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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자연의 거울(17세기 네덜란드) (1)

20장. 자연의 거울(17세기 : 네덜란드)

**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 **

 

- “네덜란드 북쪽 지방 사람들은”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부유한 상업 도시에” 살았으며 “대부분 신교를 믿었다.” “이들의 태도는 영국의 청교도들”처럼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며 대부분 남쪽 지역의 호사스런 형식을 싫어하”였다. (413쪽)

- 이들은 가톨릭적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축에 있어서조차도 이들은 수수하고 절제된 양식을 선호했다.” 이들은 “새로 완성된 그들 국가의 자부심과 업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암스테르담에 “대규모 시청사를 지시로 결정하였다. 그들이 선택한 모델은 크고 당당하지만 형태는 단순하고 장식도 별로 없는 건축 양식이었다.” (413쪽)

- “앞에서 우리는 신교의 승리가 미친 영향이 건축보다는 회화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살펴보았다(p.374).” (413쪽)

- “신교 사회에서 계속될 수 있었던 어떤 회화의 영역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홀바인의 경우가 잘 증명해 주듯이 마로 초상화 그리기였다. 성공한 많은 상인들은” 부와 직위, 명예, 권력을 가진 자신의 모습이 “들어있는 자신의 초상화를 원했다.” (413쪽)

 

▲ 프란스 할스(Frans Hals : 1580? - 1666) ▼

- “할스는 루벤스와 같은 세대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부모들은 신교도였”다. (414쪽)

- “도판 269(<성 조지 군단 장교들의 연회>, p.415)는 거의 초창기에 그린 그림으로 그가 이런 종류의 주문 그림을 그릴 때 구사한 빼어난 솜씨와 독창력을 잘 보여준다,” “할스는 처음부터 어떻게 그 유쾌한 순간의 분위기를 전달할지와 그와 같이 의례적인 모임에 어떻게 생기를 불어 넣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2명의 구성원 개개인을 드러내 보여줘야 하는 목적에 소홀함이 없이 각각의 인물을 너무나 실감나게 묘사하여 과거 우리도 그들을 틀림없이 만났었던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414~5쪽)

- 할스가 그린 “수많은 개인 초상화들 중 하나인 도판 270(<피터 반 덴 부르케 초상>, p.417)”을 살펴보자. “할스 이전의 초상화들과 비교해 보면 이것은 거의 스냅 사진처럼 보인다.” (415쪽)

- “약 한 세기 전에 그린 홀바인의 리처드 사우스웰 경의 초상화(p.377, 도판 242)라든가 같은 시기의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에서 그려진 루벤스와 반 다이크 또는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들과 비교해 보라.” “그들이 그린 초상화들은 모두 생동감이 넘치고 사실적이긴 하지만 주문한 사람의 위엄과 귀족적인 혈통을 암시하기 위해 화가들이 주문자의 자세를 세심하게 배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할스의 초상화들은 화가가 주문한 사람을 어떤 특정한 순간에 ‘포착해서’ 그의 화폭에 영원히 고정시켰다는 인상을 준다.” (416쪽)

- 이렇게 스냅 사진처럼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리는 그림은 “물감과 붓을 다루는 방법”이 아주 달랐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마치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을 몇 번 붓질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구겨진 소매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그의 빠르고 능숙한 붓놀림을 보는 것 같다.” (416쪽)

- 이러한 “빠르고 능숙한” 붓놀림은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의 특징인 단순함, 간결함(동시에 이것은 고대 그리스·로마,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신플라톤주의의 강한 영행을 받은 근대과학의 기초 또는 출발점이기도 하다)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 또한 이러한 단순함, 간결함은 부르주아 또는 자본주의 분업·전문화의 기초 또는 토대를 이루게 된다(이것은 바로 뒤에서 다루게 될 미술 영역의 분화와 전문화로 이어지게 된다).

- 다른 한편 “그의 초상화는 초기의 초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좌우 대칭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쪽에 치우쳐 불안정한 것도 아니다. 바로크 시대의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할스도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훌륭하게 균형감을 이룩해 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416쪽)

 

▲ 17세기 네덜란드에서의 회화 영역의 분업·전문화 ▼

- 가톨릭 교회권에서는 화가들이 주로 성경이야기를 소재로 한 제단화를 그려 살았지만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 북쪽 지역, 즉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이러한 그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거대한 제단화들은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교회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제작하는 방식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 화가들은 자신들이 잘 그릴 수 있는 그림들을 그려서 시장에서 다른 상품들처럼 팔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그림의 특수한 장르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전문적인 화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 특히 “바다 풍경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들”의 그림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해상을 제패하던 시대를 말해 주는 귀중한 역사적 문헌으로 간주된다.” (418쪽)

 

▲ 지몬 데 블리헤르(Simon de Vlieger : 1601 - 1653) ▼

- 이 화가는 “바다 풍경을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 (418쪽)

- 도판 271(<해풍에 흔들리는 네덜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들>, p.418)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바다의 분위기를 얼마나 놀랄 만큼 단순하고 솔직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는지를 보여 준다. 이들 네덜란드 화가들은 미술사상 최초로 하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418쪽)

- “그들은 그림을 흥미 있게 만들기 위해 극적이거나 시선을 끄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단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의 한 부분을 그렸을 뿐이며 그것만으로도 영웅적인 이야기나 희극적인 테마를 다룬 그림만큼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418쪽)

 

▲ 얀 반 호이엔(Jan van Goyen : 1596 - 1656) ▼

- “그는 헤이그 출신으로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과 거의 동일한 시대의 사람이었다. 조용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회고적인 정경을 보여주는 클로드의 풍경화(p.396, 도판 255)와 얀 반 호이엔의 간결하고 솔직한 그림(도판 272, <강변의 풍차>, p.419)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418쪽)

- “호이엔은 클로드처럼 고상하고 품위 있는 신전 대신에 소박한 풍차를, 그리고 매혹적인 숲 속의 오솔길 대신에 별다른 특징 없는 자기 고행의 들판을 그렸다. 그러나 반 호이엔은 이처럼 평범한 풍경을 평온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정경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의 눈이 익은 모티프들을 변화시켜서 우리들의 시선을 아득히 먼 속으로 인도하여 마치 우리들이 제일 좋은 위치에 서서 저녁 햇살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헤르메티시즘의 영향이 강하게 보인다.) (419쪽)

- 반 호이엔 같은 거장들의 그림, 즉 “소박한 풍경”을 그린 그림을 ‘픽처레스크(picturesque)’라고 한다. “우리로 하여금 소박한 풍경 중에서 ‘한 폭의 그림” 같은 것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이 네덜란드 화가들이었다. (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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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스터디 시작합니다^^

10년 겨울방학 중 <서양미술사> 스터디 모임 일정이 확정되었습니다.^^

 

장소 : 건대 제2학생회관 2층 생활도서관

 

날짜 :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30분 ~ 오후 1시 30분

 

교재는 전에 말씀 드린대로 곰브리치가 쓴 <서양미술사>(예경, 2009)이고요.

