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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랑 헬멧에 새겨진 ‘노란리본’ 비난한 MBC 김세의 기자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2/19 10:56
  • 수정일
    2018/02/19 10:5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정치적 표현이라고 비난하지만, 실제로 김 기자 본인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셈
 
임병도 | 2018-02-19 08:59:1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MBC 김세의 기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아랑 선수의 헬멧에 새겨진 노란리본이 올림픽 헌장을 위반하며, 박근혜 정부의 책임을 묻기 위함이 아니냐는 글을 올렸다. ⓒ페이스북 화면 캡처

 

MBC 김세의 기자가 쇼트트랙 김아랑 선수의 헬멧에 부착된 ‘노란 리본’을 비난했습니다. 지난 18일 김 기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아랑 선수에게 묻고 싶다’라며 ‘세월호 침몰에 대한 추모인가, 박근혜 정부의 책임도 함께 묻기 위함인가’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극우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일베)를 옹호하는 김세의 기자는 2007년에도 프로야구 이대호 선수의 글러브에 부착된 ‘노란리본’을 가리켜 ‘정치적 의사 표현’이라며 ‘스포츠 현장에서 정치적 표현은 바람직한가’라는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MBC 김세의 기자가 운동선수들의 ‘노란 리본’을 문제 삼는 모습은 박근혜씨를 옹호하는 극우 친박단체의 주장과 매우 흡사합니다. 정치적 표현이라고 비난하지만, 실제로 김 기자 본인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셈입니다.

김세의 기자는 자신이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림픽 헌장 50조에 따르면 그 어떤 정치적, 종교적 선전도 금지가 있네요’라며 ‘판단은 여러분들께서 해달라’는 글도 올렸습니다.

김 기자가 판단해달라고 했으니, 올림픽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통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올림픽 시상식에서 벌어졌던 검은 장갑 퍼포먼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육상 200m 시상식에서 미국의 토미 스미스 ,존 카를로스 선수와 호주의 피터 노먼 선수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육상 남자 200m에서 미국의 토미 스미스 선수는 금메달을 존 카를로스 선수는 동메달을 땄습니다. 시상식에서 미국의 국가가 연주되자 갑자기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고개를 숙인 채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번쩍 들었습니다.

두 선수의 행동은 흑인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경례 방식이자 미국의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퍼포먼스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흑인과 백인이 같은 식수대에서 물을 마시거나 같은 버스를 타지 못할 정도로 인종 차별이 심했습니다.

시상식에서 스미스가 착용한 검은 장갑은 ‘우리는 흑인이다’라는 표현이었고, 검은색 양말은 ‘흑인의 가난’을 상징했습니다. 스미스가 손에 든 상자에 담긴 올리브 나무 묘목은 ‘평화’를 의미했습니다.

은메달리스트였던 호주의 피터 노먼 선수도 미국 선수들의 인종 차별 항의에 동참하기 위해 “Olympic Project For Human Rights”(인권을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 배지를 가슴에 달았습니다.

원래 검은 장갑은 스미스와 카를로스 모두 착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카를로스가 장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고 피터 노먼 선수가 ‘나눠서 끼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검은 장갑’은 세 선수의 마음과 아이디어가 합쳐진 퍼포먼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명과 차별을 당했지만, 영원히 기억되는 선수들’

올림픽 시상식에서 검은 장갑을 끼고 인종 차별에 항의했던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다음날 올림픽 숙소에서 쫓겨났습니다. 두 선수는 미국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백인 우월주의 단체들의 비난과 토마토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이유로 미국육상연맹에서 제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피터 노먼이 사망한 10월 9일을 피터 노먼의 날로 기리자는 포스터 ⓒ구글이미지

 

호주의 피터 노먼 선수도 인종차별 항의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육상계에서 배척을 받았습니다. 특히 피터 노먼은 호주 신기록 보유자임에도 올림픽 출전에서 제외되는 차별과 수모를 당했습니다.

2006년 피터 노먼이 사망하자,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장례식에 참석해 관을 들었습니다. 2012년 호주 의회는 뒤늦게 공식적인 사과를 했습니다.

미국육상연맹은 피터 노먼이 죽은 10월 9일을 ‘피터 노먼 데이, 인권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피터 노먼은 지금도 ‘위대한 은메달리스트’,’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2등’으로 불리며 기억되고 있습니다.


‘올림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애’

 

▲좌측부터 에딘버리 브런디지 IOC 위원장, 1936년 베를린올림픽 제시 오언스, 손기정 선수 ⓒ구글이미지

 

올림픽과 정치의 연관성을 알기 위해서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등장했던 세 명의 인물을 보면 쉽게 이해됩니다.

가장 먼저 에딘버리 브런디지 IOC 위원장입니다. 브런디지는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검은 장갑 퍼포먼스를 벌인 미국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를 추방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브런디지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아돌프 히틀러 앞에서 ‘나치식 경례’를 했던 친나치 인사였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아리안 인종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알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100m, 200m, 400m계주, 멀리뛰기 종목에서 우승하여 4관왕을 달성한 선수는 제시 오언스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레이스’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인물은 우리도 잘 아는 손기정 선수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장기를 달고 출전해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는 베를린에서 사인할 때는 꼭 한국이름을 썼으며, 옆에 한반도 지도를 그렸습니다.

MBC 김세의 기자가 올림픽 헌장 50조를 운운하며 김아랑 선수의 노란리본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면, 히틀러에 협력해 놓고 “올림픽이 정치적으로 오염돼선 안 된다”고 했던 에딘버리 브런디지가 떠오릅니다.

올림픽의 본질은 ‘인류애’입니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을 비난하는 그들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스포츠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며 인류를 사랑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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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전쟁국가의 탄생

[전쟁국가 미국] NSC-68과 한국전쟁 <상>
2018.02.18 13:38:05
 

 

 

 

2차 대전 후 미국의 세계 패권이 완성된 결정적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한 전면적 재무장에 의해서였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국방비를 일거에 4배 가까이 증액했고 군사 물자 생산도 7배로 늘렸다. 서독과 일본 등 과거 적국의 재무장을 단행했다. 

미국이 대대적 재무장에 나선 것은, 그것만이 미국 중심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의지를 세계에 관철시키려면 압도적 군사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한 청사진이 1950년 4월 작성된 국가안보회의 문서 68(NSC-68)이다. 

그러나 전시도 아닌 평시에 국방 예산의 3~4배 증액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치 기적과도 같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것이 가능해졌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 주도에 의한 세계 공산화의 시발점으로 간주한 미국 지도층은 국민들에게 전면적 재무장을 설득했고 이를 실현할 수 있었다.  

미국은 재무장을 통해 압도적 군사력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서유럽과 일본 등 자본주의 선진국을 미국의 경제권에 통합했으며,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을 봉쇄했고,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 제3세계의 혁명운동을 진압했다.  

이후 미국은 영구 전쟁 국가로 변모했다. 건국 이후 처음으로 외국과 군사동맹을 맺었고 서유럽과 동아시아 등 세계 수백여 곳에 미군 기지를 운용했다. 또한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베트남전쟁, 아프간전쟁, 걸프전쟁 등을 수행했으며 아직도 중동지역에서 18년째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미국 경제는 핵무기를 비롯해 폭격기와 미사일 등 전쟁물자 생산이 계속되지 않으면 지탱될 수 없는 전쟁경제로 전환됐다. 이러한 미국의 전쟁 국가적 면모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 2010년 림팩 훈련에 참가한 미군 함정들. ⓒnavy.mil


2차 대전 발발 직후부터 전후 목표 구상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절대무기인 원자탄을 독점했고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했다.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에야 2차 대전에 참전했다. 하지만 전쟁 발발 직후인 1939년 9월부터 전후 목표를 구상하고 있었다. 정부가 아닌 재계 주도에 의해서였다.

2차 대전 발발 열하루만인 9월 12일, 미 재계의 두뇌집단(Brain Trust)으로 불리는 외교협회(CFR)가 국무부에 대해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추구해야 할 목표들에 관한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공동연구는 12월 6일 록펠러재단이 첫해 연구비 4만 5000달러 지원을 약속하면서 1940년부터 본격 시작됐다. '전쟁과 평화 연구(The War and Peace Studies)'가 그것이다. 

'전쟁과 평화 연구'에는 주로 CFR 소속의 학자, 지식인, 언론인, 관료 등 100여 명이 참여했으며 1940년부터 45년까지 6년간 362차례 회의에서 682개 정책문서를 작성해 대통령과 국무장관 등 최고위 관리들에게 보고했다. 연구보고서는 대통령 2부를 비롯해 모두 25부만 작성됐을 정도로 고도의 비밀 속에 진행됐다. 록펠러재단은 6년간 30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연구'의 핵심 목표는 처음부터 미국 경제의 세계적 확장이었다. 1930년대의 대공황을 겪은 미국의 경제 엘리트들은 미국의 과잉 농산물과 공산품, 그리고 과잉 자본이 진출할 해외 시장을 원했다. 수요 부족, 즉 시장의 결핍이 대공황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과잉 상품과 자본을 받아들일 해외 시장을 확보해야 미국의 자유와 안보,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 등의 배타적 폐쇄적 경제권을 해체해야만 했다. 배타적 경제권으로 인한 세계 시장의 분열은 곧 2차 대전의 원인이기도 했다.

'연구'의 처방은 세계적 자유무역 체제의 수립이었다. 즉 미국의 상품과 자본이 세계 어디로든 진출할 수 있는 국제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1899년 미국의 중국 시장을 목표로 발표한 문호개방(Open Door) 정책을 전 세계로 확대한 것이다. 

미국의 경제 엘리트들은 모든 국가들이 공평하게 상품과 자본을 수출할 수 있는 체제가 만들어진다면 단연 미국이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은 이미 1차 대전 이후부터 세계 최대 채권국이자 농산물 생산국이었으며 2차 대전 이후에는 세계 공산품의 절반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세계적 자유무역 체제의 수립이란 곧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복원을 의미했다.  

세계 패권 수립의 어려움  

그러나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도 세계를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각자도생을 모색했고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제3세계에서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특히 두 차례 세계 대전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선진국 간 갈등의 결과라는 점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하려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일례로 해방 후 남한 지역에서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를 바람직한 사회 체제로 꼽았다. 또한 역대 헌법 중 제헌 헌법이 노동자 이익균점권을 규정하는 등 가장 진보적 성향을 띤 것도 전쟁 직후의 세계적 분위기를 말해준다. 

미국의 세계 자본주의 복원 프로젝트는 세 단계로 진행됐다. 첫 번째는 다자주의적 무역 제도를 수립하는 것이다. 1944년 미국 주도로 수립된 국제통화기금(IMF)과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1995년 세계무역기구 WTO로 개칭)이 그것이다. 미국은 이들 국제기구를 통해 자유무역을 촉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다른 나라들은 자유무역을 할 여력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들 국가에는 미국 상품을 수입할 달러가 턱없이 부족했다. 국제제도만으로는 자유무역을 실현시킬 수가 없었다. 

마셜 플랜 

다음으로는 서유럽에 대한 대대적 경제원조였다. 유럽 재건 계획(ERP : European Recovery Program)이 그것이다. 1947년 6월 5일 조지 마셜 당시 국무장관이 하버드대 졸업 연설에서 제창했다는 이유로 마셜 플랜으로도 불린다. 1948년부터 51년까지 4년간 130억 달러를 서유럽 국가들에 원조해 자본주의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실상 실패했다. 우선 국내의 반대가 극심했다.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은 물론 국민들도 퍼주기라며 강력 반발했다. 당초 290억 달러로 책정됐던 원조 액수가 1949년 말 130억 달러로 반토막 난 것도 국내 반발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4년간의 경제 원조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달러 갭(달러 부족)이 해소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1948년 미국의 수출은 134억 달러로 대부분 서유럽에 수출됐는데, (마셜 플랜이 끝난 이후인) 1952년 유럽의 달러 보유액은 고작 20억 달러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됐다.  

미국 상품을 사들일 달러가 부족한 서유럽의 선택은 자명했다. 계획경제, 배급경제와 같은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을 시행하거나 소련 및 동구권과 물물교환 형태의 교역을 할 수밖에 없다.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러나 이는 곧 자본주의 경제, 미국 세력권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달러가 없는 서유럽은 친소련, 또는 적어도 중립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다. 미국으로서는 결단코 막아야 할 사태이다. 미국은 자본주의 선진국인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을 세계 자본주의 복원의 핵심 파트너로 지목하고 이들을 미국의 세력권 안에 묶어두려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핵심 동맹국 영국은 1949년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로 경제가 휘청거렸다. 또한 프랑스는 서독의 경제부흥에 한사코 반대했다. 숙적 독일의 재기를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1949년까지 서유럽의 통합 및 경제 부흥은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당초 미국은 마셜 플랜을 제창하면서 소련 및 동구권에 대해서도 경제 부흥을 위한 자금 지원을 제안했다. 미국의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 아래 두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1947년 7월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고 동구권 위성국가들에게도 미국의 지원을 받지 말도록 지시했다. 미국의 자금 지원은 자국의 주권을 침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로써 미소 간 대결은 첨예해진다.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  

세 번째 시도가 바로 대대적 재무장에 의한 세계 경제 재편이었다. NSC-68이 바로 그것이다. 

1949년까지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부활이라는 미국의 프로젝트는 실현 가능성이 극히 낮아 보였다. 특히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의 세계 전략은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소련과 중국, 유라시아의 두 공산 대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공산화의 유령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첫 핵실험을 비밀리에 단행했다. 며칠 후 미국은 이 사실을 탐지했고, 9월 23일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의 핵실험을 공식 확인했다. 이로부터 열흘이 채 되지 않은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텐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특히 소련의 핵실험 성공은 미국에 큰 충격이었다. 미국의 핵 독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핵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일방적으로 세계를 경영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다. 핵을 내세워 소련의 이해관계와 의사를 무시한 채 일본을 단독 점령하고 독일의 분단을 밀어붙였으며 (에너지 자원의 보고인) 중동지역에 대한 소련의 진출을 저지했다. 그러나 이제 소련도 핵무기를 가진 만큼 더 이상 미국의 일방주의는 통할 수 없게 됐다.

중국의 공산화도 문제였다. 당초 미국은 중국을 영국, 소련과 함께 전후 세계 경영의 주요 파트너로 상정했다. 이른바 '세계의 네 경찰관(four policeman)'이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 장졔스를 참석시킨 것도 루스벨트의 이러한 구상에 따른 것이었다. 그랬던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소련 진영에 합류했으니 미국으로선 큰 타격이었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공산화 이후 일본의 안보와 행로가 불투명해졌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정책 엘리트는 중국보다는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훨씬 더 높게 봤다. 일본의 산업 능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고도의 숙련 노동자와 산업 능력을 가진 일본이 소련에 넘어간다면 공산권의 세력은 엄청나게 강화될 터였다. 반면 미국에겐 뼈아픈 손실이 된다.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설사 일본이 미국 진영에 남는다 해도 공산 중국이 버티는 동아시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일본 경제를 지탱해주었던 식민지를 잃었기 때문이다. 전쟁 이전 일본 자본주의는 대만, 조선, 만주 등의 식민지를 통해 원자재와 노동력, 그리고 시장을 확보했다. 또한 중국과의 교역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수입의 17%, 수출의 27%가 대중국 교역이었다. 

패전으로 식민지를 잃고 중국 공산화로 중국 시장을 빼앗긴 일본 자본주의의 활로는 오직 동남아뿐이었다. 만일 일본이 동남아지역과 경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연간 5억 달러에 이르는 무역적자를 메울 길이 없었다. 그 경우 일본이 살 길은 공산 중국과 교역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본을 미국 세력권 안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동남아를 일본의 배후지로 만들어줘야만 했다.

문제는 동남아에서도 혁명의 기운이 뜨거웠다는 점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영국 식민지 말라야와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 등에서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를 향한 혁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베트남 북부에서는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독립을 선포했으며 1950년 초 중국과 소련은 이를 승인했다. 인도네시아와 말라야에서는 중국계 시민들이 독립투쟁에 대거 참여했다. 중국 혁명의 영향이었다. 방치할 경우 중국 혁명의 여파가 동남아 전역으로 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공산 아시아의 외딴 섬이 될 것이고 생존을 위해서는 공산권과의 공존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NSC-68 

미국으로선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우선 1950년 1월 수소탄 개발에 착수했다. 과학계 자문위원들의 일치된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결정이었다. 핵 독점이 무너진 데 따른 자신감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한 조치였다.  

1945년 이후 미국이 자신의 세계 전략을 마음 놓고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핵 독점 덕택이었다. 핵 독점이 무너진 이제 보다 강력한 무기를 가져야만 했다. 그래야만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하고 외교적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0년 1월 31일 트루먼 대통령은 국무부와 국방부에 소련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가 미국의 대외정책에 미칠 영향과 이에 대한 대응 방침을 연구할 것을 지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단장 폴 니츠를 의장으로 한 연구 그룹은 4월 7일 NSC-68을 작성해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다. 
 

