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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교양'서적 이야기

작년에도 연초에 반짝 열심히 포스팅하고 하반기로 갈수록 흐지부지하더니 ㅋㅋ

매년 비슷한 패턴 반복...  올해는 뭔가 더욱 어수선한 것이 과연 월드와이드 질풍노도 시대 다운 현상이다.

 

# 폴 블룸 [공감의 배신]

 

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폴 블룸
시공사, 2019

 

뭘까... 도전적 문제제기에 동의하고 이걸 어떻게 풀어갔나 궁금해서 책을 골랐을 뿐인데 스티븐 핑커, 조너선 하이트, 피터 싱어 줄줄이 딸려옴...  모두 석연치 않은 사람들... ㅜ.ㅜ

그리고 책은 조금 실망스러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계속 '서론'만 반복되는 느낌이랄까.

 

사람들이 온갖 좋은 것에 공감이라는 개념을 다 가져다 붙이고,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을 구분하지 않고 쓴다는 점, 도덕적 동기가 마치 유일하게 공감에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점에는 나도 백퍼 동의.
나도 공감 싫어함. inequality of what? 이라는 아마티야 센의 질문처럼 누구에게, 무엇을 공감할 것인가에 따라 공감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일수도 있고, 세상 무서운 흉기일 수도 있음. 공감 자체에 반대한다기보다, 공감이 도덕적 잣대로 쓰이고 절대화하는 것에 반대. 도덕적 판단은 꼭 그사람이 되어보지 않아도 감정을 그대로 느끼지 않아도 가능하고 여러 가지 다른 기준들이 있음. 예컨대 정의론이 그렇잖여?

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라는 저자의 비유에 "공감" (이 때의 공감이란 '동의'라는 뜻). 다수의 피해를 두고 눈앞의 생생한 서사를 보여준 개인에게 집중하는 '인식가능한 희생자 효과'로 명명할 수도 있음.


개념적으로 정의하자면 공감(empahy)이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행위' . 애덤 스미스 등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는 이걸 sympathy 라고 지칭했는데 저자는 이를 '연민'으로 개념화 (나는 전자를 감정이입, 후자를 공감이라고 부르겠소만.. 번역 상의 문제인 것 같음). 즉 empahty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고, sympathy or pity 는 타인의 감정에 대한 개인의 반응
연민은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강한 동기와 더불어 따듯함, 관심, 배려의 감정. 연민은 내가 타인에게 느끼는 것이지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은 아님 (심지어 명상수련자가 참여하여 이걸 functional MRI 로 실험한 연구도 있음 ㅋ)

"직감에 의존하는 판단에는 결함이 있다... 우리가 공감과 같은 직감에 영향을 받긴 하지만 직감의 노예는 아니다. 전쟁에 돌입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비용편익 분석을 거치면서 내자식에게는 사랑을 느끼고 생판 남에게는 특별한 온정을 전혀 느끼지 않아도 내 자식의 삶이 중요한 만큼 남의 삶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판단도 행동도 더 잘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못생긴 사람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선호한다. 이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우리 마음에 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선호를 기준으로 도덕적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줄도 안다. 이것은 우리의 사회적 행동, 우리의 추론 능력, 우리의 도덕성과 관련하여 우리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줄 알는 능력이다. 우리가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능력 덕분이다."


도덕의 범위는 역사를 거치며 확장되었고, 소수자의 권리를 대하는 태도 또한 포괄성 쪽으로 번화해왔는데 이는 ".. 역사과정을 거치며 우리 마음이 열렸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증조부모 세대보다 공감을 더 잘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인류 전체를 정말 내 가족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히려 타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보다 더 추상적인 이해를 반영한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상관없이 타인의 삶이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삶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성과 합리성이란 부분이 한꺼풀 벗겨내면 몹시도 취약한 것도 사실이지만 (많은 심리학 실험들이 간단한 암시에 의해서도 사람들이 도덕적 판단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줌), 그토록 취약한데 학문은 왜 존재하나? ㅋㅋㅋ 사실 이성조차도 환경 자극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성의 우수함이라고 생각하는디 ㅋ

공감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극단적 사례가 소시오패스인데, 이들은 타인의 마음 헤아리기, 즉 인지적 공감능력이 매우 빼어나지만(그래야 가학도 할 수 있음) 이를 조정하고 필요한 곳에 이용 (정서적 공감은 취약).  이걸 두고 '특정한' 공감능력 결핍을 문제삼기보다는 얕은 감정이 오히려 문제라고 보는게낫다고 설명

 

책 자체는 공감=선 이라고 하는 헛된 믿음(마치 종교가 없으면 도덕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프레임)에 균열을 내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인데 너무 논의가 얄팍해서... 에잉...

 

# 벤스 [힐빌리의 노래]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흐름출판, 2017

 

 

전반부 어린이, 청소년 시기 힐빌리로서의 직면했던 현실에 대한 담담한 서술은 낯설고도 낯익은 이야기. 지구 반대편 러스트벨트의 쇠락은 피부색을 생각하지 않고 읽는다면 그대로 디트로이트  흑인 이주민의 이야기.
불행을 경쟁할 필요는 없다만 백인의 피부색을 갖고도 깊은 절망과 박탈에 직면하며 무너져가는 힐빌리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여기에 더해 비자발적으로 뿌리뽑힌 고향없는 삶과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제약에 갖힌 흑인들의 삶을 저절로 떠올릴 수밖에...

멀리 부르디외 센세의 '세계의 비참', 코졸의 '야만적 불평등' Thomas Sugrue의 The origins of the urban crisis, 그리고 최근의 영화 Moonlight, Florida project 까지 동시에 떠오르면서 미국 사회에 깊은 한숨...

하지만 한국의 사당동25 그리고 내가 만났던 underclass 청년들이 직면한 삶도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나는 아직도 택배 상하차 일이 제일 쉽다는 청년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음. 남들은 지옥, 노예노동이라고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번듯한 졸업장과 인지적 자원, 사회적 자본, 정서적/사회적 기술을 전혀 익히지 못한 이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덜 부담스러운 일.....

그나마 닻이 되어주는 (그야말로 anchoring) 버팀목 하나만 있어도 아주 심연으로 추락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이러한 삶의 공통점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역사 속에 배태된 개인의 회고록. 풍부한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분석'에까지 이르지 못함. 아마도 이것이 세계의 비참, 혹은 The origins of the urban crisis 와 다른 점.
이웃 힐빌리들에게 따끔한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당사자성이라는 '자격'을 가졌기 때문이겠지만, 개인이 아무리 정신차린다 해도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음. 타고난 금수저들이라면 대충 해도 가질 수 있는 자원들과 기회들인데, 모든 존재를 갈아넣어서야 그것들을 획득할 수 있다면 wear & tear - 출발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질 수밖에...

 

이 책이 인기를 얻고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 심지어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좀 불편.... 

만국문화박람기도 아니고 남의 나라 빈곤과 불평등 내러티브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가... 고통 속에서 일어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세상에 이런 비참함이? 내가 모르는 어떤 세계, 그곳이 아마존 밀림의 어느 수렵채집부족일 수도 있고, 미국 내륙 깊숙이 힐빌리일 수도 있고.... 인간 자체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나쁘다 할 수 없으나 (나도 엄청 집중해서 읽기는 했음), 최소한 이 책이 (한국) 연구자를 위한 책이거나 (한국) 연구자에게 울림을 주는 책이어서는 안 될 것 같음. 연구자의 계급적 성격이 점차 상층 편향되면서 이런 종류의 생생한 '체험'담이 연구자들에게 간접 경험과 정서적/인지적 자극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걸 부정하려는 건 아님.. 책 그 자체보다 책을 둘러싼 국내 사회과학 연구의 풍토, 연구자의 계급성, 출판 시장 등등.. 이런게 불편함. 연구자의 책무라면 이 책을 읽고 추천글을 남기는게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underclass 의 삶을 탐구하고 분석해야 하는게 아닐까 말이지...

 

 # 최종희 [대구경북의 사회학]

 

대구경북의 사회학 - 대구경북 사람들의 마음의 습속 탐구
대구경북의 사회학 - 대구경북 사람들의 마음의 습속 탐구
최종희
오월의봄, 2020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과연 이것이 대구경북만의 특별한 속성일까?
이를테면 다른 비수도권 지역 호남, 충청 사람들은 전혀 다른 마음의 습속을 가지고 있을까?
책이 보여준 마음의 습속은 내가 그동안 막연히 짐작하고 있던 것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왜 이런 습속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것이 어떤 점에서 다른 비수도권 혹은 전근대의 잔재로 존재하는지 등에 대해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많이 아쉬움 ㅜ.ㅜ

 

# 마크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
리시올, 2018

 

90년대 초중반에 이런 종류의 문화/정치 비평을 엄청 읽은 것 같은데.. ㅡ.ㅡ
마르크스주의, 좌파적 관점에서 대중 문화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 마치 끝판왕처럼 보이는 현존 자본주의 체제의 균열과 틈새를 찾아내고 급진적 대안을 모색해보려는 움직임에 몰두했던 일련의 '세대'가 한국사회에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나에게 추천해주신 분들은 어떤 새로움을 보았던 것일까??

 

포스트모더니즘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저자가 선호하는 이유 -

1) 포스트모더니즘 테제가 처음 발전된 1980년대에는 적어도 명목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대안이 있었지만 지금은 '더 깊고 훨씬 더 만연한 고갈의 느낌,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볼모의 느낌'. 그 때는 그래도 현실 사회주의가 존속하고 있던 시절. 80년대는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독트린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된 시기, 2) 그래도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더이상 모더니즘과의 대면을 무대에 올리지 않으며 모더니즘에 대한 극복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 3)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온전한 한 세대 경과. 자본주의는 식민화하고 전유할 외부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음 ===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가 역시 끝판왕이라고 진단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진단 어디에서 급진성을 찾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음 ㅡ.ㅡ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품고 있는 아포리아

1) 정신건강 - 이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작동하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신건강질환이 유행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사회체계이기는 커녕 내재적으로 고장나 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하는 듯이 보이도록 만드는 비용이 아주 크다는 것을 시사" 2) 관료주의 - 관료주의는 스탈린주의적 유물이고 신자유주의와 함께 쇠퇴할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관료주의는 일상의 일부이며 새롭고 탈중심적인 형태를 통해 오히려 증식. 이 두 가지 문제에 특별히 초점을 두는 이유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명령이 지배하는 문화영역인 교육을 특징짓고 있기 때문 ===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는 커녕, 국가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 성장했다는 데이비드 하비의 분석이 더 설득력 있는데??? 정신질환은 과연 자본주의의 징후인가? 지나친 일반화 아님? 영국적 맥락에서는 그럴 법도 하다만, 전 세계로 시야를 넓혀보면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말여..  유로센트릭 관점은 사실 책 곳곳에 드러남. 읽는 아시아 사람 기분 나쁨 ㅡ.ㅡ  영국 교원노조가 팔레스타인 인권 고만 이야기하고 계급 이슈에 좀더 천착하다는 것 등...  무슨 맥락에서 말하는지는 알겠으나 말이지.

이를테면 정신분열증이 '자본주의의 바깥 테두리를 표지'해주는 상태라면 양극성장애는 자본주의 '내부'에 고유한 정신질환이라는 설명..... 응? "현재의 지배적 존재론은 정신질환의 사회적 인과성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부정한다. 정신질환의 화학-생물학화는 당연히 그것의 탈정치화로 이어지게 된다. 정신질환을 개인의 화학-생물학적 문제로 간주하면 자본주의는 어마어마한 이익을 얻게 된다 1) 원자적 개인화를 향한 자본의 추진력 강화, 2) 다국적 제약회사에 수익성 높은 시장 제공 "  === 지배적 담론이 생물학적 설명에 기울어져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미 학술 커뮤니티 안에서도 사회적 기원 혹은 사회적 요인에 의한 영향에 대한 논의가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닌데 너무 느낌적 느낌으로 기술하신 것 같음 ㅋ

 

아니 관료주의 비판하면서도 "진정으로 새로운 좌파의 목적은 국가를 넘겨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일반의지에 종식시키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거대 서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의심에 맞서 우리는 이러한 징후들이 모두 고립된 우연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체계적 원인, 즉 자본의 효과라고 재단언해야 한다.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또 지리학적으로 어디에나 편재해 있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전략들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발전시키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 "라니, 뭔  하나마나한 공자님 훈계말씀인가. 이미 1980년대에 앙드레고르가 에콜로지카에서 " 사회주의가 만약 도구를 바꾸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보다 나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냐고???

"우리는 의학적 질환으로 간주되는 광범위한 정신질환 문제를 유효한 적대로 전환해야 한다. 정서적 장애들은 불만이 내면에 갇혀 있을 때 발생한다. 이러한 불만은 외부로 방향을 돌려 실제 원인인 자본을 겨냥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근데 여성들은 자본만큼이나 가부장주의가 더 문제인 거 같은데? 무슨 생뚱맞은 자본주의 대환원론인지.. 20년만에 이런 거 보니 좀 참신하기는 하다 ㅋㅋㅋ 20년전 혈기왕성하고 마음 앞서나가던 마르크스주의 새내기 비평가 글을 보는 느낌적 느낌...  

