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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회의원 상가집 (2) 2007/02/16
  2. 칼산의 추억 - 변소 (5) 2007/02/13
  3. 태백산 (4) 2007/02/12
  4. 밤 새워... (4) 2007/02/12
  5. 이름 풀이... (4) 2007/02/09
  6. 3밀리미터의 차이.. (6) 2007/02/07
  7. 과기노조 대대 유회... 2007/02/06
  8. 유기수... 2007/02/06
  9. 무신경하거나, 게으르게... (8) 2007/02/01
  10. 선거는 끝나고.. (4) 2007/01/29

최순영 의원의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지역위 게시판에 떴다.

아, 안타깝구나.... 이런생각이 들었다.

딱히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한두번 지나치면서 악수를 했을 법한

국회의원이니 굳이 나까지 그 상가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안했다.



이근원이 전화해서는 박용석 부위원장한테 고사리 보낼테니까

암센타에 가서 받아 가라는 거였다. 지리산 아래에 가 있는 김인숙이 재배한 고사리란다.

 

그러겠다고 하고선 집에서 밥먹고 기다리다 박용석의 전화르 받고

암센타에 가서 박용석과 같이 조문을 했다.

최순영 의원과 애들이 조문객을 맞고 있었는데,

최의원은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최의원이 나를 모를테니까 박용석이 '연맹에서 같이 활동하는 사람' 이라고 소개를 해 줬다.

다른 일로 이렇게 와서 조문이라도 하니 다행이다 싶었다.

 

박용석이 다른 사람들 만날 일이 있다고 해서 잠시 입구에 나와 있었는데,

입구에서부터 조문실까지 늘어선 弔花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이날 국회의원들(대부분은 아니겠지만 상당히 많은...), 무슨 교육단체들,

그리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비롯한 온갖 노동조합연맹과 단위 노동조합.

민주노동당의 온갖 지역당과 지역위원회, 심지어 각 대학총장들과 한국교총을 비롯한

교육관련 단체들의 화환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최의원이 교육위원회니까..)

 

대충 봐도 양쪽에 늘어선 조화만 50여개는 되는 듯하고, 그걸 놓을 데가 없으니까

조화에 붙여온 이름걸이 천만 따로 벽면에 일사불란하게(?) 늘여서 붙여 놓았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집에 상을 당했다는 데 그리고 좋은 일도 아니고

그 슬픈 일을 당했다는데, 이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한편으로는, 그기 보내온 조화 어느 거 하나라도

개인 돈을 들여서 보낸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각 기관과 단체에서는 판공비나 경조사비를 잡아 놓은 예산에서

집행했을 것이니, 따지고 보면 국민의 세금일 텐데.... 머 이런 어줍잖은 생각이 들더라는..

보통 상가집에 가면 국회의원들이 造花로 만든 것이거나, 아니면 작은 판에 꽃그림을 그리고 근조라고 쓴 것을 가져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역시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상을 당하니까,

生花로 만든 큰 弔花를 많이도 가져다 놓는 구나 싶었다.

 

이런걸 딱히 처음 본건 아니었다.

꽤 오래된 일인데, 우리 친척 한 분이 행시를 통과해 세무서에 근무했었는데,

그 어머님이  돌아가신 병원 영안실에서 계단을 뺑뺑돌아 이런 조화가 가득했었던 걸 본적이 있다.

조화에 달린 긴 띠에 쓰인건 '00카바레 대표 ***'  '%$ 주식회사 대표 ㅇㅇㅇ' 뭐 이런식이었다.

세무서 관할 사업장에서 다들 조화를 가져다 준 것이다.

 

꽃들이 처치 곤란할 정도로 쌓이고, 사람들도 셀수 없을 만큼 넘쳐 나는 것이야

상가집에서 좋은 풍경이지만, 그런 곳은 꼭 이나라에서는 '힘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도 어떤 힘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처럼 '힘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나타난 걸 보니까,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도 힘이 있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그래서 '힘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모든걸 동원해서 그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민주노동당은 조금이라도 달라야 한다는

내 기대는 그저 순진하거나 멍청한 것일까?

 

암튼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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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6 10:37 2007/02/1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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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님의 [뚝방의 추억(6)] 에 관련된 글.

 

과기 대대가 오늘 다시 열리는데, 간다고 했는데,

우리 팀에 둘이 빠지기가 영 눈치 보여서, 글구, 낼 기관평가 관련 자료 만들다가

없다고 투덜거릴지도 모를 다른 친구들 때메 그냥 남았다.

 

행인님은 원체 바빠서 뚝방의 추억도 보이지 않고 해서 칼사의 화장실야그나 해 볼까.....

 





시골에서 살때는 똥통이 큰 항아리로 만든 것이었고, 그 옆에 작은 항아리 하나 있어서 오줌통으로 썼다. 오줌 똥을 분리해서 누었으니 그에 맞는 거름으로 썼을 것은 짐작할 만 하리라.

