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없으면 자동차도 없다
그 파장은 곧장 전 세계 자동차 공장의 셧다운으로 이어졌습니다. 핵심 반도체를 공급받지 못한 완성차 업체들은 조립 라인을 멈춰 세워야 했고, 주인을 찾지 못한 미완성 차량들이 공터에 가득 쌓인 채 반도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특정 지역에 산업 인프라를 과도하게 밀집시켰을 때, 예기치 못한 국지적 사고가 어떻게 글로벌 공급망 전체를 마비시키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본래 반도체 팹은 전력·용수·소재·물류라는 주요 인프라가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야 돌아가는 정밀한 생태계입니다. 특히 공정이 미세화될수록 단위 면적당 전력 소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매일 수만 톤의 초순수와 냉각수가 쉼 없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외부 환경에 극도로 민감한 시설일수록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리스크 분산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한 지역의 마비가 전체의 궤멸로 이어지지 않도록 대체 거점을 마련하는 분산 배치를 입지 선정의 대원칙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텍사스 한파와 정전 사태로 인해 우리는 기후 위기 앞에 안전한 곳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전략 산업을 한곳에 과도하게 모아 놓을 경우 한 번의 위기로 모든 것이 멈춰버릴 수 있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만약 당시 자동차용 반도체 주요 생산 거점이 텍사스 외 다른 곳에 고르게 분산되어 있었다면, 피해는 일부 지역 안에서 그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패를 교훈 삼아 현재를 바꾸지 않으면 미래에 똑같은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스럽게 대부분의 반도체 기업과 해당 국가는 실패에서 교훈을 배웠습니다. 미국 메모리 기업 마이크론은 대만과 일본에 팹을 운영하고 있고, 최근 미국 내 신규 팹을 뉴욕주와 아이다호 등 복수 지역에 나눠 추진하고, 싱가포르에도 대규모 투자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아이다호나 뉴욕주 중에서 하나 골라 거기에 클러스터라는 이름으로 팹을 다 모아 놓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은데 마이크론은 전력·용수·정치·기후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한 전략적으로 판단한 겁니다.
유럽연합(EU)도 칩스법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역내 반도체 생산 거점을 다변화하고 있고, 미국 역시 자국 내 생산을 확대하되 특정 주에 과도하게 집중되지 않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팹은 더 이상 웨이퍼에 회로를 그리는 공장에 그치지 않고,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전략 인프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략 인프라를 과녁 삼아 한곳에 모아 놓는 경우는 없습니다.
수도권에 반도체 팹 모아 놓는 위험한 도박
한국 반도체 팹은 수도권, 특히 경기 남부에 밀집돼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대규모 반도체 산단을 용인에 짓겠다는 건 짚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록적 폭우, 장기 가뭄, 전력 수급 오류, 지반침하(싱크홀) 등은 모두 확률은 낮아도 파급력은 큰 사건들이며, 10년에 한 번, 30년에 한 번 발생하더라도 한 곳에 모아 놓은 반도체 단지 전체에 궤멸적인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한국 수출에서 반도체 비중은 약 20~30%를 오갑니다. 반도체 단지가 한 달만 멈추더라도 우리 국가 경제 전반의 충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일 겁니다. 공급망이 글로벌하게 얽힌 상황에서, 한국발 반도체 차질은 세계 IT 생태계에도 연쇄 영향을 미칠 겁니다. 용인 반도체 산단은 세계가 주목해야 할 정도의 큰 리스크입니다.
물론 반도체 팹의 분산 배치는 비용이 더 들고, 인프라 중복투자 논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반도체 팹의 입지를 선정할 때 평균 비용이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 입게 될 손실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효율을 극대화할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을 지킬 것인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용인국가산단은 아직 공사가 시작 전이라 계획을 원점으로 되돌릴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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