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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이건희에 준 철학박사 학위는 어떤 철학인가?”

박노자 교수님, 반갑습니다. 민족주의에 대한 객관적 시각!

초딩들 보는 교과서부터 우리 한민족은 단일 민족이고... ... 우리는 언제나 외국인 혐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교육부터 당장 바꿔야 

 

 

 

박노자 “이건희에 준 철학박사 학위는 어떤 철학인가?”
SBS 라디오 출연 “고대 학생들의 시위 통쾌했다”
2005-05-10 11:52 김선애 (iyamm@dailyseop.com)기자
“민족주의는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서양이념이다. 이런 철학을 가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것은 어떤 철학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교수는 10일 S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묻고 “고려대 학생들이 이건희 회장의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반대하며 시위를 벌인 것을 보고 통쾌했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최근 펴낸 자신의 저서 ‘우승열패의 신화’를 소개하며 우리나라 민족주의는 서양 민족주의가 일본을 통해 들여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족주의는 사회진화론에서 나온 것으로 강한 자가 살아남아야 그 민족이 강해지고 진화된다는 이념이다. 그래서 초기 사회진화론은 복지국가를 세울 필요 없다고 까지 주장한다. 복지가 강화되면 약자도 살게 되고, 약자의 후손이 살아남으면 사회가 약화되기 때문이다.

사회진화론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우수한 민족이 저열한 민족을 전멸시켜야 한다는 민족주의로 발달한다. 히틀러·무솔리니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 이러한 이념을 배경으로 하며,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친 것도 바로 이 민족주의이다.

박교수는 신채호 선생이 만든 ‘독립신문’에도 강한 민족주의 이념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민족주의는 신채호·박은식 선생 등 당시 지식인 사회의 담론이었다. ‘흑인 같은 열등한 민족은 당연히 소멸돼야 한다’ ‘당장 근대화 하지 않으면, 부국강병 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이 소멸된다’ 등의 주장이 독립신문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알수있다.”

민족주의의 위험은 사회의 약자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박교수는 “여성에게 현모양처의 생활패턴을 강요하는 등의 예가 한국 민족주의의 폐단”이라며 “오늘날 우리사회에도 민족주의의 개념이 성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 김선애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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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닝구를 다시 알려주랴?

음 얼추 정리... 지금 니들은 난닝구랑 뭐가 다른데?

 

 

 

난닝구를 다시 알려주랴?
     등록 :   조회 : 2555  점수 : 590  날짜 : 2005년5월9일 17시50분 

열린우리당에서 자주 논란이 되고 사용되는 난닝구라는 말에 대하여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어서 그것의 유래와 의미를 정리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이 상당한 비하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라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간단히 정리를 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정치적 의미의 난닝구에 대한 유래


2003년 하반기경으로 기억됩니다만, 민주당은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로 민주당의 리모델링이냐 해체 후 신당의 창당이냐를 놓고 세 겨루기는 물론이고 극심한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기에 비로소 태동된 갈등은 아니지만 극심하게 외부로 표출된 시기가 그때였던 것입니다.


2002년 대선후보를 뽑기 위한 국민경선에서 단기필마로 출마한 노무현이 광주경선에서 1위를 하면서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아졌을 때, 경선주자들이 줄줄이 사퇴를 하면서 경선의 판을 깨고자 하였습니다.


바로 노무현을 후보로 대선을 치르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표출한 것이지요. 정동영이 끝까지 완주하면서 경선지킴이를 자처한 것이 그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어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 얼마나 반노무현정서가 민주당을 지배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김근태도 당시에 경선사퇴를 한 것은 반성해야할 일입니다. 아마도 민주당의 갈등이 태동되던 시기로 생각됩니다.


경선에서 노무현이 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승복하고 후보를 중심으로 대선을 위한 대오를 형성하자는 사람은 불과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후단협의 위력과 세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후보의 캠프와 후단협 및 당권파들의 반칙이 충돌하고 부딪치면서 대선준비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고, 후보의 지지율은 지속적인 하락을 하여 집권이 불가능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후단협의 활약이 상당히 위력을 발휘한 셈입니다. 당의 재정권도 후보 측에서 넘겨받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던 시기입니다.


결국은 후보단일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면돌파로 명분을 얻었기에 이길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단일화 여론조사를 간신히 승리하였습니다.


그러고도 후단협은 승복하지 않았습니다. 탈당해서 한나라당으로 자민련으로 가거나 남아서 계속 후보를 흔들거나 겉으로는 승복을 하는 척 하면서 뒤통수를 치는 방식으로 당에 해악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후보에게 굴복하는 의원들도 늘어나고 있었고 엉성하지만 대선을 치루기 위한 대오도 형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2.19의 감격적인 승리로 모두 정리가 되는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내부의 심각한 갈등들은 용암처럼 끓고 있었습니다. 인수위가 꾸려지고 당선자가 되었지만 당내의 분열은 좀처럼 해소되지를 못하였습니다. 대선을 이기고도 당이 분열한 예는 좀처럼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지만, 구당파들에게 노무현은 여전히 정치권 변방의 후배취급을 받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당을 자신들이 쥐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에 대통령이 동의해주기를 바란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쯤 조순형이 당의 발전적인 해체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천신정과 추미애 등이 그것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구당파들의 기득권수호 의지는 강력하였습니다. 거기에 정통야당의 계보를 잇는다는 명분을 대면서 상당히 강한 저항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조각과 취임 등을 거치면서 해체론을 주장하던 사람들도 일부가 이탈하고 추미애도 오히려 어정쩡한 포지션을 취한 것입니다. 아마도 입각이 좌절된 반감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천신정과 조순형을 중심으로 개혁신당에 대한 추진의지가 비춰지고 정대철이 대표가 되어 나름대로 그들에게 힘이 실리는듯 하지만, 그들 구당파의 저항은 갈수록 강해지기만 합니다. 오히려 추미애에 이어서 조순형까지 그들에게 투항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조순형은 신당의 추진이 김원기를 중심에 세우고 시작하려는 것에서 반감이 생긴 것으로 추측이 가능할 것입니다.


전당대회를 통한 민주당의 발전적인 해체와 신당의 창당을 당무회의에 상정하려고 하다가 여러 번 좌절되고 다시 추진을 하는 과정에서, 당무회의장에 이미경 의원의 머리채를 잡아 흔드는 머리채 사건도 있었고 난닝구 입은 구당파 측 당원의 당무회의 깽판도 등장을 합니다. 상정과 논의 자체를 못하게 막는 물리적인 행위가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과정에서 난닝구 등의 활약으로 결국은 해체 및 신당창당의 안건은 당무회의에서 표결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활약한 난닝구가 바로 탈당 후 신당창당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후 정동영이 앞장서서 탈당을 하고 몇 명이 후에 합류하고 하면서 열린우리당의 창당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개혁당세력과 시민사회의 신당추진세력과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독수리 오형제 등이 함께하는 신당이 오늘의 열린우리당이 된 것입니다.


당시의 정동영등에 의한 탈당은 호남의 철옹성을 버리고 전국정당을 지향한다는 명분과 당원이 주인 되는 정당을 만든다는 명분도 좋았지만 지지기반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상당부분 포기하는 결단이라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만한 일입니다.


그렇게 난닝구라는 단어는 구당파에 의하여 동원되면서 정치에 빈번히 회자되는 전설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민주당의 신당추진을 위한 당무회의를 완력으로 저지한 사람 중에 난닝구 차림으로 멱살잡이를 하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탄생한 용어입니다.


▲ 난닝구의 추억(?) ⓒ 엠파스 검색


2. 난닝구의 의미.


난닝구라는 단어를 언어적 측면에서 먼저 짚고 넘어갑니다. 아마도 RUNNING이라는 영단어를 일본인들이 잘못 발언하면서 그것이 널리 전파된 것으로 보입니다. 상체에 걸치는 under wear를 일컫는 말이지요. 언더웨어만을 걸치고 뛰는 모습에서 유래되어 런닝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일본식 발음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적인 의미의 난닝구는 어떤 의미인지 바로 이 부분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거나 혼동을 일으키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부분이니 하나씩 의미를 나열해 보는 방식이 좋을 듯합니다.


