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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 윤리학에 관해 주저리 주저리 1^^...

# 규범 윤리학 #

 

- 의미 : 당위에 관한 학문이라는 의미.

‘~을 해야 한다’, ‘~이어야 한다’ 등의 도덕 판단으로 표현.

- 이러한 도덕 판단의 기초, 토대 : <이성>

- 그런데 <이성>의 의미나 그 기능(또는 작동 방식)은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성>의 의미나 작동 방식은 시대적인 인간의 삶․문화 형태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또한 인간의 삶․문화 형태는 <이성>의 <대상>인 <인간 자신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그런데 세계에 대한 이성의 파악은 궁극적으로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법칙성, 즉 필연성을 파악하는 데 있다. 이러한 필연성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가지 형태로 나뉘게 되는데, 그 하나는 인간 삶의 필연성, 즉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당위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법칙이 가지고 있는 필연성, 즉 사실관계가 가지고 있는 필연성에 관한 것이다.

-고대에서는 이 둘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즉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후로 가게 되면 인간이 자연 존재이면서도 여타의 다른 자연 존재들과는 구별된다는 특성에 따라서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 관계에 초점을 두게 된다. 이는 인간을 여타의 다른 자연 존재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을 강조하게 되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그 특성을 ‘자유의지’로 보았다.

-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방점을 두고서 대체로 윤리의 보편성, 절대성을 강조하는 목적론적 윤리설과 법칙론적 윤리설, 공리주의 등의 규범 윤리학에서 나타난다.

- 다른 한편으로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방점을 두고서 대체로 윤리의 특수성과 상대성을 강조하는 상대론적 윤리설 등의 메타윤리학에서 나타난다.

- 아래에서는 규범 윤리학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 고대 그리스 윤리학 1 : 플라톤

- 플라톤의 윤리학은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 <이성>은 이데아 세계의 진리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인간은 바로 그 진리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 그런데 이데아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하는 현실 세계의 원본이면서도 이 현실계와 분리되어 있다.

- 그렇다면 <이성>은 이 이데아 세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이성은 현실세계를 분석하고 쪼개고 따져서 이데아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데아 세계는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오로지 도를 깨치듯이 아는 방법, 즉 직관을 통해서 이데아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그 당시의 <신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그런데 이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 당시의 인간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도시국가(폴리스)의 시민 성인 남성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 고대 그리스 윤리학 2 : 아리스토텔레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비판하였다.

예) ‘개(dog)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범신론적이고 경험론적인 형상론과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 <이성>의 목적은 <순수형상>, 즉 <신>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신>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 그런데 이 <신>은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 이 <신>은 이데아 세계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이 <신>은 <직관>을 통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분석하고 쪼개고 따지는 연역적 방법>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 그런데 이 <직관>은 그것이 참된 것이니, 거짓된 것인지 확인․증명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개인 또는 몇몇이 신의 뜻을 빌러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인간의 삶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 이 <신>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 인간 삶(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 이르는데, 이 행복은 현실 세계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연역적으로 파악하는 <이성적 활동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 그리고 이러한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중용이란 현실 세계의 이런 저런 변화에, 그리고 그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임의적인 주관에 휘둘리지 않는,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불변의 이성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질적인 삶에 휘둘려 살지 않고 <과학적인 태도>의 삶을 견지하는 것을 말한다.

- 그런데 이런 변화의 현실은 필연적인 신의 뜻이므로, 당시의 모든 정치․경제․계층적 삶은 신의 뜻에 의한 것이다.

 

** 고대 로마의 윤리학 1 : 스토아학파

- 고대 로마의 문명은 고대 그리스의 문명을 계승․발전시킨 문명이다. 그러므로 고대 로마의 윤리학 역시 고대 그리스 윤리학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러한 고대 로마의 윤리학 가운데 하나가 스토아학파가 내세우는 윤리학이다. 스토아학파가 내세우는 윤리학은 금욕의 윤리학이다.

- 고대 그리스의 윤리학의 쟁점은 참된 진리가 어느 정소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이성의 작동 방식이 달라지는 데 있다. 그런데 스토아학파가 문제 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이성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가>였다.

- 스토아학파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 작동 방식이 암묵적으로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의 물질적인 변화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 이것은 곧 물질적인 측면에서 금욕주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고, 금욕주의를 통해 마음의 평정, 고요함(부동심)을 얻은 후에야 이성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과학적 태도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 과학적 태도․실천은 곧 윤리적 태도․실천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고대 로마의 윤리학 2 : 에피쿠로스학파

- 절제와 평정을 강조했던 스토아학파와는 달리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를 주장했다.

-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은 <자유의지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 에피쿠로스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와는 달리 자연의 필연적 인과율을 거부하는 비결정론적인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의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의 필연적 인과율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신의 의지, 뜻(자연법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인간 이외의 여탸 다른 생명체와 인간 사이의 어떠한 구별․분리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의’ ‘윤리’는 성립될 수 없다. ‘인간의’ ‘윤리’가 성립되려면 인간 이외의 여타 다른 생명체와 구별될 수 있는 특성이 인간에게 존재해야 한다. 그러한 특성이 바로 ‘자유의지’라 하겠다.

- 자유의지는 자연법칙을 파악하는 능력 이외의 것이다. 자연법칙을 파악하는 능력은 자연을 분석하고, 쪼개고, 따져서 그 본질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이렇게 해서 파악된 여러 개별적인 자연법칙 그 자체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결론적으로 동물의 삶의 방식과 구별되지 않는다. 인간은 단순히 이러한 법칙들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법칙들을 자신의 삶의 목적에 맞게 종합․통일시킨다. 이렇게 종합․통일시켜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현실화하는 것이 자유의지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런데 자유의지의 실현은 이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학파의 윤리학 역시 이성을 통한 자유의지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이성은 분석하고, 쪼개고 따지는 능력이 아니라 종합하고 통일시키는 능력이 된다.

- 또한 동시에 이러한 능력은 과학적 실천의 기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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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미술의 위기(16세기 후반 유럽) 2

▲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cos Theotocopoulos : 1541?-1614) ▼

- 이 사람은 “보통” “간략하게 ‘그리스인’이라는 의미의 엘 그레코(El Greco)로” 불렸는데,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의 화가”로서 “16세기의 화가들 중에서 틴토레토의 화법을 한층 더 밀고 나간 사람”이다. (371쪽)

- 엘 그레코가 베네치아로 갔다가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한 이후에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감동적이고 극적인 환상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엘 그레코가 틴토레토를 능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는 아직도 미술에 관한 중세의 이념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73쪽)

- “도판 238(<요한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 p.372)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놀랍고 흥미진진한 것 가운데 하나다.” (373쪽)

- “흥분된 몸짓을 하고 있는 나체의 인물들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인 흰 두루마기를 받기 위해서 무덤에서 일어난 순교자들이다. 제아무리 정확하고 빈틈없는 소묘력을 가진 화가라 할지라도 성인들이 이 세상의 파괴를 요구하는 최후의 심판날의 그 무서운 광경을 이처럼 무시무시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373쪽)

- “틴토레토의 한 쪽으로 치우친 비정통적인 구성 방법에서 엘 그레코는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고 또 파르미자니노의 기교를 부린 <마돈나>(도판 234, p.365)에서와 같이 인물을 길쭉하게 그리는 매너리즘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73-4쪽)

- “그의 작품은 믿기 힘들 만큼 매우 ‘현대적’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스페인 사람들은…… 반감 같은 것은 가지지 않은 것 같다.” (374쪽)

- “그의 가장 위대한 초상화들(도판 239 <펠릭스 오르텐시오 파라비시노 수사>, p.373)은 티치아노의 초상화(p.333, 도판 212)에 비견될 수 있다.” (374쪽)

 

 

▲ 북쪽(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 미술가들의 위기 ▼

- “남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롭고 놀라운 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제와 씨름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회화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었다. 이 커다란 위기는 종교 개혁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 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374쪽)

- 또한 거대한 제단화나 프레스코화를 그린다는 것은 캘빈 교도들에게는 일종의 사치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화가들의 정상적인 수입원으로 남게 된 것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과연 그것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374쪽)

 

 

▲한스 홀바인(아들)(Hans Holbein the Younger : 1497-1543) ▼

- “우리는 이러한 위기의 영향을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 화가인 한스 홀바인(아들)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374쪽)

- 도판 240(<성모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p.375)을 살펴보자. “이 그림의 형식은 모든 나라에서 전통적인 것으로서, 우리는 이미 이런 형식이 <윌튼 두폭화>(p.216-17, 도판 143)나 티치아노의 <페사로의 성모>(p.330, 도판 210)에 적용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홀바인의 그림은 이러한 종류의 그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76쪽) 즉 완벽한 삼각형의 구도(이 삼각형의 구도의 원리는 중세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인물 배치 구도이다 ; 성모와 예수가 무대의 정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동일한 거리 내에 헌납자들의 가족들이 왼쪽에는 남성들로, 오른쪽에는 여성들로 배치되어 있다)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 “고전적 형태의 감실(龕室)에 둘러싸인 고요하고 품위 있는 성모 양쪽에 헌납자의 가족들을 별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배치해 놓은 방법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조반니 밸리니(p.327, 도판 208)와 라파엘로(p.317, 도판 203)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조화로운 구성을 상기시켜 준다. 세부 묘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인습적인 아름다움을 다소 무시하는 것으로 보아, 홀바인은 북유럽에서 화가 수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376쪽)

- 도판 242(<리처드 사우스웰 경>, p.377)를 살펴보자. “홀바인의 이러한 초상화들에는 드라마틱한 것은 하나도 없고 사람의 눈을 끌 만한 것도 없으나 이 그림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모델의 마음과 인품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다. 홀바인이 그 인물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호의 없이 본대로 충실하게 그린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376-9쪽)

- “홀바인이 이 인물을 이 그림에 배치한 방법을 보면…… 전체 구성이 아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아주 ‘알기 쉽게’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홀바인이 의도한 것이었다.” (379쪽)

- 홀바인은 “그의 초기의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배경, 즉 평소에 그 인물이 가까이 했던 것들을 통해서 주인공의 특성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세부를 묘사하는 그의 탁월한 솜씨를 여전히 과시하려고 했다(도판 243<런던의 한 독일 상인 게오르크 기체>, p.378).” (379쪽)

-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고 기법이 완숙해감에 따라서 그러한 트릭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도 않았으며 또 초상 인물로부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게 의도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높이 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거장다운 절제 때문이다.” (379쪽)

 

 

▲ 니콜라스 힐리어드(Nicholas Hilliard : 1547-1619) ▼

- 홀바인이 죽자 독일어권과 영국의 회화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가운데서도 홀바인이 지켜낸 유일한 분야가 초상화인데, 이 초상화 분야에서도 “남유럽의 매너리즘 취향이 나타나고 홀바인 풍의 간결한 양식 대신에 귀족적인 세련과 우아함이 이상시되었다.” (379쪽)

- “이런 새로운 유형의 최고 수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젊은 귀족의 초상화(도판 244 <들장미 곁의 젊은이>, p.379)”인데, 이 초상화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이었던 유명한 영국의 화가 힐리어드가 그린 ‘세밀화’이다.” (379쪽)

- “아마도 이 세밀화는 청년이 구애를 하고 있는 숙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 그린 그림 같다.” (379쪽)

 

 

▲ 16세기 후반 네덜란드 미술의 상황 ▼

-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을 통해 일찌감치 부를 축적하였고, 이러한 부의 축적은 곧바로 상인계급, 즉 부르주아지를 경제적․정치적으로 급성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급성장은 네덜란드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중세 가톨릭의 규제를 덜 받고 그만큼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 종교 개혁이 가져왔던 엄청난 역사적 파장도 네덜란드에서는 그닥 큰 파장을 가져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교 개혁은 부르주아지들이 깊숙이 연관된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시대적 배경은 네덜란드의 미술, 특히 회화의 영역을 다양하게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 “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무사하게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 그들은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그러한 모든 유형을 전문화하였다.” 신교 교회의 신도들 대부분은 상인계급, 즉 부르주아지였다. “일찍이 반 에이크의 시대로부터 네덜란드의 미술가들은 자연을 모방하는 데 완벽한 대가들로 정평이 나 있었다.” (380쪽)

- “따라서 더 이상 제단화나 기타 다른 종교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진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공인된 전문적 특기를 사줄 수 있는 시장(市場)을 발견하려고 애썼고, 또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솜씨를 과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381쪽)

- 그림을 살 수 있는 부를 가지고 있는 계급이 부르주아지였고,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일상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들을 선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일상 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들을 뒤에 가서 소위 ‘풍속화(genre painting)’라고 부르게 되었다. (381쪽)

 

 

▲ 피터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 : 1525?-69, 아버지) ▼

- 브뢰헬은 “16세기 플랑드르 최대의 풍속화가”였다. (381쪽)

