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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그 섬을 생각한다

최근 이래저래 해서 오키나와(沖縄)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증폭되었던 차에 2005년 3월 3일 3.1절 특집으로 MBC에서 방영한 오키나와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우치난츄, 일본 속의 타자들'과 '오키나와, 평화를 꿈꾸는 섬'의 2부로 구성된 이 다큐멘터리는 그 기획의도가 '우리 민족'의 경험을 되새겨보자는 다소 애매한 것이긴 해도 '풍광 좋은 관광지'로 소개하는 각종 프로그램보단 낫다 싶었다.

 

다큐멘터리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국민의식'을 묻는 것으로 출발한다. 길거리 인터뷰에서는 국적이 뭐냐고 물으면 일본인이라 대답하겠지만, 당신은 일본인(니혼진)인가 오키나와인(우치난츄)인가를 묻는다면 오키나와인이라 대답하겠다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오키나와 지역신문인 <오키나와 타임즈> 2004년 2월 20일자에 발표된 자체 설문조사 결과로는 잘 모름 1.9%, 일본인 28.8%, 일본인이면서 오키나와인 41.8%, 오키나와인 27.5%였다.

 

오키나와와 전쟁

 

이와 같은 모호한 국민정체성의 이면에는 전쟁의 상흔이 있다. 1945년 4월 필리핀, 타이완을 거쳐 18만 미군병력이 오키나와에 상륙했다. 이에 일본 군부는 본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오키나와 주민들을 방패로 삼았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일본군 사망자보다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이른바 '집단자결(옥쇄)'의 희생자는 전체 주민 40만여명 중 10만여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소년들은 학도단으로, 소녀들은 '히메유리'로 (히메는 공주, 유리는 백합을 의미) 전쟁에 동원되었다.

 

중반부에는 오키나와 중부 요미탄촌(読谷村)의 주민인 치바나 쇼이치(知花昌一) 씨가 등장한다. 치바나 쇼이치는 노마 필드의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에서 1987년 국민체육대회 때 소프트볼 경기장에서 일장기를 내려 불태웠던 슈퍼마켓 주인으로 소개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 (필드에 따르면 요미탄촌 어른들이 '일장기를 내린 것까진 좋았는데 왜 굳이 불태웠느냐'고 묻자 '태우지 않았으면 누가 또 게양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을 정도로 호탕한 성격이다.) 그는 지금은 민박집을 운영하며 평화운동을 한다. 치바나 쇼이치가 평화운동에 투신한 계기는 요미탄촌에서 치비치리 동굴이라는 '집단자결'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었다. 일본이 '집단자결'이라 부르며 의로운 죽음으로 미화했던 이사건을 치바나는 자결이 아닌 '학살'이라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피로 물든 역사 앞에서 몇 명이 죽었느냐의 문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도 살인무기로 가득찬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에선 세계 어느지역에라도 폭탄을 떨구기 위해 폭격기가 출격할 수 있다. 문제는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이즈음에서 오키나와 연구에 천착해 왔던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浪)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자신의 저서 <폭력의 예감>에서 폭력은 결과로서 기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감이라는 감각으로 기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당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바로 그 순간, 그 곳에서 폭력은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피해자의 수동성으로 읽히는것을 뒤집어 그것을 '방어태세'로 보아야 하며, 그러한 '방어태세'에서 '폭력에 대한 예감'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지금도 일본 본토인들을 '내지인'이라 부른다. <포스트콜로니얼>의 저자이자 역사교과서 문제와 관련하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도 홋카이도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10년 동안 그곳 사람들이 자신들과 '내지인'을 구별했던 경험을 회상한 바 있는데, 이는 아이누족이 살던 홋카이도 역시 일본 본토인들에 의해 '발견된' 땅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지인'들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에 '뒤늦게 합류한 자들'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 따라 전쟁에서 그들을 방패로 삼았다. 인터뷰에서 어떤 오키나와 사람은 오키나와인들이 다소간 지니고 있었던 '일본인으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의식이 더 큰 비극을 불렀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도미야마의 저서에도 등장하는 사료인 미군의 민사핸드북(Civil Affairs Handbook)에는 "대부분의 류큐인들은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한다."든지, "류큐인들은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친척처럼 취급받고 있다."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미군은 본토와 오키나와 사이를 이간질하는 선전을 하는 한편, 많은 오키나와인들을 '스파이' 혐의로 살해하기도 했다.

