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4/09/26

1946년 오늘(9.27) 1차 IMF총회 워싱턴에서 개최

1946년 제1차 국제통화기금(IMF)가 워싱턴에서 개최됐다.

 

예전에는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이름이나 들어봤던  IMF, IBRD, GATT등등 이지만 외환위기 이후엔 이런 국제기관이나 기구들이 한층 가깝게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이런 것도 다 우리나라가 OECD회원국에 걸맞는 선진국이라 그런건가 싶다.

 

IMF가 우리 삶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지 말해주는 이야기들이 몇가지 있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애들이 울면 IMF가 잡아간다고 겁주는 엄마들이 있었을 정도이며 자랑스러운 신지식인 심형래가 감독하고 영구아트무비에서 제작한 한국 SF의 신기원을 연 작품 '용가리'에서 우리의 호프 용개뤼(영화를 보면 용개뤼로 발음 난다)가 불을 뿜으며 때려부수는 건물을 보면 큼지막하게 IMF라고 간판을 달고 있기까지 하다--;; 심지어 톰 크루즈 주연의  Mission Impossible에서 톰 크루즈를 비롯한 비밀 공작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비밀 기관의 이름도 IMF다.

 

하여튼 간에 IMF는 브래턴 우즈 체제의 산물이다. 1944년 이차세계대전의 승리가 눈 앞에 보이게 되자 케인즈등의 주창에 의해 연합국측 44개국 대표가 미국 브래턴 우즈에 모여 기축통화로서의 은( silver)문제, 국제결제은행 문제들을 협의하다가 협정을 맺고 국제통화기금(IMF)와 세계은행(World Bank) 설치를 합의했다. 뒤이어 GATT와 국제 금융공사 또한 브래턴 우즈 협정을 통해 설립되었다.

 

사실 케인즈가 꿈꾼 IMF 는 오늘날 미국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IMF 와는 좀 달랐다. 물론 케인즈가 꿈꾼데로 그 당시에 IMF를 만든 것도 아니지만...하여튼 케인즈는 브래턴 우즈 회의가 끝나고 4개월이 지나서 사망하는데 브래턴 우즈 회의에서 케인즈는 마지막 정열을 다  쏟았다고 전해진다. 1930년대 대공황을 비롯한 경제적 혼란이 결국 세계대전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경제학자 뿐 아니라 정치가들도 그때는 깨달았고 케인즈는 국제금융청산연합을 제안했고 그것의 결과물이 브래턴우즈 체제인것이다.

 

자본주의의 영속을 위해서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냐는 입장에서 만든 것인데...케인즈는 브래턴 우즈 체제 내에서 미국의 입김을 최소화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고 한다. 물론 대영제국의 영광을 보존하고자 하는 속셈도 있었겠지만...그래서 IMF도 워싱턴이 아닌 딴 곳에 설치하고자 그렇게 애를 썼다고 하건만 이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는 그 즈음에 이미 미국은 슈퍼파워로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케인즈에 비해 네임밸류에서 한 참 떨어지는 미국의 경제학자 화이트가 내어놓은 안을 중심으로 브래턴 우즈 체제는 성립되었다.케인즈는 외환결제의 중심기관을 통한 국제통화를 창출하여 미국과 영국이 함께 관리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화이트는 미국이 주축이 되어 기관이 아닌 기금을 설립하여 달러화를 중심으로 미국이 관리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외에 케인즈의 초점은 외환시세의 자유화였는데 반해 화이트안은 고정환율 제도를 중심으로 한 외환시세의 안정에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케인즈고 화이트고 간에..이 체제는 겨우 이십몇년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결국 60년대 이후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 증대와 화폐발행증가로 인해 유동성 가치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미국 재무성은 금거래를 막기 위해 (브래턴 우즈체제의 핵심적 특징의 하나는 달러의 금태환이다.(당시엔 1온스당 35$, 한마디로 금들고 오면 달러로 바꿔주고 달러 들고 가면 금으로 바꿔준다는 것)금시장 개입, 한시적인 이중 금가격제(중앙은행 거래가와 실제 시장 거래가를 이중으로 맞춘것)을 적용한 끝에 마침내 전 세계를 상대로 배를 째버렸다. 