- 도판 245(<화가와 고객>, p.380)를 보면, 브뢰헬은 “뒤러나 첼리니에게”서처럼 “미술과 미술가의 존엄성을 중요”시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에서 화가의 뒤에서 “지갑을 만지작거리는” 고객(부르주아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붓을 들고 그림 작업을 하고 있는 화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381쪽)

- “브뢰헬이 주로 그렸던 그림의 ‘종류’는 농민들의 생활 장면이었다. 그는 농부들이 떠들썩하게 술잔치나 축제를 벌이고 일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381쪽)

- “브뢰헬이 그린” 풍속화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시골의 결혼을 다룬 유명한 작품”은 도판 246(<시골의 결혼 잔치>, p.382)이다. (382쪽)

- 이 그림에서 “넘치는 기지와 뛰어난 관찰력으로 묘사된 이처럼 많은 일화들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브뢰헬이 비좁다거나 번잡스러운 인상이 전혀 들지 않게 그림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틴토레토라 하더라도 이렇게 수많은 인물들이 가득 들어찬 공간을 브뢰헬만큼 교묘한 수단으로 더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383쪽)

- “식탁은 원근법에 의해서 뒤로 후퇴하고 있고, 인물들의 움직임을 배경에 있는 헛간 입구의 군중들로부터 시작해서 전경의 음식을 나르는 두 사람을 거쳐 음식을 받아 상 위에 올려놓는 사람을 통해서 다시 배경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바로 이 음식을 옮겨 놓는 사람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곧장 조그맣게 그려졌지만 회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흐뭇한 표정의 신부에게로 향하게 된다.” (383쪽)

- “이 유쾌한, 그러나 결코 단순하다고 할 수 없는 그림들에서 브뢰헬은 풍속화라는 미술의 새로운 왕국을 발견했다. 그 이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 왕국을 더 완벽하게 개척해 나갔다.” (383쪽)

 

▲ 16세기 후반 프랑스 미술의 상황 ▼

-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미술의 위기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탈리아와 북유럽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는 양쪽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프랑스 중세 미술의 굳건한 전통이 처음에는 이탈리아 미술의 유입으로 위협을 받았다. 프랑스 화가들은 네덜란드 화가들(p.357, 도판 228)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미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 상류 계급이 마침내 받아들인 이탈리아 양식은 첼리니 유형(도판 233)의 세련되고 우아한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이었다.” (383-4쪽)

 

 

▲ 장 구종(Jean Goujon : 1566? 사망) ▼

- “이탈리아 미술의 이러한 영향을 우리는 프랑스 조각가 구종이 만든 분수의 부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도판 248 <님프>). 이들 흠 잡을 데 없이 우아한 인물상들과 좁고 긴 면적에 인물을 적절하게 짜맞추어 넣는 방법에서 우리는 파르미자니노의 까다로운 우아함과 잠볼로냐의 절묘한 기교를 함께 엿볼 수 있다.” (384쪽)

 

 

▲ 자크 칼로(Jacques Callot : 1592-1635) ▼

- 칼로는 “틴토레토, 더 나아가 엘 그레코와 같이”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인물들과 예기치 않은 광경을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결합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수법을 구사하여 브뢰헬처럼 부랑자, 군인, 병신, 거지, 떠돌이 악사들의 생활 정경(도판 249 <두 이탈리아 광대>, p.385)을” 그렸다. (3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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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미술의 위기(16세기 후반 유럽) 1

18장. 미술의 위기(16세기 후반 유럽)

 

 

▲ 16세기 후반 이탈리아 젊은 미술가들의 문제의식 ▼

- “1520년 경 이탈리아 도시들의 모든 미술 애호가들은 회화가 완성의 극에 달했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레오나르도 등은 그전 세대가 이룩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실제로 해냈다.” (361쪽)

- 젊은 미술가들과 미술 지망생들은 이들을 모방하고 따르는 데 열중했다.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의 유행에 휩싸여 단순히 그의 수법(manner)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보는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매너리즘(mannerism) 시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 모두가 어려운 포즈를 취한 나체들만 모아 놓으면(“미켈란젤로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자세의 나체상을 즐겨 그렸다.”) 그림이 된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었다.” (361쪽)

- 그래서 이 젊은 미술가들은 이전의 거장들과는 달라 보이는 기발하고 색다른 것을 추구함으로써 이전의 거장들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하였다. 물론 이전의 거장들 역시도 이러한 실험적이고도 독창적인 창안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였다. 그래서 “선배들(이전의 거장들)을 능가하려는 이들(젊은 미술가들)의 미친 듯한 노력 그 자체가 그들의 과거의 거장들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였다.” (362쪽)

 

 

▲ 페데리코 추카리(Federico Zuccari : 1543?-1609) ▼

-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다소 재미있는 디자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건축가이자 화가인 추카리가 설계한 얼굴 모양의 창문(도판 231)은 이러한 기발한 창안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보여 주는 좋은 예다.” (362쪽)

 

 

▲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 : 1508-80) ▼

- 추카리와는 달리 “다른 건축가들은 그들의 박식과 고전 작가들에 관한 지식을 과시하는 데 더 열을 올렸는데, 사실 그들은 이런 점에서 브라만테 세대의 거장들을 능가했다. 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박학했던 사람은 건축가 팔라디오였다.” (362-3쪽)

- “도판 232(<비첸차 부근의 빌라 로톤다>, p.363)는 비첸차 근처에 있는 그의 유명한 별장인 <빌라 로톤다(Villa Rotonda)>이다. 이것도 어떤 점에서는 ‘기발한 창안’에 속한다. 왜냐하면 사면이 동일하며, 하나의 중앙 홀을 중심으로 각 면이 신전의 정면 형태를 한 현관을 가지고 있어 로마의 판테온(p.210, 도판 75)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363쪽)

- “하지만 그 구성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할지라도 이것은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부적합한 것 같다. 기발함과 인상적인 효과에 대한 추구가 건축의 일반적인 목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363쪽)

 

 

▲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 1500-71) ▼

- 첼리니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미술가”로서 “피렌체의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였다.

- “첼리니의 태도는 그전 세대가 했던 것보다 더 흥미롭고 비범한 것을 만들려는 당대의 불안정하고 열광적인 노력들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364쪽)

- 이러한 전형을 “몇 안 되는 그(첼리니)의 작품 중에 1543년에 프랑스의 왕을 위해 만든 금제 소금 그릇(도판 233 <소금 그릇>, p.364)”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그릇에서 “첼리니가 만든 매끈하고 우아한 인물 모습은 약간 지나칠 정도로 정교하고 장식적이라” 할 수 있다. (364쪽)

 

 

▲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 1503-40) ▼

- 첼리니와 동일한 태도를 “코레조의 제자였던 파르미자니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364쪽)

- 도판 234(<긴 목의 마돈나>, p.365)의 “작품은 일명 <긴 목의 마돈나>라고도 불리는데 그 까닭은 이 화가가 성모를 자기 나름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나머지 성모의 목을 마치 백조처럼 길쭉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367쪽)

- “그는 인체의 비례를 기묘한 방식으로 길게 늘여놓았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가진 성모의 손, 전경에 있는 천사의 긴 다리, 초췌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펼쳐보고 있는 비쩍 마른 예언자 등은 마치 일그러진 거울에 비친 상처럼 보인다.” “이러한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그(파르미자니노)는 이 그림의 배경에 인체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비례를 가진 괴상한 모양의 높은 원주를 세워 놓았다.” (367쪽)

- “이 그림의 구도는 그가 종래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조화를 기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파르미자니노는 자기가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여진 형태를 좋아한다는 것을 열심히 보여 주려고 했다.” (367쪽)

- 이러한 방식은 파르미자니노의 일관된 방식이었고, 문학에서 고전주의로부터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사실 선배 거장들이 이룩해 놓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엇인가 새롭고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창조하고자 모색했던 파르미자니노를 비롯한 그 당시의 모든 미술가들은 아마도 최초의 ‘현대적인’ 미술가들이었을 것이다.” (367쪽)

- “소위 ‘현대’ 미술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미술도 이들처럼 분명한 것을 피하고 인습적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는 다른 어떤 효과를 이룩하고자 하는 욕망에 그 근본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367쪽)

- ‘현대적인 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에 기초한 해체주의, 아방가르드 쪽 계열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장 드 불로뉴(Jean de Boulogne : 1529-1608) ▼

- 파르미자니노처럼 “선배들을 능가하려고 그처럼 절망적으로 노력”했던 몇몇 뛰어난 미술가들 중의 한 사람이 “이탈리아 이름으로는 조반니 다 볼로냐(Giovanni da Bologna) 혹은 잠볼로냐(Giambologna)라고 알려진 플랑드르의 조각가” 불로뉴이다. (367쪽)

- 도판 235(<머큐리 상>, p.366)을 살펴보자. “그(잠볼로냐)는 여기서 불가능한 것을 성취하고자 하였다. 즉 생명이 없는 물체의 무게를 극복하고 공중을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조각상을 창조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까지 성공하였다.” (367쪽)

- “이 조각상은 아주 교묘하게 균형이 잡혀 있기 때문에 실제로 공중에 떠서 빠르고 유연하게 날아가는 것 같이 보인다.” 이것은 기존의 조각상들이 땅에 힘차게 발을 딛고 서 있는 것과는 반대로 하늘을 날아가는 것처럼 함으로써 정통적인 조각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인지해 주고 있다. 이것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전기의 조각가라면, 심지어 미켈란젤로까지도 그러한 효과는 본래의 무거운 재료 덩어리를 생각나게끔 하는 조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368쪽)

 

 

▲ 야코포 로부스티(Jacopo Robusti : 1518-94, 통칭 틴토레토(Tintoretto) ▼

- “16세기 후반의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바로 틴토레토였다. (368쪽)

- 틴토레토 역시 “역시 티치아노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형태와 색채에 있어서의 단순하 아름다움에 진력이 나 있었다.” (368쪽)

- 틴토레토가 티치아노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그 불만은 “예외적인 것을 만들어 내려는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티치아노의 작품은 성격의 엄숙한 이야기와 성자의 전설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할 만큼 열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368쪽)

 

 

▲ 틴토레토의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도판 236, p.369) ▼

- 틴토레토는 이 그림에서 “성경의 이야기들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그린 사건의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368쪽)

- “이 그림은 성 마르코의 유해를 (‘이교도’인 회교도들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왔던 이야기 중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368쪽)

- “얼핏 보면 이 그림은 혼란스럽고 번잡하다.” (368쪽) 왜냐하면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과 어둠, 원경(遠景)과 근경(近景) 및 조화가 결여된 몸짓과 동작” 때문이다. (371쪽)

- 먼저 이 성경 이야기의 주인공인 <성 마르코>가 이전의 그림과는 달리 무대의 중앙에 위치해 있지 않고 구석으로 배치되어 있다. 또한 성 마르코는 시신으로, 또한 살아 있는 인간으로 이중적인 모습으로 처리되어 있다.

- 또한 양탄자 위에 널브러진 시신(성 마르코)은 “괴이한 단축법으로 그려져 있다.” (368쪽)

- 각 인물들의 동작과 행위 구성 원리는 이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빛의 명암이 이러한 구성의 원리라고 한다면, 성 마르코는 성경 이야기의 중심인물이니까 빛을 밝게 그린다고 하지만, 오른쪽에 배치된 커다랗게 놀란 몸짓을 보이는 남녀는 왜 빛을 밝게 그렸는지에 대한 이유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 이 남녀는 아마도 성인을 보고서 놀라는 몸짓인데, 그들의 시선은 성인을 향해 있지 않다.

