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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복 “정부의 대북정책은 명백히 실패했다”

<추가2> 6.15남측위, 광복 71돌 8.15민족대회 개최..공동호소문 발표(전문)
김치관/이승현 기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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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15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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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남측위원회는 15일 대학로에서 8.15민족대회를 개최했다.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이 대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는 올해 광복 71돌을 맞으며 서울에서 남북해외의 각계각층 대표들이 참가하여 진행하기로 하였던 민족공동행사가 비록 성사되지 못하였지만 해내외 각계각층의 접촉과 통일회합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앞장에서 노력해나갈 것이다.”

6.15남측위원회는 15일 오전 11시 서울 대학로에서 ‘광복 71돌, 한반도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815 민족대회’를 개최하고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6.15민족공동위원회) 민족공동호소문을 발표했다.

호소문은 “만남과 대화가 없이는 평화도, 통일도 결코 실현될 수 없다”며 “민족공동행사들과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여성, 학술, 언론, 종교 등 계층별, 부문별 지역단체들 사이의 다방면의 접초고가 왕래를 적극 추진해 나가자”고 호소했다.

또한 “남과 북의 정당, 사회단체간 다양한 접촉과 전민족적인 통일대회합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자”면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비롯하여 남과 북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함께 만든 통일의 길을 열어놓았던 경험과 성과들에 기초하여 오늘의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 이정이 6.15부산본부 상임대표와 정종성 한국청년연대 공동대표가 공동호소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앞서, 남과 북, 해외의 연석회의 준비모임 대표들은 지난 11~12일 중국 선양(심양)에서 실무회의를 갖고 연석회의를 추진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공동준비기구를 구성해나가기로 합의했다. 공동호소문의 ‘전민족적인 통일대회합’은 바로 이 연석회의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6.15남측위원회 관계자는 “심양 실무회의에서 공동호소문을 채택키로 합의했다”면서도 “충분한 내부 검토 과정을 거치지 못해 남북간 약간의 표현 차이 등이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이창복 상임대표의장은 대회사에서 “최근 수년간 민족공동행사가 제대로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서울 8.15민족공동행사와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가 정부의 민간교류 불허 조치로 무산됐음을 확인하고 “정부의 대북정책은 명백히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대학로에는 통일 원로들과 통일선봉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창복 의장은 개성공단 폐쇄와 한일 ‘위안부’문제 합의와 사드 배치 등을 거론하며 “이 모든 것을 ‘북한 압박을 위해’했다고 말하지만, 동족을 말살하겠다며 외세를 끌어들이고, 나라의 주권과 평화를 내팽개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나아가 “한반도 전쟁을 끝내는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자”면서 “사드를 배치할 것이 아니라 관계 정상화로 평화협정 체결로 나아가면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6.15남측위원회는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대화와 교류, 만남의 장을 복원하려 한다”며 지난 11일 중국 심양에서 남과 북 해외의 대표들이 회의를 갖고 연석회의를 비롯하여 통일회합과 접촉을 전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부가 북한주민접촉 신청서의 수리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달리 6.15남측위원회가 지난 11~12 중국 선양에서 열린 실무회의 참여를 강행하고 회의 결과를 발표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 왼쪽부터 김영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후지모토 야스나리 일본 포럼 환경인권평화 공동대표,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김영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 총무는 격려사에서 사드 배치의 대안을 제시하라고 국민들을 윽박지르는 정부 당국을 겨냥해 “대안은 평화이며, 방법도 과정도 평화이어야 하고 그 결과도 평화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평화는 먼저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 “정의를 세우는 일에 최우선은 소통이다. 그것은 일방적인 선언이 아니라 의견을 묻고 토의하며 설득하고 그래도 잘 안되면 포기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많은 국민들이 사드배치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위정자들은 겸손하게 국민들의 뜻을 받들어 배치 결정을 포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총무는 또 “평화의 첫걸음은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63년 동안 휴전상태에 있는 불행한 이 한반도 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일”이라며,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 일본에서 온 '코리아 국제평화 포럼' 참가단 23명이 평화통일대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일본에서 온 후지모토 야스나리 포럼 환경인권평화 공동대표는 연대사를 통해 “오랜 세월에 걸친 일제 식민지배와 그후 민족 분단의 역사에 대해 일본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문을 열었다.

후지모토 대표는 일본 아베정권이 평화헌법 개악을 통해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유엔안보리 이사국과 같은 세계의 지도적 국가’가 되기 위해 획책하고 있으나 자민당 내에서도 강경파로 알려진 이나다 도모미를 방위상에 임명하는 등 본질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역사왜곡과 국가주의에 닿아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연설에 나선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는, 지난 25년간 진실규명을 요구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목소리를 외면하고 한국 정부가 10억 엔에 일본 정부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종결을 추진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윤 대표는 “정부는 화해와 치유라는 이름을 내걸고 재단을 만들었지만 100만원으로 재단을 설립한 후 일본 정부의 10억 엔이 들어올 날만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라며, “차라리 남은 임기 1년 반 동안 정부는 가만히 있으라”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또 “지난해 12월 28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정부의 위안부 합의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일본 기시다 외무상의 거래일 뿐”이라고 말했다.

윤 대표는 “위안부 강제동원을 전쟁범죄로 인정하고 공식 사죄하며, 법적 배상과 역사 교과서 수록, 추모비 및 추모관 건립, 그리고 책임자를 밝혀 처벌하라는 정당한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들과 함께 싸워나가겠다”고 밝혔다.

   
▲ ‘8.15반전평화대회 준비위원회’는 대학로에서 종각까지 평화통일대행진을 진행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은진 6.15남측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8.15민족대회는 이정이 6.15부산본부 상임대표와 정종성 한국청년연대 공동대표의 민족공동호소문 낭독으로 막을 내리고 이후 ‘8.15반전평화대회 준비위원회’ 주최로 평화통일대행진을 종각까지 진행했다.

참가자들은 풍물패와 기수단을 앞세우고 종로5가를 거쳐 종각 앞까지 편도 대로를 행진하며 ‘남북대화 재개하라’, ‘사드배치 철회하라’, ‘군사연습 중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많은 시민들이 행진대열을 지켜봤다.

박석운 민중의힘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는 종각 앞에서 오후 1시 30분께 열린 정리집회에서 “어제와 오늘 1박 2일간의 범국민행동을 통해서 성주의 사드 철회 투쟁을 전국화시키는데 우리는 성공했다”고 자평하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전쟁반도 평화실현 국민행동을 다시 모아 나가자”고 호소했다.

또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의 민중생존권 투쟁과 저 무도한 박근혜 정권의 민중방해 행위를 관통하는 민주수호투쟁을 모아서 11월 민중총궐기로 다시 한 번 서울에 집결하자”고 제안하고 “11월에 다시 만나자”며 함성을 유도했다.

   
▲ 8.15민족대회에 앞서 같은 장소에서 8.15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앞서, 8.15민족대회가 열린 같은 장소에서 민주노총 등은 ‘사드 한국배치 철회! 한반도 평화협정체결! 6.15 10.4 공동선언 이행! 8.15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으며, 결의문을 채택 사드 배치 저지와 평화협정체결, 연석회의 성사, 친일 청산 등을 다짐했다.

(추가2, 14:46)
 

<공동호소문(전문)>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역사의 그날로부터 어느덧 71년이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강탈당하고 유구한 역사와 넋이 깃든 정신문화적 재부와 자원을 깡그리 약탈당한 것은 물론, 우리말과 글까지 빼앗기고 식민지 노예의 삶을 강요당해 온 우리민족이다.
근 40년에 이르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시기 각계각층의 수백만 우리 동포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군수기업의 노예로,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가 목숨을 잃고 전대미문의 야만통치와 수탈에 신음해야 했다.
장기간의 굴함 없는 피어린 투쟁으로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기는 하였으나 우리 민족은 외세에 의해 둘로 갈라져 장장 70여 년 동안 민족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으며 조국통일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광복 71년, 분단 71년이 되는 오늘 이 땅위에는 여전히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6.15가 열어 놓은 남북사이의 모든 통일대로가 끊어지고 접촉과 왕래, 대화와 만남조차 실현되지 못하고 있으며 전쟁과 분단구조를 공고히 하려는 책동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권이 실현되고 공고한 평화가 보장되며 부강번영하는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여기에 민족의 밝은 미래가 있다.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는 온 겨레의 이러한 통일염원을 앞장서 실현해 나갈 굳은 의지를 다시금 표명하면서 온 겨레에게 열렬히 호소한다.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해결해 나가자.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의 힘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겨레의 주권과 평화를 실현할 수 있겠는가. 분열과 대결을 강요하는 온갖 책동을 물리치고 온 겨레의 단합을 실현해 나가자
상대방의 제도와 체제를 존중하는 기초 위에서 민족의 지혜와 힘을 합쳐 나가며 화해와 단합을 적극 추동해 나가자!

한반도에서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를 실현해 나가자!
평화를 실현하지 않고는 통일을 이룰 수 없고, 통일을 이루지 않고서는 평화를 영원히 지켜나갈 수 없다.
겨레의 삶의 터전이며 후손만대가 행복을 누려갈 삼천리 강토위에서 전쟁의 참화가 또다시 되풀이 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체의 전쟁대결 책동을 중단시키고, 공고한 평화체제의 수립을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자!

해내외 각계각층의 다방면적인 접촉과 왕래, 대화와 통일회합을 복원하고 활성화하자!
만남과 대화가 없이는 평화도, 통일도 결코 실현될 수 없다. 서로 상대방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속에서는 수십년 동안 쌓인 불신과 대결의 잔재를 청산할 수도, 통일운동을 전진시켜 나갈 수도 없다.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는 올해 광복 71돌을 맞으며 서울에서 남북해외의 각계각층 대표들이 참가하여 진행하기로 하였던 민족공동행사가 비록 성사되지 못하였지만 해내외 각계각층의 접촉과 통일회합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앞장에서 노력해 나갈 것이다.
민족공동행사들과 노동자,농민, 청년학생, 여성, 학술, 언론, 종교 등 계층별, 부문별, 지역단체들 사이의 다방면의 접촉과 왕래를 적극 추진해 나가자. 남과 북의 정당, 사회단체간 다양한 접촉과 전민족적인 통일대회합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자!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비롯하여 남과 북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함께 만든 통일과 평화번영의 결실들을 하루빨리 복원하고 바닷길, 땅길, 하늘길을 다시 열어 나가자!

8천만 동포들이여!
분열과 대결정책을 배격하고, 우리민족이 힘과 지혜를 합쳐 화해와 협력, 평화와 통일의 길을 열어놓았던 경험과 성과들에 기초하여 오늘의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자.
민족분열과 전쟁대결을 끝장내고 공고한 평화와 자주통일의 문을 활짝 열어나가자!

2016년 8월 15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 불볕 더위에도 불구하고 8.15민족대회가 열린 대학로에는 3천여명이 모였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대회 참석자들이 행진에 앞서 한반도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예술창작소 상상&공감의 타악공연.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평화의 나무 합창단의 합창 공연.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종로3가 탑골공원 앞 인도에서 일부 노인들이 사드 배치 반대를 외치는 행진 대열을 향해 반대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종각 앞에서 행진을 마무리하는 정리집회가 간단히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종각 정리집회는 신나는 율동과 노래로 마무리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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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열교수 대담, 탈북자 가족처벌 주장은 극악한 모함

정기열교수 대담, 탈북자 가족처벌 주장은 극악한 모함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8/16 [02:0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집단탈북과 집단납치 논란이 일고 있는 북 류경식당 종업원 여성들 사진     ©

 

중국 북 식당 동포처녀들 집단탈북 의혹 사건이 총선 직전 터진지 5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는데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12명이나 되는 북 동포 처녀들을 꽁꽁 가두어놓고 목소리마저 들려주지 않고 있어 온 민족의 걱정이 더욱 커지고 있다.

 

주류언론에서도 이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데 반북극우언론들만 민변에 보내온 위임장은 가짜 부모가 쓴 것이라는 둥, 처녀들의 부모들이 집단구금되어 정신교육을 받고 있다는 둥, 식당 안전책임자가 처형되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마구 퍼트리고 있다.

 

한반도 사드배치 결정, 3대전략폭격기 괌 증강배치 등 미국의 대북 군사적 압박을 최고 수위로 끌어올리자 북도 사소한 미국의 움직임에도 핵선제타격으로 대답하겠다고 나서고 있고 중국은 아직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남측에 경제보복조치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하여 전쟁이건 경제대란이건 무슨 사단이 곧 날 것 같다는 국민들의 우려가 터져나오고 있다.

 

이 전쟁위기와 경제위기를 동시에 극복할 유일한 길은 남북화해와 협력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북 여성종업원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동포애적, 인도적 견지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리라는 것이 본지의 진단이다. 그렇게만 되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하여 민변에 북녘 부모들의 위임장을 전달해준 정기열 칭화대 교수와 긴급하게 서면대담을 진행하였다. 다음은 그 대담 전문이다.

 

▲ 정기열 교수     ©자주시보

 

 

1.정기열 교수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남녘에서 흔히 말하는 “71학번”입니다. 동국대 불교철학과에서 1년 수학한 뒤 73년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으로 적을 옮겨 다시 대학을 시작한 뒤 군복무까지 마치고 1980년 미국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에서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모두 마치고 그곳에서 쭉 살며 일했습니다. 
그러다 2005년 모교 초청으로 서울에 돌아가 2학기를 가르친 뒤 우연한 기회에 2006년 봄에 중국사회과학원에 초빙되어 3년을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다 2009년부터는 칭화대학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로 일하게 되어 오늘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편 2000년대 말부터는 일본대학들(게이오, 릿쿄, 교토, 리츠메이칸, 도시샤대학 등)에 초빙되어 자주 일본을 오가다 2011년부터는 동경 조선대학교에도 초빙되어 오늘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5년 3월에 뜻밖에 김일성종합대학 사회과학대학(사회과학부, 철학부, 국제관계학부 포함)에 초빙교수로 위촉되어 오늘은 북녘땅에서도 우리민족의 후대를 가르치게 되는 귀한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11년부터는 매학기 중국, 일본, 북녘조국을 오가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학자이기 전에 평생 ‘통일운동가’입니다. 지난 시기 30년 넘게 그랬듯 앞으로도 해외동포로서 끊긴 조국의 허리를 다시 잇기 위한 자주평화통일운동에 남은 생애도 모두 바쳐 일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2. 정교수님께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이 사건을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3. 탈북종업원 부모들이 민변변호사들에게 위임장을 작성해 보내주셨는데 부모들에게 위임장을 받게 된 경위는 어떠한가요?

 

 2, 3번 질문에 함께 답하겠습니다.
지금 기억에 아마도 5월 17일 오전일 것입니다. 다음 날 18일 종합대학 강의를 모두 마치고 19일 오전 출국 예정이었습니다. 당시 오래 아는 미국동포가 평양을 방문하였기에 저도 잠시 그분이 머물던 평양호텔로 숙소을 옮겨 그곳에 있었습니다. 한편 저는 2010년 9월 칭화대학 주선으로 국제영문인터넷매체 <The 4th Media>(제4언론)를 창간하게 되면서부터 오늘까지 편집인 및 책임주필로 언론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2012년부터는 언론인 신분이 인정되어 북녘 어디서든 인터넷 사용을 허락 받아 체류 중에도 계속 언론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날 오전 호텔에서 언론작업 중 <자주시보>를 읽다 우연히 “12명 북녘종업원” 관련 기사를 접했습니다. 만약 “북녘가족들의 위임장을 구할 수 있다면 <국정원>에 의해 ‘감금상태’에 있는 12명 여성종업원 모두를 밖으로 데려 내올 수 있다”는 <민변>의 긴급호소문이 담긴 기사를 읽자마자 당시 저를 안내하던 최 선생에게 “내일(18일)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 만약 허락되면 그분들에게 딸들을 구하기 위해 민변을 포함한 서울 여러 통일운동, 인권단체들의 구원대책 활동을 알려드리고 가족들로부터 받은 위임장을 19일 북경에 나가는 즉시 민변에 전달하겠다”는 뜻을 당국에 긴급히 문의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18일 아침 안내선생을 통해 북녘당국이 “적극 지원하겠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날 오후 3시 평양호텔 2층 면담실에서 12명 종업원 모두의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면담실에는 북녘당국에 부탁한 3명의 촬영기사들과 사진사 외에 아무도 동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발표된 당시 찍은 동영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듯 먼저 천금보다 귀중한 딸자식들과 졸지에 생이별을 하고 감당키 어려운 슬픔과 근심에 가득찬 가족들을 진심으로 위로, 격려하고 현재 서울에서 진행되는 구원활동을 말씀 드린 뒤 부모님들이 면담실 현장에서 직접 작성한 위임장 원본을 모두 넘겨 받았습니다. 당시 저는 12명 부모들이 위임장을 직접 작성한 사실이 논란이 되지 않도록 북녘 당국에 면담 과정과 위임장 작성 등 전 과정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담아줄 것을 사전에 부탁했고 지원을 약속 받아 다음 날 19일 아침 약속대로 평양순안공항에서 모든 영상 및 사진자료들을 정확히 전달 받았습니다.

 

가. 정교수님은 북한에 가시는 것이 자유로운지와 북한 주민을 만나시는게 자유로운지 여부 및 그 이유는 무언인지요?
네, 자유롭습니다. 통일문제를 붙들고 30년 가까이 수도 없이 북녘을 찾았고 방문할 때마다 북녘동포들을 자유롭게 만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1987년에 취득한 “미국시민권” 덕입니다. 미국시민권 관련 참고가 될까 싶어 한두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기막힌 ‘아이러니’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시민권이 도대체 뭐길래 미국동포는 그것 하나 갖고 있다고 마음대로 북녘을 오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혀서 그렇습니다. 분단 시기 70년 내내 남녘동포들에게 북녘땅은 그 누구도 마음대로 오가지 못하는 “금단”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동포들은 시민권 하나 갖고 있다고 북녘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는 분단현실이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혀서 그렇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분단현실이 정녕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남녘은 1945년 9월 8일 첫 시작부터 “미국오작품”(Made in USA)으로 70년 내내 “워싱턴의 ‘완벽한 지배’(Full Spectrum Dominance)를 받는 땅”이라는 세상의 오래된 지적이 틀리지 않다 생각합니다. 지역 농촌이라는 경북 성주군민들마저도 최근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사드사태가 온 세상 특히 가까운 이웃나라들(중국, 러시아)에게조차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실 곧 “남녘땅은 70년 내내 결국 미국식민지였구나!”라는 손가락질을 이젠 피하기 어렵게 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미국시민권 관련 보탬이 될까 싶어 참고 삼아 좀 더 말씀드립니다. 
미국에 첫발을 디딘지 7년 뒤 미국시민권을 얻었습니다. 그때가 1987년입니다. ‘조국통일운동 차원에서 시민권 얻을 자격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신청하자’고 결의한 대로 당시 <재미한청련> 회원들은 다수가 목적의식적으로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통일운동 차원에서 금단의 땅이었던 북녘을 마음 먹은대로 방문하기 시작하게 됐던 배경입니다. 그때 농담으로 ‘로마시민권’이라 부르던 미국시민권 덕에 저희들은 박정희전두환군사독재정권 시절 재일동포들이 숱하게 경험한 끔찍스런 ‘조작간첩사건’ 같은 탄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1989년 7월 임수경 당시 전대협대표가 참가한 국제평화대행진(분단선돌파사건) 사업을 시작으로 이후 수십 차례 남북해외가 주축이 된 크고 작은 국제행사들을 조직하고 그 일들에 직간접으로 관계되었지만 아직 ‘조작간첩사건’에 엮이어 남녘땅 어딘가에 묶여있지 않은 채 오늘도 북녘조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오늘 길게 말씀드리는 바로 그 미국시민권 덕입니다. 앞에서 미국시민권 덕에 북녘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70년의 분단현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외세가 우리민족에 강제한 분단선돌파”를 목적으로 남북해외통일운동역량과 국제연대운동을 접목시켜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라는 구호를 내걸고 분단 이후 처음 시도한 평화행진 사업을 북녘에 제안키 위해 평양을 처음 찾았던 1989년 3월 22일부터 오늘까지 북녘을 방문한 총 횟수는 벌써 이미 몇 해 전 100차례가 넘었다고 합니다. 횟수가 50차례 넘었던 어느 때부턴가 저는 횟수 세는 작업을 아예 포기했는데 작년 2015년 북녘 <해외동포사업국>에 계신 어느 분이 알려주어 그런 줄 알았습니다.
미국여권을 가진 덕에 남녘에서 감옥에 가는 대신 그러나 저는 모두 3차례 서울에서 ‘강제퇴거’ 되거나 ‘입국금지자’가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얼마 전 신은미 선생이 서울에서 겪은 것과 같은 경험이었죠. 그 과정 오늘까지 저는 모두 3차례 도합 16년 남녘조국에는 못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강제퇴거’ ‘강제추방’ 첫 경험은 1988년 8월이었습니다. 당시 연세대에서 열린 <남북학생회담출정식>에 13명 국제반전평화인사들을 조직해 참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종로경찰서 외사과에서 안기부 ‘덕수궁 지하안가’로 넘겨져 “3일 내리 잠 안재우는” 일종의 ‘고문’이었던 ‘밤샘취조’ 뒤 당시 밖에서 모두 걱정했던 ‘조작간첩사건’ 대신 여권에 “5년 강제퇴거”란 낙인만 찍힌 채 ‘강제추방’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뒤 두번 더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전쟁 시기 미국군대에 의해 희생된 수백 만 민간인학살만행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전 민족적 차원에서 조직된 <남북해외전민특위>가 2000년 5월 결성되었을 때 당시 저는 사무총장에 피선되면서 전민특위 첫 사업으로 다음 해 2001년 미국에서 국제민간법정을 설치할 것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인 2001년 6월 남과 북(비자발급이 거부되어 영상으로)에서 참가한 전쟁 시기 민간인학살만행 생존자들, 피해자 가족들 6-70명, 그분들을 지원하는 남녘과 해외의 수백 명 통일운동가들 그리고 케네디/존슨 행정부 시절 법무장관 역임 뒤 평생을 마치 죄를 씻듯 국제반전평화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램지 클라크 변호사(당시 재판에서 수석검사 역을 맡아 자신의 조국을 ‘전범국가’로 기소) 등 모두 26개 나라들에서 참가한 세계양심들과 함께 전민특위는 뉴욕, 워싱턴에서 전쟁 뒤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코리아국제전범재판’을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전범재판 직후인 7월 초 저는 전민특위 사업 차 남녘에 들어가기 위해 서울에 갔으나 공항에서 뜻밖에 ‘입국금지자’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강제추방’된 뒤 이후 5년을 또 다시 남녘땅에 못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확히 10년 뒤 저는 그와 똑같은 경험을 또 다시 또 하게 됩니다. 2010년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침몰사건’ 약 한달 뒤부터 <통일뉴스>에 사건 관련한 글을 연재하던 중 2010년 5월 “천안함 관련 글을 계속 쓰면 …”이란 단서가 붙은 일종의 통보성 위협을 북경 주재 국정원 참사로부터 전달 받은 뒤 그때로부터 또 다시 6년 남녘에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입국여부도 확인할 겸 가족결혼식 참가를 위해 2013년 서울입국을 다시 시도했으나 예상대로 김포공항에서 ‘입국금지자라 들어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또 다시 ‘강제추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통일운동 관련 개인사의 일부를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태어나 자란 남녘땅에선 통일운동에 뛰어든 것이 “죄”가 되어 1984년부터 감시조사대상, 수배, 미행, 도청, 강제퇴거, 강제추방, 입국금지를 거듭하며 산지가 근 30년이 되는 반면 1989년 처음 방문했던 북녘에선 거꾸로 통일운동한 것이 “최고최상의 공로”가 되어 방문 때마다 진심으로 맞아주는 동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만나는 모든 북녘동포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과 믿음, 존경을 끝없이 받아 안으면 산지가 근 30년이 됩니다. 
어디를 원망하자는 것이 아니라 통일문제 관련 남과 북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다른 비극적 분단현실을 새삼 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북을 “자유롭게 오가며” 북녘동포들과 “자유롭게 만나” 대화도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길게 개인사까지 더해서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분단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탈북종업원 부모들에게 위임장을 받는 과정에서 부모들과 어떻게 연락을 하게 되었는지요?
앞의 1, 2 질문에 대한 답에서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다. 탈북종업원 부모들은 어디에서 만나 위임장을 받으셨는지요?
역시 위 1, 2에서 충분히 소개했다고 생각합니다.