 

1970년 71년 2년간 미국의 국제수지는 대폭으로 확대됐고 이에 따라 전세계에 달러공급은 과잉 됏으며 금부족 현상이 당연하게 야기 됐다. 금가격 폭등, 달러화의 신뢰도 붕괴에 시달린 닉슨은 1971년 8월 금태환 정지 명령을 내렸고 브래튼 우즈 체제는 붕괴하게 된 것이고 킹스턴 체제가 출범하게 되었다. 만일 다른 나라 통화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국제적 결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 바로 그 나라는 작살이 났을 것이며 IMF관리 체제에 돌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미국을 건드릴 수 있으랴? 달러를 국제통화수단으로 쓰기로 암묵적으로 약속한 바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전세계가 벌벌 떨면서 미국 재무성 국채를 매입해야 할 지경이니...똥배짱 부리는  빚쟁이의 대표적 예가 아닐수 없는 것이다.

 

IMF가 자유무역 자체도 똑바로 뒷받침 하지 못하고 미국 재무성 출장소 정도의 역할 밖에 못하고 있는 지경이지만 전세계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 무역과 투자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브래턴 우즈 시스템의 정신은 대강 지금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이 경제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나라를 찾기는 힘들다(북한 정도가 아마 자유롭겠지--;;) 그러나 이 시스템 그리고 이 시스템이 금과 옥조처럼 받드는 비교우위라 지상 최고의 법칙 하에서 세계 경제는 점점 더 불평등하게 고착되고 있다.(구구한 설명을 여기서 할 필요는 없지 싶다) 브래턴 우즈 시스템이 낳은 세 자녀 IMF, World Bank, WTO가 강요하는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는 가난한 나라는 더욱 가난하게, 지구환경은 더욱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몰아 붙이고 있다.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스티글리츠 같은 미국 주류경제학자들도 인정하지 않나? 정말 이대로 가면 다 망한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974년 오늘(9.26)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결성

1974년 9월 26 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결성됐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던 카톨릭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 무효를 선언하는 양심선언 이후 구속되자 그해 9월 명동성당에서 김승훈, 함세웅, 김병상등 300여명의 젊은 사제들이 모여 정의구현 사제단을 결성한 것이다.

 

한국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기독교 성직자들 특히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 빚진바가 많다. 사제단은 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다. 김지하 구명 운동, 인혁당 진상규명운동등에 나서며 때때로 로마교황청이라는 우산을 쓰면서 박정희 독재정권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80년대 들어선 은폐된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히는데 애썼으며 특히 87년에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축소조작 은폐된 것을 폭로하여 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독재정권에 맞서 십자가를 들고 조용히 서 계시던  사제들과 수녀들의 모습을 보고선 무신론자들이라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가슴이 찡해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1972년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해방신학'을 출간한 이래 라틴아메리카의 신부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프락시스'를 위해 때로는 기관총을 들기도 했다. 프레이리의 교육학과 체 게바라의 소총 그리고 신부들의 해방신학이 남미에서는 해방을 위한 세로운 삼위일체로 불릴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정의구현 사제단은 좀 모자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싶다. 그러나 대한민국 땅에서 지난 삼십년 동안 어느 조직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꺾이지 않은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한 목소리를 내왔겠나?

 

물론 정의구현 사제단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은 카톨릭 교회 특유의 수직적 구조를 혁파해내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못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신부들이 신학적으로 그들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증명해냈던 반면에 한국의 신부들은 학문적이나 철학적 토대를 쌓아내지 못했다. 단지 정의감 만으로 수직적이고 보수적인 카톨릭 교회의 구조와 기득권에 구멍을 낼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신교와 유기적 연결 고리를 가지지 못했다. 물론 권호경등 실천, 노동사목을 하는 개신교 목사, 전도사들과 카톨릭 노동사목이 연대활동들을 펼치기는 했지만 장공 김재준으로부터 시작된 기장(기독교 장로회)의 학문적 실천적 성과들과 상호 침투하지 못한 것 또한 큰 문제점으로 지적 될 수 있을 것이다.(이것은 기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장공 김재준 이래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등 실천과 이론을 겸비한 개신교 목사들이나 한신을 중심으로한 개신교계의 실천과 정의구현사제단은 그냥 별개로 흘러온게 아닌가 싶다는거다.

