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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여성주의에 대한 생각들. 소식들

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1/25
    이유
    엉망진창
  2. 2007/12/17
    <나, 너, 우리>, 뤼스 이리가라이(1)
    엉망진창
  3. 2006/07/26
    상처는 팽이처럼 돌고 돌아서 심장을 겨냥한다.(4)
    엉망진창
  4. 2006/07/20
    아, 머리아퍼. 그리고 부끄러워(4)
    엉망진창
  5. 2006/06/29
    그녀와 그녀들과 나를 지지한다.(6)
    엉망진창
  6. 2006/05/28
    [스크랩]06 안티성폭력 페스티벌
    엉망진창
  7. 2004/12/20
    연애를 한다는 것2
    엉망진창

이유

다 가 버리고 혼자 남았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어떤 어려운 일을 해 보자고 모인 친구들이 그 목적한 일이 너무 힘들어서 도중에 변심하여 물러가 버린다.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 버린 뒤에 혼자 남는 자기를 발견할 때의 서글픔과 호젓함을 생각해 본다 

 

-이원수, 영광스러운 고독 中에서 http://blog.naver.com/marxmarx21/110026842902

 

 

 

홀로서기가 힘이 들고, 스스로가 위태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시기인 것 같다.

꼭 무엇이 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내 인생에 있어서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다듬는 시기.

 

지금도 충분히 성숙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더 숙성시켜 자라야겠다고도 생각한다.

이런걸 보면 난, 오춘기인게 분명해. 

 

 

더 이상 방황은 하지 않는다.

엊그제처럼 가끔씩 엄마의 울음 소리를 들으면 반쯤 미쳐버릴 것 같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크게 동요는 하지 않는다.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감정이 크게 동요되는게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아니까.

그래도 더 단단해져야 한다고 다짐한다.

 

 

거의 3년만에 여성주의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다.

잊고 지냈던 것이라 다시 보니 새롭고 재미있는데,

반면에 의욕이 떨어지는 것도 생긴다. 예전 기억들 때문이지.

 

 

그래서 모임에 나가는 이유를 천천히 생각해본다.

좋은 건, 맑스주의나 여성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다는 의욕(?)

선지후행의 개념은 아닌데,

그래도 고민하고 생각해보고 소화를 해야 깨닫고 실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으니까.

 

 

행동을 위한 이론적 토대 제공이 아니라,

그저 공부하는 내용 자체가 체화되는 과정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은

말장난인가?

그냥...운동권들의 입답과 이론에 감탄하면서도 때론 질식할 것 같은 느낌때문에

이게 슬금슬금 올라와서 그런가보다.

 

 

성격급한 사람들 말하기 방식도 그렇고...

때론 중간에 보이는 오류를 탁탁 지적하는 순간적 판단은 존경하지만

그래도 나같이 앞뒤전후 다 듣고  5분은 생각해야 말이 나오는 사람은 맥이 끊기니까

말하기 방식을 내가 바꾸지 않으면 울화병 생길 것 같아 ㅋㅋㅋ

 

이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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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우리>, 뤼스 이리가라이

얼마전에 <색, 계>를 봤는데, 영화 초반에 이런 대화가 나온다.

멋진 남주인공이 여주인공과 그녀의 친구에게 같이 연극을 제의하는데,

이미 유명하다던 여주인공의 친구는 연극의 주제로 입센의 <인형의 집>을 제안한다.

그랬더니, 이 남주인공 하는 말 <이 시기에 그런 부르주아 연극은 맞지 않는다>고.

 

영화<색, 계>에 대한 감상평은 나중에 하겠지만, 난 이 장면에서 피식 웃고 말았다.

남주인공의 혁명적이고 굳센 민족의식을 나타내려고 이 장면을 삽입한 거겠지.

뭐, 입센의 작품이 부르주아적인건 사실이지만, 그래도...기분이 살짝 나빠진 건 왜 인지...

여성주의에 대한 고민이 다시 스물스물 올라오던 무렵,

 

 

오랜만에 재미있게 책을 읽었다. 

뤼스 이리가라이의 <나, 너, 우리>

뤼스 이리가라이는 역자 후기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이다.

