 그런 기술을 확보하고 있음을 과시한 것이다.

 

실제 국방부에서도 이번 북극성은 고각으로 최대한 우주공간으로 높이 올라가 사거리 500KM를 비행하며 일본 배타적경제수역에 착탄했다며 미사일탄두의 대기권재돌입에도 성공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하였다.

 

▲ 이스타항공 김재현 부기장이 24일 새벽 북이 미사일을 시험발사하던 당시 비상하는 북 미사일을 촬영한 동영상 화면 갈무리    ©자주시보

 

그리고 실제로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우주공간으로 올라가는 북의 북극성 미사일의 비행궤적을 당시 이천 부근을 날던 이스타항공 소속 김재현 부기장이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유튜브에 올려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북의 북극성은 요격까지 매우 어려운 세계 최강, 최첨단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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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태 “이젠 협상으로 될 일 아냐…특별법 개정‧특검이 답”

 

더민주 초선, 세월호 특조위‧유가족과 간담회.. “‘최선’, 결과로 보여 달라”
김미란 기자  |  balnews21@gmail.com
 

 
   
▲ 더불어민주당 초선의원들이 25일 서울 광화문 광장을 찾아 세월호 특조위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 송현석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서울 광화문 광장을 찾은 더불어민주당 초선 의원들에게 이젠 협상이 아닌 세월호 특별법 개정과 특검 의결을 위해 앞장서 달라고 당부했다.

더민주 초선의원 40여명은 25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정부여당에 특조위의 조사기간 보장과 진상규명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광화문 광장까지 도보로 이동해 유가족들과 세월호 특조위를 만났다. <관련기사 ☞ 더민주 초선의원들 “朴대통령, 세월호 진상규명 약속 지켜야”>

이날 간담회 자리에서 유가족과 특조위원들은 초선 의원들의 결의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도, ‘여소야대’ 국면에서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좀 처럼 의지를 보이지 않는 야당에 대한 적지 않은 실망감을 표하기도 했다.

단원고 2학년 5반 고 오준형 군의 엄마 임영애씨는 “‘최선을 다하겠다’, ‘함께하겠다’는 그 말로 2년 6개월 가까이 버텼지만 특조위는 강제 종료되고, 유가족들은 또 단식을 하고 있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며 막막한 심경을 토로했다.

임씨는 “희생된 304명의 아이들은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그 아이들이 죽었다. 피해자 부모들이 가해자가 된 이 마당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이제 들리지 않는다”며 국회의원들에게 “일 해 달라. 저희 말에 응답 해 달라. 제발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저희도 그만하고 싶다. 하지만 엄마인데, 내 자식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뭐라도 해야하지 않나”며 “저희 맘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셔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 말을 결과로 보여 달라”고 당부했다.

   
▲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을 찾은 더불어민주당 초선 의원들이 세월호 특조위 관계자들과 단식농성 중인 유가족들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세월호 특조위와 유가족들은 농성장을 찾은 더민주 초선의원들에게 “세월호 특별법 개정에 앞장서 달라”고 당부했다. Ⓒ 송현석

세월호 특조위원들은 이날 ‘세월호 특별법 개정’과 ‘특검 의결’을 강조했다.

이석태 위원장은 “세월호 특조위가 단식을 시작할 때 무기한이라고 했지만 사실 9월 이전까지는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거라 기대했다”면서 “하지만 8월도 다 지나고 있고, 냉정히 따지면 이젠 협상으로 될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정부의 강제종료 조치로 2개월을 손해 봤고, 지금도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하며, “12월까지 활동기간을 보장 받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특별법 개정만이 답”이라고 강조했다.

권영빈 진상규명 소위원장도 “지난 19대 때도 특조위 조사활동기간 보장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농해수위와 원내대표간 핑퐁게임을 하다 끝났다. 그 모습이 지금 재현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젠 국회가 특검 의결, 특별법 개정을 위해 나서달라”고 당부했다.

세월호 문제를 대하는 야당 지도부의 태도를 꼬집는 목소리도 나왔다.

