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비 출판사 노동조합 5

분류없음 2013/05/23 10:55
편집자의 사고든, 직장 질서 문란이든 징계를 할 거면 그 평사원은 물론이고 그 평사원에 대한 관리감독을 소홀히 하여 회사에 심대한 손해를 입힌 수퍼바이저까지 징계하는 것이 옳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건 그린비출판사라서 하는 생각이 아니라 그린비할아버지회사라도 삼성이라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게 바로 회사다운 회사다. 이만. (아, 스말트폰에서 쓰면 죄다 랩처럼 붙어버리는 건 왜 이래. 문단나누기도 안 되고, 시바. 진보넷블로그 문란 죄로 징계받는 거 아냐.)
2013/05/23 10:55 2013/05/23 10:55
tags :
Trackback 0 : Comments 3

내 인생을 바꾼 징계

분류없음 2013/05/20 23:51

나는 1990년대 어느 해에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대의원대회에는 단 한 번도 출석하지 못했고 당시 한총련 main stream의 노선과 내용 가운데 몸과 마음바쳐 따르고 싶은 것도  별로 없었다. 당시 규칙이 그렇게 생겨먹어서 한총련 대의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동적으로 대의원이 되는 순간에도 그게 뭔지 잘 몰랐고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대학교 저학년 때부터 나에게 친근한 이른바 노선 내지 사람들이 세상의 중심이겠지, 그러니까 전대협-한총련의 main stream이겠지 뭐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2학년땐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minority라는 걸 알았을 때 그 충격은, 정말이지 설명하기 어렵다. 뭐, 언젠가 설명할 수 있는, 말로 풀어낼 수 있는 그 날이 오겠지.

 

문제는 내가 minority가운데에도 minority라는 것, 한총련이 내게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 뭐 그런 데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재수 없게도 그 해에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찍혀 한총련 (이른바) 고급간부는 물론이고 대의원들에게까지 탈퇴시한이 하달되고 각급 학교당국과 관할경찰서는 이들을 잡아들여 탈퇴각서를 받는 일에 혈안했다. 그 시한은 늦봄이었다가, 한여름이었다가, 늦여름이었다가 그렇게 늦춰졌고 결국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졌다. 나는 외국은커녕 집에도 갈 수 없었고 학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뭐, 그렇게 사는 일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나라에서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한 것 뿐인데 나를 둘러싼 상황은 매우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학교당국은 같은 해 교육투쟁 때문에 받았던 징계를 철회하고 받지 못한 전액장학금을 주겠다며 탈퇴서를 내밀었다. 졸업 뒤 교직원취업도 보장해주겠다고 했다. 교수들은 갑자기 친한 척을 했다가는 썩은 고기를 보는 얼굴로 나를 대했다. 누군가 엄마에게 전화를 했는지 엄마는 김치를 싸들고 총학생회에 왔다가 총학생회 옆방에 숨은 나를 찾지 못한 채 몇 번 헛걸음을 하셨다. 가을 쯤엔가, 엄마가 밥을 먹자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고 엄마를 찾아 나선 학교 앞에서 저만치 서있는 보안과 형사들의 승용차를 발견하고는 엄마와 연락하는 일도 그 날로 끊었다. 총학생회실로 나의 삼촌이라는 사람들이 전화를 해댔다. 나에게는 그럴만한 삼촌이 없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뭐 그럴 수 있어.


문제는, 정말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서 시작했다. 열렬 운동권은 아니어도 학생회 사수의 기치를 떠받들던 다른 예비역 한총련대의원들의 표정이 하나둘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학생회 구조로 따지면 그들은 중앙운영위원들이다. 그들의 징계는 이미 풀렸고 받지 못했던 장학금을 받았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술자리 회수가 늘어났다. 가끔 술에 취해 꼬장을 부렸고 나는 결국 그들이 학생처에 내려가 (혹은 끌려가) 한총련 탈퇴각서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온화하고 순한 얼굴은 점점 이그러지기 시작했고 하나둘 총학생회 사업에 어깃장을 놓기 시작했다. 당시에 나는 그들의 번민을 알지 못했다. 그들의 고뇌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는 자괴감과 현실의 충돌, 자기행동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그 욕망과 인정욕구를 헤아리지 못했다. 나는 어렸고 그들의 행동은 나에게 그저 옳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이듬해 ‘운동권에게 빼앗긴 자유를 되찾자’는 기치로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고 당선됐다. 비운동권이 아닌 반운동권의 출생을 나의 이 두 눈으로 목도한 셈이다.


가을 끝무렵, 엄마도 학교도 경찰도 별로 말이 없었다. 아, 이제 괜찮겠지. 학교 밖을 걸어나갔다. 그리고 어느 한 길에서 세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아가씨를 만났고 그들은 대기하던 승용차에 나를 태워 경찰서로 데려갔다. 두 명의 사내가 양팔을 억세게 잡았을 때 나는 제 발로 걸어가겠습니다, 라는 말 외에는 별반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수갑을 채웠다. 양손이 절로 툭 떨어졌다. 수갑은 상징이기도 하지만 가드를 세울 수 없게 만든다. 정신적, 육체적 ‘진압’이다. 지금은 없어진 보안과 조사실에서 나보다 보름 먼저 잡혀온 다른 대의원을 만났다. 그녀는 이른바 ‘골수 주사파’들이 득실거리던 학교의 단과대 학생회장이었다. 둥그런 반원형의 판옵티콘 유치장 한 가운데 방을 그녀와 같이 썼다. 길에서 만났던 그 아가씨형사는 내 몸을 싹 수색했고 브래지어, 후드티의 끈까지 가져갔다. 이를 닦고 똥을 눠도 그 아가씨와 함께 했다. 치욕이었다. 대화를 나눠보니 경북대를 졸업한 그녀는 취직이 잘 되는 경찰서를 지원했고 운이 좋아 서울로 발령받았다고 했다.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조사는 지루했다. 일단 재미가 없었다. 나는 당시 엄마아빠의 성화로 김영삼 사인이 들어간 시계를 받는 신한국당 당원이었고 통일은 독일식 흡수통일이 제 맛이라는 병맛적 지론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짜놓은 조서에 내 생각은 맞아들지 않았다. 그들은 ‘이거 또라이 아냐’라며 자주 때렸다. 지루한 조사는 반복됐다. “처음부터 다시!” 그들의 신경질적인 새된 소리. 저 책장에 꽂힌 책들을 다 읽으셨으면 선생님들이 더 잘 아실텐데 왜 자꾸 저한테 물어보세요, 그러니까 너는 저 내용에 동의하는 거 아냐, 책을 읽었어야지 동의하는지 마는지 알지 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 너는 왜 집회에 나가고 이런 찌라시를 만들었어, 선생님들도 제 자리에 있어보세요 안하게 되나… 고장난 레코드. 폭언. 인격모독. 다시 수갑 채워. 지역총련의 간부로 활동하던 김철수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공개학생정치조직의 고급간부였던 그를 나는 알지 못했다. 이 사람들이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내게서 얻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바를 어떻게 진술할 수 있단 말인가.


