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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꼬뮤날레 일정 안내

"21세기 자본주의와 대안적 세계화"

<제3회 맑스코뮤날레 학술문화제 전체 주제 설명>

올해는 6.10민주항쟁 20돌을 맞이하는 해이다. 그러나 20년 동안 세계는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이런 변화는 단지 세계적 차원 또는 정치-경제의 거시적 구조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런 거시적 차원의 변화는 미시적 차원에서의 일상적 삶의 변화로 내재화되고 있으며 역으로 미시적인 일상의 변화들이 거시적인 자본의 지배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울러 변화의 층위도 정치-경제적 구조들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이면서 일상적인 욕망의 차원들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80년대 '맑스'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자본의 지배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는 이제 더 이상 그대로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맑스의 정신, 자본주의와 다른 세계를 모색하는 비판적 사유의 정신은 '맑스' 코뮤날레를 통한 자본과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대정신을 매개하는 끈이다.    
국가권력을 필두로 하여 시민사회 내부에서는 87년 6.10민주항쟁 20돌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경축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이들은 지배의 시간을 단절시키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6.10민주항쟁을 몇몇 정치명망가들의 업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여기에는 87년 6월의 대지를 흔들었던, 작열하는 태양빛에 달구어진 딱딱한 아스팔트를 누볐던 '존재의 함성'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그 당시 혁명적 열정들과 '존재의 심연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을 추억으로, 과거로 만들며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유발하는 대중의 역동성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포획된 비루한 일상과 현실을 은폐하는 '무화과 잎사귀'에 불과하다.
바로 그들이 오늘날 진보를 이야기하면서 전지구적 자본의 지배 욕망을 끊임없이 일상적 차원으로 이전시키고 자본의 지배로 바꾸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화는 더 이상의 외부를 용납하지 않는다. 세계는 자본의 이윤 증식을 위한 전쟁터가 되어 가고 있으며 지상의 모든 생명들은 그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자본은 더 이상 지키고자 하는 가치나 규범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에 달라붙어 생명을 분절하고 이윤증식의 기계로 바꾸어 놓고 있다. 그들은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국민국가의 외피조차 벗어던지고 있다. 한-미 FTA가 보여주듯이 국가는 초국적 자본의 대행자가 되어가고 있으며 자본의 이윤 증식의 욕망에 존재의 모든 가치와 생명력을 팔아넘기고 있다.
인류의 사회화된 노동이 성취한 물질적 풍요는 단지 10%를 위한 부의 증식 욕구가 되고 있으며 그들의 권력이 되고 있다. 청년들은 더 이상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과 가치를 위한 삶을 꿈꾸지 않는다. 그들이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은 '지성'이 아니라 '자본의 이윤증식을 위한 도구'들이며 자신의 몸을 자본의 기계로 바꾸어가는 '자본의 지식'이다. 대학은 자본의 증식을 위한 신자유주의적 기제가 되어가고 있으며 사회는 온통 생산 기지가 되고 있다. 높은 청년실업률과 불안정노동층의 확산은 존재 가치의 상실과 생존의 위협을 낳고 있다. 여기에는 오직 하나의 명령만이 있다. "자본의 기계가 되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보수화는 이와 같은 생존의 위협과 목숨을 건 무한 경쟁이 유발하는 '죽음의 충동'일 뿐이다. 박정희 신드롬이 그렇고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착취, 그리고 (여)성과 소수자들에 대한 적대성이 그렇다. 자본의 지배는 경제적 층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적인 생명과 인종, 성, 그리고 욕망을 포획하며 잉여가치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전화시킨다. 그들은 모든 삶의 지평을 자본의 이기적 경쟁과 탐욕스런 욕망의 전쟁으로 바꾸어 놓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자본이냐 생명이냐', '자본이냐 인간이냐', '자본이냐 존재냐', '자본이냐 삶이냐'의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
