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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4/09/23

1937년 오늘(9.23) 장개석, 국공합작 및 중국공산당 합법화 선언

1937년 9월 23일 장개석이 2차 국공합작과 공산당 합법화를 선언했다. 2만 5천리 대장정을 겨우 마치고 연안에서 허덕이고 있던 중국공산당으로선 항일전선에 복무하고 또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장개석이 왜 갑자기 국공합작을 선언했을까? 중국공산당의 영웅적 투쟁에 감복해서? 아니면 항일의 대의 앞에 뭉쳐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어서? 둘다 아니고 실은 장학량이라는 인물이 일으킨 서안사변 때문이다. 삼년전에 101세를 일기로 하와이에서 영면한 장학량은 봉천 군벌 장작림의 아들이다. 흔히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을 쓰는데 장학량이야 말로 은수저와 은젓가락을 한꺼번에 물고 태어난 인물이다. 동북지역을 장악한 군벌 아들로 태어난 덕택에 아버지가 죽자마자 동북지역과 수십만의 대군을 한손에 넣을 수 있었다.


주색잡기와 아편으로 소일하던 장학량은 아버지가 죽고 나선 백팔십도 달라졌다고 한다. 일본 육참본부 대본영의 공작으로 만주철도에서 아버지가 폭사하자 장하량은 일본과 가까웠던 아버지와 달리 항일의지에 불타게 된다. 그래서 자기 휘하 병력과 영토를 그대로 국민당에 헌납하고 국민당군 동북 사령관의 자리에 취임했다. 그런데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는 일본하고 싸우는데는 별 관심없고 현상유지 하는 수준에 그치며 십여년동안 공산당 때려잡는 일에만 열중하는게 아닌가? 열받은 장학량은 장개석을 서안으로 불러 잔치를 벌이다가 그냥 감금해버렸다. 공산당의 합법화와 국공합작을 안 받아 들이면 장개석도 죽이고 자기도 같이 죽을 것이며 받아들이면 그대로 풀어서 총통직과 총사령관직을 계속 맡도로 하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결국 장개석은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였다. 장개석도 그나마 대인의 풍모가 엿보이는 것이 서안을 빠져나온 후에도 자기 말을 뒤짚지 않고 그대로 실행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홍군(중국공산당군)은 국민당군 팔로군으로 재편된다. 팔로군 팔로군 말은 많이 들어봤겠지만 정확한 명칭은 국민당군 팔로군이다.( 전에 정률성 이야기를 하면서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1&pid=15 팔로군 행진곡을 한 번 언급한적이 있다. 다시 찾아가보던지 아니면 기억해보라. )


하여튼 국공합작을 통해 중국인민은 항일전선에서 일치되어 싸우게 된다. 참 서안사변이 잠잠해진 후 장개석은 장학량을 재판에 회부하고 49년 대만으로 도망치면서 데려갔다.(죽이거나 육체적 폭력을 가한적이 없이 장학량을 데리고 갔다. 대만 데리고 가선 40년동안 가택연금을 시켰고...왜 그랬을까? 두고 두고 괴롭힐 심산이었을까?) 1990년대에 들면서 고령임을 감안해 대만 정부는 장학량이 자기 맘대로 살 수 있게 했고 장학량은 하와이로 이주해서 십년간 살다 죽었다.


혁명동지를 제외하곤 중화인민공화국 건설과 중국공산당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장학량이 죽었을 때 당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은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장선생의 서거 소식에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하겠으며 중국 공산당과 인민을 대표해 삼가 애도한다. 장 선생은 65년전 애국의 심정으로 서안사변을 일으켜 민족 존망의 위기에서 중국을 구했다.” 대만 총통 첸수이벤 조차도 “공과를 떠나 장선생은 중화민국(대만)의 자산이었다” 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1949년 내전에서 장개석이 공산당에게 패배해 광활한 대륙을 뒤로한 채 배 타고 대만으로 도망칠 때 장학량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혹시 전해지지는 않지만 귀싸대기라도 한 대 때린건 아닐까?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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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오늘(9.22) 삼성 회장 이병철 (주)한비 국가에 헌납, 매스컴과 학원사업에서 은퇴선언

 

1966년 9월 22일 당시 삼성 회장 이병철은 (주)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매스컴과 학원사업에서 은퇴할 것을 선언했다.