 

라. 위임장을 받기까지 몇 차례나 만나셨는지요?
12명 여성종업원들의 모든 부모들과 당시 탈출에 성공한 동료종업원 7명을 5월 3일 평양 국제기자회견장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을 직접 만난 것은 가족들 위임장을 민변에 보내기 위해 스스로 이 일에 뛰어 들었던 5월 18일 평양호텔 면담실에서였습니다.

 

마. 현재도 탈북종업원 부모들이나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으실 수 있는지요?
오늘 자주시보 서면질문에 답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저는 종합대학 강의 차 1주일 전부터 북녘에 와 있습니다. 이번 체류 기간에도 8월 22일 떠나기 전 12명 종업원들의 가족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이미 이곳 당국에 문의하고 답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만나 뵙고 가게 되면 이후 상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바. 허강일(지배인)의 부모나 가족도 만나셨나요? 허강일은 신혼으로 부인이 있다고 알려져있는데 어떠한지요?
아닙니다. 허강일의 부모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허의 부모와 가족은 아마 평생 얼굴을 들고 살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게 얼굴을 살고 살 수 있겠습니까? 허는 아마 죽어서도 자신이 지은 죄를 씻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를 그가 알기는 하는지 정녕 의심스럽습니다. 12명 나어린 딸들을 가족과 생이별시킨 천추에 용서못할 범죄를 그는 아마 평생 가도 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12명 ‘집단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종업원 얼굴사진은 그들을 하루 빨리 구해내기 위해서인지 북녘당국이 먼저 나서 온 세상에 알리고 소개하는데 반해 허의 사진은 단 한번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이유, 무슨 배경에서 그리 된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가 비록 평생 씻지 못할 죄를 짓고 자기의 조국은 물론 제 아내마저 버리고 도망간 천하 몹쓸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얼굴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 이유가 혹 그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을 지켜주고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의문입니다. 

 

▲ 법원이 요구한 대로 보완수정한 민변 위임장에 서명하고 날인을 하는 북 여 종업원 서경아 양의 부모, 지장을 찍는 부모의 표정을 보니 왜 이렇게 눈물이 솟는지, 세상에 저런 표정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분노와 걱정에 사무친 저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하루라도 빨리 풀어주어야 사람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죽었는지 살았는지라도 알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4. 위임장을 작성한 것은 부모들이 자발적인 의사에서 한 것인가요? 
물론입니다. 물어보나마나입니다. 남녘에서 흔히 듣는 이런 류의 질문은 그 자체가 사람의 도리가 뭔지도 모르는 기가 막힐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어불성설의 질문이지만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답하겠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제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가족들을 만났던 현장인 평양호텔 면담실에서 부모님들이 위임장을 직접 작성하여 저를 통해 민변에 보내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들이 국가조직에 의해 집단납치된 것이 불보듯 명확한 상황에서 가만히 주저 앉아 있겠습니까? 주로 미국(일본, 한국)에 의해 70년 극단적으로 ‘악마화’된 북녘사회를 세상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그곳은 “사람사는 곳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질문 뒤에 숨은 분단시대의 지극히 병적이고 비극적이며 슬픈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5월 17일 우연히 접한 <자주시보> 기사가 제겐 참으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한편 국정원에 의해 집단납치된 것이 확실해보이는 12명 딸들이 북녘동포 어느 그 누구만의 딸자식이 아니라 제 자신의 딸자식과도 같다는 생각 또한 앞섰습니다. 동시에 제게 이번 사건은 많은 매체들이 이미 지적했듯 “권력위기에 처한 청와대가 총선결과를 염두에 두고 성급히 벌린 또 하나의 실패한 북풍사건”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번 사건이 남녘 친미사대세력의 70년 계속되는 또 다른 하나의 대형분단범죄사건이었기에 그들을 구해내기 위한 남녘동포들의 투쟁에 그 어떤 주저함 없이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각오로 뛰어 들었습니다.

 

가. 북한당국에서 부모들을 협박하여 위임장을 작성하게 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어떠한지요?
이 질문 또한 앞의 질문과 마찬가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문제는 70년 분단시대 내내 끝없이 반복되는 문제입니다. 1945년 8월 해방된 우리민족에게 분단이 강제된 뒤 70년 내내 이번 사드배치 결정에서처럼 철두철미 미국지배를 받는 남녘땅에서 쓰는 북에 대한 보도 가운데 과연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길 수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기획탈북사건’으로 흔히 불리는 이번 사건 같은 경우 국정원이 행동주체인 조건에서 물어보시는 대단히 악의적인 그런 류의 조작된 추측성 보도, 억측, 의혹들에 대해 길게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나. 위임장을 작성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하셨나요?
네, 위임장 작성과정을 모두 다 동영상으로 담아 이미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동영상 및 사진 원본은 모두 서울 민변에 인편과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또 <자주시보>에도 다는 아니지만 관련 동영상과 사진들을 기사보도에 참고가 되시라고 역시 보내드렸습니다.

 

다. 위임장을 작성한 부모들이 실제 부모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부모들이 맞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셨는지요?
이런 류의 의혹 역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지난 8년 “이명박근혜시대”라고 불리는 최악의 남북관계시대 서울주류언론매체들이 북에 대해 쓰고 말하고 보도하는 거의 모든 자료들은 남녘과 세상이 북녘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100% 거꾸로 잘못 이해하도록 하여 기존의 70년 ‘북한악마화’를 더욱 심화시키는데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북녘을 수시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수많은 해외동포들과 세상사람들은 서울권력과 남녘의 주류언론매체들이 하루가 멀다고 악마화하는 북에 대한 내용이 얼마나 병적으로 악의적이고 거짓과 중상, 모략, 조작, 날조로 가득한 것인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남녘동포들이 북녘사회의 진실에 접할 수 없도록 해서 남과 북의 형제가 끝없이 서로 갈등하다 불신에 빠진 채 서로 대결하도록 남북을 끝없이 갈라놓고 있는 미국의 우리나라에 대한 70년 분단지배정책을 하루 속히 극복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제가 만난 가족들이 실제 부모들이 아니다”는 류의 악의적인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대해선 답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5. 탈북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속아서 탈북한 것인지데 대해 알고 계시거나 이를 판단하게 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지요?
만약 12명 북녘종업원들의 소위 “탈북” 사건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때로부터 옹근 4개월이 훌쩍 넘도록 청와대, 국정원, 통일부가 주장하듯 그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한 것”이 사실이라면 왜 아직 단 한명도 세상에 내놓고 공개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울 <민변>이 추진한 서울지방법원의 공개증언대에 국정원 주장이 사실이라면 왜 그들을 법정에 내보내 그들 말처럼 “자발적으로 서울에 온” 사실을 세상에 밝히지 못하는가입니다. “빨갱이”라 불리는 <민변> 변호사들은 둘째치고 유엔최고인권대표소 성원들이 국정원을 방문해 북녘여성들과의 접견을 요구해도 그들에게조차 접견을 허용치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까지 드러난 사건 관련 전후사정과 모든 정황은 청와대, 국정원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소위 ‘집단탈북’이라는 정부 주장과 달리 북녘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백주대낮에 국정원 즉 국가조직에 의해 “집단으로 납치되어” 서울에 “강제로 끌려온”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웅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이 국가조직에 의한 일종의 국가테러행위사건으로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폭로될 경우 서울권력 자체가 공중분해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히 중대한 국가테러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저는 북녘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든 12명 북녘종업원들의 소위 “집단탈북” 사건은 당시 모든 상황, 조건, 앞뒤 사정이 그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한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 납치됐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 탈북종업원들이 중국에서 일을 할 당시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있는지와 있다면 그 내용은 어떠하며 북의 부모들이 그것을 공개할 수 있는지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과 사진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5월 3일 기자회견 때도 그리고 ‘로동신문’과 ‘우리민족끼리’ 등 북녘매체들에서 계속 소개하고 있기에 그 질문에는 좀 더 확신을 갖고 답할 수 있습니다. 네, 있습니다. 민변의 법정투쟁과 자주시보 같은 언론들에 혹시라도 그런 자료들이 도움이 된다면 부모님들을 설득해 구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번에 뵙게 되면 적극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민족끼리에는 주지하듯 그런 편지, 사진들이 틈틈이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민변으로부터 요구가 있을 경우 제 판단에 12명 딸들이 가족, ‘동무’(친구)들과 주고 받은 편지와 사진들을 소개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 윗 사진은 통일화보에 실린 사진을 통일뉴스에서 소개한 북의 유명 최삼숙 가수의 사진이고 아래는 납치된 딸 리은경 양의 접견과 석방에 관한 모든 일을 민변에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작성하는 모습, 이 사진은 민변에서 인신구제신청을 할 때 법원에 제출되었다. 위 아래 얼굴이 같다.     ©자주시보

 

나. 탈북종업원들 및 그 가족들의 북한 내에서 생활수준이나 지위는 어떠한가요?
5월 3일 기자회견장에서 본 그리고 5월 18일 직접 만나본 12명 종업원들의 가족(부모)들은 거의 모두 평범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소위 ‘높은 당간부의 자식들’이니 뭐니 하는 서울의 무책임한 보도처럼 그런 부모는 없었습니다. 100차례 넘게 북녘을 방문하고 있는 제 눈에 서울언론이 악의적으로 보도하는 그런 ‘높은 당간부’처럼 보인 부모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제가 본 것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들 중엔 이미 서울에 보도된 것처럼 북녘만 아니라 남녘에도 잘 알려진 남녘의 ‘국민가수’와도 같은 ‘인민배우’ 최삼숙 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만나본 그는 어느 다른 어머니들과 똑 같은 평범한 어머니였습니다. 세상에 알려지기론 그의 남편은 촬영기사라고 합니다. 사회주의국가인 북녘은 세상 대부분 나라들과 대단히 다른 사회입니다. 제 눈에 그분들 모두의 생활수준은 최소한 외관상 크게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북녘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들처럼 개인 재산규모에 따라 그들이 사는 집과 타고 다니는 차들 입는 옷들이 천지차이로 다른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북녘사회는 70년 가까이 매년 1년 12달 365일 미국으로부터 여전히 “핵침략전쟁위협”과 온갖 형태의 경제봉쇄, 금융제재를 받으며 사는 나라입니다. “세계유일초강국” 미국도 모자라 세계경제대국 일본, 분단된 남녘땅의 친미사대권력 나아가 워싱턴이 지배하는 유엔조직 포함 세상 거의 모든 것을 상대로 70년 여전히 가열찬 반제자주사회주의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북녘이 세상 거의 대부분 나라들과 참으로 많이 다른 이유일 것입니다.

 

6. 탈북종업원들이 한국에 입국한 이후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보낸 사실이 있는지요. 
제가 알기론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 제3자를 통하거나 외국을 통하는 등 간접적으로 연락을 받은 것은 있는지요? 
답: 알아보지 않았지만 제 판단엔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이곳에 물어보겠습니다.


나. 북녘가족들이 한국정부에 직접 연락을 취하거나 혹은 북녘이 남녘정부에 연락한 사실은 있는지요?
답: 전자는 없고 후자는 있되 직접 하지 않고 언론을 통해 한 것 같습니다.
 
7. 탈북종업원들이 인신구제청구 재판에 출석해서 자발적으로 왔다고 진술하면 북한 가족들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이 사실인지요?
세상에 그리도 뻔뻔하고 기상천외한 거짓이 또 다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이 직접 서울에 나가 딸들을 만나겠다는 제안은 북녘에서 맨 처음부터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녘에는 국정원이 만들어내는 그런 류의 대단히 유치하고 저질스런 거짓과 허위정보, 조작정보들을 믿고 사는 마치 암흑세상에 사는 것과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 현재 탈북종업원 가족들의 신변의 안전상태는 어떠한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분들은 본래 당신들이 하던 직장생활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고 생활에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졸지에 딸자식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면서 살아있어도 산 것 같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만약 자신들에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달라진 것이라고 합니다. 기쁨과 웃음이 사라진 채 피눈물 흘리며 사는 오늘의 부모들 처지를 빼곤 오늘 생사를 알 수 없는 12명의 종업원 가족들에게 달라진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고 듣고 직접 대화 속에서 확인한 사안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질문 자체가 미국지배 세상이 북에 대해 70년 반복하고 있는 끝없는 ‘악마화선전전’이 빚어내고 있는 분단현실의 한 비극적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북한당국이 가족들을 묘향산 교육시설에 집단 구금한 뒤 사상교육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이 있었는지요?
‘집단구금’이란 말 자체가 참 재밌습니다. ‘집단납치’라는 말은 청와대 지시로 국정원이 저지른 이번 사건을 설명하는데 틀리지 않을 것 같은데 “부모들이 북녘당국에 의해 집단구금”되었다는 말 자체는 대단히 틀린 잘못된 설정 같습니다. 그런 류의 악의적인 낭설은 십중팔구 이번 사건으로 궁지에 빠진 국정원 주도의 날조된 악의적 허위정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 그런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 확신합니다. 그런 발상 자체가 참으로 어이없습니다. 북녘사회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북녘사회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을 다시 만나면 직접 물어보긴 하겠지만 아마도 가족들 반응은 십중팔구 모두 “헛소리 하고 있다, 꿈에서 깨라”고 야단치실 것 같습니다. 남쪽세상이 주장하는 그런 류의 근거없는 유치한 주장들 가운데 오늘 물어보신 가족들이 이번 사건이 문제가 되어 “집단으로 사상교육 받고 있다”는 주장은 더욱 가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역시 금시초문입니다. 지나가던 소도 하도 기가 막혀 웃겠습니다. 
북녘동포들은 70년 누구나 매주 “토요학습”을 합니다. “집단학습”이라고 이해해서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북녘에선 누구나 매주 학습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만약 북녘동포들의 ‘매주집단학습’을 서울이 ‘사상교육’이라고 해석해서 그리 주장했다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도 이번 사건 때문에 특별히 문제가 되어 받는 일종의 ‘문책성 특별사상교육’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북녘동포들은 자신들이 속한 매 조직에서 누구나 크고 작은 집단학습을 평생하며 삽니다.

 

다. 만약 탈북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하여 한국에 입국한 것이라면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지요?
탈북자 가족들은 가족 중 누가 탈북했다고 해서 그들의 삶과 생활에 그 어떤 변화도 없이 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족 중 누군가 가족과 조국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사실 때문에 가족의 한 성원으로 도망간 그들이 세상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수치스러워 얼굴 들고 살기가 어려울 수 있는 심정의 변화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녘정부와 일부 탈북자들이 남녘에 도망가서 주장하는 탈북자 가족들이 겪는다는 만화 같은 숱한 소설이야기들은 제가 알기론 사실과 한참 거리가 먼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12명 종업원들 가족 모두는 오늘 그대로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거짓과 조작을 기본으로 하는 국정원조직이 자신들이 살기 위해 끝없이 조작해서 세상에 퍼트리는 즉 “탈북자 가족들이 잡혀가서 숙청되고 감옥에 간다” 류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남쪽 표현처럼 정녕 “썰”에 속하는 악의적인 허위정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 12명 종업원 가족들 모두는 오늘도 그대로 다 자신들의 본래 생활을 계속 영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라. 탈북종업원 사건과 관련 책임자(안전교사 등) 6명이 5월 5일 평양 강건종합군관학교에서 공개처형되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는데 사실인지요?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3류의 싸구려 만화 수준의 저질스런 질문입니다. 70년 계속되는 ‘북한악마화’에 언제나처럼 동원되는 판에 박힌 전형적인 노래 가사 같은 질문입니다. 세상은 특히 남녘동포들은 북녘사회를 정녕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평생을 속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아 살지 않기 위해 끝없이 만나 대화해야 하는데 미국이 이를 결코 허락하지 않지요. 결국 투쟁 외에 진정한 자유와 독립, 주권을 되찾을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8. 탈북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지배인 허강일의 신상에 대해 알고 계신게 있는지요?


가. 허강일이나 그 아버지가 빚이 매우 많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떠한지요?
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실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그런 일종의 돌연변이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녘사회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유여하를 불문코 그는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에게 공과 시간을 들여 무엇을 알고 파악해야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허와 중국에서 함께 일하다 탈출에 성공한 7명 여성종업원들에 의하면 그는 “중국에 나간 뒤 줄곧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그는 특히 “도박과 방탕한 생활로 중국업주에게 빚까지 지게 되면서 결국엔 국정원 유혹과 매수에 넘어가 오늘과 같은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허와 몇년을 함께 일한 여성종업원들의 증언을 소개해드리는 것으로 답에 대신하겠습니다.

 

나. 허강일의 가족관계에 대해 알고 계신지요? 
모릅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허 같이 완벽하게 망가진 인간을 더 이상 자세히 알 가치가 구태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 북한으로 돌아 간 다른 종업원들은 허강일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요?
5월 3일 국제기자회견장에서 4월 국정원납치사건 당시 탈출에 성공한 7명 종업원들은 일관되게 허에 대해 공개적으로 증언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가)에서 말한 것처럼 허랑방탕한 생활하다 결국에는 실패한 인간이 되고만 경우 같습니다. 남녘에서 태어나 자라 오늘 60대 중반이 되기까지 첫 30년 가까이는 남녘에서 그 뒤 25년은 미국에서 그리고 지난 10년은 주로 중국, 일본에서, 특히 1989년 30대 중반 나이에 첫 방북한 때로부터 오늘까지 근 30년 100여 차례 넘게 북을 방문하면서 언젠가부터 쓰기 시작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남녘과 미국 같은 세상은 사람이 망가지기가 대단히 쉬운 반면, 북녘은 망가지기가 대단히 어려운 사회다. 한편 북녘은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 사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운 반면 남녘과 미국 같은 세상은 그리 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사회다.” 이번 사건과 허강일을 생각하며 다시 되새겼던 생각입니다. 허처럼 완벽하게 망가진 자가 북녘에도 있구나 싶어서였습니다.

 

▲ 북에서 유괴되어 집단납치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중국 주재 북 류경식당 여 종업원 12명의 여성들     ©자주시보

 

9. 정교수님께서 가족의 위임장을 2차례나 받아 주시는 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계신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앞에서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가. 이 사건이 남한과 북한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남북관계가 역대 최악으로 전락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분단현실의 비극적 실체가 온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남녘이 오늘 어느 정도의 극한 위기로까지 내몰리고 있는지를 역시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만 추종하는 세력이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마치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경쟁이라도 하듯 완벽하게 망가진 추악한 사대매국세력의 모습을 세상천지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정원이 주도한 “기획탈북” 사건으로 불리는 곧 국가권력기구에 의한 집단납치(테러) 행위에 다름없는 이번 사건과 2014년 세월호사건, 특히 가장 최근 발생한 2016년 7월 사드사태처럼 오늘 망가질대로 망가진 친미사대매국세력의 극단적 행태는 역설이지만 한편 세상을 일깨우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악의 사대망국시대’로 불리는 이명박근혜시대 8년은 역설이지만 “오래 잠자고 있던 일부 우매한” 민중까지 불러 일으켜 세우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2년 12월 대선 전 <통일뉴스>에 기고한 여러 편 글에서 이명박근혜시대는 “재앙시대”가 될 것이라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극심한 상상키 어려운 지난 몇년의 재앙시대가 오늘 역설적으로 나라와 역사에 거꾸로 공헌하고 있는 모습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4년 청와대가 보여준 극단적 형태의 “무능, 무식, 무지, 무통” 곧 “4무시대” 쯤으로 불러야 옳을 듯 싶은 이명박근혜암흑시대 8년은 분단시대 내내 역대 친미사대보수세력을 거의 기계적으로 줄곧 지지했던 경북 성주 같은 지역의 농촌 사람들조차 깨어 일어나도록 도울 정도로 주지하듯 오늘 완벽하게 망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완벽한 망가짐이 세상과 민중을 일깨우고 있는 역설적 현실에 웃을 수도 없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세상은 70년 남녘의 역대 분단권력 중 가장 완벽하게 망가진 역대 최악의 친미친일사대권력이 오늘 속수무책으로 어떻게 무너져내리고 있는지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12명 북녘종업원 기획탈북사건은 오늘 역대 최악의 사대분단권력이 무너져내리고 있음을 온 세상에 웅변으로 보여준 하나의 대표적인 역설적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향후에도 이 사건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주실 생각이신지요?
물론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12명 북녘의 딸은 어느 누구 남의 자식만이 아니라 내 자식, 아니 우리 모두의 자식입니다. 저는 이런 자세가 진정한 인류애적 관심과 사랑,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그랬듯 이번 일은 그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 스스로 그들을 구해내는 일에 뛰어든 사건입니다. 이들을 하루 속히 구해내는 일은 평생 하고 있는 조국통일운동과 근본에서 같은 일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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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메고 오끼나와와 괌으로 떠나는 북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개벽예감 215] 배낭 메고 오끼나와와 괌으로 떠나는 북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6/08/15 [12:27]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아프가니스탄에 전설로 남은 전투헬기조종사 구출작전
2. 어이없게 실패로 끝난 ‘독수리발톱작전’ 
3. 평양 사동구역에 세워진 청와대 모형건물
4. 정찰총국 특수전부대의 청와대기습점령연습
5. 최전방 3중 철책과 경계망은 의외로 쉽게 뚫린다
6.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의 특수작전배낭

 

 

1. 아프가니스탄에 전설로 남은 전투헬기조종사 구출작전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1년 10월 7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침략전쟁을 도발하기 직전, 내전의 포화가 작열하던 아프가니스탄전선. 그 전선에서 한 편의 전쟁영화 같이 전개된 놀라운 전투경험이 오늘도 전해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이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을 창건한 때는 1978년이었는데, 당시 소련은 내전을 겪고 있었던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1979년 12월에 파병하였다. 소련군 파병부대는 115,000명에 이르렀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소련군은 무자헤딘(Mujahedin) 반란군을 진압하는 군사작전을 벌였으나, 11년 동안 작전실패를 거듭하며 14,453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1989년 2월에 철수하고 말았다.

 

▲ <사진 1> 1979년 12월 소련은 무자헤딘 반란군에게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11년 동안 작전실패를 거듭하며 14,453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1989년 2월에 철수하였다. 위의 사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소련군 장갑차들이 국경하천의 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장면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소련군이 떠난 뒤로 무자헤딘 반란군의 공세는 더욱 심해졌고,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다.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넘겨준 무장장비들이 그 나라 군대에게 있었지만, 소련군이 사용하던 무장장비들을 사용할 줄 아는 훈련된 전투원이 턱없이 부족했고, 특히 산악지형이 발달한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중요한 무장장비로 사용되는 전투헬기를 모는 조종사가 없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철수한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의 붕괴가 임박한 상황에서 그 나라에 군사지원을 해주겠다고 나서는 나라는 없었다. <사진 1>

 

그런데 그처럼 군사지원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프가니스탄공화국에게 선뜻 군사지원의 손길을 내민 동방의 어느 한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국제주의 원칙을 견지해오는 조선은 사회주의나라를 지원해줄 때 외교적 손익계산 같은 것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지원해주기로 유명하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침략전쟁을 도발하기 직전인 1991년 봄 어느 날, 김일성 주석은 군사지원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을 도와주기 위해 조선인민군 전투헬기조종사 10명을 급파하였다. 평소에 고강도 전투비행훈련으로 단련된 그들 조종사 10명은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하여 소련군이 남겨두고 떠난 전투헬기를 몰고 전선을 누비며 무자헤딘 반란군에게 로켓포 불벼락을 안겼다.