첫째, 특정 기득권 정치인들에게 동원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정치인의 지지자이면서 유력 정치인이 원하면 몸을 던져서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에 의하지 아니하고 그저 정치인에게 휘둘리는 동원패거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당파에 의하여 감성적으로 동원된 행동파 당원이라는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폭력이나 완력으로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정상적인 당무회의를 완력으로 무력화시킨 사람들을 표현하면서 그중 난닝구 차림의 구당파 측 사람이 상징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머리채 사건보다 아마도 그 선정성이 뛰어나서 주로 사용된다고 보여집니다.


세째, 지역적인 이해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당시의 민주당이 호남을 대변하는 정치집단으로 이미지가 고착화된 탓에, 구당파가 당연히 호남의 지역주의를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으로 연결지으려는 의도를 가졌고 그들의 뜻에 동조행동을 하면서 널리 알려진 것이라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신당의 추진에는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추진한다는 명분도 포함되어 있어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네째, 극단적 패거리 주의를 말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인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그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동원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강력한 연대의식이 깔린 행위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패거리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합리성이 극도로 떨어진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성과 순리에 의존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반발을 보이는 행위로 합리성과는 엄청난 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당무회의가 토론을 하고 나름의 과정을 거쳐서 의결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고 정상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것은 불합리의 극치를 보여주는 행위였기 때문에 불합리성을 그들의 특징으로 들 수 있습니다.


여섯째, 국물에 대한 기대를 가지는 특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무회의를 완력으로 무산시킨 사람들이 구당파에 의하여 동원이 되는 과정에서 순수한 자신의 반발심리와 감성적인 흥분 때문에 그렇게 과격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과거의 동원당원들은 모두가 뭔가를 기대하고 정치인들을 지원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돈을 줄 수도 있고, 정치인이 이권을 줄 수도 있고, 일자리를 청탁해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그들이 호가호위하는 것을 묵인해줄 수도 있고, 그런 국물과 관련이 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상을 요약하면, 동원, 폭력, 지역집착, 패거리주의, 불합리성, 국물기대 등으로 간추려집니다. 정치가 이루어지는 무대의 주변에서 이런 특징들을 모두 가지거나 상당부분 가지고 있는 당원, 지지자, 선거운동원, 이익집단 등을 난닝구라는 비하의 의미를 담아서 칭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과거 우리는 민주화의 기나긴 여정을 거치면서, 호남인들의 소외와 핍박과 고통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표하면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진전시켜 왔습니다. 이제는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측면에서 비교적 완성되어 갑니다.


호남민중이 이 땅의 민주주의에 기여한 그 소중한 기록들을 과소평가하거나 그분들을 구태라고 함부로 폄훼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분들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발휘한 옳은 선택들이 이 땅의 오늘이 있게 한 요소입니다.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인정하는 바탕 위에 잘못된 부분만을 이성적으로 비판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회구성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몰이해와 감성적 충돌 등은 아직도 질적인 민주주의로 가는 험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좀 더 깊이 있는 민주주의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들의 이성적인 판단력을 증진시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무조건적인 비판도, 무조건적인 감싸기도 모두가 지양되어야할 비이성이라는 점에서 비판은 하되 대상도 행위도 명확히 구분하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난닝구라고 비판하는 그분들도 과거 독재시절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며, 한나라당의 지지자들에 비하여 정치적으로 훨씬 소중한 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론적으로 난닝구적 특성을 지닌 그룹을 비판하는 것도 몰이성의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더 많은 대중성과 우중의 이성을 발전시키는 일도 가능할 것입니다. 비하의 뜻을 담은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부적절한 경우가 없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 비토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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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 비토세력  IP :211.47.228.x    작성일 : 2005년5월9일 17시53분    
유종필이 지껄인 지역우월주의란 무엇인가?이글을 쓴 비토세력은 호남산이며 김대중의 수십년 지지자이고 오로지 호남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를 최고로 평가하는 사람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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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3분 드라마'... 시민정신이 장애인 구했다

훈훈한 이야기

솔직히 인터넷 잘 찾아보면 좋은 내용도 많다. 좆같은 내용이 더 많아서 그렇지...

 

 

지하철 '3분 드라마'... 시민정신이 장애인 구했다
선로 떨어진 장애인 구조 수신호에 열차 급제동
  손병관(patrick21) 기자
▲ 지난 8일 오후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에서 시각장애인이 지하철 선로에 떨어지자 이를 본 시민들이 수신호로 역에 진입하던 전동차를 세워 후 시각장애인 김씨를 구하고 있다.
ⓒ2005 연합뉴스
지하철역 선로에 떨어진 장애인을 구하기 위해 시민들이 수신호로 역에 진입하는 전동차를 세움으로써 참사를 막아냈다.

사건은 8일 저녁 8시15분경 서울 1호선 종로3가역 승강장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가기 위해 종각역 방향 전동차를 기다리던 1급 시각·청각 장애인 김모(43)씨는 발을 헛디뎌 선로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놀란 주변의 승객들이 이 남자에게 "승강장 바로 밑 틈으로 피하라"고 손짓을 했지만 김씨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못하고 선로에 그냥 엎드리고만 있었다.

승객 몇 사람이 김씨를 구하러 선로로 내려간 순간 멀리서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열차의 불빛이 보였다. 열차가 그대로 진행한다면 김씨만이 아니라 김씨를 구하는 승객들까지 화를 당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때 승객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기 시작했고, 이를 이상히 여긴 전동차 기관사는 급제동을 걸어 승강장에 진입하기 전 30여m 지점에서 멈춰 섰다. 선로에 있던 승객들이 김씨를 무사히 승강장에 들어올리며 긴박했던 3분은 감동적인 휴먼드라마로 마무리됐다.

119구조대에 의해 인근 병원으로 실려간 김씨는 가벼운 타박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를 구한 시민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2005/05/09 오후 9:19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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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3천명 모이면 우린 10만명 모인다

아아 달리 '선진국'이랴?

'경제대국' 원조교제 소비의 왕국 일본은 절대 못따라간다.

독도에 관한 국가의 삽질에 대해 일본 사회당, 공산당, 시민단체는 뭐한단 말이냐? 

과연 일본에 (신민 말구) 시민은 있는가?

 

ps 일본 사무라이 영화보며 일본 놈들에게도 배울 점이 많다...

일본을 따르자... 여전히 일본을 쫓아야 할 모델로 여기는 초딩들 보면 대충 난감!

 

 

 

극우 3천명 모이면 우린 10만명 모인다
[해외리포트] 종전 60년, 극우주의 행진 막아낸 독일시민들
  강구섭(kanggusup) 기자
보리출판사

▲ 종전 직후 폐허가 된 모습의 브란덴부르크 문앞 풍경 사진
ⓒ2005 강구섭
▲ 극우시위에 반대하는 대응시위에 참여한 참가자들.
ⓒ2005 강구섭
1945년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종결된 2차 대전 종전 60주년을 맞이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는 브란덴부르크 문을 중심으로 7, 8일 양일간 나치 폭력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를 추모하고 종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나치의 종식과 함께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 날'로 이름 붙여진 이번 축제에는 반전, 평화운동 단체를 비롯해 독일의 정당 정치재단, 연방의회, 독일노조연합, 경찰, 개인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해 반전, 평화, 반인종주의 등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크고 작은 행사를 펼쳤다.

특히 이번 행사에는 종전 60주년을 맞아 대규모 시위를 개최할 것이라고 공언한 극우단체의 시위대가 최근 문을 연 홀로코스트 추모 장소 및 브란덴부르크 문 앞을 통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단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섰으며 이들의 시위를 봉쇄하기 위한 대응시위가 개최되기도 했다.

극우단체의 집회가 열릴 것이라고 알려진 8일 베를린에는 극우단체 시위대와 대응시위대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해 1만여명의 경찰이 투입되었으며 연방의사당에서 정부의 종전 60주년 공식 기념행사가 열리는 동안 경찰 헬기가 베를린 상공을 순회하며 혹시 발생할지 모를 돌발적 사태에 대비하기도 했다.

"극우주의자 시위는 절대 안 된다"...베를린 광장에 모인 10만 시민들

▲ 민주주의 날, 종전 60주년 기념축제 플래카드
ⓒ2005 강구섭
행사장에는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극우주의, 불관용을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 메시지들이 행사부스마다 크게 붙어 있었고, 몇몇 부스에서는 2차 대전을 직접 경험했던 노년세대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축제 기간 동안 기다란 흰 천 두루마리에 '극우주의 반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손바닥 도장을 찍는 행사를 친구들과 함께 준비한 맨젠(17·고교 12학년)양은 "극우주의 시위대가 브란덴부르크 문 앞을 통과하는 것은 결코 허용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며 "2차 대전 종전은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고 강조했다.