같은 날 국회에선 당시 국회의원 김두한이 ‘나는 야인이 될꼬야~’ 라며 파고다 공원에서 퍼온 똥물^^을 정일권 국무총리와 국회의원들에게 선사했다.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 도중이었다. (주)한국비료가 건설자재로 위장하여 사카린(당시 사카린은 돈 덩어리였다고 한다.)을 밀수했고 그 와중에 중앙정보부와 정부가 연루되어 같이 돈을 챙겼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고급 사치품인 양변기--;; 같은 물건도 꼽싸리로 밀수 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사건으로 인해 삼성의 후계구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 사건 이후 이병철이 잠깐 전면에서 물러서고 이병철의 장자인 이맹희가 사업 전면에 나섰으나 너무 나대고 아버지를 무시했는지 몰라도 결국 팽 당해서(어 김두한도 야인인데...)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현재 CJ그룹 회장 이재현이 바로 이맹희의 큰 아들이다. 결국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셋째 아들 이건희가 이병철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2세 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둘째 아들은 이창희 인데..새한 그룹 창업주이다. 지금 새한은 거의 거덜나다 시피 했지만 한 때는 비디오 테잎 같은거 팔아서 돈 좀 벌었다.)


이병철이 손을 뗀 매스컴과 학원 사업은 도대체 뭘까? 일단 학원 사업, 이병철은 이 사건 이후 대구대학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대구대학은 지금 있는 대구대학하고는 좀 다르다. 당시 청구대학과 이병철이 물러난 이 대구대학이 합병되어 영남대학이 만들어졌다. 이 대구대학은 지금도 유명한 경주 최부잣집의(십대가 만석지기였다는 그 부잣집. 가훈으론 이런게 전해진다고 한다. 벼슬은 진사이상 하지마라, 백리 이내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엔 절대 땅을 늘리지 마라 등등) 마지막 부자 최준이 해방직후 설립한 대학인데 최준이 재산을 설립에 다 쓸어넣은 바람에 유지하기가 힘들어 이병철에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벌써 청구대학을 꿀꺽한 박정희는 대구대학까지 합쳐서 영남대학을 만들어 한방에 집어 삼켰다.


그렇다면 매스컴 사업은? 공교롭게도 이 때로부터 딱 일년전인 1965년 9월 22일 중앙일보가 창간되었다. 중앙일보의 경영은 홍진기가 맡았고(홍진기는 이병철의 사돈이다. 이건희의 장인이며 현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의 아버지다. 홍진기는 일제때 판사를 지냈다. 그 때 얻은 딸이 이건희의 부인 홍라희다. 해방 이후에도 당연히 승승장구하여 자유당 말기에는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기는 315 부정선거와 419당시 학살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했으나 홍진기는 아주 짧은 옥살이를 끝내고 이병철에게 픽업된다. 친일하면 삼대가 잘 산다라는걸 온 몸으로 증명하는 집안이다.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는 지금 검사장을 지내고 있다.) 중앙일보 뿐 아니라 나중에 ‘전 두환이라고 해요, 두발이 없다는 뜻이죠, 환장하겠어요,’ 에 의해 KBS2 방송으로 통합되어 버린 TBC 동양방송 또한 이 때 이병철이 소유하고 있던 매스컴이다. 생각해보면 그나마 5공이  잘한게 이 거 아닌가 싶다. 지금 SBS 꼬라지만 봐도 갑갑한데 만일 TBC 까지 살아남아 있고 그거랑 중앙일보가 여전히 삼성 그늘에 있다고 생각하면--;;    


현재 삼성은 중동고와 성균관 대학을 소유하고 있다.  삼성은 이병철의 모교인 중동고를 자립형 사립고로 전환하려고 지속적으로 모색중이다.  삼성의 성균관 대학 소유 이후에 삼성이 성대를 어떻게 컨트롤 하고 있는가를 알리는 문서를 총학생회에서 폭로했으나 많은 학생들은 오히려 

총학생회를 비난했다 . 그 이후 이른바 ‘비권’(성대사랑)이 총학생회를 계속 수권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일보는 수많은 잡지들과 케이블 티비 채널 두개(큐채널과 히스토리 채널)을 가지고 있으며 굴지의 출판사 (중앙 랜덤하우스)를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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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년 오늘(9.21) 고려 공민왕 피살.

 

미안하다. 또 늦었다. 그러나 정국이 정국이 아닌가 독자들이 이해해야지 어쩌겠냐--;;


1374년 9월 21일 고려공민왕이 신하 홍륜 일당에게 피살됐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 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 다른 고려왕들처럼 원나라에서 성장했다. 공민왕의 몽골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 라고 한다.