▲ NSC-68 보고서 ⓒTruman Library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한 목표와 계획에 관한 국무 및 국방 장관 보고서'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소련이 세계 정복이라는 광신적 믿음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군사력의 총체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소련은 이전의 패권 추구 국가들과는 달리, 미국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새로운 광신적 믿음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전 세계에 대한 절대적 권위의 확보를 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소련과의 갈등은 불가피하게" 됐으며 "군사력의 총체적 우위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봉쇄 정책은 공허한 허풍이 될 뿐"이라고 밝혔다.

이제까지 소련과의 냉전이 정치외교적 대결이었다면 앞으로는 군사적 대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니츠는 핵전력의 압도적 우위를 강조했다. 

"우리가 핵전력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하고 제공권을 장악했을 때, 오직 그때에만 미국의 정책 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소련이 원자탄을 사용하는 것을 억지할 수 있다"

미국이 말하는 억지 정책의 핵심이 이것이다. '미국의 정책 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소련이 원자탄을 사용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즉 소련이 미국 정복을 위해 핵 공격을 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핵전력에 대한 니츠의 믿음은 거의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냉전의 고비마다 강경한 군사 대응을 주도했던 그는 1979년 소련과의 2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2)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폭력의 최고 단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면 낮은 단계의 모든 군사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한국전쟁, 베를린봉쇄, 그리고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은 전략핵무기의 우세 덕택에 전략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니츠는 핵전력은 물론이고 재래식 전력의 대대적 증강을 촉구했다. 서유럽에 대한 미 지상군 파병도 요구했다. 미국의 재무장뿐만 아니라 동맹국에 대한 군사지원과 경제원조, 공산진영에 대한 비밀공작과 심리전 등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모든 수준의 군사력에서 소련에 대한 절대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NSC-68은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세계 정복을 실현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을 개발하고" 있으며 "이미 자체 방위에 필요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소련은 잘 무장돼 있고 "고도의 준비 태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즉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이며 그 능력은 서유럽 침공, 노르만디 상륙과 같은 서방측의 반격을 저지하고 영국 공습, 그리고 중동 진출을 동시에 해낼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고도 군사력이 남아돌아 "다른 지역에 대한 관심 돌리기 용 침공"을 할 수 있으며 이미 미국에 핵 공격을 가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소련은 1950년 당시 미국 핵 공격을 위한 장거리 폭격기를 갖고 있지 못했다. 소련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폭격기를 개발한 것은 50년대 중반이었고 1957년 이후에야 미국에 대한 전략적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1950년 중반 소련 보유 원자탄은 5개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은 299개를 갖고 있었다. 원자탄 탑재 폭격기는 264대나 됐으며 미국 본토는 물론 알래스카, 캐나다, 아조레스, 영국, 아이슬란드,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오키나와 등에 발진 기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츠가 소련의 군사적 의도와 능력을 극도로 과장한 것은 NSC-68의 처방, 즉 미국 및 동맹국의 대대적 재무장을 트루먼 대통령 등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니츠는 소련이 의도적으로 핵 공격을 가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의 핵 독점 상실에 따른 외교적 주도권 와해를 우려했다. 미국 당국자들을 당혹케 한 문제의 근원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의 패배에 따른 힘의 공백을 소련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세계 각지에서의 자급자족 경제와 계획 경제의 증가, 공산당의 성장, 그리고 제3세계에서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의 발흥을 두려워했다. 

달러 갭, 유사회경제적 혼란에 따른 유럽 통합의 부진,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 베트남 호치민의 압도적 인기 등 제3세계의 탈식민화 열풍 등 미국의 세계 전략에 불리한 상황들이 쌓여가면서 소련이 이를 이용할 것을 우려했다. 핵능력을 확보한 소련이 보다 대담한 외교 공세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다 대담해진 소련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핵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는 게 니츠의 판단이었다. 실제 전쟁 수행에 필요한 것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한다는 것이 니츠의 목표였다. 군사적 우위야말로 소련으로부터 외교적 주도권을 빼앗아오고 냉전을 수행할 다양한 옵션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국무장관 애치슨도 니츠의 판단에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소련 주위를 봉쇄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선택의 자유는 소련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 전쟁 수행에 필요한 것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방비의 대대적 증액이 필요했다. 니츠는 내심 국방 예산의 3!4배 증액을 예상했으나 재무장에 필요한 재원 규모를 명시하지는 않았다. 재정 적자를 극도로 꺼려했던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0년 당시 미국의 국방 예산은 130억 달러, 니츠의 계산대로라면 400~500억 달러로 대폭 예산을 늘려야 했다.  

실제로 트루먼 대통령은 NSC-68이 제시한 재무장을 원칙적으로 승인하면서도 필요 재원을 산출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5월 초, '다음해 국방 예산은 기존보다 적어질 것'이라고 공언했다. 니츠 등이 기대했던 국방 예산의 대대적 증액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NSC-68의 실행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한 니츠는 6월 7일 휴가를 떠났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군복 입은 케인즈', 미국을 만들다
[전쟁국가 미국] NSC-68과 한국전쟁 <하>

 

2018.02.19 09:54:43
 

 

 

 

딘 애치슨, 폴 니츠 등 미국의 전면적 재무장을 원하는 세력에게 북한의 남침은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 NSC-68이 주장한 소련 군사력에 의한 세계 공산화 음모가 현실화 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소련의 음모가 드러난 이상 미국은 대응에 나서야 했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전면적 재무장이 그것이다.  

사실 북한의 남침은 미국 지도자들의 '자유 세계' 수호 의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었다. 미국이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중립주의를 부추기게 될 터였다. 서유럽과 일본은 소련, 중국과의 화해를 추구할 것이다. 반면 전면적 재무장과 함께 북한을 격퇴한다면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의 세력권 안에 확실히 묶어둘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 대통령은 측근에게 한반도는 "극동의 그리스다. 우리가 단호하게 대처한다면, 3년 전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들에 맞서 싸운다면, 저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그리스 좌파 세력의 민족해방 투쟁을 저지한 것을 말한다.  

트루먼은 "남한의 공산화를 방치한다면 소련은 아시아 각국을 차례차례 먹어치울 것...나아가 아시아의 적화를 방치한다면 중동지역이 무너질 것이며 그 다음은 유럽이 될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하다고 말했다. 

트루먼과 애치슨에게 한반도는 중요했다. 남한의 공산화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중대한 위협이었다. 핵 개발과 중국 공산화로 고무된 소련이 그 힘을 팽창하려 하고 있으며 남한이 그 출발점이었다. 소련의 팽창은 주변부에서부터 막아야 했다. 남한이 무너지면 동남아가 무너지고, 주변부가 붕괴되면 서유럽, 일본 등 핵심 산업 지역도 미국 세력권에서 벗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트루먼 등이 보기에 북한의 남침은 김일성 주도가 아니라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 스탈린이 미국의 관심을 한반도로 돌리게 해놓고 보다 중요한 지역, 예컨대 이란 등 중동지역 또는 서독이나 서유럽을 공격할 것으로 의심했다. 
 

▲ 한국전쟁 당시 38선 경계표시판 ⓒ프레시안 자료사진


트루먼은 전쟁 발발 직후 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했고 인도차이나와 필리핀에 대한 군사원조를 증액했다. 일본과의 평화협정을 서둘렀고 서독의 재무장을 결정했다. 서유럽에 미 4개 사단을 주둔시키고 미국의 동맹국들은 경제 재건보다 군사력 증강을 우선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소련의 또다른 공격에 대한 대비였다. 소련으로 하여금 서유럽에 대해 한반도에서와 같은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은 김일성 주도였다. 스탈린의 승인은 치명적 오판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스탈린은 미국의 군사행동을 촉발하지 않기 위해 극력 몸을 사렸다. 미국과의 군사력 격차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공산당의 무력 봉기를 억제했고 그리스 좌파의 독립투쟁도 아예 외면했다. 그리스를 영국 세력권으로 인정한 처칠과의 밀약을 준수한 것이다. 

그랬던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고, 마지못한 승인이었다. 우선 스탈린은 중국 내전에서 국민당이 이길 것으로 보았고 이에 따라 공산당을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산당 승리 이후 스탈린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어색한 사과를 해야 했다.  

다음으로 중국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싸웠던 조선인 병사 2만 5000명이 1949년 말에서 1950년 초에 걸쳐 북한에 들어왔다. 김일성은 노련한 전투원인 이들과 함께 남한을 공격할 경우 남한 인민들도 함께 봉기해 한 달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소련이 핵을 갖게 된 것도 스탈린의 자신감을 북돋았다. 마지막으로 1950년 1월 '남한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애치슨 선언도 스탈린의 모험을 가능케 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 또는 미국 개입 전에 한반도 통일이 완수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애치슨 선언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오판이었다.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이른바 애치슨라인은 소련과의 전면전에 대비한 방위선이었다. 소련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남한(과 대만)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애치슨은 만일 한반도에 대한 국지적 도발이 감행된다면 유엔의 집단 안보를 발동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미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을 동원해 남한 방어에 나섰다. 미국의 개입에 스탈린은 크게 당황했다. 미국과의 전쟁에 연루된 데 대해 겁을 먹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을 지원하고 도움을 주었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겁을 집어먹었다. 미국을 무서워했다. 코를 석자나 늘어뜨렸다. 그는 미국에 대해 문자 그대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고 전한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사장될 위기에 처했던 NSC-68이 되살아났다. 급속한 재무장에 따른 재정 적자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한반도 위기를 계기로 서방진영 전체의 전면적 군사력 증강에 나서야 한다는 게 미국 지도자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7월 19일 트루먼은 의회 연설을 통해 군사비 100억 달러의 증액을 요청했다. 우방국 원조 40억 달러, 핵무기 개발 예산 2억 6000만 달러도 요구했다. 당시 미국 지도부는 전쟁이 1년 내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국방비 규모는 기존의 4배로 늘려야 하며 1954년까지 미국 및 동맹국의 재무장을 완료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9월 30일 NSC-68/2에 반영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국이 치명적 실수를 저지른다.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결정한 것이다. 당초 북한의 남침에 대한 유엔 결의는 '국경의 원상회복'이었다. 즉 북한군이 38선 이북으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7월부터 미 국무부는 미국 주도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구상했고 결국 9월 11일 북진을 결정한다. 9월 15일 인천 상륙에 성공한 미국은 남한군을 앞세워 10월 1일 38선을 넘었다. 이는 미국의 대소련 전략이 봉쇄(containment)에서 반격(rollback)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북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이 미국에 치명적 타격인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주도의 통일은 중국, 소련이 감내하기 어려운 손실이다. 특히 건국한 지 1년밖에 안 된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북한을 넘어 중국까지 침공할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15일 마오쩌둥은 대부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전을 결정했다. 중국은 10월 25일 남한군에 대한 첫 공세로 미국에 경고를 보냈으나 맥아더는 이를 무시하고 북진을 계속했다. 결국 11월 28일 후방에 은신해 있던 중국군이 대대적 공세를 펼치면서 유엔군을 38선 이남으로 내몰았다. 

전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국과 중국과의 직접 군사 대결로 확대된 것이다. 특히 당시까지 패배를 몰랐던 미군이, 삼류 농민군으로 깔봤던 중국군에 밀려 치욕적 후퇴를 해야 했다. 봉쇄에서 반격으로의 정책 전환이 파탄 난 것이다.

당황한 트루먼 대통령은 11월 30일 "우리가 가진 모든 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며 원자탄을 사용할 뜻을 밝혔다. 바로 다음 날인 12월 1일 미국을 급거 방문한 영국의 애틀리 총리는 이를 극력 만류했다.  

서유럽 국가들의 최우선 관심 사항은 자신들의 방위였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원자탄을 사용할 경우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것을 우려했다. 재래식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소련이 침공할 경우 서유럽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에게 한국전쟁은 미국 군사력의 낭비였고 유럽을 지켜야 했다. 영국은 또한 미국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사전 협의를 요구했다. 결국 핵 사용은 일단 유예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12월 14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국방예산의 대대적 증액을 요청했다. 미국 및 동맹국의 재무장 완성 시기를 기존의 1954년에서 1952년 7월로 앞당기기로 했다. 미국의 모든 경제력을 군사물자 생산에 쏟아 붓고 미군 병력을 확충하는 한편 동맹국에 대한 군사원조도 대폭 증액하기로 했다.  

이러한 계획이 NSC-68/4로 작성됐고 이는 미국 재무장의 기본 계획이 됐다. 이날 열린 NSC 회의에서 애치슨 국무 장관은 전면적 재무장의 시급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부가 원하는 규모의 병력을 모두 확보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유럽 우방국들이 원하는 군사 원조를 모두 해준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병사들을 무장시킬 무기들을 모두 생산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총동원 체제를 갖춘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12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은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의 가정, 우리의 나라,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중대한 위협에 빠져 있다. 이 위험은 소련 지배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며 소련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5개월 전 북한만 비난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는 이어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났지만 실제로는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들도 역시 중대한 위험에 직면했다"면서 이러한 "현존하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병력을 기존 250만에서 350만으로 늘려야 하며, 무기 생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고, 유럽 동맹국들과 미국의 군대를 통합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트루먼(오른쪽) 대통령과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왼쪽)가 1950년 12월 4일 백악관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뒤쪽에 애치슨 국무장관과 마셜 국방장관이 서 있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


1951년 1월 8일 연두교서를 통해서는 "남한 침략은 세계를 단계적으로 접수하려는 소련 공산 독재의 일환"이라고 규정했다.  

나아가 "서유럽이 소련 침공에 무너지면 소련의 석탄 생산량은 2배, 철강 생산량은 3배로 늘어날 것이며 미국이 유럽을 외면하면 소련은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소련에 무너지면 핵심적 원자재의 산지들을 잃게 될 것인데 그중에는 원자탄의 원료인 우라늄도 포함돼 있다. 나아가 소련이 유럽과 아시아의 자유국가들을 집어삼키면 우리로서는 감당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우리를 압박해 올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소련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를 세계에 강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서는 제한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세계 전략 추진을 위해 핵심 산업 지역인 서유럽과 일본을 재무장해야 한다는 게 트루먼 행정부의 전략이었다. 트루먼은 "우리는 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계속할 필요가 있다. 그 원조는 이제 그들의 국방 건설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제 한국전쟁의 승리는 트루먼 행정부의 목표가 아니었다. 미국과 동맹국의 전면적 재무장이 목표였다. 한반도에서 처음 시도했던 반격 정책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봉쇄 정책으로 되돌아가는 한편 자유세계의 재무장에 의해 소련에 대한 압도적 힘의 우위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가 됐다. 힘의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향후 외교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뜻밖의 암초가 나타났다. 현지 사령관 맥아더가 다른 의견을 낸 것이다. 1951년 1월 중순 맥아더는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만주에 20~30개의 원폭을 투하하며 중국을 해상 봉쇄하고 중국 국민당 군대를 동원하자고 제안했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승리를 원했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으로의 확전도 불사할 태세였다. 

그러나 이는 트루먼 행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쟁이라는 국지전의 승리보다는 향후 소련과의 세계적 대결에서 주도권을 보장할 힘의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결국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한다. 전쟁 도중에 최고 사령관을 해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한국전쟁의 승리냐, 자유진영의 재무장이냐 하는 문제는 전쟁 중 지휘관을 해임해야 할 정도로 미국 사회의 첨예한 논쟁점이었다. 

미국의 일반 대중들에게 트루먼 행정부의 처사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교착 상태인데 현지 지휘관을 해임하다니. 게다가 한반도가 아닌 유럽에 미군 병력을 파견하는 등 미국과 서유럽 군사동맹(나토) 구축에 열을 올리다니. (트루먼 대통령은 50년 12월 20일 당시 콜럼비아대 총장이던 아이젠하워를 나토 최고사령관에 임명했고 아이젠하워는 다음 해 1월 5일 유럽으로 떠났다)  

공화당 의회는 분노했고 대중들은 실망했다. 공화당은 중국 공산당과의 전면전을 통해서라도 중국을 되찾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맥아더는 개선장군처럼 미국에 돌아왔고 의회에서는 맥아더 해임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그러나 트루먼은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없었다. NSC-68이 극비 문서였기 때문이다(NSC-68이 기밀 해제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애치슨 국무, 마셜 국방 장관과 브래들리 합참 의장 등 고위 관리들은 청문회에서 '중국으로의 확전은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전면전을 치를 군사적 준비가 안 돼 있다. 따라서 조속히 전력을 증강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서유럽의 군사력 증강이 필수적'이라는 논리로 의회와 대중을 설득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세계 패권은 비로소 완성됐다. 그것은 대대적 군사비 투입에 의한 전면적 재무장에 의해 가능해졌다. 1950년 회계연도의 미 국방 예산은 130억 달러였다. 한국전쟁 기간인 1951~53년 회계연도의 국방 예산은 총 1556억 달러였다. 4배 늘어난 것이다.  

