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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추상에 대하여 생각한다

인간의 죽음의 '추상'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 대해 매우 너그럽다. 특히 죽음을 맞이한 어떤 사람에 대해 그의 일생을 돌아보고, 그를 기릴 수 있는 단 한가지의 것이라도 추모한다. 그것은 인간의 감성이 이성보다 더 강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지상정때문일까? 아니면 죽음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힘에 굴복당하는 것에 대한 반항일까?

 

그런데, 그 추모의 내용이 매우 추상적이다. 즉, 한 인간의 전체와 전체역사를 보지않고, 어떤 한가지를 추상화해서 보는것 같다. 이래서 '구체에서 추상'에서만 멈춘다면, 한 인간의 전체의 역사를 볼 수 없다. '부정의 부정'에서 보듯이, '구체에서 추상'으로 간 다음 다시 '추상에서 구체' 상승했어야 하지 않을까?

 

즉, 한 인간의 본질을 하나 하나 끄집어내서 (추상), 다시 이것들을 조합함 (구체)으로써 그 인간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김대중대통령, 그의 전체에서 끄집어내 진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젊은시절 독재에 대항했던 민주화투쟁속에서 겪었던 고통, 평화 (소위 대통령이 되어서 북에 대한 햇볕정책), IMF를 극복했다!!, 끝까지 MB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했다! 이것이다.

 

나도 그의 5번의 죽임을 당할뻔한 위기, 사형선고를 받고도 의연했던 행동들을 보면서 그야말로 나의 뇌의 인식작용을 통한 추상의 결론은 그가 '자랑스럽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분명 여러가지 행동의 측면에서 범부와는 달랐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도 온몸을 다해서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바로 부르조아민주주의가 아니던가? 그는 마치 유럽에서 봉건귀족정권에 맞선 신흥부르조아계급을 대표하듯이,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일어서는 자유부르조아계급의 지도자였던 것이다.

 

지금 언론에서는 아무도 그가 1998년 대통령이 된 바로 그 시기에 IMF를 극복한다고 하면서 노동자계급에게 칼을 휘둘러 얼마나 많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했는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1997-2001년까지 기아, 현대, 대우등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의 칼날속에서 고통을 당했던가? 그러는 와중에 그는 IMF구조조정을 통해서 부르조아계급의 재편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아무도 비정규직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고, 노동자의 임금이 절반으로 되었던 시작이 바로 김대중정권의 파견법을 위시한 "노동악법의 도입"때문이란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같은 항거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시기도 바로 2001년 김대중정권말기때였다.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 자유부르주아민주주의는 분명 군사독재시기에 쟁취해야할 목표였다. 그러나, 한 측면만 추상하여 본다면, 구체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며, 김대중이란 인물의 전체를 그리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그를 둘러싼 집단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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