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열아기 밤새 구금…단속 아닌 ‘사냥’
미등록 이주노동자 ‘인권침해’ 단속 현장
한겨레 황예랑 기자
» 미등록 이주노동자 ‘인권침해’ 단속 현장
합법 체류자까지 마구잡이 연행 시도, ‘펄펄’ 열이 끓는 이주노동자의 어린 자녀까지 보호실에 밤새 구금 ….

지난달 시작된 법무부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이 최소한의 인권마저 무시한 채 대대적으로 벌어져, 당사자는 물론 국내 인권단체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이주노동자 변호인단, 이주노동자 차별철폐 공동행동 등은 1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출입국관리소의 단속 과정에서 있었던 인권 침해 사례를 고발하고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고소와 국가배상청구소송 등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고용허가제 시행 3년이 지나면서 취업 기한이 끝난 이주노동자가 급증하고 있다”며 22만5천여명으로 추산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을 시작했다.

발목 부려져도 “네 책임이니 참아라” 뭇매
“마구잡이 연행 중단하고 관련법 개정해야”

■ 치료보다 단속이 먼저=파키스탄 출신 노동자 왈리드(37)씨는 지난달 23일 일하던 서울 성수동의 한 공장에 들이닥친 단속반을 피해 옥상에서 뛰어내리다 왼쪽 발목이 부러졌다. “너무 아프니 병원에 데려다달라”고 호소했지만 단속반 직원들은 “도망친 네 책임”이라며 묵살했다. 왈리드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약이라도 달라’고 말했지만, 되레 ‘조용히 있으라’며 여러 차례 맞았다”고 말했다. 6시간 만에 도착한 병원에선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지만, 단속반원들은 그를 목동 출입국관리소에 데려가 구금했다. 그는 다음날 석방된 뒤에야 친구들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지난달 28일에는 중국인 ㅇ씨가 한 식당에서 일을 하다 생후 7개월된 딸과 함께 연행돼 서울출입국관리소 보호실에 밤새 구금됐다. 아이가 장염 때문에 밤새 고열에 시달렸지만, 출입국관리소는 ㅇ씨의 치료 요구를 묵살했다. 출입국관리소 쪽은 다음날 찾아온 ㅇ씨의 남편에게 보증금 1천만원을 받은 뒤에야 아픈 아이를 풀어줬다. 이어 사정을 알게 된 이주노조가 항의하자 보증금 300만원을 내는 조건으로 며칠 뒤 ㅇ씨를 석방했다.

■ ‘살색’ 다르면 무조건 연행=지난달 20일 저녁 서울 성수역 부근에 있던 ㄱ(35)씨 등 방글라데시·파키스탄 출신 5명에게 인천공항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적법체류자였던 ㄱ씨는 “보호명령서를 보여달라”고 했지만, 단속반원들은 다짜고짜 연행을 시도했다. 양쪽의 실랑이가 이어지며 몸싸움 끝에 ㄱ씨는 전치 3주의 상처를 입었으나, 출입국관리소는 ㄱ씨의 일행 중 1명이 미등록 상태였다며 ㄱ씨 등 4명을 공무집행방해로 고소했다. 민변의 윤치환 변호사는 “공권력을 행사할 때 ‘살색’으로 차별하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말했다.

■ 국가기관 ‘구제’는 뒷전=다음달 귀국을 앞두고 “7년 동안 일했던 공장에서 퇴직금 930만원을 받게 해달라”며 노동청에 구제신청을 냈던 인도네시아 출신 ㅇ씨는 지난달 노동청 근로감독관한테 ‘뒷통수’를 맞았다. 경기지방노동청 수원지청에 ㅇ씨가 출석하기로 했던 당일 사장이 경찰에 ㅇ씨를 신고한 것이다. 수원지청 근로감독관은 ㅇ씨를 보호해주기는커녕 경찰을 피해 지하실로 달아난 그를 붙잡아 경찰에 넘겼다.

노동부는 ‘체불임금 청산 등 권리구제가 이뤄진 뒤 출입국관리법 위반 사실을 해당기관에 통보하라’는 지침을 두고 있지만, 근로감독관은 “알지 못한다”고 발뺌했다. 권영국 변호사는 “강제퇴거될까 무서워 이주노동자들이 권리구제 신청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사업주가 악용하고 있고, 노동부 공무원은 이를 방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개선책과 해명=이에 민변의 윤치환 변호사는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불법체류자 강제단속의 법적 근거가 불명확하고 긴급보호조항을 남용하고 있어 인권 침해가 우려된다’며 법무부에 관련법 개정을 권고했지만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정부가 지금이라도 인권 침해적 단속을 중단하고 관련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조사과는 “필사적으로 도주하거나 저항하는 불법체류자를 잡으려다 보니 몸싸움이나 직원들의 부상 등 단속의 고충이 크다”며 “특히 달마다 몇천명씩 불법체류자가 폭증하는 상황을 고려할 때 단속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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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3 16:58 2007/09/13 16:58
호남 차별에서 이주노동자 차별로
[칼럼] 외국인 100만 시대, 지역주의 그리고 07년 대선

“이주노동자들은 어디서나 3D 업종 등 가장 낮은 사회계층에 편입되고, 그에 따라 국내 노동자들은 계층상승의 덕을 보게 되지만, 극우파의 선동에 가장 쉽게 넘어가는 계층이 바로 그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대신 방패막이가 돼주기 때문일까? 유럽 땅에서는 한국에서와 같은 지역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 홍세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칼 맑스의 자본론이 영국 자본주의 하의 비참한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는 그러한 어려운 상태에 있는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주체가 될 것을 상정했다.

이주노동자를 차별한 유럽 제국주의

하지만,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그렇게 혁명적으로 가지는 않았다. 선진국의 노동자계급의 보수화를 설명하는 대표적 논리는 식민지에서 수탈한 이윤을 국내의 노동자계급에게 나누어 주어 ‘노동귀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구체적 방식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영국의 경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한 만큼 식민지 경영의 이익이 많았지만, 노동자계급에게는 그 식민지 중 특히 미국 등 신대륙으로 이민을 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더 구체적인 희망이었다.