진도는 19장(바로크 양식)부터 나가기로 했습니다.

1월 18일 화요일부터 방학 끝날 때까지 하기로 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밑에 댓글 달아주시고 오셔요.^^

무지무지 환영합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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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 (2)

▲ 귀도 레니(Guido Reni : 1575-1642) ▼

- “로마에서 자기의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킨 많은 이탈리아 거장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귀도 레니일 것이다.” (393-4쪽)

- 레니는 “카라치 파에 입문”했다. “한때는 그의 명성이 라파엘로와 비등할 정도로 높았는데 도판 253(<오로라(새벽의 여신), p. 394)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394쪽)

- “사실 레니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그가 모방하고자 했던 위대한 화가 라파엘로를 생각하게 되기를 원했다. 현대의 비평가들이 레니의 업적을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394쪽)

- 그러나 “레니가 그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서 취한 방법, 즉 비속하고 추하며 그의 고상한 이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현실보다 더 완벽하고 이상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395쪽)

-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에 의해 설정된 기준에 따라서 자연을 이상화하고 ‘미화하는’ 방침을 공식화한 사람들은 카라치와 레니, 그리고 그레니의 추종자들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떤 정해진 방법 같은 것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고전 미술과 분명하게 구별하는 의미에서 신고전주의적(neo-classical), 또는 ‘아카데믹한(academic)’ 방침이라 부른다.”(395쪽)

 

▲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 1594-1665) ▼

- “‘아카데믹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인 “프랑스 화가 니콜라스 푸생”은 “로마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살면서 “정열적으로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을 연구했는데,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순수하고 장엄했던 고대 도시들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도판 254(<아르카이에도 나는 있다>, p. 395)는 이러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서 생겨난 유명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395쪽)

- “명문에는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 “나(EGO), 즉 죽음은 목가적인 이상향인 아르카디아에도 의연히 군림한다는 뜻이다.” (396쪽) 그런데 죽음을 대하는 이들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하고 단순해 보인다(물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외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표정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깊은 성찰만이 “죽음의 공포가 말끔히 가신 조용한 휴식의 이러한 회고적인 정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396쪽)

 

▲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 1600-82) ▼

- 푸생과 “동일한 회고적인 아름다운 분위기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해진” 화가는 “클로드 로랭”이다. (396쪽)

- 도판 255(<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 p. 396)를 보자. 여기서 “그는 화면 전체의 장면을 현실과 다르게 보이는 금빛 광선이나 은빛 대기 속에 이 모든 것들을 무르녹아 들어가게 묘사했다.” (397쪽)

-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든 화가는 바로 클로드 로랭”이었다. (397쪽)

 

▲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 1577-1640) ▼

- 루벤스는 “푸생과 클로드보다는 한 세대 위였고 귀도 레니와는 비슷한 연배였다.” (397쪽)

- 루벤스는 “어떤 ‘운동’이나 유파에 가입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본질적인 신념, 즉 화가의 임무는 자기 주위의 세계를 그리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림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가 자신이 사물의 생동감 넘치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즐긴 대로 느끼게 해 주는 일이라는 신념이 흔들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397쪽)

-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 보면 카라바조의 예술이나 카라치의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397쪽)

- “그는 이탈리아로부터 교회와 궁전을 장식하기 위한 거대한 화면을 선호하는 취향을 플랑드르에 도입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고관대작들과 군주들의 취향에 잘 들어맞았다. 그는 거대한 화면 속에 인물들을 배치하고 전체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빛과 색채를 구사하는 기술을 공부했다. 도판 256(<성인들의 경배를 받고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p. 399)은 안트웨르펜의 한 교회당의 주 제단을 장식할 그림의 습작으로 그가 이탈리아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얼마나 잘 연구했으며 또 그들의 이념을 얼마나 대담하게 발전시켰는지를 보여준다.” (398쪽)

- “이 그림에는” “<윌튼 두폭화>(pp. 216-7, 도판 143), 벨리니의 <성모>(p. 327, 도판 208) 또는 티치아노의 <페사로의 성모>(p. 330, 도판 210)” 등의 “그림에서보다도 더 많은 움직임과 빛, 그리고 훨씬 공간감이 넘치고 있으며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398쪽)

 

▲ 페터 파울 루벤스의 <아이의 얼굴>(도판 257, p. 400) ▼

- “마술사와 같은 그의 솜씨는 모든 것을 생기발랄하게 하고, 강력하고 유쾌하게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그의 완벽한 기량은 그의 간단한 소묘 작품(p. 26, 도판 1<아들 니콜라스의 초상>)이나 재미 삼아 그린 그림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400쪽)

- “도판 257은 작은 소녀의 얼굴인데 아마도 루벤스의 딸인 것 같다. 이것은 구도상의 복잡한 기교도 없으며 화려한 의상이나 흘러내리는 빛도 없는 단순한 소녀의 정면 초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그림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숨을 쉬고 맥박이 고동치고 있는 듯하다.” (400쪽)

- “루벤스가 어떻게 해서 이 생기발랄한 생명력의 인상을 만들어 냈는지” 하는 것은 “아마도 입술의 물기를 암시하고 또 얼굴과 머리카락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한 대담하고 섬세한 빛의 효과와 분명히 관계가 있을 듯싶다.” (400쪽)

 

▲ 페터 파울 루벤스의 <자화상>(도판 258, p. 401) ▼

- 이 시기 “네덜란드 자체도 스페인의 ‘가톨릭’ 지배에 저항한 신교 국가인 홀란트와 스페인과의 동맹 하에서 안트웨르펜의 지배를 받는 가톨릭교의 플랑드르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 가톨릭 진영의 화가로서 루벤스는 독자적인 지위에 올라섰다.” (402쪽)

- “귀족임을 암시하는 검(劍)을 차고 있는 그의 자화상(도판 258)은 그가 자신의” 이러한 독자적인 “지위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402쪽)

 

▲ 페터 파울 루벤스의 <평화의 축복에 대한 알레고리>(도판 259, p. 402) ▼

- 루벤스의 “손을 통해서 고전적인 우화와 우의적인 이야기들이 그의 딸의 초상처럼 실감나게 살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402쪽)

- “우의화는 보통 다소 따분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루벤스의 시대에는 그것이 사상을 표현하는 편리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402-3쪽)

- “도판 259가 그런 그림의 하나인데 이것은 루벤스가 스페인과의 화평을 설득하고자 영국 국왕 찰스 1세에게 선물로 가져왔던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평화와 축복을 전쟁의 공포와 대조시키고 있다.” (403쪽)

- “이 그림의 풍부한 세부 묘사와 생생한 대조들, 빛나는 색채에 몰입되어 보게 되면 이러한 구상들이 루벤스에게 있어서는 맥 빠진 추상으로서가 아니라 박진감 넘치는 현실로 생각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403쪽)