 

문체나 내용이 재미있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책을 읽으면서 생기는 궁금증이나 떠오르는 의문을 저자가 적절한 타이밍에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어서

재미있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워낙 페미니즘에는 전무한 지식을 소유한 나로서는 책 서두 부분에 시작되는 이 질문

"<제2의 성>을 읽지 않은 여자가 있는가? 그 책을 읽고 분발하지 않은 여자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어...나다, 허거걱 ㅡ.ㅡ;; 을 연발하면서 읽었으니...

새로운 지식에 대한 정보도 즐거웠지만, 그보다 중요한건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질문들이

이 책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점 때문이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 그가 아닌 존재가 되었는가?

학교에서 국어수업 첫 시간 즈음에는 언어와 사고에 관한 오랜 논쟁에 대해 소개를 할 때가 있다.

대부분 교육과정에서는 언어와 사고는 상호보완적 관계라고 이야기한다.

사고에 의해 언어가 규정되기도 하지만, 언어에 의해 사고가 형성되기도 하며, 언어와 사회, 문화, 사고와 표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말고, 이리가라이의 시각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여성의 관점에서

언어와 사고, 언어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성형과 남성형으로 구분되어 나타나는 언어에는

그 사회의 여성과 남성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으며, 상대적으로 여성은 가부장적인

언어 질서에 의해 배제되고 부인된다고 본다. 여성의 담화와 남성의 담화는 다르며, 그 안에 내재된

모순된 질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프랑스어이기 때문에 남성형과 여성형에 대한 고민이 더 심화될 수 있었나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내가 불어를 처음 배웠을 때를 기억해보게 되었다.

우리의 언어와는 다르게 남성형과 여성형으로 구분된 언어가 낯설었지만, 금새 익숙해졌던 건

'해'와 같이 밝고 우위를 점하는 단어들은 남성, '달'이나 음성적인 것들은 여성형으로 구분했을 때였다.

낯선 문화였지만, 그게 익숙해졌던 우리의 문화에서도 음이나 양과 같은 것들로 구분되던 문화와

비슷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거다.

 

뭐,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당연히 받아들이고 그저 외우기만 급급했던 언어에 사실 성별화된 인식이

내재되어 있고, 그 관계에서 남성형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겠지.

그녀는 '그'+'녀'로 표현되며, '그' 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 말이다.

 



여성성이란 뭘까? 여성성이란게 있기는 한가? 여성성에 대해 우리는 관심을 기울여야 하기는 한가?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시작할 즈음에 한동안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문제는,

여성성에 대한 자기질문이었다.

여전히 이에 대한 해답이 명확히 풀리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는 책을 읽으면서 확실해 진 것 같다.

 

모르는 단어의 의미를 유추해 보는 방법에는 그 단어의 반댓말을 생각해보는 방법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여성성에 대해서 질문하면 그 대답을 어물어물대면서도,

반대로 남자다운 것, 남성성에 대해서는 쉽게 대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다고 그런 대답이 정말 남성성에 대해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덜 어려워 보이는 건 사회적으로 우위를 지니고 당연시 여기는 문화에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남자다운 것. 남성은 힘에 있어서 여성보다 우위에 있으며, 강하고, 지배적인 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남성은 무수히 많음에도, 사회적으로 말할 때 남성성의 모델은 이런 강인한 이미지다.

아마 그 반대가 여성성으로 이야기되고, 그 결과 여성은 보호받아야 하고, 나약한 이미지, 소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건 도식적이고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말장난 같지만 강하기도 하면서 강하지 않고, 때론 지배적이면서 지배적이지 않은 것들이 여성성을 이루는 것들이 아닐까?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용어 규정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여성성에 대한 자기 질문을 여성 스스로가 제기하고,  함의를 이뤄가야 할 것 같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여기에서 이리가라이의 책 제목으로 다시 돌아간다.

"Je (나), tu (너), nous(우리) - pour une culture de la difference (차이의 문화를 위해)

 

성별화, 성별화된 권리를 인식하고 주체성을 지니며 자신들의 결정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현실이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 그러기에 전복되고 지배와 피지배를 이루는 관계사이를

다시 전복시켜 평등을 이루기 위해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

 

 

 

개인적으로는 ...