'맑스 코뮤날레'가 3회 대회의 주제를 "21세기 자본주의와 대안적 세계화"로 잡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지배의 코드화와 그것에 포획되는 욕망과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혁명적 역동성을 새로운 삶과 세계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능성은 더 이상 '맑스'에 대한 교조적 읽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맑스의 현재성은 '맑스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야 하기 때문이다. 맑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과거의 맑스가 아니라 오늘의 맑스이다. 오늘날의 현실적 변화들에 근거하지 않은 맑스는 이미 죽은 맑스일 뿐이다. 맑스코뮤날레는 '맑스의 현재성'을 모색하며 이런 차원에서 새로운 현실의 변화를 탐색한다. 오늘날 자본의 지구화는 정보-자동화, 소비사회와 같은 새로운 사회변동과 더불어 다양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대안적 세계화를 위한 모색 또한 '자본주의와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비판적 사유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맑스주의의 역사를 내재적으로 비판하거나 징후적으로 읽음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들뢰즈-가타리, 네그리를 경유해서 다시 맑스에게로, 아니면 맑스와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서 맑스를 비판적으로 해체하는 방식으로 '코뮤니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관점과 시각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리의 봄을 확장시키는 새로운 열림이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상이한 관점과 시각들 위에서 상호 충돌하는 부딪힘이 있다. 이것은 단지 '현실사회주의권의 해체와 맑스주의의 위기'의 사후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21세기 자본주의가 이전의 세계와 다른 지평을 창출하고 있으며 그 지평 위에서 다른 갈등과 가능성들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요로 되는 것은 아마도 맑스의 텍스트가 아니라 맑스의 텍스트 안에서 살아있는 비판적 사유의 정신과 지배의 평면 위에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대정신의 모색일 것이다. 텍스트는 자본의 지배와 다른 세계를 찾는 우리의 비판적 정신에 활력과 영감을 주는 소재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상이한 관점과 다기한 시각들의 충돌은 죽은 말들이 아니라 현실을 호흡하는 정신의 살아있음, 정신의 활력과 생명력을 오히려 표현할 뿐이다.
오늘날 이 절박한 시대정신의 울림이 이번 제 3회 맑스 코뮤날레에서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전통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져 왔던 '정통' 맑스주의의 '공산주의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과 탐색이다.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더 이상 기존의 맑스주의로 21세기의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각 단체별로 각기 자신의 연구 공간에서 연구자 나름대로의 대안 사회에 대한 상과 전략을 모색해 왔다. 이번 대회에서는 이런 성과들이 보다 구체화되었다. 대표적으로 문화과학의 '코뮌적 생태문화사회'와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코뮨주의', '21세기 사회주의를 위한 대안적 경제전략'을 모색하는 마르크스주의연구/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  '21세기 사회주의'를 탐색하는 노동자의 힘/진보평론 등이 그러하다.
이득재는 「코뮌주의적 생태문화사회구성체 요강」에서 대안사회의 전략으로 생태적 문화사회구성체를 제안하고 있다. 그는 상위체계에서 자본·국가의 연합에 균열을 내며 사회공공성을 재구성해가는 지역적·전국적·세계적인 연대를 촉진하며, 하위체계에서 생태문화코뮌네트워크와 지역평의회 및 협동조합을 중심축으로 하는 자립적 능력과 직접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을 제안한다. 이와 더불어 문화과학은 '대안세계를 위한 문화사회운동'이라는 주제로 코뮌적 생태문화사회의 전략을 탐색한다.
