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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4/09/29

1946년 오늘(9.30)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종결

 

1946년 9월 30일 이차대전 패전국 독일의 책임을 묻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11개월의 심리 끝에 선고공판이 이루어졌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는 45년 8월 8일 미,영, 소, 불의 대표가 조인한 런던 협정에 기반한 것이다. 그 이후 19개국이 추가로 협정에 참가했다. 45년 11월에 시작된 뉘른베르크 재판은 앞서 말한 런던 협정에 기반한 것인데 반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동경 전범 재판은 포츠담 선언 제10항 ‘우리들의 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한 일체의 전범에 대하여 엄중한 처벌을 가한다’ 에 기반한 것이다.

기소된 24명이 나치 고위관료와 장군들 가운데 12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3명은 종신형 6명은 10~20년의 유기형 그리고 3명은 무죄 방면을 선고받았다. 24명의 열혈 나찌스들에 대한 기소이유는 1. 평화에 관한 죄:국제조약과 협정을 위반하고 침략전쟁을 계획, 준비, 실행한 죄 2. 인도에 관한 죄: 대량 학살, 추방, 집단 살해 3. 전쟁범죄: 국제 전쟁법의 위반 4. 이상의 세가지 범죄행위를 계획, 공모한 죄  의 네가지이다. 10월 16일에 나치스의 외무장관을 지낸 폰 리벤트롭을 시작으로 첫 사형이 집행됐다. 교수대 계단은 13개. 독일 군부의 원수를 지냈던 빌헬름 카이텔은 교수형이 집행될 때 '독일을 위해'를 외치고 목이 달렸단다. 히틀러의 두뇌 괴링은 사형집행 직전에 자살했고...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만, 승자의 입장에서만 말해도 뉘른베르크 재판은 복잡하고 중첩된 의미를 지닌다. 독일의 패망이 확실했던 45년 4월 29일 제3제국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그 다음날 동반 자살해버렸다. 여기서부터 승전국들의 고민은 시작됐다. 특히 미국은 반인류적 죄행을 저지르는 독일과 일본을 응징한다면서(요즘도 이런 소리 많이 나오지...여전히 미국은 악랄한 독재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전쟁하고 있지않나) 참전했기 때문에 고민은 더했다. 결국 나치와 일제의 잔혹성에 대한 기록을 전하기 위한 명분으로 전범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주범 히틀러는 자살을 했고 또 하나의 주범 히로히토 천황은 살려주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재판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정책적 악행을 죄로 명시한 현행법도 부족했고 나치스들은 죄상을 총통에게로 떠넘겼다. 죄형법정주의 원칙과 불소급원칙을 적용할 경우 처벌할 만한 죄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뉘른베르크 법정은 명령에 따랐다 할 지라도 범죄의 궁극적 책임은 개인에게 존재함을 확인했고 홀로코스트 같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선 국경과 공소시효가 없다는 전례를 남겼다. 결국 뉘른베르크 재판의 결과물은 유엔이나 다른 국제 기구들을 통해 성문화되고 전례로 남았다. 최근에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에 대한 특별 법정이 그 비근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98년 로마협약으로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이 가시화되고 있지만 미국의 특례요청(미군의 작전 수행과정에 이루어진 행위는 형사재판소의 소추 대상이 아니어야 한다는 등. 우웩!)으로 지지부진한 상태다.


그런데 이런 것 외에도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해 생각해 볼 점은 정말 부지기수다. 전쟁 과정에 벌어진 연합군의 범죄(문화재 파괴,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은 승자의 정의라는 원칙에 의거해 전혀 언급되지 조차 않았고 소련인민에 대한 전쟁범죄들도 별다른 이슈로 떠오르지 못했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인권'이란 것이 미국 맘에 들지 않는 정부에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준 강력한 무기로 등장했다. 또한 수정주의 사관의 대두에 따라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나치스, 일제의 범죄에 대한 논란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 반인륜적 국가범죄에 대해 개개인의 책임을 묻는다고 해결이 안된다는 것까진 이해하겠는데 집단 전체의 광기나 구성원 모두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그건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말자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게다가 이런건 극우파들이 악용하고 있다. 남경 대학살은 실제하지 않았다던가 전쟁시 성노예의 문제에 대해 일반적 성착취의 관점에서 접근해 물타기를 벌이고 있는 일본 후쇼사의 교과서나 산케이 신문을 보라!)


전후 일본에서 일억총참회론을 내세워 천황과 전범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던 것처럼 최근의 수정주의 역사학은 결국 아무의 책임도 묻지 못하고 허울 좋은 성찰만 강조하게 되는건 아닐런지? 고민과 공부가 더 필요한 지점인 것 같다.


처형당한 나치스 수뇌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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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오늘(9.29))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 영면.

