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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1/23
    이상한 애도(1)
    무화과
  2. 2009/01/19
    글쓰기
    무화과
  3. 2009/01/18
    오래된 물건(1)
    무화과
  4. 2009/01/16
    렛 미 인
    무화과
  5. 2009/01/13
    성명서와 기고글(4)
    무화과
  6. 2009/01/13
    안경잡이
    무화과
  7. 2009/01/13
    2009/01/13
    무화과

이상한 애도

100분토론을 보면서, 참 이상한 애도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든다. 죽음을 애도한다면서 니들이 폭력을 써서 모든 문제가 일어났다고 이야기한다. 뭐 이따위 애도가 있는지 차라리 애도하지 말아라. 솔직하게 이야기해라. 니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라고 그냥 얘기해라. 백번 양보해서 모든게 철거민들 때문이라고 해도 죽음에 대해 애도를 하려면 그 따위로 더러운 입을 놀려서는 안된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진 않은 자들 때문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수치심을 망각한 자들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뒤바뀐다. 분노가 짜증으로 짜증이 슬픔으로 슬픔이 허무로. 저들이 나와 같은 종의 인간이라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나고 저들의 망각된 수치심까지도 가난한 사람들이 짊어지는 것이 슬프고 과연 이런 세상을 밥잘먹고 잠잘자고 살아가도 되는지 어슬픈 양비론으로 공정한척 점잖빼는 자들 입에 발린 말로 애도를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자들 이제는 그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다. 독일이 나치의 역사를 사과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어떠어떠한 비판을 했던가. 그냥 무릎을 꿇었을 뿐이다. 피해자는 비판받지 말아야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가해자라면,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일말의 인간감정이라도 있으면, 그 비판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사과만 하기에도, 혹은 애도만 하기에도 모자라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철거민들의 투쟁 방식이 문제라면 그 비판은 철거민들 스스로와 혹은 함께 하는 사람들이 해야한다. 사람죽여놓고 피해자의 방식이나 도덕성이나 정치적인 의도를 운운하는 것은 얼마나 역겨운 핑계거리인지. 도대체 얼마나 뻔뻔하길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지. 차마 하늘 보기 부끄러워 살 수가 없다. 내가 인간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너무나도 수치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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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소식지 기사 써야하는데, 징하게 안써진다. 사실 1월 초에 나와야했을 소식지인데 내 맡은 글조차도 다 못쓰다보니 다른사람들에게 독촉을 못하고 있다. 하고싶은 말이 참 많은 주제를 가지고 쓰는 기사인데 그래도 왠지 글이 안나온다. 새롭게 찾아야할 정보도 별로 없고 그동안 많이 생각해본 문제인데 왜이리 글이 안써지는지 마치 기름칠 한 50년동안 안해준 가래떡 뽑는 기계에서 억지로 가래떡 뽑아내느라 구멍엔 떡이 덕지덕지 붙어서 토해내듯이 토막토막 가래떡이 뽑아지는 느낌이다. 글이 쉽게 쓰여지면 안되는건 맞지만, 그래도 어렵게 쓴다는 것이 지금처럼 이렇게 뭔가 짜증스러운 과정은 아닌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글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써 버릇했는데 참 안좋은 습관인거 같다. (당연히 퇴고도 안한다ㅠㅠ) 약간은 다른 뉘앙스이긴 하지만 윤동주도 쉽게 쓰여진 시에 대해서 그렇게도 부끄러워했는데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쓸 때 그렇게 쭉쭉 글을 뽑아내서야. 글 한 편을 쓰더라도 마치 내 모든 감정과 영혼을 다 쏟아부어야 하는데, 보고싶어 맘설레는 사람에게 문자하나 보낼때 10번은 썼다 지웠다 하는 것처럼 그렇게 소중한 마음을 담아서 글을 써야 하는데.... 