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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31
    [SMF1일차]소통,대중과는 어떻게?
    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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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공존의 기술 -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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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구없다~"진중권의 유머?심형래의 유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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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1일차]소통,대중과는 어떻게?

사회운동포럼 1일차,
사회운동총회 1,2부.
흥미롭고 중요한 논의들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 430석 규모의 강당이 꽉찰 정도로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토론에 참가했다.

1부 : 전쟁과 빈곤의 시대, 사회운동의 대안이념과 변혁의 전망은 무엇인가
2부 : 사회운동의 소통과 연대를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

두 개의 토론회가 불균등하게 결합되었다는 느낌이었고, 특히 1부의 논의가 2부에 연결되지 못한 구조로 짜여진 것은 문제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토론 모두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일단, 몇가지 느낌만 언급하자면



운동들의 "소통"의 문제

사회운동포럼의 모토는 소통/연대/변혁.
그런데 사회운동 단체들간의 소통이 문제인가?
(경향적으로 특히 2부 토론은 그런 논점으로 제기된 것같은데)
다른 부문의 사회운동 간의 혹은 단체간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 활동가들의 불성실함, 혹은 소통의 '방법론'이 문제인가?(아마도 내일 있을 "새로운 사회운동 활동양식" 워크샵은 그런 결론을 이미 예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오히려 대구민중행동의 활동가가 플로어 토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체들, 혹은 활동가들 간의 소통 이전에) '대중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제기해야 운동들 간의 소통이라는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상이한 운동들의 소통이라는 문제-- 운동노선의 토론, 공동의 대안이념의 형성을 위해서--는 각각의 사회운동이 (다른 장소, 혹은 어떤 토론회나 네트워크 이전에) 대중속에서 서로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해되어야한다. (혹은 부문운동들간의 소통이라는 쟁점의 진실은 "대중"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운동들이 그러한 고민을 할 때 대중운동이라는 공간 속에서 함께 만날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로 해서 사회운동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관계망이 의미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운동의 분할이 사실은 대중의 내적 분열, 대중이데올로기의 분열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비록 올해의 사회운동포럼이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자신의 방법론으로 채택한 행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쟁점은 제기될 수 있다. 또한 다음 사회운동포럼이 가능하다면 한계를 넘어서야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사회운동포럼 안에 하나의 쟁점이다. 1부 토론 사회를 맡은 백승욱 선생이 특히 지적하는 것처럼 이것이 핵심적인데; (부문)운동단체들, 활동가들 간의 소통이 문제인가, 혹은 대중과의 소통이 문제인가라는 지점. (특히 후자는 지적 차이의 감축, 지식의 민주화라는 쟁점, 시민교육이라는 쟁점을 동반한다.)

운동정당 혹은 사회운동적 당

당적인 운동의 미래에 대해서 1부 토론회 중에서 잠시 언급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적어도 오늘 토론에서는 장석준(전진)이 제기한 논점이 노동자의 힘에 당운동의 문제제기를 압도했다는 느낌이다. (혹은 누군가의 언급처럼 장석준은 전진의 알리바이?)

장석준은 이렇게 말한다(다소 정리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

내가 제기한 ‘운동정당’은 노힘의 비제도적 투쟁정당과는 다르다. 운동정당은 사회운동과 제도정치의 긴장과 갈등 속에 존재한다. 이것은 어떤 모범답안을 갖고 해결되지 못하는 조건에 있다. 이 쟁점은 레닌(사회주의 혁명 후)에게 있어서는 국가화된 당-대중운동의 긴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러한 긴장을 인식하고 정세에 개입하는 것이 문제이지 당의 형태에 대해서 일반화된 어떤 원칙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당 운동을 전개하는 것, 사회운동이 국가에 진출하는 경로로서 당운동을 생각해야한다는 입장이다. 운동의 혁신은 특정한 조직형태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어떤 조직형태의 특권화로 모든 것이 풀려나갈 수 없고 그것은 사회운동의 혁신에도 도움이 안 된다.
* 그럼 운동정당에 걸맞는 조직형태는 가능한가?
당만을 갖고 이야기해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전체 사회운동과의 관계가 문제. 사회운동의 전반적인 변화속에서 이야기해야한다. 현재 민주노동당 내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들.. 전형적인 선거주의들을 지역운동과 결합된 것으로 바꿀 것인가.. 당지역조직을 사회운동의 지역조직으로 만들어갈 것인가.. 이것이 다만 아이디어로 제한되는 이유는 전체 사회운동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져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운동은 국가기구와 관계하기 때문에, 경향적으로 국가화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발한 조직형태--아마도 "비제도적 투쟁정당?"--가 아니라 끊임없는 조직의 창조적 파괴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위의 발언은 1부 토론에서 나온 것이지만 2부 토론 중에도 민주노동당이 (다소 다른 용어로 표현되었더라도) '사회운동적 당'이 되어야한다는 점들이 강조되었다. 특히 지역운동과 관련해서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선거정당이냐 운동정당이냐라는 모순 속에서 어떤 길을 갈 것인지, 또 어떻게 다른 운동들이 개입할 것인지가 중요한 부분. 아마도 전체 사회운동포럼 과정에서 계속 강조될 것으로 보인다.