- 그러므로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이상화’된 형태가 그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형태들은 그와는 거리가 멀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가 그린 남자와 여자들은 그가 실제로 보고 좋아했던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403쪽)

 

▲ 안토니오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 1599-1641) ▼

- 안토니오 반 다이크는 “루벤스의 유명한 제자와 조수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푸생과 클로드 로랭의 세대에 속했다.” (405쪽)

- 안토니 반 다이크의 “기질과 분위기는 그의 스승과 대단히 달랐다.” “그의 그림에는 힘이 없고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바로 이러한 자질 때문에 제노바의 근엄한 귀족들과 찰스 1세와 그의 왕당파 당원들이 그의 그림에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405쪽)

- “오늘날 거만한 귀족적인 태도나 궁정적인 세련미를 숭상하던 당시의 영국 사회에 관한 그림의 기록을 갖게 된 것은 반 다이크 덕분이라 할 수 있다.” (405쪽)

- “사냥을 하던 중에 방금 말에서 내린 찰스 1세의 초상화(도판 261, <영국 국왕 찰스 1세>, p. 404)는 역사 속에 영원히 남고자 원했던 스튜어트 왕조의 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의 찰스 1세는 비할 데 없이 우아하고 확고한 권위와 높은 교양을 지닌 인물이며, 예술의 후원자이자 신으로부터 왕권을 부여받은 자로서 타고난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 권력의 다른 외형적인 장식이 필요치 않았던 한 남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405쪽)

- “루벤스의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건장하고 힘찬 인물들 못지 않게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시각 세계를 풍부하게 해 주는 명문 출신다운 귀족적인 품위와 신사적인 유유자적한 태도(도판 262, <존 경과 버너드 스튜어트 경>, p. 405)의 이상을 그림 속에 구체화시킨 사람”은 바로 반 다이크였다. (406쪽)

 

▲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 1599-1660) ▼

- “루벤스는 스페인을 여러 번 여행하던 중에 젊은 화가를 만났는데 그 젊은 화가는” “마드리드의 펠리페 4세의 궁전”의 궁정화가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였다. (406쪽)

- 벨라스케스는 “카라바조의” “‘자연주의’의 방침을 흡수하여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데 그의 예술을 바쳤다.” (406쪽)

- “도판 263(<세비야의 물장수>, p. 406)은 그의 초기 작품의 하나로 세비야 거리에서 물을 팔고 있는 한 노인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들의 재주를 과시하기 위해서 고안해 낸 그런 유형의 ‘풍속화’이지만,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성 토마>(도판 252)와 같이 강렬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그려졌다.” (406-7쪽)

- “지치고 주름살 투성이 얼굴에 누더기 망토를 걸친 노인과 둥근 모양의 큼직한 토기 항아리, 유약을 바른 단지의 표면과 투명한 유리잔에 어른거리는 빛 등 모든 것이 너무나 실감나게 그려져 있어서 그 물건들을 마치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407쪽)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도판 264, p. 407) ▼

-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서 “그의 주요 임무는 왕과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위신을 내세우며 딱딱하고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마치 마술을 부린 것처럼 이들의 초상화들을 사상 유례 없는 가장 매혹적인 그림들로 바꾸어 놓았다.” (408쪽)

-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카라바조의 수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렸다.” (408쪽)

- “그는 루벤스와 티치아노의 필법을 연구했으나 자연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에는 ‘남에게서 빌어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도판 264는” “티치아노가 그린 <교황 바오로 3세>(p. 335, 도판 214)보다 백 년여 뒤인 1649-50년에 로마에서 그린 것이다.” (408쪽)

- “티치아노가 라파엘로의 그림(p. 322, 도판 206,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에서 자극을 받았던 것처럼 벨라스케스는 티치아노가 그린 <교황 바오로 3세>에 대해서 도전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408쪽)

- “그러나 붓을 가지고 물질의 광택을 표현하는 방법이나 교황의 표정을 포착한 붓질의 정확성에 있어서 티치아노의 수법을 완전히 터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실물을 묘사한 그림이며 잘 베껴낸 공식 같은 그림은 아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408쪽)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 Las Meninas>(도판 266, p. 409) ▼

- “사실 벨라스케스의 원숙한 작품들은 붓놀림의 효과와 색채의 섬세한 조화에 대단히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도판만 가지고는 원화가 어떠한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그런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라스 메니나스>라고 알려진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대작(도판 266)이다.” (408쪽)

- “이 그림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없으나 나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미 오래 전에 벨라스케스는 현실의 한 순간을 화면에 담았다고 상상하고 싶다.” (410쪽)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스페인의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도판 267, p. 410) ▼

- 벨라스케스는 카메라가 한 순간의 현실을 가감 없이 포착하듯 현실을 그림으로 전환시키는 데만 멈추지 않았다. 도판 267도 “얼핏 보아서는 인상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초상 사진처럼 보일지 모른다. (411쪽)

-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일반 사진처럼 포착된 사물의 세세한 측면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사물을 사물이게끔 하는 ‘인상’(또는 일반자)을 묘사하려는 특징이 잘 드러난다.

- “붉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강아지와 같은 작은 모티프조차도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탁월한 솜씨를 드러내 보인다.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의 약혼>(도판 160, p. 243)에 나오는 작은 개와 비교해” 보자. (411쪽)

- “반 에이크는 작은 개의 곱슬곱슬한 털 하나 하나를 묘사하는 데 온 정성을 쏟고 있는 반면에, 그로부터 이백 년 뒤의 벨라스케스는 개의 특징적인 인상만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411쪽)

- “레오나르도처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한층 꼭 필요한 것만을 묘사하고 보는 사람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비록 그는 털을 하나도 그리지 않았지만 그의 작은 개는 사실상 반 에이크의 개보다 훨씬 더 털이 북실북실하고 자연스럽게 보인다.” (411쪽)

- “19세기의 파리에서 인상주의 창시자들이 과거의 어느 다른 화가들보다도 벨라스케스를 존경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효과 때문이었다.” (411쪽)

 

▲ 19장의 소결론 ▼

- “자연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관찰하며 색채와 빛의 새로운 조화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화가의 기본적인 과제가 되었다. 유럽의 가톨릭 진영에 살던 위대한 미술가들이나 정치적 장벽의 또 다른 쪽인 신교도의 네덜란드에 살던 위대한 미술가들이나 이 점은 모두 같았으며 이러한 새로운 임무에 그들의 열정을 쏟았다.” (4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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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 (1)

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17세기 전반기 :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 바로크 양식의 등장과 특성 ▼

-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Baroque)라고 부른다.” (387쪽)

- 원래 바로크라는 말은 포르투갈어나 에스파냐어에서 <비뚤어진 모양의 진주>를 뜻하는 <바로코(baroco)>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처음에는 곡선을 많이 사용한 장식 과잉의 이 양식을 <불규칙한> <그로테스크한>이라는 부정적이거나 모멸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 좀 더 세분화해서 말하자면 바로크는 매너리즘과 로코코 사이의 17세기 문화 전반의 양식을 지칭하며 이는 처음으로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바로크는 <매너리즘>(17세기 비평가들이 16세기 말의 미술가들을 비난하는 데 사용했던 가식과 천박한 모방이라는 본래의 의미 ; 선배들이 사용했던 부조화를 종종 모방했다는 의미)과 <로코코>(결벽증적인 단편성 추구)와는 다르게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였다.

