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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4/09/16

1945년 오늘(9.16) 한국민주당 창당

1945년 9월 16일 자칭 '민족 진영'으로 구성된 한민당이 창당됐다.이승만 믿고 창당된 한민당은 주도권 다툼 과정에서 이후 이승만에게 팽당하고 민주당으로 계승되었고 신민당, 평민당, 국민회의 등을 거쳐 오늘의 열린 우리당(민주당은 자신들이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에 이르고 있다.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민주당 세력과 개싸움을 벌이며 자신들이야 말로 정통 야당 '한민당-민주당'의 맥을 잇는다고 우기는 걸 보면 참 우습기 그지 없더라. '정통야당' 한민당이 어떤 당인가? 하긴 이승만 자유당이랑 티격 태격 하긴 했지만 그래서 정통야당인가? 대통령하고 사이 안좋다고 정통성 획득 한다면 김대중 정권이래 한국 최고의 정통성은 아마 김영삼에게로 돌아갈거다.

 

그렇다면 한민당은 과연 어떤 집단인지 이야기 해보자. 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국회의원 최익승이 나온다. 제헌의원 최익승의 소속 정당이 바로 한민당이다. 해방 정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정통성을 갖고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친일파 척결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지주, 친일파들이 부랴부랴 '민족진영, 반공'을 내세우며 창당한 것이 바로 한민당인 것이다.

 

한민당의 주요 멤버들은 누가 있었을까? 전라북도 땅 절반이 자기 집안 소유였으며 일제 때 이미 경비행기를 타고 소작지를 둘러보았다는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삼양사, 경방의 사주이자 그의 아우인 김연수는 반민특위 조사 대상이었다.) 경상도 관찰사 출신 악질 지주로 악명을 떨치다가 독립군의 총에 맞아 죽은 친일파를 부친으로 두고 경북 최고의 친일 기업인을 형으로 둔 장택상(장택상은 해방직후 수도경찰청장 자리에 앉아 반민특위 해산, 사회주의 전력자 탄압, 백색테러의 든든한 후견인 노릇을 했다.) 그 외에 경무국장 조병옥등이 한민당의 주요멤버였다.

 

요런 작자들이 모여서 민족진영이랍시고 미군정과 이승만의 딸랑이 노릇을 하며 정부 수립의 주춧돌--;; 역할을 하였으니 참 당시 정국도 개판 오분전임에 틀림 없는 듯 하다. 친정체제 구축에 나선 이승만에게 팽당한 한민당은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그나마 이승만 정권의 치적으로 불리는 농지개혁을 늦추고 누더기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훈을 한 것도 바로 한민당인 것이다. 이 자들은 이승만 독재가 강고해지면서 은근슬쩍 정통야당의 가면을 쓰게 되고 일정 부분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내며 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꾸게 된다. 이 들은 3대 대선에서 조봉암의 진보당에 대해 빨간 딱지를 씌우고 협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조봉암이 간첩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고 진보당이 해산당할 때도 콧노래만 부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방정국에서 온갖 불법적 테러를 자행한 조병옥이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이승만과 맞서 민중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코미디인지 비극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419의 수혜를 혼자 받아 안은 민주당의 총리 장면 또한 일제에 협력했던 자로서 동성학교 교장을 지내며 징용에 한 몫을 했다. 장면 정권은 어떤 민주적 정책을 펼쳤을까? 바로 반공법, 데모금지법 제정이라네..게다가 516 쿠테타가 발생했을때는 수녀원으로 도망쳐서 콧배기도 보일 생각도 안 했고...

 

이런 정당의 후예들이 쿠테타 후예 한나라당 더러 '너네의 역사는 쿠테타가 어쩌고 저쩌고 국민들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며 해산해야 마땅하다' 고 외치는걸 보면 얼굴 두께에도 급수가 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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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오늘(9.15) 케렌스키, 러시아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 선언

1917년 러시아 혁명 지도자 케렌스키가 왕정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선포했다.

