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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9/09
    이런 중국집이 있다.(마오 제삿날 기념)(1)
    molot
  2. 2004/09/09
    1976년 오늘(9.9) 모택동 영면
    molot
  3. 2004/09/09
    !!!이벤트 결과 발표!!!(11)
    molot
  4. 2004/09/09
    골 때리는 열린우리당 인권위원장.
    molot
  5. 2004/09/09
    긴급 공지!(10)
    molot
  6. 2004/09/09
    2003년 오늘(9.8) 레니 리펜슈탈 영면.(2)
    molot

이런 중국집이 있다.(마오 제삿날 기념)

홍미루, 곽동각....짱깨집 이름이 아니라 사람이름이다. 홍미루는 노문과 선배 이름이고 곽동각은 고대 영문과 후배 이름이지...가끔 이렇게 중국집틱한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신속한 배달과 서비스 군만두를 무기로 삼는 정말 실력없는 중국집들이 동네마다 산재해 있지만 그래도 신촌엔 괜찮은 중국집들이 꽤 있다. 화교타운으로 유명한 연희동에 가면 본토인들이 하는 중국집들이 수도 없고 그 중엔 비싼 료릿집들도 있지만 허름하지만 짜사이(중국식 김치? 장아찌?) 까지 챙겨주는 저렴하고 먹을만한 식당들이 점점히 박혀있다.(예전엔 화교들이 하는 중국집엘 가면 대만 총통 사진을 떡하니 걸어놓곤 했다. 그런데 요즘 천수이벤 사진 걸어놓은 집은 하나도 못봤다. 왜일까? 아마도 천수이벤이 분리독립주의자이자 대만성 출신이라 실향민 취향에 안 맞는거겠지.)

 

연희동 쪽 아니라 신촌에도 갈만한 중식집들은 역시 꽤 있다. 물론 고등학교 때 참고서값 삥땅쳐서 구석 방 하나 턱 잡아 탕수육 하나 시켜놓고 간만에 뺴갈 기울이곤 했던 약간 지저분하지만 편안한 그야말로 중국집은 이젠 찾기가 힘들다.

 

게다가 짜장면이라고 말하면서 자장면이라고 표기하는 바로 그것, 이삿짐 들여놓고 풀기 직전에 먹는, 당구장이나 만화방에서 먹는 바로 그 자장면이 맛있는 곳은 찾기가 힘들다. 예전에 태원 같은 곳은 여기 짜장면 둘 이요 하고 주문하고 나무젓가락을 뽑아드는 순간에 턱하니 자장면이 나와 황당하기도 했었지^^ 요즘은 글쎄....신신원 쟁반짜장이 먹을만하긴 하지만 내 입맛엔 너무 달착지근하게 느껴지더라. 굴짬뽕으로 유명한 복성각 자장면이 먹음직한 갈색에다가 약간의 기름기가 돌면서 물기가 많고 풍성한게 고춧가루 착 쳐서 먹으면 어금니 사이에 신침이 돌게 하더라.

 

자장면에 한정하면 실망스럽지만 요리 먹을 집들이야 꽤 많다. 좁은 계단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야 하는 점이 외려 중국집 다운 신뢰를 주는 홍매도 그러하고 아까 말한 복성각도 그렇다. 물론 자유총연맹 옆에 있는 복성각은 옛날식 방을 갖춘게 아니라 룸을 갖춘 집이긴 하다. 명물 거리 쪽으로 가보자면 세계 삼대 요리라는 북경오리 카오야 집도 뭐 굳이 따지자면 중국집이긴 하고...(글쎄 여긴 비싸서리...) 매콤한 요리들로 여성팬들의 인기를 끌고 있고 한때 여러 언론을 타기도 했던 완차이도 퓨전 요리집에 가깝지만 난잡스럽지 않아 좋다. (근데 이 곳도 내 입맛엔 좀 맛이 가볍지...)

 

그리고 완차이랑 맞붙어 있는 리틀 차이나는 정말 강추 업소다. 여긴 좀 불편한 점이 있긴 하다. 일단 식사류를 팔지 않는다는 점, 저녁때만 문을 연다는 점, 테이블 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 등이 그 단점들인데 외려 식당이란게 좀 이런 맛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난잡하지 않은 빨간색으로 이미지를 통합한 인테리어 또한 식당과 잘 어울린다. 근데 식당 이름은 좀 너무 없어 보이지 않나? 리틀 차이나가 뭐람. 포인트가 없잖아...

