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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19
    제주 4.3평화공원에서
    푸르른 날
  2. 2010/04/11
    [견우를 그리워하며1] 어머니의 마지막(?) 자존심
    푸르른 날

한내 제주위원회, 2월 19일에 창립총회 열고 출범!

‘한내 제주위원회’가 지난 2월 19일에 창립총회를 열고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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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첫 물길’을 열었습니다. 노동자민중 역사의 ‘한내’로 이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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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 제주위원회 운영규칙>을 만들었고, 위원장에 고대언(민주노총 제주지역본부장), 부위원장에 전우홍(진보신당 전 제주위원장), 사무국장에 김해옥, 그리고 7명이 선출직 운영위원이 선출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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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월경에 공개적인 출범식을 갖기로 했고, 구체적인 ‘사업계획’도 그 때까지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회원도 적극 조직하기로 했습니다.

‘한내 제주위원회’의 별칭으로 ‘아람수꽈’가 제안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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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역사를 노동자 민중의 눈으로, 노동자 민중 자신의 손과 발로 기록하고, 그래서 노동자 민중을 역사 발전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세워내고자 하는 바람과 열망을 모아 이제 그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무엇보다 “역사는 기억과 기록을 둘러싼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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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지처럼 버려지는 노동자 민중의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정리하고, 전산화해서 노동자 민중운동의 소중한 자양분으로 재탄생시킬 것입니다.

모든 기록물을 공개하고, 제주도내만이 아니라 전국의 노동자 민중들과 함께 공유해 나갈 것입니다.

제주도의 노동자 민중의 역사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고 교육해 나갈 것입니다.

노동자 민중 열사들의 정신을 계승해 나갈 것입니다.

그만큼 제주도의 역사를 노동자 민중의 역사로 바꿔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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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한내’라는 물줄기를 통해 노동자 민중의 역사로 이어질 것입니다. ‘한내’는 제주도 노동자 민중들의 삶과 투쟁과 문화와 --- 이 모든 것의 곁에서 함께 새로운 역사의 물줄기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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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주도는 ‘자연’이 ‘역사’를 압도하고, 그 자연을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땅”이라는.

제주도를 돌아보면 누구도 아름다운 자연경관 때문에 4.3.이라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쉽게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자연경관 가운데 많은 부분을 ‘자본’이 지배하고 있고, 그 지배를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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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은 제주도민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그나마 ‘인권과 평화’라는 수준에서 한 매듭을 지었습니다. ‘4.3.평화공원’이 그 매듭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4.3.’은 ‘피해자’로서의 모습만 부각되어 매듭지어졌지, 당시 제주의 노동자와 민중들이 무엇을 꿈꾸었고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4.3.’의 진정한 실체는 노동자 민중운동의 진전만큼 앞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한내 제주위원회’가 해야 하고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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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자유도시, 비영리병원, 국제학교--- 제주도는 점점 ‘자본의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것도 제주도‘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제주도의 민중들은 그 자본의 지배 밑에서 노동자나 노동자가 되지 못한 자로 점점 더 편제되어 갈 것입니다.

이미 제주도민 55만 가운데 20만이 임금노동자입니다.

제주 사회의 ‘발전’은 이 20만 임금노동자가 어떻게 역사와 사회의 주체로 서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역사의 주체로 서려는 자는 조직이든 의식이든 문화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역사적 정체성’을 바로 세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노동자와 민중은 자신의 시각으로, 자신의 손길로 역사를 기록하고, 자신의 발길로 역사를 발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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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만이 아니라, 현실도 버려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내 제주위원회’가 제주의 노동자 민중들과 함께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한”, 힘들고 기나긴 여정에 나섰습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기에 바로 우리가 나섰습니다.

역사는 기다려주지 않기에 지금 나섰습니다.

‘한내 제주위원회’, 이제 막 그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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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평화공원에서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어릴 적 제사나 명절 때마다 어른들이 숨죽이며 증언했던 4.3을 떠올렸다.

80년대 초반, 선후배⋅동료들과 4.3에 관련한 자료를 구해 토론하고, 연구하고, 분노했던 4.3이 다시 기억 저편으로부터 생경하게 떠올랐다.

지난 5월16일, 모친의 49제를 마치고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4.3평화공원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다가 온 것은 과거의 ‘기억’이었다.

그것은 ‘다랑쉬굴에서의 학살’에 대한 기억이었고, ‘숨막힘’과 ‘공포’의 기억이었고, ‘분노’와 ‘절망’의 기억이었다.

4.3은 할아버지의 ‘죽음’이었고, 셋아버지의 ‘행방불명’이었고, 아버지의 ‘가난’이었고, 우리 모두의 ‘숨죽임’이었다.

 

 

사실 90년대 초반 이후, 나는 4.3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 어둡고 끔찍한 기억이 싫었고, 숨막힘이 싫었고, 그 고통과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90년대 후반쯤이라고 기억한다.