문장 하나 하나가 나의 인격의 전부인것처럼 생각하고 단어 하나 하나가 마치 시람들에게 보내는 꾹꾹 마음으로 눌러쓴 편지라 생각하고 신중하고 사려깊게 써야하는데... 보나마나 이렇게 포스팅해놓구 또 갑자기 필받으면 뚝딱 기계로 찍어내는 것처럼 순식간에 마침표를 찍고 퇴고도 안할거같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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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물건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광주로 다시 서울로 총 10번정도 이사를 다닌 거 같다.(물론 내가 다녔다기 보다는 부모님이^^) 그래도 지금 집이 이제 9년째 살고 있으니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일것이다. 이사를 자주 다니게 되면 가구와 같은 부피가 큰 물건들은 아무래도 세월의 상처를 온몸에 새기게 되고 자잘한 물건들은 그것들이 꼭 필요하거나 아주 쌩쌩한것이 아니면 떠날때의 미련들과 함께 남겨지기 마련이다. 그 많은 이사에도 꿋꿋히 함께 따라다니고 있는 것들이 있으니 이놈들은 우리집에서 산 지 얼추 30년에 가까운 것들이다. 나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우리 식구가 된것들 먼저 이유식 숟가락 '거버'던가? 어릴적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암튼 그 이유식 회사에서 나온 아기 이유식용 작은 숟가락이 부엌 수저통 한 구석에서 조용히 다른 수저들을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기의 입에 쏘옥 들어갈 정도의 크기에 손잡이 부분은 약간 동그랗게 아기의 얼굴같은것이 조각되어 있다. 다른 놈들도 다 10년은 넘은 녀석들이어서 뭐 풋풋한 신입생같은 녀석은 없지만 암튼 저 작고 무뎌진 숟가락은 이제는 커피를 휘휘젓는 용도로만 쓰인다. 이 녀석은 나보다 살짝 늦게 우리집에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이야 천연그대로의 이유식을 부모들이 선호할테지만 옛날에는 '거버'처럼 인공적으로 가공된 이유식이 몸에 더 좋다는 믿기힘든 분위기였다고 한다. 두 번째로 분 빛이 바랜 하늘색 네모난 종이상자에 들어있는 분은 지금 욕실의 구석에서 여전히 은은한 향기를 머금고 있다. 아마도 아직 말을 못했을 아기였을때(그때는 참 남들이 보기에도 제법 괜찮은 인간이었겠다 싶다ㅋㅋ) 목욕을 마치고 난 아기의 엉덩이에 토닥토닥 하얀 가루를 두들겨 줬을 것이다. 아기의 몸냄새와 분의 향기가 어우러진 집안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를 것이다. 체질이 많이 바뀌어서 땀이 많이 줄었지만 요새도 여름철엔 종종 샤워를 마치고 그 분을 땀이 많이 나는 부위에 두드려주곤 한다. 이 녀석은 나보다도 먼저 우리집에 들어왔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 누군가가 선물로 줬다고... 마지막으로 맥도날드 쟁반 아직 한국에 맥도날드가 없었을 시절(아마도... 맥도날드가 한국에 언제 들어왔을까?)부터 우리집에 있었던 쟁반. 미국으로 오래전에 이민간 큰이모가 준 쟁반인데 우리엄마가 결혼하면서 가져왔다고 하니, 이 녀석은 나보다 더 오랜세월을 우리 엄마와 보낸 것이다. 쟁반에는 맥도날드의 피에로가 해변가에서 보물상자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고, 문어 한 마리가 그 보물상자를 바닷속으로 가지고 가려고 아둥바둥하고 있다. 지금이야 뭐 맥도날드 따위야 마구 싫어하지만 어렸을 때 화려한 색채의 맥도날드 쟁반을 좋아했었다. 그놈은 참 튼튼한거 같기는 하다.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깨지기는 커녕 이하나 안나가고 있다니. 김치전 부쳐서 올려놓기 딱 좋은 쟁반 아마도 이 녀석들도 조만간 사라질지도 모른다. 조금 더 오랫동안 있을지도 모르고. 사라져가는 것들을 추억하거나 애써 기억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아두려 한다. 어쩌면 그것들이 버려지거나 부서지는 건 한순간이지만 왠지 나에게는 한순간에 버려진다는 느낌 보다는 지금부터 조금씩 조금씩 그것들이 사라져가고 있다가 어느 순간 내가 깨닫게 된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것이 오래된 물건들에 대한 나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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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미 인