반면 비스마르크가 이끈 독일은 프랑스 등 유럽제국의 과시적 식민지 경영의 낭비성에 주목하고 자국 내 산업발전에 집중하는 한편, 사회보장제도를 세계 최초로 도입하여 노동자계급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며, 강력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국가중심주의로 나아간다.

한편 1800년~1950년 간 인구가 4배로 증가한 영국, 독일과는 달리 1.5배 증가에 그친 프랑스는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해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상당 부분 대응한다. 프랑스 사람들이 이웃한 벨기에 사람들을 놀리는 것에는 파업을 무력화시키려고 충원되는 벨기에 노동자들에 대한 반감이 배경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민으로 부족한 인구를 충원해 오던 프랑스는 2차 대전 이후 출산율 감소가 전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북아프리카 등 옛 식민지 출신을 많이 받아들였다. 전후 영광의 30년 동안 프랑스의 복지국가는 밑바닥을 외국인 내지는 이민자가 채워주어서 가능했던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 2005년 파리 외곽에서 발생한 시위로 자동차가 불에 타고 있다.
 
이제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종래에는 이민을 보내던 나라들도 요즘은 이민을 받게 되어 오늘날에는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인구의 상당한 비율이 외국인 내지는 이민자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 보수화의 계기, 재일 한국인

일본의 산업화 시기인 1910년 이후에는 이주 조선인들이 주로 이주노동자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략 1960년~1990년 사이 압축적으로 성장한 한국과는 달리 1890년경부터 꾸준하고 완만한 성장을 경험한 일본의 경우 공업 도시들은 기존의 인구 밀집지역을 바탕으로 나타났고 한국에서와 같은 대규모, 원거리 이농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서울, 경기, 인천의 인구가 50년 사이에 20% 미만에서 50% 선으로 증가한 한국과 대조된다. 그런 가운데 대도시에서 노동조건이 열악한 직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조선인, 중국인 그리고 일본 본토인 혼슈 섬 이외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 출신들이었던 것 같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에는 사회적 불만을 소수자에 대한 학살의 형태로 표시하였다(수천 명의 조선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재일교포들은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반영하는 한편 단일민족의 신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수민족의 포용이 쉽지 않은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현재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수성은 사회적 이동이 크지 않았던 산업화의 역사와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로 확인되는 ‘일본인 이데올로기’가 1950년 한국전쟁 특수를 기반으로 한 전후 재건의 과정에서 그다지 도전받지 않은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는 박정희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일본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가 근대 일본의 발전 노선에 매료되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듯하다.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고 63년 대선에서 영호남의 농민층의 지지에 힘입어 승리한 그는 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이루고 월남 참전을 결정하는 한편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추진해 나간다.

박정희, 화교 차별에서 호남 차별로

박정희가 강력한 민족주의를 추구하고 화교를 억압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 결과 상당수의 화교는 한국을 떠나가고 한국에는 의미 있는 규모의 소수민족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호남을 포위하는 형태’의 지역주의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승만과 조봉암이 대결한 56년 대선과 박정희와 윤보선이 대결한 63년 대선에서 영/호남 구도는 전혀 찾을 수 없다. 56년 선거에서 이승만의 득표율은 지역적 특성을 찾을 수 없다. 박정희가 윤보선을 15만 6천 표 차(42.6% 대 41.2%)라는 박빙의 승부 끝에 꺾은 63년 선거에서 박정희는 영호남 농민의 지지를 받아 윤보선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67년 선거에서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윤보선의 득표율이 38.9%로 하락한 반면 박정희의 득표율은 48.8%로 크게 상승했다. 박정희의 득표율 상승이 두드러진 지역은 서울(28.6% → 43.7%) 부산(45.6% → 61.9%), 경북(43.1% → 60.7%), 경남(56.9% → 65.6%)으로 당시 경제개발의 혜택을 보고 있던 서울과 영남지역이었다.

경기지역도 29.9%에서 38.8%로 지지율이 올라갔는데 대체로 지지율이 올라간 지역은 공장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반면 전남, 전북에선 득표수는 제자리, 득표율은 감소한다.

   
  ▲ 표 : 박정희의 득표율 변화
 

그런데 왜 전남과 전북에서 투표성향의 변화가 다른 지역과 다르게 나타났을까? 나는 경제적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경제는 경제계획에서 가격결정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공업화 정책과 저곡가 정책은 호남 경제를 악화시켰고 서울, 영남 등 공업지대가 있는 지역으로 대규모 이농을 가져왔다.

호남, 저곡가 정책과 SOC 배제에 피해

그런데 농업경제는 호남만의 문제가 아니었는데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 공업지대 건설 등에서 호남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호남지역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이는 호남인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

67년 대선의 구도가 지속될 경우 박정희가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이란 젊은 스타 정치인의 출현과 김대중으로의 후보 단일화 이후 치러진 71년 선거는 67년 선거의 구도를 무너뜨린다.

김대중은 호남 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승리하였고 부산에서도 거의 전국득표율에 유사한 수준을 유지했다. 전국적인 표차는 상당한 것이었지만, 이는 박정희가 경북과 경남에서 지역성을 기반으로 몰표를 얻은 데 힘입은 바 컸다. 다시 선거로는 이길 수 없다는 박정희 정권의 인식은 유신체제로 넘어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78년 총선에서 김영삼이 이끄는 야당이 득표율에서 승리함으로써 이런 생각이 근거가 있었다는 것이 반증되었다.

72년 이후 ‘호남차별’은 모든 부분에서 노골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사회에서 지역주의는 이미 그 전에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김대중의 등장과 함께 지역감정이 출현했다고 이야기되는 것은 그 이전까지는 호남차별이 경제정책 등을 통해 개인에게 직접적이지는 않게 진행되다가 그 이후에는 공무원 인사차별 등 개인에게 직접적인 방향으로 노골화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호남 이농민은 이주노동자

호남의 인구는 56년 전체 인구의 23%에서 71년 19%로 완만한 감소를 겪었지만 이후 지속적인 인구 감소로 88년에는 전체 인구의 13%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는 56년 32%에서 88년 29%로 거의 감소를 겪지 않은 영남권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서울 등으로 이동한 호남 사람들은 ‘이주노동자’ 군을 형성하였고 기존 서울 사람들에게 일종의 ‘계층상승’ 의식을 가져다주는 한편, ‘전라도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해’ 따위 일종의 ‘왕따’ 현상이 서서히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말 박정희 체제는 여러 가지로 위기를 겪었다. 60년대 박정희 체제의 노선은 대체로 메이지유신에서 1920년대까지의 일본의 노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일본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한일수교 자금, 월남전 특수, 일본과의 분업체제 형성 등으로 어렵지 않게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70년대가 오자 상황은 달라졌다.