박종운 안전사회 소위원장은 “지금의 야당이 원래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 때의 목적과 취지를 유지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묻고 싶다”며 “19대 때 힘들게 싸워 만들어낸 특별법을 지키려는 의지가 20대 국회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박 위원장은 “지금 현재의 특조위의 생존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현재의 특조위가 없어진다 치자, 그럼 특별법 개정을 통해 내년에 또 다른 특조위를 만들어서라도 진상규명을 하겠다는 의지를 야당이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결과를 말을 해줘야 여당이 경각심을 가질 것 아니겠냐”고 지적하며 “야당이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한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 일치단결 해달라”고 주문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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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본 낙동강 참사, 3분 3초 동영상

 
[4대강 청문회를 열자] 드론으로 찍은 '독조의 강'

16.08.25 18:34 | 글:김병기쪽지보내기|영상:이희훈쪽지보내기|편집:김예지쪽지보내기

4대강 사업, 그 뒤 5년. 멀쩡했던 강이 죽고 있습니다. 1000만 명 식수원인 낙동강 죽은 물고기 뱃속에 기생충이 가득합니다. 비단결 금강 썩은 펄 속에 시궁창 깔따구와 실지렁이가 드글거립니다. 혈세 22조원을 들인 사업의 기막힌 진실. '4대강 청문회'가 열리도록 '좋은기사 원고료 주기'와 '서명운동'에 적극적인 동참을 바랍니다. 이번 탐사보도는 환경운동연합, 대한하천학회, 불교환경연대,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이 공동 주최하고 충남연구원이 후원합니다. 4대강 특별취재팀의 활동은 페이스북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말]
이명박씨, 안녕하세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영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늘에서 본 낙동강의 모습입니다. 1300만명의 영남인들이 식수원으로 사용하는 젖줄입니다. 3분3초, 잠깐만 시간을 내어 주세요. '녹조는 물이 맑아진 증거'라고 억지를 부린 당신도 분명 좋아할 겁니다. 
 

이명박씨, 강은 무슨 색깔인줄 아시나요? 하늘빛입니다. 맑은 강은 하늘을 닮습니다. 투명하게 몸을 하늘빛으로 색칠합니다. 거짓말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도화지에 강의 색깔을 흰색으로, 때로는 파란색으로 칠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4대강 특별탐사 보도팀이 찍은 드론 영상을 보셨나요? 짙은 녹색입니다. 마이크로시스틴이라는 독성 물질을 함유하고 있는 '독조의 강'입니다. 이 강을 바라보고 자란 아이들은 앞으로 무슨 색깔로 강을 색칠을 할까요? 정말 끔찍합니다. 우리들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4대강을 하루빨리 회복시켜야 합니다. 

당신을 4대강 청문회에 세우려고 취재를 시작한 탐사보도팀은 24일 오후 금강 취재 일정을 마치고 낙동강 달성보 하류 3km지점인 박석진교로 갔습니다. 지금 '세계 명문대학 조정축제'가 열리는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수 킬로미터의 낙동강 거대한 강폭을 꽉 채운 녹조를 보았습니다. 숨이 막혔습니다. 녹색강이 한 몸뚱이로 웅크려 있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명박씨, 녹조로 쑥대밭 된 4대강을 세계 만방에 홍보하려고 작정을 한 겁니까? 다음날(25일) 오전에 찾아간 세계조정축제 현장에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수자원공사의 모터보트 2대가 녹색강을 휘젖자, 녹색 빛이 약간 옅어졌습니다. 그 다음 조정 선수들이 투입돼 세계 축제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만든 녹조가 그래도 부끄러웠나 봅니다.      

오늘부터 '4대강 독립군'은 본격적으로 낙동강 탐사를 시작합니다. 바쁘시더라도 오마이뉴스 페이스북에 실시간으로 올리는 현장 기사를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청문회에 선다면 참고할만한 풍부한 자료와 생생한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전세계로 페이스북 실시간 라이브 중계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도 부탁드립니다. 금강을 지켜온 김종술 기자와 낙동강을 지켜온 정수근 기자를 응원하는 '좋은 기사 원고료'에 적극 참여해 주십시오. 목표액 3000만 원을 달성한다면 해외 취재를 통해 죽어가는 4대강의 대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청와대도, 국회도 열지 못하는 '4대강 청문회'를 열려면 10만인 서명운동으로 여론을 만들어야 합니다. 환경운동연합 등이 진행하는 서명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이전 기사 보기] 4대강 청문회를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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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전문가들 “북한, 사드 무력화 입증”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6/08/25 10:09
  • 수정일
    2016/08/25 10:0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분석] ‘사드’ 무용지물 증명한 북한의 잠수함탄도미사일(SLBM) 발사
 