 

리틀 차이나 같은 경우엔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평일에도 거의 손님들이 테이블을 가득채우고 있다. 술은 아주 다양한 종류를 팔고 있지만 료리가 그리 다양하지도 않다. 대략 열가지 정도? 그 중에서 국물이 있는 음식은 딱 한가지다. 게살스프가 그것인데 맵싸한 맛이 참으로 뛰어나다.그 밖에 요리들도 맛이 잡스럽거나 달착지근하지 않은게 입에 착착 붙는 편이다. 근데 이 집은 식사류를 팔지 않기도 하거니와 식당이라기 보다는 술집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래서 더 맘에 드는지도 모르겠다. 주고객층은 주로 이십대 중후반에서 삼십대 초반 정도.

 

일전에 이집에 갔다가 카운터 옆에서 숙제에 열중인 초등학교 2,3 학년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주인 딸래미를 보고 '넌 참 좋겠다. 난 어릴적에 우리집이 중국집 하는게 꿈이었었는데~' 하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 말을 엿들은 주인 아주머니 코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웃으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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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오늘(9.9) 모택동 영면

1976년 오늘 모택동(1893~1976)이 83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사실 이 디렉토리를 꾸준히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마오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늘날 모택동을 이해하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아직도 마오주의에 입각해서 투쟁을 하는 세력들은 전세계에 몇군데 있고 중국에선 모택동 부적이 명절 선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이며 모택동을 냉혈한 마키아벨리스트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뿐인가? 마이크 타이슨의 팔뚝에는 체 와 더불어 마오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문신으로 박혀있다.

 

한 인물, 한 사건에 대한 진실한 해석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게 옳을 것이며 마오의 진실은 그에 대한 몇가지 해석 줄기 가운데 어딘가쯤 혼재되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에 대한 반대자나 지지자들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1911년 청년 마오가 혁명전선에 뛰어든 이래로 죽는 날까지 마오는 전근대적 농업사회에서의 반제투쟁과 사회주의 투쟁에 관한 교과서를 한 줄 한 줄 자신의 온 몸으로 써내려간 인물이다. 누구보다 철저한 공산주의자 였으면서도 창의력 있는 혁명가 였던 것이다.

 

모스크바랑 직접 라인을 대고 있던 이립삼 같은 초기 중공당 지도자들이나 프랑스 근공검학 출신인 등소평등과는 다르게 마오는 철저히 중국문화의 세례 속에서 커온 사람이다.(이것은 그의 큰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여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마오가 학습하던 영문판 공산당 선언이 후일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communist party 라는 원문에 마오가 달아놓은 주석은 뭔고 하니 '공산주의자 연회(宴會)'...--;; 파티가 당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잔치(연회)로 해석했다는 말인게다. 믿거나 말거나^^

 

항일 투쟁과 국공 내전 가운데서 마오가 남긴 주옥 같은 어록은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한다. '정권은 총부리에서 나온다'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울 수 있다' 등등

 

결국 대장정을 마치고 이차 국공합작을 통한  항일투쟁 중인 1943년 마오는 중공당 중앙정치국 주석, 중앙서기처 주석에 올랐고 죽을떄까지 중앙위원회 주석직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전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그 이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한국전쟁)에 장남 모안영을 참전시켰는데 모안영은 공중전 도중에 전사했다.

 

이후 인민공사, 대약진 운동, 문혁 와중에서 수많은 동지들을 숙청했고 좌편향적 정책들로 인해 인민들에게 해를 입혔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아직도 중국 인민들은 자주독립과 주권 수호,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의 그의 공이 과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중공당은 1981년 6월 당 중앙 11기 6중전회에서 '건국 이래 당의 역사적 몇가지 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 그 결의에 따르면 모택동 사상은 중국에서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이고 그것은 여전히 중공당의 중심사상이며 중국인민의 중요한 유산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앞으로 얼마나 우경화 해날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우경화와 별개로 능구렁이 중국인들이 마오에 대한 위와 같은 공식적 평가를 쉽게 바꿀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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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결과 발표!!!