노조운동에 대한 비판 이전에 대중의 조건을 인식할 필요

김진억(민주노총 서울본부)은 이렇게 말한다(구체적인 낱말은 다르지만 나의 언어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노조의 한계에 대해서 노조를 비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노조가 그렇게 되는 대중들의 상태에 대해서 언급하고 대안을 함께 고민해야한다. 역사적으로 노조가 경제주의/현장주의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비노조 사회운동들도 대중들을 어떻게 만나왔는지 자기반성을 해야한다.

이것은 오히려 대중을 이야기하면서 대중에 대해서는 비사고하는 토론분위기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종일관 노조운동이 문제라는 식의 분위기 속에서 하소연 같은 발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나도 노조활동가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어떤 억울한 감정같은 것이 있다.) 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운동이 비판받을 수는 있지만, 단지 비판으로 그치는 것은 무의미하고,

우선 노동자운동이 현재의 상황에 처하게된 원인을 대중의 관점에서 인식할 필요가 있을 뿐더러
현존의 노동자운동의 관행에 대한 비판 뿐 아니라, 직접 대중을 만나는 과정에서 이를 함께 변혁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제기다. (이 것은 위에서 언급한 쟁점, 부문운동들의 소통이냐, 대중과의 소통이냐라는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운동진영은 기술적으로 혹은 정책적으로 유능하지 못해서 문제인가?

토론중에 제기된 쟁점.
사회운동은 경실련과 같은 NGO운동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이 제기한 쟁점을 먼저-유능하게 제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과 유리된 것인가?

이것은 사회운동의 약화에 대해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원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출범과 국회의원 확보 이후에 가장 유능하게 정책을 제기하는 집단이 민주노동당이라는 것도 알려진 현실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은 다른 보수정당이 자신의 정책을 배낀다고 불평한다.) 이런 비판은 사회운동의 자원을 대중조직화가 아니라 정책대안의 생산으로 치환하는 데, 이는 운동을 더욱 상대화하고 사회운동단체들의 NGO화를 촉진한다.(사회진보연대 이상훈이 지적한 것처럼 '정책'은 '정치'가 아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문제는 부동산이나 부패 문제와 같은 정책이슈를 잘 포장해서 제기하는 것이 아니며, 대중들이 현실의 고통의 원인을 적합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문제제기와 대중운동의 조직화일 것이라는 점.

--
오늘 토론 중에 메모한 것들 중 몇가지 쟁점이다. (사실 더 많은 쟁점들이 있는데, 그것들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통해서 언급하도록 하자.) 내일과 글피까지 이어지는 토론 속에서 더 많은 쟁점들이 부각되고, 그럴 뿐 아니라 소통되고 공동의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런 종류의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우리 운동의 중요한 전진이라는 점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림을 클릭하면 사회운동포럼 홈페이지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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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생각의 탄생


생각의 탄생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박종성 옮김 / 에코의서재


‘생각’에 대해서 생각하는 책. 사람의 사고가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방식들을 몇 개의 개념(생각도구)들로 정리한다. ‘생각하기’에 대한 매뉴얼이라고할까.

이 책이 제시하는 생각도구들은 모두13가지.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 등이다.

대상을 인식하고 개념으로 다듬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다른 차원의 인식들과 결합하고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과정까지를 13개의 생각도구를 이용해서 제시한다. 이런 과정은 모두 하나의 두드러진 목표, ‘창조성’을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저자들은 전인적 교육을 부활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이 책은 ‘생각도구’들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교육제도에 대한 많은 제안들을 담고 있다.) 개별 학문들 사이에 벽을 쌓고 분리해서는 창조적 사고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예술과 과학은 교통해야할 뿐 아니라, 예술가는 과학자가, 과학자는 예술가가 되어야한다. 이 책의 저자들이 예를 드는 수많은 학자, 예술가, 사상가들은 그러한 주장을 확인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러한 통합과정은 서로 다른 영역의 '개념'들이 만나는 과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개념들과 감성이 만날 때, 심지어 몸과 만날 때, 그것은 다른 효과를 만들어낸다. 어떤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 순수하게 상상의 산물은 아니며, 오히려 낯선 것들이 만나는 가운데 만드는 고유한 효과라는 것을 말하는 것같다. 마치 상이한 문명들이 만나는 변경지대에서 창조적인 것들이 형성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방식의 ‘생각도구’들은 순수한 개념들 사이의 운동으로는 사고가 뻔한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능력.

이 책을 읽으면서 13가지의 ‘생각도구’만큼 중요하게 제기되는 쟁점, 창조성과 그것을 육성할 수 있는 교육제도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현대의 대중교육은 어떤 창조성을 가진 ‘전인’을 육성한다기 보다는 노동시장의 상황(이중 노동시장)에 맞는 노동력을 길러 내는 것에 중심이 가있다.

따라서 이 책이 제기하는 ‘전인’이란 전-신자유주의적인 어떤 지식인모델이거나 혹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요구되는 엘리트일 수도 있다. (책이 나온 시점이나 책에 열광하는 독자들을 봐서는 후자일 가능성이 많지만.) 아마도 여기서 배제된 사람들은 불안정노동시장을 구성하는 현대의 프롤레타리아로, 그들에게 창조성이란 별로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요구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편으로는 엘리트 교육을 위한 방법론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창조적인 전인’이라는 이상이 단지 부르조아,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의전유물일 수는 없다고 다시 주장해야한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창조성이란 어떤 거추장스러운 무엇이 아니라 삶을 실현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은 물론이려니와, 창조성이라는 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물질적 조건이 구축되어야한다.