「19-20세기 서구 코뮌주의 운동에서 문화적 관점의 동요」를 발표하는 강내희는 맑스와 엥겔스가 문화혁명을 변혁운동에 필수적 요소로 인식했다고 하면서 자본 축적 메커니즘의 근본적 지양과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 즉 문화의 창조를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심광현은「코뮌적 생태문화사회의 필요조건: 생산양식 주체양식의 공시적 변화」에서 '역사적 공산주의'가 주체양식의 변화를 간과한 반면 무정부주의 혹은 공동체주의는 생산양식을 간과했다고 평가하면서 산 노동이 자본의 도구가 되는 노동사회 대신 죽은 노동이 주체적 역능(지적·정서적·윤리적·신체적 역능) 향상의 수단이 되며 자연과 공생가능한 생태문화사회로의 이행을 모색한다. 아울러 이동연은 「'역사적 문화운동'에서 배우기: 문화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인식적 지도 그리기」에서 '아래로부터의 개인들의 자율성의 확대'와 '사회 공공성의 민주적 네트워크'를 화학적으로 절합하고자 했던 역사적 문화운동들을 비판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공산주의에서 코뮌주의로"라는 주제하에 새로운 '코뮌주의'를 모색하고 있다.「대중이란 무엇인가: 코뮌주의 신체론」을 발표하는 고병권은 코뮌주의 역사에서 대중은 대체로 대상화된 실체로 간주되어 왔다고 비판하면서 실체가 아닌 '흐름(flux)'으로서 대중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정수는 「코뮌의 욕망, 욕망의 코뮌주의」에서 욕망을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물질적 생산의 능력이자 형식으로 파악하고 자본주의 하부구조로서의 욕망의 체제를 해체하고 코뮨적 욕망의 체제를 구성하는 전망을 모색한다. 또한 정정훈은 「코뮌주의에서 능력의 개념」에서 맑스의 능력 개념을 잠재력과 협력으로 파악하고 이런 능력을 구현하는 코뮌이라는 새로운 사회의 구축 운동을 '코뮌주의'라고 규정한다.
반면 "21세기 사회주의를 위한 대안적 경제전략"을 모색하는 마르크스주의연구/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은 「재생산위기와 진보적 재정정책」을 발표하는 장상환을 필두로 하여 '기본소득' 담론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기존의 자본소득과 지대소득을 폐기하고 모든 사회 성원에게 연령별로 균등 분배하는 '사회연대소득'을 주장하는 곽노완의 「기본소득-이행전략으로서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모델에 대한 대안적 경제 모델로서 시대착오적인 케인스주의적 사회적 시장경제나 그 자체 형용모순인 시장사회주의가 아니라 시장경제 자체의 지양으로서의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 즉 참여계획경제를 주장하는 정성진의 「참여계획 경제의 가능성과 쟁점」을 발표한다.
노동자의 힘/진보평론의 연합 섹션은 "신자유주의와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주제로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맑스주의의 사상과 전략을 탐색한다. 여기서의 화두는 21세기 사회주의이다. 남구현은 「신자유주의와 노동자정치」에서 신자유주의가 계급투쟁의 지평을 넓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사회주의가 유효하며 노동자정치를 통해 이를 돌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성백은 「네오모더니즘과 21세기 사회주의」에서 탈현대주의의 문제설정의 한계를 지적하여 네오모더니즘을 새로운 문제설정으로 제시하면서, 이 문제설정의 기초로 하여 21세기 사회주의를 사유할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고 있다. 박영균은 「이행의 아포리아와 21세기 사회주의」에서 사회주의의 이행 문제에서 '이행의 아포리아'에 빠지는 것은 경제학적 문제 설정에 있다고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이행 문제를 대체권력을 형성하는 정치적 문제 설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개별적인 연구자들 간의 소소한 차이를 무시하고 본다면 문화과학, 연구공간 수유+너머, 마르크스주의연구/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 노동자의 힘/진보평론의 연합 섹션은 각기 다른 관점과 입장에서 '대안 사회'의 상과 전략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오늘날 맑스의 공산주의를 읽는 현실을 보는 방식의 차이들과 존재에 대한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논의는 80년대식의 '정통' 맑스주의적 관점, 또는 획일적으로 규정되어왔던 대안사회에 대한 논의들을 해체하면서 다른 관점과 시각들을 열어가고 있다. 여기서의 쟁점은 맑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논의가 지닌 현실적 유효성과 적합성, 그리고 대안사회의 핵심적 구성 원리이다.