맨젠양은 이번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만든 손바닥 도장 천을 학교에 전시해 친구들과 극우주의,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행사장에서 행사안내 팸플릿을 돌리고 있던 17년째 독일에서 살고 있다는 폴란드 출신의 대학생 그라바츠브시키(27)씨는 "지난 날의 과오로부터 미래를 위한 중요한 메시지를 배우는 기회로서 이번 축제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독일 노조연합 부스에서 노조연합 교육국 책임자 폴커씨는 예고된 극우단체의 시위에 대해 "급증한 청년 실업자 문제 등 경제적 불안감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극우주의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언급하며 극우주의 문제 해결을 위해 정치권이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고등학생 멘젠 양과 친구들이 준비한 반극우주의 손도장 찍기 행사 모습
ⓒ2005 강구섭
간간이 비가 내리기도 하는 다소 쌀쌀한 날씨 속에서 이틀 간 열린 이번 축제에는 연인원 10여만 명이 참여해 별다른 사고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행사장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경찰들 또한 커피, 음료수를 들고 행사장을 거니는 등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7일 밤에는 2만5천여 명의 사람이 참여해 베를린을 가로질러 총 길이 33km에 이르는 촛불 띠를 만드는 행사가 열려 '반전' '반인종주의' '반극우주의'를 염원하기도 했다.

극우주의자 3천명, 약식 집회 후 자진해산

▲ '나치주의자랑은 성관계도 갖지 말라'. 행사장의 한 부스에 붙어 있는 문구
ⓒ2005 강구섭
▲ 반전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어린이와 부모.
ⓒ2005 강구섭
결국 2차 대전 관련, 독일의 원죄의식은 전승국에 의해 유포된 거짓 논리임을 주장하며 대규모 시위를 예고했던 극우주의자들의 시위는 행진 없이 약식집회로만 짧게 진행됐다.

학생 및 시민 1만5천여명은 극우단체의 시위행렬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극우단체의 시위대가 지나갈 것으로 알려진 베를린 돔(교회) 앞 경찰 바리케이드 인근에서 대응시위를 개최, 이들의 행진을 막았다. 이에 따라 경찰은 양측의 충돌을 우려, 극우단체의 시위행진을 불허했으며, 극우주의자 3천여 명은 알렉산더 광장 앞에서 집회를 가진 후 시위행진을 포기하고 자진해산했다.

당초 극우시위대는 브란덴부르크 문까지 시위행진 할 것을 주장했으나 경찰은 알렉산더광장 부터 프리드리히 역의 거리까지만 시위행진을 가질 것을 허가했다. 이에 불복한 극우단체는 연방헌법재판소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연방헌재 또한 경찰의 손을 들어줬다.

대응시위 현장에서 만난 21세의 대학생 요하네스(기계공학 전공)씨는 "극우단체의 시위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극우주의가 독일에서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대응시위에 참여했다"라며 시위에 참여한 동기를 밝혔다.

요하네스는 또한 "극우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 사회가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역사를 상기하고 인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대학생 마틴(27)씨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터부시되고 있을 뿐이지 여전히 독일사회의 '수면' 아래에는 극우주의 정서가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마틴은 "지금까지 독일의 각계가 역사청산 문제에 대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대응시위대는 극우시위대의 시위행진이 무산되었다는 경찰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오자 환호성을 울리며 알렉산더 광장까지 평화행진을 할 수 있게 허용하라고 구호를 외쳤다.

2차 대전 종전 60년... 책임의식은 여전히 남아있다

▲ 축제 중앙무대에서 전쟁 당시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는 증언자들.
ⓒ2005 강구섭
지난 2월 시사주간지 <슈테른>은 특집기사를 통해 "2차 대전 종전 6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우리 후 세대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독일 각계 인사의 주요 의견을 다뤘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독일의 각계 인사들은 "더 이상 원죄의식에 시달릴 필요는 없지만 지난 과거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과거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서 대체로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8일 열린 종전 60주년 정부공식 기념행사에서 단상에 선 연방대통령 쾰러 또한 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연방대통령 쾰러는 "나치 시대, 독일에 의해 자행되었던 참혹한 역사에 대한 독일의 책임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독일사회가 지난 역사에 의한 고통과 그것의 결과들을 계속 기억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해야 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강조했다.

또한 쾰러 대통령은 나치로부터 독일을 해방시킨 다른 나라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며 "지난 시절을 희구하는 인종주의, 극우주의는 독일에서 더 이상 기회를 가질 수 없다"라고 분명히 선언했다.

▲ 극우시위에 반대하는 대응시위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길게 도로에 늘어서 있다.
ⓒ2005 강구섭
▲ "나치 독재로부터 해방된 것에 대해 연합군에게 감사합니다". 훔볼트 대학 본관에 붙어 있는 플래카드.
ⓒ2005 강구섭
   [인터뷰] "프랑스 시골아이도 독일 만행 제대로 배운다"
2005/05/09 오전 10:03
ⓒ 2005 OhmyNews
강구섭 기자는 독일 통일 사례에 관심을 갖고 현재 독일 훔볼트대학 박사과정(교육학)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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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 칼럼] 고1촛불시위 누가 이용하나

그렇다. 뻔히 보이는 수다.

너무도 천박하고 진부한 경영학 레토릭 '무한 경쟁이라는 급변하는 세계 경제 환경 변화 속에서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

초딩, 중딩들에게도 무한 경쟁 입시 지옥을 도입하자는 것들이 누구더냐?

국가 경쟁력 제고의 와중에 소모품 한둘 자살해도 불가피하다고 적반하장 펴던 것들이 누구더냐?

 

 

 

'고1촛불시위' 누가 이용하나
[손석춘칼럼] 낡은 '설교' 늘어놓는 저들의 속셈
  손석춘(ssch) 기자
"고1 촛불시위 부추기지 말라."

<중앙일보> 사설 제목이다. 사상 처음으로 고교생들이 대입제도를 비판하며 연 시위에 '여론 주도세력'의 눈은 대체로 차갑다. 냉갈령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의 기득권세력은,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신문들은 촛불시위마저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찬찬히 톺아보면, 저들의 공통점이 있다. 고등학생들의 맑고 밝은 촛불을 굳이 색안경을 쓰고 살천스레 바라본다. <중앙일보>는 "어린 학생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일보>가 침묵할 리 없다. "고등학생까지 촛불 들고나서게 해서야"(사설 제목) 개탄한다. 엉뚱하게 "친 정권"을 들먹인다. "이 정권 들어 친정권 세력의 정치성 촛불집회가 잇따르더니 이제 16세 고등학생들까지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겠다며 촛불을 들고 나서는 사태가 벌어지게 됐다." <동아일보> 사설도 "高1 촛불시위 自制 바란다"고 훈계했다. "누구도 시위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으름장이다.

고등학생들의 촛불시위마저 '색깔' 덧칠

참으로 뜬금없지 않은가. 고등학생들의 자발적 촛불집회에 웬 '정치색깔'이고 웬 '친정부 타령'인가. 그 뿐인가. "다 큰 어른들이 어린 학생들 등에 올라타고 뭔가 생색 내기를 하려는 것 같은 모습은 보기에도 안 좋다"(조선)고 비아냥거린다.

물론, 세 신문이 그렇게 보는 것도 자유다. 정작 문제는 고등학생들의 시위를 매도한 저들의 노림수다. 그들은 다시 한목소리로 고등학생들에게 침묵을 강권한다. 가령 "어른들에게 맡기는 것이 바른 길"(동아)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시위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공부하는 것이 더 옳다"(중앙)고 꾸지람이다.

학생들의 촛불시위에 '정치색'을 덧칠하고 침묵을 요구한 저들의 과녁은 무엇인가. 어처구니없게도 '본고사 부활'이다.