 

 이리가라이는 여성족보에 대한 논의, 모계제 사회에서 부계제 사회로의 이행, 모녀 관계라는

다양한 측면에서 여성에 대해 말하고자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초기에 주되게 드는 의문.

"왜 여성들은 이 모든 것 - 신성, 왕권,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이리가라이의 대답은 위에서 약간 언급했는데,

(사실, 저자도 명확하게 답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고냥 요런 의미가 아닐까?정도??)

 

모자관계를 뒤집어 모녀관계에 대해 주장하는 이리가라이의 주장과

여성의 출산과 관련해 태반관계로 여성의 몸을 주인공으로 설명하려 했다는 점은

처음 듣는 거라 개인적으로는 참 신선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내 갈증을 채워줬던 부분은

성 도착자 같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여성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려 했다는 점이다.

물론 프로이드의 학문적 성과와 현재까지 많은 학문분야에서 중요한 토대를 차지한다는 건 인정하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일렉트라 콤플렉스를 설명하는 그의 이론을

여성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려는 이리가라이의 의견을 읽으며 얼마나 쾌재를 불렀는지 모른다.

기쁘다못해 얼마나 감사했는지...

 

 

 

그리고 또 하나는

 

여성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문제에 대한 고민을 다시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현대 시대에 여성으로서의 글쓰기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궁극적으로 나에게?

작년 이맘 때즈음 여성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리고 언젠가 소설을 한 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줄곧 가져왔던 의미이기에 이 부분이 더 맘에 와 닿았던 것도 있다.

 

 

"글쓰기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며, 말할 권리를 박탈당한 상황에서 의사소통을 함 수 있는 수단이다

 

여성으로서의 자아와 글쓰는 자아가 분리나 분열 하지않고, 온전한 나를 찾는 방법이 뭘까하는 문제.

그것이 기본적으로는 개인의 치유와 자아발견의 과정이 동시에 이것이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현대사회에서 요구되는 많은 여성상 가운데, 20대, 출산을 경험하지 않은, 비혼의 여성인 내가

여성으로서의 여성성을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까?하는 문제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해서,

참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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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팽이처럼 돌고 돌아서 심장을 겨냥한다.

이미 상실된 나는

영원히 상실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실한 거기에서부터

모든 나는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오상원,'백지의 기록' 중

 

 

최지영의 다음 글을 기다리며

 

이젠 블로그에 글을 쓰고 안쓰고 이런 말 하지 말아야지.

무슨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언행일치'같다. 절대 말과 행동이 일치 안되는 ㅋㅋ습~ 솨~

매번 결심이 무너지는 모습이 꼭 실없는 사람 같아.

 

 

최지영 동지가 글을 내리는 과정을 사이버상으로만 지켜 보고는 화가 났었다.

그간 세웠던 내 결심과 계획을 무너뜨릴 정도로.

지금도 충분히 이해되지는 않지만, 대신 화는 누그러졌다.

그녀와 그녀들의 고민과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녀의 다음 글쓰기를 기다린다.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기다린다고.

함께 하고 싶었고, 한 편으로 난 이미 내가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힘 내라고. 힘 내보자고.

 

 

 

최지영의 글쓰기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폭력의 기억이 새롭게 떠올라 매 순간 '그만'을 외쳐야했다.

그녀의 글을 통해 새로 깨닫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많지도 않게 사는 동안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수 많은 폭력 속에 노출되어 살아왔었다는 사실이다.

잊고 싶었고, 잊혀진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기억은 내가 여덟살  때, 엄마친구의 아들로부터 시작됐다.

옷을 벗기려고 강하게 내 손목을 짓누르는 것으로부터 도망쳐 밖이 잠잠해질때까지,

그리고 외출했던 엄마와 엄마친구가 다시 집에 돌아오기까지

꽤 오랜시간 화장실에서 숨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빠도, 착한 아들을 믿는 엄마친구도 무서워서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나도 그대로 잊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폭력의 시작은 이랬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많은 일이 있었고, 그 기억들은 차곡차곡 쌓이고, 누적되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나를 통제했다.

그래서 성폭력의 문제를 나에게 돌렸을 때, 나는 지금도 자유로운 것 같지 않다.