수소탄이 개발됐고 원자탄도 대폭 늘어났다. 미국의 원자탄은 1950년 299개에서 1955년 2422개로 늘어났다. 소련은 5개에서 200개로 늘었다. 1950년 6월에서 1953년 1월에 이르는 2년 반 동안 미국의 군수물자 생산은 7배로 늘어났다. 3개월 마다 80억 달러 상당의 군수물자가 생산됐다. 1950년 6월 21개 편대였던 전략폭격기는 1952년 6월 37개 편대로 증강됐다. 해외 100여 곳에 미군 폭격기의 발진기지가 건설됐고 최초의 제트 폭격기 B-47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동맹국에 대한 지원은 경제원조에서 군사원조로 바뀌었으며 액수는 2배로 늘었다. 경제원조에 대해서는 퍼주기라며 반발했던 의회와 국민들도 군사원조에는 찍소리 없이 수긍했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부적이 신통력을 발휘한 것이다.

애치슨은 1951년 1월 10일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소련이 없다 해도, 공산주의가 없다 해도 전쟁으로 망가진 자유세계의 일부를 유지, 강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업"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즉 미국의 군비 증강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기보다는 자유세계의 결속과 경제 부흥을 위한 편법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소련에 대한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했다. 나아가 소련의 핵 보유와 중국 공산화로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 세력권에 묶어놓은 것과 함께 이들 국가의 경제를 부흥시켰다.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가 경제 재건의 마중물이었다.  

1949년부터 침체에 빠졌던 미국 경제도(1948년 하반기 192였던 제조업 생산지수는 1949년 4월 179로 하락했고 실업자 수도 22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늘어났다) 한국전쟁 이후 군사 수요에 힘입어 되살아났다. 미국인들의 표현에 따르면 '총과 버터', 즉 군비 증강과 경제 부흥을 동시에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미국은 군사국가, 전쟁경제로 변모했다. 사실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한 것은 뉴딜 정책 덕택이 아니었다. 2차 대전에 따른 막대한 전쟁 수요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2차 대전에 2950억 달러(현재 가치 약 3조 9000억 달러)의 전쟁 비용을 지출했으며 이중 17%인 501억 달러(현재 가치 6670억 달러)는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 등 동맹국에 대한 식량, 석유, 무기 대여에 사용됐다. 렌드리스(Lend-Lease, 무기대여법)가 그것이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전쟁 수요가 미국을 대공황의 늪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본의 경제 부흥에, 베트남전쟁이 한국의 경제 재건에 기여한 바를 상기해 보라. 세계의 전쟁 물자를 거의 혼자 만들어낸 미국이 2차 대전의 전쟁 수요로 얻은 혜택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해야 할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이 엄청난 군사 수요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했을 때 미국 경제는 과연 순항할 수 있었을까. 1945년 1140만이었던 미군 병력이 1947년에는 160만으로, 1945년 890억 달러였던 국방 예산이 1947년에는 190억 달러로 대폭 축소됐다. 이는 새로운 일자리 1000만개를 창출해야 하는 반면 (군사) 수요는 700억 달러 줄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경제는 침체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50년 초 NSC-68을 구상했던 미국의 정책당국자들도 당연히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 경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대규모 군사 수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군사적 케인스주의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대대적 재무장으로 세계의 주도권과 경제 부흥을 이끌었지만 이는 끊임없는 군비 증강과 전쟁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위험한 길이었다.  

사실 1950년의 재무장은 2차 대전의 전시 상황을 재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1940년부터 1945년 8월까지 6년 가까이 미국의 전쟁 비용은 2950억 달러였다. 1951년에서 53년까지 3년간 국방 예산은 약 1556억 달러였다. 전쟁 기간과 거의 같은 규모의 군사비를 지출한 것이다. 이러한 군사비 지출은 이후에도 지속된다. 즉 1950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실제 전쟁을 하거나 아니며 전쟁 준비에 매진하는 영구 전쟁국가로 변모한 것이다.

 

inkyu@pressian.com다른 글 보기
▶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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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풍력, 떠다니는 발전소가 대안이다

육근형 2018. 02. 08
조회수 3390 추천수 1
 
구조물 물에 띄우고 케이블로 바닥 고정
경관 침해와 어업피해 막고 입지 제한 적어
 
Untrakdrover _1280px-Agucadoura_WindFloat_Prototype-1.jpg»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건설된 전면적인 부상형 해상풍력발전소. 포르투갈 아구카두라 해안 5km 지점에 설치됐으며 2MW 용량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2030년이 되면 우리가 쓰는 전기의 20%를 재생에너지가 공급하게 된다. 지난 연말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놓은 ‘재생에너지 2030 이행계획’의 목표치이다.1) 계획에서 정부는 2016년 기준으로 7% 수준인 재생에너지의 발전량을 2030년까지 현재의 3배인 20%로 늘리겠다고 한다. 설비용량으로는 5배 가까운 수준이다. 현재의 재생에너지의 발전량 비중을 달성하는 데 15년이나 걸린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그 3배나 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림> 재생에너지 발전량 확대 계획
 
풍1.jpg
자료: 산업통상자원부, 2017,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안
 
그에 비하면 유럽 국가들의 최근 재생에너지 성장률은 놀라운 수준이다. 독일은 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이 2010년 16.7%에서 2016년에는 29.3%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영국은 같은 기간 6.8%에서 24.7%로 네 배 가까이 급증했다. 원전이 많은 프랑스와 일본에서는 비중이 크게 늘진 않았지만, 이미 전체 발전량의 17.3%와 15.9%(2016년 기준)를 차지한다. 적어도 7% 수준인 우리보다 배 이상 높다.
 
<그림> 주요 국가 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 2010년 vs. 2016년)
 
풍2.jpg
자료: 산업통상자원부, 2017,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안
 
2030년 태양광과 풍력이 원전 약 30여 기를 대신 
 
정부는 늘어나는 재생에너지의 대부분을 태양광과 풍력에서 얻겠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재생에너지의 58%를 폐기물이 공급했다. 열병합발전소에서 폐기물을 태워 전력을 생산하고 난방용수를 공급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2030년에는 폐기물의 비중이 6%로 줄어들고, 태양광(57%)과 풍력(28%)이 85%를 차지하게 된다. 설비용량으로 보면 태양광이 36.5GW(기가 와트, 1기가와트는 10억W), 풍력이 17.7GW 수준이다. 최근 원전 한 기가 1.4GW의 용량임을 고려하면, 태양광과 풍력이 약 30여기의 원전을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산에서 길을 잃은 풍력, 바다로, 바다로
 
04783732_P_0.JPG» 백두대간 한가운데인 강원도 평창군 횡계리 대관령삼양목장의 풍력발전기. 육상풍력발전은 산림생태계 파괴 문제를 안고 있다. 대관령/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원전 정책을 재검토하고 더욱 안전하고 환경에도 해가 덜한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높이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등 의미 있는 사회적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양광이나 풍력 역시 환경에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고, 시설 입지 자체를 지역민이 거부하는 사례도 있다. 특히 풍력발전은 저주파 소음이나 경관 훼손이 문제가 되었다. 풍력터빈이 바람이 풍부한 산 능선을 따라 건설되면서 백두대간과 같은 핵심 생태축이 훼손된다는 것도 큰 문제다. 풍력발전에 대한 지역의 민원이나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대응해 온 환경운동연합에서는 이를 두고 “산으로 간 풍력발전이 길을 잃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2) 
 
지난 연말에 발표된 ‘재생에너지 2030 계획’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인식해 대부분의 풍력발전을 해상에서 이룩할 전망이다. 해상풍력발전은 전 세계적으로 약 14GW(2016년 기준)에 달하는데, 불과 5년 전인 2011년에 4GW 수준이었던 것에 비하면 거침없는 성장세이다.3) 유럽이 전 세계 해상풍력 발전설비용량의 88%인 12.6GW를 차지한다. 영국이 5.1GW, 독일이 4.1GW, 덴마크 1.3GW, 네덜란드 1.1GW로 4개국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처음 발전을 시작한 탐라 해상풍력 30MW(3MW, 10기)가 있고, 미국은 블록 섬(Block island)의 30MW급 (6MW, 5기) 풍력단지가 유일하다. 
 
<그림> 전 세계 해상풍력발전 시설용량 누적 추이
 
풍3.jpg
자료: GWEC, 2017, Global Wind 2016 Report, p.61.
 
해상풍력발전, 대형터빈 개발, 대단지 확대, 해안에서 먼바다로 이동
 
DanishWindTurbines.jpg» 덴마크 코펜하겐 항구의 해상풍력발전 단지.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우리가 해상풍력으로 눈을 돌리기에 앞서 해상풍력 중심지인 유럽에서는 어떤 일이 논의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럽 내 해상풍력을 보면 크게 세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개별 풍력발전기(터빈)의 용량이 커지고 있다. 풍력터빈은 2000년대 이후에 들어서야 2MW 용량의 터빈이 사용됐다. 2016년에는 평균 4.8MW 수준까지 커졌고, 8MW 용량의 터빈에서 전기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2024년에는 그 용량이 두 배까지 늘어난다는 전망4)도 있다. 
 
<그림> 풍력 터빈기 평균 용량(위)와 크기(아래)의 변화
 
풍6.jpg
 
풍4.jpg
자료: (위) WindEurope(2017), p.27, (아래) http://www.telegraph.co.uk/business/2017/05/16/worlds-largest-wind-turbines-may-double-size-2024/ (검색일: 2017.1.25.)
 
둘째, 풍력단지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06년에는 단지 평균 크기가 46.3MW였으나, 2016년에 건설된 해상풍력단지는 379.5MW까지 늘었다. 혼시 원 계획(Hornsea One Project)처럼 개별단지의 총 용량이 1.2GW에 달하는 것도 등장한다. 현재 계획된 것까지 포함하면 풍력단지의 규모는 평균 1GW 수준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마지막으로 풍력터빈이 갈수록 더 깊고, 먼바다에 설치되고 있다. 2000년대만 해도 풍력터빈은 수심 20m 이내, 해안에서 20㎞ 이내에 설치되었다. 2010년 이후 수심 20m, 해안에서 20㎞ 이상 떨어진 곳에 설치되기 시작했는데, 2015년 이후에는 수심도 깊어졌지만 해안에서 약 40㎞ 이상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다.5)
 
<그림> 해상풍력터빈의 설치 수심과 해안에서의 거리 변화
 
풍5.jpg
 
Alpha Ventus supplied by Adwen in the North Sea-1.jpg» 북해에 설치된 대규모 풍력단지.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해상풍력에 대한 여론의 지지, 그러나 경관 침해에 대한 우려 갈수록 커져
 
최근 해상풍력 단지가 더 깊고, 더 먼 바다로 이동하는 것은 왜 그럴까? 연안에서 더 가깝고 얕은 수심에 설치하면 건설비용이 줄어드는 데도 말이다. 유럽에서는 경관 침해가 풍력단지의 입지 선정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유럽 내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해상풍력단지인 뉘스테드(Nysted)와 혼스레브(Horns Rev.) 풍력단지에서 풍력터빈이 경관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지역민의 태도를 비교한 연구를 보면6), 기본적으로 해상풍력발전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이 응답자의 80%에 달한다. 그런데 이와 함께 해상풍력단지의 경관 침해 문제를 줄이기 위해 외해로 풍력단지를 옮겨야 한다는 의견도 응답자의 50% 이상이다. 풍력단지를 외해로 이동하는 데에 대한 지불의사액을 물어본 결과, 우리 돈으로 12만원에서 22만원까지 지불의사가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7) 해상풍력은 필요하지만 해안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라는 요구다. 
 
풍력발전에 기술력을 갖춘 미국의 경우 의외로 해상풍력은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유럽처럼 국가가 풍력에 보조금을 제공하지도 않을뿐더러, 해운이나 어업과의 이해관계 충돌도 크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서도 경관 침해에 대한 우려가 크다. 2011년 뉴욕주 18㎞ 떨어진 앞바다에 지정한 풍력에너지구역에서의 사업도 여의치가 않게 되면서, 작년에는 다시 30㎞ 이상 떨어진 먼바다에 풍력단지를 설치할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8) 9)
 
해상풍력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유럽이나 기술력이 있는 미국의 사례를 보면 풍력발전단지는 어업이나 경관 침해와 같은 이해관계자와의 협의 문제로 난항을 겪거나 적어도 그 대안으로 점점 더 먼 바다로 이동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해안에서 불과 1㎞ 내외에 설치되는 국내 해상풍력단지
 
05853479_P_0.JPG» 탐라 해상풍력 단지의 모습. 해안에서 불과 1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허호준 기자
 
반면 국내에서 설치된 해상풍력발전은 해외 사례에 비춰볼 때 초기 단계의 문제점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 유일한 해상풍력인 탐라 해상풍력단지는 해안에서 불과 1㎞ 이내에 위치하고, 가까운 곳은 해안에서 500m 거리에 있다. 이 정도면 경관 침해는 사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수준이다. 3MW 용량의 터빈이 날개 높이까지 합하면 약 100m 정도이니 해안에서 보는 풍력기의 거리와 높이의 비는 약 5:1 정도다. 이는 55인치 티브이(122㎝ × 68㎝)를 3.4m 떨어져 보는 것과 같은 수준이다. 더욱이 풍력단지의 폭이 1㎞가 넘으니 가로세로 비율은 티브이보다 넓다.
 
탐라 해상풍력발전 단지의 인근 주민들이 경관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는지는 궁금한 사항이다. 처음에는 바다 위 풍력단지가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기대하기도 했고, 실제 환경영향평가서에도 풍력기가 관광자원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최근 인근의 다른 곳에 해상풍력단지를 지정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경관에 대한 우려는 심각하게 볼 필요가 있다. 탐라 풍력단지에서 직선거리로 20㎞ 남쪽에 계획된 대정 해상풍력단지는 경관 침해의 우려와 지역주민의 반발 등으로 도의회 심의가 두 차례나 보류되었다. 심의 보류의 사유가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후에도 지구 지정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부유식 해상풍력발전기,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라
 
Lars Christopher_1280px-Hywind-1.jpg» 하이윈드 해상 풍력발전단지.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제주도의 탐라나 대정 풍력단지 모두 해안에서 2㎞만 벗어나도 수심이 40m 이상 급격히 깊어진다. 화산섬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수심이 낮은 서남해안이라 하더라도 풍력기를 세우기 위해서는 암반까지 파이프를 박아 넣어야 한다. 수면에서 높이 100m 이상 되는 큰 구조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기반 시설 작업에 많은 에너지와 비용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는 기둥 설치 방식보다 저렴한 부유식 풍력발전기 개발에 나서고 있다. 해저 수십 미터에 기둥을 박는 대규모 공사가 아니라 해저에 고정 케이블만 걸어 두는 부유식 풍력발전은 이미 작년 스코틀랜드 해상에 설치되었다.10)
 
부유식 풍력발전기는 수심이 깊은 곳에도 설치할 수 있다. 아직은 해저에 고정하는 케이블이 필요하지만 기술 개발에 따라 완전 부유식 역시 개발될 전망이다. 우리나라처럼 연안해역에서 어업이 활발하고, 바다로 몇 킬로미터만 나가면 수심이 수십 미터 이상 깊어지는 조건에서는 기둥을 박고 어선의 출입을 통제하는 풍력발전 방식이 쉽지 않다. 특히 경관 침해 문제 역시 유럽이나 미국처럼 갈수록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좀 더 먼 바다에서 풍부한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부유식 풍력발전기의 도입이 입지 확보의 가능성을 높여줄 수 있다. 
 
744px-Floating_loose_mooring_catenary_plain.svg.png» 부유식 해상 풍력발전기 개념도. 발전기 몸체는 물에 떠있고 해저 케이블로 고정돼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해상풍력발전 확대를 위해서는 기술 개발과 협의 절차 확보 필수
 
정부의 계획처럼 해상에서 풍력발전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문제와 의사결정과정에서 드러난 문제 모두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풍력터빈의 대부분을 외국 회사에서 수입하고 있고, 대안이 될 수 있는 부유식 해상풍력에 대한 기술도 일천하다. 외국 기술로 덩치만 키워봤자 경제성은 물론 해외 진출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해상풍력에서 기술 개발의 필요성과 방향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또한 바다를 이용하는 여러 이해관계자와의 협의 과정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정부의 2030 계획에서 이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까지 서남해안이나 제주의 풍력단지 개발 과정에서 지역민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했는지 의심스러운 정황이 나오고 있다. 다양한 대안을 실질적으로 검토하고, 대안을 정하면 정말 그대로 실현될 수 있는 합리적인 절차가 필요하다. 이해관계자들이 제시하는 문제 역시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보고, 영향 여부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미국만 해도 뉴욕주의 해상풍력계획을 수립하기에 앞서 20건의 분야별 연구를 진행했다.11)
 
정부의 재생에너지 2030 계획은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과감하고 도발적인 목표 이상으로 꾸준하고 치밀한 이행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적어도 지금 정부는 4대강 사업을 하던 정부와는 다르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육근형/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부연구위원

1) 산업통상자원부,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안, 2017.12.20

2) “풍력발전은 왜 지역에서 환영받지 못하나” http://kfem.or.kr/?p=150771 (검색일: 2018.1.15.)

3) GWEC, 2017, Global Wind 2016 Report, p.61.

4) http://www.telegraph.co.uk/business/2017/05/16/worlds-largest-wind-turbines-may-double-size-2024/

5) http://windmonitor.iwes.fraunhofer.de/windmonitor_en/4_Offshore/2_technik/2_Kuestenentfernung_und_Wassertiefe/

6) Landenburg J., 2009, Visual impact assessment of offshore wind farms and prior experience, Applied Energy 86, p.380-387. 