나보다 보름 먼저 잡혀온 다른 대의원, 그녀는 어느 밤 나에게 그냥 탈퇴각서를 쓰라고 했다. 의아했지만 그녀는 매우 차분해 보였고 그 생활에 아주 익숙한 듯했다. 나는 안그래도 뭐라든 써줄 생각이었지만 main stream의 멤버가 이런 말을 하다니. 엄마가 찾아오셨고 한바탕 소란을 피우신 덕에 수갑은 더 이상 하지 않았도 됐다. 백지와 펜이 주어졌고 그녀가 먼저 작성한 탈퇴각서를 보여주며 똑같이 쓰라고 했다. 이미 머리는 진공상태였다. 아 결국 이 날이 왔구나.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베껴쓰느라 그녀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까지 똑같이 써서 두 번이나 혼났다. 너 한 번만 더 장난치면 그냥 구속이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한 자도 틀리지 않게 썼다. 엄마와 함께 걸어나와 순두부찌개를 먹었고 엄마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엄마는 집으로 나는 학교로 갔다.


탈퇴각서, 일종의 반성문이다. 그 뒤로도 검찰에 들러 비슷한 조사와 조서 작성을 몇 차례 더 했다. 사람들은 그 때마다 이거 별 거 아니야. 라고 했지만 왜 그 별 거 아닌 거에 그렇게 안달하나,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 별 것 아닌 한 장을 받기 위해 사람들은 무기정학 징계도 풀어준다 하고 주지 않았던 장학금도 준다 하고 취업도 보장해 준다 하고 엄마는 갑자기 대학생처럼 학교를 드나드시고 연락도 없던 삼촌이 전화를 하고 내 일상을 모니터하고 알지도 못하는 김철수가 등장하고 수갑을 채우고 사람을 팬다. 그 한 장짜리 반성문을 받기 위해.


이건 복종을 강요하는 거다. 영혼을 내 놓으라는 거다. 하라는대로 하라는 거다. 그래서 별 거다.


솔직히 말하건대 당시 나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한총련을 사수하고 공안탄압을 분쇄하고 뭐 그런 기치보다는 누가 나에게 뭘 억지로 하라는 거 그게 싫었다. 동의고 나발이고 안해도 될 것 같은 일을 억지로 하라는 거 그게 싫었다. 한총련을 탈퇴하든 시집을 가든 내가 알아서 할 일인데, 하든 안하든 내가 알아서 결정할 일인데, 때가 되면 알아서 할 일인데 남들이 나서서 설레발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잡혀들어갈 때까지 탈퇴각서,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그건 나에게 ‘별 거’였다. 아무리 날라리 같이 살아도 똥과 된장은 구별할 줄 알고 생각할 줄 아는 성인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나라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좀 웃기지 않나. 이게 이른바 ‘정상적’인 사회인가?


나는 나의 이 이야기를 그동안 글로 정리하지 못했다. 말로도 잘 정리하지 못했다. 나보다 더 고생한 선배들이 많았고 그들에 비하면 내 고생은 새발의 피도 아니니까. 그리고 누구든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각자 당대를 산다. 각자의 인생이 있고 시절이 있고 맥락이 있다. 그래서 그 개인은 그런 당대 속에서 시절과 맥락 속에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글쓰기와 반추는 그래서 더더욱 존중받고 격려받아야 한다.


징계와 반성문은 요구하는 입장의 사람에게선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것을 치러내야 하는 사람에게는 별 거다. 왜냐하면 이 징계라는 게, 반성문이라는 게 동등한 권력관계에서는 결단코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등한 권력관계에서는 반성이 오갈 수 있고 대화가 오갈 것이며 그리고 변화가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징계같은 요식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잘 못했는가, 왜 그랬는가, 그 내용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그 어줍잖은 권력으로 사람을 누르려 하지 말라. 사람의 양심과 영혼과 굴종을 바라지 말라. 당신은 그 복종의 형식을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의 영혼과 진심은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끝끝내 당신은 그 공허 속에서 인생을 마감할 것이다. 니네들, 내가 써준 한총련 탈퇴각서, 그거 받아서 좋았니. 좋았으면 얼마나 좋았니. 근데 니네들 이듬해 김대중정부 들어서고 경찰구조조정 때문에 다 짤렸다며. 경북대 나온 그 경찰아가씨는 지금쯤 뭐하려나. 행복…합니까?
 

2013/05/20 23:51 2013/05/20 23:51
Trackback 0 : Comments 4

사랑은 골치2

분류없음 2013/05/20 14:30
사랑은 정말 골치. 밥을 먹어도 길을 걸어도 똥을 눠도 오로지 너만 생각해. 좌회전해야 하는 길에서 문득 우회전한 나를 발견해. 햇빛이 창창하다고 여름이 온 건 아닌데 별안간 한기를 느끼는 건 바로 이 골치 때문. 아 글쎄 셔츠 한 장만 입었지 뭐야. 뒷골이 땡겨. 나는 잘 살았나, 잘 상고 있나. 이다지도 너를 사랑할 자격이 있나. 한없이 돌아보고 있어. 골치, 골치. 타이레놀도 애드빌도 나를 달랠 수 없어. 내 이 열병을 고칠 수 있는 건 온전한 너의 손길뿐. 내가, 아니 나를 제대로 먹게 해줘. 나를 제대로 걷게 해줘. 제대로 조준하게 해줘. 이 널뛰는 일교차에 적응하게 해줘. 골치, 골치. 그래서 이 지독한 사랑은 골치. 아으, 시바.
2013/05/20 14:30 2013/05/20 14:30
Trackback 0 : Comment 0

그린비 출판사 노동조합 4

분류없음 2013/05/18 13:49

*원래 이게 3이었는데 4로 밀렸다.

 


Dear Mr. Present, (현재 씨)

이메일해주어 고마워요. 심정이 좋지 못하다는 게 읽혀집니다.