미국과 중국의 접근 및 닉슨 독트린은 위기의식을 고조시켰고 7.4 공동성명과 유신체제 이행을 지나 ‘자주국방’으로 상징되는 국방력 강화정책으로 나아갔다. 박정희 체제의 노선이 30년대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 노선에 좀더 가까워지며 미, 일 및 국내 대중과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베트남의 공산화와 미군 철수를 공약한 카터의 등장은 박정희 체제를 더욱 구석으로 몰아갔다. 박정희 체제는 ‘자주국방’에 더욱 매달렸고 이는 경제적으로도 군수산업에 대한 일종의 위장책이었던 중화학공업 과잉투자로 이어졌다. 78년 총선 패배, 미국과의 갈등, 79년 제2차 오일쇼크, 부마사태로 고조된 갈등은 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박정희 저격으로 이어졌다.

이후의 정치적 공백은 79년 12월 12일 군부내 사조직 그룹의 쿠데타로 일단락되었다. 그 군부가 정치권력을 합법적으로 장악하는 과정에서 80년 5월 광주의 비극이 나타났다. 이 비극이 서울, 부산, 대구가 아닌 하필 광주에서 일어난 것은, 그리고 고립된 것은 박정희 시대의 호남차별 역사와 연결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80년 5월은 5공의 시작이었지만, 박정희 체제의 정리이기도 했다.

민주화와 호남 차별의 약화

5공은 70년대에 박정희가 부딪혔던 미, 일과의 갈등을 해소했다. 자주국방은 폐기되었고 일본과는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유화책으로 일관했다. 아웅산 테러 이후에도 대북 강경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경제적으로도 물가안정 속의 고성장을 이루었고 80년대 덩샤오핑의 개방과 고르바초프의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88올림픽을 준비하며 한국은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러한 눈부신 성공에도 불구하고 5공은 국내정치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80년 5월의 사건은 급진적 저항세력의 폭발적 성장으로 이어졌다. 85년 총선에서 역시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끈 신민당은 기호 4번임에도 여당에게 득표율에서 승리했다. 87년 개헌정국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5공은 좌초하고 현재의 헌법이 제정되는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87년 이후 2007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권력의 분산, 정권의 교체, 시민 사회의 성장, 투명성의 증진 등 여러 가지 가치로 평가할 수 있지만 빼 놓을 수 없는 지점은 ‘호남차별 및 지역주의의 극복’이라 할 것이다.

87년 선거의 결과는 극단적 지역주의의 표출로 암울해 보였다. 하지만 92년 대선에서, 30년간 특혜를 누리던 TK 지역은 다시 후보를 내지 못했고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그는 당선되어 하나회를 청산하고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고 여러 가지 자유주의적 개혁을 단행했다. DJP 연합이 이루어졌을 때 충청은 호남의 편에 섰고 TK와 PK가 분열되면서 김대중은 당선되었다.

분열만 없으면 호남을 버리고도 불패로 보였던 이회창은 호남인이 영남 출신의 스타 정치인 노무현을 지지하고 나서자 패배했다. 이제 한나라당 경선에서 호남이 지지하는 후보가 영남이 지지하는 후보를 꺾는 일이 벌어지며 호남에서 한나라당의 지지는 올라가고 있다.

아직 영호남의 감정은 남아있다. 그러나 97년 선거를 계기로 호남차별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호남은 앞으로 대선에서 최소한 거부권을 계속해서 가질 것이며 적어도 호남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고히 하지 않는 후보는 당선이 쉽지 않을 것이다.

또다른 호남인, 외국인 노동자

이제 한국 사회에서 과거와 같이 특정 지역을 배제, 차별하는 방식의 지역주의가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외국인이 방패막이가 돼주는’ 상황이 왔기 때문이다.

   
  ▲ 안산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열린 다문화가족협회 총회.
 
중소기업 3D 업종 취업을 시작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이주노동자는 유흥, 식당, 건설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확대되고 있다. 2007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100만을 넘어섰다. 2005년에 총 혼인의 13.6%가, 2006년에 총 혼인의 11.9%가 외국인과의 혼인이었다. 한 해 80만, 90만 명씩 태어나는 시대가 가고 한 해 50만 명 미만이 태어나 이미 인적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되어 버린 한국은 앞으로 외국인 이주노동자 없이는 경제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이주노동자, 이민자, 인종적 소수자의 문제는 이제 새롭게 한국 사회의 부담으로 등장하고 있다. 농림어업 종사 남성 혼인의 40% 이상이 외국인을 배우자로 하는 것이었다는 통계는 농림어업 계층의 2세들의 40%는 모국어가 한국어가 아니라는 것을 예고한다.

이러한 집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그들은 공무원이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정치인이 되는 데 문제가 없을까? 과거 백인계, 흑인계 한국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차가운 대응은 ‘그런 문제 없을거야’라는 낙관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호남차별이 발생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특히 영남에 대한 ‘상대적 소수’였다는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호남 자체의 단결은 차별의 극복을 위해 충분하지 않았다. 변화는 선거에서의 연대이든, 지식인의 개입이든, 제도적 보완이든 비호남인의 행동이 있을 때에만 이루어졌다.