7) Danish Energy Authority, 2006, Offshore Wind Farms and the Environment–Danish Experience from Horns Rev and Nysted, p. 39.

8) https://www.workboat.com/news/offshore/feds-outline-new-york-offshore-wind-energy-zone/

9) https://www.nyserda.ny.gov/All-Programs/Programs/Offshore-Wind/New-York-Offshore-Wind-Master-Plan/Area-for-Consideration

10) 노르웨이 회사인 스타토일(Statoil)사가 주도하는 ‘하이윈드(Hywind)’ 프로젝트 

11) https://www.nyserda.ny.gov/All-Programs/Programs/Offshore-Wind/New-York-Offshore-Wind-Master-Plan/Studies-and-Surve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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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에도 공사장 찾아가 나 좀 써달라는 아버지

50년 막노동은 왜 '경력'이 될 수 없을까

18.02.18 11:41l최종 업데이트 18.02.18 11:41l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의 아버지는 평생 막일을 하며 살았다.

그것은 직업도 아니었고, 경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돈도 되지 못했다. 그저 노동이었다.
회사에서는 10년 20년 시간이 지나면 호봉이 오르고 경력이 쌓이고 직급이 오르지만, 50년을 넘게 공사장에서 일한 아버지는 오를 직급도 호봉도 없었다. 50년 전도 지금도 그저 일당을 받고 막일을 하는 노동자일 뿐이다.

아버지는 해가 뜨기 전에 눈을 떴고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쓰러져 잠들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8시에 잠이 들었다. 일요일, 공휴일에 쉬는 것이 아니라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내려 공사를 할 수 없는 날에 '어쩔 수 없이' 쉬었다. 아버지에게 휴일은 하늘만이 점쳐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에도 나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그래도 공사장에 나가 오늘은 공사가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집으로 왔다. 그러니까 월화수목금토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새벽 4시에 공사장을 향했다. 날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탕을 치고 집에 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돌아오는 날과 똑같이 지쳐있었다. 자신이 하루 노동을 하지 못해 벌 수 없었던 일당 8만 원의 무게는, 하루 종일 노동을 하고 지칠 무게와 맞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남들보다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했고 온몸을 써서 일 했으며 당연히 일찍 지쳤다. 노동, 밥, 잠으로 이어지는 그 단순했던 반복은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됐다. 그 순환 속에서 자식 세 명이 자라났고 아내인 한 여자가 늙었다. 반복은 기적을 만들어낸다. 

아버지는 이제 노동 할 곳이 없다   
 그런데 이 사회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노동조차 주지 않는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 관련이 없습니다).
▲  그런데 이 사회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노동조차 주지 않는다(자료사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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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사회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노동조차 주지 않는다. 내 아버지는 환갑을 지나 이제 일흔이다. 이제 남은 건 더 이상 자신을 부르지 않는 공사장과 몸에 밴 부지런한 습관들. 

아버지는 이제 노동을 할 곳이 없다. 하루 종일 할 일이 없다. 평생을 노동만 하며 살아온 아버지에게는 노동 이외의 것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말이다. 그 습관들은 일이 없는 지금도 새벽 4시에 눈을 뜨게 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야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한다. 하루 종일 집안에서 조차도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하루 종일 집안 대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며, 동네를 돌아다닌다. 아버지의 몸은 가만히 있으면 쉬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다. 평생 노동을 습관처럼 한 탓이다. 

밥은 아주 빨리 씹지도 않고 단시간에 삼켜야 하며 몸은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 무거운 것들을 등에 지어야 하며, 팔과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 그곳이 공사판이 아닌 집안일지라도. 움직이지 않는 찰나의 순간들을 견디기 어렵다. 

공사장에서 이고 지었던 벽돌과 장비 대신 집안의 장롱과 냉장고를 등에 지고 옮겨내 쌓여있는 먼지들을 치운다. 넓지도 않은 18평 집안을 활보하며 그렇게 청소를 하고 가구들을 옮긴다. 

평생 공사판으로 출근했던 아버지는 이제 불러주는 곳이 없어 집을 공사판으로 만들어 노동을 한다. 참으로 지독한 습관적인 노동들. 그 50년의 노동이 만들어 낸 참혹한 습관들을 일흔인 아버지의 몸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끊임없이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동네를 돌아다닌다. 그런데도 하루가 길다. 갈 곳이 없고, 할 노동이 없다.

며칠 전 아버지는 술에 취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도 답답해서 집 앞에 단독주택 짓는데 가서 말했다. 나 좀 써달라고. 대뜸 몇 살이냐 물어보더라. 일흔이요 하니까 안 쓴다고 일흔은 안 쓴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하드라. 에라이! 하고 집에 왔다. 내가 그랬다."

'나 좀 써달라고' 그 한마디가 맴돌아
 
 아버지는 50년 경력자인데 막일의 50년 경력은 일흔이라는 나이만 남겼다(자료사진).
▲  아버지는 50년 경력자인데 막일의 50년 경력은 일흔이라는 나이만 남겼다(자료사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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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먹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 좀 써달라고' 그 한마디가 자꾸만 맴돌아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50년 경력자인데 막일의 50년 경력은 일흔이라는 나이만 남겼다.

나는 아버지의 나이가 일흔이라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다. 평생을 노동했고 노동밖에 할 수 없는 아버지가 더 이상 그 노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비통할 뿐이다. 

못난 딸은 늙은 아버지가 더 이상은 그 노동을 하지 않고 쉬었으면 싶다가도, 이런 순간들을 마주 할 때면 무슨 노동이라도 하길 바라는 구차한 마음이 든다. 그 노동의 목적과 결과물인 딸은 이제 아버지에게 멋진 옷도 사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술도 사드릴 수 있지만 노동을 하게 해 드릴 순 없는 노릇이다.

앙상한 아비의 팔과 다리가, 깊게 패인 얼굴의 주름살이, 냄새 나는 몸뚱이와 거친 숨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귀가 그저 다 슬플 뿐이다. 마치 그것들이 아버지의 평생 노동의 결과인 것 같아서.

평생 반복했던 아버지의 노동이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닐 진데, 그래서 일흔이 된 지금 그 누가, 무엇이, 나의 아버지의 평생 노동을 보상해 줄까?

아버지의 노동으로 나는 맛있는 걸 먹었고, 예쁜 옷을 입었고, 공부를 했고, 여행도 갔고, 술도 마셨고, 부끄럽게도 아버지의 그 노동을 원망하기도 했다. 참 못난 딸이다.

아버지는 세 명의 자식이 갓난 아이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한 여자가 숙녀에서 할머니가 될 때까지 노동을 했는데 그래서 아버지는, 그래서 나의 아버지는 무얼 보상 받았을까. 

아버지에게 노동은 평생을 지독히도 따라다녔던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아빠가 많이 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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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안 했다" 간첩 조작 수사관, 뻔뻔함 언제까지?

재일 동포 간첩 사건 가담한 전직 보안사 수사관 고병천 씨 재판
2018.02.17 12:15:34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여든 노인의 입에서는 끝끝내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의 삿대질 속에서 그는 유유히 법정을 빠져나갔다. 

간첩 조작 사건 찍어낸 베테랑 수사관 

노인의 이름은 고병천. 1939년생. 보안사령부 수사관 출신. '방첩대' 시절부터 시작해 줄곧 한 길만 파기를 38년. 보안사에서 그는 '베테랑'으로 불렸다. 다름 아닌 간첩 조작의 베테랑. 다른 부서에 비할 데 없이 '실적'이 좋았던 학원반 내에서도 고 씨의 솜씨는 단연 으뜸이었다. 30~40년 전, 숱한 청년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간첩으로 탄생했다.

당시 '가짜 간첩' 제1 목표물은 재일 교포 청년들이었다. 북한에 대한 경계가 철저한 한국 내에서는 일반 사람이 남파 공작원을 접촉할 기회라는 게 극히 드물었다. 그에 비해 재일 교포의 경우 그가 접촉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사람을 손쉽게 대남공작원으로 꾸며낼 수 있었다. 게다가 영사증명서 조작도 비교적 용이했다.  
 

▲보안사가 이종수 씨의 친척 '조신부'에 대해 오사카 영사관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한 영사증명서. 실제 조신부의 직장은 조총련계 인물이 경영하는 나카야마(中山)가 아닌 다카야마(高山)였음에도 이 서류에는 버젓이 ‘나카야마 관광 주식회사에 근무한 바 있다’고 기록돼있다. ⓒ이종수

이런 이점을 교묘히 이용해 고 씨가 만든 대표적인 '작품'이 재일 교포 유학생 이종수 씨 사건이었다. 

데모로 붙잡힌 친구에 대해 물어본다던 그들은 친구가 아닌 이 씨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북한에 다녀왔느냐", "북한에 다녀온 사람과 친하게 지냈느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그는 "아니다", "없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번엔 그가 일본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낸 사람이 누군지 물었다. 그는 먼 친척인 '조신부' 이름을 댔다. 잘못한 게 없으니 사실대로 얘기해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대답이 조작극의 단초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참 뒤 수사관들은 조 씨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계 사장이 있는 '나카야마(中山)' 회사에 다닌다며 "조신부가 너를 대남공작원으로 포섭한 것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조 씨가 다니는 회사명은 '나카야마'가 아닌 '다카야마(高山)'였다. 사실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건 갖은 고문이었다.

고문받은 기억을 떠올리자면 한숨부터 나온다. 뺨 맞기, 물 고문, 전기 고문, 다리 사이에 몽둥이 끼우고 밟기, 통닭구이. 영화 <변호인>에 나온 그대로다. 수사관들이 얼굴에 주전자로 물을 붓고 "북한 갔다 왔지"라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면 물 붓기를 4~5차례 반복한다. 그러다 기절하면 수사관들이 허위 진술서에 지장을 찍는다. 정신이 들면 수사관이 읊는 대로 자신이 북한에 갔다 왔다는 '소설'을 달달 외웠다. 영장 한 번 본 적 없이 그렇게 39일간 불법 구금됐다. (<프레시안> "30년 걸려 벗은 간첩 누명, 유우성은 운 좋다" 인터뷰 중)

고 씨로부터 고문을 받은 뒤 '가짜 간첩'으로 복역하는 대신 간첩 포섭 작업 등을 위해 강제로 보안사에서 근무했던 이도 있다. 책 <보안사>(김병진 지음, 이매진 펴냄)를 쓴 재일 교포 김병진 씨다. 김 씨는 감금이 끝날 때까지 봤던 인물 가운데 '가장 기분 나쁜 존재'로 고 씨를 꼽으며 책에 그와 관련된 일화와 어록을 전했다. 

몇십 분 지나자 몸집이 작고 나이는 사십 대 후반 정도 되는 사람이 이덕룡을 거느린 채 들어왔다. 그 사람이 앉자 이덕룡은 다른 의자를 끌어다가 그 사람 옆에 조수처럼 앉았다. 키는 160센티미터 정도고 나이에 견줘 동안이었다. 고병천 육군 준위였다. 
 

▲<보안사>(김병진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정보기관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고병천은 마치 강의라도 하듯이 장황하게 떠들어댔다.


"이곳은 경찰서하고 다른 곳이다. 정치범을 잡는 곳이다. 다시 말해 사상범을 상대하는 곳이란 말이다. 북한을 위해 일하는 놈들을 잡는 곳이라는 말이야.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37쪽)

"이 나라의 재판은 형식적이야. 우리가 간첩이라고 하면 간첩이지."(49쪽)

대꾸하자마자 이덕룡은 틈을 주지 않고 안경을 낚아채더니 뺨을 후려갈겼다. 고병천, 김국련이 차례로 나를 구타했다.(53쪽)

'VIP실' 한쪽 구속에 있던 수동식 군용 발전기에서 코일 두 줄을 풀어 내 집게손가락에 감으려 했다. 몸부림쳤다. 처음에는 겨우 벗겼지만 손목을 더 세게 붙들어서 코일을 벗길 수 없었다. 옆에서 고병천이 드럼통에 담아놓은 물을 계속 내 몸에 끼얹었다. 물에 빠졌을 때처럼 숨이 막혔다.(57쪽) 

"설사 일본에 있어도 김일성과 김일성을 지지하는 자를 철두철미하게 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애국심이다."(60쪽) 

(김 씨를 풀어줄 때) "미친개에 물렸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려라"(78쪽)

사과는커녕 "고문한 적 없다" 발뺌 

고 씨의 어긋난 애국심은 평범했던 청년들의 삶을 손쓸 수 없이 망가뜨렸다. 청춘을 감옥에 다 바쳤고, 고문 후유증으로 몸 이곳저곳이 고장이 났다. 간첩 멍에로 직장생활, 가정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피해자들이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사이, 고 씨는 1995년까지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에서 일하다 명예롭게 퇴직했다. 이후 2004년까지는 수사과 연구관으로 지냈다.

시간이 흘러 고 씨가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기회가 찾아왔다. 1984년 자신에게서 고문을 받아 간첩으로 조작됐던 또 다른 피해자 윤정헌 씨 재심 재판의 증인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 세월이 지났어도 법정에 선 고 씨는 여전했다. 

"증인은 피고인 윤정헌에게 구타나 협박 등 가혹행위를 한 사실이 없지요."
"예. 없습니다." 
"그리고 윤정헌에게 허위자백을 강요하거나 유도한 사실이 없지요."
"예. 없습니다." 
"당시 간첩사건 수사에 있어서 피의자들을 인간적으로 설득하는 데 주력하였지요."
"예. 스스로 얘기하도록 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그는 '고문한 적이 없다'며 기만적인 행태를 보였다. 결국 윤 씨는 고 씨를 모해위증죄로 고소했다.  

사과를 받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검찰은 무려 6년 동안이나 사건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공소시효 이틀 전인 지난해 12월 19일 모해위증죄가 아닌 단순 위증죄로 고 씨를 기소했다. 지난 1월 22일 간신히 첫 재판이 잡혔지만, 이번엔 고 씨 측이 기일 변경을 했다. 고 씨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일본에서 현해탄을 건너온 윤 씨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지난 12일, 드디어 첫 재판이 열렸다. 지팡이를 짚고서 나타난 고 씨의 모습은 머리가 하얗게 센 영락없는 노인이었다. 고 씨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듯, 변호인은 고 씨와 대화할 때 입을 귀 가까이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변호인은 "지금까지는 공소사실을 부인했고 인정하지 않았던 부분이 많지만 세월도 많이 흘렀고 역사적으로 바뀐 상황에서 그 태도를 유지하지 않겠다, 예전처럼 부인해서 재판이 길어진다거나 피해자들에게 상처가 더 커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문한 적이 없다'던 입장을 바꾸겠다는 얘기였다. 다만 정확한 입장에 대해선 "차후에 서면으로 제출하겠다"고 했다. 

 

 

▲12일 위증 혐의로 재판을 받은 고병천 씨(가운데)와 조작 간첩 피해자 최양준 씨(오른쪽). ⓒ프레시안(서어리)


이날 윤 씨 대신 재판을 지켜본 조작 간첩 피해자 최양준 씨는 분개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까?", "당신 때문에 멀쩡한 사람들이 불구가 되고 인생이 망가졌는데 그래도 할 말이 없습니까?" 수십 번을 따져 물었지만 고 씨는 말이 없었다. 기자들도 법원을 나서는 고 씨에게 질문했다. 기자가 계속 따라붙자 귀찮은 듯 마침내 고 씨가 대꾸했다. 

"다음에 법정에 와서 얘길 들어요." 

결국, 사과는 없었다. 

다음 기일은 다음 달 15일이다. 30년 넘게 '미안하다' 말 한마디 없던 그가 한 달 뒤엔 제대로 사과할 수 있을까. 고 씨가 지금이라도 과오를 뉘우치고 역사의 죄인으로 남지 않기를, 피해자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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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다” “좋다! 좋지”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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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8/02/18 11:57
  • 수정일
    2018/02/18 11:57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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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응원단 취주악단, 평창에서 춤 선보여
평창=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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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17  23:5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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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측 응원단 취주악단은 17일 오후 3시 40분경 강원도 평창 상지대관령고등학교에 마련된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평창특별전’을 관람한 뒤 공연을 펼쳤다. 북측 응원단이 처음으로 춤을 선보였다. [사진-조천현]

“우리는 하나다”, “좋다! 좋지”

남측 시민들이 외치자 북측 응원단은 춤으로 화답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위해 방남한 북측 응원단 취주악단이 네 번째 공연을 펼쳤다.

북측 응원단 취주악단은 17일 오후 3시 40분경 강원도 평창 상지대관령고등학교에 마련된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평창특별전’을 관람한 뒤 공연을 펼쳤다. [영상보기]

약 80여 명의 취주악단은 빨간색 상의와 모자, 하얀색 바지를 입고 손에 악기를 들고 등장했다. 악기를 다루지 않은 응원단은 빨간색 체육복을 입고 손에는 단일기(한반도기)를 들었다.

공연단이 상지대관령고 잔디 운동장에 들어서자, 시민들은 단일기를 흔들며 “반갑습니다”, “우리는 하나다”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북측 응원단은 단연 평창 올림픽의 스타였던 것.