김원식 | 2016-08-25 08:58:0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분석] ‘사드’ 무용지물 증명한 북한의 잠수함탄도미사일(SLBM) 발사
한미 전문가, “북한 SLBM 발사로 사드 무용성과 억제 능력 과시”

ⓒ민중의소리

북한이 24일 오전 동해상으로 잠수함탄도미사일(SLBM) 발사 시험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면서 한국에 배치 예정인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무용론이 더욱 확산하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SLBM을 장착한 북한의 잠수함이 사드 레이더의 탐지 거리를 벗어난 공해상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사드 포대가 이를 사전에 탐지 및 요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 전략사령부는 24일, “북한이 발사한 SLBM이 동해상으로 대략 300마일 이상을 날아가 일본 공해상(방공식별구역) 근처에 떨어졌다”고 밝혔다. 한국 합동참모본부도 “북한이 발사한 SLBM이 약 500km를 비행했다”며 “지난 수차례 시험발사에 비해 기술적으로 진전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특히, SLBM은 초기 개발단계에서 300여㎞를 비행하면 성공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합참은 북한이 이번에 발사한 SLBM은 사실상 성공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북한은 예상보다 빠른, 이르면 내년 초에 SLBM을 실전 배치할 수 있는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SLBM은 사실상 사전에 탐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사드의 배치 필요성이 커졌다고 주장하지만, 수중에서 은밀하게 기동하는 잠수함이 사드 레이더의 탐지 범위인 120도를 넘어선 공해상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면 사드는 탐지와 요격이 불가능한 무용지물이 된다. 북한이 한국의 사드 배치 무력화를 노리고 이번에 SLBM 시험 발사를 강행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이다.

북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모습ⓒ뉴시스

한미 전문가들 “북한, 사드 무력화 입증”
북한, SLBM 이르면 내년초 배치 가능성

이에 관해 북한 핵과 미사일 등 비확산 분야 전문가인 제프리 루이스는 “북한의 이번 SLBM 발사는 사드 레이더의 범위인 120도를 넘어서는 뛰어난 대응 능력(countermeasure)을 보여 준 것”이라며 “북한은 잠수함이 사드 레이더를 벗어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해 사드(배치)의 무력화를 증명했다”고 평가했다. 루이스는 “(그동안) 북한은 살보 발사(salvo launches, 여러 개 미사일을 동시에 발사). 사드 요격 미사일보다 속도가 빠르게 장거리 미사일의 고각 발사, 그리고 잠수함 미사일 발사 등 대응 능력을 증명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북한의 이러한 의도는 자부심(pride) 표출을 비롯해 여러 의도가 있겠지만, 간단한(simple) 전략만으로도 (미국의) 미사일방어(MD)를 분쇄(defeat)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의 SLBM 발사 시험에 관해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북한의 이번 SLBM 발사 시험은 사드 무력화 시도를 넘어, 본질적으로 2차 공격 능력을 갖추고 한국보다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있는 미군 기지나 미 본토에 대한 억제 능력을 갖추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대표는 “이러한 상황에서 사드나 SM-3가 더 필요하다는 주장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드 유용성 문제에 관해서도 “간단히 말해서 사드 레이더 탐지 범위 밖에서 발사되는 SLBM은 물론, 사드의 요격 고도 범위(40~150km)를 벗어나는 미사일 발사에 대해서도 (사드가) 못 잡는 것 아니냐”며 사드 도입 필요성을 일축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이번 SLBM 시험 발사 성공으로 “전후방을 다 탐지할 수 있는 360도의 탐지와 요격 능력을 구비했다고 하더라도 SLBM이 자세 각도를 낮춰서 낮은 고도로 발사할 경우, 요격은 힘들다”는 의견도 개진하고 있다. 또 일부는 “북한이 SLBM 발사에 성공함에 따라 우리 군은 앞으로 지상 킬체인 뿐 아니라, ‘수중 킬체인’까지 구축해야 한다”며 “SLBM을 탑재한 북한 잠수함을 들키지 않고 장시간 추적하려면 물속에서 1~2개월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잠항 능력이 뛰어난 핵추진 잠수함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그만큼 현재 논의되고 있는 사드 배치가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 대해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다.

