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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3/02
    압박(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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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2/24
    따뜻한 봄 햇살이 더 서럽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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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2/24
    쥐어짜기와 성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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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2/22
    네가지의 묘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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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2/20
    다시 한주를 시작하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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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2/16
    싫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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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2/13
    어이 없으려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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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2/09
    고립 혹은 배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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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2/03
    '졸작의 행진'을 위하여(이어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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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1/23
    경험과 경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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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박

전화를 끊고 심호흡을 크게 한번 내쉰다.

그래야 살 것 같다.

 

어제 밤 잠도 설치면서 촬영 일정을 머리 속으로 잡았는데

그 중 하나가 어그러진다. 휴우~~

 

벌써 3월이다. 이제 슬슬 편집에 들어가야 한다.

촬영한 분량은 턱 없이 적다.

이걸로 작품을 할 수 있을까 싶다.

한심하단 생각까지 들기 시작한다.

 

집중력이 떨어졌단 생각도 들고...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 다리가 저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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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 햇살이 더 서럽다.

창가에 앉아 해를 맞으며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해가 따뜻해서 햇빛은 참 좋은 거라고..그리고 이제 봄이니 참 좋은 시절이라고 혼자 생각하며 지긋이 눈을 감고 급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 참세상 기사를 읽었다.

 

모든 사람이 맘편히 봄을 맞이 했으면 좋겠다. 

 

 

[김진숙] 부지매 집회 : 봄이 오면 뭐가 제일 하고 싶으세요?

http://www.newscham.net/news/trackback.php?board=newsers_news&id=266



[김진숙] 2월 23일 부산지하철 매표 해고노동자 집회 연설문


대티역엘 갔었습니다. 스물아홉 구혜영의 자존심과 맏이로서의 생존이 풍족하진 않으나 소박하게 이어지던 곳. 괴정역엘 갔었습니다. 스물여섯 황이라의 미래와 꿈이 물결처럼 일렁이던 곳. 그러나 지금..그들은 거기 없습니다. 한평도 안되는 공간이었으나 그들의 생존이 이어지고 그리고 꿈이 넘실거리던 그곳엔 암전처럼 불이 꺼지고 그들은 지금..서른,스물일곱이 되어 시청앞 찢긴 깃발처럼 나부끼는 천막에 영치되어 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천막보다 더 불안스레 흔들리며 그곳에서 가을을 보냈고 한겨울의 들판을 바람막이 하나없는 맨몸뚱아리로 지들끼리 일으켜주고 지들끼리 눈물 닦아주며 꾸역꾸역 건너왔습니다.

비정규직이 뭔지도 몰랐다던 그들은 얼마나 어리석었던 걸까요. 지하철에 입사했다고 그렇게 좋아라 했다던 그들은 얼마나 순진했던 걸까요. 정성 다해 다리고 주름잡은 유니폼이 행여 구겨질세라 품에 안기조차 조심스러웠을 첫 출근. 새벽 4시.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나 분주히 동동거렸던 그 벅찬 설렘은 얼마나 가당찮았던 걸까요. 지하철에서 일하면 지하철 직원이라 믿었다던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바보였던 걸까요. 그 가당찮은 설렘과 어리석음의 댓가는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하다못해 종이쪼가리 한 장없이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는 한 마디에 모멸감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들은 버려졌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럴 수는 없는건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게 되는 불면의 밤들이 무수히 이어지고 골백번을 생각해도 그렇게 쓰레기처럼 버려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손님한테 이유없이 상소리를 들었던 새해 첫날의 새벽도 이렇게 무참하진 않았습니다. 정규직이 하던 일을 하면서도 절반도 안되는 첫월급을 받아들던 날도 이렇게 억울하진 않았습니다. 같은 역에 일하면서도 정규직 선배들과는 스스럼없이 어울리기 힘든 보이지 않는 벽앞에서도 이렇게 절망하진 않았습니다.

꿈을 짓밟히고, 밥먹고 잠자고 화장실가는 일상마저 짓밟히고. 100만원의 월급중 70만원은 부모님 드리고 10만원은 적금넣고 10만원은 보험넣고 10만원은 용돈이었던 그 눈물겹던 생존마저 참담히 짓밟혔으나..차마 자존감마저 내버릴 순 없었던 그들은 바람불고 비마저 내리는 날.찢겨져 뒹구는 포스터처럼 젖어들기만 하던 스물몇살,서른 두어살의 생애를 말릴 유일한 방편으로 기어이 청춘과 꿈과 존재를 영치할 천막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야 자신들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알았고,1300만 노동자 중에 860만이 비정규직이라면 나 아닌 누군가는 이 자릴 채울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것도 알았고,부모님께도 친구들에게도 심지어는 자신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었던 날벼락같던 해고의 이유도 알게 됐습니다. 부모님으로 부터도 선생님으로 부터도 배울 수 없었던 진실들이 있음도 알았고,노동자는 저항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는 사실도 구르고 채이며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이기 이전에 이미 누군가의 딸이고 아들이고 엄마이고 아빠였던,그들도 우리처럼 거창하진 않으나 꿈꾸었던 겁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아침이면 어딘가로 출근하는 꿈. 그들도 우리처럼 저녁이면 된장찌게 끓는 밥상앞에 둘러앉는 꿈. 그들도 우리처럼 지하철에 다니는 게 자랑스러운 꿈. 그들도 우리처럼 일한만큼 댓가받고 땀 흘린만큼 인정받는 꿈. 그러나..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요. 수백 번도 더 꿈꾸었으나 수백 번도 더 그 꿈으로 부터 배신당해 온 그들은 도대체 뭘 잘못했던 걸까요.

인파로 북적이는 출근시간의 번잡한 지하철 안에서도 이 사람들은 다 어딘가로 출근할 데가 있는 사람들이구나.아침마다 외로웠던 사람들. 166일이나 됐으면 이제 익숙해질만도 하련만 이 외로움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습니다. 매일 아침 천막 앞에 설 때마다 한숨 부터 쉬게되는 사람들. 84일이나 됐으면 친숙해질만도 하련만 이 막막함은 여전히 낯설기만 합니다. 퇴근선전전을 할 때 바쁜 걸음으로 퇴근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녁 노을보다 더 서러워지는 사람들. 듣도 보도 못한 점거농성이란 것도 해보고,난생처음 경찰들과 싸움도 해보고,하늘같은 시장님 체어맨 앞에 드러누워도 보고,천막도 쳐보고..