현재 씨도 알겠지만,
살다보면 억울한 일이 많아요. 내 진심은 그게 아닌데, 사실은 그게 아닌데, 조금만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진심도 사실도 조금만 더조차도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참 많아요.
견뎌야죠. 진심이나 사실을, 그리고 조금만 더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점들을, 주변에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시작하면서 견뎌야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거야, 뭐 그런 건 없더라고요. 사람들이, 세상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느냐 이런 것보다는 당장 내가 힘드니까 그렇게 해서 견뎌나가는 수밖엔 없죠.


현재 씨는 이미 현재 씨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현재 씨의 길을 가면서 현재 씨 자신을 옹호하세요. 현재 씨의 처지나 입장이 무엇인지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뭐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세요. 저는 그런 현재 씨가 더 좋아요. 정치적인 입장이나 노동조합에 대한 생각이나 뭐 그런 건 하등 문제될 게 없어요. ‘나’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현재 씨, 우리들이 예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 돌아봐요. 규모를 떠나 어떤 단위사업장에서 노조를 만들고 오비이락처럼 징계문제가 불거졌을 때를 돌아봐요. 그 때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었었나. 제 기억으로는 이른바 사측의 처지와 입장까지 다 경청한 뒤에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진 않았어요. 강자와 약자가 싸울 때, 펀치의 위력이 다른 두 사람이 싸울 때 누가 더 잘했나못했나를 계량한 다음에 편을 들진 않았어요. 제 기억으로는, 제 양심으로는, 제 철학으로는 적어도 그래요.

물론 사정은 있겠지요.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회사가 그렇게 나왔을까, 오죽했으면 위에 계신 분들이 그런 방법을 결정했을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다른 비조합원 분들도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러나 제가 그런 문제를 계산하기 시작하면, 제 (정치적) 판단은 이미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게 흐를 수밖에 없겠죠. 이건 인간적인 도리나,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이성적 판단과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요.

논쟁과 분쟁이 시작되면 거기엔 항상 ‘감정적’인 문제들이 얽혀요. 우린 모두 사람이니까요. 상대방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말버릇이나 태도가 바르지 않으면(바르지 않은 것 같으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죠. 옛날에 어떤 단사에서 쟁의가 시작되어 취재를 나갔을 때의 일이에요. 사측 노무팀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데 노조에서 하는 주장들에 다 동의한대요, 그런데 그 방식이, 노조위원장이라는 사람의 싸가지가 싫어서라도 동의한다고 할 수가 없대요. 세 시간이 넘도록 그 사람 말을 들어줬는데 그 사람 말도 일리가 있긴 있더라고요. 저 같아도 노조를 확 깔아뭉개고 싶었겠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의 녹취를 그대로 실을 순 없었어요. 그건 그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제가 누구의 편에 있는지, 노동조합이라는 게 왜 필요한 거고 지켜야 하는 건지 제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기사는 바로 ‘노동자’들이 보는 잡지에 실리는 거였기 때문이었어요.

그린비노동조합, 출판사에서 일어난 이번 일에 관해서는 우리 각자의 입장과 처지를 갖고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이 외의 다른 문제나 사안에 관해선 우리가 서로 대립할 이유도 필요도 없잖아요. 현재 씨도 블로그나 여타 매체, 연단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세요. 다른 사람들이 현재 씨를 소위 ‘나쁜’ 사람으로 설정하도록 내버려두지 마세요. 왜 현재 씨의 입장이 합당한 것인지에 관해 현재 씨의 방법으로 현재 씨의 정치를 하세요. 필요하다면 회사의 힘과 권위를 이용하세요. 다만, 이 모든 게 현재 씨의 철학과 삶의 지론에 부합하도록 하면 돼요. 사람들은 대부분 생각과 삶의 불일치,  바로 그 지점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어요. 그저 그 두 개를 어떤 방식으로든 일치시키면 문제는 쉽게 풀릴 거예요.

우리는 좀 더 프로패녀설해야 해요. 살면서 겪는 여러 문제들이 우리 삶 앞에 닥칠 때 그 문제들이 우리의 존재를 압도하도록 내버려두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그 문제가 무엇인지 규명할수만 있다면 이미 우리는 ‘프로’에요.

현재 씨,
필요하다면 이메일을 보내도 좋고 블로그에 덧글을 써도 좋고 어쨌든 다 좋아요. 소통하는 것, 저는 그것이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꽃개 보냄
 

2013/05/18 13:49 2013/05/18 13:49
Trackback 0 : Comment 0

그린비 출판사 노동조합 3

분류없음 2013/05/17 05:15

어떤 분이 이 글 http://soonpoong.tistory.com/1 을 읽어보라고 알려주셨다. 

(블로그 쥔장께서는 기억하실지 몰라도) 개인적으로 일면식이 있는 분이라 애정을 듬뿍 담아 읽을 수 있었다.

잘 읽었고 그리고 글쓴이의 진심이 묻어난다는 것을 읽으면서 내내 알 수 있었다. 오랫만에 이런 글을, 상투적인 표현이긴 해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글을 읽게 되니 씁쓸하면서도 ‘뿌듯’하다.

 

감히 조언을 드리자면,
앞으로 회사를 공동체를 지향하는 ‘회사답게’ 운영하셨으면 좋겠다. 잠깐! 그런데 이 분이 회사를 운영하는 처지에 계신 분인지, 아니면 자기가 운영한다고 믿고 계신 분인지 그게 분명하지 않아서 감히 드린 조언은 일단 철회. (사실확인 뒤 복구 가능)

 

다만,

 

공동체를 지향하는 회사(1) -> 회사 규모 커짐 -> 노동조합 생김 -> 분쟁 발생 -> 회사(2)

 

위의 도식에서 회사(1)이 지향했던 바를 잃지 않고이른바 ‘경영합리화’에 성공하는 회사(2)가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힌다. 어느 회사든 그 회사를 보면 그 회사의 노동조합 수준이 드러나는 것 같더라. 역으로 노동조합을 보면 그 회사의 수준도 알겠고. 그래서 그 둘을 운명공동체라든가 뭐라든가 하는가 본데 어쨌건,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게, 커뮤니티를 일군다는 게 어떤 건지, 그 지향점을 잃지 않고 갔으면 좋겠다, 는 뭐 그런 절실한 바람이다. 뭐라, 공동체를 지향하는 회사가 가능하냐고? 아니, 왜 불가능해? 우린 그저 규모가 커짐에 따르는 문제를 겪고 있는 것 뿐이라고! 우린 할 수 있다고! 불가능한 걸 처음부터 왜 하려고 했어? 처음부터 그럼 구라였어?!
 

