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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누룽지... (12) 2007/01/25
  3. 칼산의 추억...목욕 (6) 2007/01/24
  4. 여권, 자동차, 일탈... (6) 2007/01/24
  5. 칼산의 추억... (6) 2007/01/19
  6. 지리산 일출... (2) 2007/01/19
  7. 3대... (10) 2007/01/19
  8. 내부고발의 여파... (4) 2007/01/18
  9. 뚝방의 추억... (5) 2007/01/18
  10. 지리산 거림골, 세석산장 (5) 2007/01/15

졸립다...

from 단순한 삶!!! 2007/01/26 15:32

새벽 5시 5분에 일어나 첫타임 수련을 가다 보니 항상 잠이 모자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저녁시간이 한가해 졌길래,

마지막타임 수련을 이번주에는 4일 연속 가고,

그리고 밤에는 7시간이 넘는 긴~~ 잠을 잤는데....

회사에 출근하면 졸립고 하품이 나온다.

 

점심먹고 하도 졸려서 책상에 엎드려 졸았는데도(잤는데도)

계속 졸립네....

5시간도 채 안자고 새벽에 운동하면 낮에 이렇게 졸리지는 않았는데,

절대적인 잠시간이 부족했던게 아닌가?

많이 자도 계속 졸리는게 잠인가?

 

어쩌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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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6 15:32 2007/01/26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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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룽지...

from 단순한 삶!!! 2007/01/25 13:40

운동하고 집에 가니 9시가 가까워 졌다.

이시간에 집에 가면 혼자서 집 지켜야 한다.

배는 엄청 고픈데, 여기 저기 뚜껑 달린 것들을 열어보고, 문달린 것들도 열어봐도,

밥은 없다. 애들 저녁으로 먹인 모양인데, 찬밥  쪄서 먹고 남은 것만 두어숫갈 정도만 남아있는데, 그것도 누룽지 반쯤된 것뿐이다. 쌀 담가 놓은 거라도 있나 보니, 그거마자도 없다.

 



보온 밥통에 밥 한두그릇 있거나, 냉장고에 먹다 남은 찬밥이라도 있게 마련인데, 그도 저도 없으니 이를 어쩐다 싶다. 그렇다고 라면이나 떡국을 끓여 먹고 싶지는 않고, 밥을 먹고 싶은데.... 아내는 고등어 김치찌게도 새로 만들어 놓고 나갔고, 먹던 된장찌게도 있으니 반찬은 충분한데.

 

밥을 해 먹자...

쌀 퍼와서 씻고, 잠시 담갔다가 압력솥에 밥을 올리면 금새 되겠지...

(쌀씻는 도중에 휴대전화는 왔는데, 전화 좀 끊었으면 좋겠는데, 이인간 저인간 돌려가면서 통  끊지 않아서 얼마나 전화기 붙잡고 우왕좌왕 했다..)

찌게 데우고, 밥 올리고, 그 와중에도 배가 너무 고프다.

(배고픈건 정말 참지 못하는데, 고등학교때 엄마가 연탄불에 밥 올려 놓고 뜸 들이면 된다는 밥솥을 내려놓고 라면인가를 끓이고,  밥솥을 다시 올렸던 적도 있었다. 뜸들다가 밥이 제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먹다 남은 포도주 꺼내서는 고등어 김치찌게에 두어잔은 마셨더니 밥이 끓었고, 좀 있다 김빼고서는 밥을 퍼서 신나게, 열나게 먹어치웠다.

 

밥이 바닥에 약간 눌어 붙었는데, 이거 긁기도 어렵고 해서 누룽지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찬밥 데워먹다 남은 밥 두어숟가락을 같이 쏟아서 바닥에 잘 깔아서 밥솥을 불위에 올려 놓았다. 물론 불은 가장 약하게 해 놓고....

 

그리고는 그 누룽지 되는 동안 잠시 텔레비전을 켰더니, 어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슛돌이를 하는게 아닌가? 양구에서 하는 무슨 대회에 나간 걸 보여 주는데, 햐, 진짜 재밋더군...ㅎㅎ 슛돌이 팀만 보여주는게 아니라, 다른 팀들의 8강전까지 요약으로 중계해주고, 그러고 나서 슛돌이 팀의 경기를 보여주는데, 양구팀이 실력이 너무 모자르니까 한두살 더먹은 큰 친구 하나 넣어서 공을 차는데, 이 친구가 차는건 하프라인에서 찬게 세번이나 골이 되 버리다니...ㅎㅎ

그러고 있다가 아차,,,, 누룽지... 하고 일어났는데....

 

부엌이 온통 뿌연 연기로 뒤덮이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거실도 만만찮게 연기가 차 오고, 공기청정기인지 뭔가 하는놈은 최고의 출력으로 돌아가면서 색깔도 노란색을 표시하고 있었는데...

솥을 들여다 보니, 모조리  쌔까만 재만 남았는데,그래도 계속 연기만 무럭무럭 피어나고 있었더라.

일단 개스불부터 끄고, 문 모조리 열어 놓고, 개스레인지 위에 있는 바람 빼는 기계도 마구 돌려서 빼내고... 그렇게 한참을 지났는데 아직도 뿌옇게 연기가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어항에 부족한 물 채우고... 그러고도 한참 있다가 문을 닫을 즈음에, 동희가 들어왔다.