친구의 조언대로 고통의 기억은 앞으로 내가 사는 동안 품고 살아가야 할 상처로 존재할 것 같다.

그 치유의 방법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고민중이다.

현재로서는 생존자를 지지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최지영 동지의 글쓰기가 진행되면서 나는 두 가지 정도가 달라졌다.

하나는 내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 놓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글이 진행되면서 예전처럼 앉아서 울고 있지만은 않는다는 점이다. 난 점점 울지 않는다.

 

 

 

최근의 논의과정을 지켜보면서

 

과거의 기억들을 되돌이켜볼 때 처음의 시작은 성폭력인건가?라는 질문에서부터였다.

다음은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두려웠다. 그리고는 자책이 이어졌다.

왜 난 그 때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가장 괴롭고 참을 수 없던 것은  폭력의 경험으로부터 오는 충격보다도

그 이후의 과정이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나에게 최지영의 글쓰기가 괴롭지만 고마웠던 이유는 마지막 사실때문이었다.

반성폭력에 대한 무수한 논의를 했었고, 사람들은 생존자의 고통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고들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의미 이면에는 생존과 치유의 과정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자리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내 과거를 돌이키면서 하나같이 공통적이라고 느꼈던 것 중 하나는,

무섭고 공포스러운 성폭력 장면의 그 순간만큼 

그 이후에 잊으려고 노력하고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려고 하면 할 수록

더 바닥으로 치닫고 힘들었던 경험이었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최지영의 글쓰기가 있기 전까지 난 이 사실을 간과했던 것 같다.

과거를 떠올리면서 나는 이제서야 반성폭력에 대해, 그녀의 글쓰기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최지영의 글쓰기는 오롯이 개인의 글쓰기로 치부할 수 없다는 점이 여기에 있다.

 

 

그녀는 "그런 일을 겪다니 힘들었겠어요." 가 아니라

"생존의 과정이 쉽진 않지만, 때론 눈물흘리며 다시 일어나는 삶을 같이 살아요."같은

진심을 바라고 또 말하고 싶은게 아닐까?

최근의 논의를 간간히 보면서, 간혹 이걸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속상하다.

 

 

 

 

 

 

 

 

 

 

상처는 팽이처럼 돌고 돌아서 심장을 겨냥한다.

앞이 보이지 않게 피 대신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늘 제자리에서 돌고 있는 것 같다.

단단한 심장이 필요하다.

늘 제자리에서 돌고 돌아도 더 이상 나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단단한 심장은 혼자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심장과 함께 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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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머리아퍼. 그리고 부끄러워

아...나 또 금방 썼던 글을 지워버렸다.

 

감자탕이 웬수지. 내가 뭔 이득이 있다고 블로그를 보고, 게시판을 확인하고

또 멍하니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걸까.

 

제발 그런 글이 올라오지 않기를 바랬는데, 몇 일 컴퓨터를 하지 않은 사이에 올라와있는

진상조사단 글을 보고는 화가 나고 부끄러워서 짜증이 밀려왔다.

평정을 되찾고 내 생각을 정리해보면서 어디에 글을 쓸까 고민도 해봤다.

2-3년 전에도 했던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려는 모습과 침묵에 넌덜머리가 나면서

제발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으면 했다.

제발 그 거짓위선과 조직보위는 집어쳐버리라고.

 

 

난 내 해방세상을 만들고자 운동을 꿈꿨다.

지금도 그 꿈을 이루려고 나를 제어하고 다듬고 있는 중이다.

처음부터 내가 꿈꿨던 운동의 모습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꿔보고 싶다고 말하고

그렇게 시작했다.

 

그 꿈은 늘 현실에서 무너졌다.

한편으로는 동경으로 가득 찬 활동가 선배들의 모습이 늘 완벽하고 짜여지지 않은 모습이 좋았었다.

사람같았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만들어가는 활동의 모습은 완벽하지도 않지만 깨끗하지도 않았다.

그 속에서 난 늘 두려웠다. 혹시나 저 탁류에 휩쓸려 길이라도 잃지 않을까.

아니야, 지금 내가 저 탁류를 만들어나가고 있는것 같아라는 생각들 때문에.

 

그래서 늘 올곧게 서야 한다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성폭력과 관련된 논의가 늘 조직보위와 관련되는 모습을 보면서 화가났다.