<동아일보>는 사설(金부총리는‘내신의 亂’본질 알고 있나)에서 "정부가 입시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이어진 사설은 "대입 3不정책 법제화는 시대착오"란다. 노골적인 여론몰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인재 한 사람의 가치가 매년 1조 원의 이익을 내는 기업과 맞먹는다”는 발언까지 인용해가며 '경쟁'을 강조한다. 결국 이 신문에 따르면 "본고사, 고교 학력차 반영, 기여 입학제 등을 금지하는 3불(不) 정책"을 풀어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도 "학교 간 학력격차를 반영하지 못하는 현행 제도로는 대학이 우수한 학생을 뽑는 데도 보탬이 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중앙일보>도 대학의 "독립적인 입시안"을 촉구한다.

그렇다. 결국 귀결점은 '경쟁 강화'다. 황당하지 않은가. 경쟁 중심의 교육, 학우들을 자살로 몰아가는 교실에 항의해 연 촛불집회를 '호기'삼아 되레 '경쟁'을 주문하는 저들을 보라. 첫단계는 촛불집회의 정치적 해석, 다음 단계는 학생들에게 공부만 하라는 주문, 이윽고 '경쟁 강화정책'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언죽번죽 주장한다. "학생들을 불안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중앙일보 사설).

되레 "경쟁 강화"를 주문하는 저 부라퀴들

그래서다. 누가 고등학생들의 촛불집회를 부추기는지 참으로 묻고 싶다. 바로 당신들 아니던가. 끝없는 경쟁의 논리를 집요하게 주입하는 기득권세력과 그 '앞잡이 언론' 아닌가. 하릴없이 자문하는 까닭이다. 교육다운 교육을 받고 싶다는 청소년의 열망, 그 소망이 타오른 맑은 촛불도 부라퀴들의 캄캄한 잇속을 밝게 비추기에는 아직 부족한 걸까.

10대들의 촛불시위마저 '경쟁력 강화'로 몰아가는 저들에게 '경쟁'보다 '연대'가 사람 본연의 가치임을 깨우쳐 줄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촛불'을 들고 찾을 때다.
   [고태진칼럼] 경쟁 부추기던 그들이 과도한 경쟁을 걱정?
2005/05/09 오전 11:25
ⓒ 2005 OhmyNews
손석춘 기자는 오마이뉴스 고정칼럼니스트 입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를 지냈으며, <한겨레> 비상임 논설위원입니다.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로 EBS의 아침8시 <월드FM손석춘입니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신문읽기의 혁명> <아직 오지 않은 혁명>을 비롯한 언론비평서들과 함께 장편소설 <아름다운 집>을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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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약진, ‘유시민 바람’과 ‘손학규 바람’ 가능성

경청할만한 정치공학자의 분석...

노무현이 대선 1년전 대중성과 상관없이 지도자성 인정받았듯이

손학규도 그럴 가능성 있다는 기계적인 대입...

딴나라 3인 중 손학규에 가장 비중두는 혜안은 사실 공학자들에게는 공통적... 기본

 

역동적인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박근혜 약진, ‘유시민 바람’과 ‘손학규 바람’ 가능성
2005-05-08 19:19 서영석 정치전문기자 (du0280@dailyseop.com)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강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 자신감이 붙어서인지 모르나 이미지는 더욱 좋아졌다.

물론 정치인의 이미지란 일종의 필요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박근혜 대표가 ‘수첩공주’란 별명을 갖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박근혜 대표의 좋은 이미지에 비해 실속이 없다는 비난에 다르지 않다.

▲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 (자료사진) ⓒ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민원기 박항구 기자 
하지만 좋은 이미지에 좋은 내용을 채워 넣는 것이 한결 쉽다.

좋은 내용이 있는 정치인이라도 좋은 이미지를 준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표가 갖고 있는 온화하고 포근한 이미지는 박근혜 대표만의 고유의 강점이다.

가령 열린우리당의 문희상 의장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같은 자리에 앉혀놓는다고 생각해보라. 이미지 면에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이런 식이면 정치의 본질이나 현 정세의 구도에 대해 상대적으로 지식이 얕은 20대 초반 연령층의 지지도 면에서 박근혜 대표와, 그가 이끄는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을 압도할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다.

그런대로 이미지 면에서 박근혜 대표와 당적할만한 사람은 여권에서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 정도이고, 아직 크게 부각되고 있지는 않지만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도 이런 면에서는 저력이 있다고 하겠다.

이미지는 보통 정도이지만, 다른 강점으로 대적할 만한 사람을 열린우리당 지도부 가운데 꼽으라면 유시민 상임중앙위원이 있다. 하지만 유시민 위원은 아직 지도적 인물로는 부각이 되지 않고 있다. 다만 잠재력 면에서는 박근혜 대표와 대적할 만한 저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박근혜 대표 스스로 공부에 게을리하지 않고, 당의 혁신에 힘을 기울인다면 한나라당이나 박근혜 대표의 수구 이미지를 벗을 날도 어쩌면 올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좋은 이미지도 채울 내용이 없다면 결정적인 싸움에서는 밀릴 수밖에 없다. 본인의 ‘내공’에 관한 한 이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례에서도 봤듯이 주변 참모들이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공부에 공부를 거듭하는 수밖에 없다. 원희룡 최고위원이나 고진화 의원처럼 박근혜 대표에게 비판적인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보약이 될 것이다.

또한 홍준표 의원처럼 다소 불분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만드는 혁신안보다 더 혁신적인 안들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 될 것 같다. 국회의원 한두번 더 해먹을 것이 아니라면, 진정으로 정상을 노리는 사람이라면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큰 틀에서 이득이 되는 방안을 취하는 것이 최선이다.

박근혜 대표가 약진하면 열린우리당의 잠룡들이 긴장한다는 식의 해석은 일차원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보다는 이명박 서울시장이나 손학규 경기지사가 긴장한다는 것이 상식에 맞다.

▲ 손학규 경기지사(왼쪽)과 유시민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자료사진) ⓒ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민원기 기자 
박 대표의 약진 자체에 열린우리당의 정동영-김근태 장관이 긴장할 이유는 없다.

아직 시간은 적지 않게 남았고, 박 대표나 정동영-김근태 장관 모두 당장 급한 것은 당내 경선을 통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 대표가 약진한다고 열린우리당내 정동영-김근태의 전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 대표가 약진할 경우 당내 경선에서 겨뤄야 할 이명박-손학규 두사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 힘없이 밀려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내부를 보면 박근혜-이명박의 양강 체제에 손학규 지사가 조금 떨어져서 쫓아오는 형세다. 나는 이 구도를 보면서 과거 한번 쓰기도 했지만, 손 지사야말로 다크호스라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5년정도 전인가, 노무현 대통령이 아직은 여권의 희망으로 부각되기 전 정치부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노 대통령이 상당히 좋은 점수를 받은 적이 있다. 아무래도 정치권의 속사정에 밝은 이들이 한걸음 앞서 보기 때문이다.

손 지사는 최근 정치부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상당한 가능성을 인정받은 적이 있다. 손 지사가 갖고 있는 ‘내용’이 점수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기나 이미지는 시간에 따라 변동하지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본신의 내공’은 시간과는 무관하다.

이런 면에서 손 지사야말로 한나라당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라고 나는 판정한다.

만약 과거 민주당 식의 ‘노풍(盧風)’이 다음 대선을 앞두고 일어난다면, 열린우리당에서는 유시민 상임중앙위원의 ‘유풍(柳風)’이 될 것이며, 한나라당에서는 손학규 지사의 ‘손풍(孫風)’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연배라는 측면에서 보면 유풍보다는 손풍 가능성이 더 높다.

▲ 서영석 정치전문기자 
유시민 상임중앙위원의 경우 굳이 자신이 정동영-김근태 장관을 누르고 나서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 아직은 미지수이기 때문이며, 손학규 지사의 경우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사는 변화무쌍하다고 했던가. 그러한 인간사보다 더 변화무쌍한 것이 정치판이다.