 

▲ <사진 2> 소련군이 철수하자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의 붕괴는 시간문제로 되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군에는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남긴 무장장비들을 사용할 줄 아는 훈련된 전투원이 없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헬기는 당시 소련군이 남기고 떠난, 매우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전투헬기 Mi-24인데, 그런 전투헬기들을 모는 조종사가 없어 녹슬고 있었다. 그런 위기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공화국에게 군사지원의 손길을 선뜻 내민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은 전투헬기 조종사 10명을 아프가니스탄에 급파하였다. 그들은 소련군이 남기고 떠난 전투헬기를 몰고 전선을 누비며 무자헤딘 반란군에게 로켓포 불벼락을 안겼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조선인민군 조종사가 몰던 전투헬기 한 대가 무자헤딘 반란군 복병들이 난사한 총탄에 맞아 불시착하였고, 부상을 당한 조종사는 무자헤딘 반란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사진 2>

 

조선에서 금싸라기처럼 아끼는 전투헬기조종사가 부상을 입고 적들에게 포로로 붙잡혔다는 급보를 받은 김일성 주석은 그 조종사를 72시간 안에 무조건 구출해 조국으로 데려오라는 특별명령을 내렸다. 그 특별명령을 받은 부대가 바로 산악경보저격려단이다. 이 특수전부대는 평소에 고강도 산악전훈련을 단련하고 있었으니, 산악지형이 발달한 아프가니스탄전선에 파병하기에 제격이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산악경보저격려단에서 선발한 2개의 최정예 분대를 아프가니스탄전선에 급파하게 되었다.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의 경우 1개 분대 병력은 12명이므로, 아프가니스탄전선으로 떠나는 산악경보저격려단 파병부대는 24명으로 편성되었다.  

 

▲ <사진 3> 아프가니스탄전선에서 작전임무를 수행 중이던 조선인민군 조종사가 모는 전투헬기 한 대가 무자헤딘 반란군 복병들이 난사한 총탄에 맞아 불시착하였고, 부상당한 조종사는 그들에게 붙잡혔다. 급보를 받은 김일성 주석은 전투헬기조종사를 72시간 안에 무조건 구출해 조국으로 데려오라는 특별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산악경보저격려단에서 선발된 2개의 최정예 분대가 아프가니스탄전선으로 떠났다. 산악경보저격려단 전투원 24명은 현지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던 조선인민군 전투헬기조종사들과 힘을 합쳐 무자헤딘 반란군의 은신처를 찾아냈고, 과감한 습격전을 벌인 끝에 은신처에 감금된 전투헬기조종사를 극적으로 구출하였다. 위의 사진은 조선인민군 전연부대 정찰대대 전투원들의 훈련장면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조선에게 아프가니스탄은 너무 먼 나라였다. 평양에서 카불(Kabul)까지 직선거리로 5,000km다. 더욱이 조선에서는 무자헤딘 반란군이 부상당한 조선인민군 전투헬기조종사를 어디로 끌어갔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72시간 안에 무조건 구출하라는 최고사령관의 특별명령을 받은 산악경보저격려단 전투원 24명은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완수하기 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결사의 각오를 다지며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사진 3>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한 산악경보저격려단 전투원 24명은 현지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던 조선인민군 전투헬기조종사들과 힘을 합쳐 험준한 산악지대를 수색하여 마침내 무자헤딘 반란군의 은신처를 찾아냈고, 과감한 습격전을 벌인 끝에 은신처에 감금된 조선인민군 전투헬기조종사를 극적으로 구출하였다. 그 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해외파병부대의 인명손실은 없었다. 72시간 만에 완료된 그 극적인 구출작전은 한 편의 전쟁영화를 방불케 하였다. 몇 가지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작성되었지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조선일보> 2001년 11월 1일부 기사가 그 구출작전을 간략하게 보도한 바 있다.

 

▲ <사진 4> 1979년 11월 4일 분노한 이란민중은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그곳에 미국인 52명을 인질로 붙잡아두었다. 미국은 5개월 동안 인질구출작전을 준비하였고, 마침내 1980년 4월 24일 미육군 특수부대 전투원 132명을 이란에 침투시켰다. 위의 사진은 당시 '독수리발톱작전'이라는 작전명칭으로 불린 인질구출작전에 참가한 미육군 특수전부대 델타포스 전투원들이 수송기에서 내리고 있는 장면이다. 군복이 아니라 현지인과 비슷한 민간복장으로 위장하였다. 미국은 그 날의 인질구출작전에 항공모함 2척, 장거리수송기 7대, 전투헬기 8대, 근접지원공격기 2대 등 방대한 무력을 동원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 어이없게 실패로 끝난 ‘독수리발톱작전’

 

1979년 1월 16일 이란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페르시아군주제의 마지막 왕조였던 팔라비왕조가 무너졌다. 그런데 정세를 오판한 미국은 이란민중의 적인 팔라비왕조를 옹호하며 지원하는 어리석은 꼴을 보였으니, 이란민중의 반미감정이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한 이란민중은 1979년 11월 4일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그곳에 미국인 52명을 인질로 붙잡아두었다. 그 사건으로 미국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발칵 뒤집혔다.

 

다급해진 미국은 52명의 자국민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서둘렀다. 5개월 동안 인질구출작전을 준비해온 미국은 마침내 1980년 4월 24일 미육군 특수전부대들인 델타부대(Delta Force)와 레인저부대(Rangers)에서 각각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32명을 이란에 침투시켰다. 당시 이란에 잠입하여 암약하던 미국 중앙정보국(CIA) 산하 특수활동사단(Special Activities Division) 소속 전투원들이 미육군 특수전부대의 인질구출작전을 측면에서 지원해주게 되었다. 인질구출작전명칭은 ‘독수리발톱작전(Operation Eagle Claw)’으로 정해졌다. <사진 4>


미국이 인질구출작전에 동원한 무력은 엄청났다. 미해군 항공모함 2척, 미공군 장거리수송기 7대, 미해군 전투헬기 8대, 근접지원공격기 2대 등이 인질구출작전에 동원되었으니, 가히 전면전을 벌일 만한 방대한 무력이 페르시아만에 속속 집결되었던 것이다.

 

페르시아만 상공에 어둠이 깃든 시각, 모든 조명등을 모두 끄고 이란 영공 깊숙이 침투한 전투헬기들과 수송기들이 타바스(Tabas)사막의 도로를 활주로로 삼아 작전거점에 착륙하였다. 테헤란으로부터 불과 84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다. 그런데 미육군 특수전부대 전투원 132명과 현지어 통역자 15명이 분승한 전투헬기 8대가 테헤란으로 공중침투를 개시하려던 참에 갑자기 모래폭풍이 휘몰아쳤다. 모래폭풍 속에서 이륙하던 전투헬기 한 대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수송기에 충돌하였다. 기체충돌로 일어난 화염이 항공연료를 가득 싣고 옆에서 대기 중이던 항공연료수송트럭에 옮겨 붙으며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사고로 현장에서 8명이 즉사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전면전을 벌일 만한 방대한 무력이 동원된 ‘독수리발톱작전’은 그처럼 어이없게도 총 한 방 쏴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 <사진 5> 인질구출작전에 참가한 미국군 부대들이 전투헬기와 수송기를 타고 이란의 타바스사막에 착륙하였다. 미육군 특수전부대 전투원 132명과 현지어 통역자 15명이 분승한 전투헬기 8대가 사막을 떠나 테헤란으로 공중침투를 개시하려던 참에 갑자기 모래폭풍이 휘몰아쳤다. 이륙하던 전투헬기 한 대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수송기에 충돌하였다. 기체충돌로 일어난 화염이 항공연료수송트럭에 옮겨붙으며 대폭발이 일어나, 현장에서 8명이 즉사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방대한 무력이 동원된 '독수리발톱작전'은 총 한 방 쏴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위의 사진은 당시 폭발사고현장에 남은 전투헬기 잔해와 수송기 잔해를 촬영한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독수리발톱작전’이 그처럼 실패한 것은,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졌다고 으쓱이던 미국에게 커다란 수치와 망신을 안겨주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Jimmy Carter)는 6개월 뒤에 진행된 대통령선거에 재선을 기대하며 출마하였으나, 인질구출작전의 실패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고, 그로써 정권이 교체되었다. <사진 5>

 

조선인민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개한 헬기조종사구출작전은 특수전부대 전투원을 24명만 동원하고서도 완벽하게 성공하였던 반면, 미국군이 이란에서 전개한 인질구출작전은 항공모함을 비롯한 방대한 무력을 동원하고서도 어이없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극적인 대조는 조선인민군의 탄탄한 작전능력과 미국군의 허술한 작전능력을 말해주고 있다.

 

▲ <사진 6> 2015년 8월 27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안보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위의 사진은 그 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그 자리에 연사로 출연한 현역 육군 중장인 조상호 국방부 군구조개혁추진관은 국방부가 '참수작전'을 검토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다. 한국군이 '참수작전'을 자기의 새로운 작전개념으로 수용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일촉즉발의 전쟁재발위험을 몰아온 '8월위기사태'와 맞물리며 큰 파란을 일으켰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3. 평양 사동구역에 세워진 청와대 모형건물
   
사건의 발단은 2015년 8월 27일에 일어났다. 그 날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이 개최한 안보학술토론회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 연사로 출연한 현역 육군 중장인 조상호 국방부 군구조개혁추진관이 충격적인 발언을 꺼내놓았다. 그는 한국군이 조선인민군보다 우세한 비대칭전략을 개발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국방부가 지금 검토하고 있는 비대칭전략들 가운데는 ‘참수작전’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 언론매체들은 그가 말한 다른 내용들은 생략한 채 그가 언급한 ‘참수작전’를 크게 부각시켜 보도하면서, 국방부 관계자들의 부연설명을 곁들인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이를테면, <연합뉴스>는 2015년 8월 27일부 보도기사에서 “유사시 적국이 핵무기를 사용하려는 징후가 보이면 핵무기승인권자를 제거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 참수작전의 개념”이라는 국방부 관계자의 해설을 실었고, <조선일보>도 같은 날 보도기사에서 “북한 지도부는 도시가 핵무기로 공격받는 것보다 이러한 (참수작전) 보복을 더 위협적으로 생각할 것”이라는 부형욱 한국국방연구원 국방전략실장의 부연설명을 실었다. 이런 정황은 한국 국방부가 검토 중이라는 이른바 ‘참수작전’이 어느 군사지휘관의 개인적인 발상이 아니라, 이라크전쟁과 리비아전쟁 같은 침략전쟁에서 미국군이 수행한 ‘참수작전’을 한국군이 모방하여 자기의 새로운 작전개념으로 수용하였음을 말해준 것이다. <사진 6>

 

한국군이 ‘참수작전’을 자기의 새로운 작전개념으로 수용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일촉즉발의 전쟁재발위험을 몰아온 ‘8월위기사태’와 맞물리며 큰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8월위기사태’로 초긴장한 상태에 있었던 조선인민군은 한국군이 ‘참수작전’을 거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격분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격분이 예사롭지 않은 군사활동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여덟 달이 지난 2016년 4월 27일 한국군 합참본부 관계자의 발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언론에 보도된 한국군 합참본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2016년 4월 초 한국의 다목적실용위성 ‘아리랑’이 평양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사동구역 대원리에 건설된 청와대 모형건물을 촬영하였다고 한다. 그 모형건물에 관한 좀 더 상세한 서술은 미국의 관영매체인 <미국의 소리>가 미국 상업위성이 촬영한 영상자료를 분석하여 2016년 7월 16일부 보도기사에 실어놓았다. 그 분석기사에 따르면, 모두 3개 동으로 이루어진 청와대 모형건물은 2015년 10월부터 2016년 5월까지 기간 중에 건설되었는데, 청와대를 2분의 1로 축소한 크기이고, 본관 모형건물의 지붕은 가로 35m, 세로 25m이며, 진입로에서 정원을 지나 본관 모형건물까지 거리는 약 90m라고 하였다. 청와대 모형건물 진입로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나 있었다.  
위에 인용한 보도기사에서 한국군 합참본부 관계자는 청와대 모형건물이 화력시험장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것을 주목하면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들이 포사격연습표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청와대 모형건물을 건설하였으므로 그 모형건물을 표적으로 삼아 대규모 포사격연습을 곧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하였다.

 

▲ <사진 7> 2016년 4월 초 한국의 다목적실용위성 '아리랑'이 평양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사동구역 대원리에 건설된 청와대 모형건물을 촬영하였다. 위의 사진은 <미국의 소리>가 2016년 7월 16일 보도한, 미국 상업위성이 촬영한 위성사진이다. 왼쪽 사진은 청와대 모형건물을 촬영한 위성사진이고, 오른쪽 사진은 청와대 실물을 촬영한 위성사진이다. 청와대 모형건물은 청와대를 2분의 1로 축소한 크기로 건설되었는데, 모형건물의 진입로에서 정원을 지나 본관까지 이르는 거리는 약 90m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러나 그런 예측은 뭐가 뭔지 분별하지 못한 억측이었다. 아래에 서술하는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진 7>

 

첫째, 청와대 모형건물은 평양 중심부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세워졌지만, 그 모형건물이 서 있는 사동구역은 행정구역상 평양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조선인민군은 평양에 청와대 모형건물을 세워놓은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조선의 협동농장들 가운데 최우수 모범단위로 개건된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이 바로 그 사동구역에 있다는 사실이다. 남새는 채소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에는 총부지면적이 446,281㎡에 이르는 현대식 남새온실 665개동이 들어섰는데, 각종 재배작물의 생장특성에 맞춰 온도, 습도, 햇빛비침도, 이산화탄소농도를 과학적으로 측정하고 조절하는 컴퓨터종합지령체계가 가동되고 있으며, 400여 세대 농장원들과 그 가족들이 입주한 연립주택들은 태양열물가열기와 태양빛전지판을 지붕마다 설치한 산뜻한 친환경주택으로 건설되었고, 도시사람들도 부러워할 문화회관, 과학기술보급실, 장천원, 상점 같은 현대적인 문화후생시설들이 들어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선진과학기술로 부흥하는 사회주의문명국의 문화농촌을 표상하는 본보기로 개건된 그 농장을 2015년 6월 9일과 6월 29일 두 차례나 현지지도하였으며, 6월 30일에는 개건공사 준공식이 현지에서 진행되었다.

 

▲ <사진 8> 위의 사진들은 평양 사동구역에 현대적으로 개건된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을 촬영한 것이다. 위쪽 사진은 665개동의 남새온실들이 줄이어 있는 모습이고, 아래쪽 사진은 그 협동농장 안에 건설된 현대적인 문화후생시설들 가운데 하나인 장천원의 수영장을 촬영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 옆에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포사격연습을 진행할 것이라는 한국군 합참본부 관계자의 예측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한 억측이다.     © 자주시보


그런데 그런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 옆에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170mm 자행포와 300mm 방사포를 쏘는 포사격연습을 진행할 것이라는 한국군 합참본부 관계자의 예측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 8>

 

둘째, 청와대 모형건물은 실물을 2분의 1로 축소하여 실물과 매우 흡사한 모습으로 건설되었다. 위성사진만 봐서는 그 건물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외형을 그처럼 실물과 흡사하게 만들었고, 정원과 진입로까지 흡사하게 만들어놓았으므로, 건물내부도 실제와 흡사하게 만들어놓은 것이 틀림없다. 만일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그 모형건물을 포사격연습표적으로 한 차례만 쓰고 파괴할 것이라면, 그처럼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 실물과 흡사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원래 한 차례만 쓰이고 파괴되는 포사격연습표적은 위치와 크기만 표시하는 단순구조물로 세워놓는 법이다. 이런 사정을 헤아려보면, 평양 사동구역에 세워진 청와대 모형건물은 포사격연습표적이 아니라는 점이 자명해진다.

 


4. 정찰총국 특수전부대의 청와대기습점령연습

 

평양 사동구역에 세워진 청와대 모형건물은 포병부대가 포사격을 연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특수전부대가 기습점령을 연습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청와대 모형건물은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가 청와대기습점령을 실전전환경과 흡사한 모의환경에서 연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가 청와대 모형건물을 세워놓고 청와대기습점령을 연습하는 것은, 한국군이 ‘참수작전’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뒤에 나타난 새로운 군사동향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 <사진 9> 2011년 2월 8일 주한미국군사령부 청사에서 한국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비공개 간담회에서 월터 샤프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은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의 총병력이 200,000명에 이른다고 밝힌 바 있다. 고강도훈련으로 단련된 최정예 특수전병력이 200,000명이라는 사실 하나만 봐도, 조선인민군이 얼마나 강한 군대인지 알 수 있다. 위의 사진은 2011년 11월 30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도 밑에 조선인민군 제630대련합부대가 종합전술훈련을 진행한 훈련장의 모습이다. 조선인민군 제630대련합부대는 '폭풍군단'으로 불리는 최정예 특수전부대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011년 2월 8일 주한미국군사령부 청사에서 한국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비공개 간담회에서 월터 샤프(Walter L. Sharp)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은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의 총병력이 200,000명에 이른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언급한 것처럼, 지금 조선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특수전부대가 있다. 200,000명 병력은 다른 나라 군대의 총병력만큼 많은 것이다. 이를테면, 영국군은 250,000명, 스페인군은 233,000명, 스위스군은 220,000명인데, 고강도훈련으로 단련된 최정예 특수전병력만 200,000명이라는 사실 하나만 봐도 조선인민군이 얼마나 강한 군대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2011년 2월 8일 주한미국군사령부 청사에서 진행된 비공개 간담회에서 월터 샤프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은 “북한 특수부대가 매우 위협적인 만큼, 한미연합사 차원에서 대비책을 마련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무슨 대비책을 마련한다고 하면서 한국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을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에 대한 두려움은 감출 길이 없었다. <사진 9>

 

그렇다면 200,000명이나 되는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들 가운데 평양 사동구역에 청와대 모형건물을 세워놓고 청와대기습점령을 연습하는 특수전부대는 어느 부대일까?  평양 사동구역에 훈련소를 둔 부대는 정찰총국 특수전부대다. 한국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사동구역에 있는 그 훈련소는 정찰총국 제7국 198련락소라는 명칭으로 불린다고 한다. 조선인민군 각 전연군단 예하에도 정찰대대가 1개씩 있지만, 정찰총국과 전연군단 예하 정찰대대는 서로 다르다.

 

조선인민군 정찰총국은 지난날 정찰국이었는데, 2009년에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것은 조선인민군 정찰작전능력이 2009년에 대폭 강화되었음을 말해준다. 기존 정찰국이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정찰작전능력이 대폭 강화된 시점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혁명활동을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10년 4월 25일 조선인민군 창건일을 맞아 그 전해에 확대, 개편된 정찰총국 지휘부를 시찰하였는데, 당시 후계자였던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그 시찰에 동행하였다.

 

한국군 정보당국의 자료를 인용한 <연합뉴스> 2011년 2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정찰총국 특수전부대는 10,000여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난도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이를테면, 무게가 35kg나 되는 무거운 군장을 짊어지고 매일 20km씩 행군하며, 매주 토요일에는 밤 10시에 시작하여 다음날 정오까지 꼬박 12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40km에 이르는 산악행군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일보> 2011년 2월 8일 보도에 다르면, 그들은 “한 명이 적 3~15명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는 훈련(격술훈련-옮긴이)을 하루 3시간 이상, 사격은 침투 전 3,000번 이상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뉴데일리> 2010년 11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무술로 단련돼 맨손으로도 적군 몇 명쯤은 동시에 상대할 수 있으며, 저격소총을 가지면 15초 이내에 200m 밖에서 움직이는 표적 몇 개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정찰총국 특수전부대는 “최고의 무술실력과 전투장비를 가진 부대”라고 한다.

 

▲ <사진 10>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들은 최고의 무술실력과 전투장비를 가진 부대로 알려졌다. 그런 전투력을 갖추기 위해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고강도훈련으로 단련된다. 위의 사진은 2013년 12월 2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조선인민군 초병대회 참가자들 앞에서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진행한 격술훈련의 한 장면이다. 평소에 격술로 단련된 그들은 싸움이 벌어지면 맨손으로도 몇 명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한다.     © 자주시보

 

윤규식 육군종합행정학교 북한담당교수의 말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는 “유사시 대상표적에 사전침투했다가 전쟁과 동시에 행동을 개시하며, 부여받은 목표를 습격,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한다”고 한다. <중앙일보> 2011년 1월 15일부 보도기사에서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출신이라는 익명의 탈북자는 자신이 조선에서 복무를 하였던 군부대의 작전임무가 전라남도를 해방하는 것이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태백산 줄기를 타고 육상침투하여 지리산을 넘어 광주에 진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진 10>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정보를 살펴보면, 2015년 가을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평양 사동구역에 청와대 모형건물을 세워놓고, 청와대기습점령을 본격적으로 연습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군이 ‘8월위기사태’ 와중에 ‘참수작전’까지 언급하면서 조선을 극도로 자극하였으므로, 그에 격분한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청와대기습점령을 연습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5. 최전방 3중 철책과 경계망은 의외로 쉽게 뚫린다

 

한반도 군사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국군 최전방부대가 군사분계선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데,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설마 그런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청와대까지 갈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품겠지만, 한국군 최전방부대가 지키는 경계망에는 구멍이 여기저기 숭숭 뚫려있어서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쉽게 침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2012년 10월 2일 강원도 고성군에 주둔하는 한국군 제22사단 최전방 철책경계부대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연합뉴스> 2012년 10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무장을 하지 않은 조선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그 날 밤 10시 30분경 군사분계선 철책을 지지하는 철주를 타고 올라가 3~4m 높이의 3중 철책을 넘어 남하하였다. 그가 두 번째 철책을 넘는데 52초가 걸렸고, 세 번째 철책을 넘는데 1분1초가 걸렸다고 한다. 군사복무 중에 잘못을 저지르고 처벌이 두려워 탈영한 일반병사가 군사분계선 3중 철책을 그처럼 쉽게 넘었다면, 고강도침투훈련으로 단련된 특수전부대 전투원에게 군사분계선 3중 철책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 <사진 11> 2012년 10월 2일 강원도 고성군에 주둔하는 한국군 제22사단 최전방 철책경계부대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무장을 하지 않은 조선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그 날 밤 3중 철책을 넘어 남하한 것이다. 그는 한국군 경계초소의 문과 경비대 숙소의 문을 두드리며 다녔으나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고, 멀리 떨어진 일반전초로 가서 문을 두드린 끝에 한국군 병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한국군 최전방부대의 경계망이 너무 허술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위의 사진은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조선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쉽게 넘어온 철책 앞에서 한국군 제22사단 사단장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최전방 경계망이 침투훈련도 받지 못한 병사에게 그처럼 쉽게 뚫렸으니, 고난도침투훈련으로 단련된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에게 3중 철책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다.     © 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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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짜 충격적인 사건은 월책 이후에 일어났다. 3중 철책을 간단히 넘은 그가 70~80m 떨어진 한국군 경계초소(GP)로 갔으나 그 초소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250m 정도 떨어진 경비대 숙소까지 가서 출입문을 두드렸지만 2중 유리문 안쪽 상황실에 있던 한국군 경비대원들은 누가 문을 두드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하는 수 없이 30m 떨어진 일반전초(GOP)로 가서 유리창문을 두드렸는데, 그제야 소초장과 전투분대장이 나와 그의 신원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말해주는 것처럼, 한국군 최전방부대의 경계망은 너무 허술해서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는 그처럼 허술한 경계망을 뚫고 청와대까지 침투할 수 있을 것으로 우려된다. <사진 11>

 

1968년 1월 18일 밤,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전투원 32명이 한반도 서부전선 군사분계선 철책을 뚫고 침투하였다. 당시 주한미국군 제2사단은 “특별히 많은 예산을 들여서 만든 최신식 철책”을 자기들이 지키는 서부전선 군사분계선에 설치해놓고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있었지만, 그런 경계망은 고강도침투훈련으로 단련된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군사분계선 철책을 뚫고 침투한 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초인간적인 산악행군을 다그쳐 산줄기를 타고 남하하였다. 1월 20일 그들은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북한산 비봉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비봉을 출발하여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있는 군경검문소를 통과했으며, 북한산성 북문 일대에서 경찰병력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면서 청와대에서 불과 800m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다. 이것이 1.21청와대습격사건이다.