그러나 이런 대안사회의 모색은 자본지배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유라는 텍스트와 현실의 대결을 함축하며 존재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함축한다. 따라서 오늘날 21세기 자본주의에 대안전략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보다 근본적인 탐색은 철학적 사유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사고들과 개념들을 전복하거나 해체하는 작업이 될 것이며 여기서 들뢰즈-가타리, 네그리는 1, 2회 맑스 코뮤날레와 마찬가지로 3회 대회의 주제인 21세기 자본주의와 대안적 세계화를 다루는 데에서도 여전히 주요한 안내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의 텍스트는 맑스주의의 텍스트, 맑스의 텍스트와 일정한 긴장관계를 가지면서 기존의 관념들을 전복하고 해체한다. 그러나 이런 관념들의 전복과 해체는 현학적인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생산'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내재적인 틀이 되어가면서 존재의 지평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자본주의를 사유한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존재에 대한 다각도의 사유 변환과 읽기를 함축하고 있다.
정남영은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와 탈자본주의의 전망」에서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통해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재해석하고 오늘날 자본의 부를 생산하는 방식은 이전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자율평론은 '들뢰즈의 철학'을 통해서 전통적 맑스를 해체하고 새롭게 맑스를 읽고자 한다. "들뢰즈의 유물론적 존재론"이라는 주제하에 조정환은 '오늘날의 노동은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으로, 노동의 지속시간으로 공간화된 시간 개념과 가치 개념은 더 이상 사회적 결합노동을 규율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들뢰즈의 시간론을 재검토한다. 마찬가지로 승준 또한 「들뢰즈의 표현주의」에서 들뢰즈의 표현주의를 통해서 맑스주의의 3가지 체계를 해체하고 스피노자의 표현, 역능, 덕과 같은 개념으로 새롭게 재해석하고 있다. 여기에 자율평론이 아니지만 함께 발표하는 이정우는 「들뢰즈의 잠재성」이라는 논문을 통해 들뢰즈를 단순한 생성존재자로서만 아니라 생성의 바탕 위에서 어떻게 동일성들이 생성․소멸하는가를 밝히고자 한 철학으로 읽는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맑스-엥겔스의 생산양식론을 들뢰즈․가타리의 추상기계론으로 세련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각도에서 기존의 인식 틀을 바꾸고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실천적 행위를 제안하는 글도 발표되고 있다. 이번 대회에 특별히 초청된 독일 철학자 아른트는 「시간의 경제」에서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을 구분하고 자본주의가 구조화하는 노동이 무엇보다도 비노동시간에 대한 평가절하와 노동시간에의 종속, 그리고 생산성 향상이라는 노동시간의 지배라는 점을 제시하면서 시간의 경제는 가치증식요구라는 자본의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어 '사회적 통제' 아래서 최대의 비노동시간을 확보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생명의 권리와 자본의 권리」를 발표하는 이진경은 '인권'을 대신할 '생명권'을 제안하면서 생명을 분할 불가능한 개체가 아니라 항상 이미 복수의 요소들이 모여서 구성된, '중-생적 공동체'로서 선물의 체계로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이 선물의 체계인 순환계를 잉여가치 형태로 착취하는 자본에 대항하는 생명권은 투쟁의 지대라고 주장한다. 윤수종은 「분자혁명론」에서 레닌주의(집중제)와 무정부주의(무지배주의)라는 양자의 조직 모델을 비판하고 가타리를 통해서 새로운 조직 모델을 모색한다. 그는 가타리가 집중제를 일방적으로 폐기하지 않고 이해관계에 근거한 기존의 계급투쟁(몰적 투쟁)을 다양한 사회투쟁(분자적 투쟁)과 결합해 가면서 장기적이고 복합적이며 누적적 혁명과정(분자혁명)을 제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20세기 좌파사상 비판 그리고 그 너머"라는 주제 하에 조직된 사회비판아카데미의 다섯 개의 논문들 (김치수의 「『자본』이후의『자본』- 최초의 범주들에 대하여」, 금민의 「화폐와 시간 -『자본』의 관점에서 본 20세기 좌파철학」, 차문석의 「현실사회주의와 화폐」, 임운택의 「20세기 사민주의, 그 가능성과 한계 - 서유럽 사례를 중심으로」, 강정석의 「68혁명과 맑스주의」)은 맑스주의와 좌파운동을 그 내부에서 비판적으로 다시 읽어가고 있다. 