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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모 대학 총장이 일명 <빵장>으로 불리고 있다.
그 이유인즉슨, 그 총장이 <더 맛있는 빵을 먹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면서,
내년도 등록금을 2~3배 정도 올려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란다.
물론 그 이후에 해명을 했단다. <단과대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려면 등록금을 그 정도로 올려야 한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뭐,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시대가 천박하니까 교육자라는 사람도 입이 경박해지고 천박해지는가부다.
맑스가 한 말이 절실하게 생각난다.
<교육자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
교육자를 누가 교육을 시킬 것인가?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학생들이다.
학생들의 <힘>이 없으니까 즉흥적으로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힘이 있었다면 저런 식으로 교육자가 천박함을 드러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교육자가 천박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책임이 크다 할 수 있겠다.
90년대 이후로 줄기차게 대학 사회의 중요한 이슈 중이 하나가 된 것이 바로 <등록금 인상> 문제이다.
학교는 끊임없이 인상하려고 하고, 학생들은 인하하려는 저항을 계속 해 왔다.
그러나 등록금은 학교가 마음 먹은대로 계속 인상되어 왔고,
학생들의 저항은 별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것은 곧 학생 운동권의 불신을 넘어서서 학생회 자체에 대한 불신,
더 나아가 학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공부이자 활동인 <자치>에 대한 무관심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자치는 학생들에게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러고서는 오로지 취업, 취직만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
대학은 이제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 불모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
대학이라는 횃불이 점점 더 사그러지고 있다.
그러다고 하더라도 아주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여전히 투쟁의 불씨는 남아 있다.
그 불씨가 바로 등록금 인하 투쟁이다.
지금까지의 등록금 투쟁은 대학 재단과 총장에게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 등록금을 인하해 달라는 식이었다고 본다.
이때 대학의 답변 역시 먹고 살기 힘드니까, 다시 말해 자꾸 물가가 오르니까 등록금을 올리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 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똑같은 전제를 깔고 있는데, 누가 더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여 싸움의 승패를 가를 수가 있을까?
그러니 이 투쟁은 아무런 진전도 없이 지리하게 이어지는, 김 빠진 사이다와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칼자루를 대학 재단이 쥐고 있으니 싸움을 오래 끌면 끌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학생들 쪽이다.
그러니 이 싸움의 승리는 결국 재단이 하게 된다.
등록금 인하 투쟁을 한다고 대학 본관(행정관), 총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한다고 해도 학생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싸움의 승자를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싸움은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늘 항상 투쟁의 방식은 이런 식이었음을 학생들은 보아 왔다.
학생회는 학교에 선전포고를 한 다음에 말싸움 몇 번 하고 서명을 받고는 더 이상 무엇을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것 이외의 어떤 다른 전술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학생회, 학생운동 진영의 상상력의 빈곤... 이것은 교육자의 천박함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단순히 등록금만 인하하자고 하는 투쟁은 이제 안 하느니만 못한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
안 하자니 마땅히 할 사업이 없고, 하자니 이미 결판난 싸움이고, 또 학생들한테 곱지 않은 눈길을 받을 테고.
<등록금 투쟁은 졸업 이수 학점을 대폭 낮추는 투쟁과 결합해야 한다!>
먼저 등록금 투쟁은 학생들의 관심과 주체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
이 말은 아주 진부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부하다고 생각되는 이 말 속에 진리가 있다.
진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들의 관심과 주체적인 참여가 가능하도록 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학생들이 현재 수준에서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학생들은 과중한 노동, 즉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재미 없는 공부와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 공부에 지쳐 있다.
그래서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너무도 필요로 한다.
그들의 입에서는 <어휴~~! 힘들어!> 하는 소리가 무의식중에 흘러 나온다.
속된 말로 똥 누고 밑 닦을 틈도 없는 것이 학생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학생들은 정말로 약간이라도 인간적인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재미 있는 대학생활을 원한다.
학기 중엔 잠도 맘 편히 실컷 자볼 수도 없다.