 

"역사의 종언이라는 어둡고 긴 밤을 엄청난 기회로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억압적으로 만연해 있다는 사실은 대안적인 정치적 경제적 가능성의 의미한 기미만 보여도 뜻밖의 거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장 사소한 사건들도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서 가능성의 지평을 표지해온 그 반동의 회색 장막에 구멍을 낼 수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시 한 번 무엇이든 가능해지는 것이다" - 사실 역사의 모든 시기에서 계급적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이데올로기를 수반했고, 항상 당대에 대안은 없다는 이념 하에서 작은 균열들이 새로운 가능성들을 보여준 것이 사실.. 이것이 비단 자본주의만의 일은 아니잖여???
 

반성적 무기력 (reflexive impotence) - 사태가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음. 이는 영국 청년, 청소년의 집단적 병리로 우울증적 쾌락 (depressive hedonia) 상태에 빠지게 만듦.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상태를 일컫는 개념

 

나쁜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전반적으로 나랑 안 맞음 ㅋㅋㅋㅋ

실증 자료도 없고, 현실 정치 노력도 없고, 그렇다고 자본주의 너머로 나아가는 '전략'이나 주체에 대한 치열한 탐구도 없고, '부재'로부터 도출해낸 가능한 미래에 대한 상도 없고...
온라인 상에서 손꾸락 놀리는 살롱 좌파들의 평론가 놀이가 나는 싫은 거임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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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트기 직전이 정말 제일 어두운가

지난 한 주 내내 한국 사회 여성들이 집단으로 싸다구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정우 사건이야 더 이상 보탤 말도 없지만, 안희정, 박원순 두 정치인에 대해서는 아 정말 복잡한 심경이...

 

처음에는, 수감되어 부모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자식의 심정이 오죽할까 연민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이 코로나 때문에 장례식도 결혼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보란 듯이 실세 조문객들과 언론을 불러모으고, 어머니의 죽음을 하나의 거대한 정치적 복귀 퍼포먼스로 만들어내는 모습에서, 대체 내가 뭘 보고 있는 건가 어안이 벙벙했다. 

몇 십년을 같이 활동해왔던 지인이 말도 안 되는 잘못을 저질렀고, 그가 마침 부모님 상을 맞았다면 나도 아마 조문을 갔을 것이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을 우려해서 일부러라도.... 인간의 마음에는 여러 단면들이 있고, 그와 활동했던 시절, 그 때의 마음 또한 모조리 진심이 아니었다고는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커다란 슬품 앞에서 잠깐 위로는 받을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가 저지른 잘못에 현재 명백한 피해자가 있고, 그가 앞서 보여준 활동의 가치와 모습을 전면 부정하는 종류의 윤리적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면, 개인적 연민과 위로는 전하되 차마 화환을 보내고 공개적으로 조문하는 일은 못할 것 같다. 내가 그와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친구 단속 제대로 하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에라도 말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전혀 거리낄 없이 행동한다면 너 이러면 안 된다고 따로 불러 따끔하게 이야기해줄 것 같다... 친구를 진심으로 아낀다면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알파메일클럽에서는 그런 종류의 염치나 속깊은 우정은 애시당초 의미가 없는 것인가보다.

 

이런 착잡함과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박원순 시장이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실종 뉴스 직후부터 온라인에는 성범죄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평소 그의 인격을 높이 평가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기도 하고), 대통령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조금도 감추지 않은 지난 몇 년이기 때문에 도덕이고 인품이고를 떠나 그 정도의 리스크 관리는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무 안달복달하는 모습이라도 좀 숨겼으면 낫겠다 싶을만큼 대선레이스에 대놓고 관심을 보여온 그가,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또다른 측면은 변호사로서 서울대교수 성희롱 사건이나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변호인단 활동도 하고, 20년을 넘게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같은 곳에서 활동을 해왔는데 성추행을 저지를 정도의 윤리적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바닥에 소문이 나도 진즉 나지 않았게나, 이런 판단도 들었다.

그런데.. 사망이 확인되었다. 소문이 점차 확증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다른 동기를 생각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또 생각이 복잡해졌다. 여전히 의도적 성폭력이라는 생각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영페미들이 온라인에서 들끓을 때도, 난데없이 민정당 후예들이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어 미투를 이야기할 때도 그저 양쪽 다 듣기 싫었다.  아무리 시장 한 사람이 다 한 것은 아니라지만 지난 10여년 동안 서울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변화들, 특히나 주거복지, 노동인권, 건강불평등 측면에서의 정책과 사업들,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들과 촛불 시민들이 광화문에 설 수 있도록  보호하는데 그의 정치적 리더십을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힘들다. 물론 아쉬운 부분이 더욱 컸지만, 그렇다고 성과를 전면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가 씨를 뿌린 시민단체들은 여전히 제 몫을 하며 한국사회 변화에 기여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떠나는게 참 허망하고, 착잡하다는 단어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러면서 별별 가설을 다 세워보았다.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개념을 모르지는 않을테고, 혹시 자기 혼자 로맨스라고 착각했나? 여성 하급직원이 사무적으로 공손하게 응대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혼자 소설쓰고 있었던 거 아냐?  자신의 매력을 과대평가하는 K저씨들의 고질병?? 

 

그/러/나/... 

두 차례의 피해자 기자회견을 보면서, 내가 정말 알파메일을 모르는구나.... 머리를 맞은 듯했다.

그래도 그가 남긴 유산을 기리며 인간적 애도를 하던 마음이 정말, 말 그대로 차갑게 식어버렸다.

로맨스 착각이 아니라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분명한 성추행을 저질렀고, 이것이 대선가도에 리스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피해자가 감히 문제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할 만큼 권력의 속성을 알았기에. 

심지어 정당한 법의 심판을 받거나 피해자에게 사과도 하지 않은 채 무책임하게 생을 마무리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정말 환장할 노릇 아닌가... 4년동안 괴로웠던 사람이 누군데, 이 마당에서 왜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까지 가져야 하나.... 

부러질지언정 굽힐 수는 없다는 자존심과 자기애가 이런 선택을 가져온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때로는 치욕을 견디면서 과제를 완수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게 책임윤리 아닌가.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정당한 댓가를 치르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과오를 반추하면서 본인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를 바꾸는 데 1이라도 기여를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명색이 정치인이고 그에 앞서 활동가였는데....

 

최소한 20년 전 시민단체 활동을 했던 그 시절에도 지금과 같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권력에의 도취가 도덕과 윤리의 끈을 놓아버리게 만든게 아닐까 싶다.

허나 인간이란 사회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주체이기도 한데 최소한의 자기성찰조차 하지 못했다니 그저 놀라울 뿐...  알파메일의 세계란 그런 곳인가? 20만 년 인류 진화의 역사로도 극복하지 못할 만큼 수컷 우두머리의 렙틸리안 속성은 강력한 것인가? 

먹이에 가장 먼저 접근하고 독점하던 알파메일 원숭이들이 식중독으로 모두 죽고 나니 남아 있는 원숭이 무리에 평화와 협력이 찾아왔다는 사폴스키 교수의 연구결과가 문득 떠오른다. 이 정도 되면, 펜스룰을 적용해서 여성을 남성 주변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권력있는 자리에 아예 남성을 앉히지 않는 게 답인 것 같다.

 

사실 지금 제일 어이 없는 것은 서울시에서 시장을 보좌했던 정무라인 사람들이 보이는 무책임한 태도. 심지어 젠더특보는 사건 터지자마자 휴가를 냈다더니 아예 사표를 제출했다가 그나마 반려되었나보다. 그의 정치적 동지들이 고인에 대한 동지애가 1이라도 남아있다면, 이 사건을 제대로 평가하고 약한 고리와 미흡한 부분이 어디었는지 찾아내서, 비록 그가 다시 살아올 수는 없겠지만 그의 죽음을 계기로 조직내 민주주의가 한발 나아가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죽음에 의미를 1이라도 부여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는데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문학적 메타포인지...

어찌 되었든, 지금이, 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탄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 시기가, 바로 동트기 직전의 그 시기이기를, 그렇게 함께 만들 수 있기를 기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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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부일기_20200715

hongsili님의 [도시농부일기_20200612] 에 관련된 글.

 

장마철이라 날짜 맞추기가 정말 힘들다. 바로 밭 옆에 산다면 날이 개었을 때 후딱 나가보면 될텐데.. 너무 밭이 멀어... ㅡ.ㅡ 일기예보 때문에 날짜를 몇 번이나 바꾸다가 힘들게 내려갔는데, 예보와 달리 계속 비가 내려서 작업을 거의 못했음. 원래 막판 김매기하고 여러 작물 수확을 해야 하는데.. 김매기는 못하고 빗 속에 한 시간 정도 열매들만 일부 수확해서 상경. 

날짜를 미루다보니 일부 작물들... 예컨대 적채나 치커리 등 잎 채소는 너무 웃자랐고, 브로콜리도 이미 시들어가는게 있었음..  아니 내가 어떻게 키운 애들인데 ㅜ.ㅜ

중간중간 날도 뜨거웠지만 비도 계속 와서 그런지 잡초랑 작물 모두 훌쩍 자란 것을 확인. 미친 듯이 자라는 내 머리카락 같음...

 

아침 6시, 본격적 작업을 하기 전에 어떤 도구를 챙겨야 할지, 일단 현황 파악을 위해 우산 들고 가볍게 나갔는데...  밭으로 나가는 길은 낭만.... 어느 집에 울타리로 심어놓은 도라지 꽃들이 탐스러운데 봉오리는 처음... 학생 때 농활 가서 맞은 생일에 마을 어린이들이 도라지 꽃다발 안겨준 생각이 문득 떠올랐음.. 아련하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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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낭만도 잠시... 밭에 들어서자마자 뜻밖에 득음 ㅜ.ㅜ

내 발소리에 놀란 개구리가 뛰어올라 어처구니 없게도 내 장화 속으로 훌쩍 뛰어든 것. 장화를 벗지도 못하고 (발목 부분이 좁아서 자칫하다가는 개구리 터진다고 ㅜ.ㅜ), 안에서 꿈틀대는 개구리 촉감 때문에 정말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있는 힘껏 비명을 쉬임없이 질렀는데 (영겁의 세월 ㅜ.ㅜ) 그 와중에 개구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탈출 ㅋㅋㅋㅋ 아 놔.. 정신차리고 나니 어찌나 쪽팔린지...  옆 축사에 있던 돼지들 놀라서 난리치고 동네 사람 다 깨운 거 같음 ㅡ.ㅡ  K 선생님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심 ㅋㅋㅋㅋ 진짜 뭔 일이야... 쪽팔려

밭일 하다가 심장마비 걸릴 것 같은 느낌적 느낌.. 벌레, 지렁이, 개구리... 아 나는 농약 친화적 인간인가.. 차라리 농약 먹고 암에 걸려 시름시름 앓는 것이, 심장마비로 급사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 별 해괴한 생각이...

 

어쨌든 정신차리고 둘러보니 ㅋ 수세미는 지지대를 타고 부쩍 자라 있었고, 꽃도 피움.. 이제 조만간 수세미 열매를 만날 수 있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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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단호박 ㅋㅋㅋ 와 귀엽다!!!  그리고 수박이 부지런히 자라고 있음.. 너무 기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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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따로 심은 참깨...  깨털기도 해보게 생겼음 ㅋㅋ

콩을 이것저것 많이 심었는데 무럭무럭 자라고 있음. 심지어 엄마가 나 믿고 콩 안 사고 있는데 왜 안 가져오냐고 채근하기 시작함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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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놀란 가슴 부여잡고 장갑이랑 바구니 등등 장비 챙겨서 본격적 수확 작업 돌입.

토마토는 그냥 일반형, 흑토마토, 방울토마토 다 골고루 맛나게 익었고 여전히 많은 열매들이 익어가는 중.

브로콜리는 순식간에 웃자라서 일부 시들어버림. 상태 괜찮은 것만 거둬옴.

고추는 완전 주렁주렁... 농약 많이 치기로 유명한 작물인데 의외로 너무 튼실하게 자랐음. 걱정은... 혹시 열매 안에 벌레가 살고 있지 않나...  예전에 고추 먹다 벌레 나와서 깜놀한 적 있는데 그 때 충격 때문에 아직도 고추 먹을 때 미리 썰어서 먹음 ㅋㅋ  생고추 통째로 나오면 이빨로 한쪽 뜯어서 분해해 내부 확인.. 다른 사람들 질색팔색하지만 나도 살아야겠다고.. ㅡ.ㅡ

지난번 올려준 오이도 정말 쑥쑥 자라서 튼실한 열매가 많이 열렸음. 오이랑 노각 수확하고, 가지도 몇 개...

양배추는 정말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 더 단단하고, 사무실에 들고와 잘라보니 수분 대박... 보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느낌이랄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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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가 굵어져 사진을 못 찍었는데, 샐러리 농사 올해 완전 성공..  풍족하게 베어옴. 이것저것 담았더니 커다란 바구니로 두 개....

고맙게도 선생님이 운반해주셔서 사무실로 가져와 사람들과 사이좋게 나눠먹고 분배..

하지만.. 내가 우려했던 대로  벌레들도 따라옴.... 내 이 사태를 미리 예측하고 손으로 덥썩 잡지 않고 물에 넣어 휘휘 저으며 흔들어줌...  예상했던 그대로 벌레 몇 마리 떨어짐 ㅜ.ㅜ  역시 농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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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임실 요구르트까지 (예전에 우리 체험학습한 곳 ㅋㅋ) 가세하여 식탁은 보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모습...  이런 맛에 농사짓는구나 ㅋㅋㅋㅋ  저 토마토 색깔이랑 샐러리 잎 싱싱한 거 좀 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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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감자가 덜 자라 수확을 못했는데 다음에는  감자와 콩.... 고된 노동이 예상돰....