97년, 2002년 대선은 그 변화가 극적으로 표현된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소수자의 문제가 선거를 통해 해결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호남차별 문제와는 달리 이주노동자, 이민자, 인종적 소수계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아마 없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한국의 유권자 중 그 비율이 20% 이상이 된다면 비슷하게 해결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날은 너무 멀다. 프랑스에서 헝가리 이민자의 후손인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이민을 받은 지 200년이 지나서였고, 미국에서 흑인 오바마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까지는 노예 해방 이후에도 10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인종적 소수자의 문제는 결국 인권의 개념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남들이 인종차별이라고 지적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007년 09월 12일 (수) 13:47:24 김영진 / 국제정치 연구가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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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3 15:18 2007/09/13 15:18

낮에 노동부에 출석해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얼마전 비자문제로 상담했던 파키스탄에서 온 아딥(가명)씨였는데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더니 한국사람을 바꿨다. 그런데 아딥씨가 수화기를 바꿔 준 사람은 경찰이었다. 그는 아딥씨가  사기결혼 혐의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했다. 이미 한국인 여성과 브로커는 범행을 자백했다고도 덧붙였다. 그런데 아딥씨만이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딥씨를 만나본 것은 상담을 위해 한 두 번정도 였으므로 그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났을때 받았던 느낌은 뭐랄까 그냥 평범하고 착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인상이  판단의 전부는 될  수 없으므로 나는 일단  경찰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미리 잡혀있던 약속때문에 바로 아딥씨에게 가 보지는 못했고, 저녁 늦게가 되어서야 니아즈씨와 함께  갈  수 있었다. 니아즈씨 역시  아딥씨를 잘 알지는 못했으나 주말마다  금촌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만나 안면이 있었고 아친을 아딥씨에게 소개해 준 인연도 있다. 그래서인지 내가 같이 가자고 부탁하자 고맙게도 선뜻  나서주었다.


밤9시까지 면회시간이 마감이라기에 외곽순환도로를 눈썹 휘날리게 달려갔지만 워낙 늦게  출발한 까닭에  도착하니 8시45분이었다. 가까스로 면회신청에 성공한  후 조금 기다리자 아딥씨가  나왔다. 아딥씨는 두려움과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면회실로 들어왔다. 니아즈씨가 먼저 파키스탄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금 있다가 아딥씨가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더니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면회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하는 대화라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아딥씨의 말을 저쪽에서도 알아듣기 힘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받아서  통화를 해보니  상대방은 아딥씨가 예전에 일했던 공장의 '사모님'(사업주 부인)이었다.


'사모님'은 경계가 느껴지는 말투로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내가 이주인권단체에서 왔다는 것을 밝히자 조금은 안심하는 듯 했다. 그리고 아딥씨가 죄를 지을 사람이 아니라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사모님'으로부터 들은 말에 따라 지금의 상황을 종합하면 대충 이렇다. 오랫동안 '사모님'의 공장에서 일해 온 아딥씨는 너무나 착실하고 일을 잘 해서 공장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장도 잘 되고 아딥씨도 잘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많았고,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한 결혼정보업체를 알게 되었다. 그곳을 통해  한국여성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그 전까지 '불법체류'한 것에 대해 벌금을 내야했다. 벌금이 무려 700만원이나 나왔는데 회사와 친구들로부터 빌려서 겨우 낼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아딥씨는 결혼한 여성이 원하는 경제적 지원을 제대로 해 줄 수가 없었다. 결혼한 여성은 결혼정보업체에 강하게 항의를 했고, 결혼정보업체 역시 아딥씨를 안좋게 보게되었다. 그런 와중에 비자심사를 하던 출입국관리소에서 위장결혼이 의심된다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였고, 경찰서로 끌려온 여성과 결혼정보업체사장은 위장결혼이 맞다고 바로 자백을 한 것이다.


그래서 '사모님'은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지 못한 자기 탓이 크다며 나에게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겠냐고 계속 물었다. 하지만 정황을 듣고보니 위장결혼으로 판단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나 역시도  별다른  뾰족한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딥씨가 처음엔 비자취득을 목적으로 했었어도 이왕  결혼신고까지 한 이상 실제로 잘 살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모님'에 따르면 결혼생활이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은 아딥씨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아르바이트라도 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옮겨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면회를 마치고 담당 외사계 형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딥씨에게 적용되는 법은 '공증증서원본등부실기재죄'라고 하고,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고 한다. 아딥씨의 경우 배우자와의 나이차가 10년 이상이고 동거 등 실제결혼관계가 거의 유지되지 않았고, 배우자와 결혼중계업자가 이미 자백한 상태이기 때문에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구치소에서 한 달 정도 있으면서 재판을 받고 1심 판결이 나오면 바로 외국인보호소로 보내져 강제출국된다고 한다.


나는 이번에 이런 일을 처음 겪어보지만 실제 이런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대부분 중국인들이 많은데 파키스탄 사람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을 이야기하던 담당형사조차도 "위장결혼한 건 잘못이지만 우리사회에 필요한 이런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요즘 들어 TV등 언론에서 위장결혼 또는 사기 결혼한 외국인들이 적발되었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보도하곤 한다. 그런 뉴스를 접하게 되면 그냥 '국제결혼이 문제가 많구나'하고 지나쳐버리기 쉽상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결혼할 의사도 없으면서 거짓으로 결혼하는 것일까? 물론 정답은 체류자격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체류자격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일까? 물론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은 전문적인 능력이 있거나 한국에 많은 돈을 투자한 사람들로 제한되어 있다. 출입국법상 단순 기능 인력이라고 불리우는 일반 노동자들은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체류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위장결혼이라는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남성과 결혼해서 오는 외국여성 중에 발생하는 위장결혼 역시 경우는 다르지만 원인은 높은 이주규제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글을 읽는 독자들께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돈 없고 별다른 전문기술도 없는 사람들은 우리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들인가? 이런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혹시 한국인 중에도 돈 없고 전문기술도 없는 사람들은 다 내보내길 원하는 게 아닐까? 돈 없고 능력 없는 사람들을 국가가 보호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적 연대는 대한민국의 국경을 넘을 수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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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1 00:29 2007/09/11 00:29

여수외국인보호소화재참사 이후 국가인권위는 이주관련단체들과 함께 외국인보호소 방문조사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조사는 지난 6월에 이어 두 번째로 하는 것이다. 지난 6월 방문조사때는 보호외국인이 거의 없어 조사의 실효성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부의 합동단속이 시작되고 있어 그때보다 훨씬 많은 보호외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있었던 화성외국인보호소 조사작업에 참여하였다. 화성보호소에는 현재 320여명의 외국인이 수용되어 있다. 두 번째 방문하는 것인지라 첫 방문 때와 같은 긴장감은 훨씬 덜했다. 하지만 첫 방문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조사해야하는 까닭에 육체적인 피로는 훨씬 높았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는 얼마전 서울 성수동에서 단속된 이주노조 조합원도 있었다. 철창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자  한 번에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이주집회 등에 열심히 참여한 열성 조합원이었다. 그는 이주노조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이곳에서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멸시를 받고 있다고 했다.