가을도 거기서 보냈고, 겨울도 거기서 보냈고,추석도 거기서 보냈고,연말연시도 거기서 보냈고,설도 거기서 보냈고,생일도 거기서 보냈는데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겁니까. 시청,공단,한나라당 그 완강한 시멘트 벽들을 향해 얼마나 더 외쳐야 합니까. 출근하는 사람들,퇴근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이 고통스런 시간들을 얼마나 더 견뎌내야 하는 겁니까. 가슴에서 시시각각 황소바람이 이는 이 황량한 벌판에 얼마나 더 서있어야 합니까. 불안함으로 저절로 눈이 떠지는 이 모진 새벽들을 얼마나 더 참아내야 끝이 난단 말입니까.

그러나..정작 참으로 견디기 힘든 건,사람에게서 받게 되는 상처일겁니다. 한 번도 미워한 적이 없는 사람들로 부터 영문도 모른 채 받아야 했던 상처. 고스란히 듣기만 할 뿐 한 마디도 되돌려줄 수 없는 상처들.. 밤 12시가 넘으면 화장실을 찾아 헤매야 하는 불편보다, 밤마다 고막을 찢는 폭주족의 굉음보다 더 광폭하게 가슴에 바퀴자국을 남기곤 하던 상처들...

정규직의 적은 비정규직이 아니라 자본입니다. 우리가 맞짱을 떠야할 건 약자가 아니라 구조조정이라는 사시미 칼을 든 깡패입니다. 자본의 발밑에 짓밟혀 파들파들 떨고 있는 민들레를 한번 더 짓밟는 게 아니라 그 발을 치워줘야 합니다. 민들레에게 너희도 시험쳐서 소나무가 되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민들레도 숨쉬고 씨앗을 흩날릴 영토와 햇볕을 나눠줘야 합니다.민들레가 죽어가는 땅에선 어떤 나무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살아나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이 승리해야 우리가 지켜질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칼날엔 눈이 없습니다. 가장 핵심적 업무였던 비행기 조종사도 파견이 밀려 들어오고,조선소의 핵심인 크레인과 한국통신의 핵심부서들도 이미 도급으로 넘어 갔습니다. 철도 기관사들에겐 1인 다기능화라는 명목으로 열차를 연결하고 분리하는 일과 청소까지 기관사의 업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2인 승무가 1인 승무가 되고 다섯명의 정규직이 일하던 역이 세명으로 줄어들고 3호선은 두명이 일하고 야간엔 그나마 한명이 일해야 하는 부산지하철에 이미 비정규직이 1300명 입니다.

구조조정의 끝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자본이 해야 할 말을 같은 노동자가 하게 되는 이 기가막히는 상황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본질일 것입니다.

현대자동차에서 대우자동차에서 만도기계에서 한진중공업에서 병원에서 은행에서 공공기관들에서,수백만의 노동자가 짤렸지만 단 한명도 자신이 구조조정 대상이 되리라는 걸 상상하지 않았듯이,무심한 냉대와 비수 같은 말 한마디가 언젠가 고스란히 내 심장에 꽂히게 되리라는 걸 상상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철도,이랜드,롯데호텔,한국항공우주산업,부산은행,KM&I 등 정규직이 연대한 비정규직 싸움은 다 승리했고,그 승리는 정규직의 고용까지 담보를 했지만,비정규직들끼리만 싸웠던 한국통신,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 등은 다 패배했고 결국은 정규직도 구조조정의 칼날 앞에 내몰려야 했습니다.

평등해야 강해진다 했습니다. 1300명의 비정규직이 파견법이 통과되면 2천이 되고 3천이 되고야 말 쓰나미를 막아낼 든든한 방파제를 지금이라도 쌓아 올려야 합니다. 저들이 밑돌이 되겠답니다. 기꺼이 밑돌이 되어 땅 밑에 엎드려 무릎걸음으로 초석이 되겠답니다. 무릎이 깨어지고 손바닥이 벗겨져 피가 흐르더라도 그 길이 비정규직 철폐의 길이라면,누군가에게 다시 이 설움을 물려주는 길이 아니라면 기어서라도 가겠답니다.

아무 죄가 없는 저들이,아무 잘못한 게 없는 저들이,천막에서 한 겨울을 났던 그 몸 엎드려 다섯 걸음 걷고 한 번 엎드리는 그 길에서 만나게 되는 게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만은 아니길 바랍니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아직도 낯선 이름으로 살다가 그마저 빼앗긴 저들이 만나게 되는 게 더이상 서러움만은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이 자리엔 지하철 청소용역 노동자들도 와 계십니다. 스물 몇살의 아들 딸들과 사십 오십살의 어머니들이 비정규직 철폐의 같은 머리띠를 매야 하는 현실.이 현실을 바꿔낼 답이 뭔지 지하철노조가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공연한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으나.. 황이라와 정명수가 스물 여섯이라는 말을 들었던 바람 몹시 불던 밤. 바람소리 때문만은 아니었겠으나..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해고된 게 그 나이..스물 여섯.. 그날 이후 저는 단 하루도 청춘을 지녀보질 못했습니다. 차라리 50이었다면 이 더러운 세상과 타협하며 그럭 저럭 살 수 있었을까요. 훌쩍 60이라도 됐었다면 그 말도 안되는 일들을 그냥 저냥 삭히며 포기할 수 있었을까요.

마흔일곱에도 해고자로 남아있는 제가 20년 세월의 무력감과 죄스러움을 눙치기 위해 스물 일곱의 신규해고자에게 어느 날 물었었습니다. 봄이 오면 뭐가 제일 하고 싶으세요? 내게도 저토록 빛나는 청춘이 하루라도 있었다면..볼 때마다 꿈꾸게 되는 맑은 영혼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원피스 입고 삼랑진 딸기밭에 가고 싶어요. 적개심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닌..그 순결한 꿈이 이루어지는 봄이길.. 부디 저 고운 영혼들이 꽃보다 먼저 환해지는 봄이길.. 봄마저 쟁취해야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그런 봄이 부디 저들의 것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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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어짜기와 성찰

 

 

1.