 

서울이라고 칼산에왔더니, 그래도 개화한 것인지 똥통은 커다란 드럼통으로 묻었고, 그 위에 아주 넓적한 판자를 두개 올렸다. 물론 아래에 두개가 움직이지 않게끔 지지나무를 앞뒤에 하나씩 더 댄 것은 당연하고...

 

똥과 오줌을 한꺼번에 싸면 그 양이 금새 늘어 나니까 똥을 자주 퍼야 하고, 그걸 푸는데 공짜가 아니니 당연히  똥과 오줌을 분리해서누라 했는데, 오줌 눌곳은 따로 없었다. 그러니 오줌은 그냥 하수구에 누는 수밖에....그리고 첨에는 뽀송뽀송 화장지 같은게 없었으니까 신문지나 교과서를 썼는데, 이것도 똥통에 함께 버리면 양이 많아지니까 이건 따로 모아서 태웠다.

 

가장큰 골칫거리는 여름에 똥통을 하얗게 뒤덮는 구더기... 요즘처럼 온갖 독성물질을 먹어대면 구더기나 생길라나 모르겠는데, 그즈음에 구더기 참 많이도 생겼다. 똥통을 하얗게 덮는 것도 모자라, 이 넘들이 밖으로 슬금슬금 기어나와서 그 앞의 장독대나 좁은 마당으로 기어 나왔는데, 별 대책이 없으면 비짜루로 쓸어담아서 다시 똥통에 버리기도 했지만, 뭔가 자구책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구더기 방제를 위해 동원한 것이,  횟가루였다. 어디서 쓰고 남은걸 아버지가 얻어 왔는데, 이걸 똥 위에 한겹을 뿌리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약간의 효과가 있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다. 이게 독한 성분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완전히 질식시켜서 죽인건 아닐까 싶다.

어디선가 아버지가 농약인지 제초제인지 하는 것들도 가져와서는 그걸 물에 타서 뿌리기도 하고, 어떤건 가루약이어서 그걸 뿌리기도 했다.

그 다음에 동원한 것이 석유다. 석유곤로를 쓸때니까 석유가 좀 있긴 했는데, 비싸기도 해서 이걸 쓰는건 엄마 몰래 애들이 몰래 가져다 뿌렸다. 이건 꽤나 효과가 있었는데, 그 번질 거리는 석유를 뒤집어 쓰고 뒹구는 구더기를 구경하고 있노라면....

그러고 한참 있다가 에프킬라라는 신기한 모기약이 나왔는데, 이걸 뿌리는 방법이 가장 효과는 좋았다. 물론 하루 이틀 지나면 다시 살아서 기어올라 왔고, 다시 에프킬라를 뿌렸는데, 이건 엄청 비쌌기때문에 뿌릴때만다 엄마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구더기는 결국 찬바람이 부는 초겨울 즈음이 되서야 사라 졌던가...

 

똥통에 빠트린 물건도 많다.

형제들끼리 싸우는데 사용된 것들은 줄곧 똥통에 버려 졌는데, 화투장이 대표적이다. 방학이나 휴일에 할일 없으면 밤 늦도록 형제들끼리 화투를 쳤는데, 그걸로 돈따먹기를 해봐야 소용 없으니까 무슨 아버지나 엄마가 부르면 심부름 당번을 한다거나, 손목을 때리거나 그런 정도였다. 연탄불 갈아라, 할머니 방에서 밥상 내와라... 그 추운데 밖에 나가기 싫은데, 심부름은 정말 하기 싫은 거였다.

근데, 처음에야 좋게 시작하지만, 항상 시비가 붙게 마련이고, 마지막에는 거의 격투기 수준까지 이른다. 그러면 부엌건너 안방에 계시던 엄마가 달려와서는 빗자루로 한바탕 난리를 친다음에 바닥에 있는 화투판과 화투는 싹 쓸어서 똥통으로 직행이다.

이렇게 들어간게 화투 뿐만 아니라, 바둑알과 장기알까지 몇 개가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바둑이나 장기는 두는게 어차피 두명인데 꼭 편이 나뉘어져서 옆에서 훈수를 두게 되고, 그래서 지고나면 그 훈수 때문에 졌다거나 이겼다면서 또 싸움이 일게 된다.

똥통에 빠진 바둑돌을 들여다 보면서 똥을 눌때의 기분이란.... 바둑돌도 요즘이야 몇천원 주면 싼걸 사지만, 그때의 학생으로야 비싸서 도저히 살 엄두를 낼수 없는 물건이었다. 다 커서 바둑돌 한조 사서는 집에서 이제는 바둑 둘 일도 없는데, 그돌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잘 간직하고 있다.

 

식구가 기본이 열명에다, 더부살이 하는 친척들이 보통 두세명은 있었으니까 그 많은 식구들이 쏟아내는 똥 때문에 드럼통은 빨리 차올랐던 거 같다. 그럼 똥푸는 아저씨를 불러서 똥을 펐는데, 행인 동네에서 펐던 그 아저씨였는지도 모르겠다. 60대쯤 되어 보이는 거의 할아버지가 다 되어 가는 분이 똥지게를 메고 다녔는데, 드럼통 하나를 비우려면 대여섯번은 왔다 갔다 했던 거 같다.