 

오키나와의 재현

 

오키나와의 재현과 관련해서 ... 뻔한 국수주의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영화나 TV 프로그램등은 제껴두고 ... 최근의 일본영화들 중 생각나는 것들(주로 청춘스타들이 나오는)로는 <눈물이 주룩주룩>, <심호흡이 필요해> 등이 있는데, 이런 영화들에서는 오키나와인들을 '어찌 되든 되겠지(なんくるないさ)'라는 말로 대표하면서 느긋하고 낙천적인 이들로 표상한다. 이는 '내지인'들에 대한 '방어태세'를 시골사람들의 '천진난만함'으로 해석하며 식민화하는 재현방식이라 생각한다. 그밖에 애니메이션으로는 <블러드> 시리즈가 떠오른다. 오시이 마모루의 소설 <야수들의 밤>, 극장판 애니메이션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TV판 애니메이션 <블러드+>가 그것인데, 물론 원작소설에서 극장판 애니를 거치며 TV판으로 갈수록 농도가 옅어진다. <블러드> 시리즈의 경우에는 미군 주둔지인 오키나와를(태평양전쟁은 너무 노골적이라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베트남전과 연결지으며 피식민자로 재현하지만, 이들을 잠재적인 저항 주체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조금은 다르다. 여기서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를 '흡혈귀'로 표상한다. 피를 빨린 이들이 서로를 물어뜯는 흡혈귀가 되어버린다는 설정을 통해 식민주의와 자본주의가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며 재생산되고 있음을 비판하지만, 거기서도 흡혈귀는 자신의 말을 갖지 못하고 웅얼웅얼대는 괴물에 불과한 것으로 재현된다는 한계가 있다. 사실 MBC의 다큐멘터리도 오키나와 사람들이 '준비된 답'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오키나와와 '인구, 안전, 영토'

 

오키나와인들이 '인구, 안전, 영토'의 측면에서 어떻게 '통치의 대상'으로 구성되어 가는지 살펴보자.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가 1972년 미군으로부터의 반환됨과 동시에 오키나와현(沖縄県)이 되면서 일본 국민으로 기입된다. 그러나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수년 전에는 '류큐독립당'이 지방선거에 후보를 내기도 했다. 영토의 측면에서 오키나와는 지도상 대만과 일본 규슈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최근 하마시타 타케시(浜下武志)의 저서 <오키나와 입문>을 보다가 필리핀부터 대만, 오키나와, 일본 본토, 한반도, 중국 서안지역이 나타난 지도를 남고북저 형태로 '뒤집어' 제시하는 것을 보면서 적잖이 충격을 먹고 스스로를 돌아본 적이 있다. 아시아 권역 내의 특정 지역을 떠올릴 때 그간 나는 남이 아랫쪽, 북이 윗쪽을 향하는 '대륙지향적'이며 '서구중심적'인 공간적 이미지를 떠올려 왔다. 그러나 대만, 남서제도, 오키나와 사람들의 시선은 중국 대륙, 일본 본토를 향해 있기보다는 남쪽의 넓은 바다를 향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슬프게도 오키나와 땅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미군기지이며, 베트남전 때에도,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 전쟁 때에도 폭격기는 오키나와의 카데나, 후텐마 기지에서 출격했다. 안전, 즉 정체성의 안정성과 관련해서는 박물관이나 기념물을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자료관은 1999년 3월 개관을 앞두고 주민들과 오키나와 현청 간의 투쟁의 장이 되었다. 예컨대 일본군에 의한 주민 학살 관련 전시물에서 일본군의 손에서 총이 사라졌다던가 하는 문제들이 불거졌다. 다큐멘터리에서도 한 오키나와 사람이 일본의 우익들이 곳곳에 세운 위령탑을 보며 전쟁에서 죽어간 오키나와인과 조선인들의 혼은 '영령'(일본어로 영령은 용감히 싸우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라는 의미라 한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은 자들의 혼마저 정당화의 도구로 이용하는 데 대한 반대를 표하는 것이었다.