- 바로크는 프랑스의 고딕양식(즉 중세 고딕양식)이 국제적 성격으로 발전하였던 것처럼 범 유럽적 문화 현상이었다. 그러나 국가나 각 지방 특유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나타난다. 즉 하나의 공통분모를 갖기엔 너무 방대하고 다양한 예술 경향이었던 것이다.

- 바로크는 크게 두 종류로 나타나게 된다. 즉 가톨릭적 바로크와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로 나뉜다.

- 가톨릭적 바로크는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로부터 루벤스, 베르니니의 예술에서 나타난다.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는 렘브란트와 얀 반 호이엔(Van Goyen, Jan)의 예술에서 나타난다.

- 전자는 감각주의적이고 기념비적, 장식적인 반면 후자는 이보다 더 엄격하고 더 형식을 존중하는 ‘고전주의적’ 양식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14세기 옥캄의 중세 경험론에 기인한 바 크다.

- 가톨릭적 바로크는 로마를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려는 로마 교황의 진흥책에서 발단되었으므로 반종교개혁의 유력한 수단이 되어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는 종래의 종교 그림이나 조각상을 새롭게 하여 종교 미술에 신선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 이렇게 해서 나타난 가톨릭적 바로크 미술의 특징은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이다(그러나 19세기 중엽의 독일 미술사가들에 의해 바로크란 용어에서 <변칙․이상․기묘함>이라는 부정적 평가는 제거되었다).

- 동시에 가톨릭적 바로크는 귀족들의 표현 수단이기도 하여 화려 호사한 의식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구실을 다하였다.

- 이런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장식을 바탕으로 한 가톨릭적 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에 비해 감동이 넘치는 극적 표현을 특색으로 한다.

- 결론적으로 바로크 미술의 성격은 3가지로 정의될 수 있다.

⑴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바조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가톨릭적 바로크.

⑵ 전성기의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였다-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

⑶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과 코레조의 예술에서 이탈리아 바로크의 색깔과 빛의 풍요로움이 비롯된다-가톨릭적 바로크.

▲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 1541?-1602) ▼

- 도판 250(<로마의 일 제수 교회>, p.389)을 보자. 이 교회 건물은 지금으로 보면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세워질 당시인 1575년에는 “대단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388쪽) 왜냐하면 이 건물은 “유럽 전역에 걸친 종교개혁에 대항해서 싸우려는 드높은 기대를 걸고 새롭게 설립된 예수회(Jesuits) 교단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388쪽)

- 이 교회 건물은 이전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들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장식적이고 현란하면서도 나름대로 규칙성을 부여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잃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먼저 이 교회 건물이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들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장식적이고 현란한 것은 “이 건물이 고전기 건축의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388쪽)

- 일단 “원주가 틀을 이루고 양 쪽에 작은 현관을 거느리고 있는 중앙의 대현관은” “고대 로마의 개선문(<티베리우스 황제의 개선문>, 도판 74, p.119) 형식을 상기시켜 준다.” (388쪽)

- 또한 “원주(오히려 반원주나 벽기둥에 가깝다)가 아키트레이브를 받치고 있고 그 위로 높은 ‘아티카(attica)’가 있으며 이번에 이것은 또 위층을 지탱하고 있다.” (388쪽)

- 그러나 이전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 즉 “브루넬레스키의 <파치 예배당>(도판 147, p.226)”, “브라만테가 설계한 <템피에토>(도판 187, p.290)”, “심지어 산소비노의 <산 마르코 교회 도서관>(도판 207, p.326)” (389쪽)과 비교해서 훨씬 더 현란하고 장식적인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고전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융합시킨 방법을” 볼 때 “로마나 그리스, 심지어 르네상스 건축법까지도 도외시하고” (388쪽)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도외시하는 특징들은 크게 2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⑴ “마치 전체 구조를 보다 호화스럽고 다채롭고 또한 장엄해 보이게 하려는 듯 기둥이나 반기둥이 모두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388-9쪽) ⑵ “이 건축가가 단조로운 중복을 피하고 이중 틀에 의해서 강조된 대현관이 있는 중심부에 초점을 주기 위해 각 부분들을 세심하게 배치한 점이다”(예를 들어 각 현관 문 위에 장식된 부조상은 삼위일체의 형식을 띰으로써 양쪽 작은 현관문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389쪽)

- 그런데 ⑵의 특징인 ‘세심한 배치’는 “모든 부분이 전체적인 효과를 이루기 위해 존재”하도록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하나의 커다랗고 복잡한 형태 속에 융합되어 있다.” (389쪽) “이 건축가가 아래층과 위층을 조화 있게 연결”시키기 위해 “고전 시대의 건축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종의 소용돌이 형태를 사용했다” (389쪽)는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 “사실상 순수한 고전적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크 건축가들에게 퍼부었던 비난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곡선과 소용돌이 무늬 때문이었다.” (389쪽)

- 그러나 이 무늬를 빼면 이 교회 건물은 ‘기계적’으로 분할되어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무늬는 그 자체로 보면 이상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건물 전체에 건축가가 의도했던 그런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390쪽)

 

▲ 17세기 회화의 특성 ▼

- “매너리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회화가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양식보다 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은 여러 모로 바로크 건축의 발달사와 비슷하다.” (390쪽)

- “우리는 틴토레토(도판 236, 237 ; pp.369, 370)와 엘 그레코(도판 238, 239 ; pp.372, 373)의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17세기 회화”의 “새로운 이념들”, 즉 “빛과 색의 강조라든가 단순한 균형을 무시하고 보다 복잡한 구도를 선호한다든가 하는 것”들이 “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390쪽)

- 그렇지만 “17세기 회화는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을 단순하게 지속시킨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논쟁을 벌였다.

- (그런데 “미술 세계에서의” “논쟁 자체는” 16세기에 처음 일어난 것이었는데, “16세기에는 회화가 조각보다 나은 예술이냐 또는 구도가 색채보다 더 중요하냐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식의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예컨대 피렌체 사람들은 구도를 중시했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색채를 높이 평가했다).” (390쪽))

- 17세기 논쟁의 쟁점은 다음의 2가지 흐름 사이의 대립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한편으로 라파엘로의 단순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 즉 고전주의적인 아름다움의 추구, 다른 한편으로는 추한 것이라 할지라도 추한 그대로의 진실, 즉 본 그대로의 진실 추구였다.

- 이러한 쟁점에 서 있던 두 화가가 있었는데, 그들은 전자와 관련해서는 <안니발레 카라치>, 후자와 관련해서는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였다.