열린우리당의 잠룡 진영에서 포용(현재 여권 일부에서 얘기하는 원칙없는 타협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는 배제의 전략이 횡행한다면 유풍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열린우리당의 차기 주자들이 유풍을 안고가기 보다 배제전략을 구사한다면 오히려 그 덕으로 유풍이 독립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얘기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 서영석 정치전문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유시민 돌풍의 근본원인   /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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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대충 배란다. 엉덩이아니란다

시청자 여러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18세 이상만 클릭하세요..좀 야함. [163]
9925 | 2005-05-08
추천 : 10  | 조회 : 82810  | 스크랩 : 25
엉덩이 닮은 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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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ing Stones

http://www.youtube.com/watch?v=QjOM8JzUX3g&search=sympathy%20for

Sympathy for the Devil Live Altam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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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음악을 좋아하는 음악팬치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음반 한두장쯤 소장하지 않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60년대에 비틀즈(Beatles)와 더불어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주역이었던 롤링 스톤즈.
개성강한 보컬 믹 재거(Mick Jager)와 기타리스트 키쓰 리차드(Keith Richards)를 구심점으로 한 이들은 정치적인 노선을 뚜렷하게 표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인 언행과 퇴폐적인 이미지, 난폭한 무대 매너, 뜨겁게 발산되는 록에너지의 괴팍한 합성물로서 기성 세대로부터는 저주섞인 지탄을, 젊은이들에게는 열정적인 숭배를 받아왔다.
비틀즈가 필연적인 해체를 맞이한 이후에도 '가장 위대한 록밴드(The Greatest Rock Band)'의 전설을 37년째 이어오고 있는 롤링 스톤즈의 지난 세기를 돌아보고자 한다.
열렬한 록음악 팬뿐만 아니라 록음악의 입문자에게도 롤링 스톤즈는 한번은 넘어야할 거대한 산일 터. 데뷔작에서부터 최근작까지 이들의 대표적인 앨범을 살펴보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THE ROLLING STONES (64)
♬ 롤링 스톤즈의 역사적인 첫 행보. 데뷔앨범치고는 리메이크작의 비중이 상당히 크다. 로큰롤과 브리티시 블루스를 주재료로 당시의 시대 경향인 사이키델릭한 맛도 상당히 가미.

12X5 (64)
♬ 키쓰 리차드와 믹 재거의 작곡 능력이 서서히 발휘되기 시작한 앨범. 올타임 리퀘스트 넘버인 'Time Is On My Side'를 비롯해 척 베리(Chuck Berry)의 고전 'Around And Around'와 'It's All Over Now' 등이 특히 사랑받았으며 블루스 인스트루멘틀 넘버인 '2120 South Michigan Avenue'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악동' 롤링 스톤즈의 이미지보다는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비틀즈(Beatles)의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는 듯 하다.

THE ROLLING STONES NOW! (65)
♬ 롤링 스톤즈는 65년경부터 비틀즈의 뒤를 쫒는 대신 독자적인 스타일과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R&B의 영향이 강해진 본작에서 'Heart Of Stone'이 미국 차트 20위에 올라 롤링 스톤즈의 미국 침공 깃발이 올랐다. 이제 천하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가 반쪽씩 나눠먹는 시대.

AFTERMATH (66)
♬ 영국 차트 1위. 팝적인 느낌의 강화. 믹 재거와 키쓰 리차드의 작곡이 불을 뿜는 롤링 스톤즈 최초의 '진짜 오리지널' , '물 안 탄 액기스' 앨범.

FLOWERS (67)
♬ [Aftermath]와 [Between The Buttons]의 대표곡들과 66년∼67년에 발표한 싱글들을 묶은 앨범. 희귀곡들이 담겨있는 콜렉터스 아이템.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67)
♬ 비틀즈의 [Sgt.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다분히 의식한 작품. 클래시컬(?)한 롤링 스톤즈 사운드는 많은 팬들을 당혹시켰으나 사이키델릭한 당대의 시대감각에는 시의적절.

BEGGARS BANQUET (68)
♬ 사이키델릭한 전작과 달리 롤링 스톤즈의 본류인 블루스로 회귀. 델타 블루스의 영향을 받은 슬라이드 기타 사운드가 일품. 재기발랄, 에너제틱, 무르익은 명성.

LET IT BLEED (69)
♬ 브라이언 존스의 사망과 믹 테일러의 영입 등 혼란한 시기에 오히려 가장 뛰어난 수작을 내놓은 아니러니(?). 70년대를 향한 롤링 스톤즈의 거침없는 진군. 화려한 게스트. 이것이 바로 롤링 스톤즈다!

STICKY FINGERS (71)
♬ 브라이언 존스의 뒤를 이은 믹 테일러의 기타가 불을 뿜는 역작. 영국과 미국 공히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앤디 워홀이 디자인한 진짜 지퍼가 달린 LP판의 재킷도 화제거리였다. 반사회적 약물 송가의 승리.


 

EXILE ON MAIN STREET (72)
♬ 대단한 싱글은 나오지 않았으나 앨범 전체적으로 뛰어난 통일감을 이룬 작품. 전작들에 비해 비교적 스탠더드하지만 로큰롤, 블루스, 소울 등에 기반한 롤링 스톤즈 사운드가 완숙미의 정점을 터득한 하드록 명반이다.

HOT ROCKS 1964-1971 (72)
♬ 수십장에 이르는 롤링 스톤즈 앨범을 콜렉션으로 갖추려면 비명부터 나오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Hot Rocks!!'. 롤링 스톤즈의 메가히트곡만을 엄선한 베스트 오브 베스트다.

MORE HOT ROCKS (BIG COOKIES) HITS & FAZED (72)
♬ 타이틀 그대로 [Hot Rocks 1964-1971]의 속편. [Hot Rocks]보다는 소폭 히트했던 곡들이 수록돼 있으나 질적인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정규앨범에서 들을 수 없는 B-Side곡도 담겨있는 콜렉터스 아이템.

SOME GIRLS (78)
♬ 시대적 조류에 맞춰 변신을 거듭했던 롤링 스톤즈가 이번엔 디스코와 펑크로 옷을 갈아입었다. 롤링 스톤즈 특유의 하드한 사운드를 기대한 사람들의 뒤통수를 친 대단히 파퓰러하면서 생동감 넘치는 스매쉬 히트 앨범. 미국과 영국에서 모두 앨범차트 1위를 차지했다.

TATTOO YOU (81)
♬ 역동적인 로큰롤 에너지와 부드러운 발라드의 조화로운 공존. 소울풀한 보컬과 사운드가 블랙뮤직적인 성향으로의 변신을 감지케 하는 명반.

JUMP BACK: THE BEST OF.... 1971-1993 (93)
[Hot Rocks 1964-1971]에 이어 71년부터 93년까지의 대표곡들을 모은 또하나의 베스트 앨범이다. 블루스, 로큰롤, 소울, 포크록까지 롤링 스톤즈의 다양한 궤적을 추적할 수 있다.

VOODOO LOUNGE (94)
♬ 밴드 연륜 30여년에 다다른 노장 밴드의 세련미와 70년대 전성기 시절 생동감의 결합. 전설은 사라지지 않고 돌은 계속 굴러간다.

ROLLING STONES ROCK & ROLL CIRCUS[BOX](96)
♬ [Rock & Roll Circus]라는 영화를 찍으며 함께 제작한 앨범. 존 레논(John Lennon), 더 후(The Who), 타지마할(Taj Mahal) 등 영화 촬영에 참여한 밴드들의 노래도 앨범에 함께 삽입되어 있는 콜렉터스 아이템.

BRIDGES TO BABYLON (97)
♬ 이들이 과연 50대란 말인가? 변한 게 있다면 좀 더 세련돼 졌다는 것. 롤링 스톤즈 입문자라면 이 앨범으로 시작해도 나쁠 것 없다.

NO SECURITY (98)
데이브 매튜스(Dave Mattews), 타지마할(Taj Mahal), 조슈아 레드먼(Joshua Redman), 그리고 라이브 연주. 초호화 게스트가 출연한 롤링 스톤즈의 20세기 마지막 라이브 앨범. 60-70년대 히트곡들을 담았던 이전 라이브 앨범들과 달리 90년대에 발표한 앨범의 대표곡들을 수록했다.
 