4.3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이 한창일 때, 학술토론회를 마친 뒷풀이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4.3은 더 이상 학살과 주검이 돼서는 안된다. 4.3이 더 이상 패배의 기억으로만 남아서는 안된다. 4.3은 우리 노동자민중운동의 진전만큼 밝혀질 것이다. 역사의 진전만큼만 4.3은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강요배 화백의 ‘4.3 연작 그림’ 가운데, 한라산을 배경으로 제주도민들이 밝은 모습으로 서 있는 그림을 가장 좋아했다.

해방 직후 제주도민들이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자신들의 힘으로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꿈이었을 거다.

진정으로 ‘해방’된 세상을 스스로 직접 만들어 가야하고 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을 거다.

 

 

어쨌든 한 매듭이 지어졌다.

2003년 ‘4.3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했으며, 방대한 4.3평화공원이 만들어짐으로써 한 매듭 지어졌다.

50여 년간 ‘없었던 역사’, ‘억울한 죽음의 역사’는 이제 ‘평화’와 ‘인권’의 관점에서 한 매듭됐다.

 

아버지와 함께 찾아간 위령제단에서 13,000여개가 넘는 4.3희생자 명패 가운데 할아버지와 셋아버지의 명패도 있었다.

이제 모두 ‘학살’과 ‘공포’의 기억을 잊고 편히들 쉬시라.

 

 

4.3평화공원을 나서면서 지난 20여 년간 제주를 잊고 제주를 떠나고자 했던 나의 ‘의지’도 그곳에 묻고 나왔다.

4.3 당시 ‘해방’을 꿈꾸었던, 당시 제주도민들의 꿈, 그 해방을 향한 열망만을 오롯이 가슴에 품고 나섰다.

그리고 4.3평화공원을 뒤로 하고 달리는 자동차에서 멀리 한라산을 바라보며, 이런 상념이 언뜻 스쳐간다.

 

“제주도는 자연이 역사를 압도하고, 그 자연을 거대자본이 장악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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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우를 그리워하며1] 어머니의 마지막(?) 자존심

[견우를 그리워하며1] 어머니의 마지막(?) 자존심

 

 

어머니의 호인 ‘견우’가 牽牛인지 見牛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천천히 알아 볼 생각이다.

급할 것은 없다.

견우가 이제는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벌써 열흘이 지났다.

 

지난 열흘간 어머니의 영정을 볼 때마다 자꾸 떠오른 것은, 그래서 눈물을 가눌 수 없게 하는 것은 지난 3월 11일, 그러니까 돌아가시기 3주 전 제주대학교 병원에서의 어머니의 모습 때문이다.

 

***

 

제주대 병원에서의 하루 밤은 마치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병원에서 모든 식사를 거부했다. 통증 때문에 밤새 잠도 주무시지 못했다.

“어머니! 식사를 해야 약도 드실 수 있고, 약을 드셔야 밤에 잠도 주무실 수 있지 않으꽈?”

“싫다.”

“무사마씨?”

“먹기 싫다. 설사를 자꾸하는데 먹으면 또 설사할 것 같다.”

 

***

 

“저 *(요양사)이 우리집 망허게 할 거라”

“무사 경 말햄수꽈? 어머니 도와주시는 분인디”

“우리집 망허게 할 거라”

“어머니! 돈 때문에 걱정햄꾸나”

“맞아”

“돈 걱정하지맙써. 우리집 안망헙니다. 경허고 어머니가 걱정헌덴허영 방법이 이수과?”

“그건 맞아”

 

***

 

밤새 허리 통증, 가슴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이루시자 어머니께

“경해도 좀 자려고 해봅서”

“무사 내가 이렇게 아픈지 모르커라. 무사 내가 이렇게 아파야허는지 모르커라.”

“밤새 앉아 있지만 말고, 누워서 자젠해 봅서게. 어머니가 안 자난 나도 못잠수게. 나도 잠을 자사 내일 일 나갈 수 이신디---”

“그건 맞아. 경헌디 내가 무사 이렇게 아파야 하는지 모르커라.”

 

***

 

한밤 중 담배 피려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어머니는 병실에서 복도로 나오셨다.

다시 모시고 들어갔다. 몇 번이고 되풀이됐다.

“어머니, 지금 한밤중이고 다른 환자들도 자고 이시난 복도밖으로 나오면 안돼마씸”

“집에 가야메. 집에 아버지한테 가야메”

“아버진 내일 아침 일찍 오켄해수다. 오늘 병원이 마지막날이니까 잡서게.”

“아니라. 아버지 안올꺼라. 내가 가야메. 내가 가야메.”

“아버지 아침 일찍 오켄해수다. 꼭 옵니다. 걱정하지맙서”

“아니라, 집에 가야메 --- 집에 가야메 ---”

 

***

 

“병원에서 나가믄 우랭이(어머니 고향)에 가게”

“경헙주게. 겐디 우랭이에 옛날집 다 어서진거 알아? 다 아파트가 들어서서--”

“경해시냐? 경해도 우랭이에 가게 --- 우랭이에 가게”

 

밤새 어머니와 치르는 실랑이 속에서 어머니가 회복하기 힘든 과정을 가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왜 자신이 통증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는 당신만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곁에서, 그 자존심을 지키시려는 어머니를 위해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그 무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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