 

짜르 체제를 타도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온건 사회주의자'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러시아 혁명과정을 살펴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짜르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공화파, 자유주의자, 온건 사회주의자 순으로 권력이 차례 차례 넘어가고 그 다음에 마침내 볼셰비키 소비에트가 천하통일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2월 혁명에 대해 잠깐 되짚어 보도록하자. 1917년 일차대전 중 페테스부르크는 러시아 최대의 공업도시이며 군대 집결지였다. 식량난과 연료난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1917년 2월 14일 국회로 시위 행진 할 것을 결의했다. 볼셰비키등의 반대로 그 행진은 무산되었으나 마침내 23일 여성노동자들이 먼저 파업에 돌입하고 남성노동자들도 흐응했다. 25일에는 파업이 전역으로 확산되고 26일에 시위대에 대한 발포가 있었으며 마침내 27일 노동자들의 아들인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병사들은 감옥의 정치범들을 해방시켰으며 병사와 해방된 정치범들이 페테스부르크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창설한 것이다.

 

정부는 진압 부대를 출동시켰으나 그 부대는 출동중에 소멸되 버리기도 했다^^ 이 와중에 케렌스키는 의회가 혁명을 대표하게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노동자대표와 사회주의 정당 대표들이 소비에트 결성회의를 여는 것을 보고 잽싸게 국회임시위원회의 권력장악을 선포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민중들의 손에 들어가는 걸 불안해 하고 어떻게든 체제내화 하려는 작자들이 있는 법인게다.

 

이 당시의 상황은 상당히 희한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소비에트를 따를 것을 천명했으나 관리와 장교는 국회 임시위원회에 충성을 맹세했으니 이른바 이중권력 상태로 돌입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계속 진행을 외치는 국회임시위원회(관리와 장교도 포함)와 침략반대를 내건 병사들은 충돌했고 이 때 레닌이 귀국했고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소비에트는 비로소 정권 수립을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이 와중에 멘셰비키는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참가해 연립정부를 발족시켰다. 육해군 장관을 맡고 있던 케렌스키는 황당하게도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전선에서의 공세를 준비하려 했다.

이에 분개한 민중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 하에 뭉쳤다. 멘셰비키가 이 민중들을 비난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민중들은 연립의 중단과 소비에트 권력의 실현을 요구하며 무장시위를 감행하기 이르렀고 멘셰비키는 이에 볼셰비키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레닌은 다시 지하로 스며들기까지 했다. 이 와중에 케렌스키는 전쟁의 공세 수준을 높였고 열린정부 수반 자리를 꿰차기 까지 했다. 엎친데 덮친다고 군사령관 코르닐로프는 군사독재를 꿈꾸며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역시 볼셰비키와 소비에트가 코르닐로프를 저지시켰다.

 

지지 기반을 찾아 헤메이던 케렌스키는 9월에 민주주의파 회의를 열어 이른바 예비 의회를 발족시켰고 3차 연립정부를 발족시켰다. 이 연립 정부가 15일에 임시정부 수준을 벗어나 러시아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후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1917년 10월 25일 오전 10시 트로츠키를 위원장으로 하는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가 임시정부의 타도와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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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오늘(9.14) 석유수출국 기구(OPEC) 결성

늦어서 정말 미안하다. 알다시피 파견, 기간제법이 입법예고 됐고 그 것 때문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이 시간에 올리는 것을 어여삐 봐달라.ㅠㅠ

 

1960년 9월 14일 이란, 이라크 , 쿠웨이트 , 사우디 아라비아. 베네주엘라 5개 주요 산유국이 국제 석유 수출국 기구(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을 결성했다. 현재는 11개국이 OPEC에 가입해 있다. 그런데 최근 국제 유가가 어떻게 되더라? 배럴당 50달러 정돈가? (아참 1배럴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거다. 물론 나도 잘 몰랐다. 확인해보니 159리터더라. 쌀두가마니 정도 되는 양이다. 그렇게 보면 원유값이 비싼건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두바이산 원유, 텍사스 중질유 혹은 북해산 브렌트유란 이름은 아홉시 뉴스에 종종 등장해서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다.

