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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과 차별에 관한 책들

이런 분류에 다 퉁쳐도 되는지 모르겠네..

일부는 이데올로기와 인식론에 대한 것이고, 일부는 구조 그 자체에 대한 것인데.. 그냥 크게 묶어서 한 덩어리로 ㅡ.ㅡ

 

# 미치코 가쿠타니,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
미치코 가쿠타니
돌베개, 2019

 

 

어우 속이 시원해 ㅋㅋㅋㅋ
사실 프로토타입으로서의 사회구성주의가 어디 있겠냐 막연히 생각해왔지만, 요즘 소위 탈진실시대 글로벌 스케일로 포스터모더니즘이 펼쳐지고 있는 건 깜빡 놓쳤네..


당연히 포스터모더니즘, 혹은 해체주의가 등장한 것 또한 담론의 권위주의적 점유와 과도한 실증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당대의 진보였지만, 문제는 사회구성주의 그 자체는 자신을 부정하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는... 모두가 각자의 진실이 있다면 학문은 무슨 소용이며 진리에 대한 탐구는 다 뭔 뻘짓이겠어..

현재 우파 포퓰리즘이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전용'하여 객관성에 대한 철학적 부인을 수용한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보수주의 우파의 권위를 공격하기 위한 철학적 토대였건만..  참으로 역사는 알 수가 없다는...  근데 또 해체주의자들, 예컨대 데리다 같은 사람들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 반유대주의 활동을 했던 드 만을 옹호하기 위한 논거로 해체주의 가져온 거 보면 정말 토나옴... 어우...

 

이 과정에서 인터넷이 엄청난 역할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 이제 사회구성주의 그대로, 인터넷이 현실을 반영하는 데서 더 나아가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임...

몇 가지 기억해둘 문장이 있음.

한나 아렌트가 1951년 전체주의 기원해서 했다는 말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대상은 확인에 찬 나치당원이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의 차이,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아렌트 책 좀 읽어봐야겠음 ㅡ.ㅡ)

민주당 상원의원을 지낸 사회학자 대니얼 모이니핸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지, 저마다의 사실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토크빌도 참 이런저런 말을 많이 했네... 원본을 읽어봐야겠음..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자기통치 습관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통치자를 제대로 선택할 수 있을까"


제이냅 투팩치 [트위터와 최루가스] "망으로 연결된 공적 영역에서 권력자의 목적은 대개 사람들에게 특정한 이야기가 진실임을 납득시키거나 특정한 정보가 새나가는 것을 막는 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체념, 냉소주의, 권한이 없다는 느낌을 자아내는 것"

이렇게 냉소와 체념만큼, 다 더럽다, 다 똑같이 도둑놈이다라는 허무주의/해체주의 서사만큼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도 없음 ㅜ.ㅜ
도덕이나 사실의 거짓 등가성, 열정의 비대칭성 이런 단어도 개념을 잘 드러냄

정희진 선생의 해제는 가장 논쟁적인 부분에서 좀 받아들이기 어려움.

"포스트모더니즘은 누가 옳은가/그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단 하나의 목소리에 대한 문제제기였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도 진실로, 유일한 목소리일 수 없다.. 진실을 추가하는 대안이 저자의 주장대로 포스트주의 비판일까? 이러한 현상이 진실이 사라졌다는 의미일까? 진실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진실이라고 간주되는 것이 있었을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어뜬 의도이건 간에 모든 사유는 오해되고 왜곡된다. 그래서 모든 담론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의 '올바름'이 아니라 효과다. 언어의 사용 과정에서, 즉 누가 어떤 위치에서 말하는가에 따라 의미의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과거의 승자와 동일시하는 대중의 인식이다. 진실을 유무와 시비, 진위를 중심으로 논할 때, 결국 하나의 진실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진실을 따지게 되면 피와 폭력이 동반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의미 있는 흐름이었지만.. 지금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게 이 책의 메인 주장 아닌감??? 이 정도 되면, 타동적 (transitive) 대상이 아니라 자동적(intransitive) 존재로서의 실재에 대한 부정으로 보이는디??? 이런 시대일수록 비판적 실재론이 나침반이자 등대 역할을 할 수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음


그리고 러시아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글로벌 빌런 역할을 하는지 당최 이해가 안 가네..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뭣도 아니고, 딱히 이념형이나 시장형인거 같지도 않은데, 그냥 순수 악인가? 악행에 동기가 없으면 그게 그냥 순수 악 아녀?