 

구성안을 확인하고 있다.

 

물론 구성안은 있다. 처음 작업을 시작할때 만든 기획서에 있지만

 

이내 촬영을 하다 보면 그 안에 있는 이야기 보다는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시 구성안 검토하고 보충 촬영을 해야 한다.

 

다큐의 매력은 이렇게 매번 고민하면서 살 수 있는 거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매번 할때 마다 쉬운 일이 아니다.

 

 

2.

 

열심히 촬영본을 확인하고 이런 저런 의미를 붙이지만....

 

에피소드가 별로 없다. 그저 있다면 내가 다큐를 만들고 있다 정도....

 

아쉽다. 언니들을 인터뷰 하면서 느꼈던 이런 저러한 감회를 전달하고 싶은데

 

인터뷰로만으로 될까?

 

 

3.

 

사적인 공간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신뢰를 쌓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턱 없이 부족했다.

 

너무 많은 주인공을 설정했나 싶어 고민도 된다.

 

에피소드가 없는 것을 매꾸기 위해서 이런 저런 촬영을 하겠지만

 

객관적 조건이 안되는 것은 애니메이션을 사용할까 하는 생각도 한다.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걱정도 되고 또 새로운 것이니까 뭔가 설레이기도 한다.

 

잘해보고 싶은데 언니들의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그런 애니였으면 좋겠다.

 

 

4.

 

글고 결정적으로 사생활이 더 드러나려면 남편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데

 

그게 영 자신이 없다.

 

다행이 내가 만난 언니들은 남편들이 다들 언니를 존중하는 분들인 거 같다.

 

그래도 자신들의 삶이 드러나는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나올지....

 

이전에 여성관련 다큐를 할 때도 남편들은 자신들이 나오는 것을 극구 사양했다.

 

그리고 당사자인 언니들도 남편들 눈치를 봤고....

 

만약 반대였다면...남편이 주인공이었다면 다른 양상이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튼 남편들을 만나야 하는 일도 남은 것 같다.

 

그들이 마치 언니들의 보호자인양 행세하면 난 참 벨이 꼬일 것 같은데...

 

그래도 언니들은 위해서 잘해야 겠지.

 

 

 

5. 

 

이런 저런 도전을 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내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인데....

 

작업을 하면서 참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의 그 생각들과 느낌들을 잘 끄집어 내어 공유할 수 있을지....

 

나를 성찰하는 다큐가 될 것 같다.

 

 

 

쉽지가 않다.

매번 그렇듯이.

 

이번에는 얼마나 쥐어짤 수 있을까?

나를 꼭꼭 쥐어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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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지의 묘미?!

시와님의 [내 인생의 네가지] 에 관련된 글.

Rory님의 [왜 하필 네 개일까나?] 에 관련된 글.

 

 

왜 하필 네 개일까 막 생각해 밨는데 몰겠다.

하지만 하라면 해야지. ^^;;

 



 

Four Jobs I’ve had in my life(일생에 가졌던 네 개의 직업)

 

-IT업체 인터넷팀장

(카메라 사려고 들어간 회사, 정보통신운동이 이럴때 유용할줄이야. 경력사원으로 월급 많이 받았다. 놀랬다. 그래도 카메라 살돈 모으고 나왔다. 4개월)

-방송국 영상취재

(대략 3년은 한 것 같다. 미친 듯이 촬영했다. 한달에 하루 정도 쉬고 일할 때도 있었던듯. 그때는 촬영을 잘하는 줄 알았는데...지금 생각하면 * 팔린다.)

-미디어 강사 (재미나다. 아이들을 교육할때는 정말 내가 늙었나 싶기도 하고. 전문강좌를 할 때는 공부도 되고 해서 좋다.)

-다큐멘터리 감독 (평생하고 싶고 할 수 밖에 없는 직업이다. 좋다. "잘은 못해요. 하지만 하고 열심히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  영화 '아는여자'의 도둑의 억양으로..^^)

 

 

I can watch over and over(몇 번이나 다시 볼 수 있는 네 가지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우후~~ 좋다. 안토니아스와 그녀를 둘러싼 삶들의 평화로움과 따뜻함, 당당함...그 분위기가 좋아서 보고 보고 또 보고 싶은데 어데서 영화를 구할 수 있을 지 몰겠다.)-미션 임파서블(웃기는데 첩보영화 좋아한다. 뭔가 명쾌한 것이 좋아서..그리고 주변에 오래 세워놓은 차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심한다. 짭새일꺼야. 등등.)-칠레전투(칠레전투 중 민중권력인가 그 부분을 좋아한다. 정말 혁명시기의 교육은 어떤 교육보다 훌륭한듯...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역동성....으흐흐...그래서 지금 베네슈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부럽다.)-노팅힐(영국식 로맨틱 코미디 좋다. 나오는 캐릭터들이 성숙해서 보면 배려 받고 있단 생각이 든다.)그리고도 참 많네....힘들군요. 네가지를 골라 쓰는 것은...그래도 좋아하는 영화의 양태는 반영된 듯...ㅋㅋ
Four places I have lived(살았던 적이 있는 네 곳의 장소)

-남산 주변 용산

(백일까지, 당시 아빤 택시기사를 했는데 강도를 만나 사고를 당하시고 겨우 살아나셨다고..그때 그 사건이 기사에도 났었다고. 그 이후 치료비로 없는 돈 더 없어지고 경기도 산골로 이사.)

-딸기원

(백일 이후 대학때까지, 부모님은 아직도 거그 사신다.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곳인데 행정구역으로는 따로 이름이 있는데 동네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 이름이 이뻐서 좋다.)

-관악구, 영등포구 일대

(보증금 50만원에서 월세 20만원 부터 시작한 생활, 8년)

-동작구

(결혼해서 옮겨온 곳. 집 앞에 공원이 있어 좋다. 서울시내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오래 오래 살고 싶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사를 가야겠지. 우리가 살기엔 너무 비싸다.)

 


Four TV shows I love to watch(좋아하는 네 가지 TV 프로그램)

TV를 안 본지 대략 2년은 넘은 듯....라디오라면 얼마든지...