"아빠! 쥐포 구워줘!"

"웬 쥐포는?"

"지금 쥐포 굽고 있었던거 아냐?"

"그건 아니고, 누룽지 좀 태웠거덩."

그리고 쥐포 구워 줬다.

 

아내가 들어와서는

"아이구, 이거 무슨 탄내가 이렇게 나? 뭘 태웠어?"

"누룽지 만들다가....잠시 한눈 팔았더니..."

"아니, 누룽지 만들려고 했으면 옆에 붙어있어야지... 글구 밥도 안먹고 들어왔어요?"

"운동갔다 그냥 왔으니까..."

"낼부터 밥 해놓고 나가야겠네...."

 

뭐 곰탕 끓이다가 태우면 사람 살 태우는 냄새 비슷한 게 난다는 말도 있던데, 그만큼은 아니었지만, 온통 탄 냄새가 당분간 머물러 있을 듯하다..

후각 장애가 있는 산오리로서야 그 냄새에 괴로워 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타도록 아무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었다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후각장애, 이거 어디서 치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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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5 13:40 2007/01/2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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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살았던 60년대까지 여름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에 목욕은 없었다. 여름철 목욕은 동네 뒷개울에 저녁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가서 목욕을 했는데, 여자들은 위쪽에 남자들은 아래쪽으로 나뉘어서 목욕을 했다. 나이가 어리기도 했지만, 여자들도 자연스럽게 가슴 드러내고 애들에게 젖을 물렸으니까 여자들의 목욕이 궁금하거나 했던 것도 없었던거 같다.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깜깜한 밤에(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는데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개울이니까..) 여자들 목욕하는 곳에 가서 들여다 봐야 뭐 보일 것도 없었을 것이다.

 



동네 어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버스를 타고 현풍읍내까지 가서 목욕을 하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렇게 목욕을 하고 왔다면 동네 사람들한테 좋은소리 듣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차비며 목욕비 쓸데가 어디 있다고...

산오리가 서울로 올 즈음에 동네 친척 형님 한 분이 집에다 목욕탕을 만들었다. 목욕탕이래야 커다란 드럼통 하나 올려놓고, 그아래 아궁이를 만들어 장작을 때면 드럼통 물이 데워지는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집안에 욕실이란게 없으니까 부엌 옆 한데에 만들었으니 겨울에는 추워서 그 드럼통에 물 데우고 그안에 들어가 앉아서 때를 불렸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그럼 요즘으로 따지면 그럴듯한 노천욕 분위기가 났을라나... 어쨌든 그런 목욕시설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동네의 화제가 되었고, 당연히 구경하러 갔던 기억이 난다.

 

서울로 와서 칼산에 살게 되었는데, 칼산 빈민가에 목동으로는 논밭이 가득하고, 수도도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대중목욕탕이 있을리 없었다. 한 20분쯤 걸어서 고척동으로 가면 대중탕이 있었는데, 설날 전에 목욕하러 갔던 기억이 한두번 있다.

 

겨울에 목욕은 해야 하고, 대중탕에 갈 목욕비는 없었고, 학교에 가면 용의검사를 한다고 손발을 내밀고, 심지어 배까지 들어올려서 배꼽에 때 끼인거 까지 확인하고서는 선생들이 심하게 모욕을 주었으니 가끔은  목욕을 해 주긴 해야 했다.

 

아버지의 직업이 보일러공이었던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버지는 양남동의 어느 모직공장에서 일했는데, 그 당시 보일러공의 위세가 대단했다고 자랑하곤 하셨다. 추울때 난방을 제대로 안넣어 준다든지 해서 떨게 만들면 누구나 아쉬운 소리하게 마련이라는 거였다. 이걸 아버지는 기름쟁이의 '곤조'라고 했는데, 그래서 가끔 화나면 아버지는 '파이프렌치 가져와!'라고 소리 지르곤 했다. 

아버지는 당연히 보일러공이란 말을 하지 않았고, '기관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공장에서도 그렇게 불렀다. 회사 직원들이 집에 가끔 오거나 하면 '기관장님!'이라고 불렀으니까 우리도 아버지가 기관장으로 굉장히 높은 분인줄 알수 밖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동생이 어느해 학교에 내는 생활 기록부에 아버지 직업을 '기관장'이라고 써서 냈다. 담임선생이 당연히 아버지 학교 좀 오시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그때 학교엘 갔는지 안갔는지는 모르겠다. 그 이후에 우리는 아버지 직업을 기관장으로 써서는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서울로 왔을때 아버지는 종암동에 있는 전신주 만드는  어느 공장에 '기관장'으로 계셨다. 그리고 토욜이나 일욜이면 목욕하러 종암동까지 갔다. 공장의 노동자들 탈의실이 있고, 옷을 갈아입기 전에 간단한 샤워를 할수 있는 목욕탕이 있었는데, 이걸 '기관장'이 아들들에게 목욕탕으로 '개방'해 주신 거다. 칼산에서 고척동까지 터덜터덜 걸어서 30번 버스(광명에서 성북역까지 가던 버스인데 오래도록 그번호 그대로 있었다)를 타고 종암동에 내려서 공장으로 들어갔다..

