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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4/09/19

무엇을 할 것인가?

 

V. I. 레닌이 1902년 발표한 이 팜플렛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은  영감, 의지, 교훈을 얻었다. 레닌은 이 팜플렛에서  아무리 강고한 쇠사슬이라도 약한 고리를 molot^^ 로 때리면 끊어지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참 이  글을 통해 레닌 이라는 이름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이다. 또한 레닌은 새로운 형태의 정당을 가지고 전 러시아를 전복 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다고 밝혔다.


그리고 체르니셰프스끼의 유명한 소설 또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이 책이 레닌의 팜플릿보다 훨씬 먼저 나왔을 뿐만 아니라 레닌은 작가를 맑스 이전의 가장 위대한 사회개혁가로 상찬하기도 했다. 사실 이 소설이 난 더 감동적이었다. 이데올로기가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혁명적 인텔리겐찌아의 정열과 합리성에 바탕한 구체적 실천들이 정말 감동적(사실 지금 보면 좀 그렇다--;; ‘어찌 인간으로서 저렇게 완전무결할 수 가 있담 순 뻥일게야..’  하는 맘이 든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도 마찬가지고...) 이었던 것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지금까지 진보넷에서 한 것들을 꼽아보자면 카레라이스, 짜장, 하이라이스, 오징어 볶음, 오징어 국, 찜닭, 북어국, 꽁치조림, 수육, 계란찜, 콩나물밥 등이다. 앗 비빔국수도 있군(이건 실패작이었다--;;) ..  바야흐로 오곡백과가 여물고 식욕이 충천하는 이 가을에 이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가을 전어는 깨가 서말이라는 속담이 있듯 가을은 전어의 계절이다. 전어회도 맛나지만 굵은 소금 슬슬 뿌려가며 석쇠에 굽는 전어맛 또한 일품이다. 신김치랑 돼지고기 넣고 너무 맵지 않고 뭉근하게 순두부 찌게를 끓이면 쓰린 속을 달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고...맵고 달지 않게 간장 양념으로 궁중 떡볶이를 해도 한끼 식사로 훌륭할 거 같다.


물론 이런 것을 하기 위해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 팬은 너무 후지고 석쇠는 구경도 못해본데다가 반찬할 김치도 모자란데 순두부찌게에 넣을 김치가 어디 있으랴? 궁중 떡볶이에는 느타리버섯하고 다진 쇠고기를 넣어야 하는데 그건 너무 비싸다ㅠㅠ


그러나 1902년 레닌도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창간한지 2년 밖에 안되는 , 그 당시에는 지명도가 형편 없었던 정치신문 ‘이스크라’가 있었고 이스크라의 필진으로 막 합류한 스물세살 짜리 애송이 트로츠키란 동지가 있었을 따름이다.


그렇다! 내게는 아름다운 푸른 불꽃을 세 개나 내뿜는 이스크라 아니 가스레인지가 있으며 많은 생각시 동지들이 있다!

 

한 점의 불꽃에서 불길이 타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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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블로그 철학(부제:나는 여우가 아니다!)

 

간만에 좀 여유롭게 블로그를 붙잡고 있다. 자주는 아니고 게다가 들어가는 데만 들어가 보는데도 남들 블로그 보믄 참 아기자기 짜임새 있게 이쁘다. 근데 내 블로그는 자간, 장평도 삐뚤 빼뚤 사진 크기도 제 각각. 남들 블로그가 이쁜 다이어리라면 내 블로그는 초등학교 한 이학년 짜리 그림 일기장 같다 ㅠㅠ


그러나 내 비록 유나 바머처럼 기술 발전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해 폭탄 우편 보낼 능력은 안 되지만 역시 기술의 무한한 발전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바, 이런 저런 걸 할 줄 몰라서 안 하는게 아니라 디지털 공간에서도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표현하고자 일부러 이렇게 못생긴 블로그를 만들어 가고 있음을 이해 해 달라.