김치수는 『자본』서술 상의 최초 범주인 상품에 대한 해석론을 중심으로 하여 20세기의 『자본』연구사를 비판적으로 조망한다. 금민은 맑스의 화폐 개념을 일반성의 문제와 시간철학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이로부터 20세기 좌파철학의 비판적 분석을 위한 개념용구들을 끌어낸다. 아울러 사회비판아카데미는 20세기 좌파의 세 가지 주요한 조류인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68혁명기의 좌파 사상에 대한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이는 현실사회주의와 화폐에 관한 차문석의 발표, 20세기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를 개관하며 1990년대 이후의 신사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평가하는 임운택의 발표, 그리고 68혁명과 맑스주의에 관한 강정석의 발표를 통해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단체 섹션에 들어가 있지 않지만 오늘날 매우 의미 있는 제안과 사유의 변환을 담고 있는 글들이 발표된다. 68혁명운동 이후의 전통적 좌파와 탈물질주의의 대립을 비판하고 21세기 신자유주의가 이 두 입장을 한 점으로 수렴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정병기의 「68혁명」을 비롯해 혁명은 진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역사의 파국적 발전을 중단시키는 '블랑키'적 행동이라고 보는 벤야민의 혁명론을 1)중단의 정치학, 2)의식보다 감성에 정향하는 정치학(도취와 구성), 3)부르주아적 개인의 자율적 주체를 벗어나는 집단의 신체적 '신경감응'(Innervation) 등으로 조망하는 최성만의 「벤야민에서 혁명과 인간학적 유물론」, 그리고 부르주아 체제를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동일하게 이해하는 관점을 비판하고 민족감정과 자본주의 경제 간의 관계를 고찰하고, 이를 통해 부르주아적 욕망이 무엇인지, 그 욕망을 통해 시간성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탐색하는 고태경의 「맑스주의 유물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문들이 발표된다.  
  이번 대회에 새롭게 참여하게 된 에스페란토-레토(준)는 "에스페란토와 맑스주의"라는 주제로 만국 공통어인 에스페란토를 통해서 영어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인류공통의 공동체를 건설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정현수는 「맑스주의와 에스페란토 운동의 역사」에서 오늘날의 영어가 사실상의 제국어로 기능하고 있는 상황에서 언어 소통의 민족적, 국민국가적 한계를 뛰어넘을 공통어의 출현 없이 사회적 인류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이 서로의 조건으로 되는 관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인류인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최만원은 항일민족해방투쟁 과정에서 에스페란토가 수행한 역할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일제하 공산주의운동과 에스페란토운동」을 발표하고 산도르 호르바스는 「영어만의 세상?」이라는 논문에서 에스페란토가 전지구적 의사소통을 공정하고 효율적이면서 정당하게 조직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들의 전복적 읽기와 해체, 그리고 새로운 사유 양식의 모색과 제안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 또한 단일한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소재의 다양성을 넘어서 그 소재들을 다루는 연구자들의 다양한 존재론적 관점과 사유의 방식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정통' 맑스주의 안에서 '맑스'의 이름으로 봉쇄되거나 봉합되어 왔던 '사유의 불임'을 넘어서 새로운 관점에서 '사유를 개방'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유의 개방은 오늘날 지구화된 자본, 그리고 존재의 가치와 욕망을 자본의 내재적인 지배의 평면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이를 넘어서기 위한 다양한 모색들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보다 깊이 있게 존재를 사유하고 세계를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화는 다양한 갈등과 투쟁의 양상들을 낳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산업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계급모순과 다른 투쟁의 지평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양한 영역에서 전개되는 투쟁의 양상들과 접근들, 그리고 그 운동들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탐색이 필요하다. 