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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2/23
    지나간 시간에 대한 예의
    무화과
  2. 2009/02/16
    순간을 간직할 수 있을까?
    무화과
  3. 2009/02/13
    크리스마스 캐럴(1)
    무화과
  4. 2009/02/12
    세상의 끝(2)
    무화과
  5. 2009/02/11
    엄마의 귀국(1)
    무화과
  6. 2009/02/11
    요쉬카
    무화과
  7. 2009/02/10
    천천히 분노하기 (1)
    무화과
  8. 2009/02/08
    쓰기 읽기 걷기
    무화과
  9. 2009/02/01
    죽음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
    무화과

지나간 시간에 대한 예의

과거를 추억하지도 미래를 기대하지도 않겠다고 그냥 지금 이순간만에 충실하자고 다짐했던 건 아마도 2003년 쯤부터였을 것이다. 무겁던 다짐들이 무너지고, 영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굳은 신뢰들이 서로 배반하는 과정을 겪으며 이제 살아갈 세상은 그리 아름다운 곳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여전히도 루시드폴의 노래가 좋은 걸 보면 과거는 나에게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는 지나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지나간 시간에 대한 예의를 가져야겠지... 지나가버린건 어쩌면 시간뿐이고 나는 거기서 한발짝도 자라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니까. 친구가 이장혁 들어보라고 해서 한참 이장혁을 들었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감정이 버거워 엠피쓰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런데 스멀스멀 한 곡씩 한 곡씩 찾아듣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피할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때로는 피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애써 도망치려고 해도 결국에는 도망치지 못할 것들이 있다. 그렇더라도 어쩔수 없었다고, 그것이 모든 것에 변명이 되는 것은 아닐것이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예의. 그건 아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속에서도 지켜야하고 고려해야하고 배려해야하는 것들을 뜻하는 말일것이다. 상황은 언제나 지나고 난 이후에 자각을 불러일으키며 그런 일련의 과정을 다른 말로는 후회라고 할것이다. 아무 부질없는 이름 후회. 이런 면에서 인간은, 아니 나란 존재는 성찰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존재일지도. 내 감정에 취해 돌진하다가 문득 나의 속도를 깨달았을때는 항상 소중한 것들을 지나쳐버린 이후였다. 그렇게 소중한 것들과 하나씩 하나씩 이별하면서 살아왔다.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들으며, '내가 떠나보낸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것도 아닌데.' 하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돌이켜보면 모두 내가 떠나보낸것이었다. 살아가는 일은 결국 나를 죄인으로 만들고, 모든 관계는 상처를 주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나는 상처를 덜 주는 방법들에 노력하지 않았었던 것이다. 늦게라도 내가 짊어져야 할 몫, 그리고 나에게 소중했던 시간들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겠다.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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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간직할 수 있을까?