언젠가 저 할아버지는 똥을 퍼다가 어디로 가져 가는 걸까 하는 의문이 생겼는데, 신정단지 쪽으로 가는 논뚝길을 걸어가다 보니 한쪽 방죽 같은 곳에다 똥을 쏟아 부어 놓는 걸 봤다. 그 똥방죽에 빠지면 아마도 살아 나오지 못할 거 같은... 그 똥들은 비오면 함께 어디로 쓸려 갔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고 몇년이 지나자 똥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 할아버지도 그 순간부터 더이상 볼수가 없었다. 똥차는 너무 쉽게 똥을 펐다. 호수 들이대고 순식간에 드럼통 하나가 쑤욱 빨려 들어갔고, 옆에 받아 놓은 물 두어 바께스 더 부어서 대충 씻어 한번 쑤욱 빨아 들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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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3 14:01 2007/02/1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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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from 단순한 삶!!! 2007/02/12 13:46

역사와 산 2월산행은 태백산.

 

겨울 태백산을 갔다가(2001년 1월) 강 추위에 질렸던 기억이 있었던지라

우선 날씨가 어떨까 했는데, 요즘 원체 따뜻하니까 그럴 걱정은 접기로 했다.

 

금욜 밤새워 술집을 전전한 탓에 잠이 모자라서 차 안에서 열심히 잠자려고 했는데,

생각 밖으로 잠들지 못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랴, 차에 타면, 그리고 눈만 감으면 잠은

그냥 오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 왔는데, 잠이 들지 않다니...

일상과 다르게 보낸 하룻밤으로 인해 몸이 적응하지 못한 것일까?

차 안이 너무 덥다고 핑계를 대보기도 했지만, 어쨌든 잠들지는 못했다.



차에서 내리니까 약간 추운듯한데, 조금 걸으니까 금새 몸이 따뜻해지고 땀이난다.

역시 출발할때 한 30분간은 숨소리도 거칠고, 가슴이 답답하다.

장군봉에 오르니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어왔고, 천제단에 도착하니까 해가 오르기 시작했다.

춥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산 꼭대기는 추웠고, 오래 서 있기는 어려웠다.

해가 떠 오르자 주위의 산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눈덮인 산맥과 봉우리들은 여전히

세상의 변화에 관심없다는 듯이 그대로 서 있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소원을 빌었다. 뭘 빌까 생각했는데, 막상 빌려고 하면 빌 것도 없어서

지난 1월 지리산에서 한번 빌었던 걸 그대로 빌었다.

그 비는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 아닌 다른 사람들 위해

해를 향해 기도할수 있다는 게 어디랴...

같이 갔던 친구는 자기를 위해서도 뭔가를 빌었느냐고 해서 빌게 없었다고 했더니, 마음의 평화를

위해 빌어달래나... 그래서 정암사에 가서 부처님께, 그리고 진신사리를 묻었다는 7층 수마노탑을 향해서도

그 바람을 빌었다. 

 

해 오르자 주위는 온통 눈빛으로 변했는데, 온 나무를 뒤덮고 있는 상고대는 그동안 어느 산에서

보아왔던 거보다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렇게 멋진 모습을 보다니...

그런데, 멋진 일출과 멋진 상고대를 보면서도 표현하지는 못할지라도 생각으로나마, 또는 머릿속에서라도 어떤 모습이 상상되어야 할 거 같은데, 그저 '좋다' '멋지다' 이렇게 밖에 생각이 안난다니...

어쩌면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아름답고, 멋져서 그런게 아닐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상력이나 감상력이 부족하거나 다 떨어져서 그럴 거라는게 맞을 거다.

 

석탄박물관을 거쳐 점심식사를 한 식당의 순두부와 명태국은 수준이하였다는...

(박준성 선생이 너무 맛있는 집이라고 했는데, 그새 주인이 바뀌었다는데 음식맛은 역시 누구나

낼수 있는게 아니다.)

 

함백산을 넘어 가는데,  만항재에 펼쳐진 상고대는 태백산 정상의 그것과도 비교를 할수 없을만큼

멋지고 아름다웠다. 산오리는 상고대가 눈이 내리면서 나무에 달라 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안개와 구름 등이 얼어 붙은 것을 처음 알았다.

상고대【명사】 나무나 풀에 내려 눈같이 된 서리. 무송(霧淞). 수빙(樹氷). 

이것도 산오리의 상상력으로는 표현 불가....그저 멋지다. 아마 다시 보기 어려울 만큼.

 

정암사에 들러 수마노탑을 구경하고, 사북 안경다리 밑에서 잠시 박선생의 설명을 들었다.

사북에는 2001년에 갔을때 보이지 않던 수많은 호텔과 모텔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났고,

80년 사북항쟁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강원랜드와 각종 관광시설들의 위력이

금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사진기를 못찾아서 그냥 가는 바람에 사진을 못찍었다.