 

▲ <사진 12> 위의 사진은 북악산 탐방로의 어느 바위에 무수히 남아있는 총탄흔적을 촬영한 것이다. 이 총탄흔적은 1.21청와대습격사건 당시 치열한 교전이 남긴 것이다. 1.21청와대습격사건이란, 1968년 1월 21일 당시 주한미국군 제2사단이 지키고 있었던 서부전선 군사분계선 철책을 뚫고 침투한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전투원 32명이 초인간적인 산악행군으로 산줄기를 타고 남하하여, 북한산성 북문 일대에서 경찰병력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며 청와대에서 불과 800m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던 사건을 말한다. 32명의 전투원들 가운데 27명은 교전 중에 사망하였고, 3명은 군경의 포위망과 추격전을 뚫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복귀했으며, 1명은 교전 중에 붙잡혔다. 그로부터 근 반세기가 지난 지금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는 청와대 모형건물을 세워놓고 청와대기습점령을 연습하고 있다. 오늘의 군사상황은 1968년과 마찬가지로 초긴장상태에 있는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신동아> 2004년 2월호는 1.21청와대습격사건 당시 방첩부대 수사계장이었던 백동림 씨의 회고담이 실렸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32명의 특수전부대 전투원들 가운데 포로로 붙잡힌 김신조 씨를 제외하고 확인된 시신은 27구뿐이었으며, 다른 3명의 생사여부는 끝내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1.21청와대습격사건에 참가한 특수전부대 전투원 32명 가운데 3명이 군경의 포위망과 추격전을 뚫고 군사분계선을 다시 넘어 복귀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12>

 

<뉴데일리> 2010년 11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군사분계선을 넘어 복귀한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한국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던 중에 총상을 입어 “창자가 배 밖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창자를 다시 밀어넣고 손으로 막은 채 북한까지 돌아갔다”고 한다. 미국의 관영선전매체 <자유아시아방송> 2015년 4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1.21청와대습격사건 당시 한국 군경의 포위망과 추격전을 뚫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복귀한 특수전부대 전투원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현역 육군대장인 박재경 인민무력부 부부장이라고 한다.

 

한국 국방부가 2006년에 펴낸 ‘국방백서’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들은 “한반도 작전환경을 고려하여 야간전훈련, 산악전훈련, 시가전훈련을 강화하는 등 특수전수행능력을 집중적으로 향상시키고 있다”는 것이고, <내외통신> 1996년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의 실전훈련 중에 약 80%는 야간전훈련이라고 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전개할 청와대기습점령작전은 박근혜 대통령이 침실에서 잠자고 있는 심야에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소녀시절 청와대에서 겪었던 1월 21일의 악몽이 오늘 되살아나고 있는 것을 감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참수작전’을 운운하면서 조선을 극도로 자극한 한국군에게 심각한 위기상황이 닥쳐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 <사진 13>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부대원들은 평시에도 일본 오끼나와에 빈번히 침투하여 정찰임무를 수행한 뒤에 복귀한다고 한다. 그들이 오끼나와 정찰에 주력하는 까닭은, 전시에 한반도에 가장 먼저 출동하는 미해병대와 미공군의 주력부대들이 오끼나와에 집결해있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은 미공군이 오끼나와에서 운영하는 가데나공군기지를 촬영한 것이다. 매우 높은 차단벽을 세우고 경계태세를 강화한 것을 위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차단벽은 고난도침투훈련으로 단련된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전시에 그들은 특수작전배낭을 메고 스텔스 잠수정에 탑승하여 오끼나와 해변에 상륙, 침투하고, 그 섬에 있는 미국군기지들에 접근하는 작전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6.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의 특수작전배낭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병력 10,000여 명은 조선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이 일어나면, 적진에 가장 깊숙이 침투하게 되는데,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정찰활동을 벌이고 있다. 조선인민군 정찰병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 군대의 정찰병도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정찰임무를 수행하는 법이다.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적진에 가장 깊숙이 침투한다면, 과연 어디까지 침투하는 것일까? 제주도 서귀포 해안까지 침투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작전범위는 한반도 영역을 훌쩍 뛰어넘는다. <뉴데일리> 2010년 11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정찰부대들 가운데 해외정찰임무를 수행하는 정찰부대에 소속된 정찰병들은 전원이 영어와 일어를 할 수 있으며, 평시에 일본 오끼나와(沖繩)에 “빈번히” 침투하여 정찰활동을 벌인 뒤 복귀하는데, 전시에는 특수작전배낭을 메고 괌(Guam)과 오끼나와에 침투하는 작전임무를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진 13>

 

조선침공을 노리는 미해병대기지와 미공군기지가 집결된 오끼나와는 평양에서 직선거리로 1,420km 떨어져 있으며, 조선침공을 노리는 미공군기지와 미해군기지가 집결된 괌은 평양에서 직선거리로 3,400km 떨어져 있다. 
그런데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는 평시에도 평양에서 1,420km 떨어진 오끼나와에 빈번히 침투하여 정찰활동을 벌인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수중소음을 내지 않는 스텔스 잠수정을 타고 오끼나와에 침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특수작전배낭을 멘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오끼나와와 괌에 각각 상륙, 침투하여 그 두 섬에 있는 미국군 군사전략거점들을 한꺼번에 날려보낼 장거리침투작전을 준비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장거리침투작전의 구체적인 내용은 <자유아시아방송> 2016년 4월 6일 보도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전시에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적진 깊숙이 침투할 때 메고 가는 배낭은 ‘위성’이라고 불리는 특수작전배낭인데, 미사일유도장치가 들어있는 배낭도 있고, 전파교란장치가 들어있는 배낭도 있다고 한다. 전시에 핵배낭을 메고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특수전부대는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아니라 ‘폭풍군단’으로 불리는 제630대련합부대다. 

 

위성항법장치로 정밀타격기능을 발휘한다는 미사일이라고 해도, 비행거리가 1,000km 이상 넘으면 오차범위가 커질 수밖에 없으므로, 타격대상 인근에 은밀히 가져다놓은 미사일유도장치에서 송출되는 유도전파를 추적하여 타격대상을 정밀타격하는 것이 오늘날 현대전의 특징적인 전투양상으로 되었다. 예컨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미국군 특수전부대가 이라크군 군사전략거점 인근에 침투하여 미사일유도장치를 설치함으로써 미사일의 정밀타격도를 보장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바 있다.

 

▲ <사진 14>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것은 미해병대가 메고 다니는 전투배낭이다. 어느 나라 군대나 전투배낭을 멘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은 전투배낭이 아니라 특수작전배낭을 메고 적진에 침투한다. 그 특수작전배낭은 '위성'이라고 불리는데, 미사일유도장치가 들어있는 배낭도 있고, 전파교란장치가 들어있는 배낭도 있다. 전시에 핵배낭을 메고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특수전부대는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아니라 '폭풍군단'으로 불리는 제630대련합부대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에게는 미사일유도배낭만 있는 게 아니라 전파교란배낭도 있다. 전파교란장치에서 송출되는 전파는 공격대상에서 멀어질수록 약해져 교란효과가 감소되므로, 전파교란장치를 공격대상 가까이 접근시킬수록 유리하다. 그러므로 조선인민군이 평양에서 1,420km 떨어진 오끼나와나 3,400km 떨어진 괌의 미국군 군사전략거점들에게 전파교란공격을 가할 현실적인 작전방도는, 전파교란배낭을 멘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스텔스 잠수정 또는 스텔스 잠수함을 타고 오끼나와와 괌에 은밀히 침투하여 그 배낭을 공격대상 인근에 가져다놓고 강력한 교란전파를 송출하는 것이다. <사진 14>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그처럼 오끼나와와 괌에 상륙, 침투할 수 있다면, 그보다 훨씬 더 가까운 일본 본토에 상륙, 침투하여 거기에 있는 주일미국군기지들에 접근하는 것은 더 쉬운 일이다. 
배낭을 멘 여행객 차림으로 위장하고, 일본말을 하는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스텔스 잠수정을 타고 가서 오끼나와와 일본 본토의 어느 외딴 해변에 상륙, 침투한 뒤에 주일미국군기지들에 접근하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다. 배낭을 멘 여행객 차림으로 위장하고, 영어를 구사하는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스텔스 잠수함을 타고 가서 괌의 어느 외딴 해변에 상륙, 침투한 뒤에 미국군기지들에 접근하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다.

 

위에 인용한 <자유아시아방송> 보도기사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들은 특수작전배낭 ‘위성’의 사용법을 올해 2월부터 연습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들이 특수작전배낭 사용법을 연습하는 것은, 그들이 선제공격징후를 노출하지 않고 오끼나와, 괌, 일본 본토에 사전침투하여 ‘위성’을 작동시키면,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탄도미사일 초정밀타격으로 그 지역들에 있는 미국군 군사전략거점들을 파괴할 엄청난 작전계획이 수립되었음을 말해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조선침공을 노리는 미국의 전쟁수행력은 오끼나와, 괌, 일본 본토에 집결되어 있으므로, 그 지역의 군사전략거점들이 파괴되는 순간 미국은 전쟁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초정밀선제타격으로 ‘조국통일대전’을 끝내고 미국의 항복을 신속히 받아내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작전구상을 엿볼 수 있으며, 그런 놀라운 작전구상이 실현될 ‘조국통일대전’이 임박하였음을 예고하는 조선의 암시적 표현들을 읽을 수 있다. 지금 미국은 전략폭격기들인 B-52, B-2, B-1B를 괌의 앤더슨공군기지에 집결시키고 조선에 대한 선제핵타격위협을 가중시키고 있지만, 미국이 조선을 자극할수록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의 날을 한층 더 앞당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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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인의 목소리 ‘평화통일’ 하나로


국민들의 민주적 통일논의 마당된 ‘1000인 원탁회의’

“1천명의 사람들이 광화문 한복판에 모여서 평화통일 토론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가슴 뛰는 일이다. 이런 원탁회의가 남한에서도 열리고 북한의 평양에서도 열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전국교육대학생연합 송민호 회장)

“이런 모임과 만남으로 소통을 해야 통일이 가능하고 그래서 이 자리에 온 것이 기쁘다. 이렇게 모인다는 게 희망이다.”(한국순교복자수녀회 권오희 수녀) 

▲ 남북대화 촉구,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전국대표 1000인 원탁회의가 광화문광장에서 지난 14일 열렸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상임대표 이창복)가 주관하는 ‘남북대화 촉구,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전국대표 1000인 원탁회의’가 민간 차원의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통일운동 방법으로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광복 71돌 하루 전인 지난 1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000명의 각계각층 인사들이 100개의 원탁에 둘러앉아 평화통일을 위한 토론마당을 펼쳤다. ‘남과 북은 하나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작한 원탁회의는 전국은 물론, 해외 동포까지 1000인이 모여 원탁별 토론을 거치고, 그를 발표함으로써 평화통일의 중지를 모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민간차원의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아래로부터’ 통일운동 

정치, 종교, 노동, 농민, 여성, 청년, 빈민, 학술, 언론, 민족, 법조, 학생 등 각 분야와 서울에서 제주까지 각 지역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모인 참석자들은 각자의 원탁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과제’, ‘남북이 함께 하는 통일운동’, ‘시민과 함께 하는 통일운동’ 등을 주제로 토론을 펼쳤으며 그 결과를 ‘한 문장’이나 ‘키워드’로 작성해 발표, 제출했다.

특히 한반도 평화통일 문제의 최대 이슈인 ‘사드배치’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반대의견이 많았고, ‘한반도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남북연석회의를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했다. 이를 위해 ‘야당이 남북관계 개선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촉구하자’는 의견과 ‘전쟁의 위기를 없애고 평화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남북 대화를 촉구하하는 의견도 다수를 이뤘다.

아울러 ‘평화협정 체결 등 일상적인 통일협상이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소파협정, 전시작전권 회수 논의를 시작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통일운동이 자율적이고 활성화될 수 있도록 다양한 주민행사를 통해 밑에서부터 평화통일을 이뤄내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날 정당 인사들과 토론을 펼친 정의당 이정미 의원은 “사드배치 문제를 다룰 국회특위 구성을 다시 한 번 다짐했다“며 야당 내에는 당론과 상관없이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의원들이 많은데 그분들과 함께 특위 구성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통일교육과 관련한 의견도 많았는데 ‘청소년들이 함께 하는 통일논의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의 필요성은 물론, 학생들이 스스로 평화통일을 이끌어갈 미래세대임을 인식할 수 있도록 평화통일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해나가겠다’고 했으며 ‘통일역량 강화 교육과 설명회, 간담회, 통일동아리 등등의 노력을 해나가겠다는 의견도 개진됐다.

용산미군기지와 DMZ을 둘러보고 왔다는 한 예비교사모임 회원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다름에 대해 토론한다는 것을 보며 (통일의)미래가 밝구나 생각했다”며 “남과 북이 다른 것처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대화의 장을 만드는 토론문화와 교육을 더욱 활성화시키는데 앞장서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등 통일교육에 대한 요구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이 공유됐다. 

농민들이 이끈 원탁에선 “통일은 농민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며 남북 농민이 공동으로 DMZ에 생명농장을 만들고, 여성농민들은 토종씨앗을 교류 지원하는 등 남북 농업교류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민주노총에서도 ‘노동과 통일을 접목해 통일 일자리와 통일경제 등의 정책방안을 준비하자’고 제안하면서 ‘만나야 통일이다, 연석회의 성사’를 함께 주장했다.

이밖에도 ‘강정과 성주, 밀양과 세월호는 하나다’, ‘해군기지 철폐', '11월20일 민중총궐기 성사에 노동자 농민, 민중의 삶이 달려있다’, ‘남북대화의 조속한 실현’, ‘정권 교체 반드시 하자’ 등 구호로서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만나야 통일이다, 연석회의 성사시키자”

이날 원탁회의에서 참석자들은 6.15남측위원회 이창복 상임대표의장의 “남북한 평화협정 체결문제가 거론되지 않는 상황에서 통일운동은 무척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런 만큼 민주적이고 자율적으로 아래로부터하는 통일운동, 그리고 그 주체로서 문제를 푸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대회사에 걸맞게 각자의 위치에 맞는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쏟아냈다.  

한편 이날 주제연설에 나선 6.15남측위 조성우 상임대표는 “평화의 기본은 ‘자존’이다. 서로 귀한 걸 인정하고 존중하면 그 평화가 시작된다. 나라와 나라간 평화가 유지되려면 서로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주권 등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며 그것이 평화의 출발”이라고 강조했다.

또 “한반도 평화의 출발은 미일관계, 미국과 북한의 관계 정상화 등으로 핵을 현 수준에서 동결하고 평화협정 협상과 체결을 한 후 핵 감축 협상에 들어간다면 평화의 작은 출발이 될 것”이라고 평화협정 체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두 번째 주제연설에 나선 6.15남측위 여성본부 권오희 상임대표는 “남북 화해와 통일만이 민족의 살 길”이라며 리우올림픽 현장에서 남북 선수들이 함께 웃는 모습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 주었던 남북 선수단의 공동 입장을 언급하면서 “만남은 저렇게 쉬운데, 만남은 저렇게 좋은 일인데 왜 우리는 이곳에서 만날 수 없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광복 71돌에도 남북이 함께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권 대표는 또 남북화해와 협력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금강산 길이 다시 열리지 않을까 우려하며, 이미 남북의 만남과 대화가 우리의 미움과 증오의 장벽을 허물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방법임을 경험한 만큼 대결과 긴장을 부르는 충돌과 전쟁으로 비화되기 전에 꼭 만나야 된다고 호소했다.

아울러 “7.4남북공동성명, 6.15남북공동선언, 10.4남북공동선언 남북이 합의한 선언들에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가장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방법들이 담겨있다”며 "독재들과 권력유지자들, 전쟁무기상들은 더 많이 무기가 필요하다고 부추기고 자기들을 위해 대립을 부추기는 현실"을 지적하며, 평화로 가는 걸음을 걷는데 마음을 모으자고 남북대화를 강조했다.

▲ 한반도 평화통일을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강조하고 특히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반민족적 차별대우를 중단하라고 촉구하는 서승 교수
▲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해 각자의 원탁에서 논의한 결과들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호소문을 낭독하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 김순애 회장, 대한성공회정의평화사제단 이종성 요한 신부, 방용승 전북겨레하나 공동대표
▲ 원탁회의를 마치면서 옆사람과 손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통일을 염원했다.
▲ 원탁회의를 마치며 참석자들이 단일기를 들고 한반도 평화통일을 외치고 있다

원탁회의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 김순애 회장과 대한성공회정의평화사제단 이종성 요한 신부, 방용승 전북겨레하나 공동대표의 “광복 71돌을 맞아 치유되지 못한 분단의 상처 앞에서 위태로운 한반도 평화의 숨결을 되살리고 민족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한반도의 완전하고 영구적인 평화체제를 위해 노력하고 하루빨리 남북이 마주 앉을 수 있는 대화의 길을 열자”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호소문 낭독에 이어 참가자들이 단일기를 들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지난해 ‘평화통일서울시민 1000인 원탁회의’를 계기로 참가 대상을 전국으로 확대해 열린 이번 원탁회의는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통일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민주적인 통일논의의 장으로서, 통일운동의 새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원탁회의가 끝난 뒤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원탁회의는 가장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통일논의 구조를 만드는데 좋은 모델을 제시했다. 사진은 의견을 모아 적은 글

 

▲ 평화통일 염원을 담아서
▲ 이번 원탁회의에서는 '사드배치'가 남북 평화통일을 가로막는다는 의견이 많았다.

권미강 기자  kangmomo85@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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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없는 해방 71주년을 맞으며…

일제에 은혜를 입은 자들이 망언을 내뱉는 나라가 해방된 나라일까요?
 
김용택 | 2016-08-15 08:59:2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항복문서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15][16]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皇祖皇宗, 열성조)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 분투),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勵精, 노력), 짐의 일억 중서(衆庶, 국민)의 봉공(奉公, 국가를 받듦)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거듭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 참상)가 미치는 바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어린 백성[17]을 보전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이유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 직무)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 생계)에 이르러서는 짐의 우려하는 바 크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너희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신민의 적성(赤誠, 정성과 노력)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다면 이는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 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 일본왕의 항복문서 전문 -

일본왕의 항복육성 71년 전 라리오 방송 녹음자료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38선이 그어지고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미군과 소군정시대가 시작되었으며, 1948년 이승만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후 3년간의 한국전쟁은 민족의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켰고, 분단은 외세에 의해 계속 지배됨으로써 자주권이 박탈된 또 다른 종속이 시작되었다. (김용택의 현대사사료집-전국역사교사모임)

【조선 주민에 대한 태평양 미육군 총사령관 포고문 제 1호】

조선 주민에 포고함.

태평양 미국 육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하기와 같이 포고함.

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을 대표하여 서명한 항복 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전첩군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함.

오랫동안 조선인의 노예화된 사실과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킬 결정을 고려한 결과 조선 점령의 목적이 항복 문서 조항 이행과 조선인의 인권 및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음을 조선인은 인식할 줄로 확신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적극적 원조와 협력을 요구함.

본관은 본관에게 부여된 태평양 미국 육군 최고 지휘관의 권한을 자기고 일로부터 조선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과 둥지의 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설립함. 따라서 점령에 관한 조건을 아래와 같이 포고함.

제 1조 조선 북위38도 이남의 지역과 동 주민에 대한 모든 행정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하에서 시행함.

제 2조 정부, 공공단체 또는 기타의 명예 직원과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 위생을 포함한 공공 사업에 종사는 직원과 고용인은 유급 무급을 불문하고 또 기타 제반 중요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명있을 때까지 종래의 직무에 종사하고 또한 모든 기록과 재산의 보관에 임함.

제 3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속히 복종할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 행동을 하거나 또는 질서 보안을 교란하는 행동을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함.

제 4조 주민의 소유권은 이를 존중함. 주민은 본관의 별명이 있을 때까지 일상의 업무에 종사할 일.

제 5조 군정기간 중 영어를 가지고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함. 영어와 조선어 또는 일본어간에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 또는 부동이 발생한 때는 영어를 기본으로 함.

제 6조 이후 공포하게 되는 포고, 법령, 규약, 고시, 지시 및 조례는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하에서 발포하여 주민이 이행하여야 될 사항을 명기함.

위와 같이 포고함

1945년 9월 7일
횡빈에서
태평양 미국 육군 최고 지휘관
미국육군 대장 더글러스 맥아더

【치스챠코프 대장의 포고문】

제 25 조선점령군사령관 근위대대장 치스챠코프

조선 인민들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려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이 영웅적으로 투쟁하며 꾸준히 노력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일제의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라! 담 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일하였는가?

왜놈들은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여 조선 사람들을 멸시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모욕한 것을 당신들이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저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원히 없어져 버렸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붉은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작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 주었다.

조선 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를 회복시켜라! 새 생산 기업체를 담보하여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의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써 조선의 경제적 및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

조선 인민들이여!

세계에는 두 개의 침략국이 있었나니 그는 즉 파시스트 독일과 제국주의적 일본이 그 것이다. 이 두 국가는 남의 영토를 점령하며 다른 나라 인민들을 정복할 목적으로 연합국들을 반대하여 전쟁하였다.

붉은 군대는 영미군들과 협력하여 히틀러 독일을 영영 격멸하였으며 항복시켰다.

히틀러 독일이 격패를 당하고 항복한 이후에 일본이 전쟁 계속을 그냥 주장하는 유일한 국가이었다. 전반적 평화의 회복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에 들어섰다.

당시의 소련 정부가 설명하였으되 ‘자기의 정책이 평화를 가까이 오게 할 수 있으며 인민들을 앞으로 있을 희생에서와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라고 하였다.

이 극동에 또는 전세계에 평화를 수립하기 위하여는 죄악과 억압 불행과 전쟁의 마지막 발원지인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하여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과 소련을 반대하기 위한 전쟁을 오래 전부터 준비하였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여 자기의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소련을 반대하는 전쟁을 위한 위력한 연병장을 조선내에 만들어 놓았다.

조선 인민들이여!

소련 인민은 조선 이민이 일본한테 압제를 받는 것과 조선 인민이 일본의 예속에서 해방되도록 그에게 방조를 주어야 할 것을 기억한다.

때문에 붉은 군대는 극동에서의 전쟁의 발원지를 없이하여 자기의 국가를 일본의 위하(威嚇)로부터 위험이 없도록 하며 압박 받는 조선 인민에게 자유와 독립을 찾아 주도록그를 방조하였다. 붉은 군대는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의 영솔하에서 이 과업을 영예롭게 실행하였다.

그는 조선 지역에 들어와서 일본 침략가들을 박멸하였다. 붉은 군대의 역량과 위력은 위대하다. 그러나 이 역량과 위력은 언제든지 다른 인민들을 정복하려는 데 사용하지 않았으며 또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소련 인민의 위대한 수령 스탈린 대원수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에게는 구라파의 인민들과 영토에 대하여서나 혹은 아세아 인민들과 영토에 대하여 말할 것 없이 남의 영토를 점령하려거나 또는 다른 나라 인민들을 정복하려는 그런 전쟁 목적이 없으며 또 있을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붉은 군대는 독일한테 정복되었던 구라파 국가들을 해방시켰다.

지금은 이 여러 나라의 인민들이 자기 생활을 제손으로 건설하였다.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는 그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목적은 그 인민들의 해방 투쟁에 있어서 그들을 방조하며 다음에는 그들이 자기 소원대로 자기 땅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탈린의 이 말씀은 구라파 여러 나라들에게 벌써 실천되었다. 이 말씀이 조선에 있어서도 원만하게 실천되고 있다.