도시 농부의 모험은 끝나지 않는다...

(최근 부산에 사는 후배가 율도국 섬 왜 안 사냐고 채근... 그자는 어업을 담당하기 위해 낚시를 본격적으로 수련하겠다고 한다.. 큰일이네... 감자랑 콩 팔아서 섬 구매 자금 마련에 나서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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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부일기_20200612

hongsili님의 [도시농부일기_20200527] 에 관련된 글.

 

작업 전날 미리 내려가서 저녁 10시 취침....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내 손바닥보다 더 큰 개구리인지 두꺼비인지랑 마주쳐서, 일도 시작 못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할 뻔...  ㅡ.ㅡ  생각해보니 벌레만 싫어하는게 아니었어.

일단 절지동물문이 다 싫음. 자연계 생물종의 80%를 차지한다는데 ㅋㅋㅋㅋ 거미, 곤충, 갑각류....  그나마 갑각류가 좀 괜찮은 것도 같지만 막상 랍스터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냥 벌레 확대 구조 아닌가말여..

게다가 척추동물문 중에서도 양서류와 파충류 강도 싫음 ㅋㅋㅋ  현존 생물 종의 절대 다수를 싫어하는 농부라니 ㅋㅋㅋ 그렇다고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진균류를 좋아하냐 그것도 아니고.. 어류, 조류는 좋아하나, 이것도 뭐 특별한 호불호야 없지만 닭은 눈 마주치기 싫음 ㅋㅋㅋㅋㅋㅋ 랩터의 후예.. 뭔가 사악해 보인다....

 

실물 자연보다는 아텐보로 영감님이 해설해주는 BBC 다큐로만 자연을 접하고 싶은 농부의 마음이라니 ㅋㅋ

 

하여간... 놀란 마음 붙잡고 잠을 청하여 새벽 5시 기상, 작업 시작

 

세상에.. 하루가 다르게 밭이 변해간다. 가지도 쑥쑥, 지난 번 심은 겨자채와 샐러리, 수박도 잘 자라고 있당.. 샐러리와 겨자채는 이제 이름표 없어도 알아보겠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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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샘이 지난 겨울에 심어놓으신 양파와 마늘 수확..  그나마 양파는 괜찮은데 마늘은 정말 뿌리가 얼마나 단단하게 박혀 있는지 그냥 호미로 살살 파낼 수가 없음. 쇠스랑 같은 걸로 땅을 깊숙이 뒤집어 엎고 호미로 살살 털어내며 뽑아냄...  랜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부 마늘은 씨앗을 키우며 크게 자라서 일단 씨앗을 받아볼 요량으로 남겨둠

뽑아낸 양파와 마늘은 바로 흙을 털면 잘 털리지 않아서 일단 두둑에 잠시 말리고, 아침 먹고 와서 수레로 옮김...  자랑 삼아 서울 사람들한테 사진보냈더니 어디 끌려갔냐는 다급한 답문자가 옴 ㅋㅋㅋ

양파도 마늘도 시중에서 파는 것처럼 알이 굵지는 않은데 향이 엄청 강함.. 지난 번에 양파 가져가서 맛 봤는데 진짜 맛남... 보관도 꽤나 오래할 수 있음. 이번에도 양파와 마늘 수확한 거 싸왔음.

마늘 심었던 자리는 이미 흙이 다 갈아엎어진 상태라 물을 충분히 주고 선비잡이콩(?)과 제주 푸른독새기콩(?), 이름모를 까만콩을 심음..  이것도 여섯 두둑이나 심었음 ㅋㅋ 선비잡이 콩은 이름이 웃긴데 찾아보니 과거보러 가는 선비를 잡아 앉힐만큼 맛난 콩이라는 뜻 ㅋㅋㅋ 뭐 이런 뻥쟁이들 같으니라구...  어디 두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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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을 시작했고 날도 약간 흐린 편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정말 어찌나 무덥고 땀이 나는지... 그늘에서 좀 식힐 겸 (?) 언덕에 올라 매실 수확...  아래쪽 가지에 달린거 열심히 수확한 다음에 비탈길에 삼발 사다리 놓고 올라가서 매실 따고 가지치기 하니까 진짜 농부된 것 같은 느낌적 느낌....  귀여운 꼬랭이가 응원하려 옴 ㅋㅋㅋㅋ  사다리  인증샷 하나 남겼어야 하는데... 아쉽네...

내가 농활 가서 과수원 일 할 때도 사다리는 안 올라갔었는데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음 ㅋ

영농 작업하다 산재 사고 왜 나는지 알겠음 ㅋㅋㅋㅋㅋ 뼈가 부러질 것 같지는 않은데 떨어지면 온 몸이 다 긁히겠구나 싶었음.

나무 겨우 네 그루인데 커다란 바구니로 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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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밭으로 내려와 이제 토마토, 오이, 수세미 같은 작물 지지대 고정하고 머리결 다듬어주기 ㅋㅋ

할아버지께서 그물망 설치를 늦게 하셔서 오이가 다 바닥에 깔려 있음.. 이러면 벌레가 파먹거나 썩는다고 함... 줄기 다듬어서 올리고 그물에 연결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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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토마토, 흑토마토도 벌써 꽤 큰 열매들이 달려 있는데, 키가 큰 만큼 윗 가지를 지지대에 붙여서 고정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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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미도 이제 좀 자라서 김 매주고 지지대 세워 줄기 올려줌.. 이쪽 두둑은 멀칭을 잘 했는데 잡초들이 엄청나게 올라와서 그거 다 뽑느라고 땀뺐음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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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이른 봄에 심었던 완두콩은 벌써 수확철...  이것도 얼마 되겠나 싶었는데 쪼그리고 앉아서 다 따고 보니까 한 상자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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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한 송이 안에서 몇 개씩만 시차를 두고 익어가는 블루베리 나무들을 돌며, 열매 채취...

저 푸른 안토시아닌을 보라... 저절로 눈이 맑아지는 느낌 ㅋㅋㅋㅋㅋ

아니 이렇게 매일매일 새롭게 열매가 익어가면, 한동안은 매일 따먹을 수 있다는 거잖아!!!

정착 농경인에 비해 수렵채집인들이 의외로 영양상태가 좋고 노동강도가 낮았다더니 무슨 소리인지 알겠네 그려... 서울 집에도 심고 싶은데,  아무래도 밭에 심은 것만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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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마치고 샤워하고 온 싹 다 갈아입었는데도 열기가 좀처럼 식지를 않음 ㅋㅋㅋ

은근히 노동강도가 빡세서 점심 먹는데 손이 후들거려서 젓가락질을 못하겠더라구 ㅋㅋㅋㅋ 나물을 집지 못했다니까... 물 가지러 가는데 의자에서 다리가 안 떨어져서 손으로 들어 옮김 ㅋㅋㅋㅋㅋ

배는 엄청 고픈데 밥도 반공기밖에 못먹음.... 식혜만 한 사발 드링킹...  이제 작업할 때 그냥 맹물이 아니라 뭔가 매실차나 식혜 같은거 들고 나가서 먹으면서 해야겠음 ㅋㅋ

 

다음에 내려갈 때 쯤이면 감자를 캐야 하지 않을까 싶음.. 그 때까지 블루베리 더 남아 있으면 좋을텐데 ....

아우 근데 상업적으로 단일작물 농사는 정말 어려운 일인 거 같음. 온 몸의 관절과 근육이 남아나지 않는 느낌....  (정신줄도 덩달아)

하루가 지났는데도 안 아픈데가 없다구 ㅜ.ㅜ 저녁에 돌아와 씻고 그냥 다이...

겨우 요 정도 도시 농부의 삶도 너무나 고달프다.... 

 

* 자연의 신비 추가

블루베리만 신기한게 아니라 수국도 신기한 식물임. 꽃이 처음에 약간 연두색에서 시작해서 아이보리 색으로 갔다가 이제 점차  진한 핑크로 진화.... 진화하는 포켓몬도 아니고 우째 이런 일이 있나 몰라..

심지어 작년에는 꽃이 하나도 안 피고 지나갔는데 올해 이렇게 탐스럽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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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부일기_20200527

hongsili님의 [도시농부일기_20200429] 에 관련된 글.

 

한 달에 한번 밭에 가는 게으른 농부...

게으르다기보다, 다른 일이 너무 바쁜 쓰리잡 농부의 삶...

자연과 함께 하는 한가로운 농부의 삶이란 없어.. 일이 너무 되서 자연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구 ㅜ.ㅜ

 

이번에는 화요일 저녁에 내려가서 1박하고 수욜 새벽부타 작업 시작...

하루종일 각기 다른 정체성으로 세  가지 종류의 회의를 마치고 기차 타고 내려가니 이미 그곳은 오밤중, 다행히 K 샘이 마중나와 주기는 하셨는데 숙소로 쓰는 별채 서재까지 가는 길, 다시 화장실이 있는 아랫집까지 내려가는 언덕길이 암흑천지인데다 풀이 너무도 무성하게 자라서 알던 길도 헷갈리고, 게다가 스맛폰 조명으로 비춰보니 대나무들이 무서운 기세로 자라나서 여기서 잘못 미끄러져 넘어지면 죽창에 찔려 사망각.... ㅡ.ㅡ

사실 하루종일 회의 돌아다니느라 끼니를 제대로 못챙겨 먹어서 기차에서 작은 떡 두조각 먹은게 다인데 이 오밤중에 어디 가서 밥을 얻어먹을 수도 없고, 동네 가게 문이 열린 것도 아니고... 주린 배를 움켜잡고 생수만 벌컥벌컥... 가방 안주머니에 사탕 한 봉지 찾았는데 sugar free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하늘도 무심하다

이 와중에 달빛 배경 삼아 온라인으로 자료분석 미팅을 하고 ㅋㅋㅋ 그대로 기절...

새벽 알람에 일어나보니 5시 반인데 벌써 세상이 환해서 깜놀...

아침도 못 먹고 일단 날이 더워지기 전에 서둘러 작업 시작...

지난 번 작업했던 두둑에 김매기 열심히 해주고, 멀칭이 더 필요한 부분 덮어주고 나서 허리펴니 아침 8시...

 

신기하게 감자꽃도 피고, 수세미, 브로콜리며 가지며..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음 ㅋ

정말 멀칭을 제대도 해준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차이가 어마무시하다는 것을 실감.. 멀칭만 잘 해주면 김매기 할 것이 거의 없음. 지난 냉해에 콩 파종한 것들이 다 얼어죽었나 했더니 이번에 가보니 절반 정도 싹을 티웠음.. 기특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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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댁에 가서 아침 얻어먹고, 읍내 장에 가서 또 모종 구입.. 파종을 한번 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조금씩 때를 달리하며 파종과 수확을 거의 연중 지속...

모종으로 샐러리, 겨자채, 적채, 미니단호박, 수박, 곰취, 홍당무 심고, 집에 있던 루꼴라 씨도 뿌림. 비싼 루꼴라 맘껏 먹어보고 싶은 마음... 샐러리도 벌써부터 볶음밥해먹을 생각에 흐뭇 ㅋㅋㅋㅋ

지난 겨울에 심어놓으셨다는 마늘과 양파도 일부 수확하고, 주말에 엄마한테 부추전 해달라고 부추도 잘라옴 ㅋㅋ

점심먹고 서둘러 올라왔는데 벌써 햇볕이 장난 아니라 힘도 들고, 땀이 정말 삐질삐질....

그런데 역시 한국인은 장비빨 ㅋㅋ 동네 뒷산을 가도 아웃도어웨어 풀장착을 하고 나서는 사람들 아닌가... 나도 농사 대비 모자와 3M 쿨토시, 3M 안전장갑, 장화를 준비 ㅋㅋㅋㅋㅋ 누가 보면 전문 농사꾼... 심지어 옷은 등산 다닐 때 입던 기능성웨어... 3M 이 정말 좋기는 하더라구 ㅋㅋ 손에 딱 맞고 그립감 좋고, 물기도 금방 마르고.. 토시도 진짜 쾌적함...  장화는 크록스 ㅋㅋ 패션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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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번에는 몇 가지 준비물을 더 챙겨야겠음. 계속 장비 욕심 ㅋㅋ 

일단 야간과 새벽작업을 위한 헤드랜턴 챙겨야 함, 작업 끝내고 샤워 후 갈아입고 올라올 여벌 옷, 얼음물 담을 수 있는 물병. 등산하려고 사모은 소소한 장비들을 이렇게 쓰고 있다 ㅋㅋㅋ 무릎보호대도 가져갈까???


다음번에는 작업량이 몹시 많을 것으로 예상... 일단 블루베리 수확을 사칭한 시식 ㅋ 마늘과 양파수확, 산에 있는 복숭아 싸주기, 그리고 역시 엔드리스 김매기...

