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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에 울다

연두에 울다                     -나희덕

 

 

떨리는 손으로 풀죽은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 눈에 밀어넣었다.

연둣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 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도 오후를 달린다.

 

 

나희덕의 시집 <사라진 손바닥>을 산 거는 '풍장의 습관'이라는 시에 끌려서였다.

감옥에 갔을 때, 나희덕 시가 읽고 싶어서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했더니

아무리 찾아도 나희덕 시집이 없다고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 대추리에서 가방을 잃어버렸을 때, 그 가방안에 엠피3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시집 한 권이 있었는데, 그게 나희덕 시집이었나보다.

결국 출소하고 나서 <사라진 손바닥>을 다시 사게 되었다.

 

'연두에 울다'에 대한 소감을 듣게 되었다.

소감을 들으면서 시의 장면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 시를 처음 읽을 때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 솟구쳤다.

소감을 얘기해준 사람에게 공감한 걸까? 아니면 나도 이 시가 가슴에 다가올만큼 나이를 먹은걸까?

문득 나이먹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수런거리는 연둣빛이 아니라는 걸 안다.

어쩌면 울창한 초록빛도 열정적인 붉은빛도 아닐거다.

그렇다고 강렬함이 마모되어 부드러워진 어떤 빛깔도 아니다.

나는 아직 연두이고 싶고 초록이고 싶고 붉디 붉은 빛깔이고 싶지만

또 그렇지 않더라도 크게 괘념치는 않는다.

갑자기 인생이 애매해진 기분이 든다.

 

시를 계속 읽어본다.

갑자기 기차를 타고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김밥을 우적 우적 먹으며, 창 밖은 연두빛 계절은 아니지만,

시와의 '기차를 타고'를 듣고 있으면 더 좋겠다.

청량리역에서 탄 기차는 원주에서 나를 내려주고 아무일 없는 듯이 바퀴를 굴려간다.

나와 같은 생일을 가진 둘째 아기를 돌보고 있을 내 친구의 집을 찾아간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그 친구는 나이먹는 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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