그리고 몇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게 있어 그린비출판사를 애정하는 한 사람으로 이 밤의 끝을 다시 시작한다. 시바, 잠 다 잤네. 뭐, 어차피 나는 노동조합도 없는 비정규직노동자.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활동’에서 ‘노동’으로 돌아갑니다.
--> 우선 제목부터 상당히 거슬립니다. ‘노동’을 어떻게 규정하시는지 좀 그러네요. ‘노동’은 노동입니다. 노동은 사람들이 뭔가를 대상으로 해서 그 대상에 뭔가의 힘을 가해 그 대상이 과거의 대상의 존재와 다른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노동’은 순결하거나 순진무구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에요. 그냥 ‘뉴트럴’입니다. 이건희도 노동하고 저도 노동합니다. 자신의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그 대상에 담아낸다는 것, 좋은 말입니다만 당분간 이 좋은 데피니션, 묻어둡시다. 그건 그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영역(정치/정치경제학)의 문제와 결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결국 명실이 상부하지 않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자본이, 시장이 왕인 세상에 살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가진 게 몸뚱아리밖에 없는 사람들이 자기 몸뚱아리를 시장에 내놓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꺼리를 장만하기 위해 하는 일이 ‘노동’으로 되어 버린 겁니다. 그게 어때서요? 그리고 ‘활동’이란 말이 나온 김에. 한국사회의 이른바 ‘활동’가들 가운데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온전히 하고 살아가는 활동가? 거의 없어요. 백만 원도 안되는 ‘활동비’(라고 쓰고 월급이라 읽는다) 받아가면서 초근목피하는 활동가들이 태반입니다.

 


‘사측’이라는 익숙하지 않는 말
-->  ‘회사’와 ‘사측’이 아무리 잘해도 ‘개량’이라거나 ‘악덕’이라고요? 왜요? 잘하는데 왜 그런 말에 신경써요?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이 책 사줄 것 같아요? 안사줘요.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은 책 안봐요. 그냥 팜플릿 보거나 책 요약해놓은 것 보거나 아니면 복사해서 봐요. 우리 안의 ‘사측’포비아를 없애BOA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당신은 잘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의 ‘활동’과 앞으로의 ‘노동’


[…] 그럼에도 결코 인문서 수백 종의 매출이 ‘소아과’와 관련된 타이틀 서너 종의 매출을 넘어선 적도, 그 근처에 가본 적도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린비’는 그런 상황에서도 인문서를 계속 출판했던 것일까요?
-->  이미 앞에서 답하셨잖아요. “잘 알려진 것처럼 ‘그린비’는 ‘소아과’의 놀라운 매출 덕에 마음 놓고 인문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린비’의 구성원들이 인문학을 좋아해서 인문출판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 그린비가 한참 추진했던 온라인 블로그, 무가지 gblog, 웹서비스, 독자초대세미나, 학술심포지엄 등 여느 출판사에서 하지 않았던 사업들은 다양한 차원에서 인문학의 동력을 얻고자 했던 노력이었습니다.
-->  이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이 동기와 ‘소아과’의 놀아운 매출이 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냈던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건대, 이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이 모든 노력과 열정으로 만들어간 활동들이 한순간에 노동자를 착취하여 일구어낸 것으로 비춰지는 상황이 억울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  “노동자를 착취하여 일구어낸 것으로 비춰지는 상황”으로 비춰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를 착취하지 않으면 이윤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린비출판사가 이 잉여가치를  ‘착취’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그린비는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지금의 그린비가 없다니!!! 착취는 나쁜 것이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울해하지 마세요, 당황스러워하지 마세요. 다만 그것을 인정하세요. 착취? 사실, 뭐 그거 별 거 아니에요.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젖을 주시는 어머니를 착취하고 사니까요.


[…] 단지 출판노동자의 피를 빨아먹고, 노동자의 정당한 저항을 탄압하는 회사가 되어버렸습니다.
-->  Nononono, 그렇지 않아요. ‘착취’와 ‘피를 빨아먹는다’는 표현은 한참 달라요. 제 생각엔 착취는 그냥 정치(경제학)적 표현이고 피빨아먹는 건 뭐랄까, 브램 스토커의 책에서나 볼 수 있는 뭐 그런 거 아닐까…그리고 노동자의 정당한 저항을 탄압하는 회사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일정 맞는 것 같군요.

 

‘회사’와 ‘사측’이라는 어휘가 낯선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 ‘노동자’라는 어휘도 익숙하지만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그동안의 그린비의 활동들을 ‘노동’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고, 좀더 솔직하게는 ‘회사에서 하는 일 = 노동’이라는 등식을 뛰어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솔직한 고백 고마워요. 그리고 그린비의 그간 활동을 ‘노동’이라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스스로 ‘노동자’라는 생각도 안 해 보신 건가요, 혹시?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정해진 시간까지 일을 하고,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고, 대가를 받아 정해진 시간 이외의 시간에는 좋아하는 것을 하는 그런 ‘노동’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  아, 소외된 노동을 말씀하시는 거구나. 아, 이제 알겠다. Got it! 앞으로는 일일이 답변을 달지 않아도 되겠어요. 이해했어요.


[…] 이러한 지향과 운영방향이 누군가에게는 인격적 예속이었고 억압일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한 운영방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치 유토피아 같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옥과도 같았다는 점, 역시 인정합니다. 유토피아 때문에 지옥이 생겨났고, 그 지옥으로 인해 예전의 그린비가 지향했던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
-->  그냥 인정하는 게 아니라 왜 인정하시는지를 말씀해주시면 생각이 더 명료하게 다가올 것 같아요. 그리고 단한 번의 어떤 ‘실수’가 ‘실패’를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 “‘노동자’들이 원하는 회사”에 대한 상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죠.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인데 사람들은 현실이 너무 지옥같으니까 종교를 통해, 창작을 통해, 혹은 정치를 통해 유토피아를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순서가 바뀌지 않았나 싶은...

 


그린비, 일과 놀이와 공부가 분리되지 않았던 곳
-->  네, 좋아요. Sounds nice! 님은 좋은 사수(supervisor)를 만났던 거겠죠? 이젠 님이 후배편집자들에게 좋은 사수였는가, 그것을 돌아보면 되겠네요.