 

# 최종렬, 복학왕의 사회학

 

복학왕의 사회학 - 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
복학왕의 사회학 - 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
최종렬
오월의봄, 2018

 

구경꾼 삼아 관찰한 것이 아님은 알겠는데, 이 타자화는 어쩔 것이여.. ㅡ.ㅡ  너무 화자/대상이 구분됨
아무리 '경험적 실재'가 아니라 '분석적 실재'를 추구한다고 했지만, 이 연구의 추론을 통해 만들어지는 고정관념은 어쩔 것인가...   이런 방식의 서술이 윤리적인 것인지 정말 모르겠네 모르겠어... ㅜ.ㅜ

지방대생이라고 하면 공부를 어중간하게 했던 지방 출신 학생과 타지역(대개 수도권) 출신 학생들이 합쳐진 것일텐데, 공부를 어중간하게 하고 문화적/사회적 자본이 불충분하고 가정 형편도 여의치 않은 이들이야 수도권에도 넘쳐나는 바,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이 지방이라는 문화적 환경의 영향인지, 현행 대학입시 지향 교육체계 안에서 어중간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현황에 대한 것인지는 불분명. 두 개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음.   

"어차피 나는 노력해도 성취를 이룰 수 없으니 성실하게라도 임하자"는 생각은 그저 지방대생 사이에서만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일까?

지방대생이 '앎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모르고자 하는 의지', '자기계발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자기보전하려는 의지'가 강하다지만 이는 '지방대생'만의 정체성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러한 학습의욕 저하 집단을 퉁쳐서 지방대생으로 범주화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음. 수도권 인근에도 이런 종류의 습속을 가진 사람들은 넘쳐나는 거 같은데...  가족과 친구라는 일차원 공동체에 대한 의존도 오히려 중산층 정상가정 이데올로기 속에서 세대적 속성으로 자리잡았다고 생각함. 이제는 부모 세대를 넘어서는 게 아니라 부모의 경제적 자원은 물론 정치적 성향과 문화적 취향까지 이어받는 게 트렌드 아닌가 말여 ㅡ.ㅡ

서울 강남 청년들이야말로, 자기계발과 목적 합리적 행위를 한다고 하지만 철저하게 부모가 만들어놓은 안전망이나 틀 안에서 하는 거 아닌가???

'압축적 근대화를 통해 고향을 잃고 가족이 해체되었다는 담론은 서울에서나 통한다. 지방에서는 고향이 상실되지도 않았고 가족 또한 굳건하다"는 주장도 글쎄올시다... 이건 계급적 이슈.. 수도권 엘리트 핵심 분파 내에서 가족이라는 경제 공동체, 이념 공동체가 얼마나 굳건한데 말여???

'지방에서는 정치경제적 차원의 세대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문화적 차원의 세대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결론에 그래서 동의하기 어려움...  세대 전쟁은 다분히 공중전이고, 수도권에서야 주거 문제를 통해 가시화된 것이라고 생각함

또한 지방대생들이 사치스러운 대상을 추구하기보다 특정 활동을 통해 얻는 감각적, 캐락적 경험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남이 보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이 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거야 말로 요즘 소확행 열풍과 경험 구매의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지 특별히 지방대생의 문화라고 보기 어려울 듯.. 그럼 뭐 스카이 대학 학생들은 사치스러운 대상을 추구하나???