이지형과 루시드폴과 언니네이발관이 함께 한 콘서트에 갔다왔다. 살짝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 이지형이 토이의 노래를 부른 그 이지형이라는걸 콘서트 시작 조금전에야 알았다ㅠㅠ 언니네이발관 5집을 1번부터 10번까지 순서대로 연달아서 들은건 행운이었다. 내 엠피3은 좀 이상해서 노래를 넣으면 가수이름으로는 대충 정렬되는데 그 안에서 곡의 순서가 마구 섞이는데, 역시 언니네이발관 5집은 순서대로 들어야 한 편의 이야기로 살아나는 듯. 그리고 예상외의 이석원의 개그 센스. 루시드폴은 실물은 처음 봤는데, 생각보다 키가 크더라. 마이크가 낮아져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노래를 불렀다. 사람이었네를 부를땐 뭐랄까 내가 지금 이 노래를 듣고 있는것이 세상의 둘도 없는 축복같았다. 특히 마지막부분의 충만한 사운드는 마치 한 편의 대하소설의 결말과도 같은 느낌. 출소하고바로 루시드폴 3집을 사서 이 노래를 맨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이 다시 물밀듯 밀려왔다. 콘서트를 보는 내내 생각했었는데, 과연 인간이 순간을 간직할 수 있을까? 노래를 들을 때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은 음반이 라이브보다 더 완벽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어쨋든 CD플레이어가 만들어내는 소리일뿐. 라이브가 전하는 감동을 간직하지는 못한다. 그건 라이브 앨범에서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가수의 거친 숨소리와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그저 소리가 아니라 공간을 가득채운 일종의 물질성을 가진 개체로 느껴질 때의 느낌은 그 순간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가수가 똑같은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그 때마다 그 노래들은 각 각 다른 노래이며 이 세상에서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는 오직 하나뿐인 노래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하지만 지나버리고 나면, 그건 각자의 기억에 조작되어버린 이른바 추억일 뿐. 그렇다고 추억하는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순간은 그 시간과 그 공간에 존재할 때만이 유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꼭 가수의 노래가 아니더라도 모든 순간은 순간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기쁘고 즐거운 순간이든 견디기 힘든 고통스런 순간이든. 사람들은 사진으로, 혹은 동영상으로, 혹은 언어적이 표현으로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지만, 그렇게해서 태어난 각각의 기억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이 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것들의 원본이었던 그 순간만은 될 수 없다. 그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과거를 기억하거나 추억하려는 작업들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불가능을 인식하는 것과 그럼에도 끊임없이 불가능을 행하는 것은 별개다. 불가능하다고 해서 포기해버린다면 인간됨을 증명할 수 있는 중대한 행위를 멈춰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오만하지 말것이며, 지금 이 순간은 다시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하며, 지금 이순간에 최선을 다 하면 되는거다. 순간을 간직할 수도 망각할 수도 없는 우리 인간의 몫은 딱 그 정도일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미화할 필요도 없고, 다가올 미래를 낙관할 필요도 없이,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세상과 함께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 그것이 '이 순간'을 의미있게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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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엄마는 미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느라 정신 없다. 어쩌다 눈시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시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많이 안우신다. 정말 엄마말대로 미국에서 하도 많이 울어서 눈물이 말라버렸나보다. 엄마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자꾸 이모 생각이 나 사실은 안듣고 싶지만 그래도 내가 엄마한테 해 줄 수 있는게 엄마 이야기 잘 듣는 일밖에 없으니... 우리엄마도 그렇지만 이모 또한 그다지 이기적이지 못한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는 가족이나 형제자매들에게 희생하는... 이모는 2001년에 미국으로 이민갔다. 그리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하루도 안쉬고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몸에 탈이 나지... 일주일에 하루씩이라도 쉬었으면... 근데 그렇게 모은 돈은 당신을 위해서는 쓰지도 못했다고 한다. 재작년 이모가 처음 암에 걸렸을 때, 가게도 장사가 잘 안되고 병원비도 많이 들고 하니까 이모는 몰래 한두푼씩 모아서 만들어놓은 1만달러를 내놓았다고 한다. 이모부가 나중에 한국 갈일 있으면 가서 여유있게 쓰고 오라고 하려고 모오놓은 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모부는 그 돈을 받고 며칠후에 이모에게 뜸을 들이며 무슨말인가를 할듯말듯했고 답답해진 이모가 보채자 이모부 또한 이모몰래 1만5천달러를 모아놓았다고 털어놨다. 그 돈으로 이모 몸 좀 괜찮아지면 한국가서 푹쉬고 병 다 떨쳐버리고 오라고 했단다. 아... 이 무슨 '크리스마스캐럴'도 아니고... 머리카락 팔아서 시계끈 사고 시계 팔아서 머리핀 사는 것도 아니고... 암튼 사촌동생이 이모랑 이모부한테 "우린 열심히 일하는데 왜 돈이 안모이지?" 했을때 두 분다 뜨끔 했다고 했다. 그럴만도 하겠다. 우리엄마 이야기 듣는데 눈물이 찔끔거려서 참느라 혼났다. 나는 참 이기적인게, 이런 이야기 들으면서도 나를 생각한다. 이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울엄마한테 내 얘기 하면서 아프고 죽을 때 되니까 아둥바둥 돈 모은거 다 허무하다고, 용석이 지 하고 싶은일하고 좋은일하는데 걱정마라고 하셨단다. 그 얘기 들으면서도 맞는 말이라고 아둥바둥 돈벌고 살 필요없다고 나에게 유리한 말만 늘어놓고 있다. 이모의 마음을 공감하려기 보다는 엄마가 잔소리 안해서 내 일신 조금 편한거를 생각하는 심보라니.. 잘살겠다 이용석. 원래 이기적인 사람들이 잘 산다. 그래 계속 이기적으로 살자. 아... 맘이 짠했는데, 왜 결론이 이따구로 나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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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몇 날이 지났는지 모른다. 고층빌딩조차 도시에서 흔적을 감췄다. 아니, 그대로 남아있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맑은 하늘을 기억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처음과는 다르게 더 이상 사람들은 짜증을 부리지 않는다. 다만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아마도 지구의 종말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된다면 이렇게 시작할 거 같다. 지구의 종말을 상상할 때면 나는 운석의 충돌이나 거대한 자연재해처럼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미래보다는, 어두침침하고 읍습한 안개가 세상을 뒤덮은 채로 지속되는 미래가 상상된다. 즉 종말은 단절보다는,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같은거 혹은 끝나지 않는 악몽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며칠동안 서울 하늘은 뿌연 기운으로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다.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바로 옆 여의도의 63빌딩이 희미하거나 때때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언제부턴가 이런 날씨가 익숙해져만 간다. 두려운 것은 앞으로 서울의 하늘은 이렇게 고정되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만화같은 상상력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 된다해도 그다지 놀라울것 같지 않다. 어쩌면 정말로 마지막으로 맑은 하늘을 본 것이 2009년 1월의 일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느끼는 인간 세상의 종말. 사람들은 답답함 마음에 짜증 늘어가다가 짜증조차 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모두가 짜증을 내고 살아가니가 익숙해질 따름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짜증을 내지 않는 사람들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지도 모른다. 이 하늘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헛된 망상이기를. 요새 기분이 견디기 힘들었던건 어쩌면 이 하늘을 바라보며 숨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그래서 기분좀 바꿔 보려고 이장혁2집도 안듣고 있었는데, 서울 하늘을 볼 때 마다 이장혁 2집의 '그날'이 떠오른다. 물론 이 노래의 가사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의 세상의 끝과는 살짝 다르지만, 아무튼 이 노래의 느낌이 지금 서울하늘과 너무 잘어울려 불안하다. 그날 지독히도 쓰디쓴 이 세상의 끝물 이미 쓰여진 대로 그렇게 알고 있어 지난 밤 꿈처럼 사라져갈 인간들의 시간 남아있을 동안만이라도 한 번 더 날 안아줘 한 번 더 날 안아줘 안녕이란 인사도 나눌 사이도 없이 도둑같이 오고 말 그날 알고 있어 정해진 것처럼 불타버릴 인간들의 흔적 할 수 있을 동안 만이라도 한 번 더 입맞춰 줘 한 번 더 입맞춰 줘 알고 있어 정해진 것처럼 불타버릴 인간들의 흔적 할 수 있을 동안 만이라도 한 번 더 날 안아줘 한 번 더 입맞춰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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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귀국