 

내 맘대로 라디오로 대체해 보면...

 

-손석희의 시선집중, 표준 FM 오전 6시부터 8시까지

(너무 이른 시간에 해서 자주 듣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가끔 너무 숨가쁘게 진행을 해서 나도 같이 숨가빠지지만 그래도 그즈음 사람들이 어떤 것에 관심 있어 하는 지 알 수 있어 좋고. 특유의 깔끔한 진행이 좋다. )

-여성시대, 표준 FM 오전 9시 부터 11시까지

(현재 진행자들이 맘에 든다. 송승환, 양희은.)

-오지혜의 문화속으로, 표준 FM 일요일 오전 11부터 한시간

(텔레비전으로 친다면 '출발비디오여행'과 같은 존재, 일요일에 느긋하게 듣고 있으면 가끔 독립영화 소식도 해준다.)

-김미화의 세계는 지금 그리고 우리는, 표준 FM 오후 6시 부터 8시까지

(세계 소식도 좋아하고 김미화 특유의 매력이 있다. 한번 들어보시라. 반하게 된다.)

 

 

 
Four places I have been on vacation(휴가 중 갔었던 네 곳의 장소)

-제주도

(같이 사는 사람과 처음 갔을 때가 제일 좋았던 듯. 그때는 한달에 50만원으로 월세 내고 생활비 하고 그리고 적금도 넣었던 시절인데 어찌하여 20만원이 더 생겼다. 미친 듯이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갔는데 제주도 공항에 도착해서도 우리가 정말 제주도에 온거야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 돈이 없어 맛난 것도 못 사먹고  지냈지만 그래도 넘 좋았다는...)

-스페인의 한 해변

(긴 해변이었는데 사람도 별로 없고...대략 유럽인들이 썬탠을 하고 있었던 듯. 하지만 수영을 좋아하는 나와 같이 사는 사람. 열심히 수영을 했다. 나는 수영모 쓰고 아무것도 안 입고 수영을 했다는...물론 물에 들어가서 살짝 벋었지만...아무도 안쳐다 보고...글고 뭐랄까 자유로움...ㅋㅋ...다시 꼭 해보리라~~)

-파리

(하루 종일 한 24km를 걸으면서 파리 시내를 돌아다녔다. 지금도 파리 지도에 갔던 곳이 표시 되어 있다. 같이 사는 사람이랑 신나게 걸었는데 개선문, 몽마르뜨 언덕, 라데빵스까지...휴우...한 도시를 알려면 걸어서 다녀야 한단 생각이 든다.)

-한강 자전거 도로

(작년 여름, 휴가기간이긴 한데 결혼 전이라 준비로 정신도 없고 이런 저런 일이 많아서 어딜 갈 수 없었다. 결국 둘이서 자전거로 여의도에서 출발해서 엄마아빠 집인 구리시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좋더라. 한 6시간 걸렸던 듯. 중간에 허기져서 갈비도 먹고...한 30km 정도...시원한 바람과 함께~~할만하다. 하고 나면 오히려 몸이 개운해진다.)

 

Four websites I visit daily(매일 방문하는 네 개의 웹싸이트)

참세상

진보블로그

다음

네이버


Four of my favorite foods(가장 좋아하는 네 가지 음식)

-같이 사는 사람이 해주는 돼지고기 김치 찌개 (라디카 언니도 한번 먹어 보고는 볼 때 마다 이야기했던. 정성이 중요하다.)

-외할머니가 만들어주는 호박떡 (설이면 어김 없이 해서 준다. 단호박, 팥, 콩 등이 들어간 떡인데 참 맛나다.)

-내 맘대로 해물 샤브샤브 (싸고 만들기 쉽고 먹고 나면 속이 편안하다. 요즘은 입맛이 변해서 소고기 샤브샤브가 더 땡긴다. 임신 때문이란다. )

-엄마표 된장찌개 (정말 넣은 것 없이 맛나다. 우선은 짠 듯한데 먹다 보면 바닥이 보인다는...요상한 마법을 가진 찌개이다.)


Four places I would rather be right now(지금 있고 싶은 네 곳의 장소)
-아프리카 (거기 가면 다른 데는 안가고 싶어진다고 하더라. 문정현감독이...)

-태국의 조그만 섬(수영이나 실컷 하고 싶다)

-베네슈엘라 (확인하고 싶어)

-집 앞 공원. 봄이 오면.

 

Four bloggers I’m tagging(태그를 넘기는 네 명의 블로거)

뻐꾸기

산오리

네오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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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주를 시작하며..

다시 한주를 시작한다.

 

저번주에 할 일들이 수첩에 빼곡히 적혀 있다.

 

근데 별로 못했다. 마음이 급하다.

 

그래서 그랬는지 어제밤에는 작업과 관련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는 답답한 마음에 여기 전화를 하고 결국 담배까지 하나 물었다. 꿈에.

 

아기가 꿈틀거려서 결국 두 목음 빨고 끊었다.

 

웃긴다.

 

 

 

오늘 아침에는 맘이 급해서 그랬는지 몸 상태가 별로 안좋았는데

 

일찍 나왔다. 일찍 나왔으면 일을 해야 하는데 블로그를 이리 다니고 있다.

 

다행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글고 시와의 글에서 나의 치열했던 한때를 보면서

 

오히려 기운을 내고 있다.

 

 

그 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나?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래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짜투리 시간을 잘 사용하고 절실히 해야 한다.

 

난 나를 잘 안다. 뭐든 더뎌서 남보다 열심히 해야 남들만큼 한다. ^^

 

부지런 하게 일하는 것 밖에 없다.

 

부지런히. 부지런히. 부지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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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

가슴으로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이런 저런 이유로 나도 잘 그걸 못하니

 

남을 탓할 수 없다.

 

그런데 그래도 가끔 편의적으로만 손을 내미는 사람들에게는

 

묘한 화가 치민다.

 

싫어.

 

싫다니까.

 

용기를 내서 이야기한다.

 

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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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없으려나?

봄이 오기는 오는 것 같다.

집 앞 공원 벤치에 할아버지가 앉아 계시니 말이다.