 

 

▲ 틴토레토의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도판 237, p.370) ▼

- “런던에 있는” 이 그림은 “음산한 빛과 불안정한 색조가 어떻게 긴장감과 흥분된 감정을 고무시키는지를 보여준다.” (371쪽)

- 이 그림에서 “공주는 마치 그림 속에서 곧바로 우리들을 향해 달려 나올 것 같이 보인다. 한편 주인공인 성 게오르기우스는 일반적인 규칙과는 정반대로 주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배경 속에 멀리 들어가 있다.” (371쪽)

 

 

▲ 틴토레토에 대한 평가 ▼

- “틴토레토와 같은 사람은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했으며 또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그의 그림이 전설적인 장면에 대해서 그가 상상한 바를 전달하기만 하면 그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매끈하고 세심한 마무리 손질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보는 사람들의 주의를 그림의 극적인 사건으로부터 다른 데로 돌려 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았던 것이다.” (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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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새로운 지식의 확산(16세기 초 : 독일과 네덜란드)

17장. 새로운 지식의 확산 (16세기 초 : 독일과 네덜란드)

 

 

▲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업 3가지-북유럽의 평가 ▼

- ①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

- ② “아름다운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하도록 하였던 해부학에 관한 지식”

- ③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품위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고전 시대의 건축 형식에 관한 지식”

- 이러한 지식의 충격은 그러나 건축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왜냐하면 건축은 회화와 달리 대단히 기능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건축물들이 ‘공공’ 건물이었다. ‘공공’이라는 말은 중세 가톨릭교회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건축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이념을 현실화하는 기능적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 그러므로 이탈리아로부터의 “이 새로운 유행”이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자 원했던 군주와 귀족들의 줄기찬 요구에서 비롯”되었지만, “건축가들은 이런 새로운 양식의 요구를 대단히 피상적으로만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원주(圓柱)나 프리즈를 여기저기에 갖다 붙이는 식으로,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풍부한 장식적인 모티프에 약간의 새로운 고전적인 형식을 가미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건축 이념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과시했다. 건물의 본체는 고딕식으로 전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341쪽)

 

 

▲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 1471-1528) ▼

- 그러나 화가들은 건축에서의 기능들에 매어 있을 수 없었다. 이미 반 에이크와 같은 15세기 북유럽 화가들의 현실화(자연을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묘사, 즉 자연의 모방)라는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그 현실화를 새로운 미술 원리로서 자기화하려는 충동과 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뒤러는 이탈리아로의 “여행 중에” “사물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고 알프스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수채화로 옮기기도 하고 만테냐(pp.256-9)의 그림을 연구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공방을 열기 위해서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북유럽의 미술가가 남유럽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기법적인 성과들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343쪽)

 

 

▲ 뒤러의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도판 220, p.344) ▼

- 이 목판화에서 나타난 “뒤러의 상상력과 대중들의 관심은 중세 말엽 독일에서 무르익어 결국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폭발한, 교회 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과 불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343쪽)

- 이 목판화는 “성 요한의 계시록을 묘사한 일련의 대형 목판화”인데, “최후 심판 날의 공포와 그에 앞선 여러 가지 징후와 불길한 조짐들의 무시무시한 광경”을 “힘 있고 강력하게 시각화”시키고 있다. (343쪽)

- “이 위대한 한순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뒤러는 종래의 전통적인 포즈를 모두 버렸다. 살려둘 수 없는 적과 싸우는 영웅을 종래와 같이 우아하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뒤러의 성 미가엘은 일정한 포즈를 취하며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다. 그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큰 창으로 용의 목을 찌르려고 온 힘을 다해 두 손을 사용하고 있고 그 힘찬 몸짓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 이 천상의 싸움터 아래에는 뒤러의 유명한 서명과 함께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이 전개되어 있다.” (345쪽)

 

 

▲ 뒤러의 <풀밭>(도판 221, p.345) ▼

- “자연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던 얀 반 에이크 이래, 지금까지 어떤 예술가가 했던 것보다도 더 끈기 있게, 그리고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뒤러의 목적이었음을 그의 습작이나 스케치를 통해 알 수 있다. …… 예를 들면 뒤러의 토끼 그림(p.24, 도판 9)이나 풀밭의 일부분을 그린 수채화(도판 221)와 같은 것이다.” (346쪽)

- “뒤러는 자연을 모사하는 완전한 기술을 얻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유화와 동판화와 목판화로 삽화를 그려야 했던 성경의 이야기를 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346쪽)

 

 

▲ 뒤러의 <예수 탄생>(도판 222, p.347) ▼

- 고딕 미술은 성경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성경 이야기를 <자연의 모방>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통해 묘사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 <예수 탄생>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둘이 아주 자연스럽게 동화․통일된 것이 뒤러의 <예수 탄생>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러한 결합은 <예수 탄생>에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고딕 미술의 전통은 성경 이야기의 인물들로 나타나는데, 이 “인물들은 정말 작고 거의 중요치 않게 보인다. 이 그림을 보면 낡은 헛간에 쉴 자리를 마련한 마리아가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며 요셉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좁은 물통에 붓느라고 분주하다. 배경에서 경배를 올리고 있는 목동 한 사람을 찾아보려면 대단히 세심하게 그림을 음미해야 하며 또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는 전통적인 천사의 모습을 하늘에서 찾아보려면 확대경이 있어야 할 판이다.” (346쪽)

- 그러나 이 성경 이야기의 인물들의 배경인 “단지 낡고 무너진 담장”과 “이미 허물어진 외양간의 울퉁불퉁한” “금이 간 회벽”, “맞물리지 않은 기왓장들, 부서진 틈바구니에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벽, 지붕 대신 씌운 너덜너덜한 벽,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새”들이 “바로” 이 그림의 “주제인 것”처럼 “꼼꼼히” 묘사하고 있다. (346쪽)

- 이렇게 볼 때, 인물들과 배경의 결합에서 주된 것은 배경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배경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새로운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동판화에서 뒤러는 예술이 자연의 모방을 추구하고 시작한 이래로 고딕 미술의 발전을 총합하고 완성시킨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마음을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부여한 고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346쪽)

 

 

▲ 뒤러의 <아담과 이브>(도판 223, p,348) ▼

- “고딕 미술이 거의 도외시되었으나 이제 관심의 전면으로 부상한 새로운 목적을 바로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인체의 표현이었다.” (347쪽)

- “여기에서 뒤러는 반 에이크의 아담과 이브(p.237, 동판156) 같이 꼼꼼하고 충실하게 묘사된 경우조차도 실제 자연에 대한 단순한 모방이 남유럽 미술 작품들을 돋보이게 하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요소들을 창출해 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347쪽)

- “라파엘로는 이러한 문제에 당면했을 때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아름다움의 ‘어떤 이념’에 비추어 답을 구했는데(p.320), 그 이념은 그가 고전적인 조각과 아름다운 모델들로 수년 간 연구하는 동안에 익힌 것들이었다.” 그러나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확실한 법칙을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그러한 법칙을” “인체의 비율에 관한 고전 시대의 저술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347쪽)

- 뒤러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서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림으로써 인간의 체격을 왜곡시켰다. 평생 동안 몰두했던 이러한 연구의 첫 번째 결과 가운데 아담과 이브를 그린 동판화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아담과 이브>이다. (349쪽)

-다른 한편 “뒤러가 울퉁불퉁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의 어두운 그늘을 배경으로 희고 섬세하게 모델링된 인체의 분명한 윤곽을 돋보이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남유럽의 미술의 이상(가장 아름다운 인간 신체의 표현)을 북유럽의 토양에 이식시킨 최초의 진지한 시도에 감탄하게 된다.” (349쪽)

 

 

▲ 뒤러에 대한 소결론 ▼

- 뒤러의 4개의 작품을 통해서 뒤러의 화가로서의 고민의 진행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 먼저 도판 220의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에서 전통과 현실을 결합시키고자 한 뒤러의 의도가 기계적인 결합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 뒤러는 이러한 기계적 결합을 넘어서서 유기적인 조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그 노력의 일환으로 도판 221 <풀밭>이 나타나게 된다. 이 <풀밭>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경 이야기(전통)를 보다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나타난 작품이 도판 222의 <예수 탄생>이다. 성경 이야기의 일부인 예수의 탄생을 그 당시의 일상생활 속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그런데 성경 이야기의 주된 부분은 이야기 내용의 주체(subject)인 인물들이다. 이러한 인물들을 생명력이 충만한 현실성을 가지면서도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따라야 할 가장 완벽하게 아름다운 존재(Type)인 성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도판 223의 <아담과 이브>이다.

 

 

▲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uünewald) ▼

- “위대함과 예술적인 기량에 있어서 뒤러에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독일 화가”인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이 “화가가 그렸다고 확신되는” “작품들은 통상 ‘그뤼네발트’라는 라벨이 붙게 되었다.” (350쪽)

- “그는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발견들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미술의 이념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한도 내에서만 그것들을 활용했다.” (353쪽)

- “그에게 있어서 미술은 (뒤러처럼) 아름다움의 숨겨진 법칙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목적, 즉 중세의 모든 종교 미술의 목적인 그림으로 설교를 해 주고 교회가 가르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젠하임 제단화의 중앙 패널(도판 224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p.351)은 이 절대적인 목적을 위해서 다른 모든 문제들을 희생시켰음을 보여 준다.” (353쪽)

- 그 예로 “인물상의 크기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십자가 밑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손과 예수의 손을 비교해보기만 해도 그 크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뤼네발트는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하여 온 근대 미술의 법칙들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중요성에 따라서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들로 의도적으로 되돌아간 것이 분명하다.” (353쪽)

-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구세주의 뻣뻣하고 참혹한 모습에는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생각하는 그런 아름다움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뤼네발트는 수난절의 설교자처럼 이 고통스러운 장면의 무서움을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353쪽)

-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근대 미술의 원칙들을 모두 버린 것은 아니다. 그가 필요하다면 이 원칙들을 적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도판 225(<그리스도의 부활>, p.352)이다.

- 이 그림에서 그뤼네발트는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색채들을 통해 “휘황찬란한 빛을 남기고 무덤에서 막 솟아나와 승천하는 것 같이” 보이는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354쪽)

- 다른 한편 “땅 위에 쓰러져 있는 군인들의” 모습 사이에서 원근법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무덤 앞에 있는 군인들과 뒤에 있는 군인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입체성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이 한낱 이야기 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사실임을 강조함으로써 신도들에게 믿음에 대한 각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종교의 목적을 잘 전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 1472-1553) ▼

- "뒤러 세대에 세 번째로 유명한 미술가“가 크라나흐이다. (354쪽)

- 크라나흐는 “해묵은 산림과 낭만적인 풍경을 가지고 있는 알프스 북쪽 산기슭에 매혹되어 있었다.” “1504년에 크라나흐는 이집트로 도피하는 성(聖) 가족을 그렸다(도판 226 <이집트로 피난 중의 휴식>, p.354)” (355쪽)

- “이 시적인 새로운 구상은 로흐너의 서정적인 미술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p.272, 도판 176).” (355쪽)

 

 

▲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 1480?-1538) ▼

- “알트도르퍼는 숲과 산을 누비고 다니며 풍우에 시달린 나무와 바위의 형태를 연구했다. 그가 남긴 많은 수채화와 동판화, 그리고 유화 몇 점(도판 227, <풍경>)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으며 인물이 하나도 없다.” (356쪽)

-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변화이다.” “중세에는 종교적인 테마이든 세속적인 테마이든 분명한 이야기 거리를 다루지 않는 그림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356쪽)

 

 

▲ 얀 호사르트(Jan Gossaert) 또는 마뷰즈(Mabuse : 1478?-1532) ▼

- “독일의 뒤러처럼 적어도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고 노력했던” 16세기 초엽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옛날 장식에 대한 집착과 새로운 것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껶어야만 했다.” (356쪽)

- “도판 228(<성모를 그리고 있는 성 루가>)은” 마뷰즈의 “작품으로서 그러한 갈등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한 예이다.” (356쪽) 이 그림에서는 성경 이야기의 인물들과 그 배경이 따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왜 하필이면 성 루가가 성모상을 그리는 데 겉보기는 화려하지만 외풍이 있을 듯한 텅빈 궁전의 중정에 자리를 잡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되기도 한다.” (356쪽)

- “그 결과 이 그림은 확실히 대단한 매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모델들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조화미(색채를 가지고 인물이나 배경의 구성․배치를 조화롭게 통일시킨 회화의 원리)는 결여되어 있다.” (356쪽)

- 다른 한편, 이 그림은 15세기, 16세기 초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새로운 기법이 기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을 그린 방식은 얀 반 에이크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고, 그 배경은 이탈리아 방식, 즉 “과학적인 원근법에 대한 능숙한 솜씨, 그리고 고전기의 건축에 대한 조예와 능숙한 명암 처리 방법”에 충실히 따르면서 그것을 “과시하려 한 것 같이 보인다.” (356쪽)

 

 

▲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 ?-1516) ▼

- “이 화가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356쪽)

- 그렇지만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미술가들” 중의 한 사람인데, 보스는 “독일의 그뤼네발트와 같이 남유럽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물결에 휩쓸리기를 거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미술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356쪽)

- “그뤼네발트와 마찬가지로 보스는 현실을 가장 신빙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 발전되어 온 회화의 전통과 새로운 수법들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그럴 듯하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보스는 지옥의 광경을 소름끼치게 묘사한 화가로 유명하다.” (356쪽)

- 도판 229-30(<천국과 지옥>)을 보면 알 수 있다.

- “중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괴롭히던 공포심을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형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미술가는 역사상 보스 한 사람뿐일 것이다. 이러한 업적은 아마도 새로운 시대정신이 미술가들에게 그들이 본 것을 재현하는 방법을 마련해 주었고 반면에 구시대의 이념이 의연히 살아남아 있었던 바로 그 순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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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빛과 색채(16세기 초 :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16장. 빛과 색채(16세기 초 :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 16세기 초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미술의 특징 ▼

- 이 시기 이곳의 미술의 특징은 원근법과 맞먹는 빛의 명암을 사용하고 그 빛의 명암을 색채 구성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 빛의 명암을 처음 사용한 화가는 곰브리치가 마사초의 후계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꼽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도판 170, p.261)이다. 피에로는 빛을 “인물들의 형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 내는 원근법과 대등한 중요성을” (260쪽) 지닌 것으로 사용하였다.