시험과 레포트에 치여 일주일에 삼사 일은 거의 밤을 새다시피한다.
(잠 좀 자자라는 말은 촛불시위를 당긴 여고3학년의 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대학생들 전체의 입 속에서 신음소리인 듯이 나오는 말일 것이다.)
어느 딱한 책상물림들이 한국 대학생들은 공부를 안 한다고 했던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고3보다도 더 빡빡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한국의 대학생들이다.
친구들과 마음 편히 영화 한편, 연극 한편 등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
그러한 여유를 누리고 싶지만, 거의 대부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럴 시간에 토익 한자라도 더 공부해야 하고,
A+ 학점을 맞기 위한 공부를 한자라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렴풋이 자기가 꿈꾸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어하지만,
그러한 것을 할 시간이 없다.
늘 해야 하는 것의 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그러다가 졸업할 때쯤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도 잘 모르게 된다.
그냥 그렇게 떠밀려 대학을 떠나게 된다.
대학생들은 이러한 것을 대단히 두려워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하면서 받아들인다.
학생들의 공부라는 노동의 강도를 완화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이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완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이러한 노동 강도의 완화 투쟁은 졸업을 위한 이수 학점을 대폭 낮추어야 하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
절반 이상으로 낮추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고, 인간다운 대학생활을 위한 자유시간을 쟁취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시간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즉 졸업 이수 학점을 절반으로 낮추는 투쟁을 어떻게 등록금 투쟁과 연결시킬 것인가?
학교 측의 경제 논리를 역이용하면 된다고 본다.
학교 측의 논리는 대체로 등록금 인상 요인이 일반적으로 물가 상승이고, 이러한 물가 상승이 인건비의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등록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인건비의 상승이 등록금 상승의 요인이라는 것이다(그렇지만 대학 교육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시간강사의 경우 강사료의 인상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거의 20년간 강사료의 인상율은 그간의 물가 상승율에 비하면 거의 10분의 1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인건비를 낮추면 등록금을 인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졸업 이수 학점을 낮추어서 인건비를 절감하면 된다. 다시 말해서 졸업 이수 학점을 절반으로 낮춘다는 것은 그 학점에 해당하는 과목 또는 강좌를 줄인다는 것이고, 이는 곧 그 과목 또는 강좌를 담당하는 교강사를 줄이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등록금 인하 요인을 학교 측의 경제 논리를 이용하여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었을 때 당장 생존에 지장을 받는 이는 나 같은 시간강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 보장의 책임은 학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부 및 자본에게 있다. 그러므로 교강사들의 생존 보장은 학생들의 노동 강도 강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부 및 자본에 대해 요구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요구 투쟁을 할 때 학생들은 기꺼이 연대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학교 측에 공을 넘겨 버리면 학교는 분명히 <졸업 이수 학점을 낮추는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 의지의 문제이다>라고 하면서 비껴가려고 할 것이다.
학교의 답은 분명히 맞는 답이다.
사실상 졸업 이수 학점 감소 문제는 개별 학교에서 투쟁할 사안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국 전체 대학생의 문제로서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답게 공부하기 위해, 즉 과도한 노동강도의 공부, 그리하여 재미 없게 된 공부의 양을 대폭 줄이기 위해 학생들 스스로 촛불시위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학생들은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지난 번 촛불시위는 여고3학년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이제는 좀더 구체적이고 절실한 삶의 문제인 노동강도의 완화로서의 졸업 이수 대폭 감소를 위한 촛불시위는 대학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충분히 시작될 수 있으리라 본다.