 

그러나 이런 저런 췌언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정의구현 사제단은 한국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참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보다 적적한 표현이 있을까) 가장 필요할 때 정의를 구현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02년부터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대표를 맡고 있는 부안천주교회 문규현 신부와 형인 문정현 신부는 부안 방폐장 반대 싸움에서 항상 앞자리에 서있었다. 지금 용산 미군들이 옮겨간다는 평택에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며 미군기지를 거부하는 평택 민중들과 두 문 신부는 항상 함께 하고 있다. 노조와 농민들과 신부님들이 손을 잡고 평화를 이야기 하는 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의 이른바 메이저 시민 단체들이 현정권에 대해 쓴소리를 하기를 주저하고 자신들 머릿속으로 만든 거대 개혁 전선에 얽매여 있을 때 과감하게 파병 강행이면 정권 퇴진이라며 현 정권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 민중운동 진영에 힘을 실어준 단체 역시 정의구현사제단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얼마전 국가보안법 존치 입장을 밝혔을 때 정의구현 사제단 평신부께서 자신의 신분을 무릎쓰고 추기경에게 정면으로 맞서 쓴소리를 내어놓았다. 이런 실천들 앞에 창백한 이론들은 때론 설자리를 잃고 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추석과 우리 집 가사분담

내일 지나 모레면 서울에 다시 올라가게 될테니 이번 귀향 일정도 반이 넘어서고 있다. 그 동안 못된 아들로 지낸 인생인지라 집에만 오면 분위기 싸해지기 십상이었는데 이번 추석은 지금까진 분위기 좋다^^ (설마 나만의 착각은 아니겠지) 어제 새벽에 친구들이랑 술 먹고 들어오다가 엄마한테 택시비 들고 아파트 입구로 나오라고 전화한 것 빼곤 --;; 우리 엄마 아부지야 내 기사들 꼼꼼히 다 읽고 모니터링까지 해 줄 뿐더러 내 블로그의 '오늘은' 밀리면 그것 걱정도 해줄 정도의 정치적 의식을 지닌 분들 아닌가^^ 이런 걸 보면 난 참 복받은 넘이다 :)

 

추석이면 여기저기서 가사노동의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만 우리집은 좀 다르다. 사실 우린 제사도 안지내는데다가 할머니 돌아가신 이후엔 추석이건 설이건 거의 음식도 안 한다. 여기저기서 얻어오는 것만해도 냉장실이 그득한 나머지 냉동실까지 채우고 서울 오는 내 손에도 가볍지 않은 보따리가 들릴 정도다. 그래도 물론  일거리는 꽤 있다. 말 안듣는 아들 거둬 먹일일이나 할아부지 할머니 묘소 돌볼일, 고모네 방문할 일. 물론 엄마도 청춘 시절(내가 초등학교 다닐적 정도까지?)에는 명절이면 집안일에 허덕거렸었지만...

 

언제 부턴지 모르겠지만 (아마 제대 직후부터가 아닌가 싶다) 부산 집에 오면 음식이나 각종 집안 일들도 꽤 하는 편이다. (집안일 맨날 하는 엄마, 그리고 엄마 학교 다닐때면 청소를 도맡아 하고 반찬은 아니더라도 밥 앉히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게 생각하는 아부지만 하겠냐만.. 이런면을 보면 우리집 가사분담은 어디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다. 정말 자랑스럽다!! ) 그닥 어렵지 않은 별식을 만든다던가(이번엔 갈비 양념에 재워서 구웠다, 난 음식할때 고무장갑이나 비닐 장갑 끼는거 싫어하는 편인데 갈비 재우고 나니 한동안 손에서 다진 마늘과 간장 참기름 물엿이 섞인 오묘한 맛있는 냄새가 오래 가더라 배고프면 손가락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엄마, 아부지, 동생 옷들 다림질 한다던가 등등

 

첫 째 내가 이런 일들을 별로 안 힘들어 하고 둘 째 일년에 몇번이라고 이럴 때 아니면 내가 언제 식구들 일 돕겠나 싶어서 즐겁게 하려고 애 쓰는 편인데...이런 일 하는 것보다 다른 집 아들처럼 두툼한 돈 봉투 안겨드려야 하는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근데 어쩌랴~ 앞으로도 그게 쉽진 않을 것 같으니...--;;

 

엄마, 아버지 미안해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삼당의원 양대노총 위원장 연쇄 인터뷰

정말 오랜만에 이 디렉토리에 글 써보네^^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있겠으며 자식은 다 똑같은 자식일진데 블로그에서 너무 편애를 하지 않았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사실상 아무꺼나나 취재뒷다마 혹은 라 마시께따에다가 재밌고 맘 편하게 글 쓸려고 만든건데 이건 '오늘은' 때문에 너무 허덕거리니 나 원 참, 참 나 원, 혹은 원 나 참.