엄마가 돌아왔다. 생각해보면 최근 몇년동안 이상하게도 같이 살지 못했다. 내가 구속되었던 1년 2개월, 출소후에 바로 엄마는 이모의 병간호를 위해서 미국에 가서 5달동안 머물렀고, 작년 11월에 이모가 다시 아파서 또 미국으로... 2006년 8월부터 2009년 2월까지 7개월정도만 같이 살았었네. 내가 집을 나가서 독립한것도 아닌데. 암튼 이모가 설날에 돌아가셔서 예정보다 빨리 귀국하게 되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괜찮아 보이신다. 동생이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을텐데... 참 못할 짓이었을텐데. 엄마 말이 너무 많이 울어서 이제는 그냥 눈물도 말라버렸다고.... 근데 엄마 오신다고 서울에 올라온 막내 이모가 계속 운다. 아... 이런 분위기 견디기 힘들다. 무겁다.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다. 돌아가신 이모 생각을 억지로 안하고 있었는데 엄마를 보니까 막 생각난다. 사촌들 중에서 나와 내 동생을 유난히 이뻐하던 이모였는데. 작년 봄 이모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왔을 때가 아직도 생생한데. 이럴거 같아서 일부러 이모 생각안했는데. 죽음이라는 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라는걸... 엄마한테 들어보니 그래도 이모네 식구들은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할머니에게는 아직 아무도 말하지 못하고 있다. 자식이 미국가서 고생만 하다가 아파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갑자기 듣고 멀쩡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돌아가신 이모랑 이모부는 지금까지도 막 연애를 시작한 애인처럼 닭살커플이었는데 이모부가 많이 힘들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직 엄마가 미국에 있었을 때, 이모부가 술에 취해서 "내가 도대체 죄가 얼마나 많길래 이런지 모르겠다"고 하셨다고 한다. 이모부는 굉장히 어렵게 살았던 분이라서 우리엄마가 이모의 결혼을 반대했었다고 하던데... 초등학교 때부터 구두닦이, 껌팔이, 아이스께끼팔이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우리 아빠랑 같은 고향 출신인데 우리아빠 친구 중 제일 가난한 친구집에 문간방에 세들어 살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 고구마를 너무 많이 먹어서 질려버려서 지금도 고구마를 안드신다. 암튼 이모가 없는데 이모부가 잘 지내실지... 엄마가 참 많이 힘들었을 텐데... 내가 힘이 되어 주기는 커녕, 이 무거운 분위기조차도 벅차다. 힘들다. 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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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쉬카