여기서 우리는 상이한 것들이 마주치는 과정을 통해서, 무엇인가 창조적인 것이 형성될 수 있다고 할 때, 저자의 13가지 생각도구에 더해서, 하지만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핵심적인 것 하나를 추가할 수 있다. 바로 ‘노동’이다.

노동을 통해서, 개념들과 미적인 요소들을 현실과 만나게 하고 실현하고 변용할 수 있다. 노동 속에서 창조성은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저자들에게 ‘노동’이라는 항목이 이상하게도 빠져있는 것은 저자들에게나, 역사적으로나 창조적인 무엇은 노동과 분리된 엘리트들의 활동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성을 위한 사고의 도구이자, 그것을 실현하는 요소로서 노동이 강조될 수 있다면, 또 한편으로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창조적일 수 있도록 하는 현실의 조건(작업장과 교육현장에서)이 사고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전업화가가 되라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한편으로는’ 화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러스킨은 1850년대의 런던의 노동자들에게 데생을 가르쳤는데, 이는 데생을 통해서(그림을 직접 그리는 것을 통해서) 사물을 더 풍부하게 보고 느끼고, 그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목수를 화가로 만드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목수로서 더 행복하게 살게하려는 것이다”, 혹시 소질과 의지가 있다면 화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에서 재인용)

이렇게 노동자들과 예술, 과학이 만날 때,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들과 창조성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노동하는 대중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러스킨이 150년 전에 시작했던 일이 아직도-아직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말이다.


===
이 책에는 창조적인 사고의 사례로 여러 인물을 드는 데 그 중에는 헬렌 켈러도 있다. 그녀는 활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것으로 알려져있고, 메카시즘 광풍에서 희생되기도 했다. 그녀가 한 것으로 알려진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녀가 한말은 아니고, 브라질의 해방신학 계열의 Helder Camara주교가 했던 말이라고 한다. 여튼, 훌륭한 어구가 다시 떠올랐기 때문에 인용.)

"When you give food to the poor, they call you a saint. When you ask why the poor have no food, they call you a communist."
-- Archbishop Helder Camara, Brazilian liberation theolog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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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여행의 기술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여행을 준비하면서 잡다하게 챙겨읽고 있는, 여행에 대한 책들 중 한권. 하지만 가장 독특한 책이라고 할 만하다. 여행을 ‘낮선 곳에서 사진을 찍고 오는 행위’가 아닐 수 있게, 여행과 그 속에서 만나는 것들에 여행자가 스스로 의미들을 부여할 수 있도록 사고하게 하는 책.

 

글쓴이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다양한 장소들, 다양한 측면들.. 낯선 장소를 만나고 보고 느끼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보들레르나 위즈워스, 고흐와 같은 예술가들의 말을 경유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영국 숲의 덤불속에 어떤 생명에게서 나와 같은 시간대에 같은 행성을 살고 있다는 동류감을 떠올린다. 호퍼의 그림을 통해서, ‘외로움’과는 또 다른 ‘공동의 고립감’에 빠진다. 시나이의 사막에서 신이 빚은 위대한 창조 앞에서, 숭고한 장소들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는 것을 느낀다.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화가들의 작업이란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화가가 보여주고 싶은 현실의 귀중한 특질들을 담아내는 것이라는 점을, 고흐를 통해서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치는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해서도.

 

보통이 말하는 모든 곳에 가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나도 실험해보고 싶어진다. (다행히 보통이 언급한 몇 군데는 앞으로 다녀오려고 하는 장기간의 여행 예정지 목록에 들어있다.)

 

특히 러스킨을 통해서 말하는 이 부분은 인용해볼만 하다.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 가지 중심적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 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 (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이나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를 포함해서)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해 쓰거나 그림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를 묘사하는 것이다. (문단나누기와 강조는 나) 


여행에서 마주친 대상들에 대해서 데생을 하거나, ‘말그림’을 그려보는 방식으로 우리도 러스킨이 말한 것처럼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다.(그것은 러스킨의 언급처럼 기념품이나 사진으로 이루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여행을 위한 영혼의 준비를 얼추 갖추었다면(아, 그리고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노트도), 우리는 보들레르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이제 떠나야할 시간이다. (아, 아직도 준비가 너무 부족한데, 이 곳의 눈물은 이미 너무 많구나!)

 

열차야, 나를 너와 함께 데려가다오! 배야, 나를 여기서 몰래 빼내다오!
나를 멀리, 데려가다오, 이 곳의 진흙은 우리의 눈물로 만들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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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현이 걱정되는 이유

풀소리님의 [문국현이라는 고수의 출현] 에 관련된 글.

문국현이라는 쟁점에 대해서는 한번 메모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풀소리님의 포스팅이 있다. 문국현은 이번 대선에게 가장 눈에 띄는 대선주자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문국현이 제기하는 쟁점이 대중들이 '갈망'하는 것인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대중들은 이명박류가 제기하는 발전주의 환상에 다시 동원될 수 있고(적어도 현재까지 그것이 가장 강력하다), 혹은 문국현이 제기하는 사회투자국가류의 대안에 솔깃할 수도 있다.

하지만, 풀소리님이 쓴 것처럼, 문국현은 민주노동당에는 가장 강력한 적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여야를 막론하고 다른 보수정당 후보들이 잘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그러나 민주노동당 후보들이 열심히 다루는 것들--을 말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한미FTA, 농촌, 대안적 발전전략, 중소기업, 남북경협 등등. (그러나 이미 노무현 정권의 정책프레임에 있던 것들이라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국현이 민주노동당에게 위험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문국현이 아주 뛰어난 어떤 대안을 제기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정치적 입장이 리버럴들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입장이 같다면, 그것이 오히려 실현가능해보이고(당선가능성), 세련되어 보이는(정책역량) 인물에게 투표하는 것이 당연하다.