가장 공감하는 것은 확장성 없는 사회자본에 대한 지적인데, 이는 대개 경제적 중하위 계급 전반, 문화자본 측면에서의 비엘리트 대다수에게 해당하는 것이겠지만 특히 지방이라는 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회네트워크와 문화적 전망이 협소하다는 점에서 특히 문제될 수 있다고 생각함

내용 요약은...
지방대생에게 최고의 가치는 가족의 행복 -- 이러한 가치는 성찰적 겸연쩍음을 통한 방식으로 추구 (권리라는 인정 형식 속에서 타자로부터 호혜적으로 인정을 받아본 경험이 없음. 학교 성적이 따라주지 않아서. 이들의 생활 세계에서 가족과 친구를 넘어서 목적 합리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자아가 아직 분화되지 못함. 시장경쟁 언어가 오히려 닻을 내리기 어려운 이유.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자신을 변형시키는 자기통치의 길로 나아가지 않음) -- 가치 추구의 수단은 주변의 습속 (목적 수단 범주를 통해 자기계발에 나서지 않으며 '느슨한 관여'를 통해 몰입 상황 회피. 목적은 사라져도 행위가 조직되는 방식은 그대로라는 점에서) - 이를 통해 특유의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 실천

하필 영남지역이라서 그런 건가, 뭔 놈의 고색창연 가부장주의는 21세기에도 이렇게 굳건한 것인지... 언빌리버블...  이게 동시대, 나보다 젊은 세대의 이야기라는 것이 한숨 포인트...


저자는 대학이 대학다우면 된다는 '단순명료한 사실'로부터 희망을 찾고 있는데, 즉 '학생들에게 인간으로 현상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  교육'을 이야기하는데 글쎄올시다....
수도권이라고 이런 교육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학이 사회로부터 격리된 진공의 온실도 아닌데.. 과연 이게 가능한 꿈인지 나는 모르겠다고 ㅜ.ㅜ

 

# 메리 그레이, 고스트워크

 

고스트워크 - 긱과 온디맨드 경제가 만드는 새로운 일의 탄생
고스트워크 - 긱과 온디맨드 경제가 만드는 새로운 일의 탄생
메리 그레이 외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2019

 

데이터 과학자와 인류학자가 같이 쓴 책이라서 좀 기대를 했는데, 기대만큼 빼어나지는 않음... ㅡ.ㅡ

그래도 새로운 개념들을 정립하고, 플랫폼 노동 시대 (한국에서는 아주 최근에서야 본격화된 크라우드워크)의 여러 모습을 균형있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함.

아직은 정식으로 분류되지 않은 온디맨드(on-demand) 형식의 고용. 본질적으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그런 직업은 제대로 규정되지 않아고 그런 서비스의 혜택을 누리는 소비자들이 볼 수 없도록 감춰져 있기 때문에 '고스트워크'라 지칭.


물론 대부분의 생산 현장에서 생산하는 자, 노동자들이 전면에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지만 아마도 이전의 노동과 다른 점이라면 이런 일들이 사람이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 아닐까 싶음... 휴대폰 누가 만드는지 휴대폰 보면 척 떠오른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무언가를 조립하고 있을 거라는 이미지가 존재하는 반면, 페북에서 음란 이미지 삭제하는 건 인공지능이 알아서 해준다고 생각하지 이걸 누가 일일이 지우고 있다고 생각하겠어.. ㅜ.ㅜ

마치 자동판매기 안에 알고 보니 사람이 들어있더라.. 뭐 이런 거 아녀.. 실제로 배달앱 초기에 영세업자들은 인터넷으로 주문들어온 것을 일일이 자기네가 콜센터 만들어서 식당에 전화로 주문해주는 황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는게 알려져 웃음거리가 된 적도 있지...  이 책에서도 우버 드라이버 실시간 신원 인증 과정이 인공지능에 의한 이미지 인식이 아니라 인도에 앉아 있는 노동자가 화면 확인하고 몇 초만에 클릭 누른다는 사실에  깜놀함.. 뭔가 웃픈데.. 그런 면에서는 고스트워크라는 명명이 적절해보이기도 함

 

이름도 잘 지어요, crowdsourcing, microwork, crowdwork... 프로젝트를 잘게 나누어 분배하고 이를 종합하는 컴퓨테이션도 사실 한국의 다단계 하청구조를 보면 그닥 새로울 건 없는데, 일련의 과정은 힙스터+첨단 이미지로 포장하고, 아예 사람을 만날 수 없는 비인격 구조로 만들었다는 것이 특징으로 보임...