물론 그 멋진 상고대를 찍어도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은 만큼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사진을 찍지 못한게 좀 아쉬웠다.<2007년 2월 10-11일>

 

추위에 떨던 2001년 산행기록은 역사와산 홈피에서 겨우 찾았다.

 

추위에도 살아 남는 건 인간?(2000.1.16)

태백산 산행기

추위에도 살아 남는 건 인간?

추운 날씨가 계속 되는 바람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일주일 내내 고민이었다. 지난번에 얇고 따뜻한 윗도리를 사러 갔다가 조끼와 점퍼로 된 옷을 사서 해결은 되었다 했지만, 점점 추워지는데 바지는 입을 게 없었다. 토요일 오후에 또 옷 할인 판매하는 곳에 가서는 스키바지라는 걸 하나 샀다. 스키바지가 대수랴? 속에 스펀지나 넣고 누빈 게 고작이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한마디씩 인사를 하고 나니 벌써 잠잘 시간이 지났지만, 쉽게 잠들 것 같지 않아서 술에 기대기로 했다. 고량주를 서너 잔 마시고서는 자리에 앉았더니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효과가 즉시 나타났다.
달리던 게 멈추었다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떠보니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유일사 입구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라면 끓여 먹을 시간이 된다고 버너와 코펠을 찾기에 배낭에서 꺼내어 불을 붙였지만, 추운 날씨 덕분(?)에 보통의  개스 버너로는 금방 불이 사그라들고 만다. 그래도 두 세개의 버너로 라면을 계속 끓여 번갈아 가면서 뜨거운 국물을 마시는 게 좋아 보인다. 먹은 술이 약간 얼굴에 남아 있다는 느낌이 있는데 차 밖으로만 나오면 추위 때문에 술기운도 몸 밖으로 나올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새벽 5시 완전무장을 한 사람들이 출발했다. 눈길을 밟는 소리는 아이젠의 뾰족한 쇠가 날카롭게 무언가를 찢는 금속성 소리 뿐이었다. 눈을 밟는 소리, 뽀드득, 사각사각 이런 따위의 동화에 나오는 소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들리지 않았다. 군인들이 행군하는 소리 그 자체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고 있는지 오르는 길 내내 뒷사람의 발뒤꿈치를 보면서 걷는 수밖에 없었다. 달빛이 너무 밝아서 나무들이 달 그림자를 길게 눈 길 위에 늘어 놓고 있었다. 낮에 본 해 그림자와 얼마나 긴지 짧은지 서서 견주어 보고 싶다는 건 생각 뿐이었고, 그냥 걷고 또 걸어서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능선에 올라섰고, 뒤를 돌아보거나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아직도 어둠이었고, 바람과 추위만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북쪽에서 계속 불어오는 바람은 오른쪽 귀를 마비시켰고, 모자를 하나 더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더 쓸 모자가 없었다. 귀마개가 배낭 속에 있다고 생각했고, 꺼내서 모자 속에 썻다. 그래도 한참 동안은 오른 손을 귀에다 대고 걸었다.
돌탑이 있는 봉우리에 도착했다. 여기가 정상인가? (여기가 장군봉이었던 듯) 우리 등산팀은 다시 더 가라고 한다. 이 장군봉에서 천제단까지 가는 길은 정말로 추운 바람속이었다. 바람도 얼마나 센지 몸이 날라갈 것 같았고, 발걸음을 제대로 옮기기가 어려웠다. 문제는 또 머리였다. 머리 윗부분이 완전히 마비된 것처럼, 그리고 칼로 잘라 내는 것처럼 찬바람이 파고 들었다. 점퍼를 끌어 올려 머리까지 뒤집어 써 보려 하지만 위에 까지 올라오지도 않고 겨우 귀 부근까지만 닿는다. 얼마나 갔는지 또 다른 봉우리, 그리고 또 다른 돌탑(이게 아마도 천제단이었나 보다)
사람들 얼굴을 보면 모두 눈사람이 되었다. 눈썹까지 하얗게 변한 사람들이 있고, 얼굴을 조금이라도 드러낸 사람들은 보기에도 퍼렇고 검게 보였다. 날은 밝아오고 있었고, 동쪽 하늘에는 붉은 물이 들고 있었다. 곧 해가 뜬다고 기다렸고, 기다리는 시간도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조금이라도 바람을 피해보려고 제단 밑으로 모인 사람들은 완전히 동물의 왕국에서 나오는 남극의 펭귄들 모습이었다. 그 자리에서 제자리 뜀을 하면서 추위를 조금이나마 이겨 보려 하지만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해가 솟아 오르고 있었다. 한 점 붉은 게 보이나 싶었는데 순식간에 절반이 그리고 또 순식간에 둥그런 불덩이가 하나 솟아 있었다. 저렇게 짧은 순간을 보려고 이 추위를 견디며 서 있는지 참 허망하기 그지 없었다. 태백산 정상에 보든지 관악산 정상에서 보든지 아님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다보든지,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쓸다가 올려보든지, 어디서 보든 떠오르는 해는 똑 같은 걸 굳이 이런 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겠다고 오르는 것은 왜일까? 혹시 남보다 먼저 높은 곳에서 해를 보면서 만족을 느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런 생각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다른 사람을 눌러야 한다고 떠드는 신자유주의의 선전문구에 나도 모르게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지나친 느낌일까?
내려오는 길은 햇살을 받으면서 이어졌고, 이제는 제법 포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엉덩이썰매를 탈 수 있는 길이 나왔고, 준비해 간 매트를 깔고 앉아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두어번은 앞에 가는 사람과 부닥쳐서 미안하기도 했지만, 멈출수도 없었으니.....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셀 수도 없는 봉우리, 능선, 끝도 없는 산....눈....그리고  또 산과 눈. 그리고 옷을 벗은 나무들.....
당골에는 눈 눈축제가 벌어져 얼음조각들이 많이 있었지만 초입의 몇 개만 둘러보고 바로 내려왔다. 이렇게 산행은 끝났다. 새벽 5시에 출발해서 10시도 안되서 끝났다. 그 추위에도 수천명이 태백산에 왔다고 하니, 인간은 참으로 위대(?)한 동물이다. 산과 눈과 추위와 바람은 그대로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 속에서 인간들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아마 인간의 쓸 데 없는 우월의식이 아닐까?
태백시의 '너와집'에 몰려 가서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을 먹고 낙동강의 발원지라는 황지연못을 들러서 카지노에 들렀다. 그리고는 사북으로 80년 사북투쟁이 일어났던 동원탄좌 현장을 들렀다. 80년 그 시절에 신문으로 접했던 그 사건. 벌써 기억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게 안타까운 일이었다. 노동자 투쟁의 전환점이기도 했던 일을...
산에 가기전에 일주일은 들뜸으로, 그리고 산에 갔다 온 일주일은 가슴에 남은 산의 기억으로 즐거운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번 산행에서 가슴에 남길 것은 과연 무엇일까? 눈? 일출? 추위와 바람? 카지노? 그리고 노동자?  
돌아온 서울과 일산도 추위는 여전했다. 그나마 집은 따뜻함이 있었다.
                          <2001.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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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2 13:46 2007/02/1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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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새워...