이게 왜 그렇게 연결되어야만 해?

그래 정말 그렇다면 과도하게는 그런 조직은 깨져야 한다고 까지 생각하면서.

급한 물살을 만나 배를 지키기에 급급해 앞으로 나가지 못할 바에야,

배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앞으로 나아가는게 옳다고 생각하니까.

 

 

 한동안 그 물에서 떨어져 지내다보니, 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사람이 사는 곳이니까, 당연히 이런 말도 저런 말도 나올 수 있고, 실수도 반복할 수 있는거라고.

그런데 1년 후에 다시 돌아와보니, 그 물은 여전히 썩어있는 것 같다.

염려한대로 또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다.

 

이번엔 지지 않을꺼야. 질긴 년이 승리할테니까, 좀만 더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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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그녀들과 나를 지지한다.

트랙팩님의 [김원호 성폭력 사건에 관한 지지와 연대] 에 관련된 글.

며칠을 트랙백 버튼을 눌렀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금방도 난 이 한 문장을 쓰고는 십 분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성적이게 사고하고 또 행동하고 싶은데, 유독 이 문제들과 관련해서는 그게 잘 안된다.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정리도 잘 안된다.

지지하는 글을 쓰기가 힘이 든다.

 

최근 블로그에 올라오는 지랄공주의 글을 읽으면서 난 울었다.

눈으로 울지 않으려고 참으면 참을수록, 목이 매이고 마음속에 눈물이 고었다.

글을 읽는 내가 이런데, 글을 쓰기까지 생존자가 흘렸을 눈물과 떨림에 나 역시 몸서리쳐졌다.

 

내가 생존자를 직접 알아서 눈물을 흘리는건 아니다.

그렇다고 생존자의 고통을 알 것 같아서 가슴이 떨리는 것도 아니다.

나는 생존자의 고통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상상하고 싶지 않다.

상상한다는 것조차도 끔찍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하는 글을 쓰고자 함은 최근 블로그에 올라오는 생존자를 포함한

그녀들의 이야기에 동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말하는 그네들의 과거는 내 과거이고,

내 현재이자 어쩌면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모습과 고통들로 가득하다.

이건 너무 끔찍한 애기지만, 현실이다.

 

 그러한 끔찍한 현실에서 사는 그녀들이 이제 자신들의 과거를 밝히고.

당당하게 서고자 입을 열기 시작했다.

타인에게 말걸기를 통해 자신들의 생채기를 더 깊게 파는 작업으로 일어서려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 지랄공주가 위치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지지하고 연대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나 역시 일어서나가는 과정이기에.

 

 

  이마적에 여성주의에 대한 생각을 묻는 어느 동지의 말에 난 여성주의에 대해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고, 그러므로 할 말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술자리에서 이유를 묻는 동지에게 난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일들이 나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드는 현실 때문이라고 얼버무렸다.

이때의 내 대답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진실이었던 반은 내가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

나를 억압하는 폭력에 대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늘 존재한다는 점이다.

나에게 여성주의에 대해, 반성폭력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는 늘 내 주변에 존재했다.

...

 

( 금방까지 나는 내 주변사람과 그리고 나에게 일어났던 폭력의 기억을 되살려

글을 주욱 써내려갔었다. 그런데 지워버렸다. 한편으로는 나에게 주변의 경험이

고통스러운 기억들로 작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난 아직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자신이 없는 까닭이다. )

 

 

    내가 여성주의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다짐해본 적이 있었다.

이건 내가 차마 입 밖으로 말하지 못했던 숨겨진 반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고민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외면하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므로,

내게 현실과 맞설 것을 요구하는 세계와 침묵을 강요하는 세계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하고 싶다는 심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폭력앞에서 개인은 너무 무기력하다고 생각했던 시기였고, 묵인하는 방법은 맞서는 방법보다 쉬워 보였다.

 

   교육실습 마지막을 남기고 이틀 전.

결론부터 말하면 난 내 앞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에 아무것도 대응하지 못했다.

평소에 여성주의에 대해서 고민한다고 말했는데, 그래서 반성폭력에 대한 책도 읽고,

이런저런 토론도 하던 난, 정작 현실에선 아무 대응도 못하고 맥없이 무너져버렸다.