물량팀장, 아니면 소사장, 하청업체 바지사장.. 이런 사람들은 그래도 물리적 실체가 보이지만 크라우드워크 환경에서는 저 멀리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웹이나 단말기를 두고 사람 꼴을 볼 수가 없음...  그러니 노동자 입장에서는 비난도 복수도 읍소도 하기 어려움..

사이트 확인해볼 것: 아마존 엠터크, 마이크로소프트 UHRS, 리드지니어스, 아마라닷컴 (비영리)

고스트워크의 장점도 있음.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디맨드 플랫폼이기 때문에 거주지, 장애, 소수자 등 대면 접촉이나 물리적 이동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보다 낮은 장벽으로 일에 접근할 수 있음. 그런데 리차드 세넷이 거듭 강조했듯.. 이게 일자리 장벽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분절화시켜서 각자 일하게 하는 건 인간성의 파괴를 가져온다고 생각함. 물론 이 책의 저자들이 이야기하듯, 이 온라인 환경에서도 나름의 네트워크와 인간적 관계를 구축한다고 하지만 과연 이것이 의미있는 부분인지 모르겠음... 내가 또 오프라인 일터의 괴롭힘이나 텐션을 너무 축소해서 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서도...

 

주된 내용은 아니지만, '이미지넷(ImageNet)'이라는 인공지능 이미지 인식 알고리듬 연습용 데이터셋을 개발하기 위해 엠터크를 이용해 2년 동안 167개국, 노동자 4만 9천여 명이 참여하여 이미지 320만 개에 태깅을 완료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한국의 빅데이터나 인공지능 논의가 정말 심란하게 느껴짐. 이를테면 헬스데이터, 진료기록을 이용한 어떤 의사결정 알고리즘을 만들려면 이를 태깅하는 연습용 자료가 필요하고, 여기에는 그야말로 인간 노가다, 고스트워크가 절실한데 이런 과정들이 과연 만들어져있는지 모르겠음.

당장 병원 진료기롞을 활용할 수 있게 열어주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정작 이걸 어떻게 학습용 데이터로 구축할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음. 게다가 건강, 의료 데이터라는 것은 엠터크에 풀어놓는 방식으로 마구잡이로 작업이 불가능하고 프라이버시 보호와 동시에 의학 용어 이해라는 난이도가 존재하는데..  현재 영상의학과나 병리학과에서 열심히 연습용 이미지 데이터 구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 같음 ㅡ.ㅡ

 

어쨌든 컴과 플랫폼 환경에 익숙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 이런 종류의 고스트워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대학 졸업 이상의, 젊은 사람이기 마련...  최말단에서 라이더로 일하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이들 또한 불안정한 일자리와 소득, 결국 항상 긴장 상태인 프리랜서 노동자이고 나이가 들어서도 이를 쫗아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짐작하는데 (코딩이나 개발자들도 항상 새로운 거 배워야 해서 정년이 의외로 빠른 직종)..  그나마도 일자리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과연 이를 믿을만한 안정적 일자리로 믿어도 되는지는 의문.. 이 또한 어딘가에 안정적 물리적 일자리가 있다고 생각해버리는 나의 편견일 수도.. ㅡ.ㅡ 