 

▲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 1560-1609) -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 ▼

- “매너리즘에 진력이” 났다. (390쪽)

- “안니발레 카라치는 베네치아 파, 특히 코레조 파의 미술을 배운 화가 집안의 일원이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대단히 존경했던 라파엘로의 작품 세계에 매료되었다. 그는 매너리즘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라파엘로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했다.” (390쪽)

- “당시 그가 속해 있던 로마의 집단이 부르짖은 구호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양성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그의 의도를 죽은 그리스도의 시체를 보며 슬퍼하는 성모를 묘사한 제단화(도판 251,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성모>, p.351)에서 찾아볼 수 있다.” (390-1쪽)

- 그뤼네발트가 그린 고통으로 심하게 일그러진 예수(도판 224,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p.351)와 비교해보면 안니발레 카라치는 보는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와 아픔의 고통을 상기시키지 않으려고 아주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91쪽)

- “이 그림 자체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처럼 구도가 단순하고 조화롭다.” 그러나 “이 그림은 르네상스 회화라고 착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구세주의 몸 위에서 아른거리는 빛의 묘사 방식이라든가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는 표현 방식은 르네상스 양식과는 아주 다른, 말하자면 바로크적이다.” (391쪽)

 

▲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 1573-1610) - 밀라노 근처 출신 ▼

- “그의 작품은 카라치와는 전혀 달랐다. 카라바조”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 즉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392쪽)

- “그는 고전적인 규범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 대해 아주 새롭게 생각하고 싶어 했다.” 비평가들은 “그를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비난했다.” (392쪽)

- “성 토마를 묘사한 그의 작품(도판 252, <의심하는 토마>, p.392)을 살펴보자.”(393쪽) 이 그림에서는 “카라바조의 ‘자연주의’,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것을 추하다고 생각하든 아름답다고 생각하든지 간에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려는 그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393쪽)

- 이러한 “그의 의도는 아마도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는 카라치의 태도보다 더 돈독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393쪽) 그의 신앙심은 성경 이야기(“네 손가락으로 내선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복음 20장 27절)(393쪽에서 재인용))에 충실한 것에 기초하고 있는 것 같으며, 이러한 충실함은 성경의 인물들을 아름답게 묘사하기보다는 그 당시에 성경의 인물들, 즉 성인들이 겪었을 고초와 풍상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 이러한 그의 자연주의는 그림에서 성 토마가 예수를 의심하면서 자기 손가락을 예수의 옆구리 상처에 집어넣는 장면, 그리고 성인들의 모습이 풍상을 다 겪은 노동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를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였던 그는 그 전의 조토(도판 135, <그리스도를 애도함>, p. 203)와 뒤러(도판 222, <예수 탄생>, p. 347)처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마치 그의 이웃집에서 일어난 듯이 그 자신의 눈앞에 그려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오래된 성경의 등장인물들을 보다 진실되고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393쪽)

- “심지어 그가 명암을 다루는 방법도 그의 이러한 효과를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빛은 인체를 우아하고 부드럽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어둠과의 대조를 생겨나게 하는 눈부시도록 번쩍이는 거센 빛이다. 그러나 그 빛은 이 이상한 장면 전체를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393쪽)

- “안니발레 카라치와 카라바조는 19세기의 유행에서 배제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 다시금 그들의 진가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당시에 회화에 불어 넣어준 자극과 영향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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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겨울방학 서양 미술사 스터디 예비 모임^^

서양 미술사를 겨울방학 때 같이 공부하기로 했는데,

예비모임2011년 1월 11일 화요일 늦은 5시

 

학생회관 1층 식당에서 하고자 합니다.^^

 

교재는 <서양 미술사>(E. H. 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이종숭 옮김, 예경, 2009)이고요,

진도는 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부터 하고자 합니다.

같이 공부하실 분은 밑에 덧글을 달아주시고 연락처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변동 사항이 생길 경우 바로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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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뱀, 고양이, 쥐들에게 고함!

하도 매스컴 여기 저기서 GR GR하면서 쥐20을 떠들어대니,

하긴 학교 내에서도 쥐20때문에 건물 출입을 밤 9시부터 세컴을 작동시켜 통제한다더라마는...

참으로 뭐라 할까...

사람 사는 이 땅에 쥐가 얼마 전부터 설레발을 치고 온나라를 4대강 사업이니 어쩌니 하면서 들쑤시고 파헤치고 다니다보니, 그것도 모자라서 지구상의 방귀께나 뀐다는 쥐들을 20마리 초청했다나 어쨌다나,..

그러다보니 사람은 뒷전이고 쥐들이 먼저라,..

사람 먹고 싸는 것까지 뭐라 한다는 소리도 들리더라마는...

 

이에 이 땅의 모든 쥐들이 불만이 쌓여 볼멘 소리들을 해댄다.

- 아니, 빌어먹을 언제 지들이 우리 쥐들의 대표라구 이 땅에 모여서 GR들이야, GR들이!

- 도대체 그 놈들 때문에 밤에도 맘 놓고 다닐 수가 있어야지.

- 아니, XX... 짭새들이 우리들까정 검문한다고 난리라니깐...

- 그럼 우린 언제 밥 먹고 사냐, 밤에 인간들 거 살짝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하여간에 이 땅에 쥐 한마리가 온통 물을 흐리더니만,

이젠 지랑 비슷한 넘덜을 델꼬 와서 물만 흐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난리 부르스를 추고 야단이다...

울나라 그 쥐와 다른 쥐19마리가 모여 이제 사람 사는 것에 대해 감놔라 배놔라 한다는데...

하도 어이가 없는지라 일단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뭐, 이 땅의 모든 고양이들이 갱찰에 의해 집단으로 감금되었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런지

학교에 길냥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갱찰이 한숨 놓는 것은 뱀들이 겨울잠 자러 들어갔기 때문이라던데,

뱀들이 겨울잠만 자지 않았어도,

이 쥐20마리가 설레발이치치 못하지 않았을까...

겨울잠을 자고 있는 뱀들을 깨워서 전국의 고양이들을 감금으로부터 해방시켜

사람과 쥐, 고양이, 뱀들이 연대하여 쥐20이 이 땅에서 설레발이치치 못하게 해야 된다고 본다!

 

전국의 뱀들이여, 고양이들이여, 쥐들이여!!!

우리 인간과 연대의 깃발 높이 들고 쥐20마리를 몰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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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 플리즈 님 글에 대한 이야기^^...

ScanPlease님의 [등록금 투쟁과 대학입시] 에 관련된 글.

 

스캔 플리즈 님 글 잘 읽었습니다.