 

하여튼 골때리는 열린우리당 인권위원장 이후로 여기다간 처음인데..그 후에 무슨 기사들을 썼더라? 이경해 열사 일주기 집회 스케치 기사 썼고...연속 인터뷰 했고 뭐 그 정도지 싶다. 이경해 열사 일주기 때는 너무 힘들었다. 비가 많이 오는데다가 사진 찍으러 앞뒤로 뛰어다니느라 그 비 흠뻑 맞았고..그나마 인도네시아 출신 비아 깜뻬시냐 여성 활동가랑 인터뷰 한게 기억에 남네...

 

그 집회  끝나고 며칠 후 노동부에서 대형사고 하나 터뜨렸다. 파견법, 기간제법 개악안 발표~ 두둥

 

그 발표 이후에 연속 인터뷰 기획안을 잡았다. 사실 그 때는 4인 연속 인터뷰였는데 단병호 의원이 한노총 이용득 위원장도 꼭 하라고 권유해서(초기 단계에 이용득 위원장도 포함시킬까 했다가 약 10초간 고민한 후 접었었는데--;;) 5인 연속 인터뷰로 바뀌었다.

 

시간도 촉박한데다가 일이십분 인터뷰 하는 것도 아닌지라 스케쥴 잡는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약간의 뻥을 적절히 활용한 덕에 하여튼 열우 이목희, 한나라 배일도, 민주노동 단병호, 민노총 이수호, 한노총 이용득이라는 라인업으로 연속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인터뷰 진행할 때는 그냥 정신없이 했는데 돌이켜 보니 너무 빡셌다ㅠㅠ 스케줄 잡기,인터뷰이의 최근 발언들과 행적 체크하며 질문지 작성하기, 한자락 혹은 두자락씩 깔고 인터뷰 하기(비위 맞추기와 살살 약올리기를 병행하는 괴로움이란...), 돌아와서 테잎 확인 하며 빠진 부분 메우기, 초벌 원고 가지고 말 안되는 부분 고치며 원고 정리하기...흑흑 이걸 하루에 나 혼자 다 한다는건 참 힘들더라.

 

다음에는 여유를 가지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골백번도 더 들었다.

 

참 이 다섯명 가운데 정식 공문을 보내 인터뷰 요청 하라고 한 측은 두군데다. 이목희 의원실이랑 민노총 교선실--;;

 

배일도 아자씨 인터뷰 할때는 그와 나 사이의 과거의 끈끈한 인연을 상기시켜 줄까 하다가 말았는데^^(그 인연을 공유하고 있는 모 기자는 한나라당사에서 배일도 의원 만났을때 그 기억을 상기시켜줬다더라, 엄청 반가와 했다나 머라나ㅋㅋ) 인터뷰 끝나고 나니까 자신의 명저(?) '공존의 꿈'을 선물로 주더라.

 

연쇄 인터뷰 동안 나름대로 특종도 몇가지 있었다. 이목희 의원이 이 법안의 문제점들에 대해 최초로 공식적으로 인정을 했으며 민노총 각급 조직의 투쟁체 전환이나 구체적 로드맵이 공개된것도 이 인터뷰가 최초다. 게다가 한국노총으 정확한 입장도 우리가 최초로 밝혔고...

 

근데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못했다--;; 이 인터뷰 받아서 기사 쓰는 넘들 하나도 없더라ㅠㅠ 남들 보라고 기사 쓰는건 아니지만(아니지 남들 보라고 쓰는거 맞지 나 혼자 볼려면 왜 쓰나?) 이럴 땐 참 맥 빠진다.