 

내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읽다가 떠오르는 음악이 있으면 직접 찾아서 듣고,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으면 혼자 힘으로 찾는 수고를 들여서 감상하라. 연동되는 음악, 그림, 책, 영화의 제목들은 틈틈이 소개 하겠다.(이 지점에서는 피에르 쌍소라던가 스콧 니어링 들의 책을 떠올리기 바란다. 머 라다크로 부터도 배울게 있으면 배우기 바란다.  쉽고 빠르게 사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 만은 아니다.^^)


생각해보니 디지털 공간에서 느리게 사는 즐거움과 스스로 찾는 수고로움을 전파하는 내가 참 대견하기 짝이 없다.  나 자신에게 상을 내려야 겠다. 내일 사무실 가다가 맛있는 거 있으면 사 먹어야지~  신포도나 사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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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오늘(9.20) 강화도 연안을 침범한 일본 전함 운요오호, 조선 수비대와 충돌

 

흑..한 번에 나흘치를 올린다--;;


1875년 9월 20일 강화도에서 개항과 측량, 식량 및 식수 제공 등등 말도 안 되는 요구안을 내걸며 집적거린 일본 전함 운요오호와 조선수비대의 충돌이 있었다. 일명 운요오호 사건. 이 사건은 미국의 페리제독이 단 한척의 전함으로(일명 흑선, 구로후네) 자신들을 무릎꿇려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지 20여년 만에 그걸 그대로 똑같이 써먹은 것이다. 이 일은  중화 중심주의나 세계제국을 꿈꾸던 원나라와 다른 이른바 근대적, 서구적 제국주의가 아시아에 도입되어 실제로 첫 발을 내디딘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8월말 강화도 인근에 닻을 내리고 왔다리 갔다리 하던 운요오호는 아무런 사전 접촉없이 강화도 초지진 포대에 접근했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에서 나름대로 미제와 프랑스제국주의자들한테 한 깡을 보여준 조선 수비대는 냅다 포격을 가했으나 그것이 바로 일본이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음의 진수라고나 할까? 운요오호는 초지진에 맹렬한 함포사격을 퍼부었고(일본제국주의자들이 근대 무기 도입해놓고 써먹을데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태권도 몇 달 배워서 빨간 띠 쯤 따선 근질근질해져서 ‘만만한 놈 하나 걸려라~’ 하고 학교주위를 배회하던 성질 나쁜 넘들처럼 말야 ) 영종진에도 포격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육전대까지 상륙시켜 살인, 약탈, 방화 ,강간 하여튼 온갖 나쁜 짓은 다하고 ‘니들이 우리를 먼저 공격했다’ 며 배상금을 요구하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근데 재밌는 것은 이 때의 불평등조약은 그 당시의 ‘글로벌 스탠더드’였단 것이다. 요즘 BIS 비율이 어쩌고 개도국의 시장개방이 어쩌고 월스트리트의 투명한 경영이 어쩌고 하며 전세계에 강요하는 글로벌 스탠더드 말이지.19세기 후반에는 제국주의국가가 선택한 항구에 개항장의 건설, 개항장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속인주의 원칙의 적용등이 글로벌 스탠더드였던 것이다--;; 영미는 일본에 그걸 강요했고 글로벌 스탠더드 잘 배운 일본은 조선에 그걸 강요하고...아 참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ㅠㅠ) 조약이라고 역사책에 나온다. 

근대, 제국주의가 강요한 과거의 글로벌 스탠더드들에 대해 오늘날의 평가는 대체로 비슷하다.

쌀관세화, 스크린 쿼터 철폐, 한일 FTA체결 같은 오늘의 글로벌 스탠더드들을 훗날 역사는 과연 어떻게 평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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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오늘(9.19)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 쿠테타로 실각

 

1955년 9월 19일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도밍고 페론이 쿠테타로 실각하고 파라과이로 망명했다.

 

1943년 대령신분으로 쿠테타에 성공해 노동, 사회복지 장관을 거쳐 46년 첫 번째로 대통령 직에 오른 페론은 55년 쿠테타로 실각했으나 73년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재집권했다.


우리나라에선 뻑하면 남미병 남미병 하면서 데모하면, 노조가 날뛰면 남미꼴 난다고 아무데다(심지어 노무현한테도!)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한 때를 풍미했던  빨갱이 딱지의 시대가 가고 포퓰리즘 딱지의 시대가 도래했다고나 할까? 특히 아르헨티나를 콕 집어 지적하며 후안 페론의 페론주의와 포퓰리즘 때문에 개판 난 나라라고 헐뜯는다. 과연 페로니즘이 그렇게 나쁜걸까?