민주노동당은 정책프레임의 측면에서는 리버럴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구조 안에서 움직이고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얼마전에 포스트에도 언급했지만, 예를 들어 권영길 후보의 경제정책은 오히려 DJ의 벤처정책, 북방정책과 유사하고 심상정의 국제경제정책은 스티글리츠를 연상시킨다. 좌파가 형성해야할 정치의 다른 장소--대중정치가 전적으로 부재한 이 판에서 유능한 리버럴을 상대할 수는 없다.

대중을 주체화시키고, 그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운동정치는 이미 이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같다.(하긴 대선을 운동공간이라기 보다는 집권의 징검다리로 생각하는 순간, 당연한 일이겠지.) 대중들에게, (선거에 제한되지 않게) "함께 이것을 투쟁으로 쟁취합시다"가 아니라 "내가 해드리겠습니다"라는 어법이 전면에 있다. 이것이 "인간이 그 속에서 이 갈등을 의식하고 투쟁으로 해결"(마르크스)하는 영역으로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과는 이미 몇백광년 떨어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이 선거정치의 고유한 한계일지,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대안적인 선거정치, 즉 대중을 수동적 대상으로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선거에 대응할 수 있는 방식이 있는지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민주노동당 경선 속에서 드러난 민주노동당의 '정치'란 그 프레임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점점 더 짝퉁 리버럴에 불과한 무엇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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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포럼, 곧 열립니다.

2007년 여름의 가장 중요한 운동적 사건이라면 우선 이랜드-뉴코아투쟁, 그리고 사회운동포럼.
역사적인 자리가 되길 예상하고 또 기대하는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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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인 노조교육 ; 어떤 시도

광주에서 공공노조 지역지부의 간부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기초 교육을 진행하고 나서 쓴 글입니다.

보다 사회운동적이고 연대지향적이고, 지역운동전략에 기반한 노조운동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러한 운동이념을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간부, 활동가, 조합원에 대한) 노조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은 간간히 지적된다.

나도 그러한 측면에 동의한다. 여러 실천이 중요한 만큼, 대중운동 속에서 형성되는 대안적인 이념에 언어를 부여하고 활동가, 조합원들이 이를 인식할 수 있어야 운동이 구체적으로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의 변화는 대중운동의 실천 속에서 어떤 이념을 추출하고 이를 다시 대중의 언어로 돌려주는 과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가장 일반적인 경로중 하나는 노조 교육이다. 운동의 혁신을 위해서, 운동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한 교육의 변화를 위한 노력과 시도는 간간히 있어왔다. 사회진보연대도 내부적으로 고민하고 교안 구성 혹은 팜플렛 작성을 위한 워크샵 등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은 잠시 중지되어 있지만 민주노총 서울본부가 주관한 “서울지역 미조직비정규직 전략조직화 사업단”의 중요 사업 중에 하나도 교안구성 사업이었다.

나도 이러한 교안 작성 사업(이라기보다는 시도들)에 함께 했지만, 일부러 교안을 작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나마 내가 만들었던 몇 개의 교안도 구체적인 교육 요청이 있었을 때 그때 그때 작성할 수는 있었지만, 불연속적.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구체적인 교육대상을 염두에 두어야 교안작성, 교육 준비가 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이 글은 14일 쓰기 시작해서 블로그에는 지금 올리는 중) 광주지역 동지들의 요청으로 간부활동가교육을 진행했다. 간부활동가의 자세와 역할, 노동권과 임금/단체교섭이라는 다소 일반적인 제목의 교육. 30명 정도의 간부, 활동가, 열성조합원이 함께 했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부분, 노조 교육에서부터 노조의 이념을 혁신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광주 동지들이 나에게 요청한 이유도, 요청한 것도 바로 그런 측면일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다. (실제 교육은 좀 나았던 것 같지만, 교안은 단어나 표현이 난삽. 옆에 조합원들이 “써논 거는 어렵구만”하는 이야기가 들린다. 읔;;)
여튼, 다른 곳에서도 쓰려면 교안 자체는 표현-구성 등을 더 손볼 필요가 있겠다.

누군가에게 참고가 된다면 ; 교안파일(hwp)

내가 주로 반영하려고 생각했던 것, 그리고 기존의 노조교육 교안들에 대한 비판의 지점은 이렇다.

<간부활동가의 활동론 관련해서>

* 20년 전에나 지금에나 똑같은 내용으로 교육해서는 안 된다. 간부활동론과 같은 ‘기초적인’ 것이라도 노조운동이 처한 현실, 정세를 반영해야한다.

* 노조는 ‘운동’과 ‘조직’의 복합체, ‘조직’은 (물질적) 기구와 공동의 이데올로기로 구성된다.
문제는 ‘운동’을 통해서 조합원의 공동의 이데올로기, 이념을 형성하는 것.
(노조는 ‘운동’없이 존재할 수 없다. 운동을 소진하는 제도화-기구의 강화는 노조‘운동’의 무덤)

* 기구의 측면 ; 노조와 국가기구의 비교. 국가기구는 지배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어디에 권력이 있는지를 은폐한다. 그러나 노조는 반대로 투명하게 인식되어야 구성원의 자발성을 지속시킬 수 있다.