- 이 시기 이곳의 화가들은 아마도 남부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인 피에로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만, 그러한 피에로의 영향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들은 빛을 인물들의 구성과 배치의 조화와 통일성의 원리, 수단으로까지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것은 베네치아의 지형적․기후적 특성과 연관 있어 보인다. “사물의 예리한 윤곽을 희미하게 만들고 휘황찬란한 빛 속에 사물의 색채들을 뒤섞이게 하는 환초로 둘러싸인 해변의 분위기가 이 도시의 화가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의 화가들이 해 왔던 거보다 더 신중하고 민감하게 색채를 사용했는지 모른다.” (325쪽)

- 이탈리아 남부 “피렌체의 위대한 개혁자들은 색채보다는 소묘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그림이 색채 면에서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나 한 그림 속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형태들을 하나의 통일된 구성으로 결합시키는 데 색채를 주된 수단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던 화가는 매우 드물었다. 그들은 채색하기 전에 원근법이나 구도로써 그러한 통일된 구성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베네치아 화가들은 색채를 그림 위에 덧붙이는 부가적인 장식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326쪽)

 

 

▲ 야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 : 1486-1570) ▼

- 산 마르코(San Marco) 성당 도서관(도판 207)을 지은 피렌체의 건축가가 바로 산소비노이다. “그는 자신의 양식과 작품을 그 도시 특유의 분위기, 즉 환초로 둘러싸인 해변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화려한 베네치아의 밝은 빛에 어울리도록 완벽하게 적응시켰다.” (325쪽)

 

 

▲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 1431?-1516) ▼

- 도판 208(<성모와 성인들>)을 살펴보자. “그림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도 전에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채들이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326쪽)

- “벨리니는 그림의 질서를 깨트리지 않고 이 단순한 대칭적인 구도 속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성모와 성인들의 전통적인 모습을 그 신성함과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사실적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변화시키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는 페루지노(p.314, 도판 202)가 어느 정도 그랬던 것과는 달리 살아 있는 인물의 다양성과 개성을 희생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페루지노의 인물 못지않게 보다 더 조용하고 아름다운 세계, 즉 이 그림을 꽉 채우고 있는 충만한 따뜻함과 초자연적인 빛이 스며든 세계에 소속된 사람들 같이 보인다.” (329쪽)

 

 

▲ 조르조네(Giorgione : 1478?-1510) ▼

- “조반니가 보여준 모범”처럼 “색채와 빛을 행복하게 사용하여 화면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한” “영역에서 가장 혁명적인 업적을 이룩했던 사람이다. 이 미술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그의 진작(眞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겨우 다섯 점밖에 되지 않는다.” (329쪽)

- 도판 209(<폭풍우>)를 살펴보자. “이 그림은 분명히 화면 전체에 스며 있는 빛과 공기에 의해서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뇌우의 섬뜩한 빛이 그림 전체를 지배한다. 또한 이 그림이 그 시초일 듯싶은데, 그림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움직이고 있는 무대가 되는 풍경이 이제는 단순한 배경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풍경은 그 나름대로 그림의 진정한 주제가 되고 있다.” “사물과 인물을 나중에 공간 속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 땅, 나무, 빛, 공기, 구름 등의 자연과 인간을 그들의 도시나 다리들과 더불어 모두 하나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거의 원근법의 창안과 맞먹는 새로운 영역을 향한 하나의 발돋움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회화는 그 자체의 비밀스런 법칙과 방안을 갖는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329-331쪽)

 

 

▲ 티치아노(Tiziano : 1485?-1576) ▼

- 조르조네의 이 위대한 발견(자연과 인간을 모두 하나로 생각해서 그림의 소재가 되는 모든 것들이 제각각의 진정한 주제가 되도록 하는 회화 기법)의 모든 결실을 얻은 화가로서 “모든 베네치아 화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티치아노였다. (331쪽)

- 티치아노의 “물감을 다루는 솜씨는” “그(티치아노)로 하여금 전통적인 구도의 모든 규칙을 무시하게 했으며 파괴한 듯이 보이는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색채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331쪽)

- 도판 210(<성모와 성인들과 페사로 일가>)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조반이 벨리니의 그림 <성모와 성인들>(도판 208, p.327)보다 불과 약 15년 뒤에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조반니 벨리니의 그림에서처럼 성모 마리아를 그림의 중앙에 두고 시중 드는 두 성인을 대칭되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 성모를 그림의 중심에서 이동시켰으며 두 성인을 이 장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는데 이것은 거의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331쪽)

- 이것은 다가올 근대사회의 특성, 즉 개개인이 모두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된다는 근대사회의 이념인 자유(인물들의 자유로운 배치)와 평등(인물들 누구나 이 장면에 능동적으로 참여, “권위의 상징”인 “열쇠”가 “성모의 왕좌 아래의 계단에” 놓여 있음(331쪽)-이는 범신론의 특성이기도 함)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사람들은 “처음에” 이 “그림이 한 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 예기치 않는 구도는 전체적인 조화를 깨트림 없이 오히려 그림을 생기 있고 활기차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티치아노가 빛과 공기와 색채로써 이 장면을 통일시켰기에 가능하였다.” (332쪽)

- “단순한 깃발 하나를 가지고 성모의 모습과 대칭을 이루게 한” 것은 역사적․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부르주아가 정치적으로 교황청에 대적할 만큼 성장하였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332쪽)

- 도판 212, 213(<젊은 영국인>)을 살펴보자. “티치아노가 당대에 그처럼 큰 명성을 얻은 것은 초상화 때문이었다.” “이 그림에는 레오나르도의 <모나 리자>(도판 193, p.301)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세밀한 입체감의 묘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무명의 젊은 영국인은 모나 리자처럼 신비하게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이 꿈에 잠긴 듯한 눈동자는…… 영혼이 담긴 강렬한 표정으로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 같다(도판 213).” (333-334쪽)

-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은 도판 214(<교황 바오로 3세와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그의 동생 오타비오 파르네세>)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이 그림은” “티치아노가 황제 카를 5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를 떠나 독일로 그의 초상을 그리러 갔기 때문에”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되었다.” (335-337쪽)

 

 

▲ 코레조(Correggio)라 불리운 안토니오 알레그리(Antonio Allegri : 1489?-1534) ▼

- 코레조는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16세기 초기의 이탈리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과감한 혁신가로 평가”되었다. (337쪽)

- “아마도 그는 북부 이탈리아의 인근 도시들에서 레오나르도 제자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의 명암법을 배울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후대의 여러 유파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완전히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명암법에 관한 것이었다.” (337쪽)

- 도판 215(<거룩한 밤>)를 살펴보자. “왼쪽의 복잡한 장면에 대응하는 군상(群像)들이 오른쪽에는 없으므로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성모와 아기 예수에게 빛을 던져 강조함으로써 전체 그림은 균형을 이루게 된다. 코레조는 색과 빛을 사용하여 형태에 균형을 주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발견을 티치아노보다 더욱 잘 활용하였다.” (337쪽)

- “코레조 이후 세대의 수많은 화가들이 수세기 동안 그처럼 반복해서 모방한 이 화가의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가 교회의 천장과 둥근 지붕에 그림을 그리는 장식이다.” (337-339쪽)

- 이 장식의 대표적인 작품이 도판 217(<성모의 승천>)이다. 코레조는 “아래의 본당에 있는 신도들에게 천장이 열려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하늘의 영광을 곧장 바라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빛의 효과를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그의 능숙한 기술로 인해 그는 햇빛을 가득 받은 구름으로 천장을 채우고 그 구름들 사이로 천사들의 무리가 다리를 아래로 늘어트린 채 빙빙 떠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339쪽)

- 도판 216(<성모의 승천 : 파르바 대성당으 천장화를 위한 습작>)을 보면 “코레조가 단지 몇 번의 분필 자국만으로 그처럼 넘쳐흐르는 빛을 암시할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단순하 회화 수단을 구사했는지를 알게 된다.”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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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조화의 달성(16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2

▲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 1449-94) ▼

- “콰트로첸트 말엽 피렌체의 지도적인 화가의 한 사람이었으며,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다.” (303쪽)

- 콰트로첸트 시기의 다른 화가들처럼 성경 이야기(전통)와 현실의 조화를 꾀한 화가이다. 고촐리에 비견된다 할 수 있다.

- “그는 성경 이야기를 마치 그의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를 중심으로 하는 피렌체의 부유한 시민들 사이에서 방금 일어난 사람인 것처럼 재미있게 표현할 줄 아는 작가였다.” (303쪽)

- “도판 195(<성모의 탄생>)는 성모 마리아의 탄생을 묘사한 그림으로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의 친척들이 찾아와서 그녀에게 축하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여기서 15세기 말의 한 화려한 저택의 내부와 상류사회 숙녀들의 의례적인 방문 장면을 보게 된다. 기를란다요는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방법과 눈을 즐겁게 해 주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303쪽)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ounarroti : 1475-1564) ▼

- “16세기(친퀘첸토) 이탈리아 미술을 그렇게 빛나게 한 두 번째 피렌체 미술가는 미켈란젤로였다.” (303쪽)

-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시체를 해부하고 모델을 보고 직접 소묘하며 인체의 비밀을 모두 알 때까지 인체 해부학에 관한 나름대로의 연구를 계속했다.” (304쪽)

- “그러나 인간을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매혹적인 수수께끼 중의 하나로 본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미켈란젤로는 이 하나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겠다는 일념으로 분투 노력하였다. 그의 집중력과 기억력은 대단히 탁월했으므로 얼마 안 가서 그리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자세나 동작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304쪽)

- 미켈란젤로가 “30살이 될 무렵” “피렌체 시는 영광스럽게도 그와 레오나르도에게 시의회의 대회의실 벽면에 피렌체 시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다.” (304-5쪽)

 

 

▲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

- 도판 197, 198(<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을 살펴보자. 이 천장화에서 “미켈란젤로가 후대에게 제시해 준 항상 새롭고 풍요로운 착상들, 그리고 모든 세부를 묘사하는 정확한 솜씨와 그 비전의 장대함을 인류에게 천재의 능력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307쪽)

- 이것을 헤르메티시즘이 가지고 있는 범신론적 성격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신분제 질서로 꽉 짜여진 중세로부터 다양한 개인의 생존과 자유를 보장하는 근대로의 열망을 잘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 곰브리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엄청난 작업조차도 늘 새로운 형상들을 창조하려는 그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이 그림들 사이의 경계에 또 다시 수많은 인물상들을 그려 넣었다.” “이들 놀라운 인물상들은 미켈란젤로가 어떤 자세이든지, 어떤 각도에서든지 인체를 능수능란하게 그리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 준다.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는 이 젊은 운동선수들은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몸을 틀어 돌리고 있으나 언제나 우아함을 잃지 않고 있다.” (308쪽)

 

 

▲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 중 리비아 무녀를 위한 습작> ▼

- 도판 199(<시스티나 천장화 중 리비아 무녀를 위한 습작>)를 보면, “우리는 미켈란젤로가 모든 세부를 얼마나 세심하게 연구하였으며 소묘를 통해 각 인물상들을 얼마나 주의깊게 준비했는지 잘 알고 있다.” (310쪽)

 

 

▲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

- 도판 200(<아담의 창조>)은 도판 198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중앙 부분에 있는 것이다.

- 이 그림을 보면 헤르메티시즘을 단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다. 아담과 The One의 손가락으로 연결되어 있음은 인간의 세계(지상계)와 신의 세계(천상계)가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 두 세계가 상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The One이 “인간답게 힘차고 아름다우며” “의연하고 힘차”게 나타난 것으로 알 수 있다. 물론 The One이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두 세계가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범신론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 ▼

- 도판 201(<죽어가는 노예>)은 도판 200(p.312, <아담의 창조>)와 대비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에서 힘찬 젊은이의 아름다운 육체 속으로 생명이 불어 넣어지는 순간을 묘사한 반면에 <죽어가는 노예>에서는 생명력이 막 꺼지려 하고 육체가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는 순간을 선택했다.” (310-2쪽)

- 그런데 이 두 그림은 삶과 죽음의 단순한 단절과 대비를 표현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 시기로 보면, 중세 봉건 체제의 쇠퇴와 해체, 그리고 새로운 근대의 부상이라는 단절과 그 단절을 통한 역사의 연속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이 역사적 시기와 맞물려서 미켈란젤로 자신의 미술가로서의 지위에 관한 단절과 연속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 <죽어가는 노예> : 중세 봉건제의 쇠퇴와 해체 ; 중세 기독교와 교황청의 시녀로서의 미술가로서 자신의 부정.

- <아담의 창조> : 새로운 근대의 부상 ; 중세 기독교와 교황청 그리고 신학으로부터 독립한 미술가로서의 새로운 삶.