어쨌든 이렇게 고스트워크로 분산화시키면서, 사무실이나 관리와 관련된 각종 부대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기업이 이런 방식의 외주화를 선호하는 이유겠지.. 말하자면 기업 입장에서는 '거래비용'을 줄일 수 있는 수단...  문제는 고스트워크를 통해서 거래비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업주에서 고객(의뢰인)과 노동자에게로 전가된다는 것... 업무 교육도 필요없어, 부가급여도 필요없어, 사무실도 필요없어... 심지어 컴퓨터 같은 설비도 노동자가 각자의 것을 이용하니 사업주로서는 거래비용이 하나도 안 드는데 이게 다 노동자 부담...  공부도 해야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도 장만해야 해, 인터넷 회선도 자기가 부담하고 의자, 책상, 문제해결을 위한 멘토링 탐색, 골병까지 모두 노동자의 것...  이렇게 좋은 제도가 있나...ㅡ.ㅜ 플랫폼에서는 노동자도 일감을 사가는 고객, 업무를 맡기는 의뢰인도 고객...


산업혁명기에도 컨베이어로 상징되는 조립라인과 더불어서 이를 떠받치는 거대한 규모의 와주화된 '삯일'이 존재했다는 분석은 우리가 간혹 놓치는 것임. 많은 이들이 기계화가 진전되면 숙련된 인력으로 재편되고 삮일을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자동화 과정에서도 임시노동수요는 단기적으로 급증하거나 어쨌든 지속됨. 예컨대 미국에서도 남북전쟁 시작 무렵 면직물 수요 급증하면서 기계가 못하는 일을 처리해야 할 인력이 절실히 필요해지고 노예 수요가 오히려 5배나 늘어났다고... 다축 방적기 기술이 나오면서 인간 노동이 필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노동수요를 변화시켜 새로운 임시노동이 필요한 환경으로 변화... 그래서 아동 노동도 나오고...

고스트워크 또한 근본적 변화보다는 연속성에 초점을 맞추고 이해해야 할 것으로 보임. 한국에서도 산업 고도 성장기에 공장 바깥에서 허르렛일과 가내부업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었을 것이고, 아마도 오늘날 고스트워크는 이런 지위라고 보면 될 듯.. 여전히 취약하고 여전히 주변화되고... 딱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기술을 만나 독특한 속성을 갖는..

 

저자는 분명하게 이야기함 "기업입장에서 노동자들은 부담해야 할 비용이고 책임이다. 고객들은 각자 위험부담을 지고 상품을 사고파는 자주적인 행위자다. 그런데 노동자들을 고스트워크 플랫폼과 의뢰인들 간 상거래의 주요동력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그 직접적인 결과로 수백만 명의 인력이 불확실한 신분으로 머물러 있다."


미국 2016년 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40%가 긴급하게 400달러를 써야 할 일이 생기면 돈을 빌리거나 무언가를 팔지 않고서는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다고 보고.... 400달러면 50만원임...  당장의 여유자금 50만원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가 이야기하는 아래의 해결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기는 하는데, 이거 안 하려고 고스트워크 만든 마당에.. 과연 될지 잘 모르겠네 그려

  • 사회변동을 위한 기술적 해결책 - 1) 협력 (노동자들의), 2) 온디맨드 직원 휴게실 (예컨대 소셜미디어, 포럼, 채팅방) 3) 회사에서 마련한 공동의 작업공간 4) 돌발팀 조직 5) 간편한 노동자 평가 시스템
  • 기술적 전문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해결척 - 6) 노동자들을 위한 공감 형성 7) 책임과 기업 차원의 고스트워크 공급망 '굿워크코드' 도입 8) 공유자원에 적합한 고용 분류 9) 상업개선협회 역할을 하는 노조와 플랫폼 조합 10) 미래 노동자들을 위한 안전망 (보편적 의료보장, 유급휴가, 지역적 공유 사무실, 평생교육 등 + 기본소득)
  • 우리 모두를 위한 해결책: 소비자들의 행동

 

# 로버트 퍼트남, 우리 아이들

 

우리 아이들 (페이퍼백) - 빈부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
우리 아이들 (페이퍼백) - 빈부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
로버트 D. 퍼트넘
페이퍼로드, 2017

 

왕당파의 복귀를 막기 위해 부르주아 세력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 민중에 빙의하면서 조국 사태를 견뎌보내던 시절에 읽었던 책....   