이엘리 너를 처음보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을 느꼈어. 어둠속에서만 살아가야하는 널 보며, 너도 지독히 혼자구나. 나도 모르게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어. 아아 너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네가 아빠라고 부르던 사람의 병실에서 그 사람의 피를 받아먹고 나서 오스칼에게로 갈 때 사람들은 알까? 너의 슬픔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희생을 통해서 살아남아야하는 너의 그 해결할 수 없는 존재자체의 슬픔말이야 사람들은 때로는 흡혈귀를 악마처럼 생각하자나 십자가를 두려워하고 신을 두려워하고 심장에 말뚝을 박아야한다는 둥 살기 위해서 죽인다는 너의 말, 그 감정 하나 안실린듯한 무뚝뚝한 말에서 나는 너의 눈물을 봤어. 사람들은 고상한척하지만 오히려 뱀파이어가 더 도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래, 너는 네가 살기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자나. 먹을것이 아니어도, 혹은 자신의 목숨에는 아무 상관없어도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은 어쩌면 인간밖에 없을테니까. 그리고 사람들도 모두다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살아가자나. 혼자 고상한척 해도 다른 이들의 희생이 없으면 자신의 삶이 지금처럼 영위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넌 오히려 솔직한 편이지. 암튼 이러저러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오랫동안 열두살로 지내왔던, 피냄새나는, 너의 어두운 낮과 음침한 밤이 끝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널 만나게 되어서 참 기쁘기도 하지만, 모르겠어. 이 묘한 감정을. 마치 잊고 있었던 기억이 되 살아나는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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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와 기고글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글이 아마도 성명서와 기고글일것이다. 뭐 회의문서도 있지만 그것은 여러사람에게 읽히기 위한 글보다는 다분히 기능적인 글이니까 논외로 하고, 성명서과 기고글이 받는 대접, 성명서와 기고글을 쓰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봤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명서는 언제나 기고글들에 비해 푸대접을 받는다. 좋은 성명서쓰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성명서는 대개의 경우 급하게 써야하는 일도 많고, 아무래도 적절한 분량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편이고, 그래서 글을 아주 잘쓰는 사람들도 좋은 성명서를 쓰기란 쉽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성명서들이 처한 이러한 핸디캡들을 애써 보상해주더라도 성명서는 기고글에 비해서는 푸대접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나부터도 기고글을 쓸 때와 성명서를 쓸 때 들이는 노력은 크게 다르다. 그것은 정보 수집 등과 같은 노력뿐만 아니라 글을 쓸 때의 감정적 정서적 깊이까지도 포함하는 이야기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성명서는 단체의 명의로 나가고, 여타의 기고글들은 개인의 명의로 나가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이름자가 걸려서 나가는 글들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더 신경을 쓰고 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성명서는 비록 내가 쓰더라도 그것은 나의 글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 글에 대한 온갖 칭찬이나 비판도 왠지 나에게 향한다고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해탈한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아무래도 자기 자신에게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고글에 더 많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느 정도는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도를 넘어 자신의 개인적인 명성을 신경쓰게 된다면(게다가 그 경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마땅히 경계해야할 일이다. 알량한 몇글자의 끄적거림으로 이름을 알리고싶은 허영심, 좋게 말해봤자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아무튼 어떤 글이 내용과는 별개로 한 개인에게 집중된 결과를 낳는다면 운동에서의 성과 또한 집단보다는 그 한 사람에게 귀결될 수밖에 없다. 기고글과 성명서를 쓰는 사람들은 누군인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더 재미있어진다. 성명서를 쓰는 사람들은 활동가들이고, 기고글은 주로 교수라던지 대학원생이나 학위소지자등 소위 가방끈 긴 사람들이다. 물론 활동가들도 각종매체에 기고글을 쓰기도 하지만 섭외 우선순위는 박사님들이나 교수님들일것이다. 그리고 예외적인 케이스라도 그런 분들이 성명서를 쓰는 경우는 못봤다. 이를테면 한홍구선생님이 병역거부연대회의의 성명서를 쓰는 경우는 없다. 물론 한홍구 선생님이 글을 재미있고 어렵지 않게 잘쓰기 때문에 한홍구가 병역거부관련 기고글들을 많이 쓰는 것에 대해서 일말의 불만도 없다. 다만 어떤 전문가라 불리는 집단과 단체나 현장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 혹은 대우가 성명서와 기고글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것 같아서 조금 화가 나기도 한다. 글쓰는 일이 생업과 보다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이 활동가들보다 글쓰는 능력은 뛰어나겠지만, 진실은 항상 머릿속의 합리적 사고와 논리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인데, 과연 활동가들의 신체에 각인된 무수한 경험들이 아무래도 찬밥신세인거 같아서 화가 난다. 뭐 열심히 좋은 글을 쓰시는 분들을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명서보다는 기고글을 쓰는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되먹지도 못한 글 따위 가지고 허영심부리는 모습이 싫고, 소위 전문가들의 꽁무니만 졸졸 쫓으며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한국사회의 찌질한 모습이 나한테도 보이는 것이 화가 나는 거다. 물론 기고글을 쓸 기회들에서는 당연히 많은 노력과 감정을 들여서 써야겠지만, 앞으로 성명서를 쓸 일이 있다면 더 큰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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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잡이

안경을 벗어두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안경을 찾아야 비로소 눈을 뜰 수 있는데 안경이 없으니 보이는 것이 없어서 보기 위해 안경을 찾는다지만 안경없이 안경을 찾을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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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3

예전엔 세상이 쉬워만 보였었는데 아니 쉬웠다고 말하기엔 오해가 있을수도 있지만 암튼 세상이 내맘대로 변하지는 않더라도 나또한 세상맘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너무나 확실하게 구분이 되었었는데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 옳고 그른 기준들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암튼 갈수록 세상을 모르겠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모르겠고 이건 뭐 조금 커다란 이야기로 내 삶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바로 지금 이 곳 이 자리에서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지 나의 쓸모는 무엇인지, 과연 내가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인지, 혹은 내가 그렇게 누군가를 절실하게 필요로하는건지. 어느 순간부턴가 완벽한 것은 없다고, 영원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런걸 감안하더라도 너무도 불안하고 너무도 모호하기만 한. 그래도 이렇게 들떠서 맞이하는 기분좋은 서른 살은 없을거라고 생각할만한 상황도 있지만, 내가 없어도 세상은 굴러가고. 세상없어도 나는 숨쉬며 살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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