공장경비실에서 수위 아저씨한테 쭈삣쭈삣하면서 "기관장 아들인데요....." 하면, 수위 아저씨가 "어, 그래 들어가 봐라"하고선 문을 열어주었다. 어떨때는 높은 분들이 퇴근하지 않았거나, 다른 손님이 와 있을 때면, '잠간 기다리라'고 하고서는 문밖에 세워두기도 했다.

탈의실을 거쳐서 목욕탕에 들어가면 사람 너댓명 들어갈 정도의 사각형 탕이 하나 있는게, 그게 전부였다. 그 안에 네놈이 들어앉아서 장난 쳐가면서 푹 담갔다가, 밖에 나와서 때를 박박 밀고, 등을 서로 밀어주었다.

사실 우리 형제들만 이 목욕탕을 썼으니 맘대로 장난치고, 떠들고 난리를 쳐 가면서 목욕을 했으니, 대중탕 가는 거보다는 훨씬 행복한 목욕이었다. 그런데 가끔은 야근하신 노동자 한두분이 목욕하고 옷 갈아 입으러 왔는데, 이럴때면 그저 조용조용 있어야 했다. 가끔 자주 봐서 아는 아저씨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너네는 누구냐?"라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대답하기도 난처하고, 대답하고 나서도 찝찜했다. 그래도 중고등학생이고 다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한참 늦은 밤이 되었지만, 그래도 목욕하고 때 벗겨서 개운함은 너무 좋았다.

 

아버지가 직장을 문래동의 어느 식품회사로 옮겼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기관장'이었다. 문래동은 칼산에서 가까워서 종암동 가는 거 보다는 훨 나았는데, 이때 안양천을 건너서 한시간 반 가까이 걸어가야 했으니까, 그 추운날 그것도 고역이긴 마찬가지 였다. 그때 쯤 칼산까지 버스가 들어오는게 있었는데, 109번 버스 종점에서 한대가 종점과 칼산을 왕래했고, 그러니 한 30분만에 한대꼴이나 되었나 모르겠다. 그 버스 기다려서 타고 109번 종점에 가서 다시 갈아타고, 양남동에 내려서 다시 문래동 공장까지 가야 하니까 차라리 걸어다니는게 낫겠다고 걸어 다녔다.

 

이 회사에 아버지는 정년퇴직할때까지 다니셨는데, 이 회사 직원들을 대충 얼굴을 많이 익혔다. 이즈음에는 목욕할 식구들이 더 늘어 났는데, 이종사촌 한명이 서울로 유학와서 우리 집에 있었고,  직장다니는 외삼촌, 재수한다는 시골의 7촌 조카까지 있었다. 그러니 대여섯명이 모여서 목욕하러 공장으로 몰려 갔고, 신나게 목욕은 했다. 매주 갈 수는 없었으니까 2주에 한번 정도 갔다.

 

나이가 좀 들면서 친구들과의 약속도 생기고, 또 그 먼곳까지 가기도 싫고, 더구나 머리 커지면서 아무리 아버지가 '기관장'이라고는 하지만, 공장의 이사람 저사람 눈치 보이는데 목욕하러 가기가 싫어지는 거였다. 평일은 불가했고, 공장의 노동자들이 대부분 퇴근한 일요일 저녁에 가야 했는데,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이었을까.

그래도 대중탕 갈 목욕비는 감당이 안되는 처지였고, 할수 없이 싫어도 귀찮아도 갈수 밖에 없었다.

 

대학다닐때도 목욕하러 형제가 몰려서 갔었는데, 언제부터 가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이 들어서 목욕비 몇천원이면 아무때나 맘대로 목욕탕 갈수 있다는게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 일주일에 두번이고 세번이고 목욕탕에 가곤 했고, 회사에서 몇명이서 사우나패거리를 만들 정도였는데, 요즘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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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4 14:44 2007/01/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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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 겨울에는 어디론가 바다 건너로 좀 나가 보겠다고 친구들한테 놀러가자고 하는데,

   마땅하지 않았다. 계획을 잡는 거며, 날자를 잡는 거며.... 산오리가 극도의 귀차니즘과 단순함으로 지내다보니, 여행계획을 세우거나 어디 알아보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친구가 날잡고 가자 하면 따라가겠노라고 했는데, 그게 친구도 마찬가지겠지 싶다.

그러다가 복돌아빠와 중국이나 가는 걸로 결정을 했고, 산오리는 복돌아빠한테 다 미뤄놓고 있었더니, 그가 여러가지 자료를 수집하고 해서, 1월 말에 출발하는 걸로 정했다.

그래서 복돌아빠의 여권을 받아 오고,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면서 산오리의 여권도 어디 쑤셔박아 놓은 걸 찾아서 펼쳐 봤더니....

 

여권 유효기간 만료일이 06년 12월 28일이다.

 

지난해 물건너 가 보지 않았으니 여권유효기간이 끝났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고 있었던거다. 회사의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여권 새로 만들려면 2주일 걸린단다. 구청 홈피에 들어가서 보니, 번호표 받아서 기다려 접수하고, 어쩌고 해서 만드는 기간이 휴일빼고 8일 걸린다고 나와 있다. 복돌아빠가 알려준 여행사에서 전화가 왔는데(비자 만들게 여권 사본 보내라고...), 그기다 물어봤더니 같은 대답이다.   1월말은 커녕 2월 초도 포기......