 

조너선 코졸의 <야만적 불평등 > 이후의 업데이트를 본 듯한데, 학교라는 제도 너머 가족, 양육, 공동체의 영향과 역할을 두루 살피며 불평등 분석... 물론 엘리트 계급의 존속과 불평등 영구화에 대한 당파적 관점을 취한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주의자답게!), 아이들을 중심에 두고 주변 환경의 여러 층위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매우 흥미롭게, 때로는 한탄하며 읾었음. 한국의 엘리트들이 그토록 열렬히 추종하며 모방하는 시스템의 원조를 보면서 씁쓸하지 않을 수가 있나.. 나는 이번 조국 사태 속에서 한국 대학도 AP 를 채택하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음...아.. 여기 미국 식민지 맞구나...


퍼트남 교수가 청소년기를 경험한 50년대, 인종차별과 계급격차, 젠더불평등이 당연히 존재했지만 개인 수준에서의 노력이나 때로는 '우리 아이들'이라는  생각을 가진 선량한 이웃들에 의해 뜻밖의 기회가 열리고 도움을 받았던 시절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곳.. 약 30년의 격차를 두고 내가 한국에서 경험한 시절이 이 때와 비슷했던 것 같음.  (인종 차별이라는 건 아직 본격적 이슈가 되지 못했고) 빈부 격차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상층 이동의 기회가 열려있고, 빈번한 계급간 접촉과 교우가 존재했던 시절.... "우리는 가난했지만 그걸 알지 못했지"라는 퍼트남 급우의 회상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똑같음..  나도 대학에 가기 전까지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 평창동에서 학교를 다녔는데도 ㅋㅋㅋㅋ 멍청했던 건가 ㅋㅋ  


예전에 청소년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뭐로 측정하면 차이를 잘 나타낼까 했을 때, 어떤 애가 부자냐고 했을 때 초딩이던 토끼가 '이빨 교정하는 아이'라고 하면서 뭔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그 이야기 등장해서 깜놀함... 퍼트남 와이프가 새로운 동네에 이사 갈 때 '치열 교정기 테스트'를 이용하는데 이것이 양육과 소득, 학교의 질을 나타내는 지표였다고 ㅋㅋㅋ
 

코졸의 책이 공교육의 몰락 그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이 책은 학교를 포함한 지역사회 전체에 보다 초점을 두는데 코졸과 달리 공교육 자체는 불평등을 그다지 악화시키지 않는다고 주장함.. 문제는 학교 자체가 아니라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학교에 가져오는 물건들'이라고 함. 이는 가정에서의 격려와 과외활동을 위한 사적 지원금에서부터 범죄, 약물 무질서에 이르기까지.. 결국 학교 그자체보다는 누구와 함께 학교에 가느냐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 구성적 효과가 어느 순간 맥락적 효과로 양질전화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퍼트남은 '조직'으로서의 학교는 경쟁의 장에서 평준화에 기여했지만, '장소'로서의 학교가 계급격차를 확대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함


교육 성취를 설명하는 데 시험 성적보다 계급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실증 데이터에서 분명히 드러남. 실제로 대학 졸업 비율을 보면, 상위4분위 가정의 하위 1/3 성적군보다 하위 4분위 가정의 상위 1/3 성적군이 더 낮게 나옴.. 이 어마어마한 사회적 손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과외활동이 흔히 한국에서는 보충수업으로 여겨지지만 미국에서는 그 자체로 엄청난 혜택.. 나는 이것이 그동안 단순한 스펙쌓기용 도구라고 생각했는데, 이를 통해 소프트 스킬과 품성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이는 하드스킬이나 정규학습보다 더 중요함. 이러한 비인지적 특성이야말로 불리한 가정환경 아이들에게 더욱 중요할진데 현실에서 그 기회는 반대로 분포..   마찬가지로 사회적 유대관계, 그래노베터가 이야기한 약한 유대관계의 폭에서의 계급 격차는 이루 말할 수 없음. 한국 엘리트 계급의 자녀 스펙전쟁에서 이러한 전문직 인맥이야말로 대학 진학과 이후의 커리어 형성에 아주아주 중요하지... 이건 김성태 류의 불법 청탁이나 거래가 아니라 개인적 선의와 우애에서 나온 것이지만 비극적이게도 비-인격적 계급동맹이 되어버렸음... ㅡ.ㅡ