* 간부활동가는 공동의 이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조합원 상호간의 대화와 소통을 조직하는 사람이다.

* 노조에 필수적인 ‘운동’은 ①사업장 안에서 현장 투쟁, ②사업장을 넘어서는 사회적 투쟁이 모두 필요 ; 특히 ②를 위해서는 간부들의 집단적이고 일상적인 공동학습이 필수적이다. 또한 사회운동과의 열린 토론이 필요. (ex. 사회운동포럼)

* 간부활동가들은 노조라는 조직이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조직적 제약을 냉정하게 인식해야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용인된’ 조직으로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가지는 한계. 노조는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물신화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주의’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현존의 노조를 조직 하면서도 그것을 지양하는 운동을 내부에서 도입하기 위한 것이다.

* 결론적으로, 간부활동가의 역할은 “노조(조합원 대중) 안에서 운동을 실현(조직)하는 사람”으로 요약할 수 있다.

* 잘 알려진 기존의 교안 중에도
○ 노조를 “사람”과 같이 [두뇌=위원장, 심장=집행부, 척추=대의원.. 운운]라는 유기체로 비유하거나,(플라톤식 유기체론?)
○ 대의원은 ‘부서의 소대장’ 식의 군사적인 비유,
○ 조합원의 다양성은 자본이 좋아하는 경쟁/갈등의 요소라는 입장..
==> 그러나 노동자 조직은 단결의 긴급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주체들의 자발적인 연합으로 사고되어야하고, 노조 안에서도 개인의 소거가 아니라 평등-자유로운 연합이 강조되어야한다.

* 보통의 교안들은 간부의 헌신성, 청렴성 등 도덕적 가치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초등학교 도덕교육에서 배워야할 것들로 사회적 통념을 ‘노조의 용어’로 번안하여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조교육은 사회적 통념의 반복이 아니라 과학적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 되어야한다.

* 마찬가지로, 학습의 중요성, 토론의 중요성, 사회적 연대의 중요성 등은 그냥 말하면 되는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하고,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왜 필요한지 이야기해야한다. (‘자명한’ 것으로 그냥 나열하고 말 때, 그것은 정작 현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공자님말씀이 되고 말 뿐이다.)

<임금, 단체협약과 노동권 관련해서>

* 노동자들의 권리는 노동3권? 그것을 포함하지만 그것은 법적으로 제도화된 시민권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것은 일반적인 노조 교육에서 과대평가되고 있다.)

* 노동자의 권리는 오히려, “노동에 대한 권리”로서 노동권, 그리고 시민권=인권으로 제시되어야한다. (노동3권은 시민권의 한 항목을 법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 그리고 노동권 개념은 “노동할 권리”라든가 “노동에서의 권리”이라는 해석과 쟁점을 형성)

* 노동권, 시민권=인권은 “의무(댓가) 없는 권리”. 따라서 노동자의 요구는 그것이 어떤 제한없이 정당한 천부적인 권리이다. 노동자들이 이것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어야한다.

* 노조의 임단협(요구안과 내용)에서도 노동권을 실현하고, 그것에 시민권=인권을 도입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이탈리아 CGIL의 150시간 교육시간 확보와 같은 것은 그러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노조페미니즘이 가능하게 하고, 노동자가 과학과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 이렇게 노조의 단협, 임협은 단순히 좋은 조항의 나열이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다. 임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장시간-초과 노동을 강요하는 현대자동차의 임금체계는 올바른가와 같은 문제도 제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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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윤상원씨를 등장시키려면.....

정은교 선생이 프레시안에 영화 "화려한 휴가"에 대한 글을 기고하셨군요.
>> 화려한 휴가' 유감 [독자 기고] 항쟁의 주체와 실상 왜곡

좋은 글입니다.
그리고, 이 글에 붙은 덧글이 하나 있습니다. 광주와 지식인에 대한 어떤 분의 짧지만 무거운 언급입니다.
그냥 기사 하나에 댓글로만 묻히기에는 너무 아까운 글이네요. 퍼왔습니다.



윤상원씨를 등장시키려면.....
원문있는 곳(링크)
무념 / 2007-08-15 오후 2:58:40   
추천 17,    반대 1 

광주항쟁은 소위 먹물이라는 자들의 결정적 치부가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휴가의 제작자들은 이러한 미세한 흐름을 표현하기가 두려워 소위 지식인이라는 계층의 활동가들을 통채로 삭제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 실 윤상원씨는 운동권을 제외한 일반 학생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야학을 열성적으로 해 간 의식있는 청년 정도로 여겼었던 것 같습니다. 항쟁이 마무리되고 그가 도청에서의 저항을 주도하고 최후를 맞았다는 애기를 듣고 멍치끝이 띵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부끄럽다는 느낌, 내가 배신자라는 오욕감,  자신의 삶이 그다지 가치있을 것 같지는 않겠다는 뭐 그런 감정이었지요. 한마디로 광주항쟁은 젊은 우리들의 인생관을 크게 뒤바꾸어버린 경험을 안겨주었지요.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지도부에 속한 인물들의 대다수가 끝까지 싸우겠다는 약속을 뒤로 한채 어디론가 숨어버렸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씨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는 군인들의 체포작전이 시작되자 도피하여 서울의 어느 작은 공장 직공으로 들어가 체포될 때까지 숨어 지냈었지요.