 

첨언: 보자마자 나한테 턱하니 말 놓은 사람은 단병호 의원이 유일하다. 근데 기분이 하나도 안 나쁘더라. 딴 사람들 인터뷰할 땐 잔머리 굴리면서 바둑두는 기분으로 포석 깔면서 질문했는데 단의원 인터뷰 할 땐 그냥 궁금한 거 솔직하게 묻고 답변 들었다. 제일 편한 인터뷰 아니었나 싶다.  이수호 위원장 인터뷰할땐 좀 공세적으로 나가볼까도 싶었는데 그 양반 얼굴도 말이 아닌데다가 나름의 고충을 듣곤 마음이 약해졌더랬다. 이용득 위원장은 젤 화끈하더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1년 오늘(9.25)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영면

2001년 9월 25일 항일투사이자 혁명가인면서 또한 소설가인 김학철이 8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20세기 한반도에서 태어난 인물 가운데. 그리고 요절하지 않고 천수를 누린 인물가운데 김학철(본명 홍성걸) 보다 더 당당한 삶을 살아낸 사람을 찾기는 흔치 않을 것이다. 김학철의 평생 이력을 간략하게 짚어보겠다.

 

원산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남-보성고보 재학중 중국으로 망명- 약산 김원봉의 휘하로 상해에서 의열단 활동-중국공산당 가입-황포 군관학교 입학- 황포군관학교 졸업후 국민당군 장교- 팔로군 조선의용대 군관 활동- 태항산 전투에 분대장으로 참가 부상 입고 일본군에 포로로 잡힘- 나가사키 형무소 투옥, 다리 절단- 해방과 더불어 출옥, 소설가로 생활 시작- 조선정판사 사건 이후 월북-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착- 인민공사, 대약진 운동 비판하는 소설 출간으로 투옥- 문화혁명기에 다시 십년간 투옥, 당적 박탈- 모택동 사망 이후 당권회복

 

정률성과 정설송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http://blog.jinbo.net/Profintern/?cid=1&pid=16) 김학철을 약간 언급한 적 이 있었다. 그 때 꼭 독립적으로 다시 다루겠다고 약속했는데 오늘 기회가 왔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책을 하나라도 꼭 읽기를 권하고 싶다. 한 권만 권해준자면 (최후의 분대장, 문학과 지성사 간)

 

김학철은 무슨 뛰어난 혁명이론을 내어놓은 사람도 아니고 조직 활동에서 거대한 성과를 거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평생을 인민과 역사 그리고 자신 앞에 당당하게 살아간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해방 이후 한 때  혁명 영웅 칭호를 받았건만 역시 항일, 중국공산당 동지 출신으로 이북의 최초 공군참모총장이던 매제는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당시 처형 당하고 여동생 역시 노동수용소 생활... 그 자신은 띵링의 사사를 받을 정도고 중국 건국 주역들과 허물없는 사이였을 정도지만 마오의 극좌적 노선과 일인지배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이차에 걸쳐 투옥당하고 인민재판을 받았다. 그 재판을 회고하는 글을 읽어보면 눈물이 날 정도다. 인민학습당을 가득 채운 수천명의 군중 앞에서 친일분자, 우익분자로 비판받으면서 맑스, 레닌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당당하게 토해내며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다리 하나 없는 노혁명가의 모습을 보고 누구의 눈과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있으랴?

 

남긴 글을 보면 이 노혁명가 조차도 가슴 아린 적이 한 번 있었다고 한다. 반당분자로 몰리고 당적을 박탈당했을 때 인민학교를 다니던 외아들이 학교에 갔다가 소년단의 상징인 스카프를 뺐기고 울면서 돌아왔다고 한다. 반동의 자식은 소년단에 가입할 자격이 없다고 ㅠㅠ

 

김학철은 곧은 필봉으로 석정 윤세주, 정률성, 호일화(이상조), 김학무를 비롯한 조선의용대를 우리의 역사로 남겨주었다. 그렇다고 김학철의 글들의 재미없고 딱딱한건 절대 아니다. 시인 고은은 김학철을 "벽초 홍명희 이래로 우리 민족어를 진정으로 계승했으며 가장 신명나는 문학을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 한가지를 언급하자면 김학철이 우리에게 소개되는데 가장 공헌을 한 것은 '노태우 정권'이다 --;; 1989년 1회 세계한민족 체육대회에 공식 초청 받음으로 43년 만에 서울 땅을 밟았다. 아마 그 당시의 북방정책등과 관련이 있는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김학철은 94년  KBS 해외동포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이런거 보면 노태우나 김영삼 같은 대통령들도 가끔 미친척 하고 기특한 짓을 하긴 했다)