모두가 인정하듯 30년대 아르헨티나는 농축산업에 힘입어 세계 7대 부국으로 까지 불렸고 잘 나가는 나라였다. 근데 왜 민중들의 분노는 들끓었으며 페론의 쿠테타가 성공했을까?

페론집권당시 아르헨티나는 참으로 왜곡된 토지소유구조를 지닌 나라였다. (물론 남미 대부분이 그러하지만..아시아 권에서 찾아보면 필리핀이 대표적인 경우고..이런 점에서 볼때 한국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온존해온 것은 해방직후 농지개혁에 힘입은 바가 큰 것 같다.) 극소수가 대부분의 토지와 부를 소유하고 있었고 아르헨티나 상류층은 자신들의 조상 나라인 아르헨티나나 이탈리아를 모국으로 생각하며 제 나라 민중들은 인간 취급조차 안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밑바탕에서 페론의 쿠테타가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포퓰리즘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지주과두제의 시스템을 혁파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과 정책이 포퓰리즘이었던 것이다. 대중들의 사회경제적 욕구가 표출되고 정부가 일정부분을 수렴해낸 것 그것이 바로 포퓰리즘이다. 만일 아르헨티나에서 페론과 포퓰리즘이 없었다면 지금 그 나라는 어떤 형국일까? 내 생각엔 콜롬비아 비슷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약 카르텔들이 실제로 나라를 지배하는...


페론집권기를 한 번 짚어보자. 페론집권기에 아르헨티나 국민 총생산은 127퍼센트, 개인소득은 232퍼센트 증가했다고 한다. 역사상 최대의 산업투자를 했으며 농업 일색이었던 산업구조를 공업과 농업 양날개 체제로 재편했으며 기간산업을 국유화 했다. 뿐만 아니라 전체인구의 60%를 차지했던 극빈 민중들이 페론 집권기를 통해 국부의 33%를 거머쥐게 되었다.물론 이 과정에서 토호 및 제국주의적 해외자본과 마찰이 있었고 그들이 결국 군부를 움직여 쿠테타를 일으켜 페론의 일차 실각을 가져 온 것이다. 페론이 사망해 재집권이 끝난후에는 군부가 장기집권했다. 칠레 피노체트 좋아하는 작자들은 아르헨티나 군부도 칭찬한다. 국민들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경제 개혁을 해냈다고....그 경제 개혁이 바로 무제한 개방과 포퓰리즘에 대한  배신이었다. 외채, 빈부격차로 상징되는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해악은 그 군부집권자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뿐인가?


민가협 엄마들이 쓰는 보랏빛 머릿수건은 바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군사독재 희생자 엄마 들이 쓰고 나와 진상규명을 외치던 그 머릿수건에서 유래한 것이다. 포퓰리즘과 페로니즘을 치유하겠다던 독재자들은 ‘국가전복 사범 색출’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민중들을 학살, 고문, 투옥했으며 심지어 그 희생자들의 자녀들을 불법적으로 다른 집안에 강제입양시키기 까지 했다.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아르헨티니 민주화가 진행됐을 때 자신은 군인의 딸인줄 알았던 한 여성이 사실은 고문 희생자의 딸이며 불임한 군인에게 강제로 입양된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실화에 바탕한 영화도 있었다.


에..이야기가 중구난방인데 페론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여성이 있다. ‘Don't cry for me Argentina!' 라는 유언으로 전 민중을 울린 에바 페론(이하 에비타)이다. 하긴 뭐 육영수씨 죽었을때도 우리나라 민중들은 눈물 많이 흘렸다 그러더라만--;; 심지어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도 자기를 필리핀의 에비타라 그랬다나 뭐라나. 그러나 에비타는 그런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다. 에비타는 페론의 정치적 동반자로서 노동조건 개선, 남녀평등, 공공 의료의 확충을 위해 몸소 뛰었던 한 사람의 정치인이다. (물론 옷이랑 신발 같은건 좀 비싼거 입었던 거 같더라. 근데 아르헨티나 민중들은 그녀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다나? 자신들의 힘으로 잡은 권력이 아니라 아바타를 통한 혁명일 때 이런 현상은 보편적인 듯 하다.)