from 단순한 삶!!! 2007/02/12 13:01

술 마신다는 사람들을 아직도, 여전히 이해하지도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몇년 만인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밤새워' 술집을 전전했다.

(轉轉)【명사】【~하다|자동사·타동사】 이리저리 돌아다님. - 이건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술을 마시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사람들과 헤어지기 싫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산오리의 수준이 12시가 넘으면 잠드는 것이니까.

그래도 12시 넘어서까지는 그런대로 버티었지만,

그다음은 계속 잠들었다 깨었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어느 술집에서 앉아서 잤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침 8시가 넘어서 집에 가서는 12시까지 잠자겠다고 잤는데,

그게 오히려 심한 고문이었다는...

머리는 아픈데, 평소에 잠자지 않는 시간에 덜잔 잠을 자야 한다고

누워서 개기고 있으니 몸이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깨어 있는지 잠들어 있는지 구분이 안되는 상태로...

 

어쨌든 일산으로 오겠다고 날을 만든 감비를 비롯하여

먼 일산에서 기꺼이 밤새워 술집을 '전전'하신 동지들께

감사의 말씀을... 이라기 보다는 징그럽다..ㅎㅎ

 

담에는 반드시 12시 전에 끝내고,

설사 술집을 전전하더라도, 산오리가 잠들고 있으면 제발 깨우지 말아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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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2 13:01 2007/02/1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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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풀이...

from 단순한 삶!!! 2007/02/09 13:32

동희가 대학입시에 실패한 것 때문에 가장 슬퍼하고,

답답해 하고, 상처(?)를 많이 받고 있는 사람은 아내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주위 사람들의 말에 귀가 얇아지는 것은 있을수 있는 일이라 생각은 하는데,

그렇더라도 이제는 이름까지 들먹이다니....

 

동희, 동명이 이름은 산오리가 지었다.

손자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를 두고 아버지가 한자를 적어서 고민하신다길래,

그냥 '부르기 편하고 쓰기 쉬운것'으로 짓겠다고 하면서 산오리가 만들었다.

東은 돌림자라고 하니까 그거까지는 쓰고,

熙와 明은 빛나고 밝고, 의미도 좋고, 부르기도 좋을거 같아서

그렇게 지었고, 아버지는 별 이견을 달지 않았다.



동네 아줌마들의 모임에 가서 술도 한잔 마시고, 이름풀이를 한다는 사람을 불러서

동희동명이 이름을 물어봤다는 것인데,

 

동명이는 이름을 너무 잘 지어서 사주 팔자도 좋고 앞으로 무슨일을 해도 성공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특히 예쁜 아내를 맞아서 잘 살거라 했단다.....90%(여기서 %가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쯤 잘 지은거란다.