박관현씨는 옥중에서 단식항쟁 끝에 운명하게 됩니다. 그가 그리 치열하게 단식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산자로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극심한 자괴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알려지고 전남대 학내에서의 항의데모는 정말 대단했었습니다. 한달여 동안 매일의 데모 끝에 진압경찰들이나 학생들 모두 지쳐서 그저 도로에 앉아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쓴 웃음만 나옵니다. 이렇게 지독하다 할 정도로 데모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학생들 개개인이 느꼈던 그리도 심한 자괴감 때문이었을 겁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데모진압의 강도는 훨씬 강해질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정예부대를 투입하여 데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무조건 떼려잡는 그런 것일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광주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그저 버스를 타려거나 내리는 사람들을 아무 경고도 없이 덤벼들어 검은색 박달나무 곤봉으로 머리통을 내려갈겼습니다. 고시학원으로 난입하여 수업중인 수험생들을 두들겨패고 피흘리는 그들을 질질 끌고 나와 도로에 꿇어앉혀 놓거나 트럭에 태워 어디론가로 데려갔습니다. 충장로 가게에서 일하는 젊은 점원들을 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점원과 함께 항의하는 가게 주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고 일부는 어디론가 끌고 갔습니다. 나중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움직이는 것만 보면 덤벼들어 물어뜯는 미친개, 바로 그들에 대한 지금까지의 인상입니다.

집집을 수색하여 사람들을 폭행한 것은 그야말로 집 또한 안전하지 않겠다는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시외로 도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이미 교통은 두절되었고 시외로 빠져나가다가 포위중인 군인들에게 걸려 변을 당했다는 흉흉한 소문들이 자자했기 때문이었지요.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상무대에서 교육받는 군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어서 우리 동네까지는 수색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무척 다행스럽게 여겼지요.

이즈 음해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거의 모두 잠적해버리고 맙니다. 데모는 즤들이 다해놓고 정작 필요할 때는 한놈도 안보인다. 광주 시내에서 흔히 들렸던 투덜거림들이었습니다. 개학해서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니 모두들 나와 똑같이 행동했다는 걸 알고 참 기가 막히더군요. 소위 먹물이라는 작자들은 그렇게 제 한 몸 건사하기 바빴습니다.

영화에 윤상원씨를 등장시키려면 이러한 먹물들의 행동양태가 반드시 묘사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랬으면 이 영화는 또다른 저항을 받게 되지 않았을까요?

사 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선은 그 당시 나를 무척이나 괴롭혔던 심리상태를 다시 한 번 되새기기가 싫고..... 지금 내 나이 오십하고 하나, 그 영화가 잘됐든 잘못됐든 또 영화감상 시간이 길든 짧든 그 당시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되돌아가기 싫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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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직서를 내고 온 날

병가에 이어서 휴직을 연장하고,

한 동지의 사직 소식을 듣고 술을 같이 진탕 먹고,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술을 먹는 밤.

집에 오는 버스를 타고 중경삼림 주제가인 夢中人(王菲)를 듣고 나서,

어쩌면 우습게도..

럼블피쉬의 "으라차차'를 듣다가 결국 참았던 울음을 펑 울고 말았다.




 
  

음악과 동영상은 다소 무관하지만 음악 때문에, 암튼.
 


몽중인(夢中人),중경삼림 OST




가사는 원곡인 Cranberries - Dreams 의 것

Oh my life is changing everyday
in every possible way
And though my dreams
it's never quite as it seems
Never quite as it seems
 
I know I felt like this before
But now I'm feeling it even more
Because it came from you
Then I open up and see
The person fumbling here is me
A different way to be
 
Ah, la da ah... La...

I want more, impossible to ignore
Impossible to ignore
And they'll come true
impossible not to do
Impossible not to do

And now I tell you openly
You have my heart so don't hurt me
For what I couldn't find
Talk to me amazing mind
So understanding and so kind
You're everything to me

Oh my life is changing everyday
In every possible way
And though my dreams
it's never quite as it seems
'cause you're a dream to me
Dream to me   Ah la la la 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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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공존의 기술 -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공존의 기술 -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이기라.양창렬 외 지음 / 그린비


2005년 가을 이후 파리 외곽 지역을 중심으로 폭발한 (주로 "이주자들의 폭력사태"로 알려진) 소요를 분석한 책. 프랑스에 유학 중인 한국인 연구자들이 썼다. (책의 에필로그로는 발리바르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어찌보면 먼나라 이야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매우 흥미로운 정치적 쟁점들이 담긴 책.

“방리유”는 도시 근교를 일컫는 말이다. 프랑스 도시에서 방리유(근교)는 한편으로는 중산층들의 주택가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시테'라고 불리는 이주민, 하층 프롤레타리아의 열악한 주거지를 의미한다. 이 사건은 당시에 "선진국"이라는 프랑스에서, 그것도 "똘레랑스"의 나라라고 불린 곳에서 일어난 폭력적인 사건으로 많은 충격을 주었다.
 
이 책은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여러 측면에서 접근한다. 프랑스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역사, 국가의 정책, 노동자운동(주로 CGT)의 입장과 활동, 노동시장의 성격 등은 물론이고, 특히 국가의 대응으로서 범죄-치안담론, 이주자의 "배제적 통합"에 대한 정치철학적 비판 등도 다루고 있다.

프랑스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역사가 긴 만큼, 남한에서 생각하기 힘든 쟁점들도 있지만, 많은 부분은 "조만간" 우리에게도 현실화될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부는 벌써 현실이기도 하고.)