- 이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를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는 존경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성질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대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퍽 의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미술가의 지위는 그가 젊은 시절에 의식하고 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실제로 그는 77세 때에 한 이탈리아 인이 ‘조각가 미켈란젤로 앞’이라고 편지를 썼다고 해서 그 편지를 받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조각가 미켈란젤로 앞이라고 편지를 보내지 말라고 그에게 전하시오. 왜냐하면 여기서 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로 통하고 있으니까…… 나는 공방을 경영하고 있는 화가나 조각인 적은 한 번도 없었소…… 내가 교황들에게 봉사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었소.”” (313쪽)

 

 

▲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 1446-1523) ▼

- 페루지노는 “소위 ‘움브리아 파’의 지도자”로서 “감미롭고 경건한 화풍의 제단화를” 그리던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315쪽) 그리고 라파엘로 산티의 스승이기도 했다.

- “그(페루지노)의 성공적인 작품들 중에는 그가 전체적인 화면의 균형을 깨트리지 않으면서도 공간의 깊이를 묘사하는 방법과 인물들이 거칠고 딱딱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를 구사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작품”이 있다. (315쪽)

- 그 작품이 도판 202(<성 베르나르두스에게 나타난 성모>)이다. 그런데 페루지노가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얻기 위해서 희생시킨 것이 있다. 즉 콰트로첸토의 거장들이 그처럼 정열적인 애착을 가지고 추구했던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어느 정도 포기했던 것이다.” (315쪽)

 

 

▲ 라파엘로 산티(Raffaello Santi : 1483-1520) ▼

- 도판 203(<대공(大公)의 성모>)을 살펴보자. 이 그림에서 “우리는 라파엘로가 페루지노의 인물 유형의 조용한 아름다움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의 어딘가 공허한 듯한 규칙성과 제자의 그림에서 보이는 충만한 생명력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입체감 있게 묘사되어 어둠 속으로 물러나는 성모의 얼굴, 자연스럽게 늘어트려진 옷자락 속에 싸인 육체의 볼륨,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확고하고 애정 어린 자세 등 모든 것이 완벽한 균형의 효과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약간만 변경해도 그것이 전체의 균형을 깨트리게 되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구도에는 긴장감이라든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 이 그림은 마치 이것 이외의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없으며 태초부터 그렇게 존재했었던 것 같이 보인다.” (316쪽)

 

 

▲ 라파엘로의 <요정 갈라테아> ▼

- 이 그림은 일단 신플라톤주의의 경향 중에서도 플라톤의 이데아의 대립 구조를 각 인물들의 구성 배치에 적용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의 대립 구조는 선의 이데아를 중심으로 각각의 이데아들이 대립 쌍을 이루며 원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의 요정 갈라테아는 선의 이데아에 비견된다. 그리고 화살을 갈라테아의 가슴에 겨냥하고 있는 세 명의 큐피드와 헤엄치고 있는 큐피드는 모두 4인데 각각이 대립 쌍을 이루고 있다. 사랑을 나누고 있는 바다의 신 두 쌍이 있고 조개껍질을 불고 있는 해신(바다의 신) 2이 있다. 큐피드들과 해신들은 서로 대립 쌍을 이루고 있는 이데아들에 비견될 수 있다.

- “우리는 이러한 방법을 플라이우올로의 걸작(p.263, 도판 171)에서 보았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그의 해결 방법은 오히려 딱딱하고 둔해 보인다.” (319쪽)

- “라파엘로는 이전 세대의 화가들이 이룩하려고 그처럼 노력했던 것, 즉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완벽하고 조화롭게 구성해 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319쪽)

- 다른 한편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당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린 인물들의 완전한 아름다움이다.” (319쪽)

- 이러한 아름다움이 대단히 가설적이며 이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라파엘로는 그의 스승 페루지노와 마찬가지로 콰트로첸토의 그처럼 많은 미술가들의 야망이었던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어느 정도 포기했던 것이다.” (319쪽)

- 인물 묘사에 대한 이러한 가설적이며 이상적인 방신의 대단히 뉴턴의 가설(예를 들면 힘, 중력 같은 것)과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를 연상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뉴턴은 <과학 연구에 가장 좋고 안전한 방법은 사물의 성질을 부지런히 조사하고 실험에 의해 결정한 다음, 그것을 설명할 이론(가설)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라파엘로도 고대 그리스․로마의 조각상이나 인물화를 많이 관찰했을 것이고, 그러한 관찰로부터 자신의 이상적인 완벽한 인물 모델을 생각해 만들어 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파엘로가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도판 206(<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을 살펴보자. “머리가 약간 부풀어오른 근시안인 교황의 초상에는 이상화된 것이 하나도 없다.” (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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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조화의 달성(16세기 초 :토스카나와 로마) 1

15장. 조화의 달성(16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 16세기 거장(천재)들의 탄생의 역사적 배경 ▼

- 16세기, 즉 ‘친퀘첸토(500년대)’(이와 더불어 15세기를 ‘콰트로첸토(400년대)’라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부른다) “시기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파엘로(Raffaello), 티치아노(Tiziano), 코레조(Correggio)와 조르조네(Giorgione), 북유럽의 뒤러(Dürer)와 홀바인(Holbein) 등 수많은 거장들의 시대였다.” (287쪽)

- 이러한 거장들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조건은 다음과 같다. 먼저 중세 시대가 퇴락해 감에 따라서 신학의 시녀로 있던 여타의 다른 모든 과학(또는 학문)들이 신학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다른 한편 범신론의 영향으로 과학과 수학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미술에서도 이러한 과학과 수학의 발전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에는 미술가들이 원근법의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 수학으로 관심을 돌리고 인체 구조를 탐구하기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갖는 위대한 발견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발견들을 통해서 미술가들의 시야는 넓어졌다.” “그들은 자연의 신비를 탐색하지 않고서는, 또 우주에 감추어진 법칙을 밝히지 않고서는 명성과 영광을 얻을 수 없는 독립적인 거장들이었다.” (287쪽)

-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건축 분야에서 제일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브루넬레스키 시대(p.224) 이래로 건축가는 고전 시대의 지식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고대 건축의 ‘기둥 양식’에 적용했던 법칙들, 즉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식 기둥과 엔타블레이처의 올바른 비례와 치수를 연구해야 했으며 고대의 유적을 찾아가 측량해야 했다.” (288쪽)

- “이 당시 르네상스 건축가가 진정으로 열망했던 것은 건축의 쓰임새와 상관 없이 비례의 아름다움과 내용의 공간성 및 그 조화 자체가 만들어 내는 장대함만을 위해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건물의 실용적인 요구에 집착해서는 성취할 수 없는 완벽한 균형과 균제를 갈망했던 것이다.” (288-9쪽) 그런데 중세에서는 모든 것이 신학의 도구였고, 특히 과학은 일상생활에서의 실용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신학과 종교를 위한 ‘실용적’ 도구 차원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 1444-1514) ▼

- 브라만테는 “전통에 따라 성 베드로가 묻힌 자리에 세워졌던 고색창연한 성 베드로 바실리카를 헐어내고 1506년에 그 자리에 교회 건축의 오랜 전통과 신에게의 봉사라는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짓기로 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289쪽)

- 도판 187(<르네상스 전성기의 예배당 : 템피에토>)의 건축 양식을 보면 중세 고딕 양식에서 거의 탈피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뾰족한 첨탑 양식이 보이지 않고 원과 둥근 곡선 형태의 양식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 1435-88) ▼

- 베로키오는 피렌체의 화가이며 조각가이고,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이다.

- 도판 188-9(<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념상>)을 살펴보자. 이 기마상은 “그가 얼마나 꼼꼼하게 말의 해부학을 연구했으며 또 얼마나 명확하게 콜레오니의 얼굴과 목의 근육을 관찰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랄 만한 것은 투지만만하게 부대의 선봉장으로 달리는 것 같이 보이는 말 탄 사람의 자세이다.” (291쪽)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 1452-1519) ▼

- “그(레오나르도)는 그의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미술가의 임무는 더 철저하게, 그리고 더 열정적으로 더 정확하게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학자들의 책에서 얻는 지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293쪽)

- “레오나르도는 자기가 읽은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권위자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언제나 그것을 실험으로 해결하였다. 그는 자연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느꼈고 창의적 정신으로 이 모든 것에 도전했다. 30구 이상의 시체를 해부해서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기도 했으며(도판 190) 자궁 속에서 태아가 성장하는 신비를 조사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파도와 조류의 법칙을 연구했으며, 곤충들과 새들이 나는 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수년을 보내고 언젠가는 현실화되리라고 확신한 비행기구를 고안하기도 했다. 바위와 구름의 형태, 멀리 있는 물체의 색채에 미치는 대기의 영향, 초목이 성장하는 것을 지배하는 법칙들, 음(音)의 조화 등이 그의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그의 예술의 기초가 되었다.” (293-4쪽)

- “그의 글 가운데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레오나르도가 훗날 갈릴레오가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예견했음을 보여 준다.” (294쪽)

- “그는 그의 미술을 과학적인 토대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가 사랑하는 회화 예술을 비천한 기술로부터 존경 받는 신사다운 작업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294쪽)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

- 도판 191-2(<최후의 만찬>)를 살펴보자. “이 그림에는 동일한 테마를 다룬 이전의 그림들과 닮은 데가 하나도 없다. 이들 전통적인 그림들에서는 사도들이 식탁에 한 줄로 앉아 있고 유다만이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으며 예수는 조용히 성찬을 나누어 주고 있다. 이 새로운 그림은 이전의 전통적인 그림들과 아주 다르다. 이 그림에는 드라마가 있고 흥분이 있다.” (296쪽)

- “12사도들은 제스처와 움직임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는 세 사람씩 네 무리로 자연스럽게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 속에는 너무나 풍부한 질서가 있으며 또한 이 질서 속에는 너무나 다양한 변화가 내재해 있으므로 하나의 움직임과 그것을 받는 움직임 사이의 조화를 이룬 상호 작용을 살펴보려면 끝이 없다(이것은 어쩌면 상품들 사이의 관계와 아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플라이우올로의 <성 세바스티아누스>(p.263, 도판 171)를 설명할 때 논의했던 문제(즉 인물의 구성 배치 문제)를 돌이켜본다면 구성에 있어서의 레오나르도의 업적을 완전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298쪽)

- 로지에더 반 데르 웨이든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p.277, 도판 179)에서 나오는 인물상의 배치와 표정 변화를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이나 보티첼리와 같은 화가들이 각기 자기 나름대로 작품 속에서 회복시키려고 했던 그러한 무리 없는 균형과 조화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298쪽)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 리자> ▼

- “<최후의 만찬>보다 훨씬 더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들자면 그것은 리자(Lisa)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의 한 부인의 조상인 <모나 리자>(도판 193)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98쪽).

- <모나 리자>에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나타난 인물들의 다양한 변화와 표정이 리자라는 한 인물에 포괄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살아 있는 듯한 다양한 표정 변화가 <모나 리자>에서 한 인물의 변화무쌍한 표정 그대로 전이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감탄하게 하는 것은 리자라는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의 마음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299-399)

- “레오나르도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연의 위대한 관찰자인 레오나르도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사람들의 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300쪽)

- “그(레오나르도)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미술가들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 즉 정확한 소묘를 조화로운 구성에 결합하는 것만큼이나 미묘한 문제를 남겨 놓았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300쪽)

- “이탈리아의 ‘콰트로첸트(1400년대)’ 거장들”, 특히 반 에이크(자연의 모방 ; p.241, 도판 158), 만테냐(정확한 소묘법과 원근법 ; p.258, 도판 169)가 “재현한 자연은(자연이 신과 동급이기 때문에) 장대하고 인상적이면서도 그들의 인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오히려 조각상”이나 “어딘가 딱딱하고 거칠어서 나무로 만든 것 같이 보인다.” (300쪽) 다시 말하자면 인물을 세부적으로, 그리고 그대로 묘사하고 재현하고자 할수록 살아 있는 인물들이 아니라 돌처럼 굳어져 버린 인물들처럼 돼 버리는 난점을 이 거장들은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난점을 말끔하게 해결한 사람이 바로 레오나르도였다.

-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는 방식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 가령 윤곽을 그처럼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형태를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이 약간 희미하게 남겨 두면 이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인상을 피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창안으로, 이탈리아 어로 ‘스푸마토(sfumato)’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어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는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가리킨다.” (300쪽)

- 내가 보기에, 이 스푸마토라는 기법은 세부적인 것의 묘사에 있어서 빛의 밝음과 어두움, 그리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차이를 드러내는 원근법을 탁월하게 조화시킨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이 비치는 밝은 쪽과 가까운 쪽은 명확한 상이 드러나는 반면에, 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쪽과 먼 곳은 상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모호한 그 무엇으로 보인다. 이것을 선의 터치 측면에서 보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빛이 비치는 쪽은 가까운 거시에 있는 쪽과 마찬가지로 선을 명확하게 표시하여 그 형태의 경계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 반면에 그림자가 드려지는 쪽은 먼 거리에 있는 쪽과 마찬가지로 선을 불명확하게, 희미하게 처리함으로써 형태의 경계를 허물어서 서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 수 있게 된다.