그리고 산오리도 이름을 잘 지었고, 사주도 좋아서 잘 살거란다.(산오리 한자 이름은 옛날 시골 면서기가 한자를 잘못 올려서 이름이 바뀐것인데..ㅎㅎ 큰할아버지가 지어줄 때는 이 將자를 써 줬는데, 면서기가 한자를 잘 몰랐던지 狀자로 썼다. 이게 문서 장 자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여기까지는 좋았다.

동희는 사주 팔자는 좋은데 이름을 잘못 지었단다. 나이는 스무살인데 5살짜리 옷을 입고 있는 형국이란다. 허거..

그래서 뭐를 해도 잘 안된단다. 그럼 이름을 바꿔주세요, 했더니 한 40%쯤 되는 이름인데 바꿀 필요는 없고, 도장을 파서 지니고 다니란다...(이건 또 무슨 뚱딴지?) 이름에 수분이 모자라기 때문에 물수자인가 물의 뜻이 들어가는 글자인가를 파서 쓰고, 다니란다...ㅋㅋ

 

이름에 관해서 가장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내인데, 언제부터인가 개명을 해 보겠다고 알아봤다는데, 뭐가 뭐가 안되서 못했단다. 그래서 이번에 개명을 할수 있겠느냐고 물어봤더니 가능하다고 했단다.

 

한차례 이름 파동이 일 거 같다.

 

태어나고 한번도 사주나 점이나 이런걸 본 적이 없는 산오리로서는 참 황당하다.

점에 약한 여자여!  아내여! 그냥 당신을 믿어 보심이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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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9 13:32 2007/02/09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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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금욜 표준연에서 회의하고 나니,

한보따리 선물을 줬는데,

표준연의 브로셔, '표준'을 이해하기 위한 만화책, 홍보자료 등등이었고,

딱 하나 생활에 쓸만한 거라고 준 것이 30센티미터 프라스틱 자였는데...

 

표준연 연구관리과장 말로는 표준을 연구하는 곳에서 만든 것이니까

엄청 정밀한 자라고 했는데...

(뭐 0.3 밀리 어쩌고 했는데,  자에 쓰여 있는 걸 보니까 '불확도 0.3mm이내'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30센티자가 정밀하면 얼마나 정밀하고, 또 차이 나야 얼마나 차이날까 해서

사무실에서 쓰고 있는 자와 길이를 맞춰 봤더니...

 

사무실에서 쓰고 있는 자가 대충 3mm 정도 작다..

아이쿠, 30센티에 3밀리나 차이가 난다니...ㅠㅠ

 

문득,

고깃집에서 고기 사먹으면 그 무게는 얼마나 차이가 날까?

 

이런 생각이..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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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7 11:52 2007/02/07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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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표준연에서 3개연구회 연구관리과장 협의회 첫회의가 있었다.

그래서 출장을 끊어서 대전으로 향하고 있는데,

기차간에서 조 수석의  전화를 받았다.

"어디 있는 거냐? 건기연 지부는 상집 수련회 가고 대의원대회도 안온다는데..."

"엥? 대대가 오늘이여? 난출장 가는데... 대대는 몇시에 어디?"

"2시 원자력 앞의 ..."

 

회의 끝나고, 점심 먹고 대대로 갔다.

 



2시 반이나 되어 회의는 겨우 시작되었는데,

산오리는 잠들기 시작해서 두어시간 잘 잤다.

바로 뒤에 앉았던 박효정이 '앞에서 코를 골고 자고 있어서 누군가 했다' 면서

나중에 쉬는 시간에 인사했다.

 

졸거나 자는 동안에 사업평가, 회계결산, 가예산 등은 처리되었고,

남아 있는 안건은 과기-연전 통합 조합원 총투표와 비정규직특별요구안 등이었다.

공공노조로 가지 않고, 우선 과기와 연전이 통합하기로 중앙위원회에서 결의했고,

이를 조합원 투표를 거쳐서 통합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안건을 올리자마자 대의원들의 질문과 의견과 비난까지 쏟아졌다.

시간은 6시가 가까워 오자 의장은 표결을 위해서 성원을 확인해 보라 했는데,

의결정족수에서 한명이 모자란다는 것.

가까운 곳에 전화해서 대의원 오라고 하고, 비정규직 특별요구안 설명하고, 질의응답하고

그러고 기다려도 대의원은 늘어나지 않고, 결국은 7시 쯤에 유회를 선언했다.

 

통합과 관련해서 한마디도 질문이나 의견을 내지 않은 산오리지만,

그렇게 중앙위원들이 통합을 하기로 결정했으면 제대로 진행되기를 바랐는데,

그마저도 안되는 걸 보니 씁쓸했다.

당초 연맹과 함께 공공노조로 가는 것을 추진하지 않고,

굳이 연전과 통합하고, 그리고 세를 불려서 본부장 한자리라도 차지해야 겠다는

심산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였다.

그렇게 하면 과기에서 떨어져 나간 전자통신연구소나 과학기술원하고 뭐 다를 바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 쪼잔한 이기주의와 기득권 지키기 말고 무슨 명분이 있겠느냐는 느낌이었지..