이러한 멘토링에서의 차이는 분별력의 격차를 낳음.. '기회의 길에 자리잡고 있는 제도를 이해하고 그러한 제도를 자신을 위해 작동하게끔 만드는 능력에서 뚜렷하게 대비되는 차이'... 뭔지 너무 알겠음 ㅜ.ㅜ  복학왕의 사회학에서 드러났던 것이기도 하지....


심지어 이제 미국에서는 종교 공동체에서조차 계급간 격차가 나타나고 있음. 그동안의 이미지와 달리 낮은 계층에서 종교 공동체 참여가 더 낮음... 교회가 더 이상 낮은 이들을 위한 안식이나 보호처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 어째 이것도 한국 엘리트의 기독교 편향과 쌍을 이루는 느낌적 느낌..  정말 한국 지식 엘리트야말로 미국 식민지의 천하제일 모범생!


이러한 계급격차는 정치 영역에서도 관찰되는데 '교육을 잘 받은 부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직업적 성공뿐 아니라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데에도 이점'.. 투표율에서의 차이, 참여에서의 차이, 나는 너무 잘 알겠음..

책에서 인터뷰에 참여한 빈곤층 청년들이 한 번도 투표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말이지... 나치즘, 파시즘 등 '선동적 대중운동에 가장 취약한 시민들이 정확하게 "공동체의 공식적 비공식적 할동에 참여할 기회가 가장 적은 사람들"'이었다는 설명도 역시...

근로빈곤층과의 인터뷰에서 자녀들을 모두 대동하고 인터뷰 장소에 나온 이유가...주변에 대학 나온 멀쩡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이야기...  한국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이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직업이 사회복지사이거나 교사, 혹은 저 멀리 아이돌그룹인 것을 잘 설명해줌.. 의사, 변호사, 교수 같은 직업은 아예 머리 속에  존재하지 않음. 최근 내가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이런 슬픈 진실 그대로 재현...

 

퍼트남은 이 연구를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는데.. '나는 열심히 노력했고 그 결과 포트클린턴의  평범한 배경을 딛고 출세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상당 시간 동안 내가 간과했던 것은 내가 지닌 행운의 상당 부분이 공동체적이며 평등주의적이었던 시대의 가정과 공동체, 그리고 공공기관 덕분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와 반 친구들이 사다리를 오를 수 있었다면, 오늘날 평범한 배경의 아이들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연구를 마치면서 나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렇게 하지 못할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됐다."

여기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너무 잘 알겠고, 한국의 현재와 근미래를 보여주는 청사진 같아서 커다란 좌절이..  이걸 도대체 어째야 하나...


용어 몀 가지

  • 젠더 키질 gender  winnowing 이라는 용어 매우 적절한 번역 같음 ㅋㅋㅋ 요즘 아이들이 키질이라는 걸 알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 복수 배우자에 의한 다산 multi-partner fertility 사실 한국도 점차 이런 사례가 늘어나는 것으로 보임
  • 계급적 양육모델 - 1) 집중 양육 concerted cultivation - 집중 투자 방식, 2) 자연적 성장 natural growth - 아이 발전을 아이 스스로의 계획에 맡기고 투자보다는 규칙과 훈육

 

#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선량한 차별주의자 (리커버)
선량한 차별주의자 (리커버)
김지혜
창비, 2019

 

 

시의적절하게 동료 시민에게 성찰을 권하는 책... 그렇다고 자기수양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고,
흔히 빠지기 쉬운 문제. 내가 차별받을까봐 걱정하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별을 할 수도 있다는 점, 그것도 악의 없이... 이를 돌아보고 이런 세상일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건네는 책.
그리고 뭐라 딱히 설명하거나 대응하기 어려웠던 상황들을 개념적으로 명쾌하게 정리해주고 있음

 

호의나 자선 대 권리 개념 - 전자는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설명하게 드러냄.. 베풀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은 기존의 권력 관계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음. 그런데 수혜자가 권리를 요구하는 순간, 선을 넘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권력까지...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나에게 있는 권력행위..