복돌아빠한테 전화했다. 설이나 지내고 가자고.....

 

 

 



2. 저녁시간이 좀 한가해져서 저녁에 운동하러 가는날이 많아졌다. 어느날은 운동하러 가서 좁은 길 옆에 차를 세우는데, 뒤로 가는데 뭔가 걸렸다. 그게 차도와 인도의 턱이려니 하고 다시 앞으로 갔다가 뒤로 빼서 차를 세우는데,이번에는 뭔가 덜거덕 거리면서 닿는 소리가 난다. 이상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차를 주차하고서 내려 봤더니, 보도 아래 두조각의 경계석 조각이 있는데, 조각마다 철근이 삐죽이 나와 있고, 그게 뒷바퀴에 걸려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던거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퀴옆구리에 철근이 찢고간 흔적이 두어군데 나 있었다.

 

밝은날 자세히 보니까 한쪽의 흔적은 제법 깊어 보였다. 이걸 그냥 타고 다니나 마나.... 주말에 타이어가게에 갔더니 "꽤 깊은 거같은데, 액땜한 셈 치고 바꾸시죠..." 당연히 그런 말이 나올거로 예상했지만, 그래도 타이어 바꾼지 세달도 안된 새 타이어를 또 바꾸니 짜증이 왕창 날수밖에...ㅠㅠ

 

3. 술집에서 술 마시다가 회를 조금 사서 집으로 갔다.

애들보고 먹으라고 했는데, 잘 먹는다.  동명이한테 '술도 마시려면 마셔라'고 했더니, 그래도 되냐고 물어보고, 소주를 한병 찾아 줬더니 잘도 마신다. 애비는 두잔 마시고 나머지는 동명이가 마셨고, 그것도 모자라 먹다 남은 양주를 내 와서는 콜라에 타서 그게 맛있다고 잘 마신다.

"학원 끝나고 어디가서 놀다 왔냐?"

"노래방..."

"아빠가 부를 노래도 하나 찾아 주라."

"아빠는 뽕짝 좋아하지 않나?"

"뽕짝 별로인데..."

"그럼 뭐 잘불러?"

"자우림의 일탈... 마구 소리 지르지.."

"아빠 모습이랑 잘 어울린다.."

"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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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4 13:43 2007/01/2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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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산의 추억...

from 단순한 삶!!! 2007/01/19 15:54

행인님의 [뚝방의 추억(2)] 에 관련된 글.

뚝방의 추억을 그냥 쓰기에는 뚝방에 살지 않아서 그렇고,

칼산의 추억이 어울릴라나..ㅎㅎ

행인이 물 얘기를 썼으니 산오리도 물 생각이나 해 볼까나.

 

처음 서울에 왔을때는 문래동 고모 집에 얹혀 살았는데, 그 집들은 일제시대때 지은

집들이 행과 열을 맞춰서 같은 모양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그긴 당연히 수도도 있었고...



시골에서 식구들이 올라 오고 칼산 아래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당시 기역자로 된  '부로꾸'(블록인 모양인데, 일본애들이 이렇게 불러서 그랬나?) 집이었다.

대지25평에 건평 12평인데, 그당시 70만원을 주고 샀다고 했다.

 

쇠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부로꾸로 담을  쌓고  지붕은 스레트로 덮었다. 처음 갔을때는 집에 물이 없었다. 그래서 한참 아랫동네에 물을 길러 다녔다. 물론 물 길러 가는 것은 버글버글한 애들의 몫이었고, 한바께쓰 물떠서 오면 절반은 흘리고 떠 왔다. 동네에 수도는 물론 없었으니까 길건너 아랫쫏에 물 길러 가는 곳은 펌프였다.

 

얼마간 물을 길어다 먹었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엄청 불편했으니까 아버지가 집 안에 펌프를 박기 위해 지하수 구멍을 뚫기로 했다. 먼저 화장실 앞 쪽에 물길이 지나간다고 해서 그길 뚫었는데, 조금만 내려가니까 바위가 버티고 있어서 포기 했다.(그당시에도 기계로 드릴을 걸어서 뚫었는데, 바위는 뚫지 못했는지 금새 포기했다. 요즘 같으면 지하 암반수를 먹을수도 있었을 건데..ㅎ)

다시 작은 방 앞쪽에다 뚫었는데, 그기도 바위가 부닥쳐서 실패.... 마지막으로는 아예 담 바깥의 길에 구멍을 뚤었는데, 여기서 물이 나온 거다.

 

그리고는 파이프를 박고 펌프를 연결했는데, 파이프가 직선으로 바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담밖으로 꺽어졌다가 땅아래로 내려갔으니, 물이 제대로 올라올 리가 없다. 물은 많이 있다는데, 쉽게 눌러서 퍽퍽 올라오지 않고, 아주 힘들게 조금씩 올라왔다. 그래도 그게 어디랴, 시골에서 우물물 두레박으로 퍼 먹다가, 바께쓰로 물 길러 다니다가 담장 안에 펌프가 있는데... 엄청 좋았지..