- 이것은 헤르메티시즘을 가장 완벽하게 현실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헤르메티시즘에 따르면 천상계와 지상계는 ‘명확한’ 존재 사슬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형태’의 존재 사슬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천상계로 갈수록 지상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또한 천상계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신비의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비의 세계는 지상계로 오게 될 때 다양한 변화를 가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 이러한 것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제 <모나 리자>(도판 194)로 다시 돌아가 살펴보면 그 신비스러운 효과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스푸마토 기법을 아주 세심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얼굴을 그리거나 낙서를 해 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표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주로 두 가지 요소, 즉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 둔 부분들이 바로 입과 눈 부분이다. 모나 리자가 어떤 기분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은 늘 붙잡을 수가 없다. 물론 이러한 효과를 내게 하는 것은 이러한 모호함뿐만은 아니다. 그 뒤에는 더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 (301-2쪽)

- <모나 리자> 전체를 보면 모나 리자와 그 배경 사이에는 원근법적인 요소가 있다. 그런데 이 원근법적인 요소는 만테냐의 원근법하고는 차이가 있다. 왜냐 하면 이 원근법에는 빛의 요소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모나 리자의 표정이 빛의 요소와 원근법이 결합․통일되어 있듯이 그 배경도 빛이 있는 쪽은 선의 터치를 명확하게 한 반면에 빛이 없는 쪽은 선의 처리가 희미하게 되어 있다.

- 모나 리자 뒤에 있는 풍경을 보면, 그 왼쪽과 오른쪽 모두를 모나리자와 동일한 거리선상에 둔 것이 아니라 동일하지 않는 거리선상에 배치하였다. “왼쪽의 지평선은 오른쪽의 지평선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림의 왼쪽에 초점을 맞추면 오른쪽에 초점을 맞출 때보다 인물이 약간 더 커 보이거나 혹은 몸을 더 세우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또한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변하는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도 얼굴의 양면이 꼭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302-3쪽)

- 이상의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끈질기게 자연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레오나르도는 어느 선배 못지않게 근실했다. 다만 그는 더 이상 자연의 충실한 노예가 아니었다.” (303쪽) 다시 말하자면 레오나르도는 현실(지상계)에 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현실을 넘어서고자(즉 지상계와 천상계를 결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 “이제 위대한 과학자인 레오나르도는 태초의 형상 제작자들의 꿈과 두려움을 현실로 만들었다.” (303쪽) 이러한 레오나르도의 예술은 철저하게 자연에 대한 실험과 관찰,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도덕-->예술)이라는 칸트의 생각에 상당한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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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14장 전통과 혁신 2

14장. 전통과 혁신Ⅱ(15세기 : 북유럽)

 

▲ 북유럽과 이탈리아 미술의 차이점 ▼

- 이탈리아 : 천상의 세계와 지상 세계의 조화와 통일성에 바탕

- 북유럽 : <단순성>(건축)과 <범신론 성격에 따른 구체적이고 세세한 묘사>(회화)에 바탕

- 이 둘은 모두 신플라톤주의 또는 헤르메티시즘의 두 측면을 각각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차이점이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분야는 건축이었다. …… 이탈리아 이외의” “나라에서는 15세기 내내 전 세기의 고딕 양식을 계속 발전시켜 갔다. 이러한 건물들의 형태는 뾰족한 아치나 공중부벽과 같은 고딕 건축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지만, “15세기에는 복잡한 트레이서리와 환상적인 장식에 대한 14세기의 취향이 더욱 강해졌다.” (269쪽)

 

 

▲ 15세기 북유럽 건축의 특징 ▼

- “도판 174(<루앙의 법원성의 안뜰>)의 루앙의 법원 건축물은 ‘플랑부아양(Flamboyant : 타오르는 불꽃 모양) 양식’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 고딕 양식의 최후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이런 건축물들에서 고딕 건축의 마지막 가능성까지 다 소진해 버렸으므로 그 반작용이 조만간 뒤이어 일어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탈리아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어도 북유럽의 건축가들이 보다 더 큰 단순미를 갖는 새로운 양식을 발전시켰으리라는 징후가 보이기도 한다.” (269쪽)

- 이러한 특징은 영국에서 이른바 “‘수직 양식(Perpendicular style)’으로 알려진 고딕 양식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269쪽) 도판 175(<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 예배당>)을 보자. “측랑이 없기 때문에 기둥과 가파른 아치도 없다.” “일반적인 구조가 대단히 소박하고 어찌 보면 이전의 대성당들보다 더 세속적인 인상을” 준다. (270쪽)

- 이러한 세속성은 회화에서의 구체적이고 세세한 묘사와 연결된다. 다른 한편 부채 모양의 궁륭(fan-vault)(천장 부분을 뜻함)은 천상계와 지상계의 결합이 자유로운 상상의 ‘규칙’에 따라 자유롭게 조화되고 있음을 볼 때 이탈리아 건축 양식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 15세기 중엽 독일 화가 슈테판 로흐너(Stefan Lochner : 1410?-51) ▼

- 로흐너는 “반 에이크의 혁신을 보다 더 전통적인 주제(종교적인 이야기)에 활용한 미술가”였으며 “어느 정도 북유럽의 프라 안젤리코라고 말할 수 있다.” (273쪽)

- 도판 176(<장미 그늘 아래의 성모>)을 살펴보자. 먼저 이 그림을 고딕 양식의 <윌튼 두폭화>(pp.216-7, 도판 143)와 비교해 보면, “두폭화의 인물들은 다소 평면적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는 데 반해, 이 그림의 인물들은 입체적이며 따라서 현실적이다.

- 로흐너는 얀 반 에이크의 신플라톤적인 경향을 받아들여서 이 그림의 인물 배치를 플라톤의 이데아 구조에 따라 하고 있다. The One과 두 천사가 삼각형의 구도로 배치되어 있고,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둘씩, 셋씩 쌍을 지어서 원 형태의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

- 그러나 이 인물들의 표정은 두폭화의 인물들의 표정처럼 거의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다. 이는 여전히 중세 고딕 양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북유럽의 다른 화가들 ▼

- “북유럽의 다른 화가들은 오히려 베노초 고촐리와 비견된다.” (273쪽)

- 도판 177(<사를마뉴 대제의 정복> 중 헌정 페이지>)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당시의 중세 도시의 광경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이다.” (274쪽) 이 그림의 특징은 정확성, 유쾌함과 유머, 익살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 이탈리아 미술과 북유럽 미술의 혼합1 - 장 푸케(Jean Fouquet : 1420?-80?) ▼

- 그는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 방문했다.” (274쪽)

- 도판 178(<성 스테파누스와 함께 있는 프랑스 샤를 7세의 재무대신 에티엔 슈발리에>)를 살펴보자. 이 그림의 인물 표정은 <장미 그늘 아래의 성모>나 <윌튼 두폭화>의 인물 표정처럼 거의 무표정하다. 그러나 장 푸케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했던 것처럼(p.261, 도판 170) 빛을 사용하고 있다.” (274쪽) 그리하여 명암을 통해 인물들을 “마치 조각처럼 다듬어진 것처럼” (274쪽) 묘사하였다. 그런데 “모피, 돌, 옷감, 대리석 등 사물의 질감과 표면에 그가 갖는 관심을 보면 그의 미술이 얀 반 에이크의 북유럽 전통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보여 준다.” (274쪽)

 

 

▲ 이탈리아 미술과 북유럽 미술의 혼합2 -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Rogier van der Weyden : 1400?-64) ▼

- “이 거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275쪽)

- 도판 179(<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살펴보자. “우리는 로지에르가 반 에이크와 같이 머리카락 하나하나, 바느질 솔기 하나하나 등 모든 세부를 충실하게 재현할 수 있었음을 본다.” (275쪽)

- 그런데 이 그림에서의 인물들의 배치를 보면, “폴라이우올로가 직면했던 문제들(p.273, 도판 171)을” “현명”하게 해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의 몸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이 제각각의 포즈와 표정을 다양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는 근대 부르주아 시대의 서막을 알렸던 중세 도시 사회의 인간관계가 ‘어떤 규칙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의 포즈와 표정들은 제각각이지만, 그 포즈와 표정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이탈리아 미술과 북유럽 미술의 혼합3 - 후고 반 데르 후스(Hugo van der Goes : 1482년 사망) ▼

- 그는 “15세기 후반에 가장 위대한 플랑드르의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276쪽)

- 도판 180(<성모의 임종>)을 살펴보자. “무엇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성모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 12사도들의 다양한 반응(조용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 격렬하게 슬퍼하는 사람과 경솔하게 하품을 하는 사람의 표정)을 묘사한 그 훌륭한 솜씨다.” (276쪽) 이는 로지에르와 같은 업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로지에르의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에서도 여전히 <여백 또는 빈 공간>을 찾아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우주(세계)는 꽉 차 있는, 즉 빈 공간이 없는 세계였고, 따라서 빈 공간(여백)을 남겨 두는 것은 현실(세계)이 정확한 사실 묘사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독일의 목각사 바이트 슈토스(Veit Stoss : 1533년에 사망) ▼

- “조각가들과 목각사들에게는 고딕 양식을 새로운 형식 속에 잔존케 한 로시에르의 업적이 특히 중요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279쪽)

- 도판 182(<성모 마리아 교회당 제단>)를 살펴보자. 이 목각 제단의 각 장면은 “별 어려움 없이” 그 “의미를” “읽을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알아볼 수 있도록 목판에 새겨진 각 인물들의 표정(도판 183(<사도의 머리 부분>)을 참조)과 배경의 특징들이 세심하고 현실감 있도록 처리되어 있다.

 

 

▲ 중세 미술과의 단절 과정1 - 목판화와 인쇄술의 발전 ▼

- “15세기 중엽 독일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미술 기법이 발명되었”는데, 이 기법이 바로 목판 인쇄이다. “이로써 그림을 인쇄하는 것이 책을 인쇄하는 것보다 수십 년 앞서게 되었다.” (281쪽)

- 그런데 목판화는 그 특성상 “그림을 인쇄하는 데는 조잡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조잡함 그 자체가 사실 효과적일 때도 있었다. 즉” “윤곽이 단순하고 수법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282쪽)

- “그러나 그들은 세부를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과 관찰력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목판화가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 대신 동판을 사용했다.” (282쪽)

 

 

▲ 중세 미술과의 단절 과정2 -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 : 1453?-91) ▼

- 숀가우어는 “15세기의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동판화가이다.” (283쪽 참조)

- 도판 185(<거룩한 밤>)를 살펴보자. “네덜란드의 대가들과 마찬가지로 숀가우어는 그 장면에 있는 모든 작은 일상적인 세부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283쪽)

- 또한 이 그림에서도 빈 공간 또는 여백이 보이지 않는다. 숀가우어는 이러한 빈 공간 여백을 남기지 않기 위해 “폐가를 그림의 무대로 선택” (284쪽)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폐가의 무너진 돌담을 통해 기독교를 주제로 한 이 그림을 입체적이며 보다 현실감 있게 볼 수 있다.

- 그러나 “이 두 대각선은 성모의 머리에서 교차하는데 그 부분이야말로 이 판화의 진정한 중심”이 되는데, 이러한 중심은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이며 평면적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중세 전통의 미술 관념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 중세 미술과의 단절 과정3 - 동판화와 인쇄술의 발전 ▼

- 동판화를 통한 “그림의 인쇄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승리를 보장해” 주었으며, “북유럽의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여러 가지 원동력 중의 하나”가 되었다. (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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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13장 전통과 혁신 1

13장. 전통과 혁신Ⅰ(15세기 후반 : 이탈리아)

 

 

▲ 15세기 여러 ‘회화 유파’ 발생의 역사적 목적 ▼

 

- 중세시대에는 게르만 족의 유럽 통일을 통해 단일한 거대 제국이 탄생했다. 이러한 단일한 거대 제국을 통일시키는 지배적인 이념이 바로 중세 가톨릭(또는 중세 기독교)이었다. 이러한 지배 이념은 미술, 건축, 조각 등의 예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미술, 건축, 조각 등의 예술은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활동한 것이 아니라 과학을 비롯한 여타의 학문처럼 종교적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곰브리치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미술”은 “성경의 이야기를 감동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에만 사용”되었다. (247쪽)

 

- 다른 한편, 거대 단일 제국 하에서는 각 지역 또는 각 민족(nation : 이때에는 아직까지 민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하지 않았다. 이 개념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생겨나게 되었다)의 특이성이 강조될 수 없었다. 이 특이성이 강조될 경우 거대 단일 제국은 분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일성> 또는 <단일성>, <동일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동일성, 단일성이 미술에 있어서 <고딕 국제 양식>(p.215 참조)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 그러나 중세 말기에 오게 되면 절대 왕정의 왕권 강화(국왕의 권력 강화)되었고, 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부르주아가 성장하였으며, 이러한 성장으로 인해 도시 공국(도시 국가)이 출현하게 되었다.