마찬가지로 사회적 권력의 열세에 있는 집단을 유머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단순히 까탈스럽다 예민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왜 웃긴가, 누가 웃는가 라는 질문으로 전환해야 핸다는 설명은 명쾌하게 불평등 관계를 드러남. 특히나 유머를 통한 비하는 엄숙하게라면 걸러졌을 혐오표현을 느슨하게, 고삐를 풀어주는 역할을 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의가 필요... (편견규범이론)

'동성애자가 싫지만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언설로, 동성애자가 이성애자 싫다고 이야기하거나 난민이 국민 싫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단순히 개인의 선호나 취향 문제라기보다 권력의 문제.. 머릿속까지 단속할 수 없지만 공적 공간에서의 저런 발화 자체가 문제!

 

김치녀와 한남충을 똑같은혐오표현으로 볼 수는 없는 상황 ㅋ 김치녀는 '여성이 남성에게 보여야 하는 바른 행동에서 어긋나 있다는 평가를 포함.. 즉 조신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여야 정상이라는 억압적 역할 규범이 부여된 언어' 이지만, 한남충은 여성이 남성에게 특정한 역할 규범을 요구한다기보다 여성의 입장에서 '나도 당신을 조롱할 수 있다'는 호명 권력을 사용하는 현상 ㅋ 이를 둘 다 잘못이라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지적함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평등해졌다 (비정규직/정규직 선물차이, 신분증 목줄 색깔 차이)에 대해서는 왜 제한된 자원인데 이런 종류의 차별을 해야되는지에 설명 필요. 어떤 타당한 이유로 자원 배분 우선순위를 달리했는지 ..물론, 대개 능력주의가 그 답으로 준비되어 있지만 이거야말로 문제 ㅋ

소수자가 효과적인 다른 저항의 수단이 없을 때 시민 불복종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이를테면 장애인 이동권 보장 투쟁) 롤즈의 설명 합리적 "만일 정당한 시민 불복종이 시민의 화합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일 경우, 그 책임은 항거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반대가 정당화되겠금 권위와 권력을 남용한 사람들에게 있다." - 그런데 요즘 한국의 우익반동이  삭발에 단식 농성까지 그동안 소수자들과 힘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기댔던 수단을  취미처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 참... ㅡ.ㅡ

또한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지만, 이미 2백년 전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대로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지만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됨...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는 말 너무 공감.

사회가 평등행지는 것에 대해, 기득권 세력은 평등을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기에 저항... 너의 이익은 나의 손실이라고 생각하다는 거지 ㅋㅋ 평등은 한정된 재화가 아니란 말여 ㅋㅋ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 불평등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수고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불편함을 견딜 것인가 이 선택은 단순히 개인의 수고로움이나 불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공동의 가치와 지향에 관한 것"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지적에 매우 공감함....


그런데 고민되는 지점도 있음...

이를테면 '결정장애'라는 용어가 과연 장애인을 비하하는 용어로만 받아들여져야 할까.. 누구나 어느 지점에선가 하나씩은 장애를 다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오히려 장애에 대한 게토화를 완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드는데, 장애인 당사자들이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복잡... 이를테면 퀴어라는 용어의 전복적 전유 사례처럼 누구나 한 가지의 어려움= 장애를 가지고 있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낼 방법은 없을까???

이 책에는 '상식'처럼 널리 쓰이지만 정확한 정의를 몰랐던 용어를 명료하고 정확한 언어로 정의 해놓아 참조하기 좋다는 것이 미덕인데, 그 중에 하나가 토크니즘 (tokenism)- 역사적으로 배제된 집단 구성원 가운데 소수만을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차별시정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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