그 할아버지는 겨울이 오기 전까지 항상 그 자리에 앉아 계시던 분이다.

그분이 다시 나오신 게다.

봄이 왔다. 헤헤....

 

봄이 오는 마당에 설날 이야기를 하기가 좀 머쓱하지만

이 느낌을 적어 놓지 않는다면 워낙 이것 저것 잘 잊어버리는 나의 정신 상태로는

또 알멩이는 잊어버리고 느낌만 남아 뭔지 모를 께림찍함으로 불편할 것 같다.

 



얼마전 일이다.

한 친구랑 이야기를 하다 설날 이야기가 나왔다. 

그 친구는 결혼한지 대략 일년은 안된 친구다, 

그러니 이번이 결혼하고 첫 설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친구왈 "설날에 집에 가고 싶어서 혼났어."

여기서 집은 그 친구가 여자니까 친정이다.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그리고는 설날에 시댁에 가서 뭔가 불편했던 마음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너무 철 없고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다.

 

결혼 했으니 당연히 명절에 가는 거지 그걸 몰랐나?

그걸 모르고 결혼했어? 그걸 이제서야 알았어?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물음들이 들려 오지만

그리고 그걸 모를만치 순진하지도 않지만

 

나도 별스럽게 식구들이랑 친한 것도 아니니

굳이 나의 식구들이 그리운 것도 아니지만

왠지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떡이 생각나고

격이 없이 자연스럽게 음식을 해 먹고

잠이 오면 잠자고 먹고 잡으면 뭐든 누구든 음식을 하고

그러던 분위기가 그저 막 그리웠다.

 

시댁에서 나는 며느리로서 당연히 음식을 하고 당연히 상을 차리고

당연히 상을 치우고 당연히 남자들이 식사를 하길 기다렸다.

그 자리를 치우면 먹어야 한다. 그리고는 당연히 설겆이를 한다.

난 그 '당연히'가 불편하다.

당연히 누군가는 노동을 엄청나게 하는 데 당연히 누군가는 그걸 누리기만 한다.

 

그리고 같이 사는 사람의 식구들이 이런 저런 과거의 재미난 이야기를 하며 웃을 때

그저 '그런 일도 있었어요'하며 마짱구 정도 칠뿐이다.

참 외롭다. 

 

난 시어머니가 안쓰럽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 맏며느리로 이런 저런 일을 해내는 모습을 보면

이제 나이도 드셨는데 엄마 생각이 나면서 안쓰럽다. 여성연대. 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명절에 일찍 시댁에 가려 한다.

하지만 그런 나의 행동은 그저 며느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아 이 오해의 끝 없는 반복......

 

얼마전에 결혼한 후배는

시댁에서 설날, 추석 명절 중 한때는 시댁에 한때는 친정을 가라고 했단다.

휴우~~~ 부럽다. 근데 생각해 보면 합리적인 처사이다.

물론 명절이라고 시댁이나 친정을 안가도 되면 더 좋겠지만 굳이 가야 한다면

따로 따로 갈수는 없으니 이렇게 한곳으로 몰아가면 좋을 듯 하다.

 

그리고 앞의 친구에게 그 후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추진해보자고 다짐을 했다.

 

그런데 과연 될까?

같이 사는 사람은 5대 장손이고

나름 합리적인 그 사람의 부모님은

할아버지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에 편입되어 살고 계신다.

가끔 어떻게 이런 가족분위기에서 이런 사람이 나올 수 있나 심히 궁금해질때가 있다.

 

나는 과연 이야기라도 꺼낼 수 있을까?

 

막연하기만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꼭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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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 혹은 배려

어제는 아침부터 험난했다.

 

유난히 추운 날씨 덕에 중무장을 하고는 전철역보다는 조금 가차이 있는 버스 정거장에 가서 버스를 탔다. 임신을 하고 나서는 될 수 있으면 전철을 탄다. 훨씬 덜 흔들리기 때문에 안그래도 나온 배 때문에 몸에 힘이 들어가는 데 그런 몸을 릴렉스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전철역까지는 길이 경사진데다가 눈으로 미끄럽고 바람도 많이 부는 바람골이어서 험난하다. 그래서 어제는 그냥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런데 그놈의 버스가 오늘따라 왜 이리 사람도 많고 흔들리고 자리도 안나던지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원망스럽고 서운했다.

 

그렇게 힘들게 갔는데 오전 회의는 한 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겨우 시작했다. 회의는 나름대로 재미나게 했다. 3월에 하는 다큐멘터리 강좌 기획회의 였는데 정말 해보고 싶은 강좌여서 32주 정도 되는 임신시기에 해도 괜찮을까 걱정도 했지만 결국 하기로 결정했다. 기획자들도 걱정을 했는데 '걱정하는 마음에 임신한 사람을 격리시켜서는 안된다. 그녀가 결정할 수 있게 하자' 고 결정했다며 내게 바톤을 넘겼다. 그렇게 까지 마음을 읽어주는 것이 고마웠다. 임신 이후에는 회의 가는 것도 약간 꺼려졌던 일이 있다. 특히나 흡연자가 많은 회의에 가면 괜시리 눈치가 보인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불편한 것은 아닌가 반가워하지도 않을 텐데 내가 가도 되나 등등....그런 생각이 들면 외롭다. 그런데 오히려 나를 배려하고 기회까지 주다니 그때는 제대로 말을 못했지만 임신한 나를 제대로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 그저 임신한 사람도 아닌 그저 감독인 나도 아닌 임신한 감독으로 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세상엔 그렇게 고마운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회의는 즐거웠지만 배가 고팠다. 엇저녁 싸놓았던 도시락도 그만 냉장고에 넣고 그냥 나왔다. 배는 슬슬 고프고 인터뷰 약속을 해 놓은 곳으로 발길을 돌기며 허기진 배를 이것 저것으로 채우면서 갔다. 배고프면 왜 그리 서러운지....날은 또 왜 이리 추운지....날이 추워서 감기에 걸리는 경우는 드문데 이상하게 목이 메캐한 것이 아프기 시작했다.

 

같이 인터뷰 장소로 가기로 한 사람이 또 한시간 늦었다.

오늘은 정말 기다리는 날인가 보다. 맘을 먹고 투덜투덜 모드 돌입...