렛미인을 보고 극장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엘리가 너무 가슴에 와서 박혀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휘루의 요쉬카를 듣게 되었다.

아니 휘루의 요쉬카는 그 이전에 들어봤지만

별다른 느낌을 남기지 못했었는데,

렛미인을 보고 나서 그 가사가 도통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가와서 내목을 물어뜯은 아이가'로 시작하는

요쉬카를 들으면서 렛미인의 이엘리를 생각했다.

 

이엘리. 요쉬카(아마도 소녀일거라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이상하게도 그녀들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낀다.

나는 목구멍으로 액채상태의 피를 먹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니까.

 

그리고 그들의 고독이, 피냄새 나는 외로움이 낯설지 않다.

 

생각해보니 프란체스카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흡혈귀들은 항상 혼자인거 같다.

 

단단한 발톱을 세우고 있는 요쉬카처럼

나도 항상 가시돋힌 말들로 날을 세우고 두꺼운 방어벽 뒤에 숨어서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남에게 상처입히고 살고 있다.

 

호수에서 태어난 작은 흡혈귀 요쉬카에게

여긴 살아갈 만한 곳이 아니듯.

나에게도 그다지 살아갈 만한 세상은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일까

하긴 돈있고 권력있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그다지 살아갈만한 세상은 아닐듯 싶다.

 

요쉬카라는 이름도 너무 매혹적이다.

나 이름을 요쉬카로 확 바꿔 버릴까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요쉬카                   

 

다가와서
내목을 물어뜯은 아이가
내게 다가왔어 내게 다가와
내게 하는 말이
나무를 찾고 있다고
내가 태어난
나무를 찾고 있다고

단단한 발톱을 하고 다가온
내 이름은
요쉬카
어디에서 길을 잃고 헤메니

요쉬카-
여긴 네가 살 곳이 아니란다
호수에서 태어난 작은 흡혈귀
그 이름은 그 이름은
요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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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분노하기