그네 언니 말대로 바쁜 벌꿀은 쉴틈이 없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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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야기

# 대니얼 서스킨드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 기술 빅뱅이 뒤바꿀 일의 표준과 기회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 기술 빅뱅이 뒤바꿀 일의 표준과 기회
대니얼 서스킨드
와이즈베리, 2020

 

 

번역서 제목이 안티 아닌가... ㅡ.ㅡ
저자 자신도 "일은 한까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조금씩 줄어들 뿐"이라고 쓴 마당에

 

  • 기술적 실업 (technological unemployment) - 아마도 구조적 실업 중에서도 특별히 기술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상황을 지칭한 것일텐데, 이미 1930년 영국의 케인즈가 이 용어를 널리 퍼뜨리기 시작함. 근데 무려 이보다 100년 전 리카도가 1821년에 '기계장치에 대하여'라는 챕터에서 이 문제를 언급
  • 저자는 기술적 실업의 시대 특징으로, 기술 진보를 통해 모든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는 크게 해결할 것이지만 세 가지 문제, 1) 불평등, 2) 기술 대기업의 정치적 힘, 3) 삶의 목적이라는 문제를 제기할 것

 

  • 기술 진보를 통해 서로 다른 두 방향의 힘이 작동. 첫째 노동자를 대체하는 해로운 힘, 둘째 노동자를 보완하는 유익한 힘 (1 생산성 효과, 2 파이확대 효과, 3 파이 탈바꿈 효과) - 지금까지는 이 두 가지 힘의 싸움에서 후자가 대개 승리했고 언제나 인간 노동을 찾는 수요가 충분히 컸기에 이를 '노동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었음
  • 21세기 들어 숙련도별 고용율 변화를 보면 대개 고숙련과 저숙련이 늘어나고 중간 숙련 일자리가 줄어드는 현상 관찰 . 이를 양국화 혹은 공동화라고 부르고 ALM 가설 (Autor-Levy-Murname)로 설명가능. 그동안 사람들이 흔히 '일자리'에 집중했지만, 상향식으로 일자리보다 '업무' 단위로 쪼개 보면 기술에 의한 대체 '업무'가 보다 명확해짐. 대개는 교육이나 숙련 수준보다는  "틀에 박힌" 업무, 암묵적 지식보다는 '명시적' 지식에 의해 의존하는 업무들이 자동화되기 쉬움. 어떤 일자리든 단일 업무만 하는 직종은 없으며, 따라서 어떤 직종이나 일자리가 통째로 자동화된다기보다 이러한 '업무'들이 자동될 가능성
  • 그런데.... 인공지능에서 나타난 실용주의 혁명이 이러한 ALM 가설마저 무너뜨림.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는 자동화가 쉽지 않을 것이고, 그 예가 트럭 운전과 의료진단이었는데 지금 보면 가장 앞서나가는 분야 중 하나. 절차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인간지능을 굳이 모방하지 않아도 기계학습에 의해 얼마든지 업무 수행 가능. 따라서 현재 필요한 것은 기계가 모방하기 어려운 인간 능력이나 처리하기 힘든 업무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추세를 확인하는 것! 시간이 지날 수록 기계는 서서히, 끈질기게 발전에 인간 업무 영역으로 발을 넓힌 것이 분명. 이것이 '업무 잠식'인데 인간이 일에서 사용하는 세 가지 능력, 신체/인지/정서 능력 모두 기계의 압박

 

  • 하지만 이는 전세계에서 지역적으로 시차를 두고 발생. 그 이유는 1) 과제의 차이 (특정 산업 비중), 2) 비용 차이 (영국에서 지난 10년간 오히려 기계세차가 감소하고 손세차가 늘어난 것은 값싼 이민자 노동력 때문 ㅜㅜ. 상대비용), 3) 교제 및 문화의 차이
  • 마찰적 frictional 기술실업 -  일자리가 몽땅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맡은 일거리는 있는데 모든 노동자가 일감을 차지할 수 없는 상황. 그 이유는 1) 숙련 기술의 불일치, 2) 정체성의 불일치 (기술진보가 반드시 매력적인 일자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님. 신기술 때문에 제조업에서 밀려난 남성노동자들이 핑크칼라 일자리로 들어가지 않는 현상), 3) 장소의 불일치 (기술이 지역적 거리를 무위로 만들것 같지만, 예컨대 '거리의 종말, 평평한 세상'이라고 해도 현실은 다름. 러스트벨트 vs. 실리콘밸리)

 

  • 기술적 실업의 문제는 직접 실업률을 높이는 문제만이 아니라 일의 성격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음 1) 사람이 몰리면 임금 하락, 2) 일부 일자리에 질의 하락, 3) 일자리의 지위 하락
  • 구조적 기술 실업은 기술진보의 '보완하는 힘'의 약화 때문인데, 그 이유는 1) 생산성 효과가 사라져가고 있음 (노동자 생산성이 올라가면 가격 인하나 고품질로 소비자에게 전달되고 다른 분야에서 노동 수요가 높아지는데... 이제는 노동자 생산성이 올라가도 노동 수요 증가 일어나지 않음) 2) 파이는 분명히 커지겠지만, 그러한 상품 생산에 필요한 업무 수행에 인간이 유리하지 않음 (업무 잠식 효과), 3) 파이탈바꿈 효과가 소비와 고용 두 가지 측면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 ==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이 어떤 기계보다 나을 것이라는 '우월성 추정 superiority asusmption'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즉.. '노동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고 판단. 이제는 열등성 추정을 시작점으로 삼아야 할 상황.
  • 구조적 기술 실업 시대 불평등은 두 가지 자본, 전통자본과 인적 자본 모두에서 나타남. 인적자본과 전통자본 둘 다 없는 경우에 세상 암울해지는데 ㅜ.ㅜ  두 가지 모두 갈수록 불공평하게 분배됨 1) 권력을 이용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 (상위 1%, 0.1%의 독식) 2) 노동소득 분배율의 감소 == 결국 분배 문제가 핵심

 

  •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결국 큰 정부 big state. 큰 정부가 맡은 역할은 생산이 아니라 분배. 현재의 사회보장 제도나 소득 부양 정책들은 모두 고용이 일상이고 실업은 어쩌다 나타나는 예외라는 전제에 따라 설계되었지만, 이제 일이 줄어든 세상에서는 고용이 일상이지도, 실업이 예외인 것도 아님 ㅜ.ㅜ  큰 정부는 1) 가치있는 자산과 소득을 유지하는 사람에게 세금을 크게 매기고 (노동자, 전통자본, 대기업), 2) 그렇게 모은 돈을 자산과 소득이 없는 사람과 나누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함. 필자는 보편적 기본소득보다는 조건부 기본 소득 주장
  • 1796년 토머스 페인이 기본소득 처음 주장하고 그동안 각기 다른 이름으로 이 개념이 회자됨. 지역 배당금, 보편수당, 시민소득, 시민급여, 정부상여금, 국민보조금 등등.. 그런데 기본소득의 '기본'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란 (즉, 기본소득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인간다운 삶이냐, 최저 보장이냐)과 더불어 보편성에 해당하는 구성원에 대한 정의가 필요함 == 글쎄올시다??? 생산 영역에서 공공성을 확보하는 전략이 같이 가야 할 것 같은디??? 그래서 저자는 정부가 '전통 자본의 분배'를 해야 한다고 주장. 자본은 그대로 둔 채 소득만 분배하고 인적 자본만 폭넓게 분배한다면 경제불균형은 해결될 수 없음.
  • 또한 정부는 노동을 지원해야 함. 왜냐하면 일에는 경제와 상관없는 목적이 존재하기 때문에..
  • 기술 대기업 문제도 심각하게 여겨야 함. 그들의 문제는 과거처럼 독과점 같은 '경제'이슈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대개 경제적 측면과 관련 없는 문제들이 심각하게 대두함. 구글의 알고리즘이나 페이스북의 데이터 거래 등등은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상황. 그런데 현재는 신기술을 어떻게 어디에 이용할지를 이런 기술 대기업들에게 맡겨놓고 있음 ㅜ.ㅜ 이들의 정치적 힘을 감독할 수 있는 기관, 소비자가 아닌 시민을 보호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함. 물론 정부라고 다 선은 아님. 중국의 기술 국유화가 가져온 끔찍한 감시사회를 떠올려보면...

 

  • 인간은 왜 일에 의미를 부여할까...  싫의 의미와 일의 관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님. 고대에는 일을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으로 보기도 했고, 구약성서에서 일은 인간에 내려진 징벌. 반면 프로이트와 베버는 삶의 의미와 연관성을 찬양했지만 산업혁명 시대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참함을 안겨주었음 "가끔은 이런 의심이 든다. 일이 줄어든 세상을 두려워하는 글을 쓰는 학자들과 평론가들이 사실은 자기가 일에서 얻는 즐거움을 다른 사람의 경험에 잘못 투사하는 것은 아닐까?" ㅋㅋㅋ 나도 항상 이런 우려를 하기는 하지만, 일 자체를 잘 해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부정할 수 없음.
  • 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아편'. 마약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목적의식이 솟구치게 하지만, 동시에 일에 취해 갈피를 못잡게 함으로써 주의를 흩뜨려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만들기도 함. 일이 마음속에 워낙 깊숙이 뿌리내린 탓에, 일에 몹시 의존하는 탓에 일이 줄어든 세상이 다가오리라는 생각을 흔히들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실제로 생각하더라도 중요한 내용을 전혀 표현하지 못함. 일의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분명한 것은 일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 더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한나 아렌트 말처럼 우리는 "노동이라는 족쇄에서 이제 막 벗어나려는 노동자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 이 사회는 이런 자유를 얻어낼만큼 값진 더 고귀하고 의미있는 활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케인즈 걱정대로 "어떤 나라도, 어떤 사람도 여가의 시대와 풍요의 시대를 두려움 없이 기쁜 마음으로 기대할 능력이 없다. 우리가 즐기기보다 죽어라 애쓰도록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 여가가 끔찍한 선물이 되지 않으려면 1) 교육 재검토하기, 2) 여가 형식 결정하기, 3) 다시 '일'에 대해 생각해보기 - 유급 노동이 줄어든 세상이라 해도 일이 아예 없는 세상은 아니기에
  • 그동안 경제적 목표에 집중했기에 파이가 얼마나 커질지를 알고자 현대의 기술자인 경제학자들에게 의지해왔지만, 일이 줄어든 세상에서는 근본적 목표를 다시 검토해야 함. 풀어야 할 문제는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잘 사느냐'이며, 의미 있는 삶은 사는 것이 어떤 뜻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함

 

디지털시대 일자리의 퇴조와 관련하여 매우 차분하고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시함. [노동의 종말]에 비해 훨씬 최근에 쓰인 책이라 현재의 상황에 훨씬 더 부합하기도 하고..   가독성도 좋아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림...  (사실 내가 이거 읽고 있을때가 아니었는데 말야.. ㅜ.ㅜ)

그런데, 뭔가 대안 쪽으로 오면 갑분싸.... 법인세 높이고 전통자본에 세금 높이는 것 다 동의하는데, 이걸 대안이라고 제시하면... 여기에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건 이미 디지털경제로의 전환 이전에도 이야기해왔으나 노-자간 역관계 때문에 안 되고 있던 건데.. 다시 공자님 말씀 들먹이면 뭐하나 싶은 생각이....

어쨌든 생산의 재배열과 국가의 적극적 분배 개입, 기업 통제를 종합해보자면  '공공성'이라는 언어로 개념화하지 않았지만 결국 '민주적 공공성'으로 수렴될 수 있을 것 같음.

참, 눈에 띄는 잡상식 ㅋ '틈새의 신  god of the gaps'이라는 표현 너무 적절 ㅋㅋ 종교지도자들이 현대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신으로 정의한다는 의미 ㅋㅋ

 

# 조정진 [임계장 이야기]

임계장 이야기 -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임계장 이야기 -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조정진
후마니타스, 2020

 

아빠가 건물 경비일을 했던 사람으로서, 순수한 독자의 마음만으로 읽을 수는 없었지.. ㅡ.ㅡ

일단 사회 구조고 뭐고.... 사람들이 참 못됐다는 생각!!!
스스로 응분의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비대한 자아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다른 사람에 대한 멸시를 통해서 나의 상대적 지위를 구축하려는 이들의 생생한 사연에 진정 환멸.....
마침 부산에서 노숙인, 이주민 단체 활동가들과 인터뷰를 하고 온 다음날이라, 인류에 대한 환멸이 한층 더 심했던 듯..  아오 정말 미친 새끼들... 욕도 아까움..