이번 3회 맑스 코뮤날레에서는 여성주의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담은 논문들이 제출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21세기 여성과 미래 여성주의"라는 주제로 이재유가 「코뮨형성과 가사노동의 가치의 문제에 관하여」를, 연효숙이 「들뢰즈 가타리의 소수적 여성주의」를 발표한다. 이재유는 자신의 논문에서 여성해방 없이 노동해방도, 생산력의 발전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구체노동이 사용가치만을 생산하는 노동이 아니라 사용가치를 소비하는 노동이기도 한데, 성별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은 대부분이 여성에 의해 수행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대자적 계급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주장한다. 반면 연효숙은 여성운동을 소수자운동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는 21세기의 운동이 소수자 운동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대한 집합적 연대의 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이 아니라 소수적 여성주의 운동의 정체성을 탐색하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다양한 쟁점과 입장들은 여성주의 운동이 발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논의이자 운동의 활성화와 전망을 위한 논의에 새로운 활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는 "한국 기독교의 반민주세력화, 그 역사적 뿌리에 대하여-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성령의 정치"라는 주제로 초점을 맞추어 오늘날 한국에서 보수적 기독교운동의 뿌리와 역사적 기원을 추적 비판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보수주의적 정치행태와 보수세력에 대한 향도적 역할이 어떤 변화와 조건에 기인하는지를 분석하고 있는 최형묵의 「한국기독교 보수주의의 기원과 성격」을 필두로 하여 한국기독교의 성령 해석이 작위적이라고 비판하라고 비판하면서 성서 속의 지배적인 성령은 질서 해체적이며 탈권력적인 비합리적 동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김진호의 「성서 속의 성령과 한국교회의 성령의 도구화」, 그리고 이숙진의 「성령운동의 젠더정치」가 발표된다. 이것은 한국사회에 거대 권력으로 성장한 한국기독교의 정신적 기원과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오늘날 보수기독교의 '권력화'와 '자기확장의 지배욕'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늘날 우리의 비판적 사유가 최종적으로 향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 지배의 현실 그 자체를 실질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자본 지배와 전혀 다른 세계를 직접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은 아니며 그와 같은 거대한 변혁을 총론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현실적으로 주어진 삶을 바꾸어갈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사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존재의 결단을 통해서 개인의 일상과 삶을 바꿀 수 있다. 사유는 분명 여기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아울러 우리는 또한 그 사유가 정치사회적 구조를 바꾸는 작업과 병행해 가야하며 사유는 이 과정에서 이 존재의 결단과 걸음을 안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맑스 코뮤날레에서는 1, 2회 대회와 마찬가지로 당장의 현실에서 쟁점으로 부각되었거나 부각되어야 할 정치-경제-사회적 쟁점들에 대한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탐구들을 진행하고 있다.