취주악단은 언제나 그렇듯 첫 곡인 ‘반갑습니다’를 연주했다. 그리고 시민들도 곡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라고 노래를 부르던 한 시민은 굵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 북측 응원단 취주악단의 연주 모습. [사진-조천현]
   
▲ 북측 응원단 취주악단 공연 뒤로 시민들은 "우리는 하나다"를 외쳤다. [사진-조천현]

이어 ‘아리랑’, ‘옹해야’ 등 민요가 연주됐고, ‘내 나라 제일좋아’ 등 북측 노래가 연주됐다. 취주악단이 곡을 연주하자, 응원단은 일제히 나와 흥겹게 춤을 선보였다. 응원단이 취주악단 곡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은 이번이 처음.

북측 응원단은 북측에서 주요 행사마다 열리는 ‘야회’ 그대로 춤을 췄으며, 시민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남측 시민들이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는 가운데, 북측 응원단은 춤을 추며 “좋다! 좋지”라고 말해, “우리는 하나가 좋다”라는 메아리로 운동장을 울렸다.

북측 응원단을 환영하기 위해 온 명진 스님은 “문화예술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녹여주는 역할을 한다. 군사적 대립 관계를 녹여주는 북한 응원단을 열렬히 환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문화예술이 우리 민족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것 아니겠냐”며 “남북관계가 대립해서 험했던 기간이 끝나고, 정말 평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서로 미워하지 말고 같이 합쳐서 통일된 조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북측 응원단이 춤추는 모습. [사진-조천현]
   
▲ 북측 응원단이 단일기를 흔들며 춤을 췄다. 그리고 "좋다! 좋지"를 외쳤다. [사진-조천현]

응원단의 공연을 본 한 시민은 “지난 보수정권이 얼마나 망가트렸느냐. 남북관계를 파탄시킨 죄가 크지 않느냐”며 “응원단의 모습이 얼마나 좋으냐. 이런 기회가 계속 있었으면 지금 이런 경색 분위기까지 왔겠느냐. 이번 기회를 살려서 정말 우리가 함께 잘 사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시민도 “인생에 남을 만한 공연이었다.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며 “응원단의 모습을 보니 통일이 코앞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통일이 빨리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30여 분의 공연이 끝나자 시민들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손을 흔들며 “우리는 하나다”라고 거듭 외쳤다. 다른 시민들은 “앵콜”, “좋다”, “한 번 더 해주세요”라고 외쳤다. 이에 북측 응원단과 취주악단은 손을 흔들며 시민들에게 화답했다.

북측 응원단의 이번 공연은 네 번째다. 지난 9일 북측 선수단 입촌식, 13일 강릉 오죽헌, 15일 강릉아트센터 옆 ‘라이브 사이트’ 등에서 공연을 했다.

한편, 북측 응원단과 기자단은 이날 저녁 강릉 세인트존스 호텔에서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했다.

   
▲ 취주악단의 연주 모습. [사진-조천현]
   
▲ 응원단은 흥겹게 단일기를 흔들며 춤을 췄다. [사진-조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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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이란 무엇이고 북핵폐기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우방이란 무엇이고 북핵폐기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정설교 화백
기사입력: 2018/02/18 [11:0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미국 워싱턴에 수소폭탄 예상 피해 범위  

미국은 북과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다. © 정설교 화백

 

 

▲  대한민국은 미국의 봉이다

   출처- 한겨레 © 정설교 화백

 

 

▲  한국은 관세철폐

미국은 관셰 대폭인상

한국은 미국의 봉이다.  

출처- 매일경제 © 정설교 화백

 

미국이 북과 진정성 있는 대화를 원한다면 북한에게 핵 폐기라는 미국의 일방적인 목표를 말하지 말아야 된다. 미국이 북과 대화를 하려는 의도는 북한에게 핵무기가 있으며 ICBM으로 미국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이 북한에게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에게 핵무기와 그 운반수단이 없다면 미국은 북한을 3류 국가로 분류하고 대화는커녕 이 지구상에서 무시해도 좋은 나라로 어쩌면 이라크, 리비아와 같은 침략과 소멸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핵독점이 소련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었지만 미국은 핵이 없던 영국, 프랑스를 친구국가가 아니라 열등한 2등 국가로 보았고 중국은 3등 국가로 분류했다.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정상화하며 미국의 친구 나라가 된 것은 바로 핵무기와 그 운반수단인 미사일 때문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야 된다. 북한이 미국에게 굴복하여 핵무기를 폐기하는 순간 북한은 국제사회에 주목을 받을 수도 없지만 즉시 북미대화가 중단되고 북미 사이에는 불평등조약에 의한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과 명령만 있을 것이다.

 

세계 3위 핵보유국인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폐기하고 러시아로부터 크림반도를 빼앗기고 침략을 당하지만 우크라이나를 지켜주겠다던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에 아무런 제재를 가할 수도 없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만 봐도 그렇다.

국제사회는 힘에 의하여 움직이고 정의는 바로 그 나라의 <국방력>이다.

 

미국과 우방이라며 한국은 미국을 친구나라라고 부르고 있지만 한미관계의 발자취를 보면 미국과 한국은 *주종관계다. 그 하나가 한미자유무역협정으로 한국은 경제주권을 상실하고 일방적으로 미국에게 끌려다니며 불평등한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더욱 불평등하게 <재협상>을 하고 있지만 이를 국민들에게는 비밀로 한다.

 

관세철폐 한미자유무역협정에서 한국은 관세를 철폐하여 미국의 이익에만 충실하지만 미국은 자의적으로 한국에 20%가 넘는 고율관세를 부과한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한국에 방위비분담을 늘리고 있으며 GM사는 한국에 1조 달러를 투자 '3조'의 막대한 이익금을 미국으로 가져갔지만 한국의 산업은행에 5000억 추가 투자를 요구한다. 미국의 일방적인 압력에도 한국은 미국에게 할 말이 없으니이를 어찌 미국이 친구 나라<우방>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의 가계부채는 늘어가는 추세로 미국이 금리인상을 들고 나와 한국의 경제는 말 그대로 죽을 쑤고 있으며 노동자, 농민은 죽지 못해 살고 있고 실업자들은 가정이 파탄 나 사경을 헤맨다. 민심이 천심이라 했던가? 한국의 맹목적인 친미사대는 늘 민심을 역행하지만 주권<힘>이 없는 한국은 민심을 외면하고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으니 한국은 중산층이 무너져 내리고 1%의 삼성재벌을 비롯한 몇 부정부패의 재벌만 제외하고 우리들 모두가 빈자의 대열에 들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오늘날 한국경제를 대국적으로 파악하여 우리에게는 미국에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지도자 필요하다 .미국에게 '노'라고 말할 수 있을 때 한국과 미국은 비로서 친구나라가 되는 것이다. 북한도 북핵폐기를 하는 그 순간에 미국과 친구관계가 아니라 주종관계로 바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북한은 6자회담 9.19 성명을 비롯한 미국과의 협상을 해본 경험이 있어 미국의 본성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기에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만약 무조건적인 북핵폐기에 응한다면 미국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북에서 주장하는 강성대국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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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년간 보르네오서 오랑우탄 10만마리 사라져

조홍섭 2018. 02. 17
조회수 121 추천수 1
 
열대림 벌채와 팜유 농장, 사냥 때문 개체수 절반 줄어
남은 집단 절반이 100마리 이하, 35년 뒤 또 5만 줄 것
 
u1.jpg» 보르네오 숲의 오랑우탄 모습. 벌채와 사냥으로 급박한 멸종 위험에 놓여 있다. 마르크 안크레나스 제공.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의 하나인 오랑우탄이 1999∼2015년 서식지인 보르네오에서 10만마리 이상 줄어들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는 전체 개체수의 절반이 사라진 것으로,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35년 사이 현 개체수의 절반가량인 4만5000마리가 추가로 죽을 것으로 예측됐다. 
 
오랑우탄 감소의 주원인은 산림 벌채와 팜유 농장과 제지용 플랜테이션 등 숲 파괴와 사냥과 밀렵으로 나타났다. 팜유는 과자, 라면, 화장품 등에 널리 쓰여, 우리나라도 이런 감소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u2.jpg» 팜유 농장을 만들면서 조각난 열대 우림. 숲이 얿는 곳에서 오랑우탄은 살 수가 없다. 마르크 안크레나스 제공.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 등 세계 38개 연구소는 1999년부터 16년 동안 보르네오에서 오랑우탄의 둥지를 확인하는 한편 원격탐사로 숲의 변화를 측정하고 모델링을 통해 오랑우탄 개체수 변화를 예측했다. 이들은 과학저널 ‘커런트 바이올로지’ 16일 치에 실린 논문을 통해 이런 결과를 보고하면서 “지속 가능하지 않은 자연자원 활용이 보르네오 오랑우탄의 극적인 감소를 불러왔다”라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1234㎢ 면적의 현지 조사에서 오랑우탄의 잠자리 수를 통해 서식밀도를 추정했다. 그 결과 모두 3만6555개의 잠자리를 확인했는데, 연구 기간 동안 ㎞당 22.5개가 관찰되던 것이 10.1개로 줄었다. 연구자들은 맨눈으로 확인된 변화를 바탕으로 모두 14만8500마리의 오랑우탄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 추정했다.
 
사라진 오랑우탄 가운데 9%에 해당하는 1만4000마리는 산림 벌채, 산업적인 팜유와 펄프용 플랜테이션 때문으로 연구자들을 분석했다. 오랑우탄은 숲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숲이 사라진 곳에서 밀도가 가장 심하게 줄었다. 그러나 가장 많은 개체수가 줄어든 것은 선택적 벌목과 사냥이 벌어지는 원시림 내부라고 연구자들은 지적했다.
 
u3.jpg» 새끼를 데리고 있는 오랑우탄 암컷. 서식지 파괴 못지않게 밀렵과 사냥이 주요 감소요인으로 밝혀졌다. 마르크 안크레나스 제공.
 
주 저자인 마리아 보익트 막스 플랑크 연구소 연구자는 “걱정스러운 것은 가장 많은 수의 오랑우탄이 사라진 것은 남아있는 숲에서였다. 이것은 사냥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이 학술지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예를 들어, 연구자들이 오랑우탄의 서식밀도가 가장 높은 칼리만탄 지역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연평균 2256마리가 사냥 또는 사람과의 충돌로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랑우탄의 미래와 관련해 우려스러운 것은 남아있는 64개 고립 집단 가운데 38개만 개체수가 100마리를 넘는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의 개체수를 갖추지 못한 오랑우탄 집단은 장기적으로 근친교배와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능력 부족으로 멸종할 가능성이 크다.
 
연구자들은 장차 35년 동안 현재의 오랑우탄 개체수 가운데 4만5300마리가 추가로 사라질 것으로 예측했는데, 이는 숲 면적의 감소만 고려한 것이어서 감소추세는 이보다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u4.jpg» 보르네오 섬의 오랑우탄 서식밀도 변화. 감소 추세는 2050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예측됐다. 마리아 보익트 외(2018)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오랑우탄의 생존을 위해서는 벌목과 팜유 회사 등과의 파트너십과 대중의 인식을 높일 교육이 시급하다고 연구자들은 지적했다. 연구에 참여한 세르저 비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생물학자는 “오랑우탄은 유연해서 플랜테이션, 벌채된 숲, 조각난 숲에서도 어느 정도 살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죽이지 않을 때만 그렇다”며 “숲을 보전하는 것에 나아가 대중의 인식과 교육, 규제 강화, 사람들이 왜 오랑우탄을 죽이는지에 관한 연구 등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u5.jpg» 팜유 농장과 벌목으로 조각나는 보르네오 열대림. 만일 사냥을 막을 수 있다면 오랑우탄은 이런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 마르크 안크레나스 제공.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팜유 생산국으로 오랑우탄 서식지가 대규모 팜유 농장으로 바뀌고 있다. 여기서 생산된 팜유는 가공식품과 화장품 등의 원료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과 유럽 등에 수출되고 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팜유 농장 개간과 밀렵 등에 의해 보르네오 오랑우탄의 개체수가 급감하자 2016년 이 종을 멸종이 가장 임박한 ‘위급 종’으로 상향 조정한 바 있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Voigt et al., Global Demand for Natural Resources Eliminated More Than 100,000 Bornean Orangutans, Current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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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이스라엘이 또 공격하면 놀랄 만한 반격 단행

시리아, 이스라엘이 또 공격하면 놀랄 만한 반격 단행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8/02/17 [01:5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시리아의 대공미사일에 격추된 이스라엘 F-16전투기 잔해  

 

14일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시리아 정부는 13일(현지시간) 이스라엘이 또 시리아를 공습하면 놀랄 만한 반격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이만 수산 시리아 외무차관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시리아를 공격하면 언제든 더 많은 놀라움에 처하게 될 것"이라며 "그들은 시리아가 수년간 전쟁에 노출된 탓에 공격에 대응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는 기자회견 내용을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이 보도했다. 

 

이스라엘군 주장에 따르면 지난 10일 시리아에서 자국 영토로 날려보낸 이란의 정찰드론을 요격하고 그 드론 발진 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시리아 영공에 들어갔다가 대공포를 얻어맞고 격추되었다. 

시리아는 이에 대해 드론으로 이스라엘 영공을 침범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하고 자국 영토를 공격하는 이스라엘 전투기들을 향해 방공체계를 가동하여 최소한 한 대 이상의 F-16전투기를 대공미사일로 격추시켰다는 사실은 확인해주었다. 중동과 유럽의 언론들은 그 과정에 1명의 이스라엘 조종사가 중태에 빠졌다는 소리가 들린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은 F-16 자국 전투기 격추에 대한 보복으로 즉각 시리아의 4곳의 12개 목표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시리아인 6명을 죽였다고 밝혔는데 시리아에서는 이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현재 이스라엘은 시리아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 경고를 내놓은 상태이다. 

 

▲ 2015년부터 실전배치에 들어가는 이란의 s-300급 지대공미사일, 북의 기술로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미사일이 시리아 등에 실전배치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자주시보

 

그에 대해 13일 시리아 외무차관이 그런 공격을 가해올 경우 놀랄만한 반격을 가하겠다고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당당히 선언한 것이다. 뭔가 이스라엘에 치명상을 가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암시가 아닐 수 없다.

 

주목할 점은 이런 시리아의 초강경 대응 방침 천명 이후 이스라엘이 매우 조용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란과 시리아에서 이스라엘로 날려보낸 드론을 요격했다고 하면서도 그 잔해도 공개하지 않고 있어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 최고속도 마하 2.05의  F-16전투기 

 

본지에서는 F-16전투기가 격추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함부로 시리아를 공격하지 못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주력 전투기로 이용하고 있는 위력적인 F-16전투기를 한 대 이상 떨어뜨릴 수 있는 무기는 성능이 좋은 대공미사일뿐이다. F-16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전투기이며 지속적으로 성능을 개량하여 지금도 생산 판매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 전투기로 쉽게 음속을 넘나들며 대공포 사거리 밖에서 스마트 폭탄으로 목표물을 1미터 오차 안에 초정밀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대공미사일을 가지고 있다면 이스라엘의 공중우세는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한다.

 

▲ 레바논 헤즈볼라 지하 미사일 격납고에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탄도미사일이 종류별로 차량에 탑재되어 보관되고 있다. 헤즈볼라는 최근 이 미사일을 시리아로 가지고 가 알누스라, IS 등 반군들 기지를 타격하는데 사용한 바 있다. 예멘 후티 반군도 이런 식으로 미사일을 보관하고 있는 것 같다. 헤즈볼라가 이 정도면 이 미사일을 기술을 개발하여 이란 등에 제공한 북은 어떻게 준비해두고 있을 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자주시보

 

▲ ss-21토치카 미사일을 발사하는 헤즈볼라, 나토명 스캐럽(스크래브)이라는 단거리 탄도 미사일로 한 발에 축구장 몇 배 면적이 초토화되는 위력적인 미사일이다. 고체연료라 신속한 발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요격도 쉽지 않다. 사진은 그 미사일을 지금 시리아의 정부군을 돕는 헤즈볼가 발사하는 모습이다. 레바논의 반미 민병조직 헤즈볼라는 여느 정규군 못지 않은 것 같다.     ©자주시보

 

시리아가 성능좋은 대공미사일을 수없이 보유하고 있다면 이스라엘은 공중폭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로켓탄과 미사일을 주고 받는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데 시리아에는 요격회피능력이 탁월한 여러종류의 탄도미사일을 계열별로 수없이 많이 가지고 있다. 시리아를 돕는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보유한 탄도미사일만 해도 이스라엘 대도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는다.

 

이제 미사일이 발전한 현대전에서는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다. 평화공존만이 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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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영 주필 비리 유죄’ … 조선일보는 ‘침묵 또 침묵’

한겨레만 지면 통해 “조선일보의 깊은 자성이 필요하다”… 검찰, 집행유예 선고에 항소장 제출

김도연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  2018년 02월 16일 금요일

 

수천만 원대 금품을 받고, 기사 청탁 대가로 골프 접대 등 재산상 이익을 지속적으로 취했던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이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조선일보는 침묵 중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김태업 부장판사)는 지난 13일 배임수재죄 및 변호사법 위반을 이유로 송 전 주필에게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47만 원을 선고했다.  