조선 인민들이여!

1945년 8월은 조선 인민사에 새기원의 시초로 기입될 것이다.

1945년 8월에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을 일본 침략가들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그에게 자유와 독립을 찾아 주었다.

그래서 조선 인민은 자기 땅에서 자기 소원대로 생활을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받았다.

조선 인민은 자유의 태양을 다시 보고 있다.

전세계 피 압박 인민들의 해방군인 붉은 군대 만세!

조선의 자유와 독립 만세!

조선 남녀들이여!

35년 동안이나 전조선은 혹독한 놈들의 주권 하에서 신음을 하였습니다.

35년 동안이나 왜놈들은 조선 인민들을 압제하였고 조선 부원(富源)을 강탈하여 갔으며 조선 사람들의 언어 문화 및 모든 생활 제도를 능욕하여 왔습니다.

조선은 35년 동안이나 눈물과 주림의 나라로 있었습니다.

자기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조선의 애국 열사들은 수많이 죽었습니다.

오직 자기의 조국을 사랑하였으며 그의 행복을 원한다고 용감스럽고 충직한 조선 사람들을 수많이도 왜놈들이 죽여 버렸습니다.

자유와 행복에 대한 갈망과 증오스러운 왜놈들을 구축하기를 기다리던 갈망은 조선 인민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선 사람들이여!

이 선명한 갈망은 실현되었습니다.

당신들의 위력한 인접국인 소련 인민들이 조선 인민들을 조선 인민들을 후원하려고 왔습니다.

왜놈들은 조선에서 영영 구축되었습니다.

붉은 군대의 위력은 크고도 큽니다. 그러나 그는 이 위력을 어느 때든지 다른 나라 인민들을 정복함에 이용하지 않았으며 또는 이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소비에트 인민들의 위대한 수령인 스탈린 대원수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어 보십시요…“우리에게는 구라파 인민들과 영토에 대하여서나 혹은 아세아의 인민들과 영토에 대하여서나 말할 것 없이 남의 영토를 점령하려거나 또는 다른 나라 인민들을 정복하려는 그런 전쟁 목적이 없으며 또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붉은 군대는 독일 약탈자들을 박멸하고 그놈들이 약탈하였던 소비에트 조국의 지역을 해방시킨 것뿐만 아니라 히틀러 강도배한테 압박 받던 구라파 모든 인민들에게도 해방을 가져 왔습니다.

붉은 군대는 독일에 정복되었던 구라파의 여러 나라들을 해방시키고 지금 이 나라 인민들은 자기로서 자국 생활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우리의 목적은 인민들의 해방 투쟁을 도와주며 그 다음에는 그들이 자기의 땅에서 자기 소원대로 자유스럽게 생활하도록 하려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스탈린 대원수의 이 말씀은 지금 실현되었습니다. 스탈린 대원수의 이 말씀은 다 조선에서도 역시 실현되고 있습니다.

붉은 군대는 조선 내에 있는 모든 반일적 민주주의적 당들과 단체들의 광범한 협동의 기본 위에서 자기 민주주의적 정부를 창조함에 조선 인민들에게 보조를 줍니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유력하고 정직한 친우인 소련이 있습니다.
당신들의 해방 군인 붉은 군대에 백방으로 방조하십시오.
도시와 농촌에서는 안전한 생활을 계속하며 붉은 군대가 들어오기 전에 하던 그 곳에서 그대로 사업을 계속하십시오.
지방 당국에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함에 백방으로 후원하십시오
조선이 자유와 독립만세!

조선의 발흥을 담보하는 조선과 소련친선 만세!

민족의 의사와는 다르게 미국의 제안에 의해 그어진 38도선. 민족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다. 남한의 점령군으로 나타난 미군과 북한의 해방군으로 나타난 소련군…  3년간의 미소군정이 끝난 후 대한민국의 헌법에 의거 남한에서 단독정부가.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 출범한다.


오늘은 일본의 항복으로 36년간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71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일제가 물러난 지 7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은 일제가 할퀴고 간 상처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해방은 됐지만, 우리에게 해방은 오지 않았습니다.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군 소위 오카모도 미노루가 대통령이 되고 그 딸이 다시 대통령을 하는 나라. 민족을 배신한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들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일제시대 법관이, 경찰이, 군인이 해방된나라에 그들이 다시 권리를 계승한 나라가 진정한 해방이 된 나라일까요?

해방 71주년이 된 나라에서 국책기관의 책임자가 ‘친일파의 후손’이라고 공언하면서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三唱)하는 나라입니다. 돌이켜 보면 ‘해방’이라는 말은 36년간 종살이하던 우리 선조들에게는 얼마나 가슴 떨리는 말이었을까요? 2차대전에 학도병으로 혹은 강제징집으로 혹은 보국대로 정신대로 끌려갔던 수많은 백성… 만주에서 혹은 간도에서 탄광에서 혹은 이름 모르는 곳곳에 끌려가 전쟁준비로 죽지 못해 살던 노예생활에서 ‘해방’이란 얼마나 학수고대했던 말이었을까요?

처자식을 두고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군으로 싸우다 잡혀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혹은 죽어간 애국선열들은 얼마나 이 말을 기다렸을까요? 그런데 해방은 왔지만 우리한반도는 동족상잔으로 나라가 두동강이 나고 서로가 철천지 원수가 되어 호시탐탐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남은 북을 북은 남을 적으로 간주해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는 훈련, 무기경쟁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미지 출처 : 경향신문>

일제에 은혜를 입은 자들이 이런 망언을 마음대로 내뱉을 수 있는 나라가 해방된 나라일까요? 식민사관의 학자들이 해방된 나라에 교수가 되어 식민지근대화론을 가르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서 말과 글 그리고 문화들이 왜색이 창연한데 이를 두고 해방된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요? 태극기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태극기를 많이 달면 애국심이 우러날까요? 입법사법행정의 주요인사들이 독립기념관에 찾아가 광복 몇 주년 기념행사를 하고 학생들을 모아 글짓기를 하면 민족정기가 살아 날까요? 해방이 아니라 건국절이라며 4.19혁명을 부정한 독재자가 건국대통령으로 추앙받는 나라가 진정 해방이 된 나라일까요?  

오죽하면 92세가 된 김영관 광복군동지회장인 대통령 면전에서 ‘건국절 제정론’에 대해 “역사왜곡”이라고 비판했을까요? ‘건국절’로 하자는 일부 주장은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헌법에 위배되고, 실증적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고, 역사의 단절을 초래할 뿐”이라고 질타했을까요?

‘내가 죽거든 국립현충원에 안장하지 말라!, 국립현충원에는 친일파들이 묻혀 있어 함께할 수 없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유언입니다. 대한민국 국립묘지에는 한용운 선생님을 비롯해 이런 저런 이유로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한 독립유공자가 4,500명이 넘습니다. 친일세력이 판치는 나라, 해방 71년이 지만 대한민국에 왜천황폐하만세를 부르고 일본이 왜 침략전쟁을 성전이라며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지 알만하지 않습니까?

광복 71돌을 맞아 경기도교육청이 일제 강점기 때의 교명 바꾸기 등 학교 안 일제 잔재 청산에 나서겠다고 합니다. 황국신민을 기른다는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반세기가 지난 1995년에 가서야 겨우 ‘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는 ‘중 동·서·남·북 방위명과 중앙·제일…’ 등과 같은 일제식 이름이 버젓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학교 조회대, 애국조회, ‘전체 차렷·경례’ 등과 같은 일제식 문화며 ‘장학사’, ‘장학관’ 과 같은 일제식 행정용어도 그대로입니다.

언제쯤이면 진정한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주권을 누리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을까요? 40년 가까운 교직생활에서 가르치지 못한 해방을 위해 이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태극기를 달지 못하겠습니다. 진정한 해방이 오면 그때 태극기를 달고 해방의 기쁨을 누리겠습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30&table=yt_kim&uid=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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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의 분노 "썩어빠진 한국, 갈아엎을 지도자 간절하다"

 

[기고]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16.08.14 22:02l최종 업데이트 16.08.14 22:02l
 

 

필자의 한 지인이 영국의 법대 교수에게 한국의 검찰권에 대해서 말하니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더라고 했다. 한 기관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으며 기소독점권과 기소편의주의까지 갖고 있다는 설명에 "그런 기관을 두고 어떻게 인권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라고 계속 반문하더라는 것이다. 이 교수의 질문은 정상국가의 정상적인 법학 교수가 갖는 당연한 의문이다. 그러나 정작 한국 사람들은 한국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법체계 속에서 살고 있는지 잘 모른다.

'비정상적 검찰'의 뿌리는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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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앞 검찰 깃발.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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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정상의 뿌리를 캐보면 십중팔구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이기 십상이다. 우리 선조들의 사법시스템은 이렇지 않았다. 지금 이 나라는 법치(法治)인지 인치(人治)인지 구분하기 힘들지만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은 먼저 수사권을 여러 기관에 분산시켰다. 수사권을 사헌부, 형조, 의금부, 포도청, 한성부, 장예원 등으로 나누었다. 사헌부는 지금의 검찰격이고, 의금부는 지금 국민들의 도입 주장이 높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라고 할 수 있다. 포도청은 경찰청격이다. 

 

수사권을 분산시킨 것은 실체적 진실을 캐고 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에서 사헌부에 사건을 신고했는데 이런 저런 핑계로 사건을 덮으려고 들면 바로 사간원에서 탄핵에 나서고 의금부가 즉각 수사에 나서 사실일 경우 사헌부 관원을 구속했다. 수사권이 분산되어 있으니 혼란스러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담당 사건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이다. 형조·의금부·사헌부는 중대 사건을 다뤘고 포도청은 강·절도 사건을 주로 다뤘고, 장예원은 노비사건을 주로 다뤘다. 전문분야별로 수사권을 분산시킨 것이다. 

이중 대표적인 수사기관은 사헌부였다. 사헌부는 하루라도 먼저 부임한 선배가 출퇴근할 때는 후배들이 모두 일어서서 예를 표할 정도로 내부 기강이 엄격했다. 그러나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도 문제가 있으면 내부에서 먼저 탄핵했다. 중종 때 대사헌이 된 이점(李坫)이 경상감사 시절 연산군에게 흰 꿩을 바쳤던 사실이 드러나자 사헌부의 장령 등은 즉각 대사헌을 탄핵했다. 물론 사헌부 관원들도 사람인 이상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태종 4년(1404) 1월 허가증인 패(牌)가 없는 매 소유자를 수사하는데, 좌명 1등 공신인 태종조의 실세 신극례(辛克禮)가 수사망에 들었다. 신극례가 사헌부 집의(종3품) 민약손 등에게 "이 매는 주상께서 주신 것이다"라고 협박하자 민약손 등은 수하 수사관들인 소유(所由)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러자 사헌부 감찰(종6품) 박하 등이 "왜 소유에게 책임을 돌리느냐?"면서 상급자인 민약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사헌부 관료들은 직급은 낮아도 선비 중의 선비라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성들의 신뢰를 얻었다. 

사헌부 대사헌은 차관격인 종2품에 불과하지만 <연려실기술>의 '관직전고(官職典故)'에서 사헌부 관원이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모든 관료가 떨고 두려워 한다"고 전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다. 사헌부의 이런 권위는 죄 없는 사람도 죄인으로 만들고, 죄 있는 사람도 기소하지 않는 '내 맘대로' 법운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연려실기술>은 사헌부 관료는 "편복(便服)으로 거리에 나서지 못했고, 친구 초상 때도 반혼(返魂:장례 후 신주를 집으로 모심)할 때 장막을 교외에 쳤어도 감히 나가서 곡하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친구의 장례식 참석도 꺼릴 정도로 자신의 처신에 엄격하면서 불법에는 추상같았던 참 선비의 자세가 백성들의 신뢰를 샀다. 

조선에서 사헌부 관료들이 기업의 청탁을 받아서 청탁수사를 하거나 심지어 기업을 협박해서 일감을 따내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헌부 관원들은 선비 중의 선비라는 자부심과 수사권 분산에 의한 수사기관의 상호견제라는 선조들의 국정 운영 시스템에 의해 조선 최고의 수사기관으로 우뚝 섰던 것이다. 

수사권·기소권 독점 시킨 이유? '독립운동 탄압'

한국 검찰이 조선과 달리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할 수 있게 된 뿌리는 1912년 3월 18일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제령 11호로 공포한 이른바 '조선형사령'에 있다. 제령은 조선 총독의 명령을 뜻한다. 메이지 헌법에 따라 일본은 제국 의회에서 법률을 제정했지만 식민지 조선은 메이지 헌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기에 조선총독의 제령이 곧 입법이었다. 총독부에서 검찰에게 수사권·기소권을 독점시킨 이유는 독립운동을 쉽게 탄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조선형사령'이 독립운동가 억압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상호모순된 조항이 많았다. 그 11조도 그중 하나인데, "①검사는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도 수사결과 급속한 처분을 요하는 것이라 사료될 때는 공소제기 전에 영장을 발부해 검증, 수색, 물건압수를 하고 피고인, 증인을 신문하거나 또는 감정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행범인 사건"이 아니라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도"라는 희한한 규정은 두말할 것 없이 독립운동가들을 마음대로 잡아가두기 위한  것이었다. 

11조의 ②항은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검사에게 허락된 직무는 사법경찰관 역시 임시로 이를 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검사에게 수사권, 기소권을 독점시켜 놓고 사법경찰관에게도 임시로 같은 권한을 준 것 역시 독립운동가를 때려잡기 위한 것이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만든 검찰의 수사·기소권 독점은 해방 이후 친일 청산에 실패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진 친일잔재다. 따라서 검찰의 수사권, 기소권 독점구조 해체는 일제잔재 청산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할 문제이다.   

사드 배치 문제는 어떤가? 사드는 한반도 내 배치를 결정하는 순간 남·북한간의 관계를 넘어서 미국과 중국 사이의 대결 현장으로 전환하게 되어 있는 문제였다. 우리가 중국과 선린관계를 맺은 것은 남북국시대부터만 따져도 1300여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이다. 반면 미국과 동맹관계였던 것은 해방 후 70여 년에 불과하다.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북한 땅에 대해 눈독을 들이는 것은 그것대로 엄중하게 따질 문제지만 우리가 무턱대고 미국 일방의 편을 들어 중국과 맞서는 것은 우리 역사의 경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사드사태의 주체인지 객체인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사드 배치, 인조의 '하수'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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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7월 1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 주한미군 배치 결정과 관련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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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인조 5년(1627:정묘년) 만주족(여진족)이 세운 후금(청)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의 배경에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1567~1629) 사건이 있었다.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항주(抗州) 출신의 모문룡은 만주로 와서 군인이 되었다. 

<동강소게당보절초(東江疏揭塘報節草)>라는 중국 사료에 따르면 후금이 만주 장악에 나서면서 만주의 안산(鞍山)에 있던 모문룡의 친족 100여 명이 살해되었고, 분개한 모문룡은 197명의 사사(死士:결사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모문룡은 지금의 단동(丹東)시 부근에서 후금을 꺾는 진강대첩(鎭江大捷)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이는 수세에 몰리던 명나라가 후금을 상대로 거둔 귀중한 승리였지만 전세는 이미 이런 지역적 승첩으로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후금에게 쫓긴 모문룡은  광해군은 14년(1622) 일부 군사들과 조선으로 쫓겨 들어왔다. 광해군은 모문룡 문제를 자칫 잘못 처리하면 신흥 강국인 후금 전체를 적으로 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모문룡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명과 후금 중 누가 승리할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조선이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면 일방적으로 명나라의 편을 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모문룡을 해도(海島)로 숨게 해서 명나라와 후금 모두의 극한 반발을 막았다. 이것이 조선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것이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는 명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기는 국내 친명 사대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발을 샀다. 서인들은 급기야 인조반정이란 쿠데타로 광해군을 내쫓았고,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를 폐기하고 명나라를 상국으로 떠받드는 숭명반청(崇明反淸) 외교로 급격하게 전환시켰다. 이는 국가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외교문제를 이념으로 끌어올린 하수였는데 이는 모문룡에 대한 대접에서도 잘 나타난다.  

인조는 쿠데타 직후 20여 일 후인 재위 1년(1623) 3월 모문룡의 차관인 응시태(應時泰)를 명정전에서 접견하고는, "나라에 일이 많아서 지금에야 접견하니 마음이 심히 미안하다"라고 사과했다. 인조정권은 큰소리치는 모문룡을 상국의 구세주로 여기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지만 <인조실록> 2년(1624) 6월조는 모문룡이 "군사를 풀어 놓아 횡포를 부리면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집에 감춘 것까지 수색해 빼앗아 연로(沿路)가 텅 비고 백성이 모두 호곡(號哭)했다"고 전할 정도로 약탈을 일삼는 패잔병에 불과했다. 

청 태종은 모문룡과 조선의 이런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가 인조 5년(1627) 1월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 등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넘게 했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정작 외교문제를 이념화시켜 친명일변도의 외교정책으로 급선회한 인조정권은 아무런 국방대책이 없었고 이 와중에 이순신의 조카인 의주 부윤 이완(李莞)이 의주성에서 분전하다 전사했다. "오랑캐를 멸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큰소리치던 모문룡은 후금군이 철산을 공격하자 신미도로 잽싸게 도주했다. 

인조는 세자를 전주로 보내고 자신은 강화도로 들어갔지만 임란과 달리 의병이나 근왕병도 달려오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류성룡은 일본군의 머리를 베어오는 천민들은 양인(良人)으로 신분을 상승시켜주는 면천법(免賤法)을 통과시켜 백성들의 참전을 독려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끝나자 선조와 양반들은 류성룡을 실각시키고 면천법을 폐기시켜 '양반 천국, 상민 지옥'의 조선을 재연했다. 

그래서 정묘호란 때 백성들은 더 이상 양반 사대부를 위해서 싸울 생각이 없었다. 인조는 불과 두 달 후인 그해 3월 강화부 성문 밖에 단(壇)과 희생(犧牲)을 마련하고 후금과 정묘약조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정묘호란은 광해군이 임금이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불필요한 전쟁이었다.  

썩어빠진 한국 사회... 제대로 갈아엎을 인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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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이 '헬조선'인 60가지 이유 트위터 사용자 '샤우트'(@187Centi)가 지난해 지난 12월 60개의 뉴스 방송 화면을 모아 올린 사진. 각 방송화면에서 전하고 있는 뉴스는 <GDP 대비 복지비 비율, OECD 최하위>, <아이들 '삶의 질' 꼴찌> 등 한국의 열악한 삶의 질을 보여주는 통계다.
ⓒ 트위터 @187Ce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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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에 동아시아는 농경민족인 한족(漢族)이 세운 송·명 등의 제국과 요·금·원·청 등 북방 유목민족 사이 중원을 둘러싼 패권다툼의 연속이었다. 이 구도가 지금은 전 지구적 범위로 확장되어서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 사이의 패권다툼으로 재연되고 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우리는 이 구도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부터 한국전쟁까지 이 땅에서 벌어진 모든 전쟁들이 국제전이었던 것은 우리 외교역량의 협애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 중심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가 약화되면서 여러 개의 중심축이 새롭게 생성되는 중이다. 경제적으로는 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ICT)이 융합하는 4차 산업혁명 중이다. 

사회적으로는 영국의 브렉시트나 필리핀의 두테르테 당선, 미국의 트럼프 현상 등에서 보듯이 좌우를 막론하고 기존 지배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광범위한 불신과 전복이 두드러지는 상황이다. 더 이상 친미 일변도의 외교정책으로는 이 복잡한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없다. 당장 사드배치 결정의 가장 큰 수혜자가 북한의 김정은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이 사태의 복잡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새로운 리더집단의 등장을 요구하고 있다. 역사와 시대에 대한 깊은 지식과 통찰력으로 우리 사회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정치공학적 잔머리로 주판알을 튕기기 바쁜 지금의 여야정치세력이 이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아직도 전근대적인 족벌 체제가 중심인 경제계도 마찬가지고, 국제대학 상위 순위에서는 이름을 찾기 어려우면서도 국내에서는 각종 카르텔로 독점적 지위를 이어가고 있는 지식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나라는 어느 한 곳 희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분야가 한꺼번에 붕괴하고 있는 총체적 난국을 겪고 있다. 심지어 '국가 해체'라는 이야기까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무능과 불통, 아집으로 똘똘 뭉친 현 정권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이에 대한 반사이익만 추구하는 야당에도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이제 한국 사회는 여야나 좌우를 막론하고 기존의 지배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 내지는 재조직 요구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뚜렷한 역사관에서 건져 올린 미래지향적 가치관을 제시하고 실천하면서 한국 사회의 온갖 적폐를 해소하겠다고 공언하는 정치세력이나 정치인이 등장한다면 정치공학적 계산에 매달리는 기존의 여야 정치인들은 단번에 도태될 수도 있다.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썩어빠진 한국사회에 대한 근본적 창신(創新)에 나서는 그런 인재를 희구하는 것이 비단 필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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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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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적 위안부화해치유재단 당장 해체되어야

굴욕적 위안부화해치유재단 당장 해체되어야
 
 
 
우리사회연구소 곽동기 상임연구원 
기사입력: 2016/08/15 [02:33]  최종편집: ⓒ 자주시보
 
 
 

광복절을 앞둔 8월 12일, 일본 정부는 10억엔(107억원)의 정부 예산을 출연하기로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 같은 뜻을 표명했다고 외교부가 밝혔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2015년 12월 28일, 굴욕적으로 받아들였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르면, 일본정부가 단돈 107억원을 내면 위안부 문제는 한일 정부차원에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종료되게 됩니다.

 

 

그간 한일 정부간에는 일본이 내기로 한 107억원에 대한 해석이 차이가 있어 107억원 출연이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107억원이 일본정부의 예산이므로 일본이 사실상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에 관한 배상은 1963년 한일수교과정에서 이미 종결된 것이므로 위안부 문제도 1963년에 박정희가 모두 일괄타결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이번에 지급하는 107억원은 "배상이 아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로서 보다 나은 한일관계 발전을 위한 사업 지출“이라고 주장합니다.

 

위안부 문제는 태평양전쟁 시기에 발생하였던 일제의 전쟁범죄입니다. 일본의 위안부 범죄는 공소시효가 없이 일벌백계로 다스리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일본이 위안부 범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있는데 “배상금을 지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제2의 전쟁범죄로 줄달음치는 일본

 

일본정부는 지금 오바마행정부의 지지를 등에 업고 한반도 문제에 정치군사적으로 뛰어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아베정부는 “집단적 자위권”을 운운하며 전쟁을 금지한 일본의 평화헌법을 재해석하였습니다. 일본의 평화헌법은 앞으로 영구히 일본은 전쟁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것입니다. 오로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자위권”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단적 자위권”은 무엇입니까. 일본이 공격받을 경우뿐만 아니라 일본의 동맹이 공격받은 경우에도 “자위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군사동맹국은 바로 미국입니다. 미국이 북한의 공격을 받으면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을 앞세워 북한을 공격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한반도 유사시 주한미군이 북한의 공격을 받으면, 일본정부가 “집단적 자위권”을 앞세워 자위대를 대한민국에 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정부의 이러한 행보는 지난 태평양전쟁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오바마행정부의지지를 빌미로 아시아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는 것입니다. 일본정부가 우경화로 줄달음치면서 아시아 재침략을 바라는만큼, 저들은 추악한 전쟁범죄인 위안부 문제를 인정할 리 없습니다.

 

사실관계가 이러한데도 어떻게 일본정부의 단돈 107억원이 “배상금을 지불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까? 일본이 광복절을 앞두고 107억원을 우리정부에게 집어던진 것은, 가슴어린 참회와 반성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한국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거론할 수 없게끔 입을 막겠다는 것입니다. 일본정부가 107억원과 소녀상 철거를 연계짓는 것만 보아도 너무나 명확합니다.