이주언니와 인터뷰 약속을 했는데 어찌 하여 내가 그 언니에게는 선생님이 되는데

그만 다른 한글교실 선생님도 초대가 되었다. 인터뷰 일정과 집들이가 섞이고 말았다.

이주언니는 맛난 음식으로 우리를 맞았고 그 마음이 너무 좋아서 난 배고픈 배를 달랬다. 언니의 시어머니의 대략 몰상식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분노했다. 근데 도저히 못듣겠다.

 

임신을 하면 왜 갈비뼈가 그렇게 아픈 것일까? 왜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어떻게 임신한 그 많은 사람들은 이런 아픔을 견디며 지낼 수 있을까? 무기력해진다. 아기집이 커지면서 점점 갈비뼈를 누르고 올라온다. 어제는 길까지 미끄러워서 임산부에게는 매우 위험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온 몸에 힘을 이빠이 주고 안 넘어지려고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다녔더니 그놈의 갈비뼈는 더더더 아팠다. 그리고 아까 부터 슬슬 올라오던 감기기운도 본격적으로 진행되려고 하고  결국 난 이야기를 듣다 말고 쓰러져 잤다. 속으로는 계속 '인터뷰 해야 하는 데' 하면서......

 

그리고는 그제 밤에 임산부 운동 강좌 시간이 어정쩡해서 촬영 일정이 안나온다며 투덜 되는 내게 "운동에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차라리 촬영하고 스트레스 받지 말아"라고 말한 같이 사는 사람을 원망했다. 괜시리 운동하지 말라고 해서 괜시리 나의 작업욕망을 자극해서(안그래도 강박적인데) 오늘 나오는 바람에 몸이 안좋아지고 아파지면 이번주 남은 날을 날릴 수도 있는데...원망 원망스러웠다. -.- 

 

시간은 휘리릭 지나 저녁시간이 다 되었다. 촬영을 해주러 온 조연출은 다음 약속 시간이 얼마 안남았다고 눈치를 주고..ㅠ.ㅠ

과연 오늘 인터뷰를 하는 것이 맞나? 빨리 조연출도 회의에 가게 하고 나도 집에 가서 쉬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이 되긴 했지만....한번 촬영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뼈져린 경험을 몇번 했기에 그냥 밀고 나가는 것이 좋을 듯 했다. (촬영 한번 하는 것이 이렇게 비장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알려나? ^^;;)

'다음에 할까?'하는 나의 질문에 다행히 조연출도 그냥 하자고 하고 이주언니도 별 불편해 하지 않았다. 고마운 일이지.

그렇게 인터뷰를 했다. 여자를 인터뷰 하면 참 좋다. 하고 나면 힘을 얻는다고 해야 하나?

살아가는 것이 다 똑같고 다 그만큼 힘들고 다들 힘내서 산다는 생각이 들어서 힘이 난다. 어제도 그랬다. 그래서 너무나 다행이다라고 마음을 쓸어 내렸다.

그냥 인터뷰를 접고 갔으면 마음에 준비를 한 언니에게고 미안했을 것이고

촬영을 하러 온 조연출에게도 미안했을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작업을 진행하지 못한 스스로가 넘 괴로웠을 것이다.

 

지쳤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지하철을 탔다.

노약자 좌석이 비었다. 망설일 수 없다. 오늘은...

 

저번에 임신한 이주언니와 함께 노약자 석에 앉은 적이 있었다.

이전에는 한번도 앉은 적이 없어서 너무 눈치가 보이고 불편해서 몸은 편했지만

마음이 불편해서 오히려 아기에게 안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찰라에...

어느 노신사가 오더니 위압적인 태도로 노약자석표시를 가르키며 '이거 안보여. 이거' 한다. 후우...올것이 왔구나. '임산부인데요'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이야기를 하는데, 옆에서 이주언니가 '임신 너무 힘들어요' 하고 크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 노신사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옆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임신했나 보구만, 힘들겠네'한다. 결국 그 노신사는 물러갔다. 그 이후에도 맘 편안하게 가지는 못했지만, 옆에 있는 이주언니가 넘 든든했다.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언니가 너무 멋지고 든든해서 마구 그냥 좋았다. 그리고 어딘지 당당하지 못하고 움추려 드는 내가 부끄럽고 반성됐다.

 

그런데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다. 내 옆에 앉았던 남자분이 어느새 내 옆에 서 계셨던 할아버지를 가르키며 '노인이 서 있으면 젊은 사람이 일어서야지'하는 것이 아닌가? 휴우~~ 앞에 서 있는 조연출이 아저씨를 째려봤다. 다른 때 같으면 억을해하면서도 한마디 못하고 그냥 앉아 있거나 내리거나 했는데....당당했던 이주 언니도 생각 나고 든든한 조연출도 있어서 "아저씨, 임산부거든요.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무작정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안돼죠"했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 암말 없다. 휴우~~

 

대부분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저씨들이다. 위압적인 그 분위기가 너무 싫다.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면 안되나? 가끔은 젊은 남자가 버스나 지하철에서 앉아 있으면 너무 밉다. 푸후후....그래도 속으로 생각한다. '뭔가 힘든 일이 있을꺼야.' 하고 미움을 달래본다. 임신하면서 정말 세상의 배려에 대해 밀도 있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여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와 격리에 대해서도 밀도 있게 생각하게 된다.

세상은 젊은 남자들 중심으로 배치되고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쫄지 말자. 

스스로 쫄고 스스로 고립시키지 말지어다.

좀더 당당하고 좀더 소통하고 싶다. 그래야 서로를 잘 이해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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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작의 행진'을 위하여(이어서)

알엠님의 [좋은 사람] 에 관련된 글.

내가 고 3때 처음으로 골방이긴 하지만 내 방이 생겼다.

직사각형으로 길다란 방이였다. 

한 쪽면에 책상이 들어가면 그쪽면이 꽉찼고 나머지 공간에 겨우 누울 수 있는 그런 방이었다. 

그래도 너무 기뻤다.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 왠지 어른이 됐다는 의미로 여겨져서 뿌듯했다.

나만의 공간을 꾸미는 것에 재미도 들렸던 거 가다.