요새 세상에 일어나는 일련의 납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일들을 접하며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고 이내 무기력해지곤 했었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영어학원을 빼먹지 않았는데, 최근들어 도저히 공부할 정신적인 컨디션이 아니라며 결석이 잦아지고 있다. 또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기복에 허우적 거리며 대체 사람죽인 놈들은 일말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왜 이래야 하나 하며 자책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최근들어 분노는 느낄때는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커져 그 막강한 에너지에 내가 잠식당한거 같다. 그런 흥분상태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그냥 분노 한 번 하고 말꺼면 그래도 된다. 하지만 그냥 화 한 번 내는 것은 내 기분 푸는 것 밖에는 안된다. 내 기분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지 그뿐은 아닌거다. 세상을 내가 좀 살아갈만한 곳으로 바꾸려면 화풀이만 해서는 안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천천히 분노하자.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의 속도를 찾자. 천천히 분노하면 아무래도 냉철하게 사고할 수 있을거다. 그리고 어차피 인간인 이상, 모든것이 유한한 인간인 이상, 모든 에너지를 한 번에 다 소모해버리기 보다는 길고 오래갈 수 있도록 아껴두자. 분노라는 것도 한 없이 샘솟는 것은 아닐진대, 한 번에 다 써버리고 나면 그저 재가 되는 것이다. 나의 속도로 간다는 것은 분노가 슬픔이 되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난 분노보다는 슬픔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분노할 것에 대해서 천천히 분노하되 그것은 슬픔이 되어야 한다. 어차피 세상과 맞서는 일은 공부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성이 있을 수가 없고, 그 끝은 죽음과 맞닿아 있을 것이니. 평생 해나갈 일이라면 너무 지나치게 서둘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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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 읽기 걷기

오래전에 슬픔은 나의 힘이라고 이 블로그에 쓴적이 있었는데. 근데 그게 과하면 슬픔 아닌 다른것이 되어버리고 나를 숨막히게 한다. 심장이 눈물로 가득차버려 질식할거 같은 느낌. 이런 이야기를 했던니 친구는 나에게 글을 쓰라고 한다. 자기도 요새 너무 미칠거 같아서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세상이고 자기속도로 살아가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라서 요새 글을 한 번 쓰면 피를 토하며 쓴다고 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 막막하고 어두운 기분들을 떨쳐내야겠다. 친구의 말대로 글쓰기도 참 좋은 거 같다. 그리고 또 여러가지 생각해 봤는데, 음... 암튼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들이 그래도 제법 여러가지가 있다. 말한대로 글쓰기. 쌓아두면 병된다. 혹은 도망치면 나중에 후회한다. 이럴때일수록 도망치지 말고 눈감지 말고 귀막지 말고 입다물지 말고 거침없이 쏟아내야 한다. 무엇이든지 쓰자. 쓰고 보자. 일기장에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것은 참 좋은 결정인거 같다. 그리고 걷기. 지난 주, 그래서 많이 걸었다. 어떤 날은 광화문에서 신촌까지, 종로 5가에서 인사동거쳐 삼청동까지 걸었다. 남산에서 명동 청계천까지, 그리고 종로3가를 거쳐 다시 명동까지 걸었다. 걸을때는 아무 생각도 안한다. 그냥 몸이 움직이고 나는 몸을 따를 뿐이다. 물론 중간에 후루꾹장애인(집회참가자 중 한 명이 그렇게 표현하더라ㅋㅋ)때문에 잡스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ㅋㅋ 내가 왜 이곳을 걷고 있는지. 집회에 내가 왜 참여하고 있는지. 그저 멍하니 이따금씩 하늘의 달을 보면서 걷다보면 말하지 않아도 안에 쌓여 있는 무언가가 조금씩 씻겨나가는 것 같다. 근데 문제는 설연휴 직전의 집회 후, 서울역에서 홍대까지 걸었던 그날 이후 왼발바닥이 아프다는거. 그래서 많이 걸을 수 없다는 거. 그리고 어쩌면 이거는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책을 파고 들어야 겠다. 사실 출소 1년 후부터 내 안에 쌓여있던 것들이 다 소진되어서 뭔가 다시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읽기를 생각했었는데 요새는 좀 살아보고 싶어서. 살아가야겠어서. 책에 몰두하다 보면 책속에서 누군가 위로를 건네줄거 같아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미쳐서 돌아가도 내 속도를 찾아야겠다. 눈감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면서도 쉽게 흥분하지 않고 천천히 분노하면서 내 살 자리를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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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