 

 

지금 일본은 지난 태평양전쟁을 뉘우치고 전쟁범죄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를 한반도에 보내기 위해 몸이 달아올라 있습니다. 우경화로 달려가는 일본이 박근혜 정부와 위안부 합의를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본의 군사행동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발을 막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배상금을 지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석한다면, 그런 해석이야말로 “일본의 한반도 군사행동을 지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100년전, 나라를 팔아먹었던 친일파와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화해치유 재단은 해체되어야

 

일본정부의 107억원도 한일당국의 해석이 다른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이것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을 받으면 향후 우리 정부는 앞으로도 일본정부에 대해 위안부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일본의 107억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데도 “화해치유재단” 설립을 강행하였습니다. “화해, 치유”라는 이름부터가 전쟁범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새로운 한일관계 발전을 향한 일본의 성의”라는 일본정부의 해석이 주되게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위안부 재단이라는 개념부터가 2015년 12월 28일의 한일 굴욕합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굴욕적 개념입니다.

 
▲ 김주은 민주주의국민행동 사무총장은 세월호, 위안부 협상,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 세가지를 잊지말고 정권과 새누리당 심판에 나서자고 역설했다.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 재미동포들이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전쟁범죄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를 촉구하는 시위를 열 예정이다.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화해치유재단은 해체되어야 합니다. 이는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대응을 보면 명확합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이에 대해 “피해자 동의 없는 재단 설립은 정치적 폭력행위”라고 밝혔습니다. 일본정부의 공식사과와 법적인 배상이 빠진 합의는 전면 무효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위안부 피해자셨던 이용수 할머니는 기자회견에 참석해 “우리는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라며 “왜 정부는 우리를 구렁텅이로 빠트리고 두 번 세 번 죽이려 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피해당사자가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사실상 배상금”일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법원에서도 가해자가 아무리 돈을 주겠다고 해도 피해자가 반대하면 합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화해치유재단의 김태현 이사장은 일본의 10억엔에 대해 "치유금이지 배상금은 아니라고 본다"고 밝혀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박근혜 정부가 설립한 화해치유재단은 일제의 위안부 전쟁범죄에 대한 면죄부를 발행해줌으로써 일제의 제2, 제3의 전쟁범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망국적 행동입니다. 

 

 

그러다보니 화해치유 재단이 출범을 선언한 7월 28일에는 대학생 20여명이 회견장을 점거하고 한일굴욕합의 폐기를 주장하였습니다. 한 20대 청년이 ‘화해와 치유재단’ 이사장의 얼굴에 캡사이신을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국민적 공분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태평양전쟁 뿐 아니라 지난 식민지배 전반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를 중단없이 요구해야 합니다. 진정한 한일관계는 일본의 성실한 반성이 있을 때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에게 면죄부를 발행하는 화해치유재단은 당장 해체되어야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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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해외 연석회의’ 관련 실무회의 개최

11~12일 중국 심양서… “연석회의 준비 위한 노력 적극 전개”
▲ 11일과 12일 양일간에 걸쳐 중국 심양에서 남북해외 실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지난 11~12일 중국 심양에서 남북해외 연석회의와 관련한 실무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선 북측이 제안한 연석회의, 6.15민족공동위원회가 합의한 광복 71돌 민족공동행사와 노동자통일축구대회 및 각계층 통일회합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고 공동보도문을 채택, 발표했다.

이번 회의엔 남측에서 조성우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 등 4명, 북측에서 김완수 연석회의 북측준비위 부위원장 등 5명, 해외측에서 손형근 연석회의 해외측준비위 부위원장 등 4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공동보도문에서 “올해 광복 71돌을 계기로 진행하기로 했던 연석회의를 가지지 못했지만, 연석회의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고 남북관계 개선과 조국통일의 새로운 출로를 열어나가는 합리적 방도이며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큰 제안이라는데 대해 인식을 같이했다”며 “한반도에서 대결과 전쟁 위기를 해소하고, 통일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연석회의 준비를 위한 노력을 적극 전개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어 “남측에서 준비위원회를 만들어나가는 데에 따라 전민족적인 공동준비기구를 구성해나가기로” 했으며 “연석회의 성사를 비롯해 통일회합과 접촉을 전면적으로 회복하기 위한 제반 문제들을 겨레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적극 협의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편, 6.15남측위는 “현재와 같은 민간교류 전면 중단 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남북관계 위기를 격화시킨다는 점에서, 정부의 거듭된 불허에 굴하지 않고 남북해외의 만남을 통해 민간교류의 흐름을 이어가고자 한다”고 회의에 참석한 동기를 밝혔다. 아울러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해 통일회합과 공동행사 실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공동보도문

<6.15남측위원회 연석회의추진기획단>과 <조선반도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북 남 해외 제 정당 단체 개별인사들의 련석회의 북측준비위원회> 및 <해외측 준비위원회> 사이의 실무회의가 8월 11~12일까지 중국 심양에서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북측이 제안한 전민족적인 통일대회합과 그 최고 형식인 연석회의를 성사시키기 위한 당면 활동방향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협의하였으며, 광복 71돌 민족공동행사와 노동자통일축구대회 및 각계층 통일회합 문제 등에 대해서도 토의하였다.

회의 참가자들은 올해 광복 71돌을 계기로 진행하기로 하였던 연석회의를 가지지 못하였지만, 연석회의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고 남북관계 개선과 조국통일의 새로운 출로를 열어나가는 합리적 방도이며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큰 제안이라는데 대해 인식을 같이하였다.

회의에서는 당면하여 한반도에서 대결과 전쟁 위기를 해소하고 통일을 위한 민족의 단합된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연석회의 준비를 위한 노력을 적극 전개해나가기로 하였으며, 향후 남측에서 준비위원회를 만들어나가는 데에 따라 전민족적인 공동준비기구를 구성해나가기로 하였다. 또한 연석회의 성사를 위한 활동을 실정에 맞게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전개해나가기로 하였다.

이번 회의에 참가한 남 북 해외 대표단은 연석회의 개최와 함께 광복절 민족공동행사, 노동자통일축구대회 등이 남측 당국의 불허로 이번 광복절에 성사되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시하였으며, 남 북 해외의 접촉과 왕래를 정상화시키기 위한 활동을 더욱 과감히 전개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 해외는 앞으로 더 긴밀히 연계, 협의하면서 연석회의 성사를 비롯하여 통일회합과 접촉을 전면적으로 회복하기 위한 제반 문제들을 겨레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적극 협의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6.15남측위원회 연석회의 추진기획단

조선반도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북 남 해외 제 정당 단체 개별인사들의 연석회의 북측준비위원회

조국반도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남 북 해외 제정당 단체 개별인사들의 연석회의 해외측준비위원회

2016년 8월12일 중국 심양에서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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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걸 “朴, 국론 분열 안 된다? 유신정권식 사고”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6/08/14 12:51
  • 수정일
    2016/08/14 12:51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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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의 발로GO 인터뷰 78] 김홍걸 전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이영광 기자  |  kwang3830@hanmail.net
 

 

사드 배치를 두고 논쟁이 점점 과열돼 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초선 6명이 사드 문제로 중국과 토론하고자 지난 8일 2박 3일 일정으로 방중하겠다고 하자 보수언론은 물론 청와대와 새누리당까지 나서서 이들의 매국 행위로 맹폭을 가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이면서 그동안 SNS에서 자기 입장을 자유롭게 표명해온 김홍걸 전 더민주 국민통합위원장은 사드 문제 등에 어떤 입장일지 궁금해 지난 10일 그의 사무실에서 사드 문제와 함께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더민주 의원 6명의 방중을 매국 행위로 규정한 것에 김 전 위원장은 “청와대와 정부여당의 비판은 매우 부적절하고 어이없는 일”이라면서 “한 중 관계가 더 악화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의원외교 차원에서 막아보려고 작은 노력을 하겠다는 것을 정부에서 오히려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부풀려서 이적행위라도 되는 양 매도한다”고 비판했다. 또 “국가 안보에 있어서는 여야 없이 초당적으로 협력하고 국론이 분열되면 안 된다고 주장은 70년대 유신정권식 사고”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지지층 결집을 위해 매국 행위로 주장한다는 견해에 대해 김 전 위원장은 “그렇기 때문에 무책임하다고 하는 거다. 우리가 힘으로 중국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쪽과 합리적인 대화로 잘 풀어나갈 생각을 해야 하는데 국내정치에서 얻어지는 작은 눈앞의 이익에 정신이 팔려서 국가 간의 관계를 두고두고 악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짓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김홍걸 전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 ⓒ 이영광 기자

인터뷰 전날인 9일 새누리당 신임 대표로 친박인 이정현 의원이 뽑혔고 최고위원도 친박계가 차지했다. 이에 김 전 위원장은 “내년 대선을 위한 변화를 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끝까지 지든 이기든 자기들 식으로 가겠다는 고집을 내보인 게 아닌지 저는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고 결국 협치는 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아버지인 김대중 전 대통령 7주기에 대해선 “평생 노력해서 지켜오신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가 위기에 처한 모습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다가 세상을 뜨셨는데 지금 상황이 더 나빠져 있어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수 있는 큰 어른이 지금 안 계신 게 아쉽다”고 씁쓸해했다.

다음은 김홍걸 전 위원장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새누리, 초선 방중 비판, 사드사태 책임 전가…무책임한 태도”

- 지난 8일 더 민주당의 초선의원 6명이 방중한 걸 두고 논란이 되고 있어요. 김현아 새누리당 의원은 6명을 사춘기 청소년 같다고 비판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아무리 국내 정치적으로 정부에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국가안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내부분열을 가중시키지 않고, 초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국민을 대신해서 권한을 위임받은 정치의 기본적인 책무”라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하고 정부를 신뢰하고 믿음을 줘야 한다”고 주장 했는데.

“청와대와 정부여당의 비판은 매우 부적절하고 어이없는 일이에요. 일단 그분들이 중국을 방문한 것 자체가 개인 자격으로 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우리 입장도 전하고 한 중 관계가 더 악화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의원외교 차원에서 막아보려고 작은 노력을 하겠다는 것뿐인데 그것을 정부에서 오히려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부풀려서 이것이 이적행위라도 되는 양 매도해요. 그러나 얼마 전까지 전략적 동반자라고 하던 중국이 갑자기 적성국가로 변한 것도 아닌데 매국노나 이적행위라고 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아요.

또, 국가 안보에 있어서는 여야 없이 초당적으로 협력하고 국론이 분열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70년대 유신정권식 사고고 헌법상으로도 국회에서 국가안보에 대한 주요사항을 동의받도록 돼 있는 것은 그것이 정부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들의 동의까지 받아야 한다는 걸 한 번에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태도죠.

대통령이 그렇게 국론이 분열되고 논란이 많을 걸 안타까워한다면 처음부터 야당과 국민께 공개하고 그동안을 상황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도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시키는 대로 들으라는 것은 독재시대의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거죠.”

- 정부여당이 일을 키운 것 같아요.

“맞아요, 사실은 언론에도 크게 홍보하지 않고 조용히 다녀오려고 했던 것인데 오히려 정부여당 측에서 이것을 크게 부풀려 놓고 책임을 야당에 전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굉장히 무책임한 태도고 또 대중 관계를 자기들이 나서서 악화하는 걸 막을 능력이나 상황이 안된다면 야당이라도 나서서 해보라고 얘기하는 것이 책임 있는 당국자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이게 지지층 결집을 노린 것이란 분석도 있어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무책임하다고 하는 거예요. 국제관계가 굉장히 미묘한 것이고 중국의 태도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국제관계는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힘으로 중국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쪽과 합리적인 대화로 잘 풀어나갈 생각을 해야 하는데 국내정치에서 얻어지는 작은 눈앞의 이익에 정신이 팔려서 국가 간의 관계를 두고두고 악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 성주도 방문하셨잖아요. 성주 분위기는 어떤가요?

“제가 성주에 가서 분위기를 보니 사실 그전에 보도를 보고 가기는 했지만,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곳에 좁은데 현수막이 2000개나 달려 있었는데 다 사드 배치 반대 내용이죠. 그리고 군민들은 한 달도 안되는 시간에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해 굉장히 많은 지식을 쌓으시고 높은 의식 수준을 보여주셨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확실히 이번에 오판 한 거죠. 시골에 사는 분들이라고 과거처럼 공중파 또는 보수언론에서 제대로 보도를 안 해주면 정보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저 나라에서 필요하다고 하면 순순히 따라올 것으로 과소평가했다가 그분들이 저렇게 싸움을 이끌어 나가시니 정부도 상당히 놀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 대표, 우상호 원내대표가 7월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전략적 모호성, 국제관계에서 쓰는 것…반사이익만 노리다 제2새누리 될라”

-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해 더민주는 전략적 모호성을 택하고 있어요. 이에 김 전 위원장께서는 “당당하게 정책과 노선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셨어요. 하지만 김종인 대표를 포함한 지도부는 수권정당이 되는 데 도움 안된다고 하는데.

“전략적 모호성이란 말을 이런 상황에서 쓴다는 자체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것은 국제관계에서 상황이 불분명할 때 일단 입장 표명을 유보하면서 상황을 지켜볼 때 쓰는 것이죠. 하지만 정당은 언제든지 주요 현안에 대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수권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투쟁을 하면 안 된다고 해요. 지난 총선의 좋은 성적은 저희가 잘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의 잘못 때문에 반사이익으로 얻어진 것이 많아요. 그런데 그것을 마치 저희가 잘해서 된 것으로 착각하고 부자 몸 사린다는 하는 식은 굉장히 어리석은 판단이죠. 오히려 조건부 지지를 보낸 유권자들에게 확실하게 국민을 위해 싸우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분들이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 김 대표는 의원들이 사드 문제로 성주 방문이나 광화문에서 단식하는 것을 두고 도로 민주당으로 돌아간다고 해요.

“글쎄요. 그분들이 말하는 소위 우클릭을 해서 새누리당과 비슷한 정당이 될 바에는 차라리 도로 민주당이 되는 게 낫죠. 제가 그분께 하고 싶은 말씀은 저희가 도로 민주당이 될 것을 걱정하는 것보다 그분이 도로 새누리당 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것이에요.”

- 사드 문제만 놓고 보면 더민주보다 국민의당이 적극적으로 반대를 표시해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고 이번에 지도부가 새로 선출되면 그 부분은 분명히 바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대다수 당원과 의원들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옳은 것이죠.”

- 더민주 지지자들이 원하는 건 선명성을 가진 강한 야당이에요. 더민주 의원들은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당이 바뀔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더민주를 보면 당 대표 바뀐다고 지지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 의문인데.

“이번에 전당대회에서 지금 나와 계신 후보들이 제가 보기에는 잘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동안 저희 당원들이 바라왔던 선명한 야당 그리고 선진화된 당 운영 또 일반 지지자들의 뜻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상향식 정당운영에 있어서 분명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또 그런 변화가 있어야만 저희가 정권 교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 어제(9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이정현 의원이 당 대표로 뽑혔는데.

“남의 당이라 제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동안 그분이 지나친 막말, 그리고 이번에 KBS 보도에 개입하는 방송법 위반 의혹까지 받고 있는데 그런 분이 대표로 뽑히고 최고 위원도 소위 친박이라는 사람들로 대부분 뽑힌 것으로 봐서 박근혜 대통령이나 새누리당 분들이 내년 대선을 위한 변화를 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끝까지 지든 이기든 자기들 식으로 가겠다는 고집을 내보인 게 아닌지 저는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고 결국 협치는 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 야권지지자들은 이정현 의원이 대표가 되어 정권 교체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해요.

“글쎄요. 그쪽 사정으로 보면 야권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저희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얼마나 변화하는 모습을 국민께 보여드려서 수권정당으로 인정 받느냐는 게 더 중요하지 대선에서 상대편이 못하는 것에 대한 반사이익만을 노려서는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 아버지인 김대중 대통령의 7주기가 다가오잖아요. 총체적 난국에 빠진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더욱 김 대통령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실 것 같아요.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께서 사실 평생 노력해서 지켜오신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가 위기에 처한 모습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다가 세상을 뜨셨는데 지금 상황이 더 나빠져 있어서 저도 답답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제가 정치에 뛰어든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돌아가신 어른 같이 우리를 이끌어 주실 수 있는 큰 어른이 지금 안 계신 게 아쉬워요.”

“DJ 정신은 대의 추구…눈앞 이익 연연해 분열하면 계승자 아냐”

- 김 대통령은 생전에 야권의 통합을 주장하셨잖아요. 그러나 지금은 야권이 분열되었어요.

“그분은 평생 사리사욕이나 사적인 감정을 뛰어넘어서 대의를 추구하는 정치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과거 70~80년대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분이 정치적 라이벌이고 그분을 도우면 나중에 적수를 돕는 게 되는 것으로 아셨지만, 독재정권과 싸워야 한다는 대의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분을 도왔습니다.

그런 것처럼 돌아가시기 전에 야권이 하나로 뭉쳐서 수구 보수 기득권 정권에 맞서서 정권교체를 하라고 유지를 남기고 가셨는데 눈앞의 작은 정치적 이익에 연연해서 야권을 분열시키려고 한다거나 정권교체라는 대의에 반하는 행동을 한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들은 김대중 정신을 계승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없겠죠.”

   
▲ 6일 오후 전남 목포시 산정동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광장에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추모의 밤 콘서트가 열린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와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이 테이프 컷팅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 김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대북관계 개선에 힘을 쏟으셨어요. 하지만 현재 남북관계는 파탄 났어요.

“그분이 평생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셨고 6‧15정상회담을 이뤄내셨죠. 그분이 주장하셨던 합리적인 대북정책을 일방적으로 북한을 도와준다고 보수세력은 공격했지만, 그분은 냉정한 현실주의자이고 합리주의자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합리적인 정책을 꾸준히 인내심 있게 계속 따랐다면 지금 결과가 달랐을 텐데 그동안 남북 간의 대화를 포기하고 반대의 길로만 간 결과가 지금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이 가속화되는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이라고 봐야겠죠.”

- 김 전 위원장께서 기억하시는 아버지로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떤 분이었나요?

“그분은 일반 가장처럼 집안일을 일일이 챙기시지는 못하셨지만, 저희 자식들에게 바른 삶을 살도록 좋은 교훈을 많이 주셨고 그분이 과거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언제 사형이 집행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가족들은 어느 누구도 그분이 군사정권과 타협해서 목숨을 살리고 저희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일이 되도록 바란 사람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 김 전 대통령과 기억에 남는 일 몇 가지 소개해 주세요.

“그분은 감옥에 두 번 가셨어요, 남들은 감옥에 가는 걸 인생 최악의 경험이라고 하는 데 그분은 그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왜냐면 밖에서는 바빠서 하지 못한 독서와 공부를 감옥에서 하셔서 실력을 키우는 좋은 기회로 삼으셨기 때문이죠.

76년 처음 감옥에 가셨을 때는 영어를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었는데 감옥 생활을 2년 하신 후에는 서울대 병원에 계셔서 면회를 가면 영어 참고서를 놓고 제 영어 실력을 테스트하실 만큼 영어 실력이 향상되어 나중에는 감옥에서 배운 영어로 미국에 가서 미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실 수 있을 정도까지 실력이 늘어나셨습니다.”

- 어느 때가 가장 그리우세요?

“그분이 살아계셨을 때 이루신 업적이 후세 정치인들에 의해서 훼손당하는 일이 생길 때 그분 생각이 자꾸 나게 되죠.”

- 마지막으로 <GO발뉴스>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GO발뉴스>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홍걸입니다. 저는 돌아가신 아버지 김대중 대통령님의 유지를 받들어 그분이 지키시려 했던 민주주의와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번에 정계에 나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뜻을 따라서 무엇이 되는 것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서 제가 어떤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는 정치가 바뀌고 우리나라에 정부가 바뀌어서 여러분들이 지금 답답해하시는 것들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데 힘이 될 수 있도록 내년 정권 교체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지금 정권교체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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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탐방? 이미지 정치 뒤로 숨어버린 ‘책임정치’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8월 7일 경남 함양군 지리산 함양시장을 방문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상인들과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8월 7일 경남 함양군 지리산 함양시장을 방문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상인들과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이미지를 정치에 도입한 최초의 임금이었음에도 고종은 특히 사진을 통해 표현되는 자신의 이미지에 관해 깊이 이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사진을 보면 고종이 복장과 배경에 신경써서 괜찮은 ‘그림’을 만들려고 했던 점이 엿보인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이후에도 카메라를 통해 황실의 힘과 권위를 나타내 보이려 했던 것은 바뀌지 않았다. 신문물이 한 발 앞서 들어온 일본이나 서구 열강의 군주들에 비하면 늦은 셈이지만, 함부로 어진을 볼 수 없게 해 왕조의 위엄을 세우려 했던 선대보다는 이미지의 정치를 잘 예측했던 셈이다.

현대에 이르면 정치인들은 늘상 카메라 앵글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민생을 탐방한다는 이유로 수염도 깎지 않고 수수한 차림새로 시장이나 노동현장 등 시민들의 생활공간에 들르는 행보는 으레 거쳐가는 필수 경로나 다름없게 됐다. 남는 것은 사진과 이미지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민생투어’라는 이름으로 진도 팽목항에서부터 전국의 민생현장을 돌아다닐 때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히말라야 도보여행을 다니는 모습이 SNS에 올라올 때, 두 정치인의 얼굴엔 깎지 않은 수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당직에서 물러나 ‘야인’ 또는 ‘자연인’으로 돌아간 이미지가 언론을 통해 유권자들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재래시장, 독도, 탄광 곳곳 SNS게재…“순식간에 만표 왔다갔다 한다”
김무성 전 대표가 민생투어를 시작하기 전 김 전 대표 의원실에서는 기자들에게 공지 문자메시지를 돌렸다. 민생투어의 일정이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고 시민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불필요한 혼잡이 있을 수 있으니 김 전 대표의 방문일정을 사전공지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김 전 대표가 돌아다닌 행적을 홍보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SNS 등을 통해 김 전 대표가 어디에서 무얼 했는지가 빠르게 공유됐다. 김 대표가 팽목항에서 수심 깊은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던 사진과 지리산 자락의 함양시장을 방문해 상인들과 손을 잡는 이미지는 유권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됐다.

 

7월 25일 독도를 방문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독도경비대장의 설명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연합뉴스

7월 25일 독도를 방문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독도경비대장의 설명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연합뉴스

 

 
문재인 전 대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염을 기른 상태로 부탄 총리를 접견하고, 네팔 현지음식을 손으로 먹는 모습이 SNS는 물론이고 이를 인용한 언론의 보도에 등장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이전의 수염은 사라졌지만 독도와 백령도를 방문하는 등 김 전 대표와 비슷한 민심 탐방 행보가 이어졌다. 10년 전인 2006년 민생대장정이라는 이름으로 역시 이미지 정치를 잘 활용했던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도 오랜 야인 생활을 끝내고 정계복귀를 타진하고 있다. 당시 탄광에서 수염난 얼굴에 땀과 검댕이로 뒤범벅이 됐던 손 전 대표의 이미지는 강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본격적인 대선국면을 앞두고 각 대선주자마다 전열을 꾸리고 행보를 넓혀가는 시점에서 ‘민생’이라는 키워드의 이미지 정치가 전초전 격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에서 정치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득표와 당선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단지 선거국면에서만이 아니라 당내활동이나 의정활동 중에도, 당직이나 공직에서 물러나 정해진 소속이 없는 시기에도 이미지가 끊임없이 생산돼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의원들 중에는 ‘무플보다는 악플’이란 말처럼 욕 먹는 기사라도 올라오는 걸 더 좋아한다는 쪽도 많은데, 지역구에서만이라도 어디든 가서 사진 한 장 남기는 식으로 눈도장 찍고 (기사에) 한 줄이라도 더 나오려 한다”고 말했다.