유토피아 혹은 지옥, ‘계몽’을 넘어서고 싶었으나 ‘계몽’의 대상이 된 회사
그런데 지금은 제가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했던 부분이 ‘전근대’적이며 ‘회사’로 각성되지 못한 미개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근대’를 넘어선 삶이라고 여겼던 부분이 어떤 이에게는 계몽되지 못한 지옥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 서로의 감성과 생각이 다른 데서 시작된 문제 […]
--> 우리는 늘 전근대와 근대, 현대와 탈현대를 넘나들며 살아갑니다. 어느 한 순간에도 한 ‘시대’에 머물 수가 없어요. 인문(학)을 다루는 사람이면 그 간극과 분열이 더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전 탈식민주의를 공부하다가 그 열패감에 시달렸어요. 그래서 그린비책을 사려고 왔다가 이 사단을 알게된 거죠. 그리고 노동조합(원)과 비노동조합(원)의 차이는 감성과 생각의 차이라기 보다는 입장과 처지의 차이인 것 같아요. ‘내’가 놓인 ‘세상’이 ‘내’ 정치를 결정하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 차이에 대해 조금은 냉정했으면 좋겠어요.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➀ 일이 즐거운 미개인

[…] “참 밝다” “분위기가 좋다”[…]
-->  미래를 보는 사람은 그 말의 이면을 늘 기억해야 그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➁ 장인(匠人)이 되고 싶었던 도제
-->  다시 말씀드리지만, 님께서 사수를 잘 만난 인연을 일반화하는 건 곤란해요. 왜냐하면 사람은 다 다르니까요. 4-5년, 3년 이런 수치는 사실 그냥 수치죠. 사실 어떤 편집자는 1년차에도 책을 너끈히 만들어내기도 하고 어떤 편집자는 5년이 넘어도 똑같은 실수(사고)를 밥먹듯이 반복하기도 하고 그래요.


[…] 이제 제가 후배들에게 그런 선배가 되고 싶었습니다. […]
--> 그 진심은 저도 충분히 이해해요. 사실 그 진심을 높이 삽니다. 존경합니다.


➂ 이벤트도 행사도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죄
-->  죄는 죄죠. 그런데 더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어떤 노동자들이 소외당하지 않았을까. 그것을 먼저 헤아려야 할 것 같아요. 해봐서 아시겠지만 소외당하면 아무리 주지육림에 빠져도 거참, 재미없거든요.


➃ 자기 성장만을 고려했던 평가
-->  아예 이번 기회에 Performance Evaluation 기준을 마련하세요. 분회와 함께 마련하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노동자 개개인이 겪는 어떤 미세한 부분을 사수(supervisor)가 어떻게 서포트할 수 있는지 그 부분에 초점을 두고 평가 기준을 마련하세요. 한국식 근무고과평가가 아니라 그린비만의 독창성을 갖는 그런 기준을 마련하시고 노동자 개개인과 혹은 집단으로 토론하세요. 그러기 위해선 그 토론을 주도할 사수들이 열렬히 공부하고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 게 필수겠죠. 사람없이 어떻게 인문(학) 서적이 나오겠어요.

➄ 진심은 통할 거라는 순진함, 혹은 어리석음
-->  네. 훌륭합니다. 진심은 통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날밤을 까는 겁니다.


➅ 가슴을 뛰게 했던 인문 : 자율성, 자유, 민주에 대한 다른 관점
[…]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
-->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큼 앞으로는 더 많이 ‘사람’을 좋아해주세요. ‘그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요.


➆ 투명하게 떳떳하게
--> 글쎄요, 너무 ‘업계’가 업계답게 흘러가다보니까 구구절절 말씀하신 부분들이 마치 ‘비정상’적으로 그러니까 뭔가 특별한 것처럼 들리는데요, 말씀하신 바대로 해야 하는 게 원래 맞는 거 아닌가요?

➇ 직원 수의 증가와 회사다움에 대한 고민
--> 제가 사랑했던 그린비는 visioning이 확실한 출판사라는 점이었어요. 이 vision에 맞는 사람을 찾는 게 힘들다는 것 잘 알아요, 거기에 님의 고뇌가 있었겠죠. 징계는 필요하면 해야죠. 취업규칙이든, 회사편람이든 제일 마지막에 의지할 부분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필요한 건 사실이에요. 사람끼리 하는 일인데 왜 대화가 안 되겠어요, 그래도 just in case, 필요해요. 규칙이라는 건.

--> 그리고 새로 들어온 직원들이 잘못하거나 실수할 때는 님의 1-2년차를 돌아보시면 돼요. 나의 사수는 나를 어떻게 단련하도록 했으면 내 실수를 어떻게 서포트했는가. 뭐, 우울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편집과 편집프로세스 실험과 관련하여
--> 네. 편집은 일반화하기가 어려운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장 자』(莊子)의 「양생주편」(養生主篇)은 좋은 예시이기는 하나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살아있는 소가 느낄 고통을 생각하니 소름이...
--> 각 출판사는 각 출판사만의 고유 편집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발행인과 편집장이 책임지는 부분이라 사료되옵고 각 편집자는 필자와 논쟁하여 그 편집의 방향을 관철하거나 compromise하면 될 일입니다. 어찌되었든 최종책임은 발행인과 편집장이 지는 것입니다.


➁ 편집프로세스는 전문출판사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 그것은 이윤을 위해서 노동강도를 높이려는 전략은 더더욱 아닙니다. 편집프로세스는 한국사회에서 전문출판사가 생존하기 위한 방법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
--> 편집프로세스는 한국사회에서 전문출판사가 생존하기 위한 방법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것은 이윤을 위해서 노동강도를 높이는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즉, 잉여가치를 –잉여노동을- 더더욱 뽑아내야 하는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실제로 일을 하는] 노동자들과 합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전략은 전략이 아닌 것으로 됩니다. 폭력이 됩니다.
--> 너무 불필요하게 자세히 말씀하셨어요. 막말로 노동자들 갖고 생떼쓰지 마시고 문화관광부(정부) 같은 데나 출판인썸씽 같은 데에서 전국 공공도서관 확보하는 투쟁 같은 거라도 벌이세요. 삼천 군데 공공도서관이 생겨서 기본적으로 종당 천부는 소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세요. 왜 자꾸 압력을 아래로만 하세요? 상상력을 좀 바꾸세요, 제발!!!
--> 출판원가와 종당 출고가를 다 알고 있거든요. 어떻게 아냐고요? 해 본 사람이면 다 알죠. 여기에서 그런 것까지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그런 것까지 저도 ‘까놓고’ 이야기하게 되거든요. 좀 슬퍼요, 그런 게.  
--> 역자가“역자를 착취해서 출판사가 먹고 사는 거 아니냐? 순 날강도 아니냐?”라고 말하면 시바 너랑 책 안해, 그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제 생각엔 그렇게 말하는 역자들이 누구인지 감이 좀 잡히거든요. (특히 교수들이나 썩 많이 배운 사람들이) 책을 번역한다는 게 어떤 구조인지, 어떤 benefits이 (그 일부) 역자에게 가는지 더 날 것 그대로 얘기하고 싶은데 그냥 여기까지만 할께요. 그리고 어렵고 고된 길이지만 묵묵히 견결하게 자기 길을 가려는 건강한 인문(학) 역자를 발굴하세요. 번역이 영 시원치 않더라도 뛰어난 편집자가 함께 작업하면 어떤 훌륭한 책이 나오는지 더 잘 아실 것 같아요.
--> BeP.조차 볼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좋은 역서를 내는 일은 참 잘하는 일입니다. 박수!!!
-->  ‘21세기 생산혁신 전략’이라는 책이 1997년에 나왔어요.  앨빈토플러가 다품종 소량생산 얘기한 건 훨씬 이전이지 싶고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를 폭넓게 거론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즈음일 거예요. 님께서 진단하실 때에 이제 우리 그린비가 충분한 생산설비를 갖췄고 시장의 요구도 부응할 겸 다품종 소량생산, 도요타생산방식이 나을 것 같다는 건 뭐 그렇다 쳐요. 틀린 말씀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다만 ‘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는 얘기는 별반 호소력이 없는 것 같아요. 여기에서 제가 구직할 때마다 듣는 소리가 경제가 안 좋다, 인데 꼭 그 소리 같거든요. 뭐, 경제가 언제 좋았던 적이 있나요?