그 동안 그렸던 그림이며 이런 저런 포스터를 벽에 여기 저기 붙여 놓았다. ^^

거기엔 맥가이버 사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내 방에도 가전제품이 들어 왔으니 그게 TV였다.

14인치 정도 되는 TV였는데, 어릴 적 부터 토요명화를 열심히 봤던 나로서는 내 방에 나의 TV가 생긴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물론 TV는 그때 마침 시작한 TV과외를 보라고 놓아준 것이긴 했지만 ....

난 TV과외를 조금 보다가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려 그 시간대에 하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이런 저런 역사에 대한 것, 자연에 대한 것, 사회적 이슈에 대한 것 등 참 다양했는데 닥치는 대로 봤던 거 같다. 그러다 아....이렇게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저런 거 만들어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왠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행복해질 것 같았다.



대학에 들어가자 마자 다큐멘터리를 공부할 수 있는 강좌를 듣기도 하고 거기서 TV에서 보는 다큐가 아닌 다른 종류의 다큐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다큐를 통해 그 동안 알고 있었던 것들은 반쪽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신나게 공부를 했다. 거기서 이전에 포스트로 썼던 '첫사랑' 다큐도 만났다. 그렇게 다큐에 대해 알아갔지만 정작 만드는 것은 엄두가 나질 않았다.

 

꿈은 쉽게 이룰 수 없었다.

 

겉으론 활발하지만 난 속으로 참 많이도 곪아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을 긍정하는 방법을 몰라 끙끙댔고 자신감이 없어서 항상 어딘가로 숨고만 싶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저런 일들을 계속 했다. 하지만 그속에서 행복하지는 않았다. 인간관계도 참 척박했다.

 

그러다 정보통신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도 '5년만 있으면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볼 수 있어, 그건 말이지 너만의 채널을 가질 수 있단 뜻이야'란 친구의 꾐에 빠져서 말이다. 지금이야 넘 당연한 것이지만...당시가 95년이니 그 친구의 멘트는 좀 오버였다. 그렇게 정보통신운동을 시작했지만 참 어려웠다. 여전히 온라인의 세계에 익숙하지 못한 나인데 그 당시는 어떻겠는가?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하루하루가 참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사무실을 자주 오는 비슷한 또래의 영상활동가가 오는 날은 난 더 초라해졌다. 

그녀는 항상 바쁘게 사무실에 왔다 일을 보고는 휭하니 가곤 했다. 그녀는 너무 당당했고 지금 제작하는 영상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는 했지만 그저 멋지게만 보였다. 그녀가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항상 카메라 가방을 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저거 하고 싶은데.....난 내 꿈에서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닌가? ' 

참 많이 부럽고 슬펐다. 

 

그러다 아는 친구가 중국으로 여행을 가는데 그걸 다큐로 만들고 싶다고 내게 기획을 맞아달라며 부탁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그런 부탁을 한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몸 담고 있는 단체에서는 나의 나이를 생각하라며 새로운 영역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했다. 그때 나의 나이 28정도였다. 틀린말은 아니지만 그때는 그게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다. 내꿈을 향해 가는 ...

 

이래 저래 그 작업은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난 그 일을 통해서 내 안에 있는 욕망이 더 이상 덥어둘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때 나는 참 맑았다. 한가지 욕망 밖에 없었다. 다큐를 하자. 사람들고 만나고 사람들과 호흡하고 그렇게 다큐멘터리를 만들자. 당장 마음 속에서는 하나의 생각만 났다. 

'카메라를 사자!' 푸훗...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지만 당시는 참 절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생전 처음 회사를 들어가 돈을 벌었다. 딱 카메라 살 돈만 벌자. 그런 맘으로 일을했다. 그리고 딱 그 돈

을 벌어 나왔다. 그돈으로 카메라를 사고는 닦고 닦고 또 닦았다. 그 카메라가 PD100 이었는데 이름도 지었다. "카멜" 이걸 이름으로 부르면 '카멜아'가 된다. 소리로는 '카메라' ㅋㅋ...그러면서 어찌나 좋아했던지.

 

회사를 나오기 전에 강좌를 하나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배울 것이 없는 그런 강좌였다. 그래도 그때는 강좌를 들으러 가는 길이 너무 좋았다. 그 길은 걸어가기에는 어둡고 추운 길이었는데 그길만 들어서면 이상하게 가슴이 뛰고 꿈을 다 이룬 것 마냥 벅찼다. 

 

무대뽀도 그런 무대뽀가 있을까?

참 운도 좋았던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아는 선배가 동영상 컨텐츠 만드는 것을 부탁했다.

먹고 사는 것이 그때 만큼 쉽게 풀렸던 적이 없는 것 같다. ^^

프리미어를 조금 배워서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긴다.) 그걸로 막 산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하루 종일 주물럭 거리면서 편집해서 겨우 납품을 하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게 먹혔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하는 데 정말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영상 동아리 출신도 아니었고 푸른영상이며 노뉴단, 서영집이 있었지만

새내기로 시작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은 날 선뜩 받아 줄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받아달라고 말할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방송국에 아는 사람이 생겼다.

인터넷 한 카페에 가입했는데 그곳에서 알게된 사람들이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아는 것도 하나도 없으면서 사람들을 막 만나고 다녔다.

그래도 기뻤다. 그저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참 좋아보였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던 중에 촬영을 하러 가지 않겠냐고 전화가 왔다. 그것도 뉴스 꼭지를 위해서...떨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게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촬영하러 나간 날,

같이 나간 기자에게 내가 초보자인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꽤나 노력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카메라를 돌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난 자괴감에 빠졌다.

도대체 뭘 찍었는지 생각이 안났다. 너무 막막했다. 너무 쪽팔려서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겨우 방송국에 돌아와서 내게 전화를 해 일을 시킨 선배를 찾아갔다. 그리고 일을 시켰으니 책임지라고 땡깡을 부렸다. 그때 그 선배가 했던 말은 지금도 명언이다. "촬영할 때는 딱 두가지만 생각해. 앵글과 사이즈. 그것의 조합이야. 그 다음이 컨텐츠고..."