지역구의 표에 신경써야 하는 국회의원을 넘어 전국 단위의 표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대선주자의 입장에서는 선거까지 남은 일정에 맞춰 그때그때 정치 상황에 맞는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은 정치인과 주변 참모들을 고심케 하는 과제다. 목소리와 발음, 패션과 옷의 색깔, 신체언어 등 조금이나마 유권자의 호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요소들까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 야권 후보의 여론동향을 분석하는 일을 맡았던 한 당직자는 “토론이나 연설하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나갈 때마다 트위터나 각종 사이트, 뉴스 댓글까지 훑어보며 어느 시점에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를 일일이 분석했다”며 “상대 후보에게서 보이는 반응까지 고려해 계속 새로운 이미지를 덧입히는 일이 잘 되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몇 만표가 왔다갔다 할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검증할 정보 없는 중고차 시장과 같아
내년의 대선에 대비해 수면 아래서 시기를 재고 있는 ‘잠룡’들이 등장할 타이밍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어떤 이미지로 인상을 남기느냐의 문제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민생’을 앞세운 대선주자들이 여러 현장을 방문하는 소식이 나올 때마다 그들의 ‘쇼맨십’ 또는 ‘퍼포먼스’에 거부감을 느끼는 시민들의 반응이 나오는 것도 흔한 공식이 됐다. 보여주기식, 수박 겉핥기식으로 유권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 손을 잡지만 진지한 고민과 대안 모색은 부족하다는 것이 비판의 배경이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대선주자 같은 유력 정치인들이 잘 다듬어서 보여주는 이미지에 비해 그에 걸맞은 콘텐츠가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시민들이 반복되는 구도의 이미지 대신 현실적인 내용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주자들만큼이나 이미지 정치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이는 역시 대통령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한 한 전통시장에서 방앗간 상인과 대화하며 “국산 고춧가루가 귀하다”고 한 발언도 논란을 불렀다. ‘세상 물정에 밝지 않은’ 이미지를 지닌 대통령인지라 일각에서 “고춧가루 값이 얼마인지도 잘 모르느냐”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그간 역대 대통령들의 여름휴가 동안 책을 읽으며 정국을 구상했다고 했던 것처럼 박 대통령도 휴가를 책과 보고서를 읽으며 보냈다고 SNS에 올렸다. 책을 읽고 정책을 고민하는 것이 그나마 정치인의 이미지에 맞는 콘텐츠를 갖추는 방법이라는 인식이 폭넓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휴가 때 읽은 책들을 바탕으로 향후 정책 수립에 참고하는 것처럼 빈약한 정치적 이미지가 자리잡고 있는 현 정치권에서는 이미지 정치에 걸맞은 콘텐츠 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00일 민심 대장정’길에 오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28일 오후 강원도 삼척시 경동주식회사의 황조본갱에서 근로직 직원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100일 민심 대장정’길에 오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28일 오후 강원도 삼척시 경동주식회사의 황조본갱에서 근로직 직원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내용 없이 꾸며진 이미지만 넘쳐나는 정치의 문제는 하루이틀 된 사안이 아니지만 현대 정치에서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 자체는 꼭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실상 이미지와 정책을 칼로 자른 듯이 구분하는 것도 어려운 데다, 정책적 함의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이미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득세하고 있는 유력 정치인의 이미지를 통해 사회상을 읽고 시민들이 어떤 정치적 욕구를 품고 있는지를 읽어낼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안병진 교수는 “정치인의 이미지는 사회의 욕망이 투영된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이기도 하다”며 “이미지를 뒷받침할 내용이 없는 정치인들은 쉽게 한계에 봉착할 것이기 때문에 언론이나 유권자가 그들을 검증하면서 대선주자들 간의 차별성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유권자들의 치밀한 검증은 이미지 정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방법인 동시에 보다 적합한 정치인을 선택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지 정치가 만연한 정치판일수록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의 정책 지향과 실현 능력에 관한 정보를 얻기 힘들다는 데 있다. 투표권이 있는 유권자를 소비자로, 각각의 정치인들을 생산·판매자로 비유하면 정치 역시 시장과 비슷한 거래가 오고가는 영역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실제 팔리는 것이 정치인의 이미지인지 정책과 능력인지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정치 소비자로서의 유권자들에겐 정치인들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정보 외에는 판단에 도움이 되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래 당사자 간의 정보가 비대칭인 시장의 대표적인 예가 중고차 시장이다. 과거 대형 사고가 난 적이 있는지, 부품들이 작동하는 데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판매자가 알리지 않으면 쉽게 알 수 없는 정보를 바탕으로 소비자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이렇게 정보 비대칭 상태가 쉽게 개선되지 않는 ‘레몬 시장’에서는 실제로 구입해 보고 나서야 진짜 품질을 알 수 있는 재화가 거래된다. 유권자들은 투표 후 당선자를 뽑고 난 뒤에야 당선자가 직책에 맞는 정치인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면 결국 해당 시장에는 저질의 불량품만이 나돌아다니게 된다.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는 보다 나은 상품을 파는 판매자가 품질로 차별성을 알릴 방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치라는 시장이 레몬 시장이면서 독과점 시장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대체재가 있는 중고차 시장과는 달리 정치에는 대체할 시장이 없다. 한국 정치가 맘에 안 든다고 미국 가서 투표할 수도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현재 정치권에서 힘을 얻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소수의 대선주자군 외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새로운 대안 후보를 세우고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할 현실적 가능성은 매우 낮다. 저마다 다른 시민들의 정치적 견해와 입장을 민주적으로 반영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각 정당들이 밝히고 있는 정견과 강령에 따라 민의를 모아야 하지만 국내 정치상황은 정당구조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소수의 정치인을 중심으로 이미지 정치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정치를 오케스트라에 비유했다. 유권자들이 관객의 역할이라면 각 정당이 여러 악기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이며 그 정당의 대표주자가 지휘자로,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정당 내부의 다양한 파트들이 불협화음을 피하고 조화로운 연주를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그 정당의 흥행과 성패를 좌우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현재의 특정 정치인 위주의 이미지 정치는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인 정당을 바라보며 연주를 지휘하지 않고 돌아서서 관객을 똑바로 마주보고 정치하는 꼴이라는 것이 박 대표의 설명이다. 당연히 연주는 엉망이 되고 지휘자는 신뢰를 받지 못하며 관객들은 불만이 높아진다. 하지만 지휘자와 관객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불만이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오케스트라도 서너 개 있지만 사정은 똑같다. 오케스트라를 고를 선택권은 있지만 불협화음이 내는 불쾌한 연주를 피할 도리는 없는 셈이다.
 

 

시민들 ‘쇼맨십’에 거부감 보이기도

 

 

나아가 소수의 대표 정치인에 좌우되는 이미지 정치는 사실상 민주주의라기보다 귀족정치에 가깝다는 사실은 근본적인 문제에 해당한다. 소수의 귀족적 정치인들에게는 자신의 정치력을 보증해주는 대상으로서 표를 바치는 유권자들만 필요할 뿐 유권자들에게서 선택을 받은 뒤에 져야 할 책임은 극히 미미한 것이다. 박 대표는 “내년 대선을 대비하는 국면이 점차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렇게 정치적 특권만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는 소수의 정치인들 위주로 대선을 치르면 누가 당선되더라도 그 이후 지금의 문제가 반복되거나 더 큰 문제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 황제가 프러시아식 정장을 하고 찍은 사진.

대한제국 시기 고종 황제가 프러시아식 정장을 하고 찍은 사진.

결국 이미지 정치의 반대말인 정책 정치나 어젠다 정치가 자리잡으려면 우선 각 정당들이 보다 정치적 구조를 굳건히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와 같은 지적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각 당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제일 힘 있는 한 사람 지시가 그대로 당 전체에 퍼지는 오더 정치를 완전히 막진 못하더라도 어느 자리에 누가 앉느냐와는 상관 없이 당이 본연의 틀 정도는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전대만 했다하면 휘청휘청하는 모습은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더민주의 한 당직자도 소속 당을 향해 “당론이 정해지기 어려운 민감한 사안이면 토론이라도 화끈하게 벌어져야 하는데 서로 눈치만 보며 조용히 있는 당에서 어떤 활력이 나오겠느냐”며 쓴소리를 냈다.

고종이 선대 임금들과는 달리 자신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유포한 데에는 본인의 의지도 작용했지만 일본을 비롯한 각국 열강의 압박이 더 큰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러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한 일본의 요구로 일본 덴노의 이미지를 유포하던 방식과 비슷하게 고종의 이미지가 민간에 퍼져나간 것이다. 고종의 초상을 통해 근대 초기의 시각문화를 분석한 <이미지와 권력>의 저자인 권행가 덕성여대 연구교수는 저서에서 “조선의 강제병합 이후 조선의 황제는 일본의 천황 사진 아래, 훨씬 작은 크기와 장식으로 배치되었다”며 “고종은 이미지 재현의 주체가 되려 했으나 일본에 의해 선전용 이미지로 전락했다”고 분석했다. 식민지로 넘어갈 위기의 국내 상황을 자신의 권위적 이미지로 가리려 한 고종의 행보는 결국 망국이란 결과를 낳았다. 정치인의 이미지에 가려 시민들의 여론은 반영되지 않는 현대 한국의 정치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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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저 많은 아들딸들의 울타리가 되어 준거야"

유가협 창립 30주년 기념식 및 출판기념회 진행
이창훈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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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13  15: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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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협) 창립 30주년 기념식 및 『너의 사랑 나의 투쟁』 출판 기념회가 12일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렸다.[사진 - 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생겨선 안 되는 모임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들이었다
빨리 없어져야 할 슬픔의 집
더 이상 회원이 늘면 안 되는 단체였다"
- 송경동, ‘가는 길 험난하여도-유가협 30주년을 기억하며’ 중에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 창립 30주년 기념식 및 『너의 사랑 나의 투쟁』 출판 기념회가 12일 오후 5시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장남수 회장을 비롯하여 유가협 회원 50여명과 유가협 후원회장인 청화 스님을 비롯하여 축하객 300여명이 참석했다.

유가협 초대 사무국장이었던 박래군 인권중심사람 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춤패 마구잽이의 여는 공연에 이어 청화 스님의 여는 말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이해동 목사의 축사 그리고 송경동 시인의 축시와 노래패 우리나라의 축하공연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이어 유가협 30년의 세월을 기록한 『너의 사랑 나의 투쟁』 출판 기념회식이 진행되었다.

   
▲ 유가협 후원회장 청화 스님이 여는 말씀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 건강이 좋지 않은 가운데 어렵사리 행사에 참석한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 씨(89세). [사진 - 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청화 스님은 여는 말씀을 통해 최근 무더운 날씨로 나이 많은 유가협 회원들의 건강이 걱정된다며 “더운 여름은 가고 만다. 아무도 붙잡지 않기 때문이다. 슬픔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고이는 물이다. 그 물이 30년간 고였다. 아무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 고인 물이 유가협 회원들의 마음이다. 오늘 기념식을 통해 그 물의 깊이를 헤아리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축사에 나선 백기완 소장은 오늘 행사가 30년의 노고를 헤아리는 시간으로만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한숨만 짓고 있을 것이 아니라 유가협이 앞장서서 (최근 설치고 있는) 유신독재잔당 끝장내는 만인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박근혜 재집권음모를 끝장내고 정치꾼들 기회주의자들을 몽땅 쓸어버리는 일에 유가협이 앞장서야한다”고 말했다.

두 번째 축사를 한 이해동 목사는 “세상에는 올곧은 삶과 그릇된 삶이 있으며, 이러한 삶을 가르는 기준은 민족과 민주이다”라고 말한 뒤, “일제강점기 때는 그 기준이 민족이어서 죽음으로서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던 올곧은 삶이 있었으며, 지금은 민족과 민주가 기준이 되어서 죽음으로써 그 올곧은 삶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올곧은 삶을 살아간 사람들을 자식으로 둔 분들이 바로 유가협 회원들이다. 또한 유가협 회원들은 숭고한 죽음을 선택한 자식들을 가슴에 묻었다.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것은 죽은 자식들의 삶을 계속 이어간다는 뜻이다. 우리의 역사는 이런 숭고한 죽음과 그 삶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있어 올곧은 역사가 되어 왔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 연대사를 하는 백도라지 씨, 홍영미 씨, 국석호 씨.(왼쪽부터) [사진 - 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이어 진행된 연대사에서는 백남기 농민의 딸 백도라지 씨와 고 한광호 열사의 이복형 국석호씨 그리고 세월호참사로 유명을 달리한 이재욱 학생의 어머니 홍영미 씨가 나와 최근 투쟁상황을 전하며 힘들 때 마다 유가협 회원들의 찾아와 주어 많은 힘이 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연대사를 전해 주었다.

특히 홍영미 씨의 발언 중 “유가협은 30년 동안 싸워왔지만 저희는 이제 3년밖에 되지 않았다. 앞으로 30년은 더 열심히 싸울 것이다”고 말하였으며, 이어 백도라지 씨의 발언 중에 홍영미 씨의 앞선 발언을 언급하며 “저는 이제 9개월 밖에 안됐고, 나이도 젊어서 50년은 충분히 싸울 수 있을 것이다”라며 서로 눈물로 격려하는 장면이 연출되자 참석한 축하객들의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 두 작가로 부터 책을 헌정 받는 유가협 장남수회장과 정정원 부회장. [사진 - 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 유가협 30년의 기록 '너의 사랑 나의 투쟁'. [사진 - 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축시낭송과 축하공연이 이어진 후 진행된 출판기념식에서는 저자인 송기역 씨와 정윤영 씨가 나와 3년간의 기록과정을 설명하면서 송기역 씨는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회장이었던 배은심 여사가 ‘이것이 우리의 눈물이라네’라며 자료를 넘겨주던 사연을 소개하면서 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어머니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 드리는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또 정윤영 씨는 “항상 거리의 투사로만 알고 있다가 자료를 정리하면서 수면제를 복용하셔야만 잠에 들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이어 진행 순서에 따라 두 작가로부터 책을 헌정받은 장남수 회장은 돈 한푼 받지 않고 어려운 작업을 해준 두 작가와 책을 발행한 도서출판 ‘썰물과 밀물’ 김범종 사장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우리 회원들은 내형제 내 자식들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정보기관의 감시와 이웃들에게 배척당할 때 오갈 곳이 없어 방황하다가 한자리에 모였다. 아마도 유가협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30년 동안 (우리를) 격려해주신 원로 어르신들과 같이 투쟁해온 동지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 발언하는 장남수 회장. [사진 - 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 행사 대미를 장식한 참석자 전체 기념촬영. [사진 - 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행사 끝머리에는 유가협 후원회 김지혜 씨가 나와 어머님 아버님들에게 드리는 편지글 낭독과 다큐창작소에서 유가협 창립 30주년을 맞아 제작한 영상 ‘기억해요’ 상영, 노래하는 노동자 박준 씨의 축하공연이 진행되었다.

모든 식순을 마치고 먼저 유가협 회원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개별소개와 기념촬영을 하였으며, 이어 축하객들도 무대로 올라와 기념촬영을 한 뒤 두 시간이 넘게 진행된 행사가 마무리 되었다.

.........
그래도 내 자식 잃고
남의 자식 살리려고 뛰어다닌 세월동안
우리한테 너무도 많은 자식들이 생겨버렸지
다 내 자식 가족이 되었어
우리가 저 많은 아들딸들의 울타리가 되어 준거야
.........
- 유가협 창립 30주년 영상 ‘기억해요’ 나래이션 중에서


<영상> 다큐창작소 제작 ‘기억해요 (유가협 30주년을 기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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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지금은 쫓겨 가지만" 유품정리 마지막 날, 슬픈 단체사진

 

[현장] 단원고 2학년 교무실 교사 유품도 정리... "정권교체 해서라도 진상규명 할 것"

16.08.13 20:36l최종 업데이트 16.08.13 20:52l

 

416기억교실의 유품 정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기억교실(10개 교실, 1개 교무실)은 희생 학생들의 부모와 뭇 시민들이 새로운 교육의 지표로 기리고자 했던 '교육과 추모의 현장'이었다. 이들은 무엇보다 먼저 떠난 아이들의 후배들만큼은 안전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안전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기억교실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기억과 약속의 길' 순례에 나섰던 시민들의 염원은 물거품이 됐다. 또한 교사 두 명과 네 명의 아이들은 아직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유가족들은 이들이 수습될 때까지 만이라도 기억교실 이전을 미뤄달라고 요청을 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 246명이 생전에 선생님과 꿈을 나누며 키워가던 교실은 이제 더이상 그들의 공간이 아니다.

기억교실 유품 정리 마지막 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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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후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7반 교실에서 416가족협의회 전명선 운영위원장과 정성욱 인양분과장이 416기억교실 이전을 앞두고 아들 고 전찬호군과 고 정동수군의 유품과 추모물품을 보존상자에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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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후 단원고 2학년 3반 교실에서 ‘예은 엄마’ 박은희씨와 할머니가 딸 고 유예은양의 유품과 추모물품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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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예은이를 못 본 지 844일째. 이제 너와 친구들이 공부하고 뛰어 놀고 웃고 또 웃으며 꿈을 키워나가던 이곳, 이 자리 비워줘야만 하는구나. 미안해, 예은아. 정말 미안해." -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
"오늘 찬호 의자에서 엄마 아빠가 마지막으로 함께 하는구나. 엄마아빠가 찬호와 친구들에게 미안해. 찬호의 자리와 학교와 교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앞으로 진정한 안전교육의 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약속을 반드시 지킬게. 사랑한다, 찬호. 우리 집 막내. 귀염둥이…" - 전명선 416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 

희생 학생들의 유품 정리 마지막 날인 13일. 2학년 3반, 4반, 5반, 7반, 10반과 교무실 유품을 정리하는 날이다. 이날 오후 2학년 7반 교실에 416가족협의회 전명선 운영위원장과 정성욱 인양분과장이 나란히 들어섰다. 


두 아빠는 약속이나 한 듯 1분단 맨 마지막 줄 짝꿍인 동수와 찬호 의자에 앉아 시민들이 방명록에 남긴 글을 읽었다. 두 아이의 책상 위에는 친구들과 찍은 사진과 방명록, '꽃미남 사랑해'라고 만든 폼아트 이름표, 세월호 리본과 팔찌, 양초, 국화 등이 놓여 있었다. 

전 위원장은 아들 찬호에게 보내는 마지막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 분과장은 충혈된 눈을 붉히며 자리를 피했다. 동수와 찬호 그리고 2분단 맨 뒤 이준우는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단원고까지 한 반에서 생활한 단짝 불알친구였다. 

한 명 두 명 교실에 들어선 엄마들은 자녀의 책상 앞에 다가서자 털썩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들은 자식들의 사진을 어루만지거나, 방명록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을 글을 남겼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참여한 가운데 2학년 7반 교실은 2년 전 그날처럼 또다시 오열로 가득 찼다. 

'영석 아빠' 오병환씨는 "2학년 7반 부모님들이 마지막으로 다 모여 아이들 교실에 앉아 보기 위해 모두에게 연락을 드렸다"며 "결국 우리는 쫓겨 가는 것이지만 교실을 이전한 후 다시 싸울 것이니 너무 억울해 하지 말자"며 다독였다. 

오씨는 "우리는 죽을 때까지 2학년 7반이다"라며 "유품 정리 후 아이들이 수학여행 가기 전 단체사진을 찍은 벚꽃나무 아래에서 우리도 단체사진을 찍어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엄마 아빠들은 작렬하는 8월의 태양 아래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단체사진을 찍었다. 

같은 시간 2학년 3반에서는 '예은 엄마' 박은희씨와 할머니가 예은이 유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유경근 위원장의 쌍둥이 딸인 예은이가 짧은 고교 시절을 보냈던 책상 위에는 사진과 인형, 십자가와 국화꽃, 볼펜과 과자 등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예은이의 유품을 보존상자에 하나씩 옮겨 놓으며 "예은아, 미안해. 할머니가 미안해"라는 말을 끝없이 되뇌며 눈물을 쏟았다. 박은희씨는 텅 빈 책상에 앉아 속울음을 삼키느라 쉼 없이 어깨가 흔들렸다. 

정성욱 인양분과장은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 하는 학교에 왜 다녔을까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울 뿐"이라며 "힘없어서 구해주지도 못했고, 힘없어서 쫓겨나고… 언젠가 만났을 때 아이들에게 엄마아빠들이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수밖에…"라고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현 정권에서 진상규명 못하면 대선에서 정권교체 통해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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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6가족협의회 전명선 운영위원장과 정성욱 인양분과장이 416기억교실 이전을 앞두고 아들 고 전찬호군과 고 정동수군의 책상에 앉아 방명록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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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영원한 2학년 7반” 단원고 2학년 7반 엄마아빠들이 유품을 정리한 후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아이들이 단체사진을 찍은 벚꽃나무 아래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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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선 위원장은 "참사 이후에 참교육과 안전교육, 학교의 학습관 등 모든 게 바뀌어야 한다고 모두가 얘기했음에도 기억교실을 정리해야 한다는 게 여전히 납득이 되질 않는다"며 "교실 이전이 끝이 아니라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가족협의회와 교육청, 지자체 등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안전교육의 장을 만들어 참교육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위원장은 "안산교육청과 단원고, 재학생 학부모 등은 기억교실을 영구히 보존하지 못하고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을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며 "기억교실의 이전을 요구한 이들은 말로만 안전교육을 되풀이 할 뿐 진정한 교육의 길과는 거리가 먼 자신들을 언젠가 발견하고 역사 앞에서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 위원장은 12일 여야 3당 원내대표의 세월호 현안 관련 합의와 관련 "국회의장이 합의에 참석해 사인한 것은 없다. 또 세월호 특조위 활동기간과 특별법 개정과 특검은 언급이 안됐다"며 "무엇을 협의한다는 주어조차 명시 안 된 합의에 대해 국민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받아들이겠냐"고 반문했다. 

이와 관련 416안산시민연대는 13일 오후 성명서를 통해 "여야 간에 다시 모여 추가 합의를 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며 "합의 내용은 '특조위의 실질적인 조사활동 1년 6개월 보장, 인양 후 6개월간의 정밀 선체조사 보장, 조사활동에 필수적인 인력과 예산 지원' 등이며, 또한 8월 임시국회에서 세월호 특별법을 즉각 개정하는 것"이라고 촉구했다. 

전 위원장은 "사학연금공단이 대관료까지 미리 받고 청문회 계약을 취소한 것도 정부의 입김 때문일 것"이라며 "특조위 위원들이 조사관과 함께 준비하는 마당에 세월호 청문회는 반드시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역사를 역행하며 왕조처럼 군림하는 정권이지만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라며 "현 정권에서 설사 진상규명이 안 되더라도 다음 대선이나 정권교체를 통해 반드시 진상규명을 할 수 있도록 엄마아빠들이 절대 흩어지지 않고 힘을 다시 모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416가족협의회와 자원봉사자들은 오는 15~18일 책상·의자·교탁 등을 포장한 후 19일 추모행사인 '기억과 약속의 밤'을 진행한다. 이어 20~21일에는 유품, 기록물, 책상 등을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으로 임시 이전한다.

희생 학생들과 교사들의 유품은 2018년 9월 영구 추모관인 '(가칭)416안전교육시설'이 준공되면 그곳으로 옮겨진다. 추모관은 단원고 교정 옆 도로부지에 건립될 예정이다.

2학년 교무실 유품 정리 "다시는 이런 참사 일어나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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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에서 세월호 참사로 희생당한 교사들의 교무실 이전을 앞두고 2학년 교무실 앞에 유품을 정리할 보존상자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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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단원고에서 세월호 참사로 희생당한 교사들의 교무실 이전을 앞두고 고 전수영 교사의 어머니 최숙란씨와 아버지 전제구씨가 유품과 추모물품 등을 보존상자에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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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전에는 제자들을 지키다 함께 희생된 단원고 2학년 교무실 유품 정리도 시작됐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교사는 모두 10명이다. 이 중 고창석, 양승진 교사는 아직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교무실 입구에는 교사들의 유품을 정리할 보존상자가 놓였다. 교무실 게시판에는 '4월중 행사'가 또렷이 적혀있고 그 아래에 매직으로 쓴 '4월 15일~18일 수학여행'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오전 9시 30분께 시작된 유품 정리는 교사들의 부모와 형제가 직접 했다. 김종천 416기억저장소 사무국장은 "책같이 무게가 있는 유품은 별도로 정리할 테니 가벼운 유품을 중심으로 보존상자에 정리해 달라"고 당부했다. 