만19세의 우즈베키스탄 청년은 손가락을 다치는 산재를 입었으나 제대로 치료가 종료되지 않은채 단속되어 들어와있었다. 15살때  한국에 들어와 20살도 안된 나이에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굽히지 못하는 장애를 얻었다.

이 우즈베키스탄 청년을 비롯해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단속되어 들어온 사람들이 이번 조사에서는 많이 발견되었다. 합동단속이라는 이름하에 출입국직원 뿐 아니라 일반경찰들도 외모나 피부색이 달라보이면 무조건 검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사를 다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려는 나를 붙잡고 이야기한 베트남 노동자는 임신 중이던 부인이 통증을 호소하였음에도 2시간 가까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계속 단속을 진행했음을 이야기하며 다시 분노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뺨을 몇 차례 맞았다고 했다. 단지 수갑찬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려했다는 이유로.

지난 2003년 명동성당 농성에도 참여했던 한 네팔노동자의 사연은 더욱 기구했다. 공장동료가 길을 가다 단속이 되었고 그는 일하는 공장으로 앞장서라는 협박과 구타에 못이겨 그가 일하던 공장으로 출입국직원을 데리고 왔다. 그는 용케 옥상으로 도망쳤으나 출입국직원들이 사장을 협박하여 사장이 직접 그를 잡아서 출입국직원에게 인계하였다. 아마도 도망간 사람을 넘기지 않으면 벌금을 높게 부과하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손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필사적으로 도망가려 했으나 사업주는 '미안하다'며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다음날 면회를 와서도 사업주는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무엇보다 마음이 안좋았던 것은 얼마전 나와 함께 노동부에 출석했던 라하만씨 부부를 만난 것이다. 라하만씨 부인은 한국에 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았지만 남편과 함께  단속이 되어 곧  강제추방될 것이다. 라하만씨는 나의 손을 잡으며 '미안하다'고 했다. 왜 그가 나에게 미안해야 하는거지? 나는 할말이 별로 없어서 그저 잘가라는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오전9시반부터 시작한 오늘 방문조사는 저녁6시반이 넘어서야 끝날 수 있었다.

화성이라는 이름과 어울리게 화성보호소 주변은 황량한 개활지 뿐이다. 황량한 분위기에 날씨까지 구름이 잔뜩끼어 마음이 더욱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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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8 00:06 2007/09/08 00:06

방금 아프간 인질 석방에 합의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정말 다행이다. 지난번에 희생된 두 분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나머지 생명들이 더 이상 희생되지 않아 불행중 다행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한국정부가 진작 사태의 심각성을 판단하고 움직였더라면 희생된 두 명의 목숨도 살릴 수 있었지 않았나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해 한국의 반전운동은 이렇다할 역할을 하지 못한 것 같다. 몇 번의 철군촉구 집회를 중동언론들이 관심있게 취재해가긴 했지만 그것이 어느정도의 역할을 했을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한국정부의 노력이 이번 사건에서는 두드러져 보인다. 이런 일이 있게 만든 원인제공자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합의조건을 보면 그동안 탈레반측이 계속 요구했던 수감자 석방 맞교환이 빠졌다. 한국군 연내철군과 선교중단이 주된 합의내용이다. 사실 한국정부가 연내철군을 합의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탈레반측과 직접협상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과 아프간 정부는 그동안 계속 훼방만 해 온 것이 분명해보인다. 미국은 협상기간 동안 계속해서 군사작전을 펼쳤다.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의 요구를 왜곡하거나 수감자석방은 절대 안된다는 입장만을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이 애초 입장을 철회하고 한국정부와 인질석방을 합의한 이유는 무엇일까? 며칠전부터 언론에서는 사우디정부를 통한 탈레반 압박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었다. 이번 인질사태에  대해 서방언론과 정부는 대체로 무관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중동의 언론과 여론은 인질들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이들이 한국인 인질들에 대해 우호적일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인질들이 대부분 봉사단원이라는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이 대부분이라는 것도 주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도라는 것, 어찌되었든 궁극적으로는 선교가 목적이었다는 것은 불리한 요인이다. 그러나 중동사람들에게 한국은 아직은 서방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80년대 한국에서 강력한 반미운동이 벌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비록 지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한  나라이지만, 그래서 어찌보면 교전상대국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미국이나 영국처럼 바라보지는 않는 것 같다.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이런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언제 바뀔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국이 영국처럼 미국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친미국가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순간 지금까지의 우호적인 이미지는 순식간에 바뀌어버릴 것이다.

이번 사태는 한국이 그 갈림길에 와 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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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8 23:39 2007/08/28 23:39
고용허가제 3년… 외국인근로자가 털어놓은 '현실'
"때리는 사장님 아직도 무서워요"
"월급 제대로 못받고 야근은 늘 우리 몫"
재계약은 '사장' 뜻에 달려 눈치보기 급급
"성과 거두려면 이직 자유 있어야" 한목소리


고용허가제 시행 3주년을 맞아 19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외국인노동자 차별 철폐 집회에 참가한 한 여성노동자가 붉은 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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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체에서 바라본 외국인근로자
• 고용허가제 3년… 외국인근로자가 털어놓은 '현실'

지난해 1월 인도네시아에서 온 A(28)씨는 ‘때리는 사장’이 무서울 정도다. 경기 수원의 한 공장에서 프레스 작업을 하는 그는 “사장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외국인노동자들을 폭행한다”고 말했다. “방글라데시 출신 동료는 맞는 게 너무 무서워 도망쳤다”는 말도 전했다.

1년 전 한국에 와 경기 파주 가구 단지에서 일하는 네팔인 B(33)씨는 “주변에 월급 조차 제대로 못 받는 친구들이 있다”며 “공장에 일이 없으면 외국인노동자들은 일 거리도 주지 않고 월급도 물론 없다”고 억울해 했다.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고용허가제 실시 3년을 앞둔 14일 열린 한 세미나에서 “고용허가제도가 우리나라 외국 인력 정책의 획기적 전환점이 됐으며 성공적”이라고 말했다.

