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혁명과 예술 [서평/이순예,'예술,서구를 만들다']

지금은 괴롭지만 어딘가에 행복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환기시키고, 이 믿음을 결속력 삼아 사회를 통합한다는 ‘유토피아 기획’은 이렇게 예술과 사이좋게 만났다. -부르주아혁명가들-

예술은 현상계가 아닌 물자체의 존재, 곧 또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전복적인 힘을 지닌다. -저자 이순예-
자본주의의 병폐가 극에 달한 21세기야말로 예술이 지닌 전복성과 사회통합력을 절박하게 불러내야 하는 시기. -"-

문명화 과정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폭력을 내부로 흡수해 들이면서 문명에 대한 안티테제로 자신을 정립하는 예술. -"-

 

» 에두아르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1882. 전통적으로 남성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담당해온 여성들이 대중사회에서 주로 서비스업을 담당하게 됐다. 여급의 처지로는 세상에 온전한 자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림 속 여자는 “술과 더불어 여자를 눈으로 마시겠다고 나선 남자”가 아무리 수작을 걸어와도 무표정하게 있어야 한다.  


 
혁명 부르주아는 왜 모나리자를 사모했나

한겨레 김일주 서평, <예술, 서구를 만들다>, 이순예 지음/인물과사상사·2만5000원

 

<라 조콘다>. <모나리자>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은 프랑스 파리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루브르 박물관의 독방에서 방탄 유리를 쓴 채 오늘도 조용히 미소짓고 있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으로 왕궁을 접수한 부르주아는 왕궁을 박물관으로 탈바꿈시키고 약탈도 서슴지 않고 수집·분류한 수많은 예술품과 함께 <라 조콘다>를 걸었다. 관람자 자신만을 특별히 응시한다는 리자의 눈빛과 영혼이 깃든 듯한 얼굴의 생동감은 자기소외라는 근대적 병폐를 앓고 있던 이들을 어루만졌다. 물질에서 영혼을 제거해 분석 대상으로 삼고 생산성 극대화를 향해 내달리던 근대 시민은 잠시나마, 박물관이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영혼과 물질의 조화’를 내밀하게 맛보았다. 지금은 괴롭지만 어딘가에 행복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환기시키고, 이 믿음을 결속력 삼아 사회를 통합한다는 ‘유토피아 기획’은 이렇게 예술과 사이좋게 만났다. 새로운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데 예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부르주아의 생각을, 박물관 속 모나리자의 미소는 오롯이 실현한 것이다.

 

<예술, 서구를 만들다>는 예술이 ‘서구 근대의 꽃’으로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빛나며 ‘삶의 의지’와 ‘내면의 소통’을 담당할 사회적 기관으로 떠오르는 과정과, 이를 뒷받침하거나 이끈 철학적 미학의 성립, 그리고 오늘날까지 변함없는 예술의 중요성을 성찰한 결과를 담은 책이다. 인류 최초의 예술로 꼽히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그리스·로마 신화부터 현대 미술,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다크 나이트>까지, 시공간과 형식을 불문한 방대한 예술 작품들을 성찰의 대상으로 끌어들였다. 독일에서 18세기 칸트에서 20세기 아도르노에 이르는 독일 ‘철학적 미학’을 연구한 지은이 이순예(빌레펠트대 박사)씨가 이를 통해 내리는 결론은 자본주의의 병폐가 극에 달한 21세기야말로 예술이 지닌 전복성과 사회통합력을 절박하게 불러내야 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라 조콘다>로 서구의 근대 시민사회 형성에서 예술이 한 역할과, 시간이 흘러 오늘날 사진 한 장으로 그 아우라를 간단히 구매하는 현실까지 상황의 변화를 일별한 지은이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로 시선을 돌려 자연과 인간의 통합과 동화(Mimesis)를 읽어낸다. 인간의 정신능력이 도구의 발달, 특히 언어의 발달과 함께 발전하자 “의사소통은 합리적 분석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문명의 미신이 들어섰고, 미메시스는 우스꽝스러워지고, 분석은 전지전능해졌다.” 문명인은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고, 자연을 분석해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을 기른 대가로 필연적으로 ‘분열’됐다. 정신능력, 곧 이성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은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들끓는 살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계몽된 일상의 삶과 삶의 궁극이 분리되는 ‘분화’가 근대인의 조건임을 제일 먼저 밝히고 이 둘이 다시 합치되는 영역으로 예술을 발견한 이가 칸트라고 설명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인간이 감각적 지각을 통해 인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인 ‘현상계’와 인식 가능성과 경험을 초월한 현상의 참 실재인 ‘물자체’가 합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적 통합’에서 찾았다. 통합의 지점은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곳이었으며, 허구일지언정, 예술은 물자체가 실재함을 증명해줬다.

 

 
» 〈예술, 서구를 만들다〉
 

예술은 현상계가 아닌 물자체의 존재, 곧 또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전복적인 힘을 지닌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모순과, 결코 자율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향해 구성원을 채찍질하는 시민사회의 당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은이는 예술에서 찾는다. “문명화 과정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폭력을 내부로 흡수해 들이면서 문명에 대한 안티테제로 자신을 정립하는 예술은 미래지향적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문명비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은이의 여성학자적 시각은 예술과 근대성의 관계를 서술하는 내내 곳곳에서 빛을 발하며 서술의 깊이를 더한다. 서구 근대화의 주체인 ‘생각하는 남자’의 기획 아래 탄생한 근대 가족 구성과 성매매라는 부르주아 가족제도의 보충물을 에드가 드가의 <벨렐리 가족>과 에두아르 마네의 <나나>를 통해 설명할 때 이는 특히 도드라진다. “일부일처제 가족을 중심으로 추진된 정서 계발 기획은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알맞게 가공하는 기교가 최고조에 달한 결과였다.” ‘기획의 입안자’가 아닌 엄마와 딸들에게는 조신함을 가장한 딱딱함을 내면화시키는 일에 탈출구가 없었지만, 이 기획을 입안하고 실행한 남자들은 내부 자연을 욕구의 형태로 내장했다. 따라서 남성들은 다스려지지 않는 본성을 타자를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성매매가 마네의 그림에서처럼 또다른 일상으로 굳어진 이유라는 것이다. (김일주기자, 그림 인물과사상사 제공, 기사등록 : 2009-02-06 오후 08:47ⓒ 한겨레)

 

 

* 혁명과 예술에 대한(여성까지는 힘들겠고) 생각은 나중에 천천히....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