 

▲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13일 오후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오른쪽)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송 전 주필은 미디어오늘 기자의 계속된 질문에 침묵한 채 법정을 떠났다. 사진=이치열 기자
▲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13일 오후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오른쪽)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송 전 주필은 미디어오늘 기자의 계속된 질문에 침묵한 채 법정을 떠났다. 사진=이치열 기자
 

재판부는 송 전 주필이 2014년부터 2015년까지 박수환 전 뉴스커뮤니케이션즈 대표(뉴스컴·60·구속기소)로부터 기사 청탁을 대가로 골프 접대 등 재산상 이익을 취했고, 대우조선해양 사장 연임을 청와대에 청탁·알선하고 자신의 처조카를 대우조선에 부당하게 입사시켰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했다.

 

비록 실형은 피했지만 유력 언론사 최고위 간부가 기사 청탁을 받고 재산상 이득을 취해 징역형을 받은 것은 이례적이다. 재판부는 판결을 내리며 “우리 언론 전체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현저히 손상됐다”고 지적했다. 언론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송 전 주필에 대한 징역형 선고 소식은 신문과 방송 등에선 다뤄지지 않고 있다. 신문 언론 가운데 한겨레만 14·15일치 지면에서 다뤘을 뿐이다.

 

한겨레는 15일자 사설(“‘송희영 전 주필 유죄’가 언론계에 울리는 경종”)에서 “유력 언론사의 최고위 간부가 기사 청탁을 받고 금품을 챙긴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며 고 꼬집었다.  

한겨레는 송 전 주필의 인사 청탁에 대해 “언론인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저버린 행위이자 주필이라는 지위를 사적 이익을 위해 남용한 사례”라며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언론계 전체가 이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사회적 공기라는 언론 역할에서 벗어난 적은 없는지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2016년 9월2일자 조선일보 사보. 송희영 전 주필의 비리 의혹이 불거지자 방상훈 사장은 “조선일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그 역시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 2016년 9월2일자 조선일보 사보. 송희영 전 주필의 비리 의혹이 불거지자 방상훈 사장은 “조선일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그 역시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반면, 조선일보는 조용하다. 관련 보도 하나 없을 뿐더러 내부에서도 특별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은 이 사건이 불거진 직후인 2016년 9월2일자 사보에 “그동안 불거진 의혹에 대해서는 당국에서 엄정하게 수사해주길 바란다”며 “조선일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그 역시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 사건으로 “조선일보의 취재, 보도, 평론, 편집 등 업무의 공정성, 청렴성, 객관성 등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됐다”고도 밝혔는데 1심 판단이 나온 만큼 조선일보 차원의 입장이 필요해 보인다. 의혹 제기 직후 송 전 주필은 조선일보를 퇴사했지만 그는 조선일보 영향력’을 활용해 재직 시절 자기 사익을 부정하게 취했다.  

 

한편, 선고 직후인 지난 14일 검찰은 재판부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송 전 주필도 13일 미디어오늘에 “항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 ‘언론 비리 종합세트’ 송희영, 청와대 수석도 ‘오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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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배 선생 시절, 한글학회 회칙 너무도 민주적”

 박용규, 한글학회 회칙 개정 요구 1인시위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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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16  19:4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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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규 한글학회 연구위원이 한글회관 앞에서 지난 5일부터 '한글학회 회칙 개정안 공개토론회 개최'를 촉구하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최현배 선생이 바로 우리 학회를 1940~60년대 계속 지켜왔다. 최현배 선생 시절에는 한글학회 회칙이 너무도 민주적이었다.”

한글학회가 있는 서울 새문안로 한글회관 앞에서 지난 5일부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박용규 한글학회 연구위원은 “우리 민족학회인 한글학회가 더 발전하려면 한글학회 회칙 내용이 너무도 비민주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고쳐야만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첫째, 정회원이 임원 선출권을 가졌다. 지금은 없다. 두 번째로 정회원이 정기총회에서 회칙개정을 발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없어졌다. 세 번째는 한글학회 정회원이 되는 자격을 대단히 확대시켰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말을 연구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보급하고 실천하는 사람도 한글학회 정회원이 됐다.” 지금 회칙에는 국어학 논문을 발표한 사람만 정회원이 될 수 있다.

한글학회도 문제점을 인식, ‘한글학회 회칙개정위원회’를 구성해 지난해 12월 7일 회칙 개정안을 마련했다. 이어 올해 1월 23일 ‘한글학회 개혁위원회’가 구성돼 회칙개정위의 ‘한글학회 회칙개정안’ 3월 총회 통과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관성의 벽은 두터웠다. “이사회에서 낸 부대의견에는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개혁위원회) 회칙개정안 반대 부대의견”이고, “개혁위원회 세 사람이 2월 1일 한글학회 권재일 회장을 면담”했지만 요지부동임을 확인한 것이다.

추석을 앞둔 14일 오전 10시 한글학회 앞에서 1인시위 중인 박용규 한글학회 개혁위원장은 “이렇게 회원 간에 찬반 의견이 갈리고 있으니까 정식으로 회칙개정안 공개토론회를 열어달라”는 것이 요구사항이라며, 3월 24일 정기총회 때까지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1인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언제든지 공개토론회를 열어서 충분하게 의견을 나눠서, 거기서 회원 상호간에 합의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다시 최종안을 도출해 내서 3월 24일에는 전회원이 정기총회 때 최종 확정된 한글학회 회칙개정안을 상정해서 박수치면서 통과시키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느냐”는 것.

한글학회의 전신은 조선어학회는 일제시기에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발간(1936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1940년) 등을 완수했고, 1942년 16만 어휘를 수록한 ‘조선말 큰사전’을 완성, 발간하려다 일제의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일제의 최후의 발악은 1942년(임오년) 만주에서 국교(國敎)인 대종교 지도부를 체포한 ‘임오 교변(敎變)’과 국내에서 국어(國語)단체인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나타났다. 안희제 등 대종교 지도부 10명이 순교하고 윤세복 등은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으며, 조선어학회 이윤재, 한징이 옥사하고 이극로, 최현배 등이 해방후 감옥에서 풀려났다.

박용규 연구위원은 “분단이 72년인데 분단이 안 된 게 있다”며 “우리 남북의 겨레들이 똑같은 말과 글을 쓰고 있어서 말글은 분단이 안 됐다”고 짚고 “말글 연구를 더 힘차게 하고 남북이 서로 교류협력하고 화해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평소의 소신을 펼쳤다.

또한 “영어가 범람해서는 자주국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 이런 일들을 우리 민족학회인 한글학회라든지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국어운동 단체에서 활발하게 대처해야 한다”면서 “말글, 언어도 사실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이고 인권”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14일 오전 10시 한글학회 앞 1인시위 중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정식으로 회칙개정안 공개토론회를 열어달라”

   
▲ 한글회관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박용규 한글학회 연구위원.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자신을 소개해 달라.

■ 박용규 교수 :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박용규다. 한글학회 연구위원이기도 하다.

□ 언제부터 1인시위를 시작했고, 언제까지 할 작정인가?

■ 지난 2월 5일부터 시작했다. 오는 3월 24일 한글학회 정기총회 전까지는 계속할 예정이다. 1인시위 시간대는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다.

□ 1인시위는 혼자서 하나 여러 명이 돌아가며 하나?

■ 아직까지는 혼자하고 있다. 내가 한글학회 개혁위원회 운영위원장이다. 우리 민족학회인 한글학회가 더 발전하려면 한글학회 회칙 내용이 너무도 비민주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고쳐야만 한다.

□ 한글학회 개혁위원회는 언제 어떤 취지로 발족했나?

■ 지난 1월 23일 개혁위원회가 발족됐다. 개혁위원회가 등장한 배경은 한글학회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다. 그러려면 현행 회칙을 가지고서는 발전할 수 없다. 그래서 작년에 이미 한글학회 회칙개정위원회가 출범이 돼서 12월 7일 개정안을 만들어냈다. 이 개정안이 통과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개혁위원회가 출범했다.

□ 그러면 회칙 개정안은 3월 정기총회에서 통과되나?

■ 3월 24일 정기총회에서 하게 된다. 그런데 회칙 개정안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의견이 지금 갈리고 있다. 그래서 개혁위원회 세 사람이 2월 1일 한글학회 권재일 회장을 면담했다.

우리가 회칙개정안 원안을 그대로 상정해주고, 다른 이사들의 의견은 첨부돼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렇게 회원 간에 찬반 의견이 갈리고 있으니까 정식으로 회칙개정안 공개토론회를 열어달라”고 건의를 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2월 2일에 답변이 왔다. 권재일 회장은 공개토론회를 거부했다.

우리 학회가 학술단체고 또 우리 학회는 11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하에 강당도 있다. 그래서 언제든지 공개토론회를 열어서 충분하게 의견을 나눠서, 거기서 회원 상호간에 합의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다시 최종안을 도출해 내서 3월 24일에는 전회원이 정기총회 때 최종 확정된 한글학회 회칙개정안을 상정해서 박수치면서 통과시키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생각해서 나는 공개토론회를 주장했고, 또 당연히 학회는 학술단체이기 때문에 열어야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한글학회의 현재 11명의 이사는 전부 대학의 현직교수들, 제 말로 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다. 학자들이 이런 토론회를 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조선어학회는 3가지의 큰 업적을 남겼다”

   
▲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의 1935년 현충사 방문 기념 사진.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한글학회’ 하면 일제시대인 1942년 임오년 조선어학회 탄압사건이 떠오르는데, 그 역사적 맥을 잇고 있다고 봐도 되나?

■ 그렇다. 한글학회는 1949년에 전신인 조선어학회가 한글학회로 이름만 바뀌었다. 한글학회 역사를 간단히 말하면, 1908년에 주시경 선생이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었다.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그의 제자들이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를 발족했다. 이 조선어연구회의 이름이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개명이 됐다.

조선어학회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 조선어학회가 왜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결국은 처벌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됐느냐? 그것은 바로 일제가 우리 민족을 영구히 말살하기 위해서 우리 말글 말살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선어학회가 대항을 했다.

조선어학회는 3가지의 큰 업적을 남겼다. 첫째,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1933년에 제정했다. 두 번째는 1936년에 표준말을 사정해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펴냈다. ‘표준말 사정’이란 표준말을 뽑아서 제정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투리가 너무 많아지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또 하나의 큰 업적은 나라 없는 시절, 1940년에 외래어 표기법도 통일안을 냈다.

더 중요한 것은 1942년에는 16만 어휘를 뜻풀이하는 ‘조선말 큰사전’을 완성했다. 세종대왕께서 우리 민족의 문자 한글을 만들었고, 그 이후에 우리 민족이 우리말을 쓰면서 어휘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다. 그런데 우리말 사전은 없었다. 조선어학회에서는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해냈다. 이 사전이 발간되려 하자 일제는 굉장히 당혹했다.

조선어학회의 3가지 업적과 ‘조선말 큰사전’의 편찬을 막아야겠다. 그래서 일제가 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키게 된 배경은 조선어학회가 단순한 국어운동 단체가 아니고 언어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가 이를 간파해서 탄압한 것이다.

그래서 두 분이 옥사를 했고 간사장이었던 이극로 선생은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래서 함흥형무소에서 45년 8월 17일 들것에 실려서 풀려났다.

“최현배 선생 시절에는 한글학회 회칙이 너무도 민주적이었다”​

   
▲ 박용규 연구위원은 현행 한글학회 회칙을 ‘비민주의 극치’라고 비판하고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숭고한 역사를 가졌는데, 정작 지금에 와서 한글학회가 내홍을 겪고 있다니 안타깝다.

■ 최현배 선생이 바로 우리 학회를 1940~60년대 계속 지켜왔다. 최현배 선생 시절에는 한글학회 회칙이 너무도 민주적이었다. 첫째, 정회원이 임원 선출권을 가졌다. 지금은 없다. 두 번째로 정회원이 정기총회에서 회칙개정을 발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없어졌다. 세 번째는 한글학회 정회원이 되는 자격을 대단히 확대시켰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말을 연구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보급하고 실천하는 사람도 한글학회 정회원이 됐다.

그런데 2006년에 이 한글학회 회칙이 개악이 됐다. 국어학 논문을 발표한 사람만 정회원이 되게 축소를 시켰다. 그리고 2011년에는 가장 비민주적인 조항이 들어갔다. 한글학회 회칙개정 발의는 이사회만 할 수 있다고 정했다. 이사와 평의원, 정회원이 똑같이 회비를 내는데 왜 이사회만 회칙개정 발의권을 가질 수 있느냐. 이건 대단히 비민주적이다.

그래서 이번 회칙 개정안에 20명 이상의 정회원이면 언제든지 회칙개정을 발의할 수 있도록 했고, 또 임원 선출권도 정회원이 갖도록 했다. 예를 들면 현재 있는 평의원들을 이름을 운영위원으로 바꾸었는데, 정회원이 운영위원을 선출할 수 있고, 회장 부회장도 정기총회에서 정회원이 선출하도록 했다. 그리고 정회원 자격도 원래대로 최현배 시대 회칙으로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회에서 낸 부대의견에는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회칙개정안 반대 부대의견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 이렇게 찬반의견이 갈릴 때는 학회이기 때문에 토론회를 열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유일하게도 분단이 안 된 게 있다”

   
▲ 2004년부터 남북이 합의해 시작된 <겨레말 큰사전> 공동편찬 사업이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사실상 중단됐다. [자료사진 -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회]

□ 남북 간 ‘겨레말 큰사전’ 편찬사업을 추진해오다 사실상 중단된 것으로 안다. 우리말과 글을 중심으로 한 남북교류나 협력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소개해 달라.

■ 우리 민족이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이미 노무현 정권에서 진행됐다. 그것이 바로 '겨레말 큰사전 편찬사업'이다. 그런데 이 민족적인 사업이 결국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의해서 대단히 위축됐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렇게 이야기한다. 올해가 민족이 분단된 지 72년이 된다. 우리는 광복 72주년이라고 하는데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분단 72년이다. 분단이 72년인데 분단이 안 된 게 있다.

45년은 국토가 분단되고, 48년에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돼 국가가 분단됐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53년 이후에는 민족이 분단됐다. 그런데 유일하게도 분단이 안 된 게 있다. 그것은 우리 남북의 겨레들이 똑같은 말과 글을 쓰고 있어서 말글은 분단이 안 됐다. 그래서 말글 연구를 더 힘차게 하고 남북이 서로 교류협력하고 화해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지름길이다. 나는 평소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영어가 범람해서는 자주국이라고 볼 수 없다”

   
▲ 중국 연변자치주 연길 시내 간판들. 한글을 위에, 중국어 간자체를 아래에 적는 방식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우리사회가 서구화되면서 한글 사용이 많이 왜곡되거나 위축돼 있는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의 풍조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 그렇다. 과거에는 한자, 한자말이 우리말을 대단히 괴롭혔다. 그런데 20세기말, 21세기에 들어와서 한자는 많이 사라졌다. 그런데 정말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바로 우리말보다는 영어가 범람하고 있다. 길거리 간판, 방송 용어를 보라. 전부 영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영어와 영문에 의해서 우리말과 한글은 죽어버릴 수밖에 없다. 하나만 들어보겠다. 지금 아나운서들이 ‘씽크홀(sinkhole)’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내가 그래서 어느 글에 이것은 ‘땅꺼짐 현상’이라고 이야기하면 된다고 했다.

영어가 범람해서는 자주국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 이런 일들을 우리 민족학회인 한글학회라든지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국어운동 단체에서 활발하게 대처해야 한다.

내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연변에 있는 어느 교수에게 연변의 길거리 간판을 문의하자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왔다. 연변의 간판은 제일 윗부분이 한글로 씌여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중국어로 씌여 있다. 한자 간자체다. 조선족자치주이기 때문에 자치주에서 어문규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 연변이 오히려 더 잘하고 있구나’ 놀랐다.

우리도 길거리 간판은 사기업체까지도 반드시 한글로 쓰도록 해야 한다. 사기업체도 전부 우리 한반도 내에서 기업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문으로 그냥 ‘POSCO’만 쓰면 안 되고 ‘포항제철’ 이렇게 쓰고 그 다음에 영문으로 ‘POSCO’라고 쓰면 된다. 이건 최소한의 요구다.

우리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 아무런 표기가 없다. 예를 들면 그냥 기호로만 남자표시, 여자표시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MAN’ ‘WOMAN’으로 돼 있다. 이래서는 안 되고 그냥 ‘남자’ ‘여자’, 서비스 차원에서 ‘MAN’ ‘WOMAN’ 이렇게 밑으로 표기해줘야 된다고 본다. 그래서 말글, 언어도 사실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이고 인권이라고 볼 수 있다.

​(수정,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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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시아계 노벨상 작가, 공통점은 '이것'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과 모옌의 <열세 걸음>

18.02.16 20:20l최종 업데이트 18.02.16 20:20l

 

2017년도 노벨 문학상은 전년의 파격(밥 딜런 수상)을 깨고 다시 일반적인 '작가'에게로 돌아갔다.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인물로, 어린 시절 영국으로 건너가 쭉 그곳에서 살아가며 작품 활동을 전개해 온 일본계 영국인이다.