스캔 플리즈 님 글 요지는 대학 입학은 쉽게 하고 대학 졸업을 어렵게 해야

사교육비가 감소하는 등 대학 입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대학 입학을 쉽게 하고 졸업을 어렵게 하는 정책은 이미 전두환 정권 시절에 <졸업 정원제>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전두환 정권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단행한 정책 중 하나로서, 대학의 엘리트화에서 대학의 대중화로 대학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수혜(?)를 입어서 저도 대학이라는 곳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대학의 대중화는 신분 상승의 기회를 넓혀 준 계기가 되었고, 이것은 동시에 사교육의 대표격인 입시 학원을 활성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교육 폐해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는 대학 입시 전형의 다양화로 대학 입학이 조금 더 쉬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꼭 공부를 잘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특기가 있다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오로지 공부를 잘 해야만 대학에 입학할 수 있던 것에 비하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대학이 졸업하기 쉽다고 하셨는데, 졸업하기가 이전에 비해서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일단 졸업 이수 학점이 대체로 좀 높아졌고, 설렁설렁해서 졸업할 수 있는 조건이 못됩니다.

한 학기에 18학점 정도 듣는 것은 그나마 적게 듣는 것입니다. 보통 20학점씩 정도를 들어야 합니다.

거기다가 학점이 나쁜 과목은 삭제시키고 다시 그 과목을 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18학점 정도 듣는다면 레포트에다가 뭐에다가 일주일에 3일은 밤을 새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학점이 잘 나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평균이 그렇다는 거지요.

거기다가 토익 점수가 보통 750점 이상이어야 한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전에 제가 공부할 때와 비교해 보면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으로서도 입학은 예전에 비해 쉬워졌지만, 졸업은 훨씬 어려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 입시의 문제는 대학 입학을 쉽게 하고 졸업을 어렵게 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입시 문제는 대기업의 취직 입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대학생들의 사교육비는 고등학생의 사교육비와 맘먹거나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취직에 맞는 스펙을 쌓으려면 그 스펙에 맞는 여러 학원들을 다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해외 어학 연수를 1년 정도 다녀 오려면 1,500만원 정도 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교육비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대학입시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학 입학을 쉽게 하고 졸업을 어렵게 한다고 해서 이것이 대학입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학입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는 <대학이 얼마나 자본의 힘에 저항할 수 있느냐>, 즉 <대학생들이 얼마나 정치세력화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정치 세력화를 위한 첫걸음은 바로 대학생들 자신이 스스로를 정치세력화할 수 있는 <자유 시간>의 확보가 필수불가결한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시간 확보 투쟁은 한 학교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투쟁이고, 오히려 전국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대정부 정치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서 대학생들은 자신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는 실전활동(이것을 맑스는 <프락시스>라고 하더군요^^)을 활발히 펼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학은 지금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등록금을 주물럭 주물럭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입생들의 등록금을 자기 맘대로 올리다간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학입시 문제는 대학생들 자신이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시간 확보 투쟁>을 통해서 자신들을 정치세력화시켜 대학을 자본에 대한 강력한 저항 교두보로 변화시킬 때 대학입시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는 것입니다.^^

대학이 중급 노동자 양성소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면, 즉 자본에 종속되면 대학입시 문제 해결은 요원할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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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 투쟁에 관한 단상...

서울의 모 대학 총장이 일명 <빵장>으로 불리고 있다.

그 이유인즉슨, 그 총장이 <더 맛있는 빵을 먹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면서,

내년도 등록금을 2~3배 정도 올려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란다.

물론 그 이후에 해명을 했단다. <단과대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려면 등록금을 그 정도로 올려야 한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뭐,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시대가 천박하니까 교육자라는 사람도 입이 경박해지고 천박해지는가부다.

맑스가 한 말이 절실하게 생각난다.

<교육자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

교육자를 누가 교육을 시킬 것인가?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학생들이다.

학생들의 <힘>이 없으니까 즉흥적으로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힘이 있었다면 저런 식으로 교육자가 천박함을 드러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교육자가 천박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책임이 크다 할 수 있겠다.

 

90년대 이후로 줄기차게 대학 사회의 중요한 이슈 중이 하나가 된 것이 바로 <등록금 인상> 문제이다.

학교는 끊임없이 인상하려고 하고, 학생들은 인하하려는 저항을 계속 해 왔다.

그러나 등록금은 학교가 마음 먹은대로 계속 인상되어 왔고,

학생들의 저항은 별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것은 곧 학생 운동권의 불신을 넘어서서 학생회 자체에 대한 불신,

더 나아가 학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공부이자 활동인 <자치>에 대한 무관심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자치는 학생들에게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러고서는 오로지 취업, 취직만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

대학은 이제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 불모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

대학이라는 횃불이 점점 더 사그러지고 있다.

 

그러다고 하더라도 아주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여전히 투쟁의 불씨는 남아 있다.

그 불씨가 바로 등록금 인하 투쟁이다.

지금까지의 등록금 투쟁은 대학 재단과 총장에게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 등록금을 인하해 달라는 식이었다고 본다.

이때 대학의 답변 역시 먹고 살기 힘드니까, 다시 말해 자꾸 물가가 오르니까 등록금을 올리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 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똑같은 전제를 깔고 있는데, 누가 더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여 싸움의 승패를 가를 수가 있을까?

그러니 이 투쟁은 아무런 진전도 없이 지리하게 이어지는, 김 빠진 사이다와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칼자루를 대학 재단이 쥐고 있으니 싸움을 오래 끌면 끌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학생들 쪽이다.

그러니 이 싸움의 승리는 결국 재단이 하게 된다.

등록금 인하 투쟁을 한다고 대학 본관(행정관), 총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한다고 해도 학생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싸움의 승자를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싸움은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늘 항상 투쟁의 방식은 이런 식이었음을 학생들은 보아 왔다.

학생회는 학교에 선전포고를 한 다음에 말싸움 몇 번 하고 서명을 받고는 더 이상 무엇을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것 이외의 어떤 다른 전술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학생회, 학생운동 진영의 상상력의 빈곤... 이것은 교육자의 천박함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단순히 등록금만 인하하자고 하는 투쟁은 이제 안 하느니만 못한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

안 하자니 마땅히 할 사업이 없고, 하자니 이미 결판난 싸움이고, 또 학생들한테 곱지 않은 눈길을 받을 테고.

 

<등록금 투쟁은  졸업 이수 학점을 대폭 낮추는 투쟁과 결합해야 한다!>

 

먼저 등록금 투쟁은 학생들의 관심과 주체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

이 말은 아주 진부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부하다고 생각되는 이 말 속에 진리가 있다.

진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들의 관심과 주체적인 참여가 가능하도록 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학생들이 현재 수준에서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학생들은 과중한 노동, 즉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재미 없는 공부와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 공부에 지쳐 있다.

그래서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너무도 필요로 한다.

그들의 입에서는 <어휴~~! 힘들어!> 하는 소리가 무의식중에 흘러 나온다.

속된 말로 똥 누고 밑 닦을 틈도 없는 것이 학생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학생들은 정말로 약간이라도 인간적인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재미 있는 대학생활을 원한다.

학기 중엔 잠도 맘 편히 실컷 자볼 수도 없다.

시험과 레포트에 치여 일주일에 삼사 일은 거의 밤을 새다시피한다.

(잠 좀 자자라는 말은 촛불시위를 당긴 여고3학년의 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대학생들 전체의 입 속에서 신음소리인 듯이 나오는 말일 것이다.)

