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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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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17
    연두에 울다
    무화과
  2. 2009/10/17
    설레임과 두려움
    무화과

연두에 울다

연두에 울다                     -나희덕

 

 

떨리는 손으로 풀죽은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 눈에 밀어넣었다.

연둣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 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도 오후를 달린다.

 

 

나희덕의 시집 <사라진 손바닥>을 산 거는 '풍장의 습관'이라는 시에 끌려서였다.

감옥에 갔을 때, 나희덕 시가 읽고 싶어서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했더니

아무리 찾아도 나희덕 시집이 없다고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 대추리에서 가방을 잃어버렸을 때, 그 가방안에 엠피3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시집 한 권이 있었는데, 그게 나희덕 시집이었나보다.

결국 출소하고 나서 <사라진 손바닥>을 다시 사게 되었다.

 

'연두에 울다'에 대한 소감을 듣게 되었다.

소감을 들으면서 시의 장면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 시를 처음 읽을 때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 솟구쳤다.

소감을 얘기해준 사람에게 공감한 걸까? 아니면 나도 이 시가 가슴에 다가올만큼 나이를 먹은걸까?

문득 나이먹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수런거리는 연둣빛이 아니라는 걸 안다.

어쩌면 울창한 초록빛도 열정적인 붉은빛도 아닐거다.

그렇다고 강렬함이 마모되어 부드러워진 어떤 빛깔도 아니다.

나는 아직 연두이고 싶고 초록이고 싶고 붉디 붉은 빛깔이고 싶지만

또 그렇지 않더라도 크게 괘념치는 않는다.

갑자기 인생이 애매해진 기분이 든다.

 

시를 계속 읽어본다.

갑자기 기차를 타고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김밥을 우적 우적 먹으며, 창 밖은 연두빛 계절은 아니지만,

시와의 '기차를 타고'를 듣고 있으면 더 좋겠다.

청량리역에서 탄 기차는 원주에서 나를 내려주고 아무일 없는 듯이 바퀴를 굴려간다.

나와 같은 생일을 가진 둘째 아기를 돌보고 있을 내 친구의 집을 찾아간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그 친구는 나이먹는 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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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임과 두려움

설레임은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해온다.

두려움이 없으면 설레임이 주는 흥분도 없어질까?

마음이 쿵쾅거릴때는 설레는 마음도 있지만 두려운 마음도 있는거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설레임의 크기는 줄어들고 두려움의 크기가 늘어난다

상처받기 싫어서 방어하게 되고 보수적인 선택을 하기가 쉽다

지금 당장의 삶이 너무 구질구질한 것이 아니라면 이 정도 만이라도 유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한 발짝 더 내딛지 않으면 설레임도 이내 사그라진다

 

결국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 그래서 한 발짝 앞으로 나가아는 일.

그 앞이 낭떨어지인지, 넓은 꽃밭인지 아직은 모르니까...

물론 대체로 꽃밭보다는 낭떨어지일 확률이 높다는 거는 알게되었지만,

그래도 나아가지 않으면 결국 여기서 멈추게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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