 사생아 출신의 무명배우 에비타는 1944년 난민구제모금 행사에서 당시 장관이었던 후안 페론을 처음 만났단다. 근데 한참 연애 하고 있던 (나이차이는 좀 나지만) 도중에 후안 페론의 대중적 인기를 우려한 군부가 페론을 투옥시켜버렸다. 우리의 에비타가 이 때 나선 것이다.  그녀는 노동자들 앞에서 ‘당신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누구냐? 페론이냐? 다른 군부냐?’고 외쳤고 노조와 민중들은 총파업으로 화답했다. 27세에 퍼스트 레이디가 된 에비타는 안타깝게도 33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어쩌면 페론의 실각을 보지 못했으니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비타, 체 게바라 어쩌면 리버 피닉스나 커트 코베인까지--;; 젊어서 요절 했기 때문에 이들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아 아직도 추앙받는지도 모르겠다.


참 마돈나가 나온 영화 에비타는 영 ~ 파이더라.


 에바 페론과 도밍고 페론 커플.

 

첨언: 한글 폰트가 안 써져서 한글2002열어놓고 써서 복사해 붙이는데 자간, 장평이 지 맘대로다 어떻게 고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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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오늘(9.18) 미 중앙정보국(CIA) 창립

 

1947년 9월 18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창립됐다. CIA에 대해선 워낙 헐리우드 영화에서 뽀다구 나게 많이 그려놓아서 대강들 알게다. CIA의 전신은 이차대전 중에 생긴 미국 전략지원국(OSS)이다. OSS의 뿌리를 따져보자면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MI-6(영국 대외정보국)의 도움으로 설립된 것이고..하여튼 미국 넘들은 영국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영국도 마찬가지지만... OSS 는 우리와도 관계가 있다. 편이다. 먼저 김성종의 장편소설이자 티비 드라마로 유명한 ‘여명의 눈동자’ 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여명의 눈동자를 보면 여옥이가 곤명의 OSS지구대에서 첩보원 훈련을 받는 장면이 나오고 태백산맥의 김범우 또한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영국군을 거쳐 미군 OSS로부터 국내 진공 훈련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광복군은 미 OSS와 영국군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1945년 8월 하순 국내 진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장준하, 김준엽 등이 실제 OSS로부터 훈련을 받은 광복군들이다.


전쟁 이후 미소의 확장정책이 유럽에서 충돌을 일으키자 미국의 대공산권봉쇄전략의 일환으로 OSS를 CIA로 확장했고 곧 이어 마셜플랜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 때부터 냉전기가 CIA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도 힘 쓰지만 그 때 보단 못 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주요 정보기관은 CIA외에도 NSA(국가안보국-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에 잘 나타난 바 있다. 사실 규모로 보면 NSA가 CIA보다 더 크다), NRO(국가정찰국), DMR(국방지도 제작국), CIO(중앙화상국)등이 있다. 들리는 말로는 요즘 CIO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사행동과 대외정책의 기본이 되는 국가정보요약보고서(NID-National Intellingence Digest)를 작성 총괄하는 주체는 CIA다. 조지 부시 (멍청한 아들내미 말고 그 아버지) 또한 CIA국장 출신이다. 아 참 국정원의 예전 이름이 안기부였고 그 이전 이름이 중앙정보부 였다는 사실은 다 알 것이다.(초대 중앙정보부장-김종필) 그 중앙정보부의 영문 명칭이 바로 KCIA였다.


CIA의 온갖 더러운 짓들은 줄줄이 늘어놓기도 힘들지만 몇가지만 짚어보자. 먼저 본 디렉토리에서 911에 소개한 아옌데의 죽음(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2&pid=43) 뒤에 있는 것도 바로 CIA다. 70년 집권 이후 구리광산의 국유화, 중국/쿠바와의 수교로 미국의 ‘심기’를 거느리자 역시 불법행위 때문에 대통령 자리를 내어놓은 닉슨은 당시 국장 헬름즈에게 아옌데 제거 쿠테타에 대한 오더를 내렸다. 정치사회 경제적 혼란을 조성하는 것 외에 CIA는 직접 행동에 돌입했으니...


