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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4/09/02

1969년 오늘(9.3) 통일 베트남 초대 대통령 호치민 영면

1969년 8월 3일 통일 베트남의 초대 대통령 호치민(1890~1969)이 영면했다. 현실 정치인 중에 그리고 실제로 권력을 잡았던 일인자 중에 호치민 만큼 제나라 민중과 세계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인물이 있을까? 뭐 세종대왕이 있다고???

 

호치민은 등소평 처럼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수학했다. (물론 팔자좋게 유학 간건 아니고 고학을 했지) 1차 대전 이후 베르사이유 강화 회의가 열렸을때 피뜨거운 젊은 프랑스 공산당원 호치민은 호치민은 민족자결 원칙으로 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한참 헛바람을 불어넣은 우드로 윌슨 앞으로 서한을 띄우기도 하지만 전달되지 못했다.

 

이후 모스크바에 체류하며 스탈린, 이립삼들과 교류를 쌓으며 점차 성가를 높이게 된다. 이 와주엥 웃지못할 사건이 있었으니 호치민의 사망설이 널리 퍼지고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가 대형 오보 한 번 했다.) 심지어 1931년 모스크바에선 호치민의 장례식이 열리기도 했다.

 

이후 41년 고국 땅을 밟은 호치민은 그 이름도 유명한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 주석직에 오른다. 여러 과정을 거쳐 53년 마침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게 된다. 이 와중에 400킬로키터에 이르는 갱도를 둟어서 주요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었고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갱도 전투는 이후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된다. (김일성 또한 이에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제국주의 프랑스가 물러난 후 그 자리는 미국이 메꿨고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분단된다. 그 때부터 또 지난한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이 시작됐다. 여기서 그 지난한 투쟁의 경과를 풀 필요는 없을듯하다.

 

평생을 독신으로 민중의 곁에서 보낸 호치민은 68혁명당시에는 구호로 불리었다. 체와 호는 자유와 저항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아이콘이었다.(물론 일세계 특유의 오리엔턴리즘도 작용했겠지)

 

결국 호치민은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그 옆에는 가족 하나 없었다. 베트남 인민들은 사이공시의 이름을 호치민시로 바꿈으로써 그에게 말없는 찬사를 보냈다.

 

 68년 호치민의 전기를 쓴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쟝 라쿠튀르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세계의 지도자 중에서 실제로 호치민처럼 창조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만들어내는 것을 지키는 수호자이며, 근원임과 동시에 방향을 가리키며, 사상임과 동시에 실천이며, 국가임과 동시에 혁명이며, 고난의 행자임과 동시에 정치지도자이고, 사람좋은 아저씨임과 동시에 전쟁지도자인 인물은 한 명도 없다."

 

첨언: 호치민은 평소에 목민심서를 항상 옆에 두고 읽었다고 한다.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레이건한테 눈도장 찍으러 가던 전두환도 기내에서 목민심서(한문본)을 옆자리에 두고 있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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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오늘(9.2)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

1945년 9월 2일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동시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미, 소 양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안을 발표했다.

 

이차대전의 종결 외에 이 사건은 두가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미 최고 사령부(GHQ)가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다는 것(최고 통치자는 맥아더, 전후 일본 국민들은 맥아더를 마치 천황처럼 모셨다. 자신들을 패배시킨 점령군 최고사령관을 뼛속 깊이 통치자로 인정했다는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좀 이상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미 국무부의 대령 두명이 (이 중의 하나는 나중에 미 국무장관까지 오른 러스크이다.)사무실에서 지도를 보며 그은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게 된 점이다.

 

9월 2일 항복문서 조인 이전에 사실 다 짜여 있긴 했지만 미 최고사령부는 천황에게 손을 대지로 안기로 결정했다. 실제 전후 일본에서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는 세력은 공산주의자(다른 세력들은 전부다 침략전쟁에 동의, 참여했기 때문에) 밖에 없을 뿐더러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일본도 빨간 물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소비에트의 확장에 대응하기 위해선 천황이라는 구심점을 남겨둬야만 한다는 미국의 판단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 국내에서도 일억 총참회론 이라는 하나마나한 이론이 갑자기 퍼지기 시작하면서 천황은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글들과 가라타니 고진의 여러 책들을 참조하라. 특히 고진의 윤리21은 분량도 작고 쉬운 것이 참 읽을 만 하다.(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서도)

 

일본에 대한 성공적와 대중적 인기의 급등으로 간이 배밖에 나오기 시작한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와중에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기까지 했다.그 유명한 만주 원폭 투하론이 그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좀 아는 척하는 우파들은 625때 만주에 원폭만 투하했어도 통일 된 건데 말야 하면서 헛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결국 맥아더는 하와이로 불려가서 짤리고 말고 미의회에서 나름대로 유명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퇴역했다. 당연히 대통령 후보가 될 줄 알았지만 역시 이차대전의 영웅이고 서민적 풍모를 지닌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자리에 올라 한국전쟁에도 휴전 드라이브를 걸었다.