  • 나이 들면 온화한 눈빛으로 살아고 싶었는데 백발이 되어서도 핏발 선 눈으로 거친 생계를 이어가게 될 줄은 몰랐다.
  • 그들은 걸핏하면 나에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산재를 입은 직원을 치료해주는 것은 그들이 알아야 하는 세상 물정이었다. 그들은 세상 물정이라는 말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만들어버렸다.
  • 사실 경비원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중 반가운 것은 빗방울 뿐이다. 눈이며 꽃잎이며 낙엽이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들은 모두 다 쓰레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다움을 잃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 입사 첫날, 나는 별 생각없이 미세먼지 마스크를 지급해달라고 요청했다. 직원이 멀뚱히 나를 쳐다보더니 돌아섰다. 등 뒤로 혼잣말이 들렸다. "염병.. 다 늙은 경비가 얼마나 오래 살고 싶어서..."
  •  추위를 견디다 못한 경비원들이 파카를 지급해달라고 좀 더 높은 사람에게 건의해봤다.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 "노인도 추위를 탑니까?"
  • 주치의는 나의 노동이 과로를 넘어 자해 행위였다며 나무랐다. 몸이 힘들면 자각 증상이 있게 마련이고 바로 대처를 해야 하는데 나는 그 반대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나와 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한 것 뿐이었다. 자해가 아니라 살기 위한 자구노력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 젊은이들이 견뎌 내지 못하는 일과 기피하는 일은 고령자의 차지가 된다. 젊은이가 못 견디는 일을 노인들은 견대내기 때문이다. 견딜 만해서가 아니다. 견디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 나도 젊을 때 같으면 이런 일을 견디지 못했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은 지금은 견뎌낸다. 육체적 고단함도, 정신적 학대도 나이를 먹으니 견딜 수 있게 됐다. 나이에는 그런 힘이 있다. 나이가 들면 견뎌야 하는 일이 늘어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고령자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더 주신 걸까. 그러나 견뎌야 할 것들은 참 많았다.
  • 그때는 나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노동을 하는 줄알았고 그래서 삶이 더욱 고단했다. 그러나 이 책의 편집자를 만난 후 그런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그 책에서 생명이 위협받는 엄혹한 여건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만났다. 힘들다고 생각했던 나의 노동은 한낱 응석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부끄러웠다. 나보다 훨씬 힘들고 비참한 노동환경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일하는 이들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내 도동의 강도화 환경은 그대로지만 이런 깨달음 덕분에 이제는 덜 힘들다. 이 점이 더욱 감사하다.
  • 가족에게 부탁이 있다. 이 글은 이땅의 늙은 어머니 아버지들, 수많은 임계장들의 이야기를 나의 노동 일지로 대신 전해보고자 쓴 것이니 책을 읽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마음 아파하지 말기 바란다.


이제는 내가 빠져나온 (최소한 학력자본과 사회자본 측면에서) 그곳을 다시금 돌아보며,
겨우 빠져나왔다는 안도감과 아직 그곳에 남아 있는 나의 부모, 이웃들에 대한 연민, 사명감, 그리고 인간에 대한 환멸, 인생은 고해라는 현타 때문에 세상 하직하고 싶은 마음까지....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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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찜찜한 책

# 조너선 하이트, 그레그 루키아노프 [나쁜 교육] (2019)

 

나쁜 교육 - 덜 너그러운 세대와 편협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나쁜 교육 - 덜 너그러운 세대와 편협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조너선 하이트.그레그 루키아노프
프시케의숲, 2019

 

아..... 진짜 애~~~매 한 책...

미시적인 부분에서 많은 내용에 동의하는데, 왜 굳이 우익의 혐오와 차별 행동에 대한 비판보다 그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소위) 진보주의자, 좌파에 대한 비판에 이토록 많은 에너지를 쏟는지 좀 이해하기 어려움. 대학이 진보주의자 일색으로 기울어져서 사상의 다양성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는 걸 보면 과연 글쎄올시다...  한국 대학, 특히 교수진의 보수성이야 그렇다치고 미국도 우파 씽크탱크가 그렇게 차고 넘치고 시카고학파 같은 우파의 이데올로그가 그토록 강고한데 이건 너무 과도한 걱정 아닌가 말여? 파편화된 정체성 정치나 극단적(?) '정치적 올바름' 에 비판적인 것도 사실 아슬아슬....  예컨대 정체성의 정치가 보편적 인간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black lives matter 에 all lives matter 로 물타기하는 세력, 페미니즘이 아니라 보편적 휴머니즘이어야 한다며 물타기하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기에 영 찜찜할 수밖에 없음 ㅜ.ㅜ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주장을 하는 방식, 그것의 정치적, 이성적 동기보다는 '심리적/정서적 반응'에만 너무 치중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학생들이 예민하거나 피해자주의에 물들어서라기보다, 분명히 개소리하는 인간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과거라면 넘어갔을 문제들도 오늘의 높아진 인권감수성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 많아졌기에 문제제기가 늘어나는 것도 당연할진데 말이지... 

당장 한국의 상황만 봐도, 학교에서의 성차별 발언, 성추행, 심지어 성폭력 사건들이 과연 요즘 아이들이 예민해서 문제 삼는 건가? 우리 때도 그게 뭔가 불편하고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아무개 선생 '변태'다 피해야 한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그걸 설명할 안어가 없었을 뿐.... 요즘 페미니스트들이 문제 삼는 소위 '한남 문학'도  이미 예전부터 이건 좀 아닌데, 여자가 무슨 남성 주인공  돋보이게 만드는 도구야, 맨날 겁탈이나 당하고...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공포의 외인구단을 비롯하여 이현세 만화에 질색팔색했던 것이나, 일제강점기 남성 지식인 자의식 과잉 소설에 갸우뚱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다만 이걸 문제로 개념화하지 못했던 거지...   마치 예전에는 다 너그럽게 받아들였는데 요즘 애들이 예민하고 까탈스러워서 이런다고 본다면 진정한 지적 게으름이거나 너무 꽃길같은 안온한 인생을 살아오신 분들...


그럼에도 미시적인 부분에서는 동의하는 바가 적지 않았고, 나도 '안전주의' 문화에 대한 우려가 있기에 몹시 흥미롭게 읽기는 했음...  사실 이런 책은 혼자 읽을 게 아니라 술 마시고 같이 까대면서 읽어야 하는데 ㅋㅋ 아쉽네 그랴.. 예전에 스티븐 핑커 책 보면서도 같이 까댈 사람을 찾지 못해 한동안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며 주변 사람들보고 제발 읽고 나의 이 불편한 마음을 같이 나누어보자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함 ㅋㅋ  

 

책의 내용을 좀 정리해보자면...
 
*

미국사회에 두루 퍼져나간 '대단한 비진실 great untruth'을 크게 세가지로 정리.

1) 유약함의 비진실: 죽지 않을만큼 고된 일은 우리를 더 약해지게 한다
2) 감정적 추론의 비진실: 늘 너의 느낌을 믿어라,
3) '우리 대 그들'의 비진실: 삶은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다. -

이들은 여러 비진실 명제들 중에서도 고대(?)의 지혜와 모순되고, 현대 심리학 연구결과와 모순되며, 이 명제들을 끌어안는 개인이나 공동체에 해를 입한다는 점에서 '대단한 비진실'로 명명됨. 근데 바로 여기부터 살짝 고개를 갸우뚱... 고대의 문헌이라고 다 진실만 담고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고통과 도전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자원이나 레질리언스가 갖춰졌을 때나 성장에 도움이 되지 마냥 좋은 것도 아니잖여. 건강불평등 업계에서 allostatic load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도 20년이 넘었는디.... 심지어 고통을 겪어야 강해진다, 요즘애들 고생 안해서 물러빠졌다는 지적은 자칫 "나 때는 보리밭에서 일하다 애만 쑥 잘 나았다고.. 내가 군대 있을 때는 말이야..." 이런 '라떼' 꼰대가 되기 십상 ㅡ.ㅡ  
하지만 두번째 '느낌'에 대한 신봉 (한국에서는 KIBUN ㅋㅋㅋ)이나 선/악 구도로 사람 전체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서는 십분 동의!

 

*

이 책, 그리고 책의 모티브가 된 아틀란틱 칼럼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대학들의 연사 초청과 관련한 폭력(?)사태와 교과 과정에서의 '트리거워닝' 요구 점증 때문... 


우익적 선동을 일삼는 논객들의 교내 초청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집회가 간혹 폭력사태로 진화하는 것에 대해, 저자들은 공론의 장에서 논박하는게 바람직하지 아예 물리적으로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 (대학은 무엇보다 '제도화된 부당성 증명'의 공간이 아니던가!).. 그런데 1991년 정원식 계란투척 사건으로 희대의 패륜 세대라고 싸잡아 욕을 먹었던 90년대 대학생 세대의 일원으로서 한 마디 보태보자면, 당시 전교조 탄압을 비롯한 문제적 인물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행동에 대해 공론의 장에서 토론하고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었음. 겨우 계란이나 던진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저항과 의사표현의 방법이었는데,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르고 민주화 운동을 억압해온 정권이 학생들을 패륜 운운하며 이 사건을 부각시킨 것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어이 상실.. ㅡ.ㅡ


단, 이 책의 저자들이 이러한 학생들의 행동에 우려를 표명한 것은 좀 다른 이유 때문임. 학생들의 반대행위가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저항이나 실천이라기보다, 이것이 학생들의 '감정을 격발'시키거나 '안전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반대에 나서는 것이라는 점에 우려....  이러한 비판에는 나도 완전히 수긍함...  학생들이 교정 안에서 안전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타당한 규범이지만, 미성년자도 아닌 대학생들이 그토록 '정서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인지는 진정으로 모르겠음...  책에 소개된 사례들을 보면 좀 후덜덜한 것이, 유혈낭자하고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혐오와 차별이 그득한 고전문학을 배우거나 법학과에서 성폭력 사례를 포함한 판례를 공부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현하고 트리거워닝을 요구하거나 리딩리스트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하고, 논쟁적 연사들의 발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를 입을 수있기 때문에 안전공간을 마련하는 것 등은 매우 황당.... 뭔 다들 손대면 톡 하고 터지는 봉선화들인가 ㅡ.ㅡ  (아마도 압권은 영국 초등학교에서 눈싸움의 위험성을 막기 위해 눈 만지기를 금지시킨 거 ㅋㅋㅋ)  

이렇게 보호받다가 사회로 나가면 어찌 되는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학 공간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대비를 하고 멧집을 키워서 사회에 진출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 사실 SNS 상에도 다큐멘터리나 영화에 대해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트리거 있으니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공유하는 것을 보았는데, 트라우마는 회피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여 ㅜ.ㅜ 그리고 현실 사회에서 언제까지 회피할 수 있남...  


안전주의는 다소 위험한 개념이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함. 제일 안전하려면 사실 아무것도 안 하면 됨 ㅡ.ㅡ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악순환의 고리...

 

*

미세공격(microaggression)이란 개념도 소개함. '매일의 일상에서 짧은 시간에 다반사로 일어나는 언어적, 행동적, 환경적 차원의 멸시.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간에 유색인종을 상대로 적의, 경멸감, 혹은 부정적 뉘앙스의 인종적 혐하와 모욕을 전달하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저자들은 이러한 개념이 지나치게 대중화하고 오만군데 적용되고 있다는데 문제의식. 그런데 사실 이것도 애매~한 것이... 실제로 노골적이지 않은 암묵적이고 일상화된 차별이 인간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라, 타인의 행동/발언 하나하나를 맥락으로부터 거세시키고 과잉해석하여 미세공격이라 비판하는 것도 과도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모두 예민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점. 한국사회에서 일상화된 온갖 차별적 발언들, 심지어 자기 딴에는 선의에서 내뱉었지만 편견 가득 담긴 발언에 짜증이 두 배로 났던 경험들은 다 있지 않나...

 

그런데 또 책에 소개된 사례들을 보면 심하다 싶기는 함 ㅋ 소수자 학생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누가 봐도) 선의에서 비롯된 발언들마저 미세공격으로 과잉 해석하고 소셜미디어 상에 앞뒤 맥락 없이 공개해서 (일명 '가해자 지목 문화') 더 나은 해결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해버리는 사례는 너무 익숙함. 여기에 일종의 피해자의식 문화가 결합하는데, 이는 독립성과 회복탄력성이 아니라 "나약함을 신성시하는 분위기"를 가지며 세 가지 특징이 있음. 첫째 개인이나 집단은 사람들이 범하는 무례에 대해 고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둘째, 제3자에게 항의하는 식으로 갈등을 해결하려 하는 경향을 보인다, 셋째, 도움받을 자격이 있는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애쓴다... 이 세 가지는 당장 몇 개의 구체적 사례가 떠오를만큼 최근 몇 년간 사회단체들에서 극심한 갈등으로 비화되고, 문제제기한 당사자를 포함하여 소모적 상처만 입고 끝나는 (아니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를 여럿 보았음. 심지어 대학원생 커뮤니티에서도 종종 목격. 왜들 그렇게 자신을 가장 취약한 약자이자 피해자로 포지셔닝하는지 가끔 어리둥절해질 때도 있음. 학생 때, 전공의 때 문제제기해서 해결했던 경험을 들려주며 한번 맞붙어보면 어떻겠냐고 하면, 극심한 권력 불평등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며 마치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할말은 하는 사람으로 간주하는데 ㅋㅋㅋㅋ 여보시오들.. 나라고 갓 스무살 때 나이많은 남자 선배들, 전공의 때 교수들이 오냐오냐  내 이야기 잘 들어주어서 그런 거 아니라오 ㅋㅋㅋㅋ
하여간... 저자들의 비판에 동의하는 부분이 적잖으면서도 시종일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는 세대 후려치기, 리버럴 후려치기에 불안불안...  

 

*

그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저자들의 원인진단은...