 

중학생이 되었고, 학교 갔다 오면 양말이고, 옷가지고 손빨래로 잘도 빨아서 입었다. 물론 엄마가 그 많은 애새끼들거 다 빨아주지 못하니까 자기 것은 자기가 빨았다. 겨울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한놈은 펌프질하고, 한놈은 비누칠해서 빨래 문지르고...

 

추운 겨울은 좀 문제였다. 펌프에 남아 있는 물이 얼어버리는 것이다. 그럼  또 연탄불에 물 끓여서 한참을 부어 넣고, 이렇게도 시루고, 저렇게도 시루어야 겨우 얼음이 녹아서 물이 올라오곤 했다. 그러다 고무 패킹이 얼어서 찢어지거나 하면 또 며칠간은 옆집으로 물 길러 다니고...

 

늦은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는 그 펌프 옆에서 목욕을 해야 했다. 한여름에 식구들만 있으면 팬티만 입고 그냥 씻어 대면 그만이었고, 여자들은 밤 늦게 식구들을 모두 방으로 몰아 넣고, 방문 닫으라 하고서는 씼었다.  그 더운데 방문 닫고 여자들 목욕할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기다리는게 어려운게 아니라 가끔 놀다가 밖에서 여자들이 목욕한다는 걸 잊고서는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문을 벌컥 열고 나서다가는 '빌어묵을 소상'이란 어머니의 욕설을 두어마디 들어야 했다.

 

그건 괜찮은 편이었는데, 문제는 밤 늦게 들어오는 식구가 있는 날이었다. 늦게 들어오려니 하고, 더워서 견디다 못해 목욕을 하고 있는데, 대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바로 대문안이 펌프가 있는 야외 목욕탕이니 어쩌겠어... 목욕 끝날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수밖에..

 

이쯤되면 펌프 주변을 막대기를 하나 세우든지 해서 천막천이라도 둘러서 샤워라도 하게끔 만들 생각을 못했던 것일까 싶다. 그런데, 그 집 뜯어낼 때까지 그러고 살았던거 같으니까 끝까지 만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천막 쪼가리조차 구하기 어려웠기에 그랬거나, 너무 좁아서 그기까지 울타리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였던게 아닐까 싶다.

 

담에 목욕 이야기나 써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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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9 15:54 2007/01/19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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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일출...

from 단순한 삶!!! 2007/01/19 11:48

산오리님의 [지리산 거림골, 세석산장] 에 관련된 글.

 

 

제석봉에서 일출을 보았는데,

사람들은 지리산 일출을 보려면 3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한다는데,

산오리는 겨울에 산에 갈때면 대부분 일출을 보았던 거 같다.

한 30대는 덕을 쌓은 것일까?ㅎㅎ



 

첫번째 사진은 전날 하늘이 너무 파래서 찍었는데, 그 느낌이 안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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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9 11:48 2007/01/19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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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from 단순한 삶!!! 2007/01/19 11:28

지리산 갔다 부닥쳐서 움직이지 않던 카메라 돈 들여 고쳤다.

이래 저래 찍은 사진이 있는데...



 

1. 동명이가 흥사단을 따라 걷기캠프로 제주도에 가서 집으로 보낸 엽서다.

   집 주소만 있지, 애비, 에미 이름도 없다.

 

   - 이건 뭣때메 보낸거냐?

  = 그냥, 엽서 쓰라 하니까 쓴거지..

   - 네 목표냐? 아니면 부모에게 이렇게 하겠다는 거냐?

  = 그냥 쓰라니까 쓴거라니까...ㅎㅎ

  - 근데, 이 작은 글씨는 뭐냐?

  = 대학생 형이 쓴거야..

  - 이참에 아빠랑 같이 금연하면 어떠냐?

  = 싫어. 고 3  되면 생각해 볼게...

 

 

 

2. 아내가 마지막으로 뜨게질 해서 만든 동명이방 커텐이다.

   동희가 중학교 다닐때 학원갔다가 밤 12시, 1시에 들어오고, 남편은 대전가고 없고,

   그래서 애 기다리면서 온 방의 커텐을 다 뜨게질로 떴다.

   그런 고행을 왜 하냐고, 잠이나 자라고 해도 시작한건 끝을 봤다.

   이사 오고 나서 동명이 방에만 이 커텐이 없었는데, 이번에 다 떠서 걸었다.

   이 커텐 뜨는걸 보고서는 아내가 지독한 독종이란걸 알았다.

   그래도 훌륭한 아내다....

 

 

 

3. 부모님의 칠순 이벤트로 하니문 사진을 찍었다.

   스튜디오에 가서 찍었는데, 칠순잔치하는 날에는 이런 종류의 사진을 서너장 크게 뽑아서

   액자로 만들어서 식장에 가져다 주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좋아하더구먼...

   스튜디오에 처음 갔던날 산오리 사진기에 몇장을 찍었던 거다.

   이게 맘에 안든다고 다시 가서 엄마 머리모양만 바꿔서 다시 찍었다는 것인데,

   산오리는 두번째는 안갔다.

   잔치가 끝나고 무사하게 잘 치렀는가 했는데, 아버지는  또 엉뚱한(?) 꼬투리를 잡아서

   자식들을 닥달하기 시작했고, 그 댓가는 가장 부모님께 잘 하고, 또 잘하려 하는 누나가

   다 뒤집어 썼다. 만만하니까 그럴수 있다지만, 내 부모라도 이런거 정말 싫다.