 

- 이러한 출현은 곧 고딕 국제 양식을 서서히 쇠퇴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도시 공국을 중심으로 지역적, 민족적 특색이 강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미술가들로 하여금 길드(gild)를 조직하게끔 만들었고, 이러한 길드는 곧 하나의 ‘회화 유파’(248쪽 참조)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15세기의 그림은 그림 자체만 보아도 그것이 피렌체의 것인지 또는 시에나인지, 디종 또는 브뤼주, 퀼른 또는 비엔나의 것인지를 식별할 수”있게 되었다. (248쪽)

 

 

▲ 피렌체의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 1404-1472) ▼

 

-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 마사초를 이은 다음 세대의 건축가이다.

 

- 15세기 이탈리아와 북유럽 미술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 이탈리아 - 천상계와 지상계의 상호통일성

* 북유럽 - 건축에서는 <단순성>, 회화에서는 <구체적인 세부적 묘사>

이 둘은 모두 신플라톤주의 또는 헤르메티시즘의 두 측면을 각각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 알베르티는 바로 이탈리아 미술을 계승하고 있다.

 

- 도판 162(<르네상스 교회 : 만토바의 성 안드레아 대성당>)를 살펴보자. 알베르티는 직선과 원의 형태가 거의 분리되어 있는 고딕 양식을 지붕에서 직선과 원의 형태의 조화와 통일을 추구해 돔(dome) 형식을 추구했던 브루넬레스키를 이어받아 지붕의 돔 구조를 이어 받고 있다.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피렌체 대성당의 돔>(도판 146)과 비교해 보자.

 

- 도판 163(<피렌체의 루첼라이 대저택>을 살펴보자. 이 저택은 부유한 상인 소유의 집이다. 그 이전까지의 건물들의 소유는 모두 공동체의 소유였다. 즉 모두 공공건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가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의 중요시되고, 그에 따라 사적 소유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사적 소유의 한 형태가 이 대저택이다.

 

- 이 저택 역시도 벽기둥 사이를 부드러운 곡선 형태의 아치로 배치하고 있는데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는 또한 돔 구조와 아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대저택의 창문들(p.189, 도판 125)을 비교해 보기만 해도 예기치 않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티는 소위 ‘야만적인’ 첨형 아치를 부드럽게 만들고 또 고전적인 기둥 양식의 요소들을 재래의 인습적인 형식 안에 채택함으로써 단지 고딕 식 설계 방식을 고전적 형식으로 ‘번안했을’ 뿐이었다.” (250쪽)

 

-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고딕 전통과 근대적인 양식 사이의 절충은 15세기 중엽의 많은 거장들의 특징이었다.” (250쪽)

 

 

▲ 피렌체의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 1378-1455) ▼

 

- “새로운 업적과 재래의 전통을 조화시키는 데에 성공한 피렌체의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는

도나텔로와 같은 세대의 조각가인 로벤초 기베르티를 들 수 있다.” (250쪽)

 

- 도판 164(<세례 받는 그리스도>)를 살펴보자. 먼저 이 부조는 도타텔로가 만든 부조 <헤롯 왕의 잔치>(p.232, 도판 152)에서처럼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이 장면의 구성이 12세기 리에주의 유명한 놋쇠 주물공의 배치 방식과 많이 다르지 않다.(p.179, 도판 118)” (251쪽) 그런 점에서 중세의 전통적인 것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먼저, 구원의 천사들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점이다. 도판 118(<놋쇠 세례반>)에서 천사는 요단강에서 예수를 기다리다가 세례를 해주는 두 사람 위에, 즉 천상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이 부조에서는 세례를 하는 세례 요한과 수평의 위치(세례 요한의 반대편)에 있다.

 

- 또한 기베르티도 도나텔로처럼 이 부조에서 “각 인물상에 특징을 주어 그들이 행한 역할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251쪽)

 

- 이처럼 “기베르티”는 “당대의 새로운 발견들을 이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고딕 미술의 이념에 충실”했다. (252쪽)

 

 

▲ 피렌체 부근 피에솔레(Fiesole)의 위대한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 1387-1455) ▼

 

- 기베르티처럼 “안젤리코도 주로 종교 미술의 전통적인 이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마사초의 새로운 방법을 응용했다.” (252쪽)

 

- 도판 165(<수태고지>)를 살펴보자. 이 그림은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천장의 모습을 둥근 곡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인물들은 “거의 운동감이 없으며 실재의 단단한 인체를 암시해 주는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252쪽)

 

 

▲ 피렌체 화가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 1397-1475) ▼

 

- 도판 166(<산로마노의 대승>)을 살펴보자. 일단 이 그림은 원근법을 사용한 입체감을 통해 현실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말들이나 인물들은 조각된 회전목마나 인형들처럼 보인다. 이런 점은 이 그림을 매우 중세풍으로 보이게 한다.

 

- 그러나 이러한 중세풍을 해소시키는 것은 바로 그가 심취해 있는 원근법(도판 167 참조)이다. 이러한 원근법은 우첼로의 그림이 대단히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인물상들의 배치나, “심지어 땅에 흩어져 있는 부러진 창들까지도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254쪽)

 

- 이러한 우첼로의 원근법은 “관찰을 통해 얻은 세부들을 점차 더해주고, 또한 가장 사소한 음영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세세한 면을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국제 양식의 형식들을 변화”시킨 북유럽의 얀 반 에이크와는 “정반대의 접근 방법”으로 입체적인 현실묘사를 하고자 했던 방법이다. (255쪽)

 

 

▲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 : 1421경-97) ▼

 

- 고촐리는 그의 스승인 프라 안젤리코와는 화풍이 대단히 다르다.

 

- 도판 168(<베들레헴을 향해 가는 동방박사들>)을 살펴보자. 고촐리는 그의 스승 안젤리코와는 다르게 성경의 일화를 성스럽고 단순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화려하고 매혹과 환락의 동화처럼 그리고자 함으로써 당시의 생생하고 유쾌한 생활상을 묘사하고자 하였다. 이 그림 또한 원근법에 충실하다.

 

 

▲ 북부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 1431-1506) ▼

 

- “그(만테냐)가 현실성이라고 부른 기준은 조토의 시대보다 훨씬 더 정확한 것이 되어 있었다. 조토의 경우 중요했던 것은 이야기의 내면적 의미, 즉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즉 성경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어떻게 하면 성스럽고 아름답게 그려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반면 만테냐는 외부적인 형태에도 관심을 가졌다.” 즉 어떤 “광경이 실제로 벌어졌을 장면을 그대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256쪽)

 

- 도판 169(<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성 야고보>)를 살펴보자. 이 그림은 만테냐의 현실성을 충분히 반영한 그림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성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하여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 도판 169의 그림은 도판 168의 고촐리의 그림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고촐리의 인물들은 화려하지만 표정들이 거의 동일하고 생동감이 없는 반면에, 만테냐의 인물들은 매우 “조각적이고 인상적이다.” 또한 원근법을 통해서 만테냐는 그의 인물들을 “단단하고 형체가 있는 존재들처럼 서 있고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하였다. (259쪽)

 

 

▲ 남부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cesca : 1416?-92) ▼

 

- 피에로는 만테냐의 비슷한 점을, 고촐리와는 전혀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만테냐와 고촐리처럼 원근법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 도판 170(<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을 보자. 이 그림에서 피에로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곧 <빛의 처리>이다. 피에로는 이 빛을 통하여 <현실성>을 훨씬 더 잘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에서 빛은 인물들의 형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 내는 원근법과 대등한 중요성을 지닌다.” (260쪽) 이러한 점에서 곰브리치는 “마사초의 후계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피에로를 꼽는”다. (260쪽)

 

 

▲ 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만들어 낸 새로운 문제점 ▼

 

- 중세 시대는 대단히 수직적이고 위계적이며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던 2차원적인 평면적 시대였다. 왜냐하면 신의 세계(이데아 계)가 기하학적으로 2차원적인 단순한 삼각형의 구조를 가진 세계였고, 인간 세계의 현실계도 이러한 신의 세계를 본 떠 만든 세계이고 그 세계를 지향하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의 현실은 평면적이고 인물상들 역시 평면적인 삼각형 구도로 배치하면 되었다. 또한 정확하고 세세한 소묘 역시 알 필요가 없었는데, 이 또한 신의 세계가 가장 단순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 그러나 “현실 세계를 거울과 같이 반영하는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관념이 채택되자마자 인물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 이전처럼 용이하지 않았다.” (260쪽) 왜냐하면 중세 신분제 사회가 서서히 붕괴되면서 상인, 과학자 등이 ‘부각’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해진 신분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 “이러한 문제는 거대한 제단화나 그와 비슷한 작업에 직면했을 때 특히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이런 그림들은 멀리 떨어져서 보여지며 또 교회 건축의 전체적인 구조와 어울려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술가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분명하고 인상적인 윤곽으로 신자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260쪽) 한마디로 말하면 중세의 시대적 이념과 붕괴되어 가는 중세의 시대상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였다.

 

 

▲ 15세기 후반 피렌체 미술가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Antonio Pollaiuolo : 1432?-98) ▼

 

- 폴라이우올로는 “이 새로운 문제, 즉 소묘에 있어서도 정확하며 구성에 있어서도 조화로운 그림을 그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262쪽) 그는 “정확한 규칙을 써서 이러한 문제를” “최초”로 “해결하려 했던” 사람이다.

 

- 이러한 그의 시도는 도판 171(<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에 잘 나타나 있다. 폴라이우올로는 이러한 규칙을 플라톤의 이데아 계의 구조로 나타낸 것 같다.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원뿔 형태의 꼭짓점에 위체해 있다. (평면적인 형태로 봤을 때 이는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의 위치에 해당한다). 그리고 성 세바스티아누스에게 활을 쏘는 사람들은 원뿔의 원을 형성하는 위치에 있는데 각기 대립적인 쌍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이는 플라톤의 이데아들의 특성과 구조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할 수 있다).

 

- 그리고 원근법을 사용하여 인물들의 입체감을 보여 주고 있다.

 

- 그러나 이 그림은 뭔가 조화롭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즉 “폴라이우올로는 그가 성취하려고 시도했던 것을 거의 성공시키지 못하고 있다.” (262쪽) 왜냐하면 이러한 규칙(플라톤의 이데아 구조)은 중세적인 것인데, 이 중세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서 이 그림의 배경에 있는 “토스카냐의 풍경” (262쪽)과 제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배경에 있는 토스카냐의 풍경을 원근법으로 이용하여 훌륭히 묘사하고 있지만, 그 주제와 배경은 사실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순교가 집행되고 있는 전경의 언덕과 배경의 풍경을 연결시키는 것은 하나도 없다” (262쪽)

 

 

▲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 1446-1510) ▼

 

- 보티첼리 역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한 15세기 후반의 피렌체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262쪽)

 

-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 도판 172(<비너스의 탄생>)이다. 이 그림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근거한 것인데, 이 신화의 주요 원리는 <다(多)의 공존>이다. 신들 사이의 위계질서 없이도 잘 공존하는 방식을 중세 신분제가 붕괴해 가고 있는 시점에서 앞으로 따라야 할 그 당시 사람들의 공존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런 공존 방식은 미술에서 인물상의 배치의 기준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 그러나 보티첼리의 인물 묘사는 “덜 딴딴해 보이”고 그럼으로써 “폴라이우올로나 마사초의 인물처럼” 해부학적 지식에 따라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264쪽)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우아한 운동감이나 선율적인 선들은 기베르티나 프라 안젤리코의 고딕 전통, 또는 앞에서 우리가 부드러운 육체의 곡선과 섬세한 옷주름의 흐름을 언급한 바 있는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p.213, 도판 141)나 프랑스 금세공사의 작품(p.210, 도판 139)과 같은 14세기의 미술을 상기시켜 준다.”(264쪽) 다시 말하자면 인물 묘사의 측면에서는 중세의 전통을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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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12장 현실성의 정복

서양 미술사 스터디한 내용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함 보셔요^^.