 

내 한 때 김학철을 너무나 존경(혹은 흠모)한 나머지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한 적이 있었는데 포기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어릴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나서 김학철의 어머니께서 '너는 아버지도 없으니 술 담배 하면 후레자식이라고 욕먹는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김학철은 ' 내가 항일운동, 탄압받는 작가 생활을 해서 불효를 할 지언정 어머니의 저 말은 지켜야 겠다'고 생각해서 죽을 때 까지 술,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았단다. 심지어 항일 무장 투쟁기간에도--;;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김학철 작사 류신 작곡 조선의용대 추도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1년 오늘(9.24) 에드워드 사이드 영면

2001년 9월 24일 팔레스타인 출신 비교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백혈병으로 투병 끝에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영국의 식민지이던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집중 이주, 팔레스타인 인들과 갈등을 일으키던 1947년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 카이로로 이주했다. 상류층이었던 부모 덕택에 십대후반에 미국으로 이주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에서 공부했으며 그 이후 평생을 미국 시민권자로 살았다. 몇 년전에 출간된 에드워드 사이드의 자서전 제목은  Out of place 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카이로에서 성장하면서 부유한 부모 덕택에 탈아랍식 정통 영국 식민 교육을 받은데다가 십대후반부터는 미국 동부에서 교육을 받은 사이드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팔레스타인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그 정체성이 바로 1978년 오리엔털리즘의 출간으로 연결된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20세기 후반 문화,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중에 한 명이다. 그의 책 '오리엔털리즘'과 그 개념은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다. 오리엔털리즘자체에 대한 설명이나 언급은 다음 기회로 돌리겠다. 그러나 오리엔털리즘이 얼마나 대중화 된 개념이냐면 심지어" 올 가을의 패션트렌드는 과감한 오리엔털리즘 풍의 실버체인과 가죽 재킷의 미스매치 불라불라" 하는 식으로 여성지의 패션란에서도 언급될 정도다. 그리고 '오리엔털리즘' 한국어 번역판은 영남대 박홍규 교수의 성실한 작업에 힘입어 참으로 괜찮은 역서중의 하나다.오리엔털리즘의 출간 이후,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서 에드워드 사이드는 학문으로서만이 아니라 항상 실천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하워드 진, 노암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의 삼대 양심(?)적 지식인으로 꼽힐 정도였으니..

 

참 지난 2000년 에드워드 사이드는 심각하다면 심각할 수 있는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단체 관광객의 일원으로 레바논-이스라엘 접경지역을 돌아보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스라엘 경비 초소에 돌팔매질을 했고 그 광경이 이스라엘 측 CCTV에 찍혔던 것이다. 당연히 이스라엘 측은 대대적으로 그 장면을 선전했고 팔레스타인 인들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행위라고 입에 게거품들을 물었다.

당시 사이드는 사진에 찍힌 사람이 자신임을 인정했으며 '레바논 접경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의 점령이 끝난 것을 기뻐한 나머지 환희의 제츠처로서 투석을 했다'며 또한 '철책선에 도착하기전 과거 점령지에서 발생한 인권유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보았다. 지난 35년간 정의와 평화에 반해 행해졌던 만행이 자신이 던진 돌의 무게에 비해 너무 무겁다'며 기회가 생기면 또 돌을 던지겠노라고--;; 당당히 밝혔다.

당시 미 주류 유태계에서는 난리가 났고 컬럼비아 대학에도 압력이 갔다고 한다. 그러나 석좌교수 에드워드 사이드의 무게 또한 만만치 않았던 법 컬럼비아에서는 그 압력들에 대해 가비얍게 일축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회가 닿으면 '평행과 역설'이라는 책을 일독해보길 권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대표적 유태계 음악인 다니엘 바렌보임의 대화를 묶어낸 책이다. 바렌보임은 나찌의 상징이자 이스라엘에서는 터부시 되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바그너 작)을 01년 이스라엘에서 최초로 연주해서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역시 리하르트 바그너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갑론을박을 벌이는데 그 대화들이 너무나 아름답다. 물론 오슬로 협정(지난 9월 13일자 오늘은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2&pid=49 참고)을 두고선 날 선 대화들이 오고가기도 하더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