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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버린 텍사스...한국 반도체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6/02/24 10:40
  • 수정일
    2026/02/24 10:4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반도체 특별과외] 수도권의 반도체 클러스터는 전 세계의 리스크

26.02.24 06:43최종 업데이트 26.02.24 07:13

2021년 2월 18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킬린의 195번 주도 표지판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 겨울 폭풍 '유리(Uri)'가 텍사스에 기록적인 추위와 정전을 몰고 온 가운데 결빙과 강수를 동반한 폭풍이 미국 내 26개 주를 휩쓸고 지나갔다.AFP 연합뉴스

미국 텍사스주 하면 흔히 뜨거운 태양, 사막, 석유, 카우보이를 많이 떠올립니다. 실제로 텍사스는 기후가 대체로 온화한 편입니다. 휴스턴·오스틴 등 중남부는 아열대성 기후에 가깝고, 겨울 평균기온도 영상권입니다. 미국 내 최대 석유·가스 생산지 중 하나이고, 전력 요금이 낮아 에너지를 많이 쓰는 산업이 많이 모여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2021년 2월, 이 통념을 깨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북극의 찬바람이 미국 중남부까지 내려오면서 텍사스 곳곳의 기온이 영하 20℃ 안팎까지 급락한 겁니다. 평소 혹한에 대한 대비가 미흡했던 텍사스는 발전·가스 설비가 동파되거나 멈춰 섰고, 갑작스러운 추위에 난방을 위한 전력수요는 급증했습니다.

텍사스는 워낙 자체 에너지가 풍부하다 보니 미국 안에서도 드물게 독립 전력망을 운영하는데, 이에 따라 다른 주와의 전력 연계가 제한적인 구조입니다. 그러다 보니 갑작스러운 전력 부족 사태에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고, 그로 인해 대규모 순환 정전이 발생했습니다.

날씨는 추운데 난방을 위한 전기의 공급이 끊기자 많은 이들이 추위로 인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2021년의 텍사스 한파는 공식 집계로 246명 이상이 추위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사망한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자연재해 피해 중 하나입니다.

정전이 장기화하자 텍사스 주정부는 지역 내 대형 산업체에 전력 사용 중단을 요청했습니다. 사람 살리는 게 우선이니까요. 가장 먼저 표적이 된 건 24시간 365일 가동을 전제로 설계된 반도체 팹입니다. 반도체 팹 하나가 발전소 하나 분량의 전기를 쓰니까 가동 중단에 의한 효과도 가장 큽니다.

이에 따라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삼성전자의 팹은 1998년에 운영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가동을 멈춰야 했습니다. 삼성전자 외에도 자동차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NXP, 전력반도체를 만드는 인피니온, 아날로그·전력반도체를 생산하는 TI가 수일에서 수주간 팹 가동을 멈췄습니다.

반도체 공정은 표면에 아무것도 없는 순수 웨이퍼가 수 주 동안 수백 단계 공정을 거치며 회로를 새겨서 완성되는데, 워낙 미세한 회로를 그려내다 보니 환경에 민감합니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클린룸 내부의 온도나 습도에 변화가 생기거나 장시간 팹 운영이 중단되면 공정을 진행 중이던 웨이퍼의 상태가 변해 상당수를 폐기해야 합니다. 업계 추산으로 삼성 오스틴 공장의 직접 손실만 수억 달러 규모였고, TI, NXP, 인피니온도 큰 생산 차질을 빚었습니다.

문제는 시점이었습니다. 2020년 하반기부터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도입되면서 노트북 등 IT 기기와 데이터센터의 수요가 급증했고, 전기차 전환과 함께 자동차용 반도체 수요도 빠르게 늘던 때였습니다. 안 그래도 수요는 늘고 공급은 따라가지 못하던 상황에서 IT산업의 핵심 부품인 반도체를 생산하는 텍사스의 주요 팹이 동시에 멈춘 겁니다.