  • 정치적 양득화와 정당 간 적개심의 심화 - 근데 이것도 한국이랑 좀 비슷한게, 계급적/사회경제적 이슈보다는 이념적, 규범적 이슈를 둘러싼 양극화라는 점에서 계급전쟁보다 '문화전쟁'에 가까운 것으로 보임, 미국 민주당이 뭐 그렇게 진보적이라고 ㅋㅋ
  • 십대의 불안증과 우울증 수준 증가 - 대학이 문제라기보다 이미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진단 일명 i 세대가 '소셜 미디어의 거대한 사회적, 상업적 실험 속에 푹 담긴 채 인격 형성에 중요한 십대 시절을 보냈던 첫번째 세대'라는 점이 단서 이들은 어른의 감시 없이 보낸 시간과 오프라인 생활 경험이 과거의 그 어느 세대보다 적었던 시대라는 진단...  븍히 여자 아이들이 이러한 상황에 취약하며 우울증도 남자아이들에 비해 급증, 어느 정도냐 하면 불안증으로 고충을 겪는다는 학생이 2016년이 되면 51%  한국도 과연 이럴까?
  • 양육 방식의 변화 - K 스타일의 입시교육 몰빵.. 특히 미국 중산층 엘리트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고, 그러니 미국의 명문대 입학생들에게 이런 문제가 불거지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는
  • 자유놀이의 감소 - "사회적 상호작용이 성글어지면 이 세상은 더 많은 갈등과 폭력에 물드는 곳이 될 것이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보다 다른 누군가의 강압에 의지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가장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될 것이다" - 이 부분은 세넷이 '무질서의 효용'에서 극도로 강조했던 부분으로, 한국에서도 적용된다고 생각
  • 캠퍼스 관료주의의 성장 - "대학생들이 극단적 좌파 성향이거나 정치적 이념 때문이 아니라 학생을 소비자로 대하는 시장지향적 결정을 내리고, 학생들을 1년에 6만 달러 거금을 지불하고 수업과 각종 진미, 안락한 편의시설과 신나는 학교 생활을 즐기는 고격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지적에 동의하고, 결국 이 관료주의라는 것은 책임회피의 정치...
  • 정의에 대한 고조된 열정 - 글쎄올시다?? 이건 마치 한국 학생운동의 이념과잉과 비슷한 것 아닐까 싶은디...

 

*


자, 그럼 저자들의 대안은 무엇인가...
바람이 불어오면 꺼지는 촛불이 아니라, 더 거세게 타오르는 횃불이 되도록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에는 깊이 공감...
허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상처받지 않기를 선택하라. 그러면 상처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상처받았다고 느끼지 말라. 그러면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ㅋㅋㅋㅋ 뭐래, 원효대사 해골물이냐...

저자들은 1) 자기 힘으로 할 수있게 준비시킨다, 2) 감정적 추론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준다, 3) '우리 대 그들'을 넘어 사고하도록 가르친다, 4) 학교가 변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같은 양육 방법을 안내하면서, 자신들의 전공답게 인지행동치료가 도움이 될 것으로 소개.


인지행동치료에서 말하는 왜곡된 자동사고 유형이란.. 1) 마음 읽기 2) 미래 점치기, 3) 재앙화, 4) 딱지 붙이기, 5) 긍정적인 면 깎아내리기, 6) 부정적 필터링, 7) 과도한 일반화, 8) 이분법적 사고, 9) 당위적 사고, 10) 자책, 11) 남 탓하기, 12) 불공평한 비교, 13) 후회 지향, 14_) 상황 가정, 15)  감정적 추론: 감정이 현실 해석을 이끌도록 내맡기는 것, 16) 부당성 증명을 못 받아들임, 17) 판단 위주 사고


내 주변에도 이런 종류의 인지왜곡 대장들 몇 명 있고, 트위터 세상에는 한 백만 명 있는 것 갈음 ㅋㅋ   이것이 과연 사회적 수준의 대응으로 적합할지는 의문이지만, 이들이 이러한 인지왜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사람들의 정신 건강이 매우 개선될 것임은 분명해 보임 ㅋ

아우.. 누구 이 책좀 읽고 나랑 이야기 좀 합시다 캠페인하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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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부일기_20200429

hongsili님의 [도시농부일기_20200322] 에 관련된 글.

 

새벽같이 용산역 앞에서 K 선생님의 차를 얻어타고 임실고고...  오늘의 일꾼 날총님도 함께...

중간에 안성 휴게소 들러 김밥, 라면, 소떡소떡과 커피로 서둘러 (하지만 배터지게) 아침을 떼우고, 임실 들어가 읍내 장에 가서 모종 무려 4만 5천원어치 구입!!!

모종으로 나와 있는 식물들의 종류에 깜놀.... 세상에 정말 많은 종류의 채소들이 있구나.

텃밭하시는 분들이 상추나 치커리, 겨자채 같은 잎채소들을 많이 키우지만 경험에 의하면 저거 부지런히 따먹는 것도 일 ㅋㅋㅋㅋ 이미 나는 김체리님 텃밭에 방치된 상추가 서서히 나무로 변태하는 모습을 목격한 일도 있다 ㅋㅋㅋㅋ 별하고 방울 몇 개만 걸면 크리스마스 트리로 써도 되겠더라구 ㅋㅋ

그래서 우리는 좀 시간이 걸리고, 비교적 보관이 용이한 작물에 초점...

 

하지만..  맘대로 골라보라는 K 선생님의 제안과 달리 아는 작물이 많지가 않아서..   나의 야심작물 수세미를 일단 픽하고, 역시 애정하는 야채들인 브로콜리, 아스파라거스, 노란색 파프리카를 고름.  샘이 여기에 아삭이고추, 가지, 피망, 흑토마토, 대추토마토, 완숙토마토를 보태주심. 얼룩강낭콩, 일명 호랑이콩도 사고 싶었으나 다행히 집에 종자가 있다고 하셔서, 푸짐한 꾸러미 들고 귀환. 심바와 코랭이가 오랫만에 봤는데도 반겨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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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아뿔싸!!!!!! 돌아와서 모종 분류하려고 보니 뭐가 뭔지 모르겠어 ㅋㅋㅋ 오로지 구분 가는 것은 잎이 익숙한 수세미, 단가가 비싸서  한 주씩 담아준 흑토마토, 코스모스처럼 생겨 기억에 남았던 아스파라거스 뿐!!!   각종 추론과 토론을 거듭하여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름표를 붙여놓았다가 나중에 열매 열리면 그 때 정정하자고 결정했는데, 아니 열매가 열리면 이름표가 굳이 필요없잖아.. 이게 무슨 짓이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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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잠깐 꽃샘추위가 심하게 왔었는데, 밭에 나가보니 그것 때문에 얼어 죽은 작물이 상당히 많았음. 각종 강낭콩과 완두콩들이 너무 시들시들하던데 과연 살아날지 모르겠음 ㅜ.ㅜ  본격 농사꾼인 이웃께서 잠깐 우리밭에 구경오셨는데, 거기는 냉해 때문에 아예 파종을 새로 하셨다고 함... 상업작물 하시는 분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겠더라구... 

 

일단 멀칭 용으로 심어둔 호밀이 이제는 정말 많이 자라서 그걸 베어 재료 준비. 이미 이삭이 패인 것도 있어서 이걸 그냥 멀칭용으로 쓴다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호밀 정미소가 국내에 밀양 한군데 밖에 없어서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 양을 거기까지 가져갈 수도 없다고... ㅜ.ㅜ 원래 멀칭 용도로 심은 것이니 일단 베기는 베는데.. 아우 아까워...  나랑 날총이랑은 바닥에 떨어진 호밀대 하나도 다 주워서  두둑에 올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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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감자 김매기 작업...  다행히 중간에 샘이 감자 이랑을 다 덮어두셨던 덕에... 멀칭을 치우고 보니 새싹들이 거의 대부분 살아있었음... 어찌나 반갑던지... 여섯 이랑이나 되는 감자밭에서 꼼꼼하게 김매기하고 싹 올라온 이외 부분 덮어주는 작업 수행....  은근히 잡초들도 뿌리 힘이 세고, 흙도 단단하게 뭉쳐 있는 부분이 많아 모종삽과 호미로 작업하는데 손목과 팔꿈치 무리데쓰...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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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나서 정말 대화 한마디 없이 계속 비어 있는 두둑에 퇴비주고 다듬어서 모종 심고, 멀칭하고....

중간중간 두더지굴, 지렁이, 벌레 만나서 단말마의 비명 지르고...

동네 닭은 왜 그리 수시로 우는지 깜딱깜딱 놀램...  닭은 아침에만 우는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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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종 다 하고 점심 먹으려 했는데, 워낙 오전에 늦게 일을 시작하다보니 두 시가 넘어도 작업도 많이 남은데다 배가 너무 고파 일을 할 수가 없음...   이번에도 산들미향에 가서 제육볶음이랑 된장찌개...  천하일미....

 

밥먹고 돌아와 정말 1분도 쉬지 않고 다시 작업.. 서울 가는 기차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그 전에 오늘의 작업을 마쳐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지!!

근데 가만히 보니까 날총 너무 일못함 ㅋㅋㅋㅋ 못한다기보다, 너무 꼼꼼하게 작업을 해서 내가 세 이랑을 할 동안 하나도 제대로 못함. 아니 무슨 상감청자 만드냐고.. 왜 그렇게 조심조심 꼼꼼하게 하는 것이여..... 이것은 마치 시험 전날 교과서 구석구석까지 꼼꼼하게 읽으며 공부하다 결국 시험진도의 반도 다 보지 못하고 시험장에 들어오는 인간의 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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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다섯시 무렵까지 모든 작업을 마치고 시원하게 밭에 물을 다 뿌리고 걸어서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보니 정말 일당 알바처럼 일하고 왔음. 새벽차 타고 도착해서 한 시도 쉬지 않고 일하고 밥먹고 다시 일하고, 바로 귀환 코스 ㅋㅋㅋ 원래 생각한 안빈낙도의 삶이란 이런게 아니었는데 ㅋㅋ 나중에는 손에 힘이 빠져서 김매다 모종삽을 놓치기까지 했다니까 ㅋㅋ 다리도 후들후들...

돌아오는 기차에서도 미친 듯이 잘  것 같았지만 팔이 계속 욱신거려 한 숨도 못잤음...

다음에는 꼭 저녁 때 미리 내려가서 한숨 돌린 다음 아침 일찍 농작업 하고 쉬엄쉬엄 하며 돌아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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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우리 밭 옆에 돼지 키우는 농가가 있는데, 오가는 길에 돼지들과 자꾸 눈이 마주침.

애들이 정말 깨끗하고 볼때마다 톱밥도 청결해보이는 걸 보니 정성들여 키우시는 건 알겠는데, 돼지들이 너무 똘똘하고 사람 지나가면 이쪽으로 다가와 친근함을 내보여서 마음이 ㅜ.ㅜ 

얼마전에 이주노동자 지원단체 활동가 분 이야기 들어보니 돼지가 정말 영리하고 사람을 잘 따라서, 돼지 축사 이주노동자들한테는 고용주들도 비교적 대우를 잘 해준다고 함..   손이 바뀌면 돼지들이 스트레스 받기 때문에.... ㅜ.ㅜ

그렇게 영리하고 사회성 좋은 아이들인데... 좁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사육당하는게... 막상 눈으로 보면 많이 괴로움. 심지어 밥 때가 되면 엄청난 울음소리들이 울려퍼짐. 좁은 공간에서 서로 밀치며 순서를 다투느라 벌어지는 일.... 저런 대접을 받을 존재들이 아니잖아... ㅜ.ㅜ 

하지만 점심 제육볶음은 너무 맛있었고, 정말 뭐랄까.... 인간은 존재 자체로 다른 생명체들에게 민폐... ㅡ.ㅡ

 

사실 율도국에서 소돼지는 키우지 말자고 내가 제안한 적 있음. 그걸 누가 잡냐고.... ㅜ.ㅜ

근데  날총이 굳이 자기가 할 수 있다고, 고기 먹고 싶다고 했었는데 오늘 좀 수그러진 것 같음... 직접 마주해보니, 안 되겠다고 ㅡ.ㅡ

밸로시랩터의 후손이자 눈이 마주쳐도 우리 마음이 덜 괴로운 닭까지는 수용가능한 것으로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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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

실컷 다 써놓고 글을 날려버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ㅡ.ㅡ

뭘 잘못 눌렀길래... 하여간 다시...

 

#1. 투표율

 

코로나유행 때문에 선거가 제대로 될 수는 있을까, 투표율이 바닥이면 어쩌나 은근 걱정했는데 다들 그런 걱정을 한 것인지 오히려 예년보다 투표율이 더 높았다.  도통 바깥 나들이를 하기 어렵다보니, 나라가 허용해준 기회에 모처럼 나들이해보자는 심사였는지도 모르겠으나, 나도 사전투표하러 갔다가 사람 너무 많아서 깜놀 ㅡ.ㅡ  마감 시간 다가와서 투표 못할까봐 전전긍긍하기까지...

'적당히'를 모르는 민족의 근성이 여기서도 발휘된 것인가...

어떤 정당을 지지하든간에, 도저히 저꼴은 못봐주겠다, 이건 막아야한다는 절박함을 각자 품었던 게 주요 이유가 아니었을까.  내가 투표 안하면 저놈들이 이긴다, 그건 눈뜨고 볼 수 없다... 이런 마음?