☞ 글 | 이기연(popper@changgo.com

 

 


Rolling Stones / Let It Bleed
01   Let It Bleed 
02   Love In Vain 
03   Midnight Rambler 
04   Gimmie Shelter 
05   You Got The Silver 
06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 
07   Live With Me 
08   Monkey Man 
09   Country Honk 

Rolling Stones / Get Yer Ya-Ya`S Out! (Live)
01   Jumpin` Jack Flash 
02   Carol 
03   Stray Cat Blues 
04   Love In Vain 
05   Midnight Rambler 
06   Sympathy For The Devil 
07   Live With Me 
08   Little Queenie 
09   Honky Tonk Women 
10   Street Fighting Man 

 

이 앨범은 레온 러셀, 알 쿠퍼, 라이 쿠더, 지미 밀러 등 롤링 스톤즈 앨범 사상 가장 화려한 게스트들이 등장하는 수작이다.
또 하나의 롤링 스톤즈다운 명곡으로 기억될 'Gimme Shelter'에서는 소울적인 뉘앙스도 감지되고 있는데, 코러스 부분에서 이들은 살인과 능욕, 그리고 사랑 등을 매우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라이 쿠더가 만돌린을 연주하고 있는 'Love In Vain', 피들 연주가 시골적인 풍경을 잘 표현해주는 'Country Honk', 키쓰 리처드의 베이스와 레온 러셀의 피아노, 그리고 바비 키스(Bobby Keys)의 테너 색소폰 연주 등을 들을 수 있는 경쾌한 'Live With Me' -레온 러셀의 혼 어레인지도 좋다-, 이안 스튜어트의 피아노가 사이드 곳곳에서 빛을 발하며 키스의 슬라이드 기타 솔로 역시 구수하게 다가오는 타이틀곡 'Let It Bleed', 브라이언 존스가 퍼커션을 연주한 폭력적인 남녀차별주의적 송가 'Midnight Rambler' -리듬이 점차적으로 빨라지며 흥분도를 더하는 것이 인상적-, 키쓰 리처드가 보컬과 기타를 함께 맡고 있는 'You Got The Silver', 탬버린과 비브라폰 등을 삽입하고 있는 재즈적 업템포의 'Monkey Man', 그리고 CF에 삽입되어 익숙한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Version 2)'에서는 알 쿠퍼가 피아노부터 프렌치 혼, 오르간까지 도맡아 연주하고 있으며 런던 바흐 성가대까지 가세시키고 있는 것이 돋보인다.
한편 이 앨범이 공개될 즈음 이미 비틀즈는 와해와 해체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 롤링 스톤즈는 세계 최고의 로큰롤 밴드로 올라서게 되었다.
이 앨범을 끝으로 브라이언 존스가 그룹을 떠난다. 그는 멤버들과의, 더 정확히는 믹 재거 및 키스와의 음악적 견해 차이가 두드러져 결국 팀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는 밴드를 탈퇴한지 불과 한 달만에 죽고 말아 주변을 가슴아프게 하기도 했다. 


첫 포문을 여는 전미 챠트 1위 곡 brown Suger는 이들의 라이브시 항상 마지막을 장식하는 명곡으로(이들의 공연을 보면 이 곡이 나올 때 가장 화려한 스테이지가 연출된다) Keith Richards의 발군의 리듬기타 베킹을 중심으로 어쿠스틱 기타, 섹스폰, 피아노가 혼연일체를 이루며 흥겨운 로큰롤을 만들어 낸다. 이어지는 sway는 brown sugar보다 템포가 한층 느려지긴 했지만 흑인 블루스의 향취가 그윽한 곡으로 특히 곡 후반부 Mick Taylor의 발군의 기타 솔로를 들을 수 있다. Pearl Jam 의 alive의 후반부 기타솔로와 비견될 만하다. Rolling Stones의 곡치고는 너무나 아름다운(사실은 Rolling Stones이기 때문에 가능한) 록발라드 wild horses는 필자가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랙이다. 노을이 비껴가는 저녁하늘을 바라보며 느끼는 이유 모를 서글픔이 밀려오는 듯한 여운을 주는 곡이랄까. 공격적이고 거칠 것만 같은, 록 역사상 최고의 보컬 연출자 Mick Jagger의 보컬 역량을 이 곡에서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또 다른 명곡 can’t you here me knocking은 록큰롤풍으로 흐르다가 곡 중반부부터 B. keyes의 흐느적거리는 섹스폰이 재즈적 빚깔이 내는가 싶더니 이내 Mick Taylor의 진득한 블루스 기타톤이 끼어든다. 기타와 섹스폰이 섞여 마치 서로를 애무하는 듯한 모양새로 곡을 마친다. 이 곡 중반부를 들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성적 무드를 연상케 하는 곡이다. 이어지는 곡 you gotta move는 블루스 풍의 한층 느려지고 단순해진 사운드의 곡으로 뭔가에 도취된 듯한 보컬과 슬라이더 기타가 절묘한 어우러짐을 연출해 낸다. 분위기를 또 다시 바꿔 이어지는 btich는 터프하고 거칠 것 없는 전형적인 Rolling Stones표 음악이다. 보컬, 관악기, 슬라이더 기타, 그리고 타악기가 이렇게 촘촘히 잘 짜여지면서 익사이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Rolling Stones가 왜 록큰롤의 천재인가를 말해준다. Mick Jagger의 호소력 짙은 보컬이 돋보이는 l got the blues는 브라스의 반복적인 멜로디라인이 가히 일품으로 곡 중간 Billy Preston의 하몬드 오르간 연주는 곡을 더욱 맛깔스럽게 만들어 준다. 거장 Ry Cooder가 참여해 멋드러진 슬라이더 기타 연주를 선보인 sister morphine은 일설에 의하면 당시 Mick Jagger와 연인으로 마약에 찌들어 있던 Marianne Faithful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라 한다. 상큼한 컨트리풍의 곡 dead flower는 이 앨범 전체를 지배하던 흑인 블루스 필이 완전히 가신 곡으로 블루스에 거부감을 느끼는 국내 팬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을 듯 한 곡이다. 곡이 경쾌하고 부담이 없다. 마지막 곡 moonlight mile은 Stones팬들에게 she’s rainbow나 2000 light years from home과 함께 이들 최고의 사이키델릭록으로 받드는 곡이다. 특히 후반부의 웅장한 스케일의 현악연주는 아트록과 클레식의 느낌마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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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 고찰] KGB가 돌아온다!

멋진 마지막 멘트!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로 복원을 논하던 고르비는 뭐하고 살까

 

남의 나라와서 대통령 앞에서 자본주의가 공산주의 이겼다 역사 종말 연설하던, 무례하기 짝이 없고 싸가지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던 애비 부쉬, 머리에 든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옐찐, 한술 더뜬 푸틴...... 삽집은 계속된다.

 

 

 

 

[고찰] KGB가 돌아온다!

2004.04.25. 월요일
딴지 해외첩보 수집반

 

노통이 곧 러시아를 방문할 예정이다. 방문취지가 소련의 '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행사' 참석이란다. 60년 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과 맞짱 떠서 이겼으니 한국을 포함해 미, 영, 독, 일, 중 등 국가들이 손수 와서 축하해 달라는 거다. 뭐 불렀으니 축하는 해주겠다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좀 씁쓸하다.

그 내막. 오늘은 그걸 디벼보도록 하겠다.


암살


모스크바 북쪽 클랴지민스키 거리 11번지.

64세의 한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그랜드 체로키 지프를 자신의 아파트 앞에 주차하려는 찰나, 총성이 울린다. 첫 번째 탄환과 두 번째 탄환은 각각 이 남자의 머리와 가슴을 정통으로 관통, 세 번째 탄환은 남자의 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향하던 28세 여자의 머리에 박힌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 여자는 피범벅인 채 병원으로 후송 조치되었으나 다음날 아침 숨진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은 4살난 여자아이 뿐.

영화의 한 장면이냐고? 아니다. 지난 4월 10일 일요일 저녁 7시 반경에 일어난 실제 사건되겠다. 숨진 남자는 전 FSB(러시아 연방보안국, KGB의 후신) 부국장. 숨진 여자는 그의 아내, 4살난 여자아이는 이들 부부의 딸로 밝혀졌다.

사건 발생 후 각 언론들은 대체로 두 가지 살해배경 보도를 내놓았다. 러시아 일간지 <코메르 산트>같은 경우는 "비지니스 상 불거진 개인적 원한관계에 의한 행위"로 살해배경을 설명했다. 살해된 전 FSB 부국장은 은퇴 후, 러시아에서 호황업 중 하나인 경호업계 대부로 자리잡았는데, 마피아와 전직 KGB요원들이 얽혀 서로 이권다툼을 하고 있던 중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 죽은 그가 FSB 부국장 시절 체첸 전쟁에 반대하는 제스쳐를 취하고 당시 옐친 러시아대통령의 심복을 체포했으며, FSB의 수장으로 새로 내정된 사람에 대해 불만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종의 정치적 보복이라는 주장이다. 