2학년 2반 담임을 맡았던 고 전수영 교사의 어머니 최숙란씨와 아버지 전제구씨는 딸의 유품을 하나씩 챙겼다. 책상 위에 있던 수능기출문제집 등 참고서는 상자에서 꺼내 다시 책꽂이에 꽂았다. 상자 안에는 추모 메시지, 방명록, 서류 뭉치, 조화, 이름표, 수첩, 필기류, 솔방울 등이 가지런히 정리됐다. 그리고 어머니는 생전의 딸이 사용했던 작은 칠판을 닦고 또 닦았다. 

전 교사는 2013년 임용고시에 합격해 단원고 교사로 재직했다. 세월호 참사를 접한 어머니가 전화를 걸었을 때 "학생들과 통화를 위해 배터리를 아껴야 한다"며 끊은 것이 딸과의 마지막 통화였다. 이윽고 어머니에게 "아이들 구명조끼 입혔어. 미안해"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34일 만에 어머니 품으로 돌아온 전 교사는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채였다.

최숙란씨는 지난 4월 딸의 이야기를 담은 <4월이구나, 수영아>를 출간했다. 이 책은 세월호 희생교사 유가족의 심정을 담은 첫 책이다. 또한 엄마의 이름으로 겪은 그날 그 아침과 아이들, 수영이를 잊지 않기 위한 기록이다. 그리고 아직 모든 곳에 존재하는 딸, '수영이'에 관한 이야기다. 

최씨는 "이 책(<4월이구나, 수영아>)을 낸 것도 딸을 기억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쓴 거예요. 혹시나 먼 훗날 딸과의 추억을 잊어버릴까 봐"라며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그 곁에서 아버지는 교무실 복도만 하염없이 내려다봤다. 

"어제 꿈에 딸이 나타났어요. 간식을 만들어 딸에게 먹여주는 꿈…(울음) 수영이와 함께 했던 시간이 너무 그리워 견디기 힘들어요. 가슴이 답답한 게 터질 것 같았는데 그걸 억누르고 오늘 딸을 다시 찾았어요. 천사 같은 내 딸의 마지막 흔적이 남은 이곳을…

아이들 교실과 교무실 이전을 앞두고 있는데, 틈나는 대로 수영이 자리나 교실을 보고 갔어요. 마지막 정리를 하니까 너무 슬퍼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요.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배려하고 아껴주는 안전한 사회가 되었으면 해요."

"아이들과 마지막 함께 한 선생님들 마음 되새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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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단원고에서 세월호 참사로 희생당한 교사들의 교무실 이전을 앞두고 고 남윤철 교사의 어머니 송경옥씨와 아버지 남수현 충청대 교수가 유품과 추모물품을 정리한 후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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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로 제자들과 함께 희생당한 단원고 2학년 교사들의 교무실 이전을 앞두고 유품을 정리한 보존상자가 책상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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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유품을 정리한 고 남윤철 단원고 교사(2학년 6반 담임)의 아버지 남수현 충청대 교수와 어머니 송경옥씨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교무실을 떠날 아들에게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남 교수는 "마지막으로 아들 유품을 정리하는데 무슨 말이 또 있겠냐"며 "아직 돌아오지 못한 선생님이 계시다"며 짧게 말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교사'들도 교무실을 찾았다. 이들 교사들은 '찾아가는 전국 진실마중대'라는 모임을 만들어 지난 8일 목포에서부터 전국을 순회하며 세월호 특별법 개정 서명운동을 진행하다 12일 안산에 도착했다. 

정태연 교사(안양공고)는 "보통 돌아가시면 좋은 데 가시라고 하는데, 지금은 실상 쫓겨나는 거다. 선배, 동료 교사를 지키지 못한 것 같아 착잡한데, 제일 안타까운 건 (기억교실 보존과 관련해) 재학생들에게 물어보지 않은 것"이라며 "단원고 선생님들이 부모 같은 마음이었기에 두려웠지만 끝까지 아이들과 함께 했다. 그 마음을 항상 되새기며 아이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선생님들을 만나 뵙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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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출구전략’을 알아보자

 
사드 배치로 한반도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 이은 제3의 전선이 되었다. 미·중 간에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터지는 화약고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의 국익에 부합하는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남문희 기자  |  bulgot@sisain.co.kr
 

 

 

사드 특집


사드 ‘출구전략’을 알아보자

전문가들이 내놓은 ‘사드 위기’ 5단계 해법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할 대안은?

성주 선비가 20년 만에 서울에 온 까닭

 

 

 

한·미 양국의 사드 배치 선언 이후 분명해진 점이 있다. ‘주장’과 ‘팩트(사실)’ 사이의 괴리다. 사드가 북한의 핵·미사일 방어용이라는 박근혜 대통령과 한민구 국방부 장관의 ‘주장’과, 경북 성주에 배치되는 사드로는 수도권은 물론 중부권의 핵심 군사기지조차 방어할 수 없다는 ‘사실’ 사이에 괴리가 있다. 또한 한반도에 배치될 사드가 여전히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와 무관하다는 우리 군 수뇌부의 ‘주장’과 미국 의회 회계감사원 자료 등을 통해 미국 MD의 핵심이라 할 ‘핵심지휘통제체제(C2BMC)’의 중앙컴퓨터와 연동된 최전선 국가의 레이더라는 ‘사실’ 사이에도 괴리가 있다. ‘성주에 배치될 사드가 미국 MD가 아니라면, 이는 마치 통신사에 가입되지 않은 최신형 스마트폰이라는 뜻이다’라는 연세대 최종건 교수의 지적(<한겨레> 7월27일자)처럼, 성주에 배치될 사드를 미국 MD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한국 정부가 유일하다.

사드 배치는 한국을 넘어 동북아 정세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최근 미국이 사드 한국 배치를 서두른 이유에 대해 미·중 간 남중국해 대결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려는 분석이 제기됐다. 곤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 현대> 특별편집위원은 <월간중앙> 8월호에 장문의 글을 기고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해 9월 미·중 정상회담 이후 친중국 노선을 접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이 남중국해 인공섬 매립을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했다. 미국은 제1열도선(‘열도선’이란 중국의 대미 군사방어선으로, 제1열도선은 일본 오키나와에서 타이완-필리핀을 잇는 가상의 선을 말한다. 중국식 용어로는 도련선) 방어를 위해 한국을 반중국 전선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사드 배치를 서둘렀다고 곤도 다이스케 위원은 분석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EPA</font></div>2015년 10월27일 미국 해군 구축함인 라센함(위 사진 앞쪽 배)이 남중국해를 항해하는 가운데 중국이 자국 군함을 보내 미국 군함을 뒤쫓는 위기 상황이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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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27일 미국 해군 구축함인 라센함(위 사진 앞쪽 배)이 남중국해를 항해하는 가운데 중국이 자국 군함을 보내 미국 군함을 뒤쫓는 위기 상황이 조성됐다.


이보다 더 깊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남중국해를 성역화하고 반접근·지역거부(A2AD) 전략의 주력 무기인 중거리미사일의 정확도를 높이려 한다. 미국의 공해전(AirSea Battle) 전략을 무력화하기 위해서다. 실제 중국은 중거리미사일의 정밀도를 오차범위 2~3m 이내까지 끌어올림으로써 미국 공해전 전략의 핵심인 MD를 이미 무력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또 난사 군도와 시사 군도 그리고 필리핀 앞바다에 있는 스카보로초 군도를 잇는 삼각편대(아래 지도 참조)가 완성되면 중국에 의한 남중국해 공역의 성역화가 이뤄진다. 그리고 중국이 매립 중인 파이어리크로스 등의 난사 군도 인공섬은 남중국해의 진입 수로를 장악하는 위치에 있다. 인공섬 매립이 완성되면 미·일 군함의 접근이 어려워진다. 공역과 영해의 성역화가 이뤄지면 하이난 섬 잠수함 기지가 미국의 감시망에서 벗어난다. 미국 본토 타격용 SLBM(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쥐랑-2를 탑재한 중국의 전략핵잠수함이 자유롭게 서태평양을 거쳐 미국 본토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시사IN> 제422호 ‘제2의 닉슨 독트린 몰려온다’ 기사 참조).

사드 배치로 ‘반중국 네트워크’에 가입한 한국

이에 미국은 중국 인공섬 12해리(약 22.2㎞) 이내 해역으로 항해하는 ‘항해의 자유’ 전략을 통해 중국의 남중국해 성역화를 막고 있다. 또 군사기술 첨단화를 통한 제3차 상쇄전략(Third Offset Strategy)으로 대응한다. ‘제3차 상쇄전략’은 1차 상쇄(전략 핵무기), 2차 상쇄(위성 위치확인 시스템 활용)에 이은 것으로 드론 등 스스로 학습하는 머신러닝 개념을 적용한 군사무기 활용을 말한다. 지난 2014년 미국 전략문제연구소(CSIS)는 미국이 글로벌 파워로서 지위를 유지하려면 아시아·태평양은 이제 동맹국에 맡기고 미국은 중·러를 대상으로 한 글로벌 전략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척 헤이글이 국방장관이던 시절 시작해 애시턴 카터 현 장관이 구체화하고 있는 ‘제3차 상쇄전략’이다. 첨단 군사기술을 통해 중국·러시아 등 경쟁국을 따돌리겠다는 구상이다. 냉전 시대 전략핵무기 등을 증강했던 두 차례 상쇄전략에 이은 세 번째 업그레이드 버전인 셈이다. 중국의 반접근·지역거부(A2AD) 전략을 무력화하기 위해 미국은 3차 상쇄전략의 일환으로 최첨단 무기들을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무인비행기(드론)나 무인잠수함 그리고 음속의 7배라는 레일건을 탑재한 구축함을 남중국해에 투입하는 방안도 그 연장선상에서 거론되고 있다.

  중국의 대미 군사방어선 가운데 하나인 ‘제1열도선’(오른쪽) 방어를 위해 미국이 한국 사드 배치를 서둘렀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의 대미 군사방어선 가운데 하나인 ‘제1열도선’(오른쪽) 방어를 위해 미국이 한국 사드 배치를 서둘렀다는 분석이 나온다.


제3차 상쇄전략은 국방비를 군사기술 혁신에 집중 투자하겠다는 의도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 있는 제1열도선 방위는 제1열도선상 국가들이 ‘반중국 네트워크’를 결성해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언론인 곤도 다이스케의 분석은 바로 한국이 사드 배치를 통해 제1열도선의 반중국 전선 국가로 급속히 빨려들어 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제1열도선을 ‘캄차카 반도-일본 열도-한국-타이완-필리핀-대(大)순다 열도를 잇는 남북 라인’이라고 규정했다. 즉, 한국을 포함했다. 국제정치학계에서 여러 주장이 있지만 제1열도선은 대체로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1950년 1월 주장한 애치슨 라인과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2011년 1월 일본 <교도 통신>이 보도한 용어 해설에서도 ‘제1열도선은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알류샨 열도-일본-필리핀을 잇는 라인을 ‘서방 측 방위선’이라고 연설에서 밝힌 것이 기원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동안 제1열도선을 설명할 때 일본을 기점으로 오키나와-타이완-필리핀을 잇는 방어선으로 봤지 한국을 기점으로 보지는 않았다. 물론 한국의 이어도가 제1열도선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제1열도선 국가인 것은 아니다. 이게 바로 국제정치의 상식이다.

사드의 X밴드 레이더를 한국에 배치하는 것은 미국 공해전의 관점에서 보자면 MD 강화다. 또 ‘상대보다 멀리서 먼저 보고 때린다’는 상쇄전략 교리와도 연결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드 배치로 한국은 ‘반중국 네트워크’에 가입했을 뿐 아니라 졸지에 분쟁지역의 열점이 된 셈이다. 한국의 사드 배치로 한반도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 이은 제3의 전선이 된 것이다. 미·중 간에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터지는 화약고라는 의미다.

중국이 제1열도선의 국가들로 분류한 일본·타이완·필리핀 등은 모두 중국과 영토 문제로 대립 중인 분쟁국가이다. 한국은 미국과 동맹국이지만 그 동맹은 북한의 도발을 억지하기 위한 대북억지 동맹이지 중국에 반하는 동맹은 아니었다. 더구나 전체 수출의 25%를 차지할 만큼 중국은 한국과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EPA</font></div>냉전 해체의 기폭제가 된 ‘이중 결정’을 주도한 서독 헬무트 슈미트(가운데)와 헬무트 콜(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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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해체의 기폭제가 된 ‘이중 결정’을 주도한 서독 헬무트 슈미트(가운데)와 헬무트 콜(왼쪽).

“미국이 판단하고 우리는 받아들였다”는 청와대

또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은 아시아·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전략이다. 미국 처지에서는 남중국해를 둘러싼 대중국 군사 대립만 있는 게 아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의 급성장은 미국에도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지난 1월 4차 핵실험 이후 미국 내에서는 북한의 핵능력이 미국-중국-러시아 다음 순위 국가들인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수준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6월22일 북한은 무수단 미사일 발사 실험에서 미국의 태평양 군사거점인 괌을 타격할 능력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핵탄두를 장착한 무수단 미사일 단 한 발만 떨어져도 미군 병사 8만명이 사망한다는 게 미국 군사전문가의 분석이다. 미국이 중국이나 러시아보다 북한에 대해 걱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중·러는 오랜 대화와 협상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북한은 어느 방향으로 튈지 통제 불능이기 때문이다.

남중국해에서는 중국과 대립하지만 한반도에서는 중국의 협조가 필요했던 게 지금까지 미국 아시아·태평양 전략의 얼개였다. 그런데 사드 배치 선언 이후 이런 구도가 급속하게 헝클어졌다. 북한과 대화 채널이 중단됐고, 중·러를 통한 대북 통제 역시 어려워진 상황으로 가고 있다. 남중국해에 대한 미국의 군사 압박을 분산하기 위해 중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미국의 사드 배치 선언은 곤도 다이스케가 주장하듯 미국이 중국이나 북한과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충격요법을 통해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한 의도가 일부 작용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완전한 오판이었던 셈이다. 1년 뒤에나 배치될지 말지도 모를 사드를 배치한다고 요란하게 선언했지만, 당장 미국 역시 별로 건진 게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은 7월14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한국 사드 배치 판단은 미국이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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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은 7월14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한국 사드 배치 판단은 미국이 한다”라고 말했다.

주변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신무기 체계를 들여올 때 국제정치적으로 지켜야 할 상식이 있다. 상대 국가의 안보 우려를 해소할 조건이나 방안에 대한 메시지를 동시에 발표하는 것이다. 군비 증강 조치를 할 경우 조건부 군축 제안을 동시에 한다든지 억지력(deterrence) 강화와 관여(engagement)의 확대와 관련한 메시지를 동시에 발표한다. 안보를 위해 군비를 강화했지만 상대방의 군비도 강화돼 오히려 안보가 위태로워지는 ‘안보 딜레마’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 대표 사례가 바로 1979년 12월12일 있었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이중 결정(Double-Track Decision)’이다. 1977년 소련이 동유럽에 배치했던 SS-4와 SS-5 중거리미사일을 최신형인 SS-20 중거리 핵미사일로 교체함으로써 유럽의 군사력 균형이 위태로워졌다. 그러자 나토는 한편으로는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과 퍼싱Ⅱ 미사일을 나토 국가에 배치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양측에 배치되는 중거리 핵미사일을 최소 수준으로 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 양국에 압력을 넣어 군비통제 협상을 진행시킬 것을 결의했다.

당시 이 제안을 주도한 이는 서독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였다. 사민당 출신으로 자신의 지지 기반과는 배치되는 결단이었지만 그 결단은 냉전 해체의 기폭제가 됐다. 1982년 정권을 이어받은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가 그의 정책을 계승했다. 콜 총리는 비록 보수적인 기민당 출신이지만 중거리미사일 배치와 더불어 소련에 대한 경제지원 및 동독에 대한 20억 마르크의 차관 지원을 단행하는 외교력을 발휘해 1987년 미·소의 중거리핵전력(INF)협정 타결에 일조했다. 결국 냉전의 해체와 베를린 장벽 붕괴, 독일 통일 등 20세기의 역사적 사건들은 바로 헬무트 슈미트의 이중 결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에 사드 배치를 요청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판단은 미국이 한다. 미국이 (판단)하고 우리는 받아들였다.” 7월13일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이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한 말이다. 주권국가인 한국의 안보를 책임진 사람의 발언이 맞는지 귀를 의심케 하는 내용이다.

위기가 바로 기회이다. 위기의 순간에 ‘남의 판단’이 아니라 ‘우리의 판단’에 따라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해법의 내용에 ‘우리의 문제뿐 아니라 남의 문제에 대한 해법’도 함께 포함돼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중국은 그동안 한반도를 자국 안보의 방파제로 여겨왔다. 그런데 사드 배치 이후의 한반도는 방파제가 아니라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했다. 혹자는 지금 중국이, 청일전쟁 패배 이후 일본 지배하의 한반도나 한국전쟁으로 미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했을 때의 한반도 상황과 같은 위기의식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미국이 판단했고 우리는 받아들였다’ 같은 무책임한 말로는 중국의 보복과 대응 행동을 피해갈 수 없다. 더 이상 늪에서 허우적대지 말고 우리 국익에 부합하는 출구전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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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조위 단식 농성은 계속된다

 

김서중 특조위원 "여야 3당 합의, 의미 없다"
이준상 기자 | 승인 2016.08.12 18:40

8월 임시국회에 앞서 여야 3당의 원내대표가 만나 세월호 참사 조사와 관련해 합의점을 찾았지만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의 단식 농성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특조위 김서중 위원은 이번 합의에 대해 "의미 없는 합의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정세균 국회의장이 12일 오전 국회에서 가진 여야 3당 원내대표들과의 회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정 의장,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
 

여야 3당은 12일 합의문에서 "세월호 선체인양이 가시화됨을 감안해 진상규명을 위한 선체조사는 반드시 필요하고, 그 활동을 계속하기로 합의했다"며 "조사기간, 조사주체 등 구체적인 사항은 앞으로 원내대표가 협의하기로 한다"고 밝혔다.

김서중 위원은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실질적인 활동 기간과 권한을 보장해달라는 것"이라면서 "완벽한 성과는 아니더라도 진상 규명을 할 수 있는 기간과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 한, 단식 농성을 풀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번 합의문에는 세월호 참사 진상조사와 관련해 선체조사에만 합의됐을 뿐, 세월호 특조위의 권한과 활동보장에 대한 논의는 빠져있다.

(서울=연합뉴스) 윤동진 기자 = 이석태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2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조사활동 보장을 위한 세월호 특조위 단식농성을 시작하고 있다.

김 위원은 "특조위 설립 이유는 정부와 해경의 초기 구조 실패와 조사 과정에서의 의문 등으로 인해 국민들의 불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선체조사도 당연히 세월호 특조위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은 새누리당이 이번 합의문을 통해 특조위를 조사 주체가 아닌 조사참여 정도로 그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여당이 주체가 돼 조사한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국민의 불신 때문에 "사회적으로 못 믿겠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며 특조위가 선체조사를 맡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새누리당은 기존의 세월호 특조위가 아닌 국회 차원에서 진상조사를 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차원에서 유가족, 여야 의원들과 전문가들이 참가하는 새로운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다.

김 위원은 선체조사가 특조위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조위는 여지껏 유의미한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만약 정부가 특조위 조사를 중단한다면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채, 국민들의 세금을 낭비하게 만드는 꼴"이라고 특조위 활동 기간 보장을 촉구했다.

실제로 특조위는 활동 기간동안 여러 성과를 내왔고, 앞으로 밝혀야 할 사안도 산적해 있다. 특조위는 지난 3월 2차 청문회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이 청해진해운 본사 지시였다는 것을 밝혔다. 또한 진도·제주 VTS 녹음파일의 편집 의혹도 제기했다.

하지만 정부는 일방적으로 특조위 활동이 6월30일부로 종료됐다고 선언했다. 특조위의 조사 인력은 감축됐고, 예산 배정도 끊겼다. 이에 따라 현재 세월호 특조위는 정상화를 촉구하며 지난달 27일부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무기한 단식 농성을 이어오는 중이다.

이준상 기자  junsang022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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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통일대행진단 6일차, 광주 청년들과의 뜨거운 하루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6/08/13 10:06
  • 수정일
    2016/08/13 10:0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기획] 청년통일대행진단 6일차, 광주 청년들과의 뜨거운 하루
 
 
 
청년통일대행진단 
기사입력: 2016/08/13 [01:40]  최종편집: ⓒ 자주시보
 
 

 

8월 11일, 청년통일대행진단 활동 6일째 광주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광주 광천동에서 1인 시위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 2016 청년통일대행진단 광주 활동, 아침 선전전     © 자주시보


어제 밤 제작한 사드가고 평화오라, 사드 대신 남북대화를 이라는 스케치북 이음 선전물을 들고 광주 시민들을 만났다.

 
청년통일대행진단 활동을 하며, 더 많은 시민들을 만나기 위해 항상 연구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청년들이다.

 

▲ 2016 청년통일대행진단 광주 활동, 광주교도소 양심수 석방 투쟁     © 자주시보

 

청년통일대행진단은 아침 선전전을 마치고 아침식사와 율동연습을 하고 광주교도소로 향했다.

 
광주교도소에는 김홍렬 전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위원장이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감되어 있다.

 
광주 청년들과 함께 집회를 하고 김홍렬 위원장 면회를 하였다. 벌써 구속된지 만 3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감옥 안에는 많은 분들이 계신다.

 
구시대의 유물인 국가보안법 때문에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단 한걸음도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지만 창살 안의 김홍렬 위원장은 청년들의 세상이라며 열심히 살다 만나자고 청년들을 응원해주셨다.

 
집회에 참가한 광주청년들과 김홍렬 위원장에게 편지를 쓰고 집회를 마무리했다.

 

▲ 2016 청년통일대행진단 광주 활동, 광주 기아차 노동자들과 연대     © 자주시보

 

광주교도소 앞 투쟁을 마친 청년통일대행진단은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광주 기아자동차 1공장 앞으로 향했다.

 
일을 마치시고 나오는 노동자분들에게 사드반대가 율동도 하고 유인물도 나눠드리며 사드반대와 남북관계 개선, 8.15대회에 대해서 알렸다.

 
노동자와 청년의 멋지고 아름다운 만남이어라.

 

▲ 2016 청년통일대행진단 광주 활동, 광주 충장로 사드 반대 선전전     © 자주시보

 

오후에는 광주 충장로로 다시 가서 광주청년들과 함께 사드배치 철회 서명운동과 8.15대회를 알리는 선전전을 진행하였다.

 
새로 나온 유인물에는 사드 반대, 평화협정 체결, 남북관계 개선과 8.15대회 내용까지 담고 있다.

 
오늘은 사드배치 반대 서명 770명, 6일째 누적 3880명이다. 목표는 초과했지만 우리는 멈출수가 없다.

 

▲ 2016 청년통일대행진단 광주 활동, 율동 연습 등 선전전 준비와 광주 청년들의 따뜻한 환대     © 자주시보

 

광주청년들과 하루를 함께 보낸 청년통일대행진단. 
광주청년들의 따뜻한 마음과 정을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다.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함께 해준 광주청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이제 청년통일대행진단은 수도권으로 올라온다.

 

(멋진 청년들을 응원해주실 분은 아래에 웹자보에 있는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 )

 

▲ 2016 통일대행진단     ©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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