이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이나 민주당후보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되도 않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파렴치한 행동을 정당화하고, 쇠파이프 움켜쥐고 민주주의 투사인양 목에 핏대를 세우는 나경원의 모습을 더이상, 네버 앤 에버, 보고 싶지 않았다. 이건 뭐 이념이나 개별 정책에 대한 동의/부동의 같은 품격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2. 위성정당과 민주당, 진보정당

 

내 블로그는 소중하니까, 여기에 쌍욕을 쓰지는 않겠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아무짓이나 해도 되고, 그래서 했고,  심지어 그랬더니 실제 원하는 결과를 달성하기까지 했다. 민주주의 역사에 참으로 아름다운 교훈을 남겨주셨다. 쟤네들이 하는데 우리는 그럼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거냐고 항변하는데,  이거야말로 정의당을 비롯한 소위 '우군' 시민사회를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 이야기 아니고 뭐겠나. 너네한테 사정하고 달래가면서, 듣기싫은 욕먹어가면서 같이 가고 싶지는 않아, 그런 노력 따위 하고 싶지 않다구. 따라올테면 따라와... 요런 마음?

그런데 이게 어떤 개인의 '마음'이라면야 뭐 어쩔 도리가 있겠나,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보호받아야지. 그런데 집권여당이 이런 정치적 스탠스를 보인다면, 이게 도대체 의회 민주주의인가??? 또라이에는 또라이로 맞서는 바닥으로의 경쟁이라니.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코어팬덤 전사들의 결기야 내가 공감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으나, 이런 방식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사후 승인하는데 가담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들의 불편한 마음에는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87년 이후 유구한 '비판적 지지론'에서 이제는 '비판적' 마저 떼어버리고, 심지어 심상정, 이정미 의원 지역구에마저 떡하니 공천을 해대는 패권주의에 이제 넌더리가 난다. 수구보수 일파보다 우리 민주당 앞길에서 딴지 걸었던 정의당이 더 밉다고 온라인에서 떠드는 이들을 보면, 과연 어떤 대목에서 딴지를, 그리고 왜 걸었는지 확인 좀 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합리적 대화는 어차피 불가능.

 

물론 정의당에 대한 심경도 복잡하다. NL 그룹이 대중적 진보정당을 '본사'의 지령을 받는 허수아비로 만들어가는 꼴 보기 싥어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거쳐 가만히 있다보니 노동당원 되었다가, 여기도 또다른 본사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기도 안 찬 사실에 탄복하여 탈당한 이래 아직까지 당적이 없다. 정의당으로 표상되는 진보정당 존재의 정당성을 강력히 지지하면서도, 여전히 당원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 해결되지 않은 그 무엇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정의당보다 더 처참한 것은 녹색당이다. 그나마 정의당은 원칙을 지킨다는 명분이라도 남았지만, 대체 녹색당은 왜 그런 악수를.. ㅜ.ㅜ  쉽지는 않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후일이라도 도모할 수 있는 것 같다.

 

#3. 자기효능감 대잔치

 

선거 다음날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의 '야인'으로 돌아가겠다는 인터뷰를 보고 나도 모르게 방언이 터졌다. 왜, 기왕이면 트렌치코트 입고 성냥개비라도 물고 인터뷰하지... 자기효능감이 아주 만랩이로구나.

다들 킹 메이커 놀이. 정치 막후/배후 조정 놀이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조심성이라고는 개나 줘버린 것 같다. 칩거하던 모사가 선거 국면에 홀연히 중원무림에 나타나 기가 막힌 용병술을 발휘하여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이제 혈겁을 뒤로 하고 내 역할은 여기까지오. 윙크 한 번 하고 쿨 하게 돌아서서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간다는 서사를 내가 왜 "무려 21세기" 선거에서 봐야하는지 모르겠다고!!!

석양으로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소오강호 가락이 어울릴까나, 아니면 영웅본색의 테마OST가 흐르는게 더어울릴까나 그런게 궁금해졌지. 

민주연구원은 원래도 당의 정책 씽크탱크 역할을 전혀 못해왔지만, 이제 공식적으로도 그냥 선거공학 일삼는 아재들의 살롱으로 확정. 비례후보들도 누구를 대표하고 어떤 배태성을 갖는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으니, 그저 신출귀몰한 플레이어들의 용병술을 믿어볼 밖에. 다음 선거 때도 다시금 홀연히 등장하여 작전을 지휘해주실테니, 그동안 비전이고 정책이고, 시민사회연대나 지역운동 모두 쓸데 없는 낭비적 투자 되시겠다.

 

미래당은 선거 전날까지 본인이 맡은 당 이름도 모르는 분한테 선거캠프를 이끌도록 했으니 더 할 말도 없다만, 위기에 짠 하고 등장하여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해낼 것이라는 그런 근자감 나도 진정 배우고 싶었다. 한국 남자들에게 삼국지 금지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도 잠깐 들었던 것이, 다들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는 와룡에게 자기동일시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든단 말이지. 

그런가하면 아무런 정책도, 작전도 없이 그저 달리기만 하고 세 석을 가져온 안철수의 성취감과 자기효능감은 앞으로 또 어쩔 것인가?

 

#4. 코호트효과

 

당분간 선거 결과에 대한 이런저런 심층분석이 나오겠지만,

장기적 추세에서는 상당 기간 미래통합당(aka. 자유당, 민정당, 민자당, 한나라당, 신한국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등등)이 우세를 점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나의 짐작. 물론 대선에서 어떤 카리스마적 인물이 출현하거나 선거 국면에서 이변이 속출할 가능성이야 상존하기에 장담이야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흔히 나이가 들면 보수화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예전에 호프스테드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연령 효과는 대개  Power Distance 가 높은 국가들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특징. 미국과 유럽에서의 68세대, 일본의 전공투 세대들을 보면 이후 나이가 들어서도 후속 세대보다 계속 일관되게 리버럴한 것이 특징인데, 이를 power distance 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코호트 효과가 상당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물론 "권력 질서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은 그 권력에 닿기를 애타게 소망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잠재력이 상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ㅋㅋ

현재 50대는 20년 전의 50대와 역사적 경험이 전혀 다르고,

이제 50대에 접어들게 되는 70년대 출생인간들은 그 이전과도 또 다른 망나니세대 ㅋㅋ 그 유명한 엑스세대, 신세대인데다 교복과 두발 자유화, 과외도 없이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보내고 90년대 대중문화의 전성기를 향유하며 온갖 리버럴 짓은 다 해본 이들 아닌가. 이들은 사회조사에서 나이가 들어도 진보적인 견해에 동의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계속 높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이후 금융위기를 비롯하여 사회경제적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그래서 사회경제적/계급적 이슈에 대해서는 본인의 계급 위치에 따라 다른 견해를 보일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최소한 이념적이거나 사회적/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는 보수꼴통을 지지할 가능성이 낮을 것으로 짐작한다. 너무 낙후하고 너무 후지기 때문.

예컨대 유승민이나 이혜훈처럼 그래도 좀 제정신으로 말하는 것같은 보수주의자들이 등장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는 글쎄올시다. 게다가 이 두사람조차, 처음에는 좀 멀쩡한가 했으나 들여다보니 그것도 아니어서 ㅋㅋㅋ 그 똑똑하다는 KDI 경제학 박사도 동성애자 이슈 앞에서는 하느님의 순한 양이더라구 ㅋㅋㅋ

 

장기적 전망이 그렇다는 거지, 격변이 잦은 한국사회에서 또 무슨 일이 일어나서 사람들의 마음이 획 돌아살지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최소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성숙한 상황에서 사회경제적, 계급적 이슈들이 전면에 부각되었을 때는 코호트 효과고 뭐고 사라지는 거지 뭐. 뿐만 아니라 다크호스로 부상하고 있는 우리 20대 XY 인구집단......  아...... 할많하않...

 

그나저나 21대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마침내 달성했으니 그동안 힘없어서 못한다고 엄살피우던 여러 가지 개혁조치들, 차별금지법 입법, 52시간제 유예와 탄력근로제 확대 중단, 부양의무제 철폐, 공공병원 확대, 젠더폭력 처벌강화 등등의 의제들을 어떻게 처리하나 두고 볼 일이다. 공수처나 검찰개혁, 사법농단 재발방지 같은 이슈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엘리트그룹 분파 내에서 알아서 필사적으로 싸울테니 굳이 나까지 걱정해주지 않아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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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밀린 독서일기가 에버노트에 한 가득 있지만 차곡차곡 정리하려다 패가망신할 것 같아서 ㅋㅋ 일단 최근에 읽은 책부터 정리하자로 전술 전환...

 

# 마샤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2015)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민음사, 2015

 

일찍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었으나, 죄가 무슨 죄나 사람이 죄지.. ㅡ.ㅡ

이런 인간환멸이 한 가득인 상황에서 정신 좀 다독여보려고 책을 읽음.

사실은 코로나 유행에서 드러난 혐오 문제를 좀더 차분하게 이해해보려는 마음으로 책을 폈는데, 중간에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점화되면서 가해자 신상공개 논란이 벌어짐. 한층 혼란 ㅜ.ㅜ

 

법은 감정적이 아니라고 노력한다지만 분명히 감정을 반영하고 (사실 분노와 탄식 없이 어떻게 인류사회에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되었겠나!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법에서 감정의 역할을 흔히 부정하고는 하지만 이미 영미 현행법에서도 '타당한 동정심'은 이미 양형 선고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 또 이론과 실천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존재한다는 지적으로부터 책은 시작. 이를테면 법이 범인에게 수치심을 주어야 한다는 시각과 법은 시민들이 존엄성을 훼손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시각이 공존하는 상황. 특히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공동체주의자들에게 사회규범의 표현으로 옹호되는 경향.  


감정은 자연발생적으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고를 담고 있음. 대개 자신의 목표와 목적의 도식 안에서 일정한 중요성을 부여해왔던 것에 대해서만 감정을 가지며, 목마름이나 배고픔의 욕구와는 다른 것이, 감정에는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훨씬 더 많은 사고를 수반. 즉 감정은 '지향적 대상'에 초점을 두며 그러한 대상에 대한 평가적 믿을음 수반. 이를테면 인종주의는 감정 속에서 나름의 근거가 있기에, 증오의 기반이 되는 사실이나 가치와 관련된 잘못된 밁음을 없앤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ㅜ.ㅜ) 감정도 바뀔 수 있는 것임. 감정은 분별없는 정서적 격앙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개인이 지닌 중요한 가치와 목적에 맞게 조율된 지적 반응...   옳소옳소....

 

법은 잘못된 '행위'를 처벌하고 그 행위에서 비롯된 '죄책감(guilty)'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작동해야지, 행위가 아닌 인간 정체성에 근간을 둔 혐오에서 비롯된 법적 판단, 혹은 수치심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됨. 수치심과 혐오는 분노나 두려움과는 분명히 다른 감정이기에, 너스바움은 혐오에 강하게 반대하면서, 혐오가 어떠한 행위를 범죄행위로 규정하는 일차적 기반이 되어서는 안 되며, 현재처럼 형법에서 죄를 무겁게 하거나 경감시키는 역할을 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함  

 

혐오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하자면...
혐오가 법에서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위해로 여겨질 수 있는 불쾌감이 정당한 지침 역할을 할 수 있는 생활방해법이나 토지용도 지정 정도. 흔히 '혐오가 담고 있는 지혜'를 운운하며 혐오를 정당화하고 그에 기반한 차별이나 법제도를 옹호하지만 (동성애가 대표적 타겟), 사실 혐오라는 감정은 인간이 동물적 육체를 갖고 있다는 불쾌감으로부터 촉발되며, 사회적 실천은 취약한 사람들과 집단을 대상으로 투영됨. 이러한 반응이 규범적 의미에서도 비합리적인 것은, 이러한 반응은 될 수 없는 존재가 되려는 열망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열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표적으로 해서 심각한 위해를 가하기 때문.

혐오는 감각 요소에 의해 유발되는 부정적 반응인 '기피'나 해로운 결과가 예상되어 거부하는 '위험'과도 구분됨. 혐오는 대상이 지닌 감각적 요소라기보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 관념적 요소에 의해 유발. 혐오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지닌 동물성을 숨기고 ('오염'),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꺼려할 때 현저히 드러나는 유한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감정임.   
혐오는 분개와도 다른데, 분개는 모든 사람에게 법률적 규제의 기초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위해 또는 손상과 관련된 반면, 혐오는 법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오염'에 대한 사고와 연관. 분개는 일반적으로 발생한 위해를 야기한 사람에 대한 평범한 인과적 사고와 위해의 심각성에 대한 일상적 평가에 기초하는 반면, 혐오는 실제적 위험보다는 자신이 오염될 수 있다는 신비적 사고에 바탕. 또한 분개는 일반적 속성 상 우리가 쉽게 상처입을 수 있는 취약한 존재이며 우리가 가장 마음쓰는 대상이 다른사람의 부당한 행위로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응이지만, 혐오는 우리가 될 수 없는 어떤 존재, 즉 동물성을 갖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되려는 소망을 중심으로 움직임.  혐오의 절규에는 '나는 이 추악한 세상을 나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그러한 바보같은 제도에 나는 토할 것 같고 그것들이 나의 (순수한) 존재의 일부가 되도록 놔두고 싶지 않다'가 담겨있는 반면, 분개는 '이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방아왔다면 더 이상 그러한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담겨 있음. 혐오는 오염에 대한 사고가 중심이기 때문에, (행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라져버리길 원함. 역사적으로 혐오는 특정집단을 배척하기 위한 사회적 무기로 작동해왔음. 특권을 가진 집단은 자신과 구별하는 집단을 통해서 우월한 인간적 지위를 명백히 하려 했으며, 유대인, 여성, 동성애자, 불가촉천민, 하층계급 사람들 모두 육신의 오물로 더럽혀진 존재로 그려짐. 이런 면에서 사회의 도덕적 진보는 위험과 분개로부터 혐오를 '분리시키는' 정도에 따라 측정할 수 있을 것임.