 

파월이 그나마 부시 정권에서 비둘기파인것이나 아이젠하워가 한국전쟁의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이 된 후 그 공약을 지킨걸 보면 군바리들이 총 무서운 줄 아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반도의 미소 분할 점령 과정은 다들 알겠거니 싶어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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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오늘(9.1) 리비아 쿠테타 일어나 왕정 무너지다.

미안하다. 오늘이 아니라 어제다. 사실 이거 몇명이나 보는지 알 수도 없고 반응도 차가움에도 불구하고 귀찮기는 와방 귀찮은데 확 때려치울까 싶기도 하다--;; 달랑 한 열흘 했는데 이렇게 빨리 위기에 봉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집 인터넷이 갑자기 안되는지라 사무실에서 밖에 못하는 탓도 크다. 이해해달라.

 

1969년 9월 1일 리비아에서 카다피 대위가 쿠테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렸다. 60년대 3세계 쿠테타 열풍의 막차를 탄 것이다. 왕정을 무너뜨린 쿠테타 그리고 그냥 쿠테타가 60년대에는 참 많았다. 금방 생각나는것만 해도 터키, 이라크, 한국, 이집트, 리비아...

 

그 공통점은 한국을 제외하곤 제 나라 민중들의 지지를 받은 쿠테타였다는 것이다.(사실 516 터졌을때 좋아했다란 양반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긴 하다.) 식민지 신세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빅 브러더들은 자신들이 통제하기 쉬운 통치자를 원했기에 부패한 구 왕족들을 골라서 왕권을 쥐어주고 배후조종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 왕가들은 민중들의 이해와 요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식민 종주국과 자신들의 이해에만 집중 했었고 불만은 거의 폭발 수준에 달했던 것이다. 그게 바로 60년대 동시다발적 쿠테타의 배경이다.

 

60년대에 뽀개진 왕정과 유사한 행태를 보이는 왕정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우디 아라비아.

 

하여튼 리비아 민중들은 쿠테타를 열렬히 환영하고 카다피 대위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선뜻 받아들였다. 쿠테타 하자 말자 지 계급장에 지가 별네개씩 다는 짓거리 하는 우리나라 쿠테타 대빵들과 달리 카다피는 쿠테타 이후 이십년이 지나서야 대령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물론 지금 카다피의 공식직책은 국가원수 이다.

 

동아건설의 대수로 공사등으로 인해 우리와도 친숙한 리비아는 카다피 집권 이후 지속적으로 독자노선을 걸었고 카다피는 미국의 공적 2호라면 서러울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매일 잠자리를 바꾸기도 했다는데...

 

물론 리비아가 꾸준히 독자노선을 걸을 수 있는 바탕에는 풍부한 원유매장량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제와 억압위주의 통치가 아닌 민중들의 지지에 기반한 통치가 더 큰 기반이 아닐까 한다. 미국이 섣불리 카다피를 건드리지 못한 것도 그 탓일게고....

 

마냥 멋지기만 하던 카다피도 맛이 가는 모습을 요즘은 조금씩 보이고 있다. 리비아 축구협회 회장인 카다피의 아들이 이탈리아 프로축구팀 유벤투스의 이사가 되지 않나? 페루쟈에 선수로 등록하지 않나...

 

국제적으로도 리비아는 조금씩 변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팬암 항공기 폭파 사건의 배후로 오랫동안 경제적 제제를 받던 리비아는 이라크가 박살나는 모습을 보고 쫄았는지 모르겠는데 미국과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다. 이라크 하나로도 벅찬 미국 또한 짝짜꿍을 맞추고 있고..

 

카다피가 맨날 들고 다니는 그린 북(green book, 이슬람과 사회주의의 짬뽕)을 보면 주체사상이 생각나기도 한다.

 

요즘 나타나는 카다피의 적극적 세계화(?)가 민중들의 생존과 자유를 위한 것인지 자기 권력의 연장을 위한 것인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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