박근혜와 박근혜 미니홈피 사이월드 백만번째 방문객과의 데이트에 버금가는 빅 이벤트!

 

'peyo와 molot 사이에서' 천번째 방문객 이벤트가 성황리에 마감되었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천번째 방문객 행인께서 술을 끊었다고 하시니 행인께는 다음 기회에 감사의 마음을 표할 수 있는 자리를 가지도록 하면 어떨까 싶네요. 박근혜도 아마 백만한번째 사람하고 만남을 가졌다죠?

 

그렇다면 그 다음 1001번째 방문자는 달군 되시겠네요. 달군에게 이벤트 당첨자에 준하는 대우를 하도록 하고 참여를 희망하시는 자일리톨, 스머프 님등을 저렴한 회비--;;(절대 세종대왕 한 분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로 초청하고자 합니다. 추석 연휴 이전에는 반드시 모임을 갖는 것으로 해놓고 시간을 맞춰보도록 하지요. 참석 희망자들은 댓글을 달아주세요.  새끼줄 한 번 맞춰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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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때리는 열린우리당 인권위원장.

 며칠전에 국보법 관련 국회 취재를 나갔다. 민가협 하고 열우 인권위원장 조성래 의원 면담 자리였는데 사실 별 기대를 안하고 갔다. 열우당에도 국보철폐론자들이 꽤 많은 상황이니 인권위원장이면 당연하게 폐지론자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왠일 이람!! 자칭 인권변호사 출신 조성래는 강력한 폐지 반대론자 였던 것이다. 카메라가 없었기 떄문인지 조성래 의원은 황당한 발언들을 민가협 회원들 앞에서 계속 쏟아내더라. 기사화 한게 대부분인데 빠진 몇가지를 들어보자면...'우리한테 표를 주고 말고를 떠나서 국보법 폐지 반대라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우리는 화해와 관용 정신을 가져야 한다.'(이건 국보찬성론자들을 관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웩) '나에게 강요하지 마라'(국보철을)

 

민가협 엄마들은 뒤집어 지기 시작했고 한나라당이랑 다를바가 없다는 발언들을 했다. 조성래 왈 '부산 가서 물어보세요.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항상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람입니다'

 

머 열우 내의 관료출신 어떤 의원이 이런식으로 말한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소위 인권변호사 출신의 인권위원장의 뚫린 입에서 저런 버라이어티한 발언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니까 참 황당터라.

 

조성래가 누군가? 초선의원이지만 노무현 직계 부산사단의 좌장으로 불리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난 조성래가 그냥 나오는 데로 말한게 아니라 어떤 노림수가 있는건 아닐까 하는 속셈이 든다. 그날 아침에 이미 조성래는 열우 전략회의인지 나발인지에서도 그런 말을 한 모양인데...여권이 국보철 하겠다는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심히 우려스럽다. 이 쉐이들이 안 나서면 사실 안 되는것 아닌가?

 

조성래의 황당한 발언들을 듣고 노회찬 의원실에 가서 일러주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멘트 딸라고...

 

첨에 노회찬의원은 안 믿더라. 황당해하면서...그래서 설마 내가 지어냈겠냐고? 진짜라고 몇번이나 강조하니까 믿더라--;; 기사화 하지 않은 노회찬의 말 한마디 '인권 변호사는 무슨 인권변호사 먹고 살라고 변호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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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공지!

이 블로그에 들어오시는 모든 분께 알립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방문자 수가 날로 증가하는 지라 감사의 의미로 이벤트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이 블로그의 1000번째 방문객을 저희 사무실(진보네트워크)로 모셔 제가 직접 요리한 안주로 술을 한 잔 대접하고자 합니다.

 

추세로 보아하건데 오늘 아니면 내일 당첨자가 가려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한가지 있긴 한데...누가 1000번째 방문자인지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여튼 그 방법은 제가 강구하겠습니다. 물론 이 이벤트를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아서 자신이 방문자 이면서도 쌩까는 분이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뭐 꼭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다들 마음의 준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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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오늘(9.8) 레니 리펜슈탈 영면.