상황은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희망에 대해서도 절망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절망을 낳는다는 점에서 둘은 같은 말일 뿐입니다. 이 상황에서 믿는 건, 이런 좋지 않은 조건 속에서도, 어쩌면 바보 같은 짓일지 모르지만, 여전히 저자는 책을 쓰고, 역자는 번역을 하고, 출판사는 책을 만들고, 독자는 책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책 만들기의 여러 가지 방법을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 상황은 좋습니다. 그리고 희망은 절망을 낳지 않아요. 근거없는 희망 따위가 절망을 낳기야 낳기는 하겠죠. 인문(학)의 묘미는 희망을, 끊임없는 희망을 생산하는 데 있습니다. 네.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책을 만들기 위해 늘 힘써주세요. 늘 희망을 생산해 주세요.
 

회사가 되겠습니다

 

“회사가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당연한 이 말이, 왜 이렇게 늦되냐 질책받는 이 말이, 제게는 아직도 가슴을 저리게 하는 힘겨운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무엇보다 분회원들이 원하는 대로의 ‘회사다운 회사’가 되어야겠지요. 그 회사의 모습은 지금 전체 편집팀과 디자인팀에게 완전히 맡긴 편집프로세스와 진행하고 있는 단체협상 속에서 모양을 갖춰가겠지만,
--> ‘왜 이렇게 늦되냐’는 질책 빼고 글자 그대로라면 전부 동의합니다. 늦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질책의 이유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질책하고 싶군요.

 

분명한 건, 그 ‘회사’의 모습은 당연히 전과 같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기존에 그린비가 기꺼이 지향했던 가치 속에서 나왔던 행동들이 ‘회사’의 행동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  이 부분은 어쩐지 속상합니다. 왜 결론이 이렇게 나는지 저로서는 그 논리 구조를 따라가기 힘들군요.


돌이켜보면 상품을 생산하고 팔아서 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회사로서, 특히 그 규모가 커질 때 전 구성원이 큰 틀에서 기존에 회사가 가져온 지향을 이해하고 함께 자율성을 발휘해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어리석지 않습니다. 할 수 있지만 다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그린비가 지향한 가치에 비춰본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방식에 기대 사업은 해도 그 운영은 커뮤니티에 걸맞게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불협화음이 없을 수 있겠어요? 그런 데가 있다면 저 좀 소개시켜주세요.


[…] 시도했던 일들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상처가 되었다고 해서, 그로 인해 결국 또 다른 상처들을 낳았다고 해서, 통곡하며 머물거나 돌아설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지금 이 상처를 직시하고, 서로가 직시한 현실이 다르다는 점을 받아들이며, 서로의 생각과 감정이 다른 이 지반 위에서 최선을 다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 합니다. […]
-->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생각과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에 또 다시 격려를 드립니다. 차이에 기반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님의 말에 박수를 보냅니다.


[…] ‘활동’이 아닌 ‘노동’을 해야 함을 받아들입니다. 다만, 이 받아들임이 상처를 최소화하는 길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회사가 되겠습니다.
--> 반복하는 말씀입니다만 저도, 님도, 그린비 식구들도 모두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죽지 않는 한 계속 ‘노동’을 해 왔고 하고 있으며 할 것입니다. 우린 사람이니까요.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린비가 향후 그동안 지향했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는 '회사'가 되지 않는다면 더 큰 저항과 갈등과 상처에 직면할 것입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2013/05/17 05:15 2013/05/17 05:15
Trackback 0 : Comments 3

그린비 출판사 노동조합 2

분류없음 2013/05/13 13:02

지금 쓰는 이 것은 이 글http://blog.jinbo.net/ys1917/trackback/880 에 관련있는 글이다.

트랙백 천 년만에 하려니까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네.

 

-----------

지금 살고 있는 온타리오 주는 얼마 전 사회서비스 제공 분야에 LHIN이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외관으로만 보면 아주 그럴싸 하다. 그런데 미시적으로 들어가면 골 때린다. 제도 전반을 MBA출신들이 수립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아주 골을 때린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케이스를 담당하는 소셜워커(사회복지사)가 하루에 몇 건 정도를 처리하고 전체적으로 총괄해서 보고하고 그에 따라 컨설팅도 같이 하고 뭐 그러는 자못 환상적인 제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LHIN을 도입한 뒤로는 한 사람의 워커 당 하루에 몇 건 그러니까 예를 들면 다섯 건, 을 반드시 해야 한다. 클라이언트마다 상황이 다르고 각 클라이언트가 매일매일 처한 조건도 다를텐데 그냥 수적 개념으로 몇 건 처리, 이렇게 바뀌어버리니까 어떤 몰지각한 워커는 전화해서 하이 긋모닝, 에브리싱이즈올롸잇? 그러고 전화끊고 아싸 한 건 처리, 혹은 커피숍에서 십 분 간격으로 클라이언트 미팅 약속을 잡고 한 시간만에 한큐에 처리. 그리고 클라이언트메니지노트를 입력한다. 그리고 땡. (이 나라에서는 사회복지사의 위상이 제법 높은 편이라 생각없는 사람들이 많이들 사회복지사가 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런데 슬픈 것은 그렇게 하루 다섯 건을 처리해도 그 워커 당사자에게는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거다. 클라이언트들은 죽어날 것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권리도 모른 채 넋놓고 당하는 거지. 아니, 자신이 착취당하고 (being abused)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출판업에서 그것도 인문(과학)을 다루는 출판업에서 편집노동자들에게 하루 몇 쪽씩 정해서 일을 시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언제까지 책을 마치고 출간한다,는 대략의 아웃라인을 책임편집자가 수립하고 편집(장)회의에서 합의하면 그 아웃라인의 세부사항은 담당자가 알아서 하고 중간중간 편집장은 중간보고를 듣고 애초의 계획대로 길을 잘 가고 있는지 길눈이 역할을 하면 되는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아닌가? 아닐까? 문제집 만드는 회사도 아니고 - 예전에 문제집 만드는 데에서 일해봐서 잘 안다, 는 이명박식 접근입니다 - 호떡 찍는 데도 아닌데 이렇게 하면 잘 안된다는 것을 회사도 잘 알고 있을텐데...