   젊고 멋있고, 밖에 나서면 누구나 '호인'임을 인정하는 아버지지만,

   자식들에게는 불편하고, 대책없는 아버지다. 그래도 부모라는게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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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9 11:28 2007/01/1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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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인가 지지난해인가? 하튼 때를 기억하는건 영 빵점인데,

우리 회사의 비정규직 여직원이 재고용이 안되자,

여러가지 회사의 비리(?)를 어느 시민단체에 고발했고,

그래서 밑빠진 독상이라는 상을 받았다고 언론에서 보도한적이 있다.



어쨌든 그 고발 내용중에 허위출장이라는게 있었다.

시내출장이나 국내출장을 올려서 출장비는 받았는데,

출장을 가지 않았거나, 아니면 날자를 줄여 일찍 돌아 온다거나,

출장인원으로 잡아 놓은 인원보다 적게 간다거나... 뭐 이런 것들이다.

 

그렇게 해서 출장비를 좀 남기면 그걸로 갑에 대한 접대비로 쓴다든지,

부서 회식비로 쓴다든지 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일듯하다.

 

그래서 이 사건이 시민단체에서 청렴위로, 그리고 감사원이나 검찰까지 번진듯하다.

회사 내부에서도 분위기 뒤숭숭하고,

다른 연구기관에서도 그 여파로 허위출장 있는지 점검해 보라는 지시가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어쨌거나,

산오리한테도 '출장 소명'을 하라는 건이 하나 왔는데,

1년반쯤 전에 저 멀리 나주까지 출장을 갔다 온 건이다.

출근해서 출장결재 올리고 팀원과 같이 10시 29분에 연구원을 나서서

저녁 17시 48분에 연구원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근데, 이게 왜 출장소명을 하라는 것인지 알수가 없다.

계획보다 적게 간 것도 아니고, 출장인원을 줄인것도 아니고, 또 가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가만 생각해 보니,, 아마도 나주까지 갔다 왔는데,

그 짧은 시간안에 가능한 것이었느냐? 뭐 이런 의구심 때문에 소명하라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일산에서 10시반에 출발해서 7시간 20분만에 나주를 갔다 올수 있느냐는 그런???

 

그럴 거라 생각하고 소명은 했다.

일산에서 승용차로 공항으로 가고, 공항에서비행기 타고 목로로 갔고,

목포에서 택시타고 나주로 갔다. 그리고 업무협의를 두어시간 하고

다시 타고 갔던 택시를 불러서 목포공항으로, 그리고 김포공항에서

주차장에 맡겼던 승용차 불러서 타고 되돌아 왔다.

오가는 비행기를 몇시에 탔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충분히 가능한 스케줄이었고, 그렇게 했다. 근데 그게 소명해야할 내용이라니...

그래서 마지막에는 개인차량 이용과 공항주차비, 목포-나주간 택시이용으로

출장비는 부족했다고 썼다.

(출장계획에는 그런거 없다, 일산-김포도 버스요금, 목포-나주도 버스요금만 올릴수 있고,

그나마 항공료는 그대로 계상했다. 택시비나 주차비는 식비나 일비로 때웠지만, 혼자 가서는

완전부족이고, 둘이 갔으니까 그나마 조금 부족하거나 똔똔 정도로 때울수 있다.)

 

이런 거 소명하라는 건 그럴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허위 출장의 결정적인 근거와 증빙이 되었던 것은 회사의 출입카드 시스템이다.

회사는 도난방지를 위해 출입카드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오히려 직원들이 엉뚱한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허위로 출장을 올리고, 그 출장비를 다른데다 쓴 인간들은 처벌도 받고,

고쳐져야 할 일이지만, 출장 갔다가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와서 밀린 일처리하고

야근까지 했던 친구들은 출장안가고 일찍 돌아왔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도둑을 잡는 것이 아니라, 식구를 잡고 있는 꼴이 된것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에서 출입기록은 노동조합의 합의가 있어야 유출을 할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노동조합은 합의해 줄수 없다고 했는데, 회사는 일방적으로 자료를 내줬다.

그런데, 이걸 노동조합도 마구잡이로 반대할수 없었던게,

허위출장이란게 있으니 도덕적이지 않은 것을 감싼다는 비난을 받을수도 있었으니까..

 

이 건과 관련해서 또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했다.

며칠동안은 계약서류철 200여개를 일일이 뒤져서 숫자를 찾아내는 짓거리도 했다.

서류먼지가 책상과 바지를 한참이나 더럽히고, 목이 매캐해 지고,

그 숫자들을 엑셀 파일에 쳐 넣느라고 화면과 서류철만 뒤지고 보고 했더니,

눈이 더 어질어질할 노릇이다.

어딘가 한곳에 문제가 생기면, 줄줄이 관련 없는 사람들도 함께 갖가지 시달림을 당해야 한다.

그러니까 첨에는 내부고발자를 좋게 얘기하던 친구들도,

이제는 '그친구가 오히려 문제'라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에구....