외국인노동자들의 권익이 크게 신장됐다는 자화자찬이다. 그러나 정작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의 시각은 정반대였다. ‘현대판 노예제’로 불린 산업연수생제도보다는 그나마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인권 침해는 제자리라는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여전한 부당대우

18일 경기 오산이주노동자센터에는 다급한 전화 한통이 울렸다. 이날 병원에 입원한 방글라데시 노동자의 전화였다. “회사에서 오후5시30분께 퇴근 카드를 찍게 하고 저녁 밥도 안 주고 계속 일을 시켰다. 회사를 옮기겠다고 항의하자 무자비하게 때렸다.”

한국 생활 2년6개월을 맞은 ‘중고참’ 스리랑카 노동자 C(30)씨도 한국인과 차별하는 부당 대우가 가장 큰 불만이다. 경기 김포시 한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하는 그는 “일과 후 하루 4시간씩 더 하는 야근은 언제나 외국인들의 몫”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네팔인 노동자는 “얼마 전 네팔인 노동자가 휴일도 없이 8개월 동안 매일 밤 늦게 혹사 당하다 자살 기도를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며 가슴을 쳤다.

고용허가제는 외국인노동자에게도 한국인과 똑같이 노동관계법을 적용해 산재보험 최저임금 노동3권 등 기본적 권익을 보장토록 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권운동사랑방에 따르면 고용허가제 시행 이후 외국인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10% 정도 떨어졌고, 노동시간은 273시간에서 280.4시간으로 오히려 늘었다.

직장도 제대로 못옮겨

방글라데시 출신인 이주노동자 D(25)씨는 3년 전 고국을 떠난 뒤 한 번도 못 본 가족들이 보고 싶다. 비행기 값도 문제지만 매년 계약을 경신해야 하기 때문에 회사 눈치가 보인다. 더 큰 걱정은 한국에서 더 일을 하려면 회사가 시키는 데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3년의 합법 체류 기간이 끝난 뒤 회사가 자신을 원해야 바로 일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6개월 뒤 재입국 할 수 있지만 보장도 없는데다 돈도 많이 든다. 한국 체류 여부는 100% ‘사장’ 뜻에 달려 있다. 그는 “더 돈을 벌고 싶지만 회사를 뛰쳐나간 뒤 단속의 눈길이 두려워 하루도 마음 편히 자지 못하는 친구들이 떠오른다”며 말끝을 흐렸다.

이주노동자노조 마숨 사무처장도 “정부는 고용허가제 이후 입국 비용이 700달러 정도라고 하지만 스리랑카 네팔 베트남 이주노동자의 국내 입국 비용을 조사해 보니 실제로는 1만 달러 가까이 들었다”고 말했다. 고용허가제가 겉돌고 있다는 의미다.

외국인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이 제도가 직장 이동의 자유를 사실상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고용허가제는 예외적으로 3년간 3, 4차례의 이직 기회를 주지만 회사가 망하거나 회사가 근로계약을 해지한 경우 등 불가피한 사유로 한정하고 있어 실제 혜택을 받는 외국인노동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호르헤 부스타만데 유엔 이주민특별보고관도 3월 유엔 인권이사회때 “한국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이동권 제한은 인권침해 여지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고용허가제의 개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이 문제는 내국인 노동자의 일자리 등과 얽혀 있어 섣불리 개선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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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7 13:39 2007/08/27 13:39
두번째 이주노동자 영화제 '무적활극'
오는 31일부터 전국 주요 이주노동자 거주지서 개최
 
두 번째 이주노동자 영화제가 오는 31일 서울 개막전을 시작으로 오는 10월28일까지 전국 주요 이주노동자 거주지에서 열린다.

지난해 처음 열린 이주노동자 영화제는 3천명이 다녀왔을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이주노동자 영화제 집행위원회는 인기비결을 ‘지역상영전’이라고 귀뜸한다. 올해도 서울을 비롯해 안산, 제주, 대구, 의정부, 용인, 인천, 마석, 여수, 김해 등 이주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주요지역에서 릴레이로 펼쳐질 예정이다.

올해 이주노동자 영화제가 개막작으로 선택한 것은 세르지오 아라우 감독의 2004년작인 ‘멕시코인이 사라진 날’. 이 영화는 만약 캘리포니아의 라티노(미국의 이주 남미노동자를 낮추어 부르는 말)들이 하룻밤 만에 갑자기 사라진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미국 내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리고 있는 날카로운 풍자 코메디이다.

집행위원회는 이번 영화제의 슬로건을 ‘무적활극(無籍活劇)’으로 내걸고 있다. 적(籍)이 없이 불안정한 삶을 살지만 활기찬 이주노동자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설명이다. 슬로건처럼 이번 영화제는 이주노동자가 처한 부조리한 모순을 담은 진지한 다큐멘터리도 있지만 개막작처럼 유쾌한 영화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제작한 영화들도 상영작에 올랐와있으니 눈여겨 볼 것.

서울에서는 오는 31일부터 다음달 3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다양한 부대행사와 함께 진행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주노동자 영화제 홈페이지(www.mwff.or.kr)를 참고하면 된다.
 
 
<매일노동뉴스> 2007년 8월 23일
 
김미영 기자  ming2@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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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7 13:28 2007/08/27 13:28
+ 종합
"참여정부는 인간사냥 정부... 고용허가제는 실패했다"
[현장] 고용허가제 시행 3년 규탄 단속추방 중단 결의대회
텍스트만보기   선대식(sundaisik) 기자   
▲ 이주노동자들과 인권단체의 행진 모습.
ⓒ 오마이뉴스 선대식

"더르 파코르 본더 꺼로!"
"스톱 크랙다운(Stop Crackdown)!"
"단속 추방 중단하라!"


찜통 같던 19일 오후 2시 서울역 앞에서는 여러 나라의 언어로 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방글라데시, 네팔, 스리랑카 등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의 외침이었다. 앞의 세 외침은 방글라데시어, 영어, 한국어라는 다른 언어로 울려 퍼졌으나, 담고 있는 내용과 절박함은 다르지 않았다.