극우들이 이주자를 배제하는 인종주의적 의제를 제기하고, 우파들이 그것을 포용하며, 좌파들도 그 의제에 답을 하게 되는 상황에서 이주자와 관련된 쟁점들은 점점 더 우경화된다.(이런 걸 정책프레임 전쟁이라고 할텐데, 미국에서도 우파들이 강한 것으로 유명.)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의 불안정화, 실업의 문제를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로 전가하고자 하는 지배계급의 입장이 확대된다.

우파들은 백인 하층 노동자, 자영업자들의 불만을 이주자들에게 돌린다. 이 과정에서 이주자들을 범죄자로 몰아부치게 되는데, 이는 "사회보장"을 후퇴하면서도 대신 "사회적 안전"을 지킨다는 것으로 쟁점을 이동한다. 이를 위해서 방리유 지역에 대한 억압은 증대되고, 오히려 폭력과 저항을 유도한다. (2005년 사태도 사르코지가 의도적으로 도발했다는 강한 혐의가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남한의 국가가 노동자운동에 대해서 하는 짓거리도 이런 측면이 있는 듯)

치안담론 속에서 이슬람국가의 이주자들은 실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슬람원리주의 테러리스트와 상징적으로 연결되고, “범죄와의 전쟁‘은 ”테러와의 전쟁“과 같은 것으로, 사회적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표상된다.

책은 너무나 많은 흥미로운 쟁점들을 많이 담고 있지만, 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특히 관심있게 본 쟁점 두개만 일단 언급하자.(쟁점들을 요약하는 것도 힘들다; 나머지는 담에 생각나면..)

이슬람 여성들의 히잡 착용 문제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종교적 상징물인 히잡(이슬람식 여성 스카프)을 착용하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입장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법안으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문제는 법안이 아니라 이 안에 담긴, 드디어 폭발한 쟁점들이다.

여기에는 정교분리의 원칙부터, 다문화주의, 이슬람 사회(공동체와 가족)에서의 여성의 지위, 식민주의 등과 같은 쟁점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이런 쟁점들을 여기서 다 소개하기는 힘들겠지만, 다만 “정교분리”원칙에 대해서는; 이것은 애초 대혁명 이후 기독교 교회의 지배로부터 국가를 분리하려는 것이라는 점, 따라서 현재 언급되는 “정교분리”는 완전히 다른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언급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논쟁에 대면하는 원칙으로 “그녀들의 입장에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히잡을 쓰는 이슬람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으로부터 생각하자는 것이다. 심지어 페미니스트들 조차,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서만 이슬람 여성들을 대상화해왔다는 비판.

이슬람 여성들(이슬람 페미니스트들도)은 오히려 스스로 히잡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것이 남성우월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자신을 “무성적인 존재로” 드러내는 역설적인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여성으로서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서.(사진은 마르세유에서 이슬람 여성들의 시위)

이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무엇보다 문제는 히잡을 착용하는 이슬람여성들, “그녀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라져야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녀들이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문제라는 점, 국가가 법으로 금지하고 오히려 그녀들이 학교로부터 철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전혀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의 입장과 이중노동시장

이주자들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입장은 어땠을까? 저자는 그것이 이중적이라고 말한다.(“연대”와 “통제‘의 모순) 한편으로 이미 합법화된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대변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이주노동자의 유입에 반대하고, 이에 따라 불법 이주자들에 대해서는 눈감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프랑스의 노동자운동이 전후 사회적 합의의 한 주체로 자리하면서 노동시장 정책에 대한 입장에 제약이 가해진 상황과도 연관된다. 이러한 이중적 입장은 프랑스 공산당의 몇몇 쟁점들에 대한 모호한 입장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 노동자운동(특히 CGT)가 민족주의적이라는 것은 아닌데,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동유럽 이주노동자들을 비롯한 이주노동자를 조직해왔고, 이들을 대변해온 역사가 있다. 이주노동자 공동체를 형성-지원하고 이들을 대변하려한 노력들을 보면 단지 민주노총에 "가입시켜준" 정도의 활동 이외에는 적극적인 조직화 전략도 지원도 없는 남한 노동자운동의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한 입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주노동자의 합법화가 그나마 상당히 이루어져있다는 사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장기간의 노동자 이주의 역사가 있고, 프랑스 사회에 거의 완전히 통합된 2~3세대가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상황이다보니 남한과 단순히 비교하기는 힘들다. 남한 정부의 극단적인 이주노동자 관리, 불법화가 민주노총에게는 이주노동자의 합법-불법과 무관한 지원이라는 입장을 요구하는 셈이지만, 정부의 입장이 어느 정도 유화적으로 변화할 경우 민주노총의 입장도 모호해질 수 있다.

한편, 노동자운동은 방리유의 소요에 대해서 의미있는 행동을 조직하지 못했고, 입장도 모호했다. 방리유의 소요 이후 불과 만에 쟁점화된 CPE(최초고용계약법) 투쟁은 전혀 연결되지 못했다. 이는 시기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이렇게 된데에는 노동자운동이 조직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 혹은 노조가 조직되어 있는 공공부문, 안정적인 노동시장에 몰두한다는 점도 작동한다고 지적된다.(사회운동적인 성격을 가져온 프랑스의 노동자운동에서조차 난점이었다는 점) 이들 방리유의 청년들은 실업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운동은 일자리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배제되는 이주자들에 대해서 어떤 입장으로 갖고, 또 실천할 수 있을까?
(한편, 이런 지점은 "노동운동을 잘하면 사회운동의 과제들은 다 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니냐"는 노동운동 좌파들의 입장들에 다시 한번 회의적이게 한다. 사회운동포럼 사전 토론에서도 제기되는 논점인데.. 노동운동으로 안되는 것들이 있답니다;;)

그밖의 쟁점들을 간단하게만 메모.