어느 딱한 책상물림들이 한국 대학생들은 공부를 안 한다고 했던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고3보다도 더 빡빡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한국의 대학생들이다.  

 

친구들과 마음 편히 영화 한편, 연극 한편 등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

그러한 여유를 누리고 싶지만, 거의 대부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럴 시간에 토익 한자라도 더 공부해야 하고,

A+ 학점을 맞기 위한 공부를 한자라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렴풋이 자기가 꿈꾸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어하지만,

그러한 것을 할 시간이 없다.

늘 해야 하는 것의 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그러다가 졸업할 때쯤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도 잘 모르게 된다.

그냥 그렇게 떠밀려 대학을 떠나게 된다.

대학생들은 이러한 것을 대단히 두려워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하면서 받아들인다.

 

학생들의 공부라는 노동의 강도를 완화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이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완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이러한 노동 강도의 완화 투쟁은 졸업을 위한 이수 학점을 대폭 낮추어야 하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

절반 이상으로 낮추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고, 인간다운 대학생활을 위한 자유시간을 쟁취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시간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즉 졸업 이수 학점을 절반으로 낮추는 투쟁을 어떻게 등록금 투쟁과 연결시킬 것인가?

학교 측의 경제 논리를 역이용하면 된다고 본다.

학교 측의 논리는 대체로 등록금 인상 요인이 일반적으로 물가 상승이고, 이러한 물가 상승이 인건비의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등록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인건비의 상승이 등록금 상승의 요인이라는 것이다(그렇지만 대학 교육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시간강사의 경우 강사료의 인상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거의 20년간 강사료의 인상율은 그간의 물가 상승율에 비하면 거의 10분의 1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인건비를 낮추면 등록금을 인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졸업 이수 학점을 낮추어서 인건비를 절감하면 된다. 다시 말해서 졸업 이수 학점을 절반으로 낮춘다는 것은 그 학점에 해당하는 과목 또는 강좌를 줄인다는 것이고, 이는 곧 그 과목 또는 강좌를 담당하는 교강사를 줄이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등록금 인하 요인을 학교 측의 경제 논리를 이용하여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었을 때 당장 생존에 지장을 받는 이는 나 같은 시간강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 보장의 책임은 학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부 및 자본에게 있다. 그러므로 교강사들의 생존 보장은 학생들의 노동 강도 강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부 및 자본에 대해 요구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요구 투쟁을 할 때 학생들은 기꺼이 연대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학교 측에 공을 넘겨 버리면 학교는 분명히 <졸업 이수 학점을 낮추는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 의지의 문제이다>라고 하면서 비껴가려고 할 것이다.

학교의 답은 분명히 맞는 답이다.

사실상 졸업 이수 학점 감소 문제는 개별 학교에서 투쟁할 사안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국 전체 대학생의 문제로서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답게 공부하기 위해, 즉 과도한 노동강도의 공부, 그리하여 재미 없게 된 공부의 양을 대폭 줄이기 위해 학생들 스스로 촛불시위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학생들은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지난 번 촛불시위는 여고3학년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이제는 좀더 구체적이고 절실한 삶의 문제인 노동강도의 완화로서의 졸업 이수 대폭 감소를 위한 촛불시위는 대학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충분히 시작될 수 있으리라 본다.

대학 안에 갇혀 있던 대학, 외부와 소통이 단절된 대학이 아니라 사통발달의 거리 광장의 대학,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한 대학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해 와서 발표하고 토론하며, 또한 서로 격려해 가면서 공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듦으로써 스스로 대학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러한 대학 만듦은 자연스럽게 대학 안에 갇힌 대학에 대한 동맹 휴업으로 나타날 것이고, 휴학 투쟁으로 나타날 것이고, 졸업 연기 투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은 서서히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자본은 자기 입맛대로 노동력을 공급 받을 수 없을 텐데, 졸업하는 학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대학은 더 이상 대학에 갇힌 대학이 아니라 사통발달의 광장의 대학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할 커리큘럼을 만들기 시작하고, 이 커리큘럼대로 공부하기 시작할 것이고,

이 공부한 것을 발표하고 토론하며 서로 격려해 가는 공부의 장, 축제의 장, 소통의 장, 정치의 장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러한 장은 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릴 것인데, 이는 기존의 축제와는 전혀 다른 학생들 스스로를 생산해 내는

생산력 발전의 축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축제는 곧 학생들 자신의 코뮌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이것은 곧 등록금 인하가 아니라 대학의 무상 교육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아가 대학 입시제도도 폐지될 것이고, 누구든지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대학에 올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학의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좀 더 생각이 구체화되는 대로 세부적으로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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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 윤리학에 대하여^^...

# 메타 윤리학 #

 

- <과학(합리성) = 윤리>라는 도식이 아예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문제의식은 에피쿠로스학파, 흄, 칸트와 거의 똑같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성 작용의 영역을 과학에 한정시키고 윤리의 영역은 빼 버린다는 것이다.

- <과학(합리성) ≠ 윤리>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면, 윤리(~해야 한다, 당위, 도덕, 자유의지의 영역; 가치판단의 영역) 영역에 속하는 주장은 그 근거를 과학․합리성의 영역(~이다, 자연법칙․필연성의 영역; 사실판단의 영역)으로부터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조류가 메타 윤리학이다.

 

** 메타 윤리학 1 : 무어와 이모티비즘

- 메타윤리학의 대표적인 학자가 <무어>이다. 무어는 윤리적인 판단의 참됨을, 즉 가치판단의 참됨을 과학․합리성의 영역에서, 즉 사실 판단에서 그 근거를 끌어대는 것은 오류이고, 이러한 오류를 <자연론적 오류>라고 불렀다.

- 예를 들어 ‘인간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규범 윤리학자에게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결국 행복하게 잘 살더라’는 등의 사실에 관한 판단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규범 윤리학자에게 <윤리 = 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실판단의 예를 많이 끌어들여도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는 증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과 당의는 그 존재의 층위가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 이렇게 해서 메타 윤리학은 규범 윤리학이 학문, 즉 과학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현대의 대표적인 메타 윤리학의 조류는 <이모티비즘(emotivism)>이다. 이모티비즘을 주장하는 윤리학자들은 예를 들어 ‘인간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판단은 ‘아 슬프다’, ‘나쁜 녀석’ 등과 같이 말하는 사람의 감정(emotion)을 표출하거나 듣는 사람의 감정을 일으키는 구실을 할 뿐이며 우리에게 아무런 사실도 알려주지 않는다.

- 그러므로 이모티비즘에 따르면 이런 도덕판단은 예를 들어 ‘이 사과는 빨갛다’는 사실판단과 달리 참, 거짓을 가릴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도덕판단을 핵심 내용으로 삼는 규범 윤리학은 과학이, 즉 학문이 될 수 없다.