그래도 이제는 글 하나 정도는 쓸 수 있을 거 같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2009년은 갑자스럽게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시작되고 있다. 죽음이라는 거. 사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아주 특별한 사고가 아닌한 내가 이 나이에 죽을 일이 없고 그건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부모님도 아직 건강하시니까... 근데 생각해보면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더라도 그것을 애써 외면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가자지구에서의 죽음들은 나에게 절망으로 다가왔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슬픔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심하게 감정이입이 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심리적, 지리적 거리감 탓이겠지만. 그보다는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일에 대한 절망이 컸다. 그건 이스라엘 군대에 대한 절망이라기 보다는(군대는 원래 그런곳이니까) 그런 학살을 수행하고 있는, 군복을 벗으면 평범하기 이를데 없을 군인들 개개인에 대한 절망이었고, 더 크게는 언덕에 도시락 싸들고 올라가 망원경으로 폭격을 구경한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절망이었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의심케 하는 그런 지옥같은 상황을 무서워서 차마 말 못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어떻게 야구경기보듯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용산에서의 죽음은 팔레스타인에서의 보다는 더 큰 슬픔과 분노를 일게 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물론 나와 같은 심장을 빌려쓰고 있을테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보다 훨씬 가깝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리적인 원근감의 차원은 아니다. 싫든 좋든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과거 철거민들의 투쟁에 열심히 연대하면서 골리앗도 같이 쌓고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여기에 있고 내가 가자에 있었으면 단지 그 이유때문에 내가 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용산에서의 죽음은 더 큰 확률로 그것이 나의 죽음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다가왔다. 그 때, 상도동에 골리앗을 쌓았을 때, 이런일이 일어났다면. 나와 내 친구들중 누군가가 언제나처럼 그 골리앗 안에 있었다면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아무 기도도 안하지만 경찰들과 대통령이 보여주는 저 후안무치의 태도가 분노를 일으킨다. 저들에 대해서는 쓰고싶지 않다. 그냥 분노 해야겠다. 마지막으로 이모의 죽음. 유난히도 나와 내동생을 다른 사촌들에 비해 이뻐하던 이모가 죽었다. 저 멀리 아메리카에서. 울 엄마는 동생이 죽어가는 모습을 몇 달동안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모의 죽음에 대한 나의 방식은 가장 큰 슬픔과 그것에 대한 회피였다. 예전에는 죽음은 소멸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것. 이모가 이제 세상에 없다. 나를 보면 마구 껴안고 하던 이모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죽음은 소멸이라기 보다는 조용한 망각인거 같다. 이모의 육신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자체가 아예 사라진것은 아니다. 사진첩의 사진속에, 나의 기억속에, 이모와 닮은 우리엄마의 얼굴에도 조금씩은 남아있다. 다만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는 것일뿐. 사실 지금도 이모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나는 피하고 있다. 그 슬픔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닐것이다. 다만 슬픔에 직면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어쨋든 살다보면 잊혀질 감정들에 부대끼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런데 참 미안하다. 이모한테 잘가시라는 말 한마디 못한것이 참 맘이 안좋다. 연말에, 크리스마스에 카드 한 통이라도 보낼까 망설이다가 뭐라고 써야할지, 삶을 포기하지 마라고 해야할지 편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시라고 해야할지(이미 이모는 그 당시 오래 못살거라고 진단을 받고 있었다) 알 수 없다는 핑계로 그냥 미뤄둔 것이 후회스럽다. 너무나 후회스럽다. 그래도 우리 식구들은 이모가 오래 못 갈 것을 알고있어서 슬프지만 충격적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느정도씩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가자지구와 용산에서 가족을 잃은 분들은 어떨까... 그 갑작스럽고 어이없는 죽음에,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마지막의 인간다운 죽음을 박탈당한 모습에, 그 감정을 나로썬 짐작할 수 없을 따름이다. 세상에 어느 목숨붙이가 미사일 총탄에 맞아죽을 운명으로 태어났단말인가. 세상에 어느 사람이 경찰에 몰리고 깡패한테 위협당하며 불 타 죽을 운명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겠지만, 요즘처럼 죽음이 도처에 검은 구름을 띄우고 있는 시절은 숨쉬기가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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