혐오는 인간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반응으로, 너무 어리거나 부주의해서 혹은 잘 몰라서 해당 품목의 이점을 숙고할 수 없을 때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장치이기는 하지만, 이로부터 혐오가 법적, 정치적 목적에 적합한 귀중한 반응이라는 결론을 도출해서는 안 됨. 인간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많은 반응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공적 행위의 지침이 될 수 없음. 혐오가 법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추정상의 기준이 될 때, 그리고 특히 취약한 집단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예속하고 주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때 이는 위험한 사회적 감정이 됨. 우리는 혐오를 이용해야 하지만 혐오가 담고 있는 인간사회의 비전에 기초해서 우리의 법률 세계를 건설해 나가서는 안 됨 === 한문장 한문장 모두 지극히 동의

 

다음 타자 수치심!
인간에게는 원초적 수치심이 존재하고 선을 가져올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만 공적 삶에서 규범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움. 그래서 자유주의적 사회에서는 수치심을 억제하고 시민이 수치심을 겪지 않도록 보호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음. 왜 그런고 하니, 수치심은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특정 사회가 지닌 규범적 정향에 상관없이 밑바탕에 존재. 수치심은 인간이 지닌 인간성, 즉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과 동시에 과도한 욕심과 기대가 두드러지는 존재라는 인식 안에 존재하는 일정한 긴장을 해소하는 매우 일시적인 방법이기도 함. 모든 사회는 혐오와 마찬가지로 수치심을 통해 특정 집단과 개인을 선택하고 그들을 '비정상'으로 구별하며 자신이 무엇인지 누구인지에 대해 부끄러워하게 만들어 왔음.

수치심은 역사상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처벌 방식의 일부이지만, 규범적 상황은 혐오보다 훨씬 복잡함. 일정한 형태의 수치심은 긍정적 윤리적 가치를 지니지만, 그러한 역할들이 원초적 또는 나쁜 형태의 수치심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함. 현대 자유주의 사회가 '정상적인 시민'이라는 매우 일반화된 직관적 사고에서 벗어나야만 수치심을 둘러싼 현상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음.

수치심은 어떤 이상적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응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자아의 '특정한 행위'보다는 '전체 자아'와 관련. 수치심과 모욕의 구분이 필요한데, 수치심을 주는 것은 도덕적 비판이 정당한 경우들과 당사자의 인간성 자체를 욕보이지 않는 가벼운 경우도 포함하는 보다 넓은 개념인 반면, 모욕은 일반적으로 이를 당하는 당사자가 인간 존엄의 측면에서 다른 사람과 동등하지 않은 열등한 사람이라는 진술을 표현함. 당혹감은 일반적으로 수치심보다 가벼운 상황이며, 항상 사회적이고 맥락적이지만 수치심은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음. 수치심은 깊게 자리잡고 있는 문제와 관련되며 세상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무관하게 '자기 스스로의 평가'를 담고 있는 감정이라는 점이 중요. 당혹감은 청중이 없으면 생기지 않고, 청중의 속성에 대한 자신의 인식에 반응하는 것.

수치심은 완전해지고 완전한 통제력을 지니려는 원초적 욕구로부터 기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폄하와 어떤 형태의 공격 (자아의 나르시즘적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격렬하게 비난하는)과 연결될 가능성이 존재함. 분노와도 구분이 필요한데, 분노는 위해 또는 손상에 대한 반응이며 부담함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죄책감은 말하자면 자기 처벌적 분노로, 자신이 잘못이나 위해를 저질렀다는 인식에서 생겨남. 수치심은 결점이나 불완전성에 주목하고 감정을 느끼는 그 사람 자체가 지니는 일정한 측면에 관심을 두지만 죄책감은 어떠한 행위에 초점을 맞춤. 죄책감에 내재된 공격성은 수치심 주기에 담긴 공격성보다 더 성숙된 것이고 창조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음. 죄책감은 도덕적 요구를 수용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요구를 제한하는 것과 연관되었기에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생각과 관련됨. 법은 사회가 범죄에 대해 죄책감을 표현하고 죄책감을 사회적 동기로 활용하도록 해야 함.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통찰력 있는 말을 귀담아 들어서 귀중한 개인적 이상을 향한 자신의 노력을 계속해서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정상적인 것을 벗어난 모든 것은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가 되며, 많은 경우 신체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됨. 수치심을 외부 대상에 투영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얼굴에 소인을 찍임으로써 정상인들은 일종의 대리 행복을 얻고, 외부를 통제하고 완전무결해지려는 유아기적  소망을 만족시킬 수 있음. 모든 사회가 관여하고 있는 낙인찍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유아기적 나르시즘과 자신의 불완전성에서 생겨난 수치심에 대한 공격적 반응이라 할 수 있음. 낙인찍는 행위의 핵심은 피해자를 비인간화하는 것.

 

수치심을 주는 처벌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논거를 제시할 수 있음 

  1.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모욕을 주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게 됨 (죄책감은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수치심은 인격에 주목)
  2.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일반적으로 인민재판 같은 모습을 갖는데, 인민재판은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일반적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공평하고 심의적이며 중립적 재판이 아님
  3. 역사적으로 수치심 처벌은 사람을 잘못 대상화하거나 처벌의 정도를 정확하게 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처벌이 지닌 억제 기능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함.  수치심의 대상이 실제 범죄자에서 단순히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 비교적 빠르게 이동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 왜냐하면, 수치심은 애당초 잘못된 행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정상에서 벗어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 이들을 대상화함으로써 지배적 집단은 자신들을 정의하고 보호할 수 있음. 이러한 자기보호 뒤에 완전무결성과 나르시즘적 승리를 추구하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기에, 수치심을 주는 사람이 지니는 분노의 대상이 실제 범죄자에 국한되지 않으며, '정상인'들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희생양이 될 수 있고 공동체에서 배척당할 수 있음
  4. 수치심에 기초한 처벌은 경험적으로 강력한 억제 효과를 지닌다기보다 정반대의 결과 초래. 모욕을 당한 사람은 전보다 소외되고 불안해지며, 이미 연약한 자아를 지닌 사람이 수치심을 경험하게 되면 우울증과 공격성으로 이어지기 쉽고, 그래서 수치심을 강화하는 것은 폭력을 줄이기보다 오히려 키우기 십상
  5.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보다 많은 사람을 사회적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큼.

이러한 논거에 반대하는 이들은 수치심 처벌이 형벌의 네가지 목적 (응보, 억제, 표출, 개심 또는 재통합)을 잘 수행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 처벌이론에서 응보주의는 무임승차와 평등한 자유에 관한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인데, 모든 시민이 동등하며 행위에 대한 동등한 자유를 향유해야 할 때, 범죄자는 자신에게 평등하지 않은 자유의 영역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 없고, 응보적 처벌은 범죄자의 불평등한 자유요구를 기록에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 응보적 처벌은 복수와 다르고 이런 면에서 수치심 처벌은 전혀 응보적이지 않음. 수치심 처벌은 일탈 집단과 대비되는 상위집단을 정의하는 것이 사실상 전부라 할 수 있음.  


물론 비판적 자기성찰의 결과로 야기되는 수치심 (에렌라이크의 미국 근로빈곤층에 대한 르포가 미국 대중들에게 수치심을 갖게 만드는 방식)은 개혁을 추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음. 일종의 건설적 수치심이라 명명할 수 있는데, 이는 완전히 일반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하기 때문에 법적인 측면에서의 수치심 처벌과는 다름.

 

대개 혐오와 수치심을 기초로 작동하는 법적 처벌은 시작은 도덕적 공분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로 향한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
동성결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공격적 대중운동의 많은 부분은 전혀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며 원초적 나르시즘의 공격적 형태의 요소를 수반. 성소수자에게 낙인을 안겨줌으로써  가족과 성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발휘하길 바라는 것임. 이는 인종 간 결혼 합법화에서 '정상적' 가족 구조를 송두리째 뒤집는다는 인식과 마찬가지. 당시 백인 남성들은 자신의 남성성에 대해 수치심을 느낄 수 있었기에 이러한 수치심의 위협을 피하려는 욕구에서 인종간 구분선을 엄격하게 나누고자 했음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동성 결혼의 권리에만 초점을 두다보니, 결혼의 지위에 대한 건설적 논쟁이 어려워짐. 제도로서의 결혼은 사랑과 함께 폭력을, 아이 양육과 함께 아이에 대한 학대와 멸시를 키워왔고 특히 일반적으로 여성과 아이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해왔음. 동성결혼에 대한 공포와 이에 대한 반작용 때문에 평등한 결혼 권리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공적으로 토론되어야 할 긴급한 문제들이 지연됨 ㅡ.ㅡ)

 

혐오와 수치심을 규범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의 주장에 담긴 아킬레스 건은 '공동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 모든 공동체는 규범과 가치에 대한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권력의 차이도 마찬가지. 특정 집단의 가치로 내걸리는 것은 주로 집단 내 가장 지배적 구성원들의 가치임.  또한 공동체주의자들은 대체로 인종, 장소, 또는 공통의 문화나 언어로 이루어진 집단에 초점을 두지만, 공통의 취향이나 직업, 문제를 공유하는 집단, 압제의 역사를 공유하는 집단도 공동체가 될 수있음

 

밀이 자유론에서 옹호했던 결론은, 다수(자신이  행하는 방식이 정상이라고 정의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의 압제를 막고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적이고 주의 깊은 보호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낙인의 작동에 대한 일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해법은 개인적인 자유와 권리를 빈틈없이 강조하고 모든 시민에게 법의 동등한 보호를 확고히 보장하는 것임. 너스바움은 이러한 맥락에서 시민들이 수치심과 낙인을 겪지 않고 살 수 있는 '촉진적 환경'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 그러면서 낙인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빈곤을 지적하며, 예의 역량접근법을 토대로 사회가 모든 시민에게 괜찮을 생활수준을 보장해야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 (인간 역량이란 어떤 구체적 형태의 기능을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러한 기능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상태를 지칭). 법적 측면에서는 차별금지법과 증오범죄법이 중요한데, 자유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시각을 지닌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어떻게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할 것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실재함. 또한 자신에 대해서든 다른 사람에 대해서든 다루기 어렵고 수치심을 야기할 수 있는 인간성의 측면을 대면하고 검토할 수 있는 공간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프라이버시 강조함. 예술이나 문학을 통해 생기는 상상과 공상은 과도한 불안없이 자신의 인간성이 갖는 다루기 어려운 측면을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이 되며 이러한 탐구는 자신에 대한 인식을 보다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이러한 자기탐색은 타인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높여줌. 이 두 가지 능력은 바람직한 힌간관계를 맺는 데에도 중요하며, 자유주의 사회가 건강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도 필요. 즉, 사회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상상하고 탐구하는 공간을 보호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 프라이버시 영역, 특히 사람에 따라서는 수치스럽게 여길 수 있는 활동과 상상을 위한 프라이버시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중요. 대개 공/사 구분은 대칭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데 '정상인'의 경우는 감추고 싶은 선택과 공개하고 싶은 선택을 모두 보호하지만 '비정상인'에게는 감추라고 요구하기 때문. 이를테면 성소수자에게, 여성들에게 '사회가 혼란을 감당할 수 없으니' 욕구와 노출을 감추라고 하는 것처럼.

 

이러한 논의들을 따라가다보면, 최근의 텔래그램 성착취 사건에서의 가해자 신상공개가 과연 처벌의 응보, 억제, 표출, 개심 측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


그러나 이들이 저지른 범죄의 내용이 개인에게 수치심과 말할 수 없는 낙인을 가져온 행위였다는 점에서, 응보적 측면의 처벌이 타당해보이기도 함. 물론 억제와 표출 측면에서는 신상 공개보다는 강력한 형량이 더 의미있는 기여를 할 것으론 생각하지만서도... (이들에게 개심이 가능하긴 한 건지 잘 모르겠음 ㅡ.ㅡ)
근데 사실, 가해자의 수치심 처벌 측면에서의 신상공개보다는 잠재적 범죄 예방 측면에서 논의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음. 핵심 가해자인 조주빈을 포토라인에 세우는 거야 뭐 대중에게 딱히 '알 권리'를 충족시켜줄 것이 없으나, 그를 포함한 26만명 주변에 있는 여성들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성범죄 피해자가 되었거나 앞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신상 공개가 필요해보임. 언론에 명단이 공개되어 봤자 이들이 연예인도 아닌데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고, 오히려 좀더 상세한 정보를 성범죄자 신상공개 형태로 조회해볼 수 있게 해서 잠재적 피해를 예방하는 것은 매우 필요해보임.
     


너스바움의 논문들만 읽다가 단독 저서는 처음 읽어봤는데 엄청 꼼꼼하고 논리적이고, 견고한 정치철학적 관점이 분명히 드러나서 강추하고 싶음.
그런데.... 책을 읽고나서 근본적 미스테리는, 이렇게 합리적이고 똑똑한 양반이 왜 유대교로 개종했느냐 하는 것... 인간 본연의 취약성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혐오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는 점에서 합리적 감정이 아니라는 수백페이지짜리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신 종교에 대한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의 혐오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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