그의 작품은 살아온 공간에 맞추어 자연스레 영어로 발표되었다. 하지만 그가 순수한 일본 혈통이라는 점과 작품 내에 일본과 관련된 내용들이 종종 배어있다는 점 등으로 인하여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 소식은 일본 본토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는 1994년 오예 겐자부로가 문학상을 거머쥔 뒤 13년 만에 나온 일본계 문학상 수상자였기 때문이다.

한편 가즈오 이시구로는 2010년대 들어 노벨 문학상을 거머쥔 두 번째 아시아계이기도 하다. 그 이전의 수상자는 2012년 수상의 영광을 거머쥔 중국인 소설가 모옌이다. 모옌은 '관모예'라는 본명을 가진 중국의 원로 작가로서, 이미 중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중국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붉은 수수밭>을 비롯해 여러 작품이 미디어화 되고 국제적 찬사를 받기도 했다.

 

오래간만에 나온 아시아계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이 두 사람의 작품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같은 아시아계이지만 국적은 물론이고 삶의 경로와 작품 세계, 문체까지 매우 다르기 때문에 대표작의 비교를 통해 두 작가 각각의 특징과 더불어 아시아 문학의 현황에 대해서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 전쟁 세대의 '반성'을 촉구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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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에 수상의 영광을 안겨다준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소설이다. 국내에서는 '현대의 고전'을 출판한다는 목적 아래에 간행되고 있는 민음사의 '모던 클래식' 세트의 일환으로 근래에 새로 간행된 바 있다.

이 책의 원본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1989년 초본이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출판 첫 해에 부커상을 수상하였고, 4년 뒤에는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되기까지 했을 만큼 이 작품에 대한 세간의 주목은 상당했다.

그러나 현대의, 그것도 한국의 독자가 읽기에 <남아 있는 나날>의 내용은 그 명성에 비해 시시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학은 자극적인 소재나 서사구조를 채택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도리어 그 정반대의 길, 담담하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서술자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 역시 초반부에는 빠르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영국의 한 고급 저택에서 살아온 노년의 '집사'가 들려주는 '품위'나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따위의 논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책 읽기에 익숙지 않은 이들이라면 낯선 소재와 지리한 전개로 지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가 드러나며 <남아 있는 나날>이 주목받은 이유를 독자들은 깨닫게 된다. 자신이 평생 존경하며 섬겨온 주인이, 자신의 삶의 자부심의 주축이 되어온 바로 그 인물이 실은 한낱 무능하게 이용된 '나치 부역자'였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과정, 그것이 이 책의 주인공이 서서히 깨닫게 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인식의 과정이 이 작품의 소재이다.

작가는 <남아 있는 나날>을 통해서 30년대 영국의 역사 속 어두운 면을 끌어내고, 동시에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노년의 주인공)에서라도 그것을 바로 인식하고 '남아 있는 나날'에서는 새롭게 바뀐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남아 있는 나날>을 감성적인 필체로 그려낸 역사소설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이 작품 뿐 아니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보다 확실하게 동일한 소재를 다룬 바 있다. 이 작품은 제국주의 일본에 부역했던 화가의 반성적 회고담을 다룬다. 이처럼 그의 글들은 늘 섬세하고 은은하나, 그것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그 어느 작가의 것보다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과제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모옌, 환상을 통해 억압된 현실을 꼬집다 
 

 모옌 <열세 걸음>
▲  모옌 <열세 걸음>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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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모옌의 경우는 어떨까. <열세 걸음>을 그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사실 이시구로보다 모옌의 작품은 국내에 훨씬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붉은 수수밭>을 비롯해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문학동네,2009), <풀 먹는 가족>(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열세 걸음>을 비롯한 이들 작품은 모두 동일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바로 환상적 형식이다. 앞서 말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서술 방식이 여러 작가들에게서 흔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모옌의 서술 방식은 보다 파격적이다. '중국의 마르케스'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그는 중국의 민담과 설화를 끌어다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그러하듯,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옌 역시 환상적 이야기들을 현실 곳곳에 삽입해 둘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기법을 즐겨 사용한다. 여기에 더해 <열세 걸음>에서 독자들은 초반부에 서술자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명시되지 않은 채 서로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으로 이야기가 서술되기 때문이다. 서술자의 지위 역시 비전통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 기법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즈오 이시구로와 마찬가지로 모옌 역시 어디까지나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문학을 보여준다. <열세 걸음>의 경우, 70~80년대 중국 사회가 마주하고 있던 여러가지 모순적인 상황들과 '대(大)를 위해 소(小)'가 희생되어도 좋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

작품의 후반부, 주인공인 물리 교사 장즈추가 죽은 상황에서 그를 추모하는 학교 연설이 이루어진다. 이때 교장은 선생의 죽음을 계기삼아 더욱 공부에 매진할 것만을 강조한다. 얼마나 '개인'이 지니는 가치가 사라진 사회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교장이 선창했다. "대학 합격!" 
"대-학-합-격!" 
교장이 선창했다. "대입 실패는 살아도 죽느니만 못한 것!"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 지나온 역사 속 잘못된 유산들을 꼬집는다면, 모옌은 지금 '당장'의 중국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아시아계 작가들의 위상과 미래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발표하는 노벨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발표하는 노벨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 노벨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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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아시아계 인물들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1세기 들어 아시아인으로서 문학상을 받은 인물은 앞의 두 사람과 더불어 총 네 명 뿐이다.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은 유럽-아시아 사이에서 정체성의 논란이 있는 '터키' 소속의 오르한 파묵이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본인의 국적을 버리면서 조국을 강하게 성토하며 귀화, 서구권에 편입된 반체제 중국인 작가 '가오싱젠'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실국적이 영국이라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아시아 작가들의 국제무대에서의 주목도는 여전히 전통 서구권 뿐 아니라 남미 및 동유럽계 문학에 비해서도 저조한 편인 셈이다. 이미 아시아가 국제무대에서 정치경제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찮아진 지 오래인 상황에서, 이러한 문화적 약세는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문학 역시 중일 양국의 문학이 그러한 상황 속에서 훨씬 더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개선해 나갈 수 있을까. 두 노벨상 작가를 비교해보며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결국 어떠한 방식으로 보편적 감성을 그려내는지가 해당 작가 및 문단의 역량을 좌우한다는 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와 모옌의 서술 방식은 매우 상이하고 소재 역시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면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람이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문제 - 2차 세계대전의 정신적 극복, 전체주의(또는 공산주의) 사회의 내재적 모순 - 를 뛰어난 표현력으로 소설화 해냈다는 점이다.

사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소설이나 시가 아시아권에서 정착한 지는 서구에 비해 오래되지 않았다. 또한 아시아의 선진 국가들조차도 이미 국제무대의 주류인 서구권에서는 한 세대 전 지나간 이데올로기 문학이나 민족 문학에 불과 최근까지도 강하게 빠져있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국제적 보편성이나 뛰어난 표현력 등이 확보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갈수록 이러한 장애 요소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다양한 세계 문학들이 전세계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부디 멀지 않은 시일에 새로운 아시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새롭게 탄생해 아시아 문학의 더욱 발전된,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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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도 펼쳐진 남북해외 공동응원전

14일 여자하키 단일팀-일본 전 스크린응원 '민족화해한마당'
김연희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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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15  12:5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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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서울본부와 서대문추진위는 14일 서대문구청 대강당에서 '민족화해한마당'을 열어 여자 아이스하키 한-일전 스크린응원을 펼쳤다. [사진 - 통일뉴스 김연희 통신원]

코리아팀과 일본의 여자 아이스하키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시민들과 해외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서울본부’(이하 615서울본부)와 ‘평화와 통일로 가는 평창올림픽 서대문구추진위원회의’(이하 서대문추진위)의 주관으로 <민족화해한마당> 서울행사가 14일 오후 4시 서대문구청 대강당에서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는 평창 동계올림픽 계기로 남쪽을 방문하게 된 53명(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46명, 조선대학생 3명, 미주1명, 유럽3명)의 해외동포와 서울시민 250명이 함께 했고, 강릉에 이어 올림픽 기간 중 두 번째로 열리는 행사다.

   
▲  경기 중간 쉬는 시간에는 후쿠오카조선가무단에서 온 김묘수 단장과 김윤기 가수의 장고춤과 노래 공연이 진행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연희 통신원]
   
▲ 무대와 객석은 금새 하나가 됐다. [사진제공 - 6.15서울본부]

이번 행사는 서대문추진위 대표이자 민중당 서대문구위원장인 박희진씨의 사회로 여자아이스하키 한국-일본 경기 응원과 주최 측에서 마련한 다양한 문화행사들로 진행되었다.

노래패 ‘희망새’와 대학생노래패연합 대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공연을 선보였으며, 경기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공동응원을 직접 배워보는 시간도 가졌다. 경기 중간 쉬는 시간에는 후쿠오카조선가무단에서 온 김묘수 단장과 김윤기 가수의 장고춤과 노래 공연도 함께 진행되었다.

행사에 참가해 총련응원단을 대표해 무대에 오른 재일조선청년상공회 배창렬 중앙간사장은 “재일동포 청년들은 일제식민지 통치의 희생자이며, 분단의 고통과 일본의 극심한 차별 속에서 오직 통일을 위한 한길을 걸어온 동포들의 애국애족의 넋을 이어나가는 민족의 참된 아들딸이다”면서 겨레의 숙원인 자주통일, 평화번영을 앞당기기 위한 거족적인 운동에 힘차게 떨쳐 나서겠다”고 밝혔다.

   
▲ 민족화해한마당에는 일본 49명, 미주 1명, 유럽 3명의 해외동포들이 서울시민과 함께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연희 통신원]
   
▲ 티켓을 구하지 못해 현지 응원은 무산됐지만 한마당의 열기는 높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연희 통신원]

이날 응원에 참가한 서울시민들은 박수와 함께 “우리는 하나다” “이겨라 코리아” “통일조국”을 외치며 코리아팀을 응원했다. 0대 2로 코리아팀이 지고 있던 중 2피리어드에 30번 희수 그리핀 선수의 단일팀 첫 골이 터지는 순간 관람하고 있던 300명의 사람들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한반도기를 흔들며 환호하며 힘차게 경기응원을 이어나갔다.

비록 스크린 응원이지만 현장에서와 같이 파도타기도 하며 남북해외동포들의 마음이 평창까지 전해지길 바라며 마지막까지 응원을 이어나갔다.

스크린응원의 단장을 맡은 서울겨레하나 강혜진 홍보팀장은 “첫 골을 넣는 장면을 보면서, 아이스하키의 새로운 역사를 남북단일팀이 함께 썼다는 것에 감동적이었으며, 남북해외가 함께 하는 이런 경기에 응원단장을 맡아 기쁘다”는 소감을 전했다.

   
▲ 총련응원단을 대표해 재일조선청년상공회 배창렬 중앙간사장이 무대에 올라 인사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연희 통신원]

이번 재일동포응원단은 1,2,3차로 나누어 남측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 행사에는 2차 참가자들이 함께 하게 되었다. 2차 참가자들은 청년, 학생 2,3세 동포들이 90%를 이루고 있었다.

그 중 일본 조선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양순 학생은 “남쪽겨레들을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며 “이제라도 통일이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다. 아울러 “우리의 하나 된 힘이 있으면 꼭 통일을 안아올 수 있다고 확신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행사를 주관한 615서울본부는 이후 남북해외공동응원 계획과 관련해 단일팀 순위결정전이 열릴 18, 20일에 평창에서 직접 서울시민들과 함께 남북공동응원을 추진하기 위해 현장티켓구하기에 매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 민족화해한마당이 진행된 서대문구청 인근에는 한반도기와 홍보물들이 내걸렸다. [사진제공 - 6.15서울본부]
   
▲ 해외 응원단 환영 만찬이 인근 식당에서 이어졌다. [사진제공 - 6.15서울본부]
   
▲ 환영 만찬장에서도 '통일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사진제공 - 6.15서울본부]


​(수정,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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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 힘 실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2/16 11:01
  • 수정일
    2018/02/16 11:0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르몽드,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 힘 실려 

Posted by: Daniel Jeon in Headline, 국제, 정치 2018/02/16 00:28 0 414 Views 

 

 

-한미관계 훼손 없는 대화 추진 줄타기 곡예 

-미국의 미묘한 입장 변화는 문재인의 승리 

-핵실험 등 과거 민주정부 때와 상황은 달라 

-봄 재개될 한미 군사훈련이 첫 시험대 될 듯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몽드>가 최근 급속하게 진전되고 있는 남북관계에서 드러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을 주목했다. 이는 문 대통령이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한국의 ‘한반도 운전자론’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도쿄에 주재하는 필립 퐁스 특파원은 지난 14일자 인터넷판에 ‘평양과 줄타기 곡예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문 대통령이 « 미국과 관계를 훼손하지 않고 미국이 북한에 대해 벌이고 있는 « 최대 압박 » 전략의 막다른 골목에서 나오는 길을 찾고 있다 »고 보도했다.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특사로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김여정의 방북 초청에 대한 청와대의 확답은 아직 없지만 남북 두 지도자의 만남이 기정사실화된 것으로 보고 미국 역시 변화의 조짐이 감지된다고 적었다. 완강하게 북한의 ‘선 핵포기’를 주장했던 미국이 ‘선 대화’로 방향을 튼다면, 이는 « 문재인의 승리 »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과 일본이 대놓고 반대한 북핮과의 대화를 밀어부친 것은 문 대통령이었고, 결과적으로 안전한 올림픽이라는 숙제를 문 대통령이 « 해냈다 »고 봤다. 또 최근 나타나고 있는 북한의 전향적 태도는 계산된 전략이 분명하지만 문 대통령 역시 « 자신의 계획이 있다 »고 보도했다. 다만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거의 인정되는 현재의 상황은 ‘햇볕정책’을 추진하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와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올림픽이 끝나면 다가올 한미 군사훈련 재개 문제가 문 대통령의 첫 시험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문은 문 대통령이 « 평양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공격적 옵션을 줄이는 정도의 동의를 얻어 »내고, « 북한 지도부에게는 핵과 미사일 실험 유예 발표를 끌어내는 » 방법을 쓸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에게도 그들이 원했던 북한의 양보를 끌어냈다는 인식을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문은 남북관계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한반도의 위기 상황을 바꿔놓았다고 보고 한국이 이 문제에 대한 발언권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역설하는 ‘한반도 운전자론’과도 일맥상통한다. 

 

번역 및 감수 : Sang-Phil JEONG http://www.lemonde.fr/…/dialogue-avec-la-coree-du-nord-le-p…


[저작권자: 뉴스프로, 기사 전문 혹은 부분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https://thenewspro.org/2018/02/16/dialogue-avec-la-coree-du-nord-le-president-sud-coreen-moon-jae-in-joue-les-funambules/

 

Le président sud-coréen Moon Jae-in joue les funambules avec Pyongyang 

평양과 줄타기 곡예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Le chef de l’Etat sud-coréen cherche à sortir de l’impasse à laquelle conduit la stratégie de « pression maximale » exercée sur la Corée du Nord par les Etats-Unis, sans s’en désolidariser. 

한국 대통령이 미국과 관계를 훼손하지 않고 미국이 북한에 대해 벌이고 있는 « 최대 압박 » 전략의 막다른 골목에서 나오는 길을 찾고 있다. 

LE MONDE | 14.02.2018 Par Philippe Pons (Tokyo, correspondant) 

필립 퐁스(도쿄 특파원) 

 

Lorsque le dirigeant nord-coréen Kim Jong-un annonça, dans son message de Nouvel An, qu’il était prêt à participer aux Jeux olympiques (JO) d’hiver de Pyeongchang et à reprendre le dialogue avec la Corée du Sud, les analystes étaient loin de penser que deux mois plus tard la donne dans la péninsule allait profondément changer. Non seulement la République populaire démocratique de Corée (RPDC) participe aux JO mais encore Kim Yo-jong, sœur cadette de Kim Jong-un et influente figure du cercle dirigeant, a transmis au président Moon Jae-in une invitation à se rendre à Pyongyang. Ce dernier n’a pas encore répondu mais le principe de cette visite semble acquis.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신년 연설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및 한국과 대화에 나설 준비가 됐다고 말했을 때 전문가들은 두 달 후 한반도의 상황이 심하게 바뀔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단지 북한 팀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문제가 아니라 김정은의 여동생이자 북한 지도부의 영향력 있는 인사 중 하나인 김여정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평양으로 오라는 초청까지 한 것이다. 초청에 대한 답은 아직 하지 않았지만 거의 성사된 것으로 봐야 한다. 

 

Washington n’a d’abord vu là qu’une offensive de charme de la RPDC destinée à fragiliser l’alliance entre la Corée du Sud et les Etats-Unis. Mais la position américaine semble en train d’évoluer. « Les Etats-Unis portent un jugement positif sur le rapprochement intercoréen et seraient disposés à des pourparlers avec la Corée du Nord », a annoncé, mardi 13 février, le porte-parole du président Moon, Kim Eui-kyeom. Le secrétaire d’Etat américain, Rex Tillerson est plus réservé : il est selon lui « prématuré de parler d’un processus diplomatique ». Mais les lignes bougent. 