삼성전자 오스틴 팹 전경. 2021년, 혹한으로 반도체 팹이 멈추는 일이 발생했습니다.삼성전자

반도체 없으면 자동차도 없다

그 파장은 곧장 전 세계 자동차 공장의 셧다운으로 이어졌습니다. 핵심 반도체를 공급받지 못한 완성차 업체들은 조립 라인을 멈춰 세워야 했고, 주인을 찾지 못한 미완성 차량들이 공터에 가득 쌓인 채 반도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특정 지역에 산업 인프라를 과도하게 밀집시켰을 때, 예기치 못한 국지적 사고가 어떻게 글로벌 공급망 전체를 마비시키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본래 반도체 팹은 전력·용수·소재·물류라는 주요 인프라가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야 돌아가는 정밀한 생태계입니다. 특히 공정이 미세화될수록 단위 면적당 전력 소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매일 수만 톤의 초순수와 냉각수가 쉼 없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외부 환경에 극도로 민감한 시설일수록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리스크 분산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한 지역의 마비가 전체의 궤멸로 이어지지 않도록 대체 거점을 마련하는 분산 배치를 입지 선정의 대원칙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텍사스 한파와 정전 사태로 인해 우리는 기후 위기 앞에 안전한 곳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전략 산업을 한곳에 과도하게 모아 놓을 경우 한 번의 위기로 모든 것이 멈춰버릴 수 있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만약 당시 자동차용 반도체 주요 생산 거점이 텍사스 외 다른 곳에 고르게 분산되어 있었다면, 피해는 일부 지역 안에서 그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패를 교훈 삼아 현재를 바꾸지 않으면 미래에 똑같은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스럽게 대부분의 반도체 기업과 해당 국가는 실패에서 교훈을 배웠습니다. 미국 메모리 기업 마이크론은 대만과 일본에 팹을 운영하고 있고, 최근 미국 내 신규 팹을 뉴욕주와 아이다호 등 복수 지역에 나눠 추진하고, 싱가포르에도 대규모 투자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아이다호나 뉴욕주 중에서 하나 골라 거기에 클러스터라는 이름으로 팹을 다 모아 놓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은데 마이크론은 전력·용수·정치·기후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한 전략적으로 판단한 겁니다.

유럽연합(EU)도 칩스법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역내 반도체 생산 거점을 다변화하고 있고, 미국 역시 자국 내 생산을 확대하되 특정 주에 과도하게 집중되지 않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팹은 더 이상 웨이퍼에 회로를 그리는 공장에 그치지 않고,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전략 인프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략 인프라를 과녁 삼아 한곳에 모아 놓는 경우는 없습니다.

수도권에 반도체 팹 모아 놓는 위험한 도박

한국 반도체 팹은 수도권, 특히 경기 남부에 밀집돼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대규모 반도체 산단을 용인에 짓겠다는 건 짚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록적 폭우, 장기 가뭄, 전력 수급 오류, 지반침하(싱크홀) 등은 모두 확률은 낮아도 파급력은 큰 사건들이며, 10년에 한 번, 30년에 한 번 발생하더라도 한 곳에 모아 놓은 반도체 단지 전체에 궤멸적인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한국 수출에서 반도체 비중은 약 20~30%를 오갑니다. 반도체 단지가 한 달만 멈추더라도 우리 국가 경제 전반의 충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일 겁니다. 공급망이 글로벌하게 얽힌 상황에서, 한국발 반도체 차질은 세계 IT 생태계에도 연쇄 영향을 미칠 겁니다. 용인 반도체 산단은 세계가 주목해야 할 정도의 큰 리스크입니다.

물론 반도체 팹의 분산 배치는 비용이 더 들고, 인프라 중복투자 논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반도체 팹의 입지를 선정할 때 평균 비용이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 입게 될 손실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효율을 극대화할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을 지킬 것인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용인국가산단은 아직 공사가 시작 전이라 계획을 원점으로 되돌릴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진행상황. 아직 착공 전이라 언제든 계획을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용인시청

반도체 초호황기인 지금 우리나라 상황에서 호남권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산단에 새로운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것은 단순히 리스크 해소를 위한 반도체 팹의 분산 배치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또 하나의 반도체 생태계를 탄생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정부와 기업은 수도권 집중이 불러올 잠재적 재앙을 외면한 채 안일한 태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온화한 날씨와 풍부한 에너지를 자랑하던 텍사스가 북극 한파에 속수무책으로 얼어붙어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세계 산업이 멈춰 섰던 그날의 비극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거대한 자연의 변덕과 예기치 못한 사고 앞에서 인간이 쌓아 올린 효율은 한낱 모래성에 불과함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반도체 팹의 분산은 단순한 지역 균형 발전의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골든타임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안전장치이자 국가 서바이벌 전략입니다. 지금 내리는 결단이 훗날 우리 경제의 숨통을 틔울 생명선이 될지, 아니면 거대한 재앙의 도화선이 될지, 정부와 기업의 책임 있는 이들의 용기 있는 선택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반도체 #호남권RE100반도체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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