김창근은 「반자본주의적 대항지구화운동의 쟁점」에서 1980년대 초반 이후 한국 자본주의 발전과 국가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그는 시장개혁론과 발전국가론이 모두 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경제발전의 주요한 원인을 발전 '국가'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네오 맑스주의의 국가 이론에서 나오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개념을 재검토하고 있다. 또한, 서강대사회과학연구소는 "세계화시대 한국민주주의: 검토와 모색"이라는 주제 하에 「'경찰국가'와 한국 민주주의」를 발표하는 김세균을 비롯하여 지방정부의 기업주의화가 오히려 경쟁적인 도시 및 지역 개발과정을 통해 지역불균등발전, 지역주민의 양극화, 지방정부 재정의 부실화를 낳고 있다고 비판하는 최병두의 「'세계화'와 지방정부의 기업주의화」, 그리고 한국 시민사회의 참여 민주화의 방향과 과제를 모색하는 유팔무의 「한국시민사회의 민주화와 참여민주화의 대안」, '노동운동 위기론'이라는 담론을 실제 노동운동의 위기가 아니라 연구자, 활동가에 의해 (재)구성되는 메타 히스토리(meta-history)라고 규정하고 이를 분석하는 김원의 「신자유주의 시기 '노동운동 위기론': 지속 혹은 변주?」가 발표된다. 이외에도 "대안을 찾아서"에서는 불로소득을 근절시키고 주거비를 절반 이하로 낮추기 위해서는 보유세 강화보다 택지 국유화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남훈의 「택지국유화 강령」을 비롯해서 박거용의 「영어의 전지구적 확산과 대안적 영어교육 정책의 모색」, 송유나의 「반자본 공공성쟁취투쟁과 에너지」 등이 발표된다.
특히 이번 대회는 미래의 시대정신을 만들어갈 새로운 신진 연구자들인 대학원의 석․박사과정생들이 함께 하는 <영 코뮤날레>가 처음으로 개최된다. 이들은 오늘날의 자본 지배를 거부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진지한 열정으로 만나 학문과 현실에 대한 열정을 토해내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들은 최근 한국 사회에서 국가 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다루어지고 시민사회 내부에서 일면적으로 다루어졌던 '성매매/성노동'과 '대학에서 맑스주의자로 살아남기'라는 자유포럼을 진행한다. 아울러 '2007, 2030세대의 맑스'라는 개인 자유발표세션에서 자본 지배의 현실에 대한 대결을 포함하는 비판적 사유를 담은 10여개의 참신한 논문도 발표한다.
오늘날 우리의 삶과 현실, 일상을 생산하고 조직하는 것은 자본처럼 보인다. 21세기 자본주의에는 외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예적 삶을 강요하는 자본의 포획과 지배로부터 벗어난 다른 세계, 다른 삶, 다른 가치들을 모색한다. 그것은 자본의 전일적 지배가 우리의 근원적 열망과 생명력을 영원히 잠재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야만'을 강요하는 자본으로부터 단절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시대정신을 만드는 '힘'이자 비판적 사유를 이끄는 '파토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대회'를 다름 아닌 '맑스'의 이름으로 불린 '코뮤날레'라고 정의했다. '코뮤날레communale'는 '코뮌commune'과 '날레nale'('축제의 해'라는 뜻)를 합성한 조어로서, 맑스의 희망과 좌표인 코뮌의 해, 코뮌의 이상을 담은 축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맑스 코뮤날레는 오늘날의 '야만'적 세계상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지향적 좌표로서의 '코뮌' 안에서 '맑스'를 다시 불러내고 이 안에서 현실의 모순과 극복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여기서 정답을 알고 있는 선지자도 예언자도 없다. 맑스의 정신 안에서 맑스의 비판적 사유와 혁명적 열정을 부여받았지만 맑스 또한 정답은 아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그 현실적 전망을 모색하는 작업은 그 현실의 짐을 떠맡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들과 다양한 철학적 관점들, 그리고 다양한 해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비록 이와 같은 접근과 해석들이 연구자 개인들의 관심사와 열정, 감성, 가치에 따라 상호 충돌하고 심지어 서로 직접적인 갈등을 유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늘날 '자본의 지구화'와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지평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공통의 문제의식과 그 문제의식을 생산하는 공통의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일어나는 소소한 분란과 충돌은 '대안적 세계화'를 위한 우리의 실천적 관심을 더욱 고조시키고 활성화하는 '생성의 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비록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과 해석들이 공존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자본이 전일적으로 관철시키고 있는 이 지배의 평면을 벗어나기 위한 함성이라는 데에서 맑스 코뮤날레는 '코뮌'의 현재이자 미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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