 

미국 정부는 우선 한미 공조를 흐트러트리려는 북한의 유화책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이 진전되고 있는 것 같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2월 13일 화요일 « 미국은 남북의 화해에 대해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있고 북한과 대화에도 나설 것 »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조금 더 신중하다. 그는 « 외교적 절차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시기 상조 »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노선은 움직인다. 

 

Des négociations entre la RPDC et les Etats-Unis achoppent jusqu’à présent sur l’exigence de Washington qui veut que Pyongyang renonce à son arme nucléaire avant de commencer des pourparlers. Une condition inacceptable du point de vue nord-coréen. Désormais, les Etats-Unis semblent disposés à des pourparlers préliminaires sans préconditions. S’il est confirmé, l’infléchissement de la position américaine serait une victoire pour M. Moon. 

북미간 협상은 지금까지 북한이 대화에 나서기 전에 핵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국의 완강함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이 선행 조건 없이 사전 교섭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게 확정된다면 미국의 입장 변화는 문재인의 승리가 될 것이다. 

 

Sans se désolidariser de la stratégie de « pression maximale » sur la RPDC des Etats-Unis et de leurs alliés, le président sud-coréen cherche à sortir de l’impasse à laquelle conduit une telle stratégie si elle n’est pas assortie d’un dialogue avec Pyongyang. L’annonce, lundi 12 février, d’une prochaine visite en RPDC du président du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 Thomas Bach, à une date qui reste à fixer, pourrait être une autre brèche dans la politique d’isolement de la RPDC. 

미국과 그의 동맹국의 북한에 대한 « 최대 압박 » 전략을 건드리지 않고, 한국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 전략이 인도하는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나오는 길을 찾고 있다. 지난 2월 12일 발표된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의 방북이 북한에 대한 고립 정책의 또 다른 구멍이 될 것이다. 아직 방북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

[저작권자: 뉴스프로, 기사 전문 혹은 부분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https://thenewspro.org/2018/02/16/dialogue-avec-la-coree-du-nord-le-president-sud-coreen-moon-jae-in-joue-les-funambules/

 

La sécurité des JO d’abord 

무엇보다 올림픽의 안전 

 

La rapidité du rapprochement entre les deux Corées a pris tout le monde de court, à commencer par le président sud-coréen, qui se retrouve dans une position de funambule entre Pyongyang et ses alliés américain et japonais. Au départ, Tokyo et Washington n’ont pas caché leur désapprobation. Si les Etats-Unis semblent nuancer leur position, le Japon reste figé dans son intransigeance. 

한국의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남북 관계 진전의 빠른 속도는 모두의 허를 찔렀고, 북한과 한국의 동맹인 미국,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 곡예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됐다. 초반에는 미국과 일본 정부가 반대의 뜻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이 입장에 변화를 준 것처럼 보인다 해도 일본은 비타협적으로 경직돼 있다. 

 

Que Pyongyang cherche à entamer le « front » constitué par la Corée du Sud, les Etats-Unis et le Japon et à desserrer l’étau des sanctions internationales et que ce rapprochement, apparemment soudain, soit le fruit d’une stratégie calculée ne fait guère de doute. Le régime nord-coréen improvise rarement : il ouvre le dialogue avec Séoul après avoir renforcé sa position par les avancées réalisées en 2017 en matière nucléaire et balistique. Il reste que l’on aurait tort de voir la RPDC en manipulatrice d’une Corée du Sud faisant preuve d’une naïveté irresponsable. Le président Moon a aussi son agenda. 

북한이 얼마나 한미일 « 전선 »에 타격을 입히려 하고 국제 제재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는지, 갑자기 찾아온 이 화해 무드가 계산된 전략의 산물이라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북한 체제는 즉흥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들이 한국과 대화에 나선 것은 2017년 핵과 미사일 실험을 성공하면서 입지를 굳힌 뒤였다. 이젠 북한이 무분별하게 순진한 한국을 가지고 논 것이 아니길 바라는 수 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자신의 계획이 있다. 

 

Il lui fallait d’abord assurer la sécurité des JO en faisant retomber la tension de ces derniers mois. Il a réussi. Au-delà de cette trêve, il entend dégager son pays de la situation déplaisante de cible d’une riposte du Nord à une attaque américaine. Se situant dans la ligne de ses prédécesseurs de centre gauche (Kim Dae-jung et Roh Moo-hyun) au pouvoir entre 1998 et 2008, M. Moon entend tout faire pour que son pays ne soit pas le jouet des grandes puissances – ce qui a été le sort de la Corée avant et après la partition de 1945. Sans remettre en cause l’alliance avec les Etats-Unis, vitale pour la sécurité de son pays, il entend mener une « politique sud-coréenne » vis-à-vis du Nord. 

문 대통령은 지난 몇 달 간의 긴장을 떨어트리면서 무엇보다 올림픽의 안전을 담보해야 했다. 그는 해냈다. 휴전기를 넘어 그는 미국의 공격에 대한 북한의 반격의 대상이 되는 불쾌한 상황에서 벗어나길 원하고 있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집권한 중도좌파 대통령들(김대중과 노무현)의 노선에서 문 대통령은 1945년 분할됐을 때를 전후한 한국의 상황처럼 한국이 강대국들의 장난감이 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려고 한다. 그는 한국의 안전을 위해 필수적인 미국과의 동맹은 그대로 둔 채 « 한국의 대북정책 »을 가져가고자 한다. 

 

La grande différence avec la politique de rapprochement dite du « rayon de soleil » de ses prédécesseurs tient au fait que la RPDC est aujourd’hui, sinon une puissance nucléaire (des doutes subsistent sur la technologie de rentrée dans l’atmosphère de ses missiles), du moins détentrice de capacités nucléaires désormais prises au sérieux. 

전직 대통령들의 화해정책인 « 햇볕정책 » 당시와의 커다란 차이는 북한이 오늘날 핵 보유국(미사일의 대기 진입 기술에 대한 의혹이 있다 하더라도)이라는 점, 적어도 무시할 수 없는 핵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저작권자: 뉴스프로, 기사 전문 혹은 부분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https://thenewspro.org/2018/02/16/dialogue-avec-la-coree-du-nord-le-president-sud-coreen-moon-jae-in-joue-les-funambules/

 

Sursaut nationaliste 

민족주의적 고군분투 

 

La « politique du rayon de soleil » visait à une réconciliation entre les deux Corées par une coopération économique et des échanges de personnes. Aujourd’hui, Séoul ne peut s’en tenir à cette approche compte tenu des avancées nucléaires et balistiques de la RPDC : la détente entre les deux Corées a pour but de faire retomber la tension dans la péninsule mais aussi de permettre d’amorcer une négociation entre Pyongyang et Washington. 

« 햇볕정책 »은 경제 협력과 인적 교류를 통해 남북간의 화해를 추구했다. 북한의 핵 미사일 기술이 너무 앞서서 더 이상 한국에서는 이 같은 접근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남북 간 데탕트는 한반도 내의 긴장을 완화하는 목적이 있기도 하지만 북미 협상의 물꼬를 트게 할 수도 있다. 

 

Un rapprochement intercoréen peut favoriser une retombée de la tension dans la péninsule en rendant difficile, tant que le dialogue est en cours, une opération militaire américaine. Mais il n’est pas en soi un remède car cette tension tient à un facteur qui échappe à Séoul : l’hostilité entre les Etats-Unis et la RPDC.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 나타나게 될 남북관계 개선은 한반도 내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미군의 군사 작전을 어렵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긴장의 원인이 서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북미 간 적대관계에도 있기 때문에 만병통치약은 될 수 없다. 

 

Le premier test de l’habileté du président Moon à naviguer entre l’allié américain et la RPDC sera la reprise, au printemps, des exercices militaires conjoints américano-sud-coréens qui ont été ajournés pendant les JO. Il est peu vraisemblable qu’il puisse reporter à nouveau ces manœuvres mais il pourrait obtenir de Washington d’en réduire le caractère offensif pour ne pas braquer Pyongyang, tout en encourageant les dirigeants nord-coréens à annoncer un moratoire sur les essais nucléaires et balistiques qui pourrait être présenté comme une concession du régime attendue par Washington. 

동맹인 미국과 북한 사이를 오가는 문재인 대통령이 얼마나 능숙한지를 측정하는 첫 시험대는 봄에 있을 한미 군사훈련 재개가 될 것이다. 훈련은 올림픽 기간 동안 연기됐었다. 훈련을 다시 연기하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만 평양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공격적 옵션을 줄이는 정도의 동의는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 지도부에게는 핵과 미사일 실험 유예 발표를 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기다렸던 북한 체제의 양보로 인식될 수 있다. 

 

Le réchauffement des relations intercoréennes modifie profondément la donne de la crise dans la péninsule en faisant intervenir un nouvel élément : un sursaut nationaliste de Séoul. La Corée du Sud estime en effet avoir son mot à dire dans la recherche d’une solution, dont les Etats-Unis et leurs alliés devront tenir compte. 

남북관계 개선은 한국 내 민족주의적 노력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개입하면서 한반도의 위기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한국은 실제로 미국과 그의 동맹국들이 고려해야 할 해결책을 찾는데 있어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번역 저작권자 : 뉴스프로, 번역 기사 전문 혹은 일부를 인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반드시 밝혀 주십시오.]

[저작권자: 뉴스프로, 기사 전문 혹은 부분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https://thenewspro.org/2018/02/16/dialogue-avec-la-coree-du-nord-le-president-sud-coreen-moon-jae-in-joue-les-funambu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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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스트레스에 지친 여성들을 위한 통쾌한 '19금 유머'

[기획-명절에 몰아보기 '딱' 좋은 OOO] 설 연휴에 챙겨볼 만한 힐링 영화 3편

18.02.15 18:52최종업데이트18.02.15 18:52
명절 연휴는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소중한 기간입니다. 하지만 귀성 전쟁과 차례 준비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때이기도 하죠. 가족 간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불화가 있거나, 마음 안 맞는 친척들과 지내는 것이 힘든 사람들에게는 평소보다 조금 더 버거운 기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2018년 설 연휴를 맞아 명절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영화 세 편을 골라봤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니 부담 없이 즐기면서 건강한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끝없는 엄마 노릇에 지쳤다면, <배드 맘스>(2016)

 
 영화 <배드 맘스>의 포스터. '완벽한 엄마'가 되기를 포기한 세 엄마의 도전기. 화장실 코미디가 난무하지만, '엄마'에게 모든 걸 떠맡기는 세태에 대한 비판이 신랄하다.

영화 <배드 맘스>의 포스터. '완벽한 엄마'가 되기를 포기한 세 엄마의 도전기. 화장실 코미디가 난무하지만, '엄마'에게 모든 걸 떠맡기는 세태에 대한 비판이 신랄하다.ⓒ Netflix


에이미(밀라 쿠니스 분)는 완벽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이들의 학교 통학과 특별 활동 수업은 물론 학교 숙제까지 챙겨야 하고,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직장에서는 정직원 못지않은 업무량에 시달리지요. 모든 것이 완전히 꼬인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만난 다른 학부모 칼라(캐서린 한 분), 키키(크리스틴 벨 분)와 함께 '나쁜 엄마'가 되기로 의기투합합니다. 

미국 중산층 여성들이 주인공인 이 영화는 가정의 돌봄 노동 중 많은 몫이 어머니에게 떠넘겨지는 풍조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한창 유행했던 미국식 화장실 코미디가 난무하는 '19금' 작품이지만, 찝찝하기보다는 통쾌함을 선사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아버지는 집안일에 거의 신경도 쓰지 않고, 장성한 자녀들도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공감 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각본을 함께 쓰고 연출까지 같이한 존 루카스와 스콧 무어는 과거 '진상 남자들의 숙취 모험기' <행오버>(2009)의 각본을 쓴 인물들입니다. 슬랩스틱도 마다하지 않고 열정을 불사른 밀라 쿠니스, 캐서린 한, 크리스틴 벨의 연기도 좋습니다. 엔딩 크레디트에 나오는, 주요 배우들이 각자 실제 어머니와 함께한 인터뷰 영상도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배드 맘스>는 지난 2016년에 개봉하여 전 세계적으로 2천만 달러의 제작비를 훨씬 상회하는 1억 8천만 달러의 수입을 올린 바 있습니다. 속편으로 나온 <배드 맘스 크리스마스>(2017)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 전편의 주인공들에게 각자의 어머니들이 찾아오면서 더 큰 곤경에 처하는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두 편 모두 넷플릭스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뜻대로 안 풀려 속상한 청춘이라면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2011) 

 
 영화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의 포스터. 인생이 꼬여만 가던 애니(크리스틴 위그)는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 들러리 준비를 하게 된다.

영화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의 포스터. 인생이 꼬여만 가던 애니(크리스틴 위그)는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 들러리 준비를 하게 된다.ⓒ UPI 코리아


애니(크리스틴 위그 분)는 페이스트리(과자, 빵의 한 종류) 가게를 열었다가 말아먹은 후 여러모로 위기 상황에 몰립니다. 자신을 섹스 파트너로만 생각하는 남자친구나, 도저히 같이 살기 힘든 '비호감' 룸메이트도 문제인데, 유일하게 의지하는 절친 릴리안(마야 루돌프 분)까지 결혼 소식을 전합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릴리안의 결혼식 들러리를 서게 된 애니는, 취향과 성격이 전혀 안 맞는 다른 들러리들과 결혼식을 준비하며 '절친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불태웁니다.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큰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분투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계획하고 기대했던 대로 되는 일은 많지 않고, 생각하지 못한 문제만 늘어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상황이 안 받쳐줘서,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그렇다며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기 쉽습니다. 특히 명절에 오래간만에 만난 친척들이 근황을 물으면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그런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기 시작하면, 곧 모든 걸 남 탓으로 돌리는 게 버릇이 되고 그럴수록 문제는 점점 더 해결하기 어려워집니다. 

무작정 남 탓을 하기 전에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모든 일에 있어서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려는 자세'입니다. 서로 문제를 지적하고 들춰내기보다는 상대방이 잘하는 것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고 나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 좀 더 잘 보일 겁니다. 무엇이 아쉬웠고 어떤 것을 잘 하는지,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등이요. 이 영화에서 애니가 다시 시작할 힘을 얻게 되는 과정도 이와 같았습니다. 

2011년 개봉작인 이 작품은 3천 2백만 달러의 제작비로 촬영된 후 전 세계에서 2억 8천만 달러가 넘는 수입을 올리며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각본을 직접 쓰고 주연을 맡은 크리스틴 위그는 SNL 출신의 코미디언이기도 한데,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죠. 전체 영화 톤과 다소 안 맞는, 독특하고 튀는 개그로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멜리사 맥카시(<스파이>, <고스트 버스터즈> 등 출연)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넷플릭스와 구글 플레이 스토어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내 인생도 소중하다면 <미라클 벨리에>(2014)

 
 영화 <미라클 벨리에>의 포스터. 청각 장애인 부모님과 동생이 있지만 듣고 말하는 데 아무 불편이 없는 폴라(루앙 에메라)에게 새로운 꿈이 생긴다.

영화 <미라클 벨리에>의 포스터. 청각 장애인 부모님과 동생이 있지만 듣고 말하는 데 아무 불편이 없는 폴라(루앙 에메라)에게 새로운 꿈이 생긴다.ⓒ 영화사 진진


부모와 남동생이 모두 청각장애인이지만, 폴라(루앙 에메라 분)는 말하고 듣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파리에서 온 전학생 가브리엘에게 반한 그녀는 그를 따라 합창부에 가입합니다. 그런데, 입 밖으로 소리내 노래하는 게 처음인 그녀에겐 뜻밖에도 아름다운 목소리와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이를 알아본 합창부 선생님은 파리에서 있을 음악학교 오디션에 지원해 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고민합니다. 자신은 다른 가족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자신만의 꿈이 생긴 사춘기 소녀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따라서 전형적인 성장물의 공식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으며, 전반적인 분위기도 밝고 코믹합니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길을 가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심정, 그런 상황을 뒤늦게 알고 도움이 되지 못해 안타깝고 미안한 부모의 마음이 어우러지면서 좀 더 의미심장한 영화가 됩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은 한,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은 떼래야 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은 있는 법입니다. 아무리 사연이 딱하고 힘들어도 부모는 언젠가 자식을 놓아주어야 하며, 자식 역시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는 때가 늦으면 늦을수록 애증만 깊어질 뿐입니다. 

프랑스에서는 2014년 크리스마스 전주에 개봉하여 2015년 상반기까지 장기 상영되면서 무려 7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주인공 폴라 역할의 루안 에메라는 영화 촬영 당시 신인 가수였지만, 놀라운 노래 실력과 생동감 넘치는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프랑스 국민 가수 미셸 사르두의 노래들 역시 좋습니다. 특히 오디션에 참석한 폴라가 객석에 있는 부모를 위해 '비상(Je vole)'을 수화와 함께 부르는 장면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감동을 선사합니다. 왓챠 플레이와 pooq, 네이버 N스토어 등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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