보다 더 유연하게 보다 더 자유롭게 그러면서 보다 더 명백한 책임을 지도록 해야 인문 분야 편집노동자들이 일을 더 잘한다. 그래서 출퇴근 시간도 아주 자유롭게 하고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교양을 드높이지 않으면 도저히 책을 만들 수 없구나, 라는 사명감(?)이 들어야 수유연구실에도 제 발로 걸어가고 때로는 워크샵 기획안을 제출하기도 하고 그러는 거다. 이게 심해지면 집에서도 일을 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일을 하고 똥을 누면서도 일을 하고, 망조가 들기 시작하는데 그 때가 바로 편집장이 혹은 사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시점이다. 노동자가 스스로 자신의 노동력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시점이므로 회사 입장에선 감가상각비 계산 상 손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너에게 휴가를 주겠어. 좀 쉬고 오지. 태국행 비행기를 끊어 놓았으니 일주일 놀고 오면서 태국사람들은 무슨 책을 읽는지, 푸켓에 놀러온 서양것들은 무슨 책들을 들고 왔는지 그런 것도 알아오면 아주 좋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돼. 어쨌든 자네는 재충전이 필요할 것 같아. 자네가 진행하는 책은 당분간 편집장이 홀딩하고 있는 것으로 하지. 자, 다녀오게.

 

따라서 나는 포드식 편집프로세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왜 회사가 자발적으로 그런 대략 좋지 아니한 구렁텅이에 빠졌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 그린비출판사가. 누군가 인격이 불량하거나 상상력이 빈약하지만 대단히 부지런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건가? 했다가는 맞아맞아,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모두들 힘들었던 거야. 뭐 그런 식으로 급정리.

즉, 포드식 프로세스 철회는 노조의 승리이겠으나 더 나아가면 회사로서도 좋은 일이다, 뭐 그런 것.

 

징계는 글쎄.

이건 좀 센 거라서 생각하면 할수록 골이 아프다. 자존심과 명분 싸움. 동종업계 싸장님들 눈치도 봐야 하고, 업계의 관행이라는 게 있는데 그것도 좀 거슬리고...

그냥 통크게 결정하세요. 책 만들 때 사고를 낸 그 당사자와 관행대로 처리하세요. 하던대로 하세요. 뭘 자꾸 일을 크게 만들고 그럽니까. 정말 장사 안 하실 거예요?

 

 

마지막으로 공격성을 보이는 비조합원  마케터 썸온에게,

스피드욕배달서비스 (1818-1818)를 주문하고 싶지만 당분간 어렵겠네요. 조합원들에게 공격성을 띠지 말아주세요. 공격(성)은 상대방 수비수들에게 하는 거니까요. 누가 당신의 팀인지 찬찬히 살펴보세요. 자살골은 한 번이면 족해요. 당신이 결국 위험에 처했을 때 누가 마지막으로 당신의 그 손을 잡아줄 것인지 집에 가서 벽보고 잘 생각해보세요.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는 건 아니잖아요. 코 막혔어요?

 

2013/05/13 13:02 2013/05/13 13:02
Trackback 0 : Comments 3

그린비 출판사 노동조합

분류없음 2013/05/09 00:25

몇 년 전 일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 따라서 이름을 대지 않는다 – 좌파의 소문난 거장께서 한 언론사의 대표(?)로 계셨을 때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했단다. 직원들의 이 말이 사실이었는지 위협(?)적 농담이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런데 그 거장은 직원들의 이 말에 “노조라니요, 여러분들이 이 곳의 주인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예능을 다큐로 받은 것인지, 다큐를 예능으로 받은 것인지 그 맥락 또한 내가 알 길은 없다.

사실 노동(조합)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른바 (so-called) ‘노동조합 알레르기’라는 것은 있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알레르기를 극복하지 않는 한 노동(조합)운동의 해방은 없다, 없을 것 같다. 어차피 노동조합은 자본운동의 산물이지 않은가. 노동조합이 갈 때까지 발전해봤자 갈 길은 뻔하지 않은가. 물론 현재 한국사회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나를 포함해서- 비정규직노동자, 비공식노동자들에게 당장은 꿈만 같은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도 산업별 지역노동조합 같은 게 있어서 자발적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잡을 때 노동조합이 있는 데를 고를 수는 있다.)

맑스, 스피노자, 벤야민, 라이히, 파농 등 서구 철학의 근간과 대안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인물들의 생각을 끊임없이 건강하게 생산해낸 그린비출판사에 노동조합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싸! 정말이지 빈 말이 아닌 게 그린비출판사는 내 삶의 젓줄* (젖줄 아님)과 같았다. 8-90년대에 잘 나가던 출판사들이 줄줄줄 도산하거나 막아먹히고, 우회전하고 마가릿대처의 주문에 따라 가실 때에도 견결히 한 길을 고집하던 그린비출판사, 막말로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 안 읽어본 진보넷블로거들 있나(요)? 한 검의 양날을 가장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그린비출판사를 보며 언젠가 출판사에서 일할 때에도 우러러보며 내게 그 날이 올 것인가, 그 날을 위해 묵묵히 소처럼 가련다, 그런 자세로 살았던 적이 나에게도 있었더랬다.

노동조합이 생긴 일은 좋은 일이다.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이나 회사와 동등하게 교섭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노동자들이 공식적으로 자기들끼리 뭉칠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다는 것은 잘된 일이다, 암만, 잘된 일이지. 더구나 출판사에서 일하시는 -특히 편집부에서 일하시는- 노동자들의 허위의식을 건강한 방향으로 드높이기 위해서라도 노동조합은 필요하다. 결국 그 모든 일들이 사회를 발전적으로 끌어가는 일들이니 말이다. 자본운동을 폐절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조합 운동 또한 갈 때까지 가 볼 일이니까 말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 과정에서 불거진 일이다. 징계, 말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이런 불쾌한 전형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된 것이 나에겐 안타깝다. 내 속 모르는 사람들은 어디서 회사편을 들고 지랄이야, 하겠지만 이건 정말 지랄이 아니다. 그러니 속 모르고 먼저 지랄말라.