 

1902년 9월 29일 프랑스의 문필가이자 소설가 에밀 졸라(1840-1902)가 영면했다. 그리고 에밀 졸라는 파리의 판테온에 묻혔다. 판테온은 정말 프랑스 사람 특유의 자존심이나 허풍에 걸맞는 공동묘지 이름이 아닌가? 만신전이라니... 사실 에밀 졸라는 한국 사람들에게 친숙한 소설가이다. 그의 소설을 한편도 안 읽어본 사람 조차 이 세상에서 제일 불효자로 에밀 졸라를 많이 기억하는 편이다. 비근한 예로는 세상에서 가장 마른 ‘비사이로 막가’ 일본의 최고 대머리 ‘도끼로 이마까라’ 등이 있다.


또한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염상섭과 더불어 에밀 졸라는 자연주의 소설가로 각인되어있다. 에밀 졸라는 발자크의 인간희극 시리즈에 맞서기 위해 루공 마카르 총서를 썼다. 루공 마카르 총서는 이십권으로 이루어진 연작(?)성격의 종합 소설이다. 루공과 마카르 두 집안의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통해 제2제정 프랑스 사회를 묘사한 작품이라고 하더라(물론 난 이걸 다 읽어보진 않았다.)  일찍이 맑스가 ‘서점의 잡다한 경제학 책을 뒤적이는 것보다 발자크 소설을 읽는 것이 경제학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상찬할 정도로 발자크는 리얼리즘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발자크의 인간희극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승기를 그린 것이다. 이에 반해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는 그 이면을 그려낸 것이다. 철도와 해운의 발달 이면에 있는 이촌향도 현상, 도시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 노동쟁의등이 졸라의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 모파상 또한 졸라의 문하에서 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졸라의 작품으로는 제르미날(대혁명 이후 프랑스는 자체적으로 달력을 만들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달 이름들을 거부하고 알아서 만든 것이란다. 제르미날의 의미는 ‘싹트는 달’이다.) 이 있다. 기회가 되면 다들 읽어보시길...제르미날에서 그려지는 광부들은 굳건한 의지와 도덕적 우월성을 자랑하는 순결한 노동전사들이 아니다. 온갖 패덕과 성적 문란상을 저지르고 있으며 부르주아지들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지저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노조는 결성되고 그들은 일어서서 맞선다. 정말 싹트는 달인게다(이렇게 써놓고 보니 그렇고 그런 뻔한 소설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인터내셔널 깃발이 등장하는 장면은 좀 뜬금없긴 하다) 158분짜리 대작으로 제작된 영화 ‘제르미날’도 참으로 볼만한 영화다. 프랑스의 안성기 쯤 되는 제라르 드 빠르디유가 나온다.


마농의 샘의 감독이기도 한 클로드 베리가 역시 감독을 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클로드 베리의 아버지는 평생을 직공으로 살다간 노동자였다고 하고 베리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노동계급의 비애와 소망을 동시에 엿보았단다. 광부 마외 역의 제라르 드 빠르디유와 그의 아내 역을 맡은 미유 미유의 아버지들도 노동자였고 그들은 이 영화를 통해 부모를 추모했단다. 주인공 에티엔느 역의 르노 도 프랑스에선 대강 안치환 쯤 된다나?


영화를 보면 참 가슴 찡한 장면들이 많다. 과묵한 가부장 노동자에서 전사로 변신한 마외(제라르 드 파르디유)는 파업 대열을 막아선 군인들 앞에서 외친다. “쏴바라. 어서 쏴봐! 이 개자식들아” 파업과 갱도 붕괴 과정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었으면서도 조업재개에 끝까지 반대하던 마외의 아내 마유드(미유 미유)는 사십이 넘은 나이에 수백미터 지하 갱도로 다시 내려가면서 “남편도 없다, 자식도 없다, 희망도 없다,그러나 살기 위해 나는 내려간다”고 되뇌인다. 약간 유치하지만 영화로 보면 감동스러운 에티엔의 발언 “파업은 실패다. 그러나 빵을 쥐고 주인행세를 하는 몇 안되는 무리들과 수천만의 노동자들이 대면할 그날은 반드시 온다”ㅠㅠ


이 영화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가 몇가지 더 있다. 헐리우드 영화가 그야말로 몰아치던 94년 미국영화에 대응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에서는 당시 수백만 달러의 예산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노동계, 문화계, 좌파 정당들이 발 벗고 나서 이 영화를 홍보했었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자면 예전에 민주노총 공식 후원 영화가 하나 있긴 했다.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 이거 연극은 정말 재밌었는데 영화로는 완전 쉣이었지. 안성기, 문성근, 황신혜, 심혜진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했지만)


내 기억에 이 영화는 한국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주라기 공원’이랑 정면 대결했었다. 무모하나 용감한 배급이었는데 결과는 말안해도 알겠지 ㅠㅠ 보름만에 극장에서 내려왔다.


