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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9/06
    진정한 냉면의 길(1)
    molot
  2. 2004/09/06
    1949년 오늘(9.7) 멕시코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영면(7)
    molot

진정한 냉면의 길

 

새벽녘이면 날씨가 꽤 쌀쌀하기 까지 하고 일교차가 높아 감기 걸린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낮에는 여전히 더운데다가 태풍 불어온다고 습도까지 많은지라 아직도 냉면 생각이 난다.왔다갔다 하다 보면 냉면집에 아직도 사람들이 꽤 많더라. 


일전에 선배에게 식사 대접을 할 일이 있었다.(내가 멀쩡히 돈 잘버는 선배한테 식사대접을 한다는 말은 내가 시간을 내주고 메뉴도 골라주고 계산은 그 선배가 한다는 뜻이다 ^^V 근데 어떤 후배가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접하겠다면 정중히 사양하겠다--;;) 그 선배랑 무슨 일로 이틀간 시간을 같이 보내긴 했지만 좀 느끼한 식사들의 연속이었는지라 저녁은 깔끔한 것으로 먹기로 합의를 봤었다. 정통적 요리를 좋아하지만 에쓰닉한 요리나 각종 퓨전요리도 즐기는 나는 베트남 퍼 를 제안했으나 그 선배는 개운하게 김치찌게를 먹자고 했고 김치찌게를 받아안기엔 속이 그닥 좋지 않다는 반론이  이어진 끝에 냉면을 먹으러 가기로 합의를 봤다. 을밀대를 갈까 하다가 좌회전을 놓치고 을지면옥을 갈까 하다가 저녁시간에 을지로로 차 몰고 들어갔다가 나오는건 죽음이 아닐까 싶어서 신촌으로 왔었다.


기실 신촌에도 그나마 전통을 자랑하는 냉면집들이 몇 군데 있긴 하다. 예컨데 명물거리에 있는 고박사 냉면(이 곳은 정말 명실이 상부하지 못한 곳이다. 사리는 한 젓가락 집으면 끝이고...육수도 글쎄...)도 있고 우정스포츠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냉면집들이 몇 군데 있고 또 현대백화점 에스컬레이트 입구 맞은편의 함흥냉면집도 최상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퀄러티를 보장하는 곳이다. 그런 곳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배를 끌고 간 곳은 율촌냉면(구월산 족발집에서 아래로 오십미터 정도, 현대백화점 일층 옆문 바로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이었다. 왜냐면? 내가 저녁타임에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 지성의 명철함보다 대중운동의 우위를 믿는 나로서는 꿩 잡는 게 매라는 고래의 격언을 믿을 수 밖에 없고 사람 몰리는 곳이 맛집이라는 진리의 역관계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뜨, 그러나 냉면을 먹은 후 선배는 나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나는 담담히 그 욕설을 배불리 먹었다. 자, 그렇다면 율촌 칡 냉면이 맛이 없었던가? 따지자면 꼭 그런건 아니다. 가게에 들어 갔을때 테이블이 딱 하나 남아있었던 것을 보고 '음 잘왔군' 하는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었으나 너무 시끌벅적하고 어린 친구들이 많았던걸 보곤 좀 의심의 여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여튼 그러다가 칡냉면 대짜 두 그릇이 서브되어왔다.


이건 뭐...그래 맛있다면 맛있을 수도 있다만 그 맛이라는게...학교 앞 분식점 냉면맛이라는게 문제였다. 나도 매운 음식 좋아하고 매워서 맛있는 음식도 있고 매워야만 하는 음식도 있다. 그리고 단 음식도 마찬가지다.(단 음식 일반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치만 냉면이 그래선 안된다.


근데 이 냉면은 매콤달콤의 극치였다. 고삐리때 학교 앞 분식점에서 그 당시 가격으로 천이백원 주고 먹던 냉면, 지금도 어느 중고등학교 앞 분식점에 가면 이천오백원 정도를 주고 먹을 수 있는 그 냉면...바로 그 맛이었던게다--;;사골육수와 동치미 국물이 조화된 시원하면서 구수한 육수는 간 곳이 없고 사이다에 고춧가루 탄 맛의 육수가 그 자리를 차지했으며 씹히는 맛이 중요한 편육과 채썬 배도 없고 냉면 그릇에 담긴 거라곤 시커먼 칡사리와 오이, 무채, 시뻘건 고춧가루 그리고 마치 물에 빠져죽은 개미떼 같은 통깨들...


물론 나도 이런 음식들 먹고 또 어떨땐 좋아하기 까지 한다. 근데 이건 말이지 라면 집 혹은 수제비 집에서 곁다리 메뉴로 끼워 판다던가 아니면 떡볶이를 서브메뉴로 하는 냉면 전문 분식집의 맛인거지 냉면과 설렁탕을 메인으로 내세우는 식당의 맛이 아닌게다.


언어가 그렇듯이 음식 또한 언중 아니 식중(衆)에 맞춰 갈 수 밖에 없고 또 맞춰가야만 한다만 이런 분식점 냉면을 5500원씩이나 받아먹고 또 그런 식당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건 뭔가 좀 찝찝하다. 나 또한 언젠가  붐비지는 않되 주인과 손님 서로가 만족해 하는 일품요릿집을 했으면 하는 꿈(--;;)이 있어 그런지 모르겠지만 뜬금없이 메이냐드 케인즈의 발언이 생각난다. 뭐랬더라? 자본주의하의 경제가 돌아가는게 미인대회랑 마찬가지긴 한데 개별 주체들이 좋아하는 미인을 고르는게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미인을 고르는거라 했던가? 어쩌면 이 글 읽고, ‘그래 내가 원하던 냉면은 바로 이거야’ 하면서 찾아갈 사람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네.