어쨌거나 통합을 위한 조합원 투표야 다시 대의원 대회를 열어서 하면 되니까 한두달 늦어 진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도 없지만, 이참에 처리못한 비정규직특별요구안은 오히려 이번에 꼭 처리했어야 할 사안이었다. 실무자는 허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실제로 비정규직에 관한 교섭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속수무책으로 지나갈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영주 전 위원장에게는 약간의 아쉬음이 남았다.

지난해 어느 대대에선가 복직하게 되면 임기 마치지 않고 복귀할 것이냐는  질문이 나왔을때, 고영주는 당당하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지난 1월 22일부터 화학연구원에 재입사 형태로 복직했다. 그리고 과기노조 위원장을 사퇴했다.

복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산오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기노조야 당분간 직무대행체제로 가다가 연전과 통합해서 통합위원장을 선출하면 되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별다른 설명없이 위원장 사퇴하고 쓱 들어갔으면 대의원대회가 열리는 데 와서 대의원들한테 인사라도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저간의 사정이라도 몇마디 설명해 주면서....

 

그기에 덧붙여, 고영주가 입을 열기만 하면 '6기 집행부가 다 망가 뜨린(이건 산오리의 표현이다) 과기노조를'  7기 집행부가 일으켜 세웠다고 해 왔는데, 실제로도 그 말은 맞다. 이 말이 나올때 마다 6기 집행부의 일원이었던 산오리는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회의에서도 누구 하나 시비를 거는 지부장이 없었을테고, 고영주라는 이름만으로도 지부장들은 일사불란하게  따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조직력은 배가 되었고, 조합원은 많이 늘었다는 걸 인정한다.

그 와중에 광주 과기원의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서도 과기노조는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

그런 조직력과 일사불란함으로 이번 대대까지 깨끗하게 마무리해서 과기와 연전의 통합투표를 정리해놓고 들어갔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투표에 들어가면 압도적인 지지로 마무리야 되지 않겠는가....

 

또 하나 남은게 있구나..

6기집행부 끝나고, 상근자의 돈 문제가 드러났는데, 그런대로 잘 정리되어 가다가 이즈음에 막혔다는 게 대대 자료에 올라왔다. 어느 대의원이(이 양반도 아마 지부장도 했었지.) 그랬다.

"그 친구가 제대로 변상하지 못하면, 6기 임원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솔직히 나도 책임지고 싶다. 6기 집행부의 일원으로...

그치만 도대체 조직이란걸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어느 회사(기관)에서 회사원(직원)이 돈 떼어 먹으면 그 돈 사장(원장, 기관장)이 책임지고 물어내나? 책임질 만한 책임이 있다면 당연히 책임지겠지만,  그런 책임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되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또 있구나...

대의원 8명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 지부에서는 겨우 산오리 한명만이 참석하여, 대의원대회 유회의 가장 큰 역할을 한 지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산오리도 대의원대회 있어서 간 게 아니라 다른 회의 갔다가 참석한 것이니, 말해서 무엇하랴..

우리 지부는 미리 잡아 놓은 상집간부 수련회  때문에 모두 안(못)갔다는 것인데, 사실 산오리도 그날자가 대의원 대회인지도 몰랐다...

하여튼 그런 대의원 대회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산별노조를 만들었다는, 그래서 '자랑스런 과기노조'라고 일삼아 늘어놓는 과기노조의 모양새가 이렇다.

내얼굴에 침을 뱉고 있지만, 함께 반성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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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6 15:32 2007/02/06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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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수...

from 단순한 삶!!! 2007/02/06 13:16

유치봉님의 [유기수위원장님 면회 다녀오다] 에 관련된 글.

 

잡혀 들어간지 벌써 6개월째란다.

지난 8월에 들어갔다니...

얼마나 큰 죄를 지었다고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로 옮겨져 있다.

 

5일 휴가내고  대구로 갔는데,

아침 8시 10분에 집을 나서 밤 8시40분에 집에 들어왓으니까,

12시간 30분을 길바닥에서, 차 속에서 보냈는데,

막상, 유기수와 얼굴을 마주보고(그것도 두꺼운 아크릴로 가로막힌채)

몇 마디 나눈 것은 겨우 5분이었다.

 

교도소도 자기가 원하는 곳에 옮겨주면 안되는 것일까?

멀리 떨어진 가족들도 한번 찾아가려면

하루종일 걸려서 겨우 얼굴 잠간 보고 와야 하다니...

 

언제나 씩씩한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런 씩씩한 인간들은 밖에서 열심히 싸워야 하는데,

갇혀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노동조합과 당에서 보아온 그는,

가부가 분명하고,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가 빨리 싸움터로 돌아 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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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6 13:16 2007/02/06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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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으면 회사에서 월급 받는 것도 좀 미안하게 느껴진다.

연말이면 으례 한차례의 분답과 소란을 거치고,

1월과 2월에는 제법 한가한 계절이다.