그러게 첨부터 문제가 불거질때 잘잘못을 좀 잘 가려서

불만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것이지,

일 다 터지고 벌어지고 나서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근데, 이 일은 언제쯤 끝날라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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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8 17:17 2007/01/1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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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방의 추억...

from 단순한 삶!!! 2007/01/18 16:31

행인님의 [뚝방의 추억] 에 관련된 글.

행인님이 안양천 뚝방에서 살았다고 하니까, 산오리도 그 동네서 오래 살았으니,

추억이 많다...

 

산오리네 집은 행인이 살던 뚝방은 아니었고, 칼산이다.

71년도 여름에 서울로 왔는데, 아버지가 영등포국민학교에 넣어줬다.

칼산에서 문래동의 영등포 국민학교까지 3형제가 걸어서 등하교를 했는데,

지금 걸어가라 해도 한시간은 더 걸릴 거리였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학교 가는데 한시간 반씩 걸어가고, 다시 집에 오는데 한시간 반 걷고...

아마도 산오리가 조금 잘 걷는다면 이때 단련한 것이 아닐라나 모르겠네..

 

 




논둑길을 지나서(이당시 논둑길이 지금 목동아파트 14단지 부근이다)

안양천 뚝방을 올라가서 뚝위로 한참을 걸어가서

행인네 집 근처의 안양천 아래에 구름다리가 하나 있었다.

안양천 물이야 장마철 빼고 나면 항상 어른들이라면 걸어서도 건널 정도의

깊이와 폭이었으니 20~30미터쯤 되는 다리였던 거 같다.

양쪽에 쇠줄을 걸고, 그 아래에는 빈 드럼통을 몇게 받쳐 놓고,

다리바닥은 나무 판자를 어설프게 올려 놓은 모양새다.

그러니 건너 갈때 다리 위에서 출렁거리며 장난치고 놀기 좋은 다리였다.

 

그 다리는 물론 정부에서 만들어준 다리는 아니었나 보다.

다리 입구에 조그만 움막(요즘 이동식  화장실 만한)을 지어 놓고,

다리 주인인 듯한 아저씨가 돈을 받고 있었다.

한번 건너는데 5원이었던가?...

(그다음해 중학생이 되었을때 시내버스 교통비가 10원인가 15원이었으니까 결코 싼편은 아니었다.)

아마 한달치로 끊으면 몇십원 됐던거 같은데, 얼마였는지 기억이 없다.

이 다리는 안양천 뚝방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문래동이나 도림동의 공장으로 넘어가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었기에 아침 출근시간이면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여름 방학때나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가다 보면,

어라, 다리가 없어졌다. 큰 비 와서 다리를 쓸고 내려가 버린거다.

그러면 또 그 다리 다시 만들어질때까지 오목교까지 걸어내려 가거나,

고척동까지 걸어서 버스를 타고 가기도....

 

겨울방학 시작할때 쯤이나 2월 봄방학 전에는

군데군데 조금씩 물이 고인 곳이 있었는데,

얼음 아래 붕어들이 놀고 있었다는....

그때까지는 안양천이 그나마 물고기 정도는 살정도는 되었었나 보다.

산오리는 안양천에서 목욕해 보지는 않았는데, 그 전 몇해까지는 안양천에서 여름에

수영을 하고 놀고 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 긴 안양천 뚝방을 따라서 서너줄의 판자집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칼산에 올라가서 보면 그건 예술이었다.

서울 중심가에서 쫓아내니까 쫓겨 와서 집단적인 주거지가 형성되었거나

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변두리로 모여들어 만들어진 주거지였을텐데,

그래도 줄을 맞춰서 지었으니까 위에서 보면 멋있어 보였다.

학교 갔다 오다가 심심하면 뚝방위를 걷는것이 아니라,

뚝방 아래의 동네 좁은길을 걸어서 왔다.

문앞에 내놓은 연탄재를 차기도 하고,  동네 개 똥구멍을 차기도 하고...

그 동네 지나다니면서 행인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화장실도 가끔은 애용하고...

 

74년인지 75년인지 정확한 년도는 기억이 안난다.

엄청 큰 물난리가 났는데, 안양천이 넘칠 지경에 이르렀고, 지금 목동아파트가 들어선

논바닥은 완전히 잠겨서 커다란 바다가 되었다.

안양천 뚝방으로 물구경을 갔는데, 뚝방아래 사람들이 온통 가재도구를 꺼내들고선

뚝 위로 피난을 올라 오고 있었다.

뚝방아래 집들 가운데 낮은 쪽의 집들은 절반이 물에 잠겼다.

그 동네에 살던 우리 친척 한사람이 애를 낳았는데, 물이 집에 잠겼으니

갖난애기를 싸들고 우리 집으로 피난을 왔다.

뭔지 모르고 물구경에다, 집에는 손님들이 왔으니 그저 좋아 했었다는...

당시에 물이 안양천을 넘기 일보 직전까지 갔는데,

소문에 의하면, 문래동 쪽의 뚝에 대포를 설치했다는 거였다.

문래동쪽으로 둑이 터지면 공장들의 피해가 막심할테니까

아예 목동과 신정동 쪽의 뚝을 터뜨리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직접 보지 못했기에 사실인지 소문인지는 모르겟다.