대학 안에 갇혀 있던 대학, 외부와 소통이 단절된 대학이 아니라 사통발달의 거리 광장의 대학,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한 대학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해 와서 발표하고 토론하며, 또한 서로 격려해 가면서 공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듦으로써 스스로 대학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러한 대학 만듦은 자연스럽게 대학 안에 갇힌 대학에 대한 동맹 휴업으로 나타날 것이고, 휴학 투쟁으로 나타날 것이고, 졸업 연기 투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은 서서히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자본은 자기 입맛대로 노동력을 공급 받을 수 없을 텐데, 졸업하는 학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대학은 더 이상 대학에 갇힌 대학이 아니라 사통발달의 광장의 대학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할 커리큘럼을 만들기 시작하고, 이 커리큘럼대로 공부하기 시작할 것이고,
이 공부한 것을 발표하고 토론하며 서로 격려해 가는 공부의 장, 축제의 장, 소통의 장, 정치의 장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러한 장은 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릴 것인데, 이는 기존의 축제와는 전혀 다른 학생들 스스로를 생산해 내는
생산력 발전의 축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축제는 곧 학생들 자신의 코뮌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이것은 곧 등록금 인하가 아니라 대학의 무상 교육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아가 대학 입시제도도 폐지될 것이고, 누구든지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대학에 올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학의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좀 더 생각이 구체화되는 대로 세부적으로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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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위는 이해와 대립하는 것입니다. 당위는 이런 것이죠.린도스 사람 에우아고라스의 아들 클레오불로스의 말
1. 적도가 최선
2. 아버지를 공경할 것
3. 신체와 혼을 유지할 것
4. 즐겨 듣는 자가 되고 말을 많이 하는 자가 되지 말 것
5. 무지보다는 박식을
6. 불길한 말 듣기를 삼갈 것
7. 덕과는 친하고, 악과는 남이 되라
8. 불의를 미워하고 경건을 지킬 것
9. 시민들에게 최선의 것을 충고할 것
10. 쾌락을 이겨낼 것
반면 이해는 이런 것입니다.
플라톤(DK10A2)
저로서는 바로 그것, 즉 '자신을 아는 것'이 절제라고 얼추 말하지요, 또 나도 그러한 잠언을 델포이 신전에 헌정한 분과 같은 생각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와 "절제하라"는 것은 - 그 잠언이 의미하는 바나, 또 내가 주장하는 것처럼 - 사실 같은 말이긴 하지만, 아마도 어떤 이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저로서는 '무엇이든 지나치지 말라', '보증, 그 곁에 재앙'과 같은 후대의 잠언을 헌정한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너 자신을 알라'라는 잠언을 하나의 충고라고 생각할 뿐, 신전에 들어서는 자들을 위한 신의 인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그들 역시 아주 유익한 조언들을 신에게 바치려고 그러한 잠언들을 새겨 바쳤던 것이지요.
카르미데스 16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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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대해서는 아는게 별로 없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등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런 학문들이 지금의 학문처럼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을 이해해야하는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아테네에 가는데, 당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는 강의와 토론을 위한 공간만이 아니라 학자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2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플라톤 밑에서 학문을 정진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외국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때문에 아테네의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지만, <정치학> 집필과 강의를 통해 학문적 차원에서 정치에 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제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관심을 가지는 질문은 무엇을 탐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탐구하느냐입니다. 논리학은 탐구의 방법론입니다. 그의 논리적 분석은 실재(reality)를 개념적으로 재생산하는 사고에 대한 분석입니다. 논리적 분석은 궁극적으로 실재와 진리 인식을 목적으로 합니다.
자연학은 자연의 운동과 정지의 원리를 자기 속에 갖고 있는 실체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형이상학에서 규정합니다. 철학이 질료와 분리되는 실체를 다루는데 비해, 자연학은 질료와 분리될 수 없는 실체를 다룹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을 통해 자연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연의 본질인 운동 또는 변화의 고찰을 중심으로 그 조건과 관계와 원인에 대해 논하고, 그것과 더불어 무한과 장소, 시간을 다룹니다. 사물의 생성 및 소멸과 질료적 구조를 다루는 학문이 자연학, 즉 현재의 과학입니다. 인간도 자연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모든 것이 그것 때문에 존재하는 목적 telos라고 보았습니다. 자연은 본성 혹은 본질이라는 뜻도 있죠. 만사가 요행이고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원인일 뿐 자체적인 원인에 앞설 수 없다고 합니다. 자연은 방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질료로 여겨지기도 하고 형상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에게 있어 생성, 변화, 운동은 질료가 그 목적인 형상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해석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자연은 단순히 세계에 내재하는 운동의 원리일 뿐 아니라, 세계와 사물의 목적을 위한 활동 원리이기도 합니다.