바쁜 곳은 여전히 바쁘다고 아우성이지만,

산오리네 업무는 그렇지 않다.

군대는 보직이라거나, 줄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맡은 일에 따라서는 바쁨의 차이가 있는게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렇게 한가하다고 느끼는게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해결해야 할 몇가지 일은 여전히 해결되지(하지) 않고 있고,

그게 내가 노력해서 될 일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풀리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안되는 일은 마냥 냅두고 있다가 몇 년이 지나서 다른 업무로 옮길 때

퍼 넘겨 주고 가면 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분위기도 편치 않다.

일주일간 감사를 나와 있으니, 언제 불러서 뭘 물어볼지도 몰라 항상 자리를 지키면서

대기하고 있다. 그 일주일간 딱 한번 불러서 간단한 자료 요청한 거 밖에는 없었는데,

그래도 휴가와 출장을 자제하고, 어제와 같은 체육행사도 나가지 말고 있으란다.

언제 어떻게 마무리 될지 예측불가.... 

 

열심히 놀기 위해서 대략 이런저런 연결고리들을 끊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시간이 좀 걸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혼자 노는것에 서툴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산오리로서는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러려고 노력해 볼 예정이다.

 

당 게시판에 갔더니,

연맹의 김종호 부장이 에프티에이집회때 달려 가서 꽤 갇혀 있다가 나와서는 인사를 올렸다.

이 친구가 잡혀 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참 무신경하다....ㅠㅠ

허영구 부위원장 감방 가 있는 동안 면회라도 한번 가겠다고 생각했는데,

며칠전 민주노총 선거하는데 나와 있더라...... 이 게으름이란..ㅠㅠ

유기수 위원장은 결국 실형을 선고 받고 대구교도소로 이감 되었단다.

포항 있는 몇 달 동안 겨우 편지 두어통 보낸거 말고는....

 

휴가 하루 내고 대구에라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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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1 14:53 2007/02/0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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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끝나고..

from 단순한 삶!!! 2007/01/29 11:43

26일은 민주노총 임원 선거에다가 당의 각종 선거 개표일이었다.

당은 도당과 지역위원회에서 내가 원했던 후보들이 많이 당선되어서 다행이다.

사실 선거 막판까지도 지역위원회 위원장 선거는 불안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얘기를 들으면서 처음에는 좀 의아하다가, 또 약간은 열을 받다가, 이내 포기했다.

이번에 연합인지, 주사파인지 하는 애들이 한번 해 보는 게 뭐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핑계로 당에서도 아예 손발을 탈탈 털자는 생각이 확 들었던 거다.

 



97년 '일어나라 코리아'를 내걸고 권영길 후보 선거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무려 10년 가까이 이 짓거리(?)를 계속하고 있고, 당에서 뭔가 '자리'를 하나라도 맡고 있었다.

물론 말로는 10년을 넘어서 100년까지, 아니 우리 새끼들까지 이 짓을 끈질기에 해도 진보를 실현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끈질기게 하자고 해 왔고, 마음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다짐해왔다.

근데, 핑계인지는 모르지만, 그 자그만 성과마저도 다 갉아 먹고, 하는 짓거리들 보면 정말 내가 이 당의 당원이란게 쪽팔림으로 다가오는게 지난 1-2년이었다면,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더 커가고 있었던게 사실이다.

 

그 참에 선거까지 지게 생겼다고 하니, 어라 잘되었네,... 그많던 돈과 몸을  때우라는 사역도 이제 줄이거나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싶은 간사한(?) 맘이 드는걸 어찌하랴..

그런데, 선거는 겨우 이겼단다.

간사한 마음을 계속 키워갈 요량이지만, 확실하게 손발을 탁탁 털기는 어렵게 된 거 같다..

 

민주노총 임원선거에서 양경규 위원장의 당선을 빌었다. 그리고 아무리 썩어빠진 민주노총이라 하지만, 이지경에 이르렀는데 설마 떨어지기야 하겠냐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떨어졌다. 그 찌질이들이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민주노총 조합원이란게 또 이리 쪽팔려서, 민주노총 조합원 안하고 싶은 마음이 수백번도 더 든다...

민주노총과 당의 선거를 보면서, 자꾸 60년대와 70년대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했던 선거가  떠오른다. 막걸리와 고무신으로 대표되는 그 선거들...

그들이 막걸리 한잔과 고무신 한쪽을 받고 그 찌질이들을 찍어줬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정서가 그들의 바람이 바로 그 찌질이들이 내세우는 정책이고 공약이었을 것이라는....

그러니 민주노총이든, 당이든 저 찌질이들의 공약으로, 그리고 그 공약으로 당선되는 것은  곧바로 노동자와 서민의 정서와 바람이 그대로 드러나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노동자와 서민의 정서나 현실을 무시하고, 그들과 거꾸로 가려고 하는 생각을 가진 산오리의 생각이 문제일 거라는....

 

맘에 안들어도 민주노총 조합원, 당원으로는 계속 남아 있어? 말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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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9 11:43 2007/01/2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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