물 내리고 다시 안양천 건너 문래동으로 갔더니, 그동네도 어른 가슴만큼은 물이 잠겼는데,

당시에 수세식 변소 없었으니까 온통 똥물로 물이 잠겼던 선을 선명하게 그려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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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8 16:31 2007/01/1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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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스머프...님의 [지리산에 다녀와서..] 에 관련된 글.

 

역사와 산을 따라 나선지 오래다.

지난해 애 학원을 핑계거리로 거의 가지 않았기때문이다.

가지 않다 보니까, 은근히 무박산행이 무서워지기도 한다.

잠자는 시간을 그 좁은 버스의자에 앉아서 몸을 비틀며 잠을 청하는게 싫어서인데,

그렇게 보니까 아예 1박을 잡아서 이틀동안 움직이는건 여유로와서 좋았다.
이틀동안 지겹도록 본것은 하얀 눈길, 새파란 하늘, 그리고 쏟아지는 별, 그리고 떠오르는 해,

그 붉은 바다....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자 마자 눈이 어른거리고, 침침하고, 눈꺼풀은 떨리고, 하늘은 침침하고,

형광등 불빛에 눈을 껌벅이면서 적응하자니, 꽤 답답했다.



거림골로 올라간 적은 없었던 초행길이지 싶다.

김재영처럼 지리산을 57번째 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름있는 계곡은 대충 다녀본 듯한데,..

 

1. 세석산장은 너무 호화찬란(?)한 산장이었다.

    지나치기만 했지, 산장에서 잠자본 적은 없었는데, 그날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산장에서 자야하는 칼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지리산을 오더라도 장터목을 굳이 가지 않고, 세석에서 잠자면 편하고 좋겠다.

    넓고 편하다고 해서, 그리 편하게 깊게 잠들었던건 아니었던거 같다.

    몸을 뒤척일때마다 불편해서 깼는데, 그리고는 또 잠들고, 코를 골아서 옆사람에게

     방해를 주고....

    어쨌든 세석은 너무 좋은 산장이다. 산에서 그렇게 좋은, 편한 곳에서 자는건 좀 미안하다.

     별도 많고, 먹을 것도 잘 먹고, 잠까지 오래도록 잤으니 그이상 뭐가 더 필요하랴..

    술 따로 안가져 가는 바람에 조장한테 '기본이 안되었다'는 소리를 여러번 들었는데,

    무겁더라도 담부터는 소주 한병은 챙겨가자..

 

2. 아침에 우리 조는 가장 먼저 출발했는데, 전날 엄청 먹고서도 아침에 또 배가 고파서

   누룽지 끓인걸 먹고 걷기 시작했다. 근데, 처음 30분 정도는 오르막 길이고, 조장이

   빠르게 빼서 그렇기도 하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넘 힘들었다.

   약간의 준비운동이나 여유도 없이 출발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가슴이 막혀 못가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3. 장터목을 지날때부터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었는데, 이게 언제쯤 해가 떠오르려나 몰라서

   좀 기다렸다가 보고 갈까 하면서 계속 올랐다. 제석봉에 올랐을때 해가 떠올랐고,

   그 추운데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고, 이리저리 뛰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그바람에 카메라를 바위에 약간 부닥쳤는데, 그다음부터는 작동중지....

   밧데리가 없어서이거나 , 추워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아래에 내려와서도 여전히 중지.

    오늘 에이에스센터에 맡겼다.....ㅠㅠ

 

4. 올라가면서도, 그 추위속에서 산등성이를 걸으면서도,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언제부터 무릎이 아프다고 오래 걷는 것은 가지도 못했고, 이러다가 산에 가는 건 포기해야

   하는거 아닌가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제 그럭저럭 잘 걸어가고 있다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약간 무게가 더 나가더라도 큰 배낭을 지고 갈수도 있겠다는 자만심까지..

   이렇게 또 무리 하다가 완전히 무릎이 고장나는거 아닌지 모르겠네..

 

5. 로타리 산장에서 아침겸 점심을 먹으면서, 물을 뜨러 법계사에 들어갔는데, 물 뜨고,

  내려오면서 절을 들른 김에 열심히 합장을 해서 부처님께 기도했다.

  재수의 길로 들어설지도 모를 동희가 맘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기도와, 산에 가기전에

  일출을 보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한 공주가 커플생활(?)을 할수 있게해 달라고 빌었다.

  일출을 보면서  빌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도가 효험이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는 짝들을

  찾아서 즐겁게 살아가시길...

 

6. 아침 겸 점심 먹으면서 박인해에게 한 농담은 그에게 마음에 남았나 보다.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산오리 아저씨의 말처럼 비와 강동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걸 보면....

   박인해가 한 말은 다 공감이 가고 반성해야 할 것들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나

   중고등학생을 만나면 더 할 말이 없어지고 마는 듯하다.

   그나마 몇번 보아왔기에 아는 척하거나, 친한 척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부담으로

   또는 '어른들은 항상 그모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때문이다.

   어릴적에 어른들이 반말하거나,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껴 왔을 테지만,

   나이 먹어가고, 어른이 되면서 다시 어른들이 하던 것들을 반복하는 것에 대해 반성할 일이다.

 

7. 2월엔 태백산을 간다는데, 무박이란다.

   가고 싶다는,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버스안에서 불편함으로 시달릴걸 생각하니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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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5 18:25 2007/01/1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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