 

** 메타 윤리학 2 : 헤어

- 무어나 이모티비즘에 따르면 모든 도덕판단과 그 도덕판단을 핵심으로 하는 규범 윤리학은 주관적인 개인 감정에 기초하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도덕, 윤리는 성립할 수 없게 되고, 인간 사회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 바로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규범 윤리학이 학문(과학)으로 성립할 수 있다고, 즉 도덕판단도 참, 거짓을 가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메타 윤리학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20세기 미국의 윤리학자 헤어이다.

- 헤어는 도덕판단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적 요소>, 즉 이성(과학)이 작용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도덕판단도 참, 거짓을 가릴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도덕판단 속에는 <누구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과 <이런 이웃 사랑을 적극적으로 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전자는 이 도덕판단의 내용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보편화 가능성>과 그 내용을 행동에 옮기도록 촉구하는 <규제성>이 들어 있다.

- 보편화 가능성을 먼저 살펴보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 또는 없는지, 즉 그 보편화 가능성의 참․거짓(정당성과 부당성)을 가질 수 있으며 이 결과에 따라 규제성의 ‘~을 하라’는 것 역시도 해야 되는지 또는 하지 않아야 하는지, 즉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참․거짓을 판별할 수 있게 된다.

- 그렇기 때문에 헤어는 규범 윤리학이 학문, 과학으로 성립할 수 있다, 즉 <과학 = 윤리>라는 도식이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 메타 윤리학 3 : 듀이

-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철학자 듀이는 도덕판단이란 인간이 부딪친 <문제 상황> 속에서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 일종의 <실천 판단>이며, 이 실천판단 속에는 <현재 사실>에 대한 정보와 미래 사실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 예를 들어 ‘너는 병원에 가야 한다’는 실천판단 속에는 현재 너의 몸이 아프다는 사실에 대한 정보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나을 것이라는 미래 사실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다. 그리고 현재 몸이 아프다는 점과 병원에 가면 나을 것이라는 점은 참․거짓을 가릴 수 있다.

- 그러므로 듀이에 따르면 도덕판단도 참․거짓을 가릴 수 있으며, 이 도덕판단을 핵심 내용으로 가지는 규범 윤리학은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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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 윤리학에 대하여 주저리 주저리 2^^...

** 근대 윤리학 1 : 칸트의 윤리학

- 중세 봉건 공동체가 해체되고 근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각 개인들은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지게 되었다. 이것은 곧 각 개인들의 생존이 각 개인 자신에게 달려 있을 뿐 다른 어떤 누구에게도 간섭 받거나 침해 받을 수 없음을 뜻한다.

- 이러한 생존의 법칙은 타인을 완전히 배제하는 배타적 특성을 가진 사적 소유의 원리가 된다. 모든 합리적인 수단․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신만의 부를 소유․축적할 수 있다는 것이 근대 시대의 <자유> 이념이며, 누구나 이러한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근대 시대의 <평등> 이념이다.

- 자기 자신만의 생존을 위하는 근대 인간은 곧 만인 대 만인 투쟁 상태, 즉 먹지 않으면 먹히고 마는 정글 법칙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 이러한 상태는 여타의 다른 동물들이 사는 자연 세계와 똑같은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서로 돕고 협력하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윤리’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가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피쿠로스학파에게서처럼 칸트에 오게 되면 고대의 전통인 <과학(합리성 또는 이성) = 윤리>라는 도식이 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정글법칙에 따라 사는 이 현실의 삶이 왜 그러한지를, 즉 신의 뜻을 이 현실 속에서 찾아봐야 정글법칙이 그 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글법칙은 정확하게 말해서 신의 뜻이 아니다.

- 정글의 법칙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배타적인 사적 소유의 원리, 즉 적대적인 무한 경쟁의 원리로서 이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만드는 원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사회성, 즉 협력과 단결, 연대와 우애라는 특성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제 인간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간의 사회성을 회복시켜야만 하는 의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안 하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러한 의무의 영역은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적 현상의 영역, 즉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객관적 ‘사실’의 영역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영역이다. 이 영역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당위’ 또는 ‘도덕’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 이러한 의무․의지를 칸트는 ‘선 의지’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지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그러한 의지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답게, 즉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사회성(연대와 협력, 그리고 우애와 단결)을 실현시키며 살아가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 칸트의 이러한 <선 의지>는 <정언명령>이라는 정식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 위와 같은 내용을 고찰해 볼 때 칸트의 ‘선 의지’, ‘정언명령’은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유의지처럼 <자발성>에 기초한 윤리 법칙이라 할 수 있다.

- 그런데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유의지>와 칸트의 <선의지>와의 차이점은 아마도 칸트의 선의지가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유의지 방향을 구체적으로 설정하였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유의지의 발현방향을 <선>으로 구체화하였다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 이러한 윤리 법칙은 국가들 간의 윤리적․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UN과 비슷한 <국가연합>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 근대 윤리학 2 : 공리주의

- 에피쿠로스학파와 칸트의 윤리학이 자발성에 기초해 있다고 한다면 공리주의는 비자발성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수로서의 나의 이익이 다수로서의 여러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충돌이 일어나게 될 때, 공리주의는 다수의 여러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지지하게 되며, 소수로서의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여러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법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는 <적대적인 무한 경쟁>을 생존 원리로 삼고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 대다수가 이 생존 경쟁으로부터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는 칸트가 말하는 선의지, 즉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정언명령이 실현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이런 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즉 비합리적인 것으로 비판 받을 수 있다.

- 윤리는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리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윤리관을 통해 공리주의가 성립한다. 그런 점에서 공리주의는 <경험주의적>이다.

- 공리주의는 이러한 자본주의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다시 말해서 <적대적인 무한 생존 경쟁> 원리를 이미 그 바탕에 깔고 있다. 그 경쟁에서 탈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 경쟁에서 탈락한 자는 경쟁 구조 속에 다시 뛰어들 수 없는 죽은 자(또는 비존재)이다.

-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는 경쟁 이전의 전체의 측면에서 볼 때 <최대 다수>이다. 왜냐하면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에는 애초부터 경쟁에서 승리한 자뿐만 아니라 패자부활전 같은 것을 통해서 다시금 경쟁 체제에 편입될 수 있도록 구원 받은 자들과 앞으로 경쟁 체제에 들어올 예비 경쟁자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일단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킨 <행복한 자들>이다.

- 그러므로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의 원리는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 된다.

-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그 특성상 <배제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경쟁에서 탈락한 소수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다른 한편 경쟁은 단 1번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한하게, 그것도 적대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계속 최대 다수 중에서 경쟁에 탈락한 소수가 배제되고 결국에 가서는 <1등 혼자만이> <최대 다수>가 되고, <최대 다수>인 경쟁자는 <최대 소수>가 된다.

- 이렇게 해서 공리주의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 결국에 가서는 1등만을 위한 윤리법칙이 되고 만다.

- 또한 공리주의 경제지상주의(경제적인 이익이 커져야만, 즉 파이가 커져야만 각 개인에게 돌아갈 이익도 커진다는 논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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