* 시빌리테(시민윤리)의 문제. 그것은 발리바르에 의해서 운동에 필요한 이념의 하나로 제시되기도 하는데, 이게 이주자와 관련해서 프랑스에서 기만적인 성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무례한” 이주자 청년들.. 이런 식의 비방과 이를 범죄와 연결시키는 시도. 정작 문제는 이주자들에게 먼저 “무례한” 국가권력이 문제라고 하겠지만, 개념이 이런 현실에 봉착할 때 어떤 이론적 전략이 필요할까?

* 공동체주의 문제. 이주자들의 (민족에 기반한) 공동체는 긍정적인가? 그것은 공동체주의로 후퇴하는 것은 아닌가? 발리바르는 공동체주의를 강화하는 배제와 추방을 먼저 사고해야하고, 이주자들의 공동체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이도 매우 현실적인 문제.

* 정치의 부재 혹은 소멸의 상이한 양상.. 이주자들, 하층 프롤레타이아는 “대표되지 않음”으로서 정치에서 배제된다. 극단에서 초민족 부르조아지는 굳이 국내정치에서 대표될 필요가 없다. 방리유의 반란은 정치적 생성, 봉기적 생성의 계기일 테지만 그것은 여전히 슬로건도 정치적 목표도 부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치는 어떤 생성의 계기를 가질 수 있을까.. (발리바르가 제기하는 7가지 논점 중에 하나)

* 이중노동시장. 프랑스에서도 이중노동시장이 고착되고, 2차 부문 노동시장(중소영세비정규직 일자리라고 보면 될텐데)에서 특히 이주자들과 백인노동자들이 경쟁한다. 이에 따라 주로 노조로 조직화된 1차 부문(공공부문, 대기업, 전문직)은 오히려 무관심. 일단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최저임금의 지속적인 인상으로 제시된다.(옳다고 본다) 문제는 제한된 일자리에서 경쟁하는 2차 부문 노동시장에서 인종주의적인 대결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점. (남한에서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 적대적인 것처럼)

=====
한편, 극단적인 모습의 방리유를 무대로한 프랑스 영화도 있다.

“13구역”은 도시에서 방리유를 배제하는 방식의 극단을 상상한 영화다. 그곳에서 장관(아마도 내무부겠지)은 이미 콘크리트 장벽으로 고립된 방리유를 핵폭탄으로 날려버릴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나온다.

(마침 오늘 케이블 TV에서 하더군. 실제로 빠리 외곽의 방리유는 도시외각순환고속도로에 의해서 고립되어 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보니, 사르코지가 비슷한 짓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징적 배제를 물리적 배제로 만드는 것은, 몇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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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영구없다~&quot;진중권의 유머?심형래의 유머?

'디워'에 대한 포스팅을 한 번 더하게 되네.

100분 토론에서 진중권이 한 비유 중에 "영구 없다~"가 있다. 이게 아주 재밌는 말인데, 언론이 이상하게 보도하는 바람에 괜한 욕설로 알려지는 중이다. 여튼, 심형래 개그의 본질을 진중권이 패러디한 셈.

대부분의 언론이 "스토리가 없는 것이 ‘영구 없다’와 다를 바가 없다” 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한다. 엥? 황당한 얘기다. 신문마다 100이면 100 기사들이 다 이런데, 기자들이 멀쩡한 말을 전혀 이해할 능력이 안되거나 멍청하게 처음 쓴 남의 기사를 배껴쓴다고 밖에 볼 수없게 만드는 대목. 물론 이 말이 '디워' 영화 욕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핏대올리는 '디워'광팬들도 마찬가지고.

토론 중에 진중권이 한 말은 이렇다.(오마이뉴스의 토론 지상중계만 정확하더만.)

(관객들이) '아리랑' 나와서 눈물 흘렸다. 엔딩 크레디트 올라갈 때 '인생극장'이라 찡하다. CG 볼만하다. 이것 빼곤 없다"며, "문제는 그러면서도 애국 코드가 아니다, 민족 코드가 아니라고 하니 황당하다. 영구가 '영구 없다' 하는 것과 똑같다"

'디워' 광팬들이 민족주의, 애국주의 논리로 말하면서도 곧바로 그게 아니라고 핏대를 올리는 모습에 대한 언급이다.

심형래의 "영구 없다~"개그가 재밌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영구가, "영구 없다~"라고 말한다. 관객들은 영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영구는 단지 "말"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 모순을 우리 모두 알지만 영구만 모른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것과 말의 불일치가 일어나고 그것을 모르는 영구를 우습게 만든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바로 그것인데, '디워'광팬들이 "영구 없다~"로 집단 개그를 해주고 있는 시추에이션.
그러니 그것을 보는 관객들은 웃을 수밖에 없지 않나.

심형래의 위트있는 개그를 그의 광팬들이 (충실한 팬들답게?) 따라하는 셈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 심형래가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들을 광팬들은 정말로 모른다는데 있다. 그러니 이제는 그것이 그냥 코메디가 아니라 블랙코메디가 될 수밖에. (여기선 역사가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반복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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