*‘민중의소리’ 24일 자에 게재된 필자의 기사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1&table=newyork&uid=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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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몰이 명예훼손 승소 재미 동포 린다 리 씨 인터뷰

종북몰이 명예훼손 승소 재미 동포 린다 리 씨 인터뷰
 
 
 
뉴스프로 
기사입력: 2016/08/25 [01:40]  최종편집: ⓒ 자주시보
 
 

 개인 승리 아닌 재미동포 승리라 생각
– 정의는 그냥 주어지지 않아

                                                                          2016/08/22

                                                                                                편집부

 

▲ 세월호 시위 중인 린다 리 씨     © 뉴스프로

 

2년간의 재판 과정 후에 종북몰이에 대한 명예 훼손 소송에서 린다 리 씨가 승소했다. 당시 한국 보수 언론들이 해외 민주화 단체 회원들의 신상을 털고 종북몰이한 것에 대해 많은 동포들의 분노가 대단했다. 그래서 이 재판 결과는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재판 승소 소식을 접한 후 뉴스프로는 린다 리 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한 심경을 전한다.

 

1. 재판이 시작된 후 2년이 지나 마침내 미시 USA를 종북이라고 매도한 보수 인터넷 매체 발행인과 기자들이 벌금형을 받았다. 그동안 그리고 지금 심정은 어떠한가?

 

린다: 2년간의 지루한 싸움이 끝났다. 4건의 소송 모두 승소해서 기쁘다. 쉬운 싸움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렇게 오래 걸릴지는 몰랐다. 블루투데이 측에서 자꾸 여러 가지 트집을 잡아서 재판이 계속 연기됐고, 도중에 담당 검사와 판사가 바뀌어서 내용을 다시 보내기도 했다. 내가 대표해서 소송을 했지만 나의 승리가 아니라, 재외동포들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2년간의 변호비용에도 못 미치는 가벼운 손해배상 판결은 앞으로도 재발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쉽다. 

 


2. 소송을 위해 재외 동포들의 십시일반으로 후원을 해 준 것으로 알고 있다. 후원해 주신 분들께 드릴 말씀이 있다면 한마디 부탁한다.

 

린다: 승소 소식이 언론 보도를 통해 나간 어제 소송비용을 후원해 주신 분들께 이메일과 MissyUSA, 페이스북 등을 통해 다음과 같이 감사 인사를 드렸다.

 

“길고도 지루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2년 만에 여러분께 승리의 소식을 전합니다. 여러분들께서 함께해 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정의가, 진실이, 그리고 함께하면 이긴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이길 수 있었고, 함께 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3. 린다 리 씨 사건 당시는 세월호 시위가 미국에서 점점 거세게 확산되고 있었고, 많은 해외 민주화 운동 단체 회원들의 신상이 털리는 일이 있었다. 왜 보수언론의 타깃이 되었다고 생각하나?

 

린다: 미주 37개 도시에서 세월호 시위가 열릴 정도로 해외에서 세월호 시위는 뜨거웠다. 주로 30, 40대의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이 MissyUSA 사이트를 통해서 자발적으로 모였다. 그중에는 전부터 시민운동을 해온 분들도 있었겠지만, 어느 단체소속이 아닌 엄마, 아빠 개인으로 모였다.

 

그런 자발적인 모임을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몇몇 핵심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지목해서 ‘종북’으로 몰고 신상을 털면 두려워서 그만둘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린 부모이기에 그만둘 수가 없었다.

 

 

4. 소송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린다: 두 가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첫 번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이 저조해질 무렵, 소송으로 인해 오히려 해외에서의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고 지역 간의 연대가 더욱 돈독해졌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십시일반으로 소송비를 모아 겨우 소송을 시작했는데, 해외에 살기 때문에 공탁금을 내지 않으면 소송이 기각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하마터면 소송을 포기할 뻔한 것이다. 하지만, 소식을 들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공탁금을 마련해서 소송을 재개할 수 있었다.

 

 

5. 린다 리 씨 승소는 큰 의미가 있으며, 근거 없이 종북이라 보도할 경우 언론매체는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해외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동포들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싶은가?

 

린다: 내가 소송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정부에 대해 비판을 하면 북한을 추종하지 않아도 ‘종북’으로 몰아가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특히, 해외에 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해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간 재외동포들에 대한 ‘종북몰이’가 도를 넘을 정도로 지나쳤다고 본다.

 

그래서, 그것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선 누군가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례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외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재외동포들은 늘 조국인 대한민국이 잘되기만을 바라며 몸은 멀리 해외에서 살고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해서 시위도 하고, 서명운동도 하는 것이다. 이런 애국심에서 나온 행동을 ‘종북’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6. 린다 씨가 보는 한국의 민주화는 어떤 상태인가?