 

19세기 미국에서 최초로 상용화 된 이후 석유는 인류 최고의 뜨거운 감자 자리를 내어놓은 적이 없다. 일찌기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는 석유를 '악마의 눈물'이라고 일컬은 적이 있다.  록펠러가 바로 본 거 아닌가 싶다. 석유는 문명 확대에 큰 공헌을 했지만 지구 각지의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자동차, 탱크, 전투기, 항공모함 모두가 석유로 움직인다. 석유 덕에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다가 단추 하나로 미사일을 투하 할 수 있게 됐다. 뿐인가? 대형 유조선의 원유 유출로 기름을 흠뻑 뒤집어 쓴 가마우지의 사진은 잊을만 하면 반복적으로 국제뉴스를 장식한다.

 

석유가 창출하는 가치는 세계적 빈부격차를 더 심화시키고 냉전 이후 전쟁들에 석유가 한 다리 걸치고 있지 않은 것을 찾기는 어려울게다. 이라크가 세계 제2의 산유국이 아니면 지금처럼 미국의 표적이 되었을까?

 

뿐만 아니라 원유는 전세계적 로또나 다름없다. 지금이야 유정 개발이 쉽지 않았지만 몇십년 전만 해도 상황은 다르다. 영화 자이언트에서는  반항아 제임스 딘이 한 구멍 잘 뚫어서 일거에 인생역전했고(검은 원유로 샤워하며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린 제임스 딘의 모습이 인상적이지 않나?) 조지 W 부시 또한 텍사스 원유 사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지?

 

하여튼 OPEC의 등장만을 보면 꽤 긍정적이다. 지난 9월 10일자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2&pid=42) 본란을 통해 '곡물 메이저' 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지만 석유 메이저들도 그에 못지 않다. 온갖 지저분한 합병과 통합을 거쳐 지금은 엑슨 모빌(미),로열 더치 쉘(영국, 네덜란드), BP(영), 쉐브론 텍사코(미)로 정리된 석유 메이저들은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주요 원유생산국들의 석유를 한세기 동안 강탈하다 시피 해왔고 그 기업의 본국들은 석유를 전략무기 처럼 사용해왔다.

 

결국 그 제국주의 국가들과 석유 메이저들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산유국들이 결성한 것이 바로 OPEC인 것이다. 몇번의 원유 파동을 통해 OPEC은 세를 과시했지만 사십여년이 지난 오늘날 OPEC을 보면 뭐 그렇지도 못하다.

 

물론  사우디의 아람코나 쿠웨이트의 KPC, 베네수엘라의 PDV(그렇다. 지난 9월 11일 본란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2&pid=43 에서  언급된 베네주엘라의 석유 산업 사보타지의 중심이 바로 PDV다) 등이 OPEC의 역사를 통해 나름대로 국제적 석유 메이저로 등극하기는 했다. 최근엔 러시아 올리가르히(과두 재벌)들이 자국의 국영 석유 회사를 인수해 덩치 키우기에 나서고 있고...

 

몇번의 석유 파동 동안 아랍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미영등 제국주의 국가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혁혁한 공훈을 했던 OPEC은 이후 여러가지 이유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됐다. OPEC내의 가장 큰 전선은 친미-반미의 전선이다. 그 아래 아랍 민족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지만 첫 째 전선을 벗어난진 못한다. 이라크, 이란, 베네주엘라등이 목소리를 높이고 감산 정책을 펼치면 사우디, 쿠웨이트등  미국 꼬붕들은 급격한 증산을 통해 찬물을 끼얹어 버리곤 했다. 물론 기름 한 방울 안나는 우리나라로선 유가 상승이 큰 부담이 되지...

 

그러나 농산물이나 석유나 다 마찬가지다. 세금, 각종 부담금, 독점적 정유체계등을 통해서 중간에서 해먹는 돈이 얼마일까? 주유소에서 기름 넣을때 가격하고 배럴당 원유가격의 차이를 비교해 보라. 배럴당 50달러 해봤자. 리터당 가격으로 치면 우리 돈 300원에 물과하다. 주유소에서 넣을땐 근 4배에 달하지? 하여튼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고 있는거다. 시장경제, 자유경쟁을 들먹이는 작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선 왜 말이 없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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