형이상학에서는 자연 다음으로 오는 것들, 존재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의 형이상학은 존재의 우선적인 범주인 실체와 관계합니다. 실체란 무엇인가. 그에게는 개별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실체입니다. 그러나 그가 개별자가 진정한 실체이자 유일하게 진정한 실체라고 말할 때, 그는 보편자가 그 자체로서 분리된 실체라는 플라톤주의적 독트린을 거부하는 것이지, 사물 안에 있는 형상적 또는 종적 요소라는 의미에서의 보편자가 실재적(real)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맨 처음을 좋음과 목적으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는 놀랍게도 최고선과 정치학에 대해 말합니다. 윤리학인데 왜 정치학 얘기를 하느냐. 좋음에는 최상의 좋음이 있는데 그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정치를 못했으면서도 정치가 가장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 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 정치학이 규정한다고 합니다. 왜냐면 정치학은 실천적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이 입법을 하기 위해서는 정의에 대한 앎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치학의 목적이 인간적인 좋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최상의 좋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은 무엇인가, 윤리학은 직역하면 품성, 성격에 관한 논의들입니다. 이것은 <윤리학>에서는 정치학으로, <정치학>에서는 거꾸로 윤리학으로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과 정치학은 같은 것입니다. 왜냐면 정치는 개인이 모여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하려면 개인이 훌륭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윤리는 당위가 아니라 탁월함, aret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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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학파의 형성은 당시 그리스의 정치현실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시조인 에피쿠로스는 알렉산더 왕이 죽은 이후 권력투쟁이 벌어지면서 그리스는 피폐화되고 그리스를 지탱하던 중간층도 점차 빈민화됩니다. 따라서 그리스의 민주주의도 함께 흔들렸고, 정치학이나 윤리학도 쇠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주의가 대두합니다.이것은 중국의 명말청초의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명말청초는 격변기였습니다. 이민족인 청나라의 침략으로 명나라 말기의 정치 상황은 환관의 발호와 국가재정의 파탄, 격렬한 당쟁 등으로 혼란에 빠집니다.
이러한 비참한 정치현실과는 달리, 명대에는 상품경제의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역간의 교류도 활성화되고 사람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생활과 소비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달라진 물적 환경 앞에서 중국 봉건 통치의 기반을 떠받쳐오던 예교와 도덕 관념도 점차 변모합니다.
가치관의 변화는 명분을 상실한 유학의 교조적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들을 둘러싼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성의 해방과 개성의 발견에 눈을 뜹니다. 여기에 암담한 정치 현실에 대한 환멸은 지식인들에게 염세적 은둔 풍조를 부추깁니다. 그들은 백성을 교화하고 임금을 보필하는 재도지기로서의 문학을 전면거부하고, 소품의 새로운 양식을 통해 삶의 진실을 발견하고, 제도의 질곡과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정면으로 고발 풍자합니다.