그런데 공민왕은 그 당시 고려왕들하고는 좀 달랐다. 고종 당시 원의 침략 이후 고려왕은 몽골의 부마가 되었고 조나 종을 붙이지 못해고 칭호는 왕으로 바뀌었다. 그 밖에 폐하-> 전하 등등 바뀐게 아주 많다. 아 참 왕명에는 반드시 ‘충’자를 붙이게 되었다. 충목왕, 충혜왕, 충정왕, 충선왕, 충숙왕 등등 그런데 공민왕은 자기에게 ‘충’ 자를 붙이지 않았다.


고려가 이 정도로 원에게 꽉 잡혀 살았지만 꼭 그런 것 만은 아니라는 주장들도 많이 전해진다. 일단 원에게 40여년  동안 개기며 버텨낸 나라가 고려를 제외하곤 없고(에..일본이 있네. 여몽연합군의 이차에 걸친 침략을 가미가제-신풍 덕택에 막아냈으니--;;) 고려왕은 몽고황족의 부마를 지냈으며 몽고 황실 내부의 다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단다.  그 밖에 ‘고려양’ 이라고 해서 원나라 대도(수도 이름)에서는 고려의 풍습이 최신 유행을 했다고 한다. 원나라 말기에는 공녀 출신의 고려 여인이 정식 황후 자리에 오르기도 했을 정도니... 

하여튼 공민왕은 원에 대해 독립적이려고 노력했고 또 실제로 그런 정책들을 펼쳤다. 즉위하자마자 몽골 연호와 관제를 철폐했으며 정동행성을 혁파했다. 누나(원나라 기황후) 믿고 까불던  기철 일파를 척결했고 원명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쌍성총관부, 동녕부 등을 공격해 영토의 일부를 회복했다. (이 때 스타로 올라선 인물이 황금을 돌처럼 봤다는 최영과 신궁 이성계..사실 이성계의 아버지는 원나라 다루가치 출신인데 하여튼 이렇게 시대의 변화에 민감해서 변신을 잘 하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대내적으로는 신돈을 등용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했다. 한문을 보면 알겠지만 전민변정도감은 논밭과 노비에 관한 행정을 정비하기 위해 설치된 특별기관이다. 무신정권 이후 권세가들이 토지를 마음대로 겸병하여 병작반수제(이런거 기억 나나? ㅋㅋ 고딩때 다들 국사시간에 배웠을텐데...기억을 더듬어보시길.)를 강요했다. 원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고려의 힘이 약해지면서 부터는 친원파들이나 원나라에 관련된 기관들(정동행성이라던지 제주도에 있던 말목장, 전국에 산재되어있던 다루갖치들)은 한 술 더 떠서 마음대로 토지를 수탈하고 양민을 노예로 삼았던 것이다. 당연하게 세금도 안 내고...


전민변정도감 판사 신돈은 탈법/불법적으로 점유된 토지와 노예에 대해 개경에서는 15일 지방에서는 40일의 기간동안 자진신고하게 하였다. 토지는 원주인에게 돌려줘서 국가의 수조권이 닿게 했고 에서는 노예는 자신들 마음대로 자신의 행보를 결정하게 했다. 이 조치는 민중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나 당연히 기득권 세력과 마찰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신돈은 고려말 등장한 신흥무장세력(최영, 이성계、김방경등등)과의 갈등 뿐 아니라 유교를 바탕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신진사대부 계층과도 물과 기름처럼 지냈다. 공민왕과도 트러블이 발생하여 결국 1371년에 처형--;; 사랑해 마지 않았던 노국대장공주도 죽었고 신돈까지 스스로 숙청한 공민왕은 헤롱헤롱 거리기 시작했다. 귀족집안의 잘생긴 자제들로 고성된 ‘자제위’ 라는 기관을 설치했는데 사실 이게 묘하다. 딱히 하는 일도 정해지지 않은 이 친위집단 자제위가 공민왕의 동성애 상대 집단이었다는 말도 있는데...자제위 소속 젊은이들이 공민왕으로부터 지나칠 정도로 총애를 받은 것은 확실하다. 여러 계비들과 간통사건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그러다가 급기야 자제위 소속 홍륜이 익비를 임신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고 공민왕은 그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 고자질한 최만생과 홍륜을 다 죽이려 하다가 거꾸로 침실에서 자기가 죽음을 당한다.ㅠㅠ


고려말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자주적 대외정책과 대내 개혁을 실시했던 공민왕은 이렇게 허망하게 갔다. 공민왕 사후 이십년도 안되서 고려는 멸망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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