근데 길어서 보시기 불편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앞으로도 스터디 끝날 때까지 계속 정리해서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양미술사』(E. H. 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이종숭 옮김, 예경, 2009)

 

 

12장. 현실성의 정복(15세기 초)

 

 

▲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 또는 헤르메티시즘 ▼

- 그리스 고전의 합리적인 면모를 재조명하는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그리스 시대에 유행했던 자연세계에 대한 마술적이고 신비적인 사상이 다시 등장하였다. 이 사상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1460년 마케도니아에서 피렌체로 여러 그리스 문헌이 보내져서 코시코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가 그것을 소장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헤르메스 전집」(Corpus Hermeticum)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로 하여금 이것을 번역하게 했다. 피치노와 당시 사람들은 이 책의 저자로 알려진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us)가 모세와 동 시대 사람인 이집트 신부로서 실제 인물이고, 기독교의 예언자이며, 플라톤과 플라톤주의도 이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 역사적 실수는 르네상스 시대에 엄청난 결과를 야기했다.” (『과학사신론』(김영식,임형순 공저, 다산출판사, 2008), 71쪽)

- 헤르메스주의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매우 유행했던 신플라톤주의의 한 지류로서 중세의 마술적, 연금술적 사조와 연관되어 우주에 존재하는 신비적인 힘을 인정하고 인간이 자연에 영향을 미친다는 자연에 대한 근대적 세계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 헤르메스주의는 우주와 인간이 연관되어 있다는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는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영향으로 ‘존재의 큰 사슬’과 ‘대우주-소우주 유비관계’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존재의 큰 사슬’ 이론은 이 사슬의 한 쪽 끝에 신과 천사들이 있고, 다른 한 쪽 끝에 인간과 지상세계가 있으며, 이 둘이 거대한 사슬로 묶여 있다는 이론이다. 당시 사람들은 천상계와 지상계 사이의 여러 상관관계들을 설명함으로써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추구했고 점성술은 그 관계들을 기초로 발전하게 되었다.

- 헤르메스주의는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인간을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우주는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신성한 신의 영역이었다. 반면에 헤르메스주의에서 우주는 신비적 힘들의 네트워크(network)로 연결되었고, 네트워크 한 부분인 인간과 대우주가 서로 영향을 미쳤다. 즉 헤르메스주의에서 우주는 인간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과거에 인간이 자연을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무능력자였다면,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은 무능력에서 벗어나 자연을 통제하고 변형시켜 자연에 영향을 미치는 적극적인 존재로 발전한 것이다.

-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에 널리 퍼진 헤르메스주의는 동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뿐만 아니라 이후 세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레오나르도는 신비주의 사상에 입각한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고, 16~17세기에 베이컨과 뉴턴은 신비주의 사상과 연금술에 심취했었다. 기존에 수용된 신비주의가 자연의 초월성과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관념이었다면, 헤르메스주의는 구사상 체계를 타파하는 새로운 지적 에너지로서 자연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연구하는 근대과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 플라톤의 만물계(현상계)의 복잡한 현상들이 이데아 세계의 아주 단순한 구조로부터 비롯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신비화의 이면에는 복잡하게만 보이는 우주 현상을 단순한 우주 구조의 원리, 법칙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과학적인 노력들이 숨어 있었다. 앞으로 우리는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등의 과학자들을 통해 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헤르메스주의(또는 신플라톤주의)의 상호 영향과 관련된 신비함은 플라톤의 <관여 또는 분유>개념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관여 또는 분유 개념은 논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당히 비유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 이 장에서의 현실성(또는 사실성)의 의미 ▼

- 이 현실성은 단순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단순한 현실이 아니다. 헤르메티시즘에 따르는 현실이다. 즉 중세 때처럼 신의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지상세계로서의 현실계가 아니라 신의 세계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면서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현실이다.

 

 

▲ 르네상스가 서양 미술사에서 가지는 의미 ▼

-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한다.

- 고트 족과 반달 족 같은 게르만 종족이 침입하여 로마가 멸망한 지 700년이 지나서야 고딕 양식이라고 부르는 미술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때 고딕이라는 말은 이탈리아 인들에 의해 <야만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 이 당시의 이탈리아인들은 야만적인 고딕 양식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시도를 시작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단테와 조토의 출생지이며 부유한 상업도시인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

- 피렌체에서 15세기 초에 일단의 미술가들이 계획적으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미술 개념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하였다.

 

 

▲ 젊은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lippo Brunelleschi:1377-1466) ▼

- 피렌체 대성당의 돔(dome) 구조의 완성(도판146, <피렌체 대성당의 돔>, 225쪽 참조)

- 중세 시대에는 픞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 따라서 지상계와 천상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운동의 형태로 볼 때, 천상계의 구조는 원 운동 구조(그리하여 천상계에서 원 운동은 자연 운동이고 직선 운동은 강제적 운동이 된다)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반대로 지상계의 구조는 수직 자유낙하 운동으로서의 직선 운동 구조(그리하여 지상계에서 직선운동은 자연 운동이고, 원 운동은 강제적 운동이 된다)로 이루어져 있다.

- 그러므로 중세 고딕 양식의 건축들은 거의 모두가 직선 형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 형태나 곡선 형태의 구조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 그러나 지상계와 천상계의 상호 결합과 영향이라는 점에서 볼 때, 브루넬레스키는 직선과 원형태가 결합된 곡선 형태의 돔 구조를 지붕(지상계와 천상계가 만나는 지점)에 적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후에 아마도 17C 운동 역학의 포물선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브루넬레스키와 마사초(Masaccio : 1401-28)의 원근법 ▼

- 원근법은 현실 세계, 즉 3차원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방법인데, 이는 수학적(이 당시까지만 해도 수학은 천상계의 구조를 파악하는 학문으로서 주로 수적 비율과 연관된 기하학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방식에 의거한 것이다.

- 이 원근법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적용한 것(즉 신플라톤주의 또는 헤르메티시즘을 적용한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삼각형 구조이다.

(선의 이데아)

 

 

 

(이데아1) (이데아2)

 

** 이데아1과 이데아2는 대립쌍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삼각형 구조는 2차원적인, 즉 평면적인 아주 단순한 구조이다. 이 삼각형 구조는 현실계에 <관여 또는 분유>를 통해 다양한 입체적 형태로 나타난다(플라톤은 우주의 물질 형상은 바로 정다면체의 기하학적 도형이라고 주장했다. 우선 불은 정4면체로 이루어져 있다. …… 공기는 정8면체로 이루어져 있다. …… 물은 정20면체로 이루어져 있다. 흙은 정6면체로 이루어져 …… 매우 안정적이다. …… 기하학에는 이 네 가지 정다면체 이외에 또 하나의 정다면체가 주가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에는 또 하나의 원소가 있어야 한다. 즉 제5원소는 정12면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둥글게 생긴 형태로서 하늘을 구성하고 있다).

- 그런데 이 3차원의 현실 세계는 2차원의 이데아 계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있다.

- 도판 149(마사초 작, <성 삼위일체, 성모, 성 요한과 헌납자들>)를 살펴보자. 예수,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 요한의 위치와 헌납자들인 상인들의 위치는 분리되어 있고, 상인들이 서 있는 위치는 지상계(현실계)이고, 그 뒤는 천상계(이데아계)이다. 그러나 천상계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손으로 만지면 만져질 것 같은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 도판 149를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에 비견되는 신(The One)과 예수, 그리고 그 밑에, 대립쌍에 비견되는 성모 마리아(여성)와 성 요한(남성), 그리고 더 밑에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의 관여 또는 분유 형태로서의 상인 부부가 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삼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2차원적으로도, 그리고 원근법에 따라 3차원적으로도 삼각형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 이렇게 볼 때 원근법은 기하학적 도형상 삼각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각형의 2점의 지상계로부터 삼각형의 나머지 1점의 천상계에 이르는 모습이 바로 이 장에서 말하는 현실이고, 그 현실은 원근법으로 처리되어 있다.

- 성모가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을 손으로 가리키는 단순한 제스처는 현실계(지상계)와 이데아계(천상계) 사이의 상호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하고 할 수 있다. 현실계는 운동 변화하는 세계인데, 이 운동 변화는 대단히 현란하고 복잡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계늬 운동 변화가 이데아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이데아계가 현실계처럼 현란하고 복잡한 운동 변화를 겪는 세계는 아니다. 그러한 운동 변화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상호 영향성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데아는 가장 단순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 도나텔로(Donatello : 1386?-1466) - 브루넬레스키 일파 중 가장 위대한 조각가 ▼

- 도판 151, 150(도나텔로 작, <성게오르기우스>)을 살펴보자. 여기에도 범신론적인 헤르메티시즘(헤르메스주의)의 영향이 잘 나타나 있다. 중세에서의 지상계와 천상계의 분리를 통해서 볼 때, 상인들은 거의 무표정한 고요한 아름다움(도판127 참조)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천상계의 성인들은 지상계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희로애락 등의 감정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 게오르기우스>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결의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이 천상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자신감과 힘찬 기상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 도판 152(도나텔로 작, <헤롯왕의 잔치>)를 살펴보자. 도나텔로는 여기에서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헤롯왕이 있는 연회장과 악사가 있는 회랑, 그리고 음식을 만들어 내는 주방(?)의 위치를 원근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세 개의 방을 플라톤의 사회의 세 계급을 분리한 것에 비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개의 방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근법으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 왕실의 연회실은 플라톤의 이데아 계에 비유될 수 있는데, 이데아 계는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날 수도 없거니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연회실 안에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표정한 표현들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공포와 갑작스러운 혼돈의 표정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교황청과 중세 가톨릭의 권위 상실로 인한 그 당시의 사회상을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점은 살로메의 어머니와 연회석 사이에 <큰 공백>이 있다는 점이다. <큰 공백>은 곧 <빈 공간>을 의미한다. 중세 시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의 여향으로 이 세계 전체, 즉 우주 전체는 빈 공간이 없이 꽉 차 있다. 왜 이런 생각을 했느냐 하면, 빈 공간은 운동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운동 변화는 곧 신분제 질서 체제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5C 전까지의 모든 예술 작품에는 빈 공간(여백)을 남겨 두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은 헤르메티시즘의 영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운동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지상계와 천상계 사이의 빈 공간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빈 공간은 나중에 뉴턴의 만류인력 법칙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 알프스 북쪽의 조각가 클라우스 슬뤼테르(Claus Sluter) ▼

- 당시의 부유하고 번창하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 디종(Dijon)에서 1380년 경부터 1405년까지 일한 사람이다.

- 도판 154를 살펴보자.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예수의 수난을 예언했던 예언자인 다니엘과 이사야라는 인물이다. 이 인물들은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도판 151, 152)에서의 성 게오르기우스처럼 인상적인 표정을 가지고 있다.

 

 

▲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 1390?-1441) - 북유럽에서 사실성(현실성)의 정복을 최종적으로 완수한 사람 ▼

- 얀 반 에이크 역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브루넬레스키와 마사초와는 달리 사실적이고 세속적인 표현에 좀 더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신플라톤주의의 범신론적 성격, 더 나아가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신론적 성격과 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은 개개의 만물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 범신론인데, 개개의 사물에 대한 사실적이고 세세한 묘사는 신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도판 155를 살펴보자. 일단 전체적으로 볼 때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이데아들의 존재 구조가 선의 이데아를 중심으로 대립 쌍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쌍으로 대비되어 이루어져 있다. 위의 그림은 말할 것도 없고 아래 그림도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범신론이 가지는 해방 성격에 따라, 아래 그림을 보면 영주 귀족들과 기사, 농노들과 같은 평민들이 수평으로 배열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또한 이러한 범신론의 성격에 따라 The One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의 표정이 세속 인간의 다양한 표정처럼 다양하다. 도판 141(p.219, 100년 전 시모네 마르티니가 그린 제단화)와 비교해 보라.

- 도판 156도 마찬가지이다.

- 도판 157을 보게 되면 생생하고 구체적이면서 세부적인 묘사가 눈에 띄는데 이것도 다 범신론적인 성격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범신론에 의해 자연과학이 크게 발전하는 것과 깊은 연곤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원근법도 사용하고 있다.

- 도판 158(<아르놀피리의 약혼>) 이 그림 역시도 얀 반 에이크가 아르놀피리와 그의 신부 잔느 드 쉬라리의 약혼을 기록화처럼 사실성에 기초해 그린 그림이다. 두 인물의 세세한 묘사뿐만 아니라, 특히 강아지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도판 160 참조). 또한 거울에 반사된 모습 역시도 아주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거울 속에 얀 반 에이크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이 거울 속의 그림은 원근법에 의해 처리돼 있다(도판 158 참조).

 

 

▲ 스위스 화가 콘라드 비츠(Conrad Witz : 1400?-1446?) ▼

- 도판 161(<제자들로 하여금 고기를 잡게 하신 기적>)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대단히 친숙해 보이는 느낌을 지닌다. 그 이유는 실제 제네바 호수와 살레브 산을 배경으로 그렸으며 실제 어부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성경에서 이 호수는 티베리아 해로 나온다). 중세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면 곰브리치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티베리아 해를 상투적인 몇 개의 물결 선으로 처리했을 것이며, 예수의 모습을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의 모습은 친근하면서도 굳건한 모습(이는 마사초의 도판 149(<성 삼위일체, 성모, 성 요한과 헌납자들>의 인물상을 연상시킨다)으로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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