이날 열린 '고용허가제 시행 3년 규탄! 단속 추방 중단! 이주노동자 인권과 노동권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에는 이주노동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한국의 노동자 50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을 뜨거운 거리로 내몬 건 2004년 8월 17일 시행돼 3년을 맞은 고용허가제다. 고용허가제의 주요 내용은 이주노동자의 체류기간을 3년으로 제한하고 4번 이상 직장을 옮길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당시 정부는 ▲송출비리 감소 ▲불법 체류자(미등록 이주노동자) 발생 방지 ▲이주노동자의 권익향상 등이 기대된다고 홍보했다.

실제로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14일 고용허가제 시행 3주년 국제세미나에서 "고용허가제 시행으로 외국인 근로자 권익이 향상되고 채용과정이 투명해졌다"며 고용허가제 3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이날 현장에서 만난 이주노동자의 목소리에선 정부의 주장과는 큰 온도차가 느껴졌다. 이들은 "고용허가제는 실패했다"고 강조했다. 이날 기자는 오후 4시 20분부터 5시 반까지 서울역에서 명동성당으로 행진하는 동안 이주노동자 10여명과 대화를 나눴다.

10명 중 9명이 불법체류자... "한국에 들어오려 1000만원 줬다"

▲ 'No one is illegal'이라는 팻말을 든 임다둘씨와 그의 동료 사민 레자씨.
ⓒ 오마이뉴스 선대식

'노동비자 쟁취'라는 붉은 띠를 두른 임다둘(27)씨가 눈에 띄었다. 손에는 'No one is illegal'(불법인 인간은 아무도 없다)이라는 팻말이 들려있었다.

방글라데시 출신인 임다둘씨는 2007년 3월 한국에 왔다. 임다둘씨는 한국말이 서툴러 동료인 사민 레자(29)씨가 인터뷰를 도왔다. 임다둘씨는 현재 경기도 광주의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노동조건에 대해서 묻자 임다둘씨는 "하루에 12시간씩 일해 월 110만원을 받는다"며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임다둘씨에게 "어떻게 한국에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임다둘씨는 3개월 비즈니스 비자를 받고 들어왔다고 답했다. 한마디로 불법이었다. 고용허가제로 송출비리가 근절될 거라는 정부의 말과는 달랐다. 임다둘씨는 손가락 10개를 들어보였다. 그리고 "1000만원을 (브로커에게) 줬다"고 말했다.

임다둘씨의 사례는 고용허가제의 허실을 보여줬다. 이날 많은 이주노동자를 인터뷰한 결과 송출비리 근절뿐만 아니라 불법 체류자 발생 방지, 이주노동자 권익 향상 등 문제도 정부의 기대와는 어긋났다.

이날 만난 10여명의 이주노동자 중에서 합법 체류자는 단 한 사람에 불과했다. 경기도 동두천의 한 가죽공장에서 일하는 있는 네팔 출신의 야덥(40)씨 역시 불법체류자다.

▲ 야덥씨의 모습.
ⓒ 오마이뉴스 선대식

야덥씨는 "네팔에 14살인 아들과 17, 15살인 딸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여기서 돈을 벌어야 자식들을 학교를 보낼 수 있다"며 "(불법이더라도) 계속 일해야 한다"고 밝혔다. 주 6일 근무해 야덥씨가 받는 월급은 110만원이다.

어제(18)일 저녁 7시부터 이날 오전 8시까지 야간작업을 하고 나왔다는 야덥씨는 매우 피곤해 보였다.

행진 대열 속에서 만난 필리핀 이주노동자 공동체의 준두다이(45)씨. 2002년 8월에 한국에 온 준두다이씨 역시 불법체류자다.

체류기간이 지났지만 비자가 다시 나오리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숨어서 일하고 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갑자기 준두다이씨가 일하는 공장에 들이닥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준두다이씨는 "지난 8일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동료 2명을 잡아갔다"고 말한 뒤 팔로 옆에서 행진하던 동료의 목을 조르고 다른 한 손으로 주먹질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기자가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때리는 모습을 봤느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무섭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는 불법체류자(미등록 이주노동자) 집중단속에 나섰다.

"참여정부는 살인적 단속 및 추방하는 인간 사냥 정부"

이주노동자들과 인권단체는 행진 전 성명서를 통해 ▲고용허가제 규탄 ▲단속 추방 중단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주장했다.

이들은 "고용허가제가 인권을 신장시키기는커녕 이주노동자의 삶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며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수를 줄이겠다며 10만명을 살인적으로 단속 추방해 '인간 사냥 정부'임을 자랑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이들은 "차별과 억압을 강화하는 단속 추방 정책으로 일관한다면 제 2, 제 3의 여수 참사가 또 다시 발생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단속추방 정책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지만 미등록 이주노동자 수는 줄지 않았다"며 "고용허가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영구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이주노동자들에게도 1550만 임금노동자처럼 보편적 인권이 있다"며 "노동3권을 비롯한 차별 없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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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1 21:26 2007/08/21 21:26

고용허가제 3년의 진실

from migrant 2007/08/17 23:54
사람대접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고용허가제 3년의 진실](1) - 이주노동자, 40년 전의 권리와 자유
이상재(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정부에서는 8월부터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합동단속에 들어간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고용허가제를 안정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8월 17일이면 고용허가제 3년이 된다. 고용허가제 시행 3년이라는 시점과 집중단속이 8월에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닌듯 하다. 민중언론 참세상은 고용허가제 3년을 맞아 고용허가제가 과연 이주노동자에게 '약'이 되고 있는지, '독'이 되고 있는지 그 진실을 따져본다.- [편집자 주]


지난 주말 센터를 찾는 이주민들과 함께 동해로 여름캠프를 가는 길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늘을 찾아 삼삼오오 둘러 앉아 점심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5-60대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늘을 찾아 우리들 주위에 앉았다.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스텝 명찰을 달고 있는 나를 보더니 대뜸 ‘많이 좋아졌지요?’라고 묻는다. ‘구경도 다니고 한국 온 게 얼마나 행운이야’라며 서로들 우리들에 대한 소감을 나눈다. 입 안에서 여러 말들이 맴돌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고단한 이주노동을 벗어나 동해바다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좋아 져야죠.’라고 얼버무리며 그냥 웃다 돌아섰다. 센터 후원회원들을 포함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던지는 질문이다. ‘이제 좀 좋아져 사람대접 받으며 일하는 거죠?’