에밀 졸라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드레퓌스 사건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그건 다음기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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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오늘(9.28)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 영면

 1970년 9월 28일 이집트 대통령 가말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의 상징적 인물이다. 사담 후세인 조차 제2의 나세르를 꿈꿨었고 리비아의 최고지도자 카다피의 벤치마킹 대상 또한 나세르이다. 뿐만 아니라 제3세계 국가들에 영향을 매우 크게 끼친바 심지어 박정희 조차도 나세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나세르는 이집트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로서 48년 1차 중동전쟁 이후 국내변혁의 필요성을 의식하여 비밀조직 자유장교단을 결성하여 중심 역할을 맡았다. 52년 7월 자유장교단은 마침내 민족주의적 쿠테타를 일으켰다.


이 쿠테타로 인해 이집트의 친영, 친미, 반민중적 무하마드 알리 왕조(마지막 왕은 파루크)는 종지부를 찍었다.  또한 이 쿠테타로 인해 2,300년만에 이집트 인에 의한(물론 이집트 인의 실체가 머냐고 물으신다면 할말은 없다--;;) 통합적 민족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세르의 쿠테타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아랍’ 이라는 코드의 제기였다. 이는 제국주의자들하고 짝짜꿍이 맞는 사우디 왕조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나세르는 영국, 프랑스 이후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복잡하게 얽힌기도 하고 마음대로 국경선이 그어져버린 아랍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물론 이것이 성공했다면 역시 제국주의적 성격을 띄게 되었을런지도 모르지만)


나세르는 시리아와 예멘과 함께 아랍연합을 만들기도 했다. 1956년 수에즈 운하에 대한 국유화를 전격적으로 선언했을 때만 해도 나세르는 전 아랍의 영웅이었다. 영국, 프랑스에 의해 한세기 동안 지배당한 수에즈 운하(이 가치를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와 아랍의 진정한 독립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이집트가 다른 국가들 위에 군림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시리아가 61년 탈퇴하고 즉각 아랍연합은 붕괴하고 말았다.


나세르는 50년대 말부터 계획경제를 실시하고 이집트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띄기 시작했다. 61년에는 사회주의 선언을 하고 사기업을 국유화하기 까지 했다. 당연한 결과로 미국-이스라엘이라는 축과 대립각을 격하게 세우기 시작했고 수차례의 중동전쟁에서 연전연패ㅠㅠ 했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패배가 연속될수록 아랍권에서 나세르의 인기는 높아가기만 했다.

  

그러나 연속된 패전은 역시 경제적, 정치적 부담을 낳는 법. 67년의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불과 6일(!)만에 패전하고 당시 이집트 영토였던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에게 점령되기도 했다. 결국 군사적 해결로 돌파구를 찾지 못한 나세르는 정치적, 외교적 해결방안을 찾기 시작했고 70년 6월에는 미국의 중동평화안을 수락했다. 


이 와중에 요르단에서 일어난 요르단 정규군과 PLO게릴라 간의 충돌사건을 수습하려다가 과로로 죽고 말았다. 일설에 따르면 요르단 국왕을 독살하고자 홍차에 독을 탔는데 실수로 자신이 그 홍차를 마셔서 사망했다고도 한다.(근데 난 이건 못믿겠다. 무슨 삼국지 연의도 아니고 말야..)


나세르의 후계자는 혁명동지이자 부통령이었던 안와르 사다트 이다. 사다트는 나세르의 노선을 계승할 것을 대내외에 천명하면서 냉전구도에서 미국의 편에 섰다. 78년에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미국 대통령 카터와 회담을 하기도 하고 81년에는 이스라엘을 방문하기도 했다. 점입가경으로 이집트는 아랍동맹에서 제명까지 당했다. 아랍권내에서 이집트의 지도적 위치는 상실 당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걸 만회하기 위해 사다트는 더 강한 친미적 경제, 외교 정책을 펼쳤고 외자도입과 투자 증대정책을 펼쳤으나 이집트는 인플레이션, 주거, 교통, 실업 문제에 점점 더 시달리게 됐다. 결국 사다트는 82년 암살당하고 말았다. 사다트와 나세르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있다. 대통령 전용차를 타고 카이로 시내를 달리고 있던 사다트가 교차로를 만났다고 한다. 운전사가 ‘각하 어디로 갈까요’ 라고 물으니 사다트는 ‘전임 나세르 대통령은 어떻게 했나’ 고 되물었단다. 운전사는 ‘나세르 대통령께선 좌회전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사다트 왈 ‘그러면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 하게나’ 라고 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소싯적에 아버지가 사온 사다트 자서전-중앙일보사 간-을 읽었는데 그 땐 사다트가 정말 훌륭한 사람이고 나세르는 이상한 독재자 인줄 알았었다. 돌이켜 보니 참 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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