책을 만들다보면 사고는 부지기수로 발생한다. (혹시 그린비출판사에 그동안 사고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겠지요?) 살다가 실수하는 거랑 비슷하다. 오줌누다가 똥나오는 거랑 비슷하다. 몇년 종사하지 않은 출판사에서 나도 사고 많이 냈다. 우리 사장님께 미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만들어달라는대로 만든 인쇄소, 제본소 노동자들에게 면이 안 서기도 했다. 그 뿐인가, 입고 끝나고 주문나오는대로 배본 시작했는데 사고난 걸 알아버리면 정말이지, ‘죽고’ 싶었다. 사고가 나면 가장 먼저 사장님께 보고하고 함께 의논했다. 어디서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함께 찾아냈다. 독자를 생각하는 차원에서 사고를 최소화하고 가장 빨리 그것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뭐, 책 한 권 내고 끝낼 일인가, 장사 한두 번 해봐(요)? 무엇보다 책을 만든, 책을 만들 사람들이 ‘제 정신을 차리는 게’ 가장 중요했다, 중요했던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조부문 –출판사의 산업 분류는 ‘제조’다- 의 최종책임은 제조 공장의 짱이 지는 거다. 출판사에서 최종 책임은 발행인이 지는 거다. -그게 싫으면 판권의 발행인에서 빠지면 된다- 그리고 나서 종업원을 닥달하면 된다. 나는 그런 책임라인을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까웠다는 게 첫째 이유다. 둘째는 그동안 사고가 났을 때 어떻게 처리했는지 나는 그게 궁금하다. 그 관행이 분명 있었을텐데 갑자기 노동조합이 생겨서 그 관행이 바뀐 것은 아니겠지(요)? 사람들은 일견 ‘관행’은 나쁘다, 고 할 수 있지만 모든 관행이 나쁜 것은 아니다. 사고는 사고일 뿐이다. 그것이 회사의 명운을 결정할 정도로 흘러버리면 글쎄, 이럴 경우는 안 생각해봤는데… 그냥 이자율이 가장 낮은 -리스크율이 가장 낮은- 펀드에 돈 넣어두고 기다리며 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속상하다. 최근 들어 이 곳에서 탈식민주의 생각에 박차를 가하게 되어 파농의 책이 급했는데 일이 이 지경까지 되어 버린 마당에 그린비출판사 책을 산다는 건 뭐랄까, 내 양심의 빤쓰에 구멍을 내는 일인 것 같아 당분간 지켜볼 수밖에. 쌀로 밥 짓는 소리, 공자님 껌 씹는 소리를 맛있는 밥내로, 유쾌한씨의 껌씹는 소리로 만드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책상에 앉아 말 같지도 않은 원고를 몇 번 만져 책으로 내 본 주제에 뭔 소리야,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난 그래도 책 만드는 노동자였어, 씨바. 니들이 노동을 알아!

 


* '젓줄'에 의아해 할 분들, 특히 편집라인 출신 분들께: 저는 젓갈을 참 좋아하여요. 밥상에 젓갈이 있으면 밥을 너댓 공기나 먹을 줄 안답니다. 아주 조용히. 따라서 과거의 저는 그린비출판사 책만 있으면 맑스책 안 봐도 배가 불렀더랬어요. 내 삶의 젓갈인, 젓갈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제 맞춤법 오류는 그냥 눈감아 주세요. 덧글에 써주시는 건 완전 환영. :P

 

2013/05/09 00:25 2013/05/09 00:25
Trackback 0 : Comments 3

간격

분류없음 2013/05/09 00:22

간격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되는,

기어이 떨어져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보고서야 알았다


- 안도현,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2004>

2013/05/09 00:22 2013/05/09 00:22
tags :
Trackback 0 : Comment 1

악몽

분류없음 2013/05/07 23:27

새벽에 꿈을 꾸었다. 잊었나 싶으면 영락없이 재현되는 이 악몽.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이 감정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어딘가 작은 구석에라도 사랑이 있지 않았을까, 남아있지 않을까. 언젠가 그 사람을 만나 물어보면 그렇다고 답하지 않을까. 그런 헛된 망령의 정체를 비로소 이제야 할 것 같다. 그것은 결단코 사랑이 아니었다. 한참이나 지난 일을 끄집어내어 무엇하느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물어야만 했다, 물어야만 했나 보다. 바로 나 자신에게. 그것은 단언컨대 사랑이 아니었다. 폭력과 권력의 남용이었고 그리고 아직 여물지 않은 감정의 치명적인 훼손이었다.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정직했고 정직해야만 했으므로. 최대한 이성적으로 그리고 흔들리지 않으면서 이 결을 되짚어 볼 일이다. 이것을 끝내지 않으면 나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악몽에 시달릴 것이다. 죽는 날까지, 아니 꿈을 꿀 수 없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이것이 내 운명이다.
 

-----

아, 정말 미치겠다.

이 꿈을 꾸는 날이면 정말이지 먼지처럼 훌훌 사라지고 싶다.

그만 좀 괴롭혀라. 훠어이 훠어이 가버려라. 제발.

2013/05/07 23:27 2013/05/07 23:27
tags :
Trackback 0 : Comment 0

고기 먹었다

분류없음 2013/04/01 08:46

몹시 피곤하지만 쌀을 사러 밖으로 나갔다.

버스를 타고 이십여 분가량 가면 제법 큰 한국인 마켓이 있다.

일단 쌀을 산 뒤 방친구가 좋아하는 팥죽을 산 다음, 나도 모르게 차돌박이를 샀다.

여기 사람들은 그 부위를 먹지 않아서 그런지 가격이 저렴한 편.

집에 돌아와 너무 피곤해 그냥 쓰러져 잤다. 한참 뒤 허기를 느껴 일어났다. 찬밥과 고추장을 꺼낸 뒤 아무 의식없이고기를 굽고 있었다. 너댓점 구운 뒤 밥과 함께 먹었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냥 나도 모르겠다. 내 몸이 쇠고기를 원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생고기를 그렇게 먹고 나면 왜 그렇게 죄책감이 드는지 알 길이 없다.

2013/04/01 08:46 2013/04/01 08:46
tags :
Trackback 0 : Comment 0
◀ PREV : [1] :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