그 때 FSB의 수장으로 내정된 사람은 현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레닌그라드의 파이터

유도 7단의 무술 고수, 16년 동안 첩보활동을 한 KGB 요원, 슬라브족 특유의 좁고 각진 얼굴, 상대방을 꿰뚫고 있는 듯한 차가운 눈, 말 수가 적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냉혈적 이미지.

푸틴.

그가 자서전을 통해 털어놓은 레닌그라드에서의 어린 시절 얘기 한 토막.

"어릴적 싸움을 해 콧잔등이 성할 날이 없었다."
 "길거리에서 무자비하게 싸우는 법을 배웠고 학교 진학 후에는
성적이 좋지 못했다."

크렘린 궁에 입성한지 3년 만에 지구 땅 덩어리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국가의 수반으로 고속 승진한 그는, 분명 어린 시절을 관조하듯 이 문구를 썼으리라. 그러나 그에게 있어 '무자비하게 싸우는 법'은 어른이 되어서도 현재진행형이다.

1999년 9월 30일. 이 날은 '96년 1차 체젠전쟁 종결 이후 러시아가 체첸 영토에 처음으로 지상군을 침투시켜 전면전으로 확대되던 날. 이 날 이후 전세는 러시아 쪽으로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러시아군은 1주일쯤 후에 체첸영토의 3분의 1을 장악했으며, 다시 1주일쯤 후엔 전쟁 최대 작전 목표인 고라고르스 마저 손아귀에 넣었다. 1차 체첸전 당시와는 대조적으로 지상군 투입 보름만에 주도권을 확보함으로써 러시아가 전략적 승리를 이미 달성한 것으로 평가받게 된다.

이러한 전쟁을 실질적으로 총지휘한 사람은, 당시 불과 1달째 총리직을 맡고 있던 푸틴이다. 그의 대통령 행을 도운 결정적인 사건인 이 2차 체첸전쟁은 사실 그 해 9월 모스크바 내에서 다섯차례 잇따른 아파트 폭발 테러에서 촉발된 거다.

'99년 9월 13일 모스크바 남부에 위치한 8층 아파트 테러. 이 사건으로 120여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이 폭발물을 설치한 사람이 체첸 테러분자가 아니라 사실은 러시아 FSB의 소행이라는 설이 체첸군 사령관에 의해 제기되었다. 300여명을 사망시킨 연쇄 아파트 폭발 테러는 체첸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하나의 빌미였고, FSB 국장 출신으로 체첸 진압의 대표적 매파였으며 공작정치에 능한 푸틴이 이를 지시했다는 거다. 물론 하나의 가정이다.

만약 이 가정이 맞다면 푸틴은 어쩌면 어린 시절 레닌그라드에서 '무자비하게 싸우는 법'을 익힌 후, 그 획득형질의 일정부분을 체첸 전쟁에 그대로 활용하고 있었던 게다. 언론에선 물론 이러한 면을 '전광석화같은 실천력과 추진력'으로 표현하지만.
 

  체카에서 KGB까지

1917년은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가장 격동적인 한 해였다. 그 해 2월, 300년 간 지속된 로마노프 왕조가 니콜라이 2세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10월에는 왕조의 뒤를 이은 임시정부마저 무산계급의 노동혁명을 부르짖은 볼셰비키에 의해 무너졌다. 러시아에서 '세계최초 사회주의 국가의 태동'이라는 기운이 무르익을 무렵인 이 때, 볼셰비키 혁명의 반대파를 축출하기 위해 그 해 12월에 창설된 비밀경찰이 있었으니, 이게 체카(checha)다. 바로 KGB의 뿌리가 되는 셈.

체카는 레닌암살 미수사건 이후 볼셰비즘의 모든 적을 색출, 자료에 의하면 한달 동안 무려 500여명을 숙청시킨다. 이후 체카는 게페우(GPU, 국가정치보안부), 엔케베데(NKVE, 내무인민위원회), 엔카케베(NKGB, 국가보안인민위원부), 엔게베(NGB, 국가보안부)로 개칭된다. 마치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고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바뀌듯이.

스탈린 집권 시 게페우와 엔케베테는 소련인민들 중 소련정권에 조금이라도 위험을 가할 인물로 판단되면 가차없이 숙청, 당시 루비얀카 형무소 지하실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참혹한 인간도살이 이뤄졌다. 아, 갑자기 밥 딜런 형님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뒈져야 진짜 참 많이 죽었다는 걸 깨달을까" 어쩌구하는 노래가사가 생각날라구 한다.

KGB 본사

아무튼, 그러다가.. KGB(국가보안위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54년이다. 서방에 알려지기로, 80년대에 한정시켜 KGB가 가동할 수 있는 요원은 50만에 이른다.이 중 기갑부대, 항공기, 함정을 소유한 국경경비대가 30만이다.

이 30만이라는 수치는 일본 자위대의 육·해·공군을 합친 것보다 많다. 물론 이 국경경비대는 소련 국방부의 지상군이나 공군과는 별도로 가동되는 군조직이다. 이 점은 'KGB = 소수정예의 비밀경찰' 이라는 편견을 간단하게 유린한다. KGB가 해체될 당시인 91년엔 정식요원이 70만명, 조직을 운영하는 연간예산이 22조 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소련 내에 있는 모든 공공기관서부터 개인단위까지 정보 신경망을 촘촘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KGB는, 미국 CIA까지 그 신경망을 뻗치고 있었다(물론 미국 CIA도 KGB에 첩자를 두고 있었다. 양측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보통 KGB에 잠입한 CIA요원이 발각되었을 때 당장 처형하지 않고 가만이 놔둔다. 왜? 의도적으로 잘못된 역정보를 미국으로 흘려보내는 루트로 최대한 활용하다가 이 활용가치가 없어지는 시점에서 제거하면 되기 때문이다. KGB에 잠입한 CIA요원이 전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 전향의지의 진정성은 어느 만큼 KGB가 몰랐던 중요한 정보를 털어놓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진정성마저 집요하게 의문시되며 양측간 정보전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속고 속이고.. 이 바닥이 참 골치 아프다.

74년 동안이나 소련 숙청의 역사를 대변하고, 미국 CIA와 첩보전쟁을 벌이며 소련의 강성이미지를 튜닝해내던 집단 KGB. 그런 KGB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 소련변혁의 구심점 고르바쵸프의 등장으로 KGB는 닑은 냉전 전유물 이상의 존재의미를 찾지 못한 거다. 막바지에 이르러 고르비를 크림반도에 연금시키면서까지 옛 소련공산당의 중흥을 꾀한 쿠데타가 실패하게 됨으로서, 공포정치의 상징 KGB는 옐친에 의해 91년 말 FSB(연방보안국)과 SVR(해외정보부)로 해체분리된다.
 

다시 푸틴, 그리고 KGB의 부활

91년 당시 KGB와 군바리가 일으킨 쿠테타의 현장.

몸소 탱크 위에 올라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자"고 기염을 토해낸 자 있었으니 옐친이다. 그의 이 행동 하나는 국내외 여론을 반쿠데타로 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국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났다. 

그런데 8년 후.

일흔에 가까운 나이, 툭하면 재발하는 심장병, 술주정뱅이에다 끊임없는 실언, 친척의 부패 스캔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제 정책의 실패 등으로 옐친은 개혁주의자라는 이름의 껍데기만을 남긴다.

이 때 권력의 진공상태를 간파하고 러시아 국민들의 욕망을 스캔한 뒤 그 진공상태를 차곡차곡 자신의 힘으로 냉혹하게 채운 사람은, 푸틴이었다. 옐친의 불안한 퇴임 후를 보장하는 대신 후계자로 낙점 받았고, 러시아 민족주의를 자극해 체첸 전쟁을 국민통합에 교묘히 활용하였으며, 이 때 보여준 본인의 강성이미지를 러시아의 강성이미지로 버전업 시키는 능력..

대통령 행정실 부실장에서 FSB국장으로, 총리로, 그리고 대통령 권한 대행을 거쳐 마침내 대통령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년 남짓. 이 가파른 출세가도의 탄력인지 대통령이 되어서도 강성 드라이브는 계속 된다. 강력한 러시아를 만들기 위한 이런 노력은 냉전시대의 구소련으로 돌아가려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결국 국민들은 푸틴의 이런 부분에 기인해, 그를 제정러시아 시대 힘의 상징 표트르 대제의 현대적 출현이라고까지 평가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입문을 도운 친옐친계를 계획적으로 토사구팽시키고, KGB시절 충성관계에 있던, 자기 말마따나 "부패는 조또 모르는" KGB 출신으로 친정체제를 구축한다.

