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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그녀들과 나를 지지한다.

트랙팩님의 [김원호 성폭력 사건에 관한 지지와 연대] 에 관련된 글.

며칠을 트랙백 버튼을 눌렀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금방도 난 이 한 문장을 쓰고는 십 분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성적이게 사고하고 또 행동하고 싶은데, 유독 이 문제들과 관련해서는 그게 잘 안된다.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정리도 잘 안된다.

지지하는 글을 쓰기가 힘이 든다.

 

최근 블로그에 올라오는 지랄공주의 글을 읽으면서 난 울었다.

눈으로 울지 않으려고 참으면 참을수록, 목이 매이고 마음속에 눈물이 고었다.

글을 읽는 내가 이런데, 글을 쓰기까지 생존자가 흘렸을 눈물과 떨림에 나 역시 몸서리쳐졌다.

 

내가 생존자를 직접 알아서 눈물을 흘리는건 아니다.

그렇다고 생존자의 고통을 알 것 같아서 가슴이 떨리는 것도 아니다.

나는 생존자의 고통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상상하고 싶지 않다.

상상한다는 것조차도 끔찍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하는 글을 쓰고자 함은 최근 블로그에 올라오는 생존자를 포함한

그녀들의 이야기에 동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말하는 그네들의 과거는 내 과거이고,

내 현재이자 어쩌면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모습과 고통들로 가득하다.

이건 너무 끔찍한 애기지만, 현실이다.

 

 그러한 끔찍한 현실에서 사는 그녀들이 이제 자신들의 과거를 밝히고.

당당하게 서고자 입을 열기 시작했다.

타인에게 말걸기를 통해 자신들의 생채기를 더 깊게 파는 작업으로 일어서려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 지랄공주가 위치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지지하고 연대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나 역시 일어서나가는 과정이기에.

 

 

  이마적에 여성주의에 대한 생각을 묻는 어느 동지의 말에 난 여성주의에 대해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고, 그러므로 할 말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술자리에서 이유를 묻는 동지에게 난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일들이 나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드는 현실 때문이라고 얼버무렸다.

이때의 내 대답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진실이었던 반은 내가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

나를 억압하는 폭력에 대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늘 존재한다는 점이다.

나에게 여성주의에 대해, 반성폭력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는 늘 내 주변에 존재했다.

...

 

( 금방까지 나는 내 주변사람과 그리고 나에게 일어났던 폭력의 기억을 되살려

글을 주욱 써내려갔었다. 그런데 지워버렸다. 한편으로는 나에게 주변의 경험이

고통스러운 기억들로 작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난 아직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자신이 없는 까닭이다. )

 

 

    내가 여성주의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다짐해본 적이 있었다.

이건 내가 차마 입 밖으로 말하지 못했던 숨겨진 반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고민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외면하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므로,

내게 현실과 맞설 것을 요구하는 세계와 침묵을 강요하는 세계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하고 싶다는 심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폭력앞에서 개인은 너무 무기력하다고 생각했던 시기였고, 묵인하는 방법은 맞서는 방법보다 쉬워 보였다.

 

   교육실습 마지막을 남기고 이틀 전.

결론부터 말하면 난 내 앞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에 아무것도 대응하지 못했다.

평소에 여성주의에 대해서 고민한다고 말했는데, 그래서 반성폭력에 대한 책도 읽고,

이런저런 토론도 하던 난, 정작 현실에선 아무 대응도 못하고 맥없이 무너져버렸다.

아니다. 무너져버렸다는 표현보다는 묵인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심할 때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난 여성주의에 대한 책들을 덮었고, 침묵했다.

그 후로 한동안 여성모임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술자리에도 가지 않았고, 외면했다.

 

 

 그러면, 그러다보면 잊혀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늘 그렇듯 상처를 준 사람은 쉽게 잊을지라도, 상처를 받은 사람은 쉽게 잊지 못한다.

그리고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아물 것 같지도 않은 이 상처는 잊을 것 같으면 순간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내가 언젠가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할 때, 가해자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아직도 가해자의 뻔뻔한 표정과 몸짓 그대로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를 온전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할 수 있는 곳에 생존자의 글이 자리한다.

그녀의 생존과정이 단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존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사실 너무 가슴아픈 말이다. 그 말 이면에는 우리 모두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생존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니까.

 

사는 것 자체가 투쟁이 되는 세상 속에서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고 실제로 얻어내는 과정에서

생존자가 상처를 치유해나가기 위해

나는 그녀를 지지하고, 그녀들을 지지하고 또 나를 위해 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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