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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16
    지(知)와 열정 - 경향201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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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2/16
    주의표시하기전에 주의할일 - 경향20100209
    흑무
  3. 2010/02/16
    부모의 명절과 아이들의 명절 / 경향20100216
    흑무

지(知)와 열정 - 경향20100209

[고미숙의 行설水설]지(知)와 열정  / 고미숙 고전평론가

 

 

새해 벽두, 폭설이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혹심한 한파까지 몰아닥쳤다. 방송에선 70년 만의 대기록이라고 했다. 연구실(‘수유+너머’ 남산)이 있는 곳은 서울 남산 중턱. 워낙 고지대라 마을버스나 택시가 올라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필 그날 김윤식 선생님 강의가 열렸다. 과연 이 폭설을 뚫고 사람들이 올까? 살을 에는 추위에 저 아래 지하철역에서 이 중턱까지 한참을 걸어와야 하는데….

하나 기우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눈을 툭툭 털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제는 ‘이광수와 고아의식’. 40, 50대 수강생들에겐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킬 만한 테마였다. 한데, 아주 특이하게도 수강생들 중에 10, 20대가 상당수 섞여 있었다.

70대 노대가와 10대 학인의 소통

그들은 ‘김윤식’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이광수’는 이름만 겨우 알 뿐 대체로 무관심했다. 하긴, 일제나 식민지라는 말도 생소하기 그지없는 세대들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유는 비슷했다. 아버지가 꼭 들으라고 해서, 혹은 선배와 선생님들이 이 절호의 기회를 놓지지 말라고 해서. 그 말들이 하도 절실하여 ‘대체 어떤 분이기에?’ 하는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이렇게 ‘울퉁불퉁’한 학인들을 앞에 놓고 강의가 시작되었다. 이광수의 생애를 밑그림으로 헤겔에서 루카치로, 향가에서 야나기 무네요시로, 숫타니파타하에서 자본주의 맹아론으로, 평소에 공부하는 내용을 단 하나의 여과도 없이 그대로 쏟아내셨다. 무려 네 시간에 걸친 강의가 끝난 뒤 10대들이 보인 첫 반응,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어른들이 막 웃는데 따라 웃을 수가 없어서 괴로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아이들은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다시 남산 중턱을 찾아들었다. 이때부터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발적 선택이었다. 신기했다.

한 마디도 못알아 들을뿐더러 4시간 동안의 집중력을 요하는 이 힘든 강의를 대체 왜? 홈피에 올린 그들의 후기. “선생님이 살아온 세월과 그에 따라 켜켜이 쌓인 내공, 기운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먹어 기력이 떨어지더라도, 김윤식 선생님처럼 멈추지 않고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계속 여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17살 해완) “ ‘교수는 항상 새롭게 공부하고 그것으로 항상 새로운 강의를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왠지 모르게 울컥했어요.”(21살 우준) “당신 자신의 시대는 식민 사관을 극복하는 것이 인문학의 과제였고 고민이었다. 각 시대마다의 과제가 있다. 그런데 지금 세대는 아무런 의무도 사명감도 부여받지 못한, 그냥 던져진 세대이다. 그래서 매우 불안에 떨고 있지만 그 불안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어떻게 저렇게 시대를 크게 바라볼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 놀라웠습니다.”(22살 윤의) “들을 때는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는데, 신기하게도 선생님의 강의 내용이 어떤 세미나에서든 한 번씩은 꼭 나오고 있거든요! 어디로든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해주신 선생님, 뒷북 감동입니다.”(21살 윤미)

배움이란 열정과 기운의 전승

요컨대 이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강의를 들었던 것이다. 강의의 내용이 아니라, 강의가 야기하는 특별한 기운과 감응하고 있었던 것. 평생을 구도자처럼 공부를 해온 70대 ‘노대가’와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들’의 이 특이한 소통법! 아, 그렇구나! 세대를 가로질러 소통한다는 건 바로 이런 거로구나.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지식이란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열정과 기운을 전수하는 것임을. 너무나 평범해서 잊혀진 명제, 그리고 벼랑 끝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시대의 대학과 지식인들이 반드시 환기해야 하는 명제 또한 이것이 아닐지. “지(知)는 열정이다, 배움이란 스승으로부터 그 열정을 ‘훔치는!’ 것이다”라고 하는. 5일 연속강의가 끝나는 토요일, 그날도 눈이 내렸고, 그날 강의 역시 밤 11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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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표시하기전에 주의할일 - 경향20100209

[사물과 사람 사이]   주의 표시 하기 전에 ‘주의’할 일이일훈 건축가

 

 