아니다. 무너져버렸다는 표현보다는 묵인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심할 때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난 여성주의에 대한 책들을 덮었고, 침묵했다.

그 후로 한동안 여성모임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술자리에도 가지 않았고, 외면했다.

 

 

 그러면, 그러다보면 잊혀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늘 그렇듯 상처를 준 사람은 쉽게 잊을지라도, 상처를 받은 사람은 쉽게 잊지 못한다.

그리고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아물 것 같지도 않은 이 상처는 잊을 것 같으면 순간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내가 언젠가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할 때, 가해자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아직도 가해자의 뻔뻔한 표정과 몸짓 그대로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를 온전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할 수 있는 곳에 생존자의 글이 자리한다.

그녀의 생존과정이 단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존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사실 너무 가슴아픈 말이다. 그 말 이면에는 우리 모두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생존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니까.

 

사는 것 자체가 투쟁이 되는 세상 속에서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고 실제로 얻어내는 과정에서

생존자가 상처를 치유해나가기 위해

나는 그녀를 지지하고, 그녀들을 지지하고 또 나를 위해 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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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06 안티성폭력 페스티벌

06 안티성폭력페스티벌 프로그램 소개 | 페미니즘의 도전


 

 

본행사: 홍대체육관 19:00~21:30 (사회자 : 홍석천, 김현숙)

공개 모집을 통한 일반 참가자와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 중인 아티스트들이 함께 어우러져 연극, 복합극, 꽁트, 개그, 패로디, 미니콘서트, 춤, 퍼포먼스, 다큐멘터리 상영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반성폭력의 의미를 홍대 체육관 특설무대에서 150분에 걸쳐 풀어낸다. 한국사회의 대표적 성적소수자이자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하고 있는 홍석천 그리고 '출산드라'로 알려져 있는 신랄한 개그우먼 김현숙이 사회자로 나서 폭력적인 성을 거부하고 우리 내면에 억눌렸던 성적 자아를 찾아가는 본 축제를 이끌어 간다.


거리행사: 본 행사 후 21:30~22:00 홍대 놀이터까지 행진

무대 공연 중심의 본 행사가 끝나면 전 출연자와 관객들이 4미터의 여신상을 앞세우고 홍대 앞거리를 행진한다. 성폭력 근절의 의지를 다지고 여성들에게 환한 밤길을 밝혀주는 축제의 실제적 하이라이트로 안티 성폭력의 취지를 널리 알리는 거리 퍼포먼스이다.


위 웹자보를 다운받으셔서 헤푸게 뿌려주세요^^

안티성폭력페스티벌 더 자세한 내용은 ☞antifestival.co.kr

 

 

행사명 | 2006 안티성폭력페스티벌
행사일 | 2006년 6월 2일 (금) 해지고 7시부터
장소 | 홍익대학교 체육관
주관 | (주)도서출판 이프, 홍익대학교 총여학생회
홈페이지 | http://www.onlineif.com || http://www.antifestival.co.kr
공동주관 |

꿈꾸는지렁이들의모임, 늘푸른여성지원센터,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또하나의문화, 사이버문화연구소,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제주여민회, 피자매연대,
한국성폭력위기센터,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장애여성문화공동체, 새움터, 여성문화예술기획, 장애여성공감

협찬 | SK텔레콤 | 포스코 | 두산중공업 | 국민은행 | 신한은행 | 삼성전자
서울증권 | 쎌 인터네셔널 | 한국마사회 |
담당 | 이프 기획팀 임우정 (festival@onlineif.com)
(☏ 02-3676-3301, FAX 02-3676-3308)

 

 

 

밥 먹고 도서관 오르는 길에 벽에 포스터가 붙어있길래 뭔가 찾아봤다.

안티 미스코리아 후속으로 열리는 행사라는데, 난 처음 들어봤다.

뭐, 돈 주고 함께할 생각까지는 없고, 저녁에 거리행진한다고 할때

밥먹고 배 식힐겸 구경이나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본 행사에서 하는 걸 그냥 공개적인 공간에서 하면 안될까란 생각도 잠시

이상하게 본 행사보다 거리행사가 더 땡긴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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