 

린다: 고등학교 때 이민 와서 30년째 미국에서 살고 있다. 미국도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나의 눈으로 보기에는 대한민국은 지난 8년간 민주주의가 급속도로 후퇴해서 내가 한국에서 살던 70, 80년대 수준으로까지 되돌아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특히, 언론은 거의 미개한 수준인 것 같다. 언론은 국민에게 사실을 보도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대한민국의 대다수 언론의 왜곡, 편파 보도를 보면 정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7. 미 시민권자 아이들에게 이번 소송에서 이긴 엄마로서 해 줄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이 있나?

 

린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우리 엄마는 ‘activist(활동가)’라고 소개한다. 정의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불의를 보고 참지 않고 그에 맞서 싸워야만 얻을 수 있다는 걸 이번 소송을 통해 아이들이 깨달았길 바란다.

 

 

8.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어떤 활동을 할 예정인가?

 

린다: 사실 아무런 활동도 하고 싶지 않다. 아니,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실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어떤 계획을 하며 활동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때그때 마음이 가장 쓰이는 곳에 생각보다 행동을 먼저 하게 된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은 한국에 THAAD 를 배치하는 것에 반대하는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금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두고두고 못난 조상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시민권자로서 내가 내는 세금이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깨뜨리고 군비경쟁을 가속화 하는 데 쓰이는걸 원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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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에서 난리치고 여기로 온다니" '사드 불똥' 튄 김천, 분노한 시민들

 

[현장] 야유받은 이철우 의원... 시장·시의원은 삭발

16.08.24 21:50l최종 업데이트 16.08.24 23:22l

 

 

▲ 김천 학생들의 외침 "한반도 사드 반대한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방어를 위해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 배치 제3후보지로 김천 인근이 거론되자, 24일 오후 경북 김천 삼락동 김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사드배치 결사 반대 범시민투쟁 결의대회'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한반도 사드 배치 반대하는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유성호
▲ 사드 반대 김천 시민들 "이 땅에 사드 한 발도 못 들어온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방어를 위해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 배치 제3후보지로 김천 인근이 거론되자, 24일 오후 경북 김천 삼락동 김천종합운동장에서 시민들이 '사드배치 결사 반대 범시민투쟁 결의대회'를 열어 사드 배치 반대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유성호


사드 불똥이 튄 김천시민들의 분노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정부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이른바 제3후보지로 김천과 인접한 성주 롯데 골프장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24일 김천시민들이 처음으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날 오후 6부터 김천종합운동장에 모인 8천여 명의 성난 민심에 답하기 위해 시의원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김천사드배치반대투쟁위원회(아래 투쟁위) 공동위원장들은 즉석에서 삭발했고, 시장도 머리를 깎았다. 

투쟁위 수석공동위원장을 맡은 김세운 김천시의회 부의장은 "사드가 피해가 없다면 왜 가장 최적지라고 발표했던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나"면서 "우리 김천에 사드 배치는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성주의 사드 배치를 사실상 남의 이야기로 생각해왔던 지역의 민심에 대한 반성도 있었다. 박희주 시의원(무소속)은 "성주에 사드가 유치된다고 했을 때 불구경했지 않나"라면서 "우리 집에 불똥 튀니까 불 꺼달라는 셈 아닌가"라고 자성론을 제기했다. 박 시의원은 "두 번 반성하지 말고 후회 없는 김천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성주 먹기 싫다고 뱉은 음식 김천 먹을 수 있나"
▲ 삭발하는 박보생 김천시장 '사드 결사 반대' 북한의 탄도미사일 방어를 위해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 배치 제3후보지로 김천 인근이 거론되자, 24일 오후 경북 김천 삼락동 김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사드배치 결사 반대 범시민투쟁 결의대회'에 박보생 김천시장(가운데)을 비롯한 공동위원장들이 사드 배치 반대를 요구하며 삭발하고 있다. 이날 박 시장은 "4만 5천 성주군민이 막아서 성주군민이 먹기 싫다고 뱉은 음식 김천시민이 먹을 수 있나"며 "14만이 넘는 여러분이 단결한다면 어떻게든 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사드 배치 반대하겠다"고 투쟁 의지를 밝혔다.ⓒ 유성호
▲ 김천 시민들의 야유에 급히 자리 떠나는 이철우 이철우 새누리당 의원이 24일 오후 경북 김천 삼락동 김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사드배치 결사 반대 범시민투쟁 결의대회'에 참석해 인사말 도중 시민들의 야유가 이어지자 급히 자리를 떠나고 있다. 이날 김 의원은 "절대 국회의원 한 번 더 하기 위해서 연연하지 않는다"며 "나라가 잘 되도록 하고 김천이 절대 손해보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유성호
박우도 투쟁위 공동위원장도 울먹이며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호소했다. 그는 "내 자식도 소중한데 남의 자식이라고 안 소중하지는 않다"면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런 위험한 걸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박보생 김천시장은 예정에 없던 삭발을 감행했다. 박 시장은 "성주군민이 먹기 싫다고 뱉은 음식을 김천시민이 먹을 수 있나"라면서 "여러분이 단결한다면 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사드 배치를 결사반대하겠다"고 약속하며 그 자리에서 삭발을 하겠다고 나섰다. 박 시장이 삭발하자 투쟁위 위원장들도 덩달아 삭발했다.  