미안하다. 오늘이 아니라 어제다--;; 이해해달라. 그래도 새벽 한시가 넘어서 퇴근하고 이걸 쓰고 있다. 어여삐 봐주기 바란다. ㅠ.ㅠ

 

2003년 9월 8일 다큐멘터리 감독, 극영화 감독, 사진 작가 그리고 스킨스쿠버 다이버인 레니 리펜슈탈이 101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레니 리펜슈탈은 20세기 여성 예술가 중에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미학적, 선동적 측면에서 볼때 이미 20세기 전반에 가장 완성된 형태의 결과물이었다. 무용가, 영화배우로 그녀의 예술 커리어가 시작됐지만 그녀 스스로가 표현대상으로 그치기엔 그녀의 예술적 능력이 너무 뛰어났다.

 

스스로 프로덕션을 차려 제작, 시나리오, 연출, 주연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북치고 장구쳐서 만든 작품 '푸른 빛'은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고 그녀는 곧 나치에 픽업된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전설적인 작품이 바로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 1934 감독 레니 리펜슈탈 출연 아돌프 히틀러, 루돌프 헤스, 파울 요제프 괴벨스' (출연진만 봐도 으스스 해지지 않나?)이다.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이 작품은 21세기 오늘날에도 보는 사람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든다.

 

120명의 스탭, 36대의 카메라, 8개월 간의 편집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난 이 작품은 그야말로 프로파간다의 극치다. 도입부에선 히틀러가 등장한다. 그 장면은 마치 메시아의 강림을 떠오르게 하며 또 다른 장면에선 히틀러가 20만명의 군인 사이를 헤치고 등장하는 샷이 나온다.  이 샷을 잡기 위해 리펜슈탈은 정면의 첨탑에 카메라를 설치하기 까기 했다. 그 외에 부감샷의 사용을 통한 장엄한 장면과 백그라운드 뮤직으로 쓰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Horst Wessel Marsch’까지...정말 이것이 예술이로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작품이다. 미학적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을 뛰어넘은 창작물이 있을까?

'의지의 승리'를 패러디 한 작품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앨런 파커 감독의 '핑크프로이드 더 월'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에 이르기까지...그리고 우리가 2차 대전 자료화면들에서 흔히 보이는 히틀러의 카리스마틱한 묘사들은 거의 전부가 이 작품에서 따온 것이다. 심지어 나치 패망 이후 이 작품은 나치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오랬동안 전세계적으로 방영금지작으로 묶여있기도 했다.

 

그녀의 천재성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전세계를 경악케 한 작품이 바로 이듬해 나왔으니 그 작품은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올림피아' 인 것이다. 이후 수많은 스포츠 중계와 상업적 영화들에 영감을 준 이 작품은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과 생동감 넘치는 경기 장면들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그 뒤로 매 올림픽 마다 만들어지는 기록영화들은 사실 전부가 이 작품의 패러디에 불과하다.

 

'올림피아'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다. 레니 리펜슈탈은 동양에서 온 과묵한 한 청년의 모습에 혼을 팔려버렸으니 그가 바로 '손기정'이다. 올림피아의 꼭지들 중에 가장 긴 시간이 할애된 부분이 바로 손기정의 마라톤 역주 장면인게다. 물론 올림피아 또한 나치스와 아리안 족의 우월성이란 주제의식이 과도하긴 하다. 이 지점에서 내가 미디어 참세상에 올린 기사를 하나 참조하라.- "축구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저항세력 되어 싸웠을 것"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0887&page=2&category1=3

 

어쩌면 당연한것인지 모르겠지만 2차대전 이후 리펜슈탈은 전범 재판까지 받았고(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실형은 안 살았다.) 그녀의 예술은 어떤 자본과 정치세력의 뒷받침도 못 받았다. 결국 리펜슈탈은 돈도 안들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장르를 찾았으니 그것이 바로 사진이었다.

 

그녀는 이후 아프리카의 풍경과 인간들을 사진으로 담아냈고 그 작업들 또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뿐인가? 71세에 스킨 스쿠버 자격증을 땄고 그 떄부터는 해저 카메라맨으로서 그녀의 예술을 이어나갔다. 100세 생일을 맞이하여 공개된 작품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해저의 인상'. 그녀는 이 작품으로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컴백을 전세계적 찬사 속에서 화려하게 해냈다.

 

2003년 레니 리펜슈탈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잘못은 히틀러를 만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예찬자와 비판자 모두에게 경악과 감탄을 남겨준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중 하나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의지의 승리’ 중 두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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