대한민국의 거짓말

올 1월부터 산업연수제가 폐지되면서 외국인력정책은 고용허가제로 일원화됐다. 아직까지도 일원화 방침이 명확하지 않아 연수생 신분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산업연수생과는 또 다른 규모가 큰 기업의 해외투자법인연수생 제도는 여전히 살아 가장 낮은 자리의 이주노동을 강요하고 있다. 다 제쳐두고 고용허가제로의 일원화에 대해서만 얘기해보자. 사람대접 받으며 노동하고 있는가? 과연 현대판 노예제도는 끝났는가?

40년 전에 만들어진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8조는 ‘어느 누구도 노예상태에 놓여 지지 아니한다.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 및 노예매매는 금지된다. 어느 누구도 강제노동을 하도록 요구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같은 규약 12조에서는 ‘합법적으로 어느 국가의 영역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영역 내에서 이동의 자유 및 거주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며 자유이동을 보장한다. 한국은 이 규약에 1990년에 가입 비준했다. 국내법의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과연 대한민국은 스스로 비준한 규약을 지키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아니다’이다. 물론 한국정부는 근로기준법 제 6조 ‘사용자는 폭행, 협박, 감금 기타 정신상 또는 신체상의 자유를 부당하게 구속하는 수단으로써 근로자의 자유의사에 반하는 근로를 강요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잘 지키고 있다고 국제사회에 호도하고 있다. 거짓말이다.

[출처 : 이정원 기자]

[출처 : 이정원 기자]

고용허가제는 강제노동을 강제하는 제도다.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제 25조 1항은 ‘외국인근로자는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경우가 발생하여 그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정상적인 근로관계를 지속하기 곤란한 때에는 노동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직업안정기관에 다른 사업 또는 사업장으로의 변경을 신청할 수 있다’며 외부적 조건이 아닌 이주노동자의 자유의사에 따른 사업장 이동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사업장 이동을 세 번까지 보장하고 있다’는 말은 왜곡이다. 사업장 이동의 자유는 없다. 단, 1년 단위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 권리는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직업선택의 자유, 자유의지에 관한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당한 현실을 가능케 하는 것은 ‘폭력적인 강제단속추방’과 ‘돈’이다.

현대판 노예제도의 연속

고용허가제 시행 2년을 맞아 지난해 이주인권연대에서 벌인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산업연수생제도에서 만연했던 송출비리가 고용허가제에서도 여전히 만연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지 노동자 10년의 월급에 맞먹는 과도한 송출비용은 한국에서의 어지간한 인권침해와 억압을 견딜 것을 강요한다. 정치적 및 시민적 규약 11조는 ‘어느 누구도 계약상 의무의 이행불능만을 이유로 구금되지 않는다.’고 권리보호를 규정해놓고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금지된 불평등한 계약에 지쳐 쓰러지는 순간 구금의 대상이 된다. 해명의 기회마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구금되어 강제출국 되면 평생 송출비용이 삶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가난한 고향의 가족들이 떠오른다. 노예이기를 감수하고 만다.

구금을 위한 단속은 법보다 폭력적이다. 같은 규약 9조는 ‘어느 누구도 법률로 정한 이유 및 절차에 따르지 아니하고는 그 자유를 박탈당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대한민국도 영장주의를 따르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여기서도 예외다. 공장 무단침입은 기본이고, 다만 서로의 감으로 짐작할 뿐 신분을 밝히지도, 알 필요도 없다는 듯이 코앞에 가스총을 겨누며 우선 잡고 본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권리인 생명권과 신체의 안전권은 안중에 없다. 건물에서 뛰어 내려 내장이 파열되어 죽던, 철창에 갇혀 ‘문을 열라’며 소리치다 죽어가건 폭력적 단속추방은 계속된다. 고용허가제 시행 이후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강제단속추방은 이주노동자들을 일상적인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부당한 현실에서의 탈출은 추방이다. 사업장 이동의 자유는 저 뒤로 밀린다. 노예이기를! 감수하고 만다.

홈에버에 가지 마세요!

캠프를 가 있는 동안 공단 근처 홈에버에서 버스 두 대를 대놓고 대대적인 단속을 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전에도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공단 근처 대형마트를 집중적으로 단속하고는 했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단속 많으니까 홈에버에 가지 말자’는 이야기를 함께 한 사람들과 나눴다. 울지도 웃을 수도 없는 참담한 연대다. 밑바닥 연대로부터 희망의 싹은 틔워진다. 지원단체 한국인 실무자의 목소리가 아닌 주체들의 함성이 폭력적 제도와 공권력에 맞서, 최소한 이 정도의 인권은 지키자며 40년 전에 합의했던 선언들이 현실로 되는 날, 그런 아름다운 밤이 하루라도 어서 오기를.
* 이상재님은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홍보교육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2007년08월13일 11: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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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7 23:54 2007/08/17 23:54

퇴직금 등의 건으로 사무실을 찾아왔던 스리랑카 노동자 마힌다씨가 결국 임금과 퇴직금을 지급받았다. 사업주와 사무실에서 만나 합의를 보았다. 사업주는 끝까지 100% 지급을 하려하지 않았는데 액수보다는 감정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온 마힌다씨가 비자만료를 앞두고 이탈하였기 때문에 사업체에서는 이탈한 노동자 수 만큼 1년간 연수생을 받을 수 없게된다. 연수생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가 고안한 고육지책인 것이다. 이를 이유로 사업주는 노동자에게 마지막까지 사업주로서의 강제력을 행사하고 싶어했다. 당연히 줘야할 돈을 주면서 마치 선심쓰는 듯한 온갖 생색을 다 냈다. 마힌다씨가 100% 지급을 요구하자 사업주는 지급해주는 대신 출입국으로 데려가겠다는 협박까지 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사업주 입장도 어느정도는 이해를 했었는데 그런 협박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속내는 이번에 지급하게 되면 다른 지급받지 못한 노동자들도 지급을 요구할 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정부는 연수생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사업체에게 벌칙을 부과하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결국 그 댓가는 다시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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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5 00:12 2007/08/15 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