그리고 자꾸 하면 는다고도 했다. 카메라를 들고 자신감이 없을 때 그만한 조언도 없다. 지금도 가끔 강좌를 할 때 그말을 써먹는다. 그때 그말은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든 나의 마음을 쫙 펴준 말이었다. ㅋㅋ

 

방송국은 거대한 공장이다. 각기 맡은 일을 하면 되고 그 일을 제대로 못한다 싶으면 다음날 연락이 안온다. 그 첫날 내가 그 선배에게 했던 행동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거다. 어디 뭘 모른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 앞에서 할 수 있나. 방송국에서...그곳은 정글이고 살아남아야 하는 공간이었다. 

 

 

임산부 체조하러 가야 한다...다음 이야기는 갔다 와서..........

^__________________^

 

 

으흐....이 뒷 부분이 다 날라갔다.

다시 힘내서 마무리를!

 

방송국에서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운이 좋았던 게지.

얼마나 개차반 같은 사람들이 많은 곳인데.

다행히 카메라를 든 여자는 별로 없었고 아이들과 여성에 관한 아이템이 오면

언제나 내 차지였다. 조금씩 카메라를 드는 것이 힘들지 않았고 또 나름대로의 내 장점도 발견하면서 일하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그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열심히 A를 찍어 가면 편집 후에는 B가 되어 방송 되는 모습을 보면서 오래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곳에서 참 얄굿은 것을 많이도 배웠다. 돈도 벌었고.

 

그러다 여성노조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작업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리 활발히 활동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거기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독립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던 친구였는데 그 친구와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경험이 많은 친구는 얄굿은 경험만 있는 내게 별 불편한 표도 내지 않고 같이 일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친구 덕분이 아닌가 싶다. 그때는 그저 작업을 한다는 것에 정신이 없어서 별말 못했지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 듯. 친구~~고마워~~

 

왜 이런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할까?

시작할 때의 나의 무대뽀를 자랑하고 싶어서?

아니 어쩌면 졸작이 될 것이 뻔한 이번 다큐를 생각하면서

그래도 지금은 작업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내 마음을 다지는 것이다.

 

그때는 한가지만 있었다.

하자.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그럴 능력이 되지도 못했다.

난 참 이해력이 느리고 머리로 보다는 마음으로 느끼고 겪어야 겨우 이해한다.

 

그래서 다행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머리로 '아,,,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해서 다큐를 만들 수 없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같이 마음으로 경험하면서 그들의 경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걸 나눠 주고 싶다. 그렇게 소통하고 싶다. 다른 사람의 경험은 그게 즐거운 경험이든 힘든 경험이든 다 나에게로 오면 아프다. 이렇게 힘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짠하다. 어쩌면 사는 것 자체가 참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픈 마음은 다 마찬가지 일테지. 아닌척 이런 저런 것들을 갔다 붙여도 말이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하면 잘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고민하다 보면 처음에는 안보이던 이런 저런 것들이 조금씩 보이고 그러면서 나도 성장할 수 있다.

어쩜 난 소통을 잘 못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너무 자기 안에 갇혀 있어서 남의 안에 뭐가 있는지 느끼기에 모자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행이다. 다큐멘터리가 있어서.

 

남을 느끼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난 확장되고 사람들과 만나 소통한다.

 

'소재로 다큐를 한다.' 그건 아마 진짜 다큐가 아닐 것 같다.

겪고 경험하고 이애하고 소통하기 위해 고민하고 고민하고 방바닥을 구르면서 또 고민하고 그렇게 해서 겨우 만들어 내는 것이 다큐인데.....그걸 어찌 소재만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이번 작업?

졸작이 되겠지. 정말 졸작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졸작이면 어떠랴. 계속 다큐멘터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다행이 아닐까?

 

요즘 심한 딜레마에 빠졌다.

아기를 만나는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정말 아기가 힘이 될 것 같다.

아기를 만나면 고맙다고 몇번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일 욕심 많은 엄마를 만나 고생했는데 고맙다는 말을 꼭 해야 겠다.

그런데 아기를 만나기 전에 작업을 마쳐야 한다.

작업을 졸작이 되더라도 마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턱 없이 부족하다.

이야기를 여기서 하나만 팔까? 아니면 넓혀야 하나?

이상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

고민에 고민은 꼬리를 문다.

시간을 막 붙들고 늘어지고 싶다.

그래서 괴롭다. 어잉.....

 

그래도 해보자.

'졸작의 행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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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경험

임신하고 나서 가장 좋은 것은

사람들과 쉽게 친해진다는 것이다.

자료조사를 하러 간 곳에서도 사람들은 쉽게 몇개월인지 물어 오고

임신하면 어떻다는 이야기를 서슴 없이 한다.

이전에도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쉽게 하곤 했지만

공통된 경험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편하게 하는 지

참 대단하단 생각까지 든다.

 

출산이 5월 말이니까.

이제 17주, 4개월 정도 남았다.

출산전까지 작업을 대략이라도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참 바쁘다.

거기다 돈도 벌어야하고.

 

임신한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하려니 참 여러가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평소처럼 일을 양껏 할 수도 없었으니 스트레스가 날로 높아만 갔다.

게다가 이번 작업은 이전과는 다르게 공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에 대한 것도 아니고 사적인 공간에 카메라(얼마나 거북스러운 장치인지...)를 들고 삐집고 들어가야 하니 이 또한 스트레스였다.

과연 사람들이 카메라를 어떻게 느낄까...참 거북스러운 물건인데...자신의 사생활이 남의 카메라에 담기는 것을 어찌 받아들일까? 두렵기까지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의 카메라 보다 먼저 나의 배(^^;;)를 본다.

임신 초반부터 나온 배를 보면서 사람들은 반갑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임신 중에 있는 이주언니는 나를 동료로 받아들이고

아기가 셋 있는 이주언니는 나의 카메라가 불편한데도

배는 나와가지고 뭔가 해보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내가 안쓰러워서 인지 나를 봐주는 것 같다.

 

경험과 경험이 만나 인연을 만든단 생각도 든다.

하기야 알엠님도 내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그저 짝사랑만 했을 텐데....

임신한 덕분에 알엠님도 찾아갔으니....정말로 인연을 만드네.

 

고마운 인연이다.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된 언니들도 그렇고.

아기한테도 고마워해야겠다.

넘 오번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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