 

 

첨언: 이 글은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내 글을 수정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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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오늘(9.7) 멕시코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영면

1949년 9월 7일 멕시코의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Jose  Clemente Orozco,1883-1949) 가 영면했다.  오로스코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레스코 화가로 꼽힌다. 오로스코 라는 이름만 들으면 누굴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듯 싶어 오로스코와 항상 함께 등장하는 두 이름을 나열해본다. 그 이름들은 바로 디에고 리베라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오로스코, 리베라, 시케이로스 이 3인은 멕시코 벽화운동의 주역으로서 전세게를 휩쓸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소설들 보다 더 일찍 마술적 리얼리즘과 민중의 생활을 프레스코 벽화로 널리 알렸다. 힙합문화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그래피티 또한 이들의 벽화운동의 세례를 깊이 받았고 바스키야를 비롯한 현대 미술들도 이들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심지어 80년대 이후 나타난 한국의 벽화운동, 걸개그림 운동들 또한 이들에게 뿌리를 대고 있다.

 

그렇다면 멕시코 벽화운동은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멕시코 벽화운동은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에밀리오 사파타와 판쵸 비야의 혁명에 닿는다. 멕시코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보다 오히려 더 앞선 것으로 20세기 최초의 사회혁명으로 불린다.

 

사파타와 판쵸비야는 결국 혁명 이후 죽임을 당하고 오브레곤이라는 정치지도자가 통일을 하게 되었지만 오브레곤 또한 사파타의 농업개혁-무상 농지 분배, 이 문제로 인해 아직까지도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은 투쟁하고 있다.-을 자신의 혁명정부에서 받아들였고 곧이어 그 혁명정부는 1917년 혁명헌법을 통해 국토와 지하자원이 국가소유임을 명확히 함으로 미국의 간섭을 거부했다.(멕시코는 알고 보면 뜨거운 전통을 지닌 나라다. 멕시코의 대표적 대학인 UNAM대학 또한 전세계 대학중에 투쟁 순위로 따지자면 몇 손가락 안에 들만하다.)

 

뿐만 아니라 정교의 분리, 혁명의 주역이었던 메스티조와 인디언의 지위 향상등에서 볼때 금세기 전반부 멕시코는 눈부셨다. 트로츠키가 왜 뜬금없이 멕시코로 망명해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 뒤에는 이런 배경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여튼 멕시코 혁명을 마무리 지은 오브레곤 정권은 작가 호세 바스콘셀로스를 문교부 장관에 임명했다. 바스콘셀로스는 종합적 국가 교육안을 실행했으니 문맹, 무학에 시달리는 농민과 자녀들을 위해 많은 교사들은 하방시켰다. 국가차원의 브나로드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교사들은 살해, 폭력에 시달렸다. 농부들이 교육 받는 것을 두려워한 멕시코 대 농장주들의 짓인 것이다.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대부들은 오늘날에도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교사들은 계속 시골로 시골로 향했고 국가 또한 굴하지 않았다.  

 

이러한 국가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가 바로 벽화 지원 계획이었던 것이다.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벽화(프레스코화)를 그릴 수 있도록  화가들에게 공간과 자금을 지원한 것이다. 멕시코 벽화운동은 이렇게 시작된것이니 오로스코, 리베라와 시케이로스는 벽화운동을 이끌며 민중들을 자극했다. 이 운동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전세계적 이슈로 떠올랐다. 얼마전 이 시대를 다뤘던 영화도 나오지 않았던가? 셀마 헤이엑 주연의 '프리다 칼로'( 사실 이런거 보면 유명하고 대단했던 넘들도 여성들한테 대하는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근데 이런 전통을 가진 멕시코에서 왜 오늘날에도 사파타의 후예들 (사파티스타)들이 치아파스에서 투쟁하고 있을까?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역시 여기에도 적용된다. 멕시코 혁명정부는 1927년 제도혁명당을 창당했다. 제도 혁명당은 라틴 아메리카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당으로 불리는데 너무 성공적인 나머지 70여년을 장기집권 해버린 것이다--;; 제도혁명당의 존재는 모든 급진적인 정치세력들의 부상을 막았고 제도혁명당 지도부는 그들의 투쟁 대상이었던 아시엔다(대농장주)와 미국과 앞으로는 싸우면서 뒤로는 짝짜궁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비판적 지지 뭐 이딴거 생각나지 않나?)

 

그리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메스티조에게 사회적 시민권을, 제국주의의 간섭 철폐라는 사파타의 혁명정신과(제도 혁명당이 배반해버린) 사파타의 후예들이 다시 나타난 게다.  사파티스타는 NAFTA(북미 자유무역협정) 발효에 맞추어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며 치아파스 라칸돈 정글에서 1994년 1월 1일 봉기g했다.  "오늘, 우리는 말한다. 이제 그만좀 해!(Ya! Basta!)"....그들이 내건 선언문의 제목이다. (몇년전에 어떤 학생운동 그룹이 이걸 따와서 쓰기도 하더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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