마찬가지로, 에피쿠로스 역시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게 됩니다. 그는 아테네에 있는 정원을 사들여서 학교를 세우고 죽을 때까지 '정원' 공동체에서 활동합니다. '정원'의 구성원은 여자와 노예는 물론 창녀도 속해 있었기 때문에 에피쿠로스를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의 철학의 목적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고통을 야기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고자 했기 때문에 기존의 교육이나 공적인 일도 거부하고 개개인이 오로지 자신과 공동체만을 의지해서 살아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아타락시아는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외부의 자극은 적극적으로 차단되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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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돌아가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로 중용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찾아봐야하는데 집에 있지만 관두고, 플라톤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절제로 해석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릴께요. 절제란 사람마다 달라요. 매달 백만원 버는 사람과 매달 천만원 버는 사람에게 절제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능력에 맞게 소비하는 것이 절제겠죠. 아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님은 이 글을 직접 작성하셨는지, 아니면 어떤 글을 퍼오신건지, 퍼오셨다면 출처를 밝히셔야하고, 어떤 글을 읽고 그 글을 바탕으로 쓰셨다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철학사를 이해하는것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너무 급히 작성하신 것은 아닌지, 급하게 레포트를 제출해야한다면 큰 무리가 없지만 다른 사람도 보는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려놓으시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동의하지 않으셔도 좋고요, 자신이 공부해서 아는 만큼만 말하는 것이 진보를 위한 한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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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 대한 설명도 그래요. 플라톤의 국가를 안 읽어봤지만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플라톤은 능력만 있으면 여자에게도 정치의 기회가 주어져야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고 여성과 남성은 본질적으로는 동등하지만 현실에서 여성의 본질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알고있어요. 한번 찾아보세요. 실제 폴리스의 정치가 여자를 배제했다고 해서, 바로 그런 점이 안타까워서 플라톤은 국가에서 여자도 능력만 있으면 정치를 할 수 있어야한다고 했는데 저렇게 말씀하시면 혼동이 일어나죠. 그것은 공정하지 않아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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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학파가 금욕을 말한 것도 당시 그리스가 무역을 통해 얻은 상품과 노예들 때문에 극도의 사치와 방탕에 물들었고 그때문에 망했어요. 그래서 스토아학파가 이를테면 막대 구부리기처럼 금욕을 말했던 것이지 스토아 학파는 에피쿠로스 학파에 비해 매우 실천적이고 도덕적, 규범적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들이었어요. 물론 그들의 한계는 시대의 한계이고 그들에게도 명백한 한계가 있지만.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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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학파는 고대 유물론자들의 영향을 받아 자연의 필연적 인과율을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는데, 그들에게 쾌락이란 말씀드린대로 고통의 적극적인 회피에요.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자연 현상의 구체적인 원인들에 대해서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했어요. 특히 천문학에 있어서 동시대의 과학적 발견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어요.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영향을 받는데, 맑스가 이 두사람 가지고 박사논문 쓰죠. 맑스도 젊었을 때는 고대 철학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그래요. 어떻게 다르냐.데모크리토스는 원자의 크기는 무한히 다양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원자들의 모양이 무한히 다양하다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원자도 존재할 것이라고 했어요.
에피쿠로스는 원자의 수는 무한히 많지만, 원자의 모양은 매우 다양할 뿐 무한히 다양하지는 않다고 했어요.
그럼 이 사람들이 도구도 원시적인 상태에서 원자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까요.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이 영원히 움직인다고 말할 뿐, 운동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어요.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이 자신의 무게 때문에 아래로 떨어진다고 주장했어요. 여기서 원자가 똑바로 안떨어지고 비스듬하게 떨어지는게 있는데 이것이 원자론의 엄격한 결정론을 깬다고 생각한거에요. 필연에 저항하는 자유의지.
이 정도면 소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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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님이 정리하신 규범윤리학은 당위, 이성, 남성, 필연으로 정리됩니다. 그렇다면 규범에 대립하는 것들은 당위(sollen)에 대립하는 그냥 있음(sein), 감성, 여성, 우연 등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정말 대립항일까요. 잘 생각해봅시다.당위는 그래야한다는 것입니다. 현존재가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다운 것이냐, 인간성이란 무엇이냐, 인식이 필요합니다.
남성과 여성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더 밑에 있는 인간이라는 층위에서 동등합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만나길 원합니다. 이것도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사람과 여자만 있지 남자와 여자가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 그 여자, 사람, 여인, 교수, 여교수, 등등
이성과 감성은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성도 이해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불의를 보면 분노하는 것은 우리의 가슴에 또 다른 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고대 철학자들이 이성을 강조했을까요. 당시 민중이 신화적, 종교적 세계관에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무슨 죄목으로 극약을 먹고 죽었는지 생각해보시죠. 불경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똑같은 처벌을 받고 망명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는 필연과 우연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우연이란 있지 않고 단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사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입니다. 사물에는 질서가 있다는것이죠. 그러나 인간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신비로워 보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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