트랙2라는 코드네임으로 일단 특공대를 조직했다. 그 특공대 활동의 걸림돌은 엉뚱한데 있었다 바로 당시 칠레 육군참모총장 슈나이더. 슈나이더는 칠레의 다른 군장성들과 다르게 문민통제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내심 아옌데가 맘에 안들었으면서도 헌법 수호를 강조하며 군을 통제 장악하고 아옌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박 모나 전 모 혹은 칠레의 피 모씨들하고는 질적으로 좀 다른 사람이었던 게다. 그리하여 트랙2는 외교행낭을 통해 칠레 우익장교에게 깨끗한 저격용 총기(잘 닦았다는 말이 아니다--;; 총기일련번호, 제조처등을 통해 출처를 알 수 없게 정리된 총이란거지)을 전달했고 몇시간 후 슈나이더는 저격 암살 당한다. 곧 이어 쿠테타 발발, 아옌데 사망 ㅠㅠ.


뭐 이것 뿐 만이 아니자. 쿠바 피그만 침공, 수차례에 걸친 카스트로 암살시도, 체게바라 사형에 대한 최종 결정 이런 것 모두가 CIA의 공작이다. 하긴 뭐 박정희가 김대중을 납치해올 때 그 목숨만은 살려준 것도 CIA라나??


잘 알다시피 KCIA또한 능력은 딸리지만 불법자행 으로 따지면 세계 어느 정보기관에도 꿀리지 않았다. 결국 정보를 중앙집중해서 써 먹으려는 권력자들의 의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양 기관이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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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오늘(9.17)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9월 17일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알파벳 순으로 북한(D.P.R.K)이 160번째 , 남한(R.O.K)이 161번째 유엔 회원국으로 결정됐다. 뭐 유엔이 별건 아니지만 남북 양국이 48년에 실체로서 모습을 드러내고도 43년이 흘러서야 유엔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재밌는 사실은 유엔이 특별나게 남북 양측을 가입 안 시켜 주려고 해서 안 시켜 준게 아니란 것이다. 남한은 북한이 가입하게 될까봐 미국을 내세워 계속 공작을 했고 북한은 남한만 가입하게 될까봐 소련을 내세워 방해공작을 펼쳤다. 특히 남한은 단독가입 아니면 의미없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북한은 남한만의 단독가입 혹은 동시가입은 분단의 고착화라는 논리를 내세웠었다. 그리하다가 서로서로 상대만 안 들어가면 나도 안 들어가도 별 상관없겠다는 인식하에 쭉 지내온 것이다.


긴 세월 유엔 안 들어가고도 서로 불편 없이 살았는데 갑작스레 유엔에 동시가입하게 된데는 몇 가지 배경이 존재한다. 먼저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필두로 한 동구 국가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이 있다. 비록 이북이 그 동네에서 나름대로 독자노선을 걷긴 했지만 전통의 맹방들이 픽픽 쓰러져가고 소련 조차도 페레스트로이카다 글라스노스타다 해서 배반(?)을 때리는 판국이니 뭔가 살길을 찾긴 찾아야 했던 것이다. 남한의 경우를 보자면 경제로서는 이북이 따라오지 못할 만큼 멀찍이 도망간데다가 원님덕에 나발분다고 체제경쟁에서도 남 덕에 승리하게 된 것이 아닌가? 게다가 외화 팍팍 들고 박철언이 이 동네 저 동네 수교하러 다니고...


결국 이런저런 사정들이 겹쳐서 남북이 유엔 동시가입하기로 쇼부를 친 것이다. 소련으로서도 자신들이 미국하고 더 이상 군사력, 경제력으로 경쟁을 못하는 마당에 동북아의 남북 대치 상황이 급변하기를 바라진 않았을거고 어느정도 연착륙하기에는 유엔 동시가입을 마다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동구권은 픽픽 쓰러지지만 당시 북한은 건재하고 김일성도 꽤 팔팔했기 했던걸 감안했을 테다. 유럽의 정치적 격변도 컨트롤 하기 힘든데 열받은 이북이 혹 사고나 치지 않을까 싶었던 차에 유엔 동시가입이란 카드는 동북아 긴장이 어느정도 연착륙 할 수 있는 카드로 다가 왔던 것일테다.


지금 생각해보면 딱 한 세력이 어이없어 했을텐데..그건 바로 남한내 운동세력들이 아닐까 싶다. 동구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우리식 사회주의를 믿으며^^ (이런걸 보면 참 주체적 민족이다 싶다. 남에선 민족적 민주주의, 북에선 우리식 사회주의) 이북을 민주기지로 삼아 남한 해방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지 싶다. 이북이 분단고착화의 상징인 유엔 동시가입을 승인했으니...소비에트 믿던 좌파는 좌파대로 급변하는 정세에 어이없어 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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