교통안내 주의 표지는 사고를 방비하려 설치한다. 교차로, 건널목, 굽은 도로, 오르막과 내리막, 횡단보도, 과속방지턱 등 각종 위험정보를 미리 알려 유용하다. 그 중엔 낙석도로 구간을 알리는 것도 있다. 돌이 굴러 떨어질 위험을 미리 알리는 것인데 지날 때마다 아슬아슬하다. 만약 돌이 떨어진다면 달리는 자동차는 피할 방법이 없다. 낙석의 위험은 경고하지 말고 불안의 뿌리를 뽑을 일이다. 사람들이 많이 쓰는 건물에도 그런 위험을 알리는 경고문이 있다.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 바닥에 ‘미끄럼 주의’라고 새겨져 있다. 어찌나 거울 같은지 천장의 불빛이 반사된다. 넘어질 위험을 감수하면서 굳이 미끄러운 재료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끄럽게 가공된 재료는 우선 시각적으로 세련되고 미려해 보여 고급스럽고 디자인을 잘한 듯 보인다. 심지어는 보행자 전용도로를 디자인만 앞세워 걷는 이가 미끄럽게 화강석물갈기로 마감한 얼빠진 길도 보았다. 매끄러운 재료는 눈이나 비가 오면 사람이 넘어져 크게 다친다. 공공 공간과 시설은 사람의 안전이 중심이어야 한다. 불안과 위험을 알면서 근본을 고치지 않고 주의와 경고문으로 버티는 것은 유사시 핑계거리를 찾는 불순함 그 자체다. 주의 표시 하기 전에 본질에 더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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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명절과 아이들의 명절 / 경향20100216

[문화와 세상] 부모의 명절과 아이들의 명절     /  이영미 문화평론가

 

설날과 밸런타인데이가 겹쳐 있던 연휴가 드디어 끝났다. 올해도 어김없이 언론은 명절증후군이니 초콜릿 판매실적이니 하는 이야기를 했다. 설날 ‘공부는 열심히 하냐?’ ‘언제 결혼할 거냐?’를 묻는 어른들 앞에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젊은이들은, 차례와 세배가 끝나기 무섭게 애인들을 만나러 나가 버렸다. 그런 자녀들을 보고 부모들은 ‘요즘 애들은…’으로 시작하는 고정 레퍼토리를 한 바퀴 돌리면서 혀를 찼다.

‘조상이나 부모에게 인사하는 것보다 서양 명절이 그리도 중요하냐?’ ‘초콜릿 회사의 상술에 놀아나는 것도 모르냐?’는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젊은이들은 별별 ‘데이’들을 다 수입하고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 아마 어른들이 아무리 야단을 해도 이런 기념일들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기념일이니 명절이니 하는 것으로 시간을 구획 짓고 살아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우리 명절을 외면하고 서양 명절에만 목을 거는 이유는? 젊은이들이 느끼기에 설이니 추석 같은 명절은 부모들을 위한 부모들의 명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설과 추석 같은 명절에는 가족 간의 권력관계가 매우 보수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명절증후군은, 그저 쪼그리고 앉아서 전을 많이 부쳐서만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권력 아래서 힘든 일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권력이란 모든 인간관계에 있게 마련이지만, 문제는 명절의 가족권력 작동방식이 평소에 비해 더 보수적이고 강고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현실을 무시한 채 당위, 명분, 체면 같은 것으로만 굴러가는 이날의 질서는 종종 너무도 비현실적이다. 평소에는 멀쩡하게 설거지를 하던 남편이 명절날 부모 앞에서는 손 하나 까딱 안한 채, 얼굴 퉁퉁 부어 일하는 아내를 외면한다. 서울의 명문대 대학원까지 나오고서도 몇년째 백수인 아들에게 시골의 아버지는 전화를 걸어 ‘바쁜데 안 내려와도 된다’고 한다. ‘요즘 뭐 하냐’고 안부 물을 친척들 보기가 민망해서다. 보수적 가족질서의 명분과 체면치레에 밀려, 평상시의 화목한 가족사랑이 불가능해지는 날이 바로 이 날이다.

남자 장손 중심 권력관계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타성(他姓)의 여자인 며느리가 가장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따지고 보면 상당한 권력을 지닌 시어머니 마음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주문 차례상은 절대로 안 된다’ ‘과채탕적(瓜菜湯炙) 빼놓으면 안 된다’고 옛날식 명분을 고집하는 늙은 남편과, 노골적으로 불편한 얼굴을 하는 젊은 며느리들 눈치까지 봐야 하니, 명절만 되면 기도원이나 절간으로 도망가고 싶다는 시어머니가 적지 않다.

부모들 중심의 이런 명절이 편하지 않은 청소년들은 집 바깥으로 튀어나가 자신들만의 명절을 갖고자 한다. 적어도 거기에는 가족권력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서양식 명절이 고착화되면서 이 역시 적잖은 스트레스거리가 된다. 설과 추석이 가족권력을 확인하는 날이라면, 서양식 명절은 소유를 확인하는 날이다. 애인의 유무, 비싼 초콜릿과 저녁식사를 살 수 있는 경제력 유무가 이날만큼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소유를 확인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지라도 소유의 확인과 과시를 무엇보다도 중시하면, 없는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명절과 행사라는 것에서 절차와 형식으로 명분을 확인하는 속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명분과 체면이 실질을 지나치게 압도할 때 우리는 명절마다 늘 불행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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