그 정도가 어느 만큼인가 하면, 한 때 러시아란 나라는 대통령, 국방장관, 내부장관이 KGB출신으로 포진되었던 나라였다. 뿐만 아니라 연방 이민국, 국가 지원국, 천연자원 감독국, 군사기술 협력국, 마약류 유통 감독국 등 힘께나 쓸만한 기관의 오야붕이 전부 KGB 출신이었다. 작년엔 아예 공식적으로 KGB의 부활을 요지로 한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나라 전체를 무슨 비밀첩보국 만들 일 있나?
 

스탈린의 추억

그런데 더 웃긴 건 러시아 국민들의 반응이다. 단순히 푸틴에 대한 지지율이 70%를 웃도는 - 대통령 지지율 70%. 그건 그럴 수 있다. 모라토리움을 선언할 만큼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를 단 시간 내 고성장으로 반전시키고, '초강대국 국민'이라는 이들의 자존감을 복원시켜 놨으니까 - 차원 이상의 '강했던 소련에 대한 향수'같은 것이 러시아 국민들의 정서에 서려있다.

서방언론의 부추김과 옐친의 권력욕이 합쳐지면서 '소련해체'가 이뤄졌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제기되고, 푸슈킨 광장엔 아직도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련국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91년 쿠테타 실패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쿠테타 저지 기념 집회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크렘린궁에서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던 소련 국가가 푸틴의 지시로 다시 울리기 시작했고,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군사 퍼레이드가 10년 만에 부활했으며..

KGB 부활의 분위기도 만만찮다. KGB의 가장 잔인한 우두머리였으며 소련공산당 서기장까지 지낸 안드로포프의 90회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 이걸 푸틴이 공식적으로 연 것이다.

'부다페스트의 도살자'라고 불려지기도 하는 이 양반은, 헝가리의 반소항쟁 때 헝가리인 5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혈진압의 총책임자다. 우리로선 잊을 수 없는 사건 하나. '83년 269명을 태운 KAL 007기가 소련에 의해 격추되었을 때 이 양반이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더랬다.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도 KGB 열풍이 일기 시작했는데, 영화에서부터 TV드라마, 베스트셀러 소설, 심지어 테마 레스토랑까지, KGB가 하나의 문화코드로 떠오를 정도다. 푸틴이 KGB가 되는데 영감을 줬던 소설 <방패와 칼>은 영화화되어 절찬리에 상영되었다.

지금 러시아 국민들은 한때 강대했던 제국과 그 통치자 스탈린에 대한 향수를 앓고 있다. 그를 추모하는 거리가 조성되고 그의 동상이 재건된다. 참전용사들은 그가 지휘한 과거의 전쟁들을 자랑스레 읊조리며, 히틀러를 상대로 항복을 받아낸 지도자로 그를 새롭게 칭송한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스탈린은 레닌에 이어 '20세기 가장 위대한 러시아인' 2위를 차지했다.

러시아 밖에선 보인다. 그들은 현재의 상실감을, 그렇게 과거에 대한 왜곡된 기억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게.
 



"박정희 같은 사람이 한 번 더 나와서 정치판을 확 갈아엎어야 할텐데."
"그 분 때문에 우리가 이 만큼이라도 먹고 살게 된 거 아냐"

요즘도 하는 얘기들이다. 이런 식으로 박정희를 되살려낸다. IMF와 경제불황의 감성적 해법으로.

인터넷 경매에서 박통의 소장품들이 관심을 끌고, 생전에 어느 잔치에서 노래 부른 장면이 네티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각종 여론 조사에서 늘 압도적으로 1등 먹으며, 신문사들은 또 그들대로 돌아가며 신드롬을 조장하고, 좃선은 아예 한 면을 할애해 전기를 내보내고..

부끄럽다.

바로 우리가 러시아인들이다...

딴지 해외첩보 수집반
술탄(sultan@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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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보러 가는 거야?

음... 최근 자동차 트렌드를 소개한다.

 

 

차 보러 가는 거야? 여자 보러 가는 거야?
2005년 서울 모터쇼 탐방기
  김동희(collin) 기자
자동차 관련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니 모터쇼는 가보면 좋을 만한 행사입니다. 회사 이 곳 저 곳에서 간다는 사람도 많았고 그 중 여러 명이 먼저 다녀온 후 모터쇼 사진들을 공유해 놓았습니다. 아침에 회사에 가면 자신이 찍은 모터쇼 사진을 공유해 놓았다는 내용의 메일이 서너 개쯤 되어 모터쇼에 가기 전 본의 아니게 사진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공유 폴더의 사진에는 어김없이 레이싱 걸들이 들어 있고 심지어 가슴만 클로즈업해서 찍은 사진, 반사되는 바닥에 비친 다리만 찍은 사진까지 보기 민망할 사진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사무실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전날 갔다 온 사람의 사진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진들을 다 모으느라 분주합니다. 아무도 차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제 자리에서 공유된 사진을 보고 있는데 부장님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합니다.

“아니 저 미인은 누구야? 멋진데.”
“A씨가 모터쇼 가서 찍어온 사진이에요.”
“다들 차보러 가라고 출장 보내줬더니만 여자만 보고 오는구먼.”

동기 한 명은 모터쇼에 다녀오더니 난리입니다.

“눈만 높아져서 왔어요. 처음에는 사진도 같이 못 찍을 것 같더니 그 다음에는 좀 뻣뻣하게 옆에서 찍고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찍게 되더라고요.”

그의 얼굴에서도 그 전날의 즐거움이 남아 있습니다.

▲ 레이싱 걸들은 포즈를 취해주느라 바쁘다.
ⓒ2005 김동희
3년 전 서울에서 하는 모터쇼를 가봤는데 그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아직 디지털 카메라가 이렇게 많이 보급되어 있지도 않았고 레이싱 걸에 대한 인기도 그다지 높지 않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뀐 것을 알았습니다.

차 앞에 누가 서 있느냐에 따라 사람이 몰립니다. 차도 중요하지만 여자의 미모가 더 중요합니다. 예쁘고 사진을 찍을 때 포즈를 잘 취해주는 여자가 서 있으면 그곳에서는 차를 구경할 시간도 없습니다. 모두들 그 여자 분과 사진을 찍기 위해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서 있을 뿐입니다.

멀리서 레이싱 걸과 차를 함께 찍으려고 해도 여자인 저에게는 별로 시선을 주지 않습니다. 사실 많은 남자들이 목 빼고 기다리는데 여자인 제가 사진 찍으려고 하는 게 어떤 곳에서는 약간 어색하기도 했습니다.

▲ 남자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레이싱 걸
ⓒ2005 김동희
또 왜 남자 모델은 없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아직도 남자들이 차를 사는데 더 주도적이긴 하지만 강한 이미지의 SUV차량이나 멋진 스포츠카에 멋진 남자 모델이 서 있다면 왠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제 눈에 띈 남자 모델은 단 한 명이었습니다. 그나마 눈에 띄지 않았다면 있는지조차 모를 뻔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차 닦는 아르바이트생인 줄 알았으니까요.

▲ 처음 본 남자 모델. 이곳에서는 여자와 남자가 함께 서있었다.
ⓒ2005 김동희
이렇게 몇 시간을 돌아다니다 보면 기운이 빠집니다.

‘도대체 무얼 보러 온 건가?’
‘내가 차에 대해 얻은 정보는 무엇인가?’

사실 이번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차의 보닛 한 번 열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차 안에서 제가 담당하는 부분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확인한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 전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메르세데스 벤츠의 SLR McLaren
ⓒ2005 김동희

▲ 메르세데스 벤츠의 CLS 350. 자동차 색과 디스플레이가 잘 어울린 차.
ⓒ2005 김동희
왠지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듯한 모터쇼. 차를 소개하기 위한 자리인지 레이싱 걸을 소개하기 위한 자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우스운 행사가 돼버린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차가 중심에 선 모터쇼를 보고 싶습니다.
2005/05/08 오전 12:41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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