박 시장과 투쟁위원장들의 삭발을 하는 사이 이철우 새누리당 의원이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무대 옆에 등장했다. 이 의원이 오후 7시께 무대에 오르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하고 흥분한 일부 주민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물병을 던지기까지 했다. 

사드 배치에 찬성한다고 밝혔던 이 의원은 이날만큼은 납작 엎드리는 모양새였다. 그는 "이렇게까지 국방정책이 흔들리는 나라, 정말 죄송하게 생각한다"면서 "대한민국도 지키고 우리 김천도 확실히 지키겠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저는 사드 배치와 관련해 오래전부터 주민 설득이 되고 충분한 이해가 가고 난 다음에 배치지역을 발표하도록 했다"면서 "어제도 국방부 장관에게 제3후보지 반드시 주민들이 오케이(OK)할 때 그때 발표해야 한다고 얘기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의원을 향해 주민들은 "이철우 내려와", "집에 가" 등을 외치며 야유를 보냈다. 

주민들 '사드 배치 안돼'... "김천이 반대하면 또 어디로 옮길 거냐"
▲ "김천 시민 위협하는 사드 배치 반대한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방어를 위해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 배치 제3후보지로 김천 인근이 거론되자, 24일 오후 경북 김천 삼락동 김천종합운동장에서 시민들이 '사드배치 결사 반대 범시민투쟁 결의대회'를 열어 사드 배치 반대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유성호
현장에서 만난 주민들은 사드 배치를 철회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구미를 떠나 김천으로 이사를 왔다는 김민희(42)씨는 "구미는 공장도 많고 해서 공기도 맑고 공원도 많은 곳에서 아이들과 즐겁게 살기 위해 이사를 왔는데 이곳으로 사드가 온다니 저희로서는 통탄스럽다"고 말했다. 

혁신도시인 율곡동에 살고 있다는 김아무개(33)씨와 신아무개(36)씨는 "사드가 김천 근처에 배치된다고 해서 당혹스럽다"면서 "우리는 사드가 김천에만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민들은 김항곤 성주군수를 향해 원망스럽고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농소면에서 자두와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다는 차해수씨는 "골프장에서 우리 집까지는 약 3.5km에 불과하다"며 "성주에서 난리치고 이곳으로 온다니 상당히 황당하고 불안하다"고 말했다.

사금분(61)씨는 "농소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았다"며 "성주군수가 왜 김천 인근에 사드를 배치하도록 요구했는지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정부의 행태가 더 웃긴다. (사드를) 성주에 결정했으면 끝까지 하든지 주민들이 반대한다고 다른 곳으로 옮기고... 김천이 반대하면 또 어디로 옮길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투쟁위는 사드 배치 결의문을 발표했다. 투쟁위는 결의문을 통해 ▲ 김천시민의 안전과 생존권을 위협하는 제3후보지 사드 배치 요청 결사 반대 ▲ 시민 동의 없고 행정절차 무시한 원칙과 일관성 없이 행동하는 국방부의 각성 ▲ 지역 갈등 초래하며 김천시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사드배치를 끝까지 막아내자고 호소했다. 

한편 김천 투쟁위는 25일부터 매일 오후 7시부터 율곡동 안산공원에서 촛불집회를 열기로 하고 한 달 동안 집회신고를 했다고 밝혔다. 또 SNS를 통해 3000여 명이 넘게 모였다며 '김천 사드 반대'가 아닌 '대한민국 사드 배치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기로 했다.
태그: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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