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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의 오류는 국가간체제와 국내체제의 혼동

보르디가님의 [양아치 창비] 에 관련된 글.

 

보르디가 님의 글은 여러 면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보르디가 님의 글에서 문제삼는 내용들은 창비주간논평의 다양한 필자들 중 김기원 교수의 개인적 성향이 상당히 반영된 것도 사실이지만, 창비라는 집단이 내세우고 있는 '진보개혁 구상'이 양아치스럽다는 지적엔 십분 동의한다. 비싼 돈 주고 계간 <창작과 비평>을 꾸준히 보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간 한국사회에서 창비의 행보를 다시금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창비의 여러 논의들 중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동의한다. 창비는 진보적 민족주의라는 이론적 기반이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냉전구조 붕괴와 남북간 화해분위기 형성 등 역사적 상황이 변화하면서 더 이상 적절하지 못하다는 판단 아래 일찍부터 세계체계론을 수입해 이론적 쇄신을 시도했다. 이러한 이론적 성실함은 평가해 줄 만하다. 그 과정에서 민족통일이라는 목표는 탈분단체제 형성으로 변화하였고, 이에 따라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조선족, 재일조선인 같은 디아스포라도 껴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체계 내에서는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재편을 통해 동아시아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전망을 세웠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일찍부터 전후 미국 헤게모니가 서유럽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형성되었음을 지적해 왔다. 간단히 말하면 서유럽이 다자간 질서로 나아갔다면, 동아시아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일방적 질서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변화의 계기는 냉전구조의 붕괴, 미국자본주의의 쇠퇴와 중국자본주의의 부상 등이었다. 이러한 흐름들을 읽어내면서 동아시아 공동체의 가능성을 분석하고 제시한 대표적인 이가 백영서 교수다. 그의 논의를 비롯한 창비의 동아시아 연구들은 국가간체제의 수준에서 한, 중, 일이라는 국민국가 단위를 중심으로 꼼꼼히 짚어내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은 중국과 일본의 대립구도, 특히 일본의 경우 과거사 문제를 내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피해의식의 극복을 내세우는분위기라던지, 국내 계급투쟁이 극단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상황이라던지 하는 문제들 때문에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상황 때문에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라는 목표 제시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러한 창비의 논의가 국내체제로부터 국가간체제로 분석수준을 거슬러 올라가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하면서도 다시 국민국가 수준의 국내체제로 추상수준을 거슬러 내려와서는(엄밀히 말하면 추상수준을 거슬러 내려오지 않는다) 계급관계에 기반한 분석을 버리고 진보개혁 통합과 같은 의제를 내놓는다는 것이다. 창비의 양아치성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좀더 거칠게 말하면 자신들의 거두인 백낙청 교수를 쉽게 거스르지 못하는 데에 기인한다. 그러니 국민국가의 그늘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과 상반되는 부르주아 제도정치 중심의 주장들을 내놓으며, 결국 세계체계론을 편의적으로 적용한 꼴이 되었다. 국가간체제에서의 행위주체인 개별 국민국가를 중심에 두다 보니 국내체제에 대해서도 여전히 국민국가를 중심에 두고 국내 사회집단간 갈등의 조정과 통합 같은 것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백영서 교수의 연구에서는 '국익'과 같은 개념이 국내체제 분석을 대신한다.

 

요는 이렇다. 창비주간논평의 김기원 교수의 글이나 창비가 제기하는 진보개혁 구상과 같은 국내정세 분석들에 대해서는 그 국민주의적 함의를 비판하면서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창비라는 집단은 워낙 그간 미국을 강하게 의식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국가간체제, 국제지역질서에 대한 시각과 분석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때 창비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가 자신들의 국민주의와 잘 맞지 않는다는 판단 끝에 덮어두었다고 생각하는,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접근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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