 

 

 

-사진: 인터넷에서 찾아본 오키나와 1평 반전지주회 관동지부의 홈페이지 첫 화면

 

 

 

일본 내 미군기지의 약75%가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미군기지, 특히 공군기지로 인한 소음문제는 물론, 140여건의 항공기 사고도 일어났다. 2004년에는 오키나와 국제대학에 미군 헬기가 추락하는 참사로 다시 한 번 주민들의 투쟁이 일어났다. 사회사가인 나카무라 마사노리(中村政則)도 <전후사>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일본의 '전후'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 지적한다. 다큐멘터리를 보며 또 놀라웠던 것 중 하나는 지역신문인 <류큐신보>가 오키나와 전쟁을 마치 지금 일어난 일처럼 보도하는 특집호를 발행했다는 부분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주년이라는 오늘의 한국에서 내전이 불러온 수많은 상처와 문제들이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라는 문제의식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상기시킬 수 있는 미디어는 과연 존재할까 하고 생각해본다. (사족을 달자면 매주 월요일 일본 방위청 앞에서 열리는 평화운동가들의 시위 장면에서는 얼마 전 민주노총 위원장 후보로 나섰던 허**씨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탈식민, 하위주체, 대변(대표)/재현

 

고모리 요이치는 자신의 저서 제목을 "포스트콜로니얼"이라는 형용사로 정한 데 대해 그 뒤에 어떤 명사가 붙더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다고 한 바 있다. 그는 서구 식민주의 논리를 일본의 상황에 맞게 변용한 사람으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꼽는다. 후쿠자와는 1875년 <문명론의 개략>에서 사회진화론적 발전단계론에 기초하여 '문명', '반개', '야만'이라는 3단계 규정을 제시한다. 후쿠자와의 논의는 '문명'을 '문명'으로, '야'만을 '야만'으로 성립하게 하는 중간항적인 타자로서의 '반개'를 만들어냈다. 이에 따라 일본 본토의 인민은 '아이누인'이나 '류큐인'에 비교할 때 '문명'이 되며, '아이누'나 '류큐'를 영유하고 개척의 장소로 삼을 수 있는 권리가 '문명'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삼극구조 논리 안에서 '반개'는 '야만' 없이 '문명'에 대해 '반개'일 수 없기 때문에 '야만'을 계속해서 날조하지 않는 한 자기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다. 고모리는 자국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제도, 문화, 국민들의 정신을 서구 열강이라는 타자에 의해 반강제된 논리하에서 자발성을 가장하며 식민지화하는 '자기 식민지화'를 '식민지적 무의식'으로, 동시에 자신을 서구에 대해 '반개'로 설정함으로써 '문명'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확인하고 자신이 '반개'이기 위해 끊임없이 '야만'을 날조하고자 하는 숨은 의식을 '식민주의적 의식'으로 개념화한다.

 

다큐멘터리 시작부분의 한 길거리 인터뷰에서 한 도쿄 청년은 "오키나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아름다운 섬이며 사람들도 친절하다"고 대답한다. 표면적으로는 젊고 건전한 도쿄 시민으로서의 시민의식이 나타나 있을지 몰라도 거기엔 '자신은 세계도시인 도쿄의 잘 나가는 상류층에는 끼지 못한다'는 '열등감'의 형태로 '식민지적 의식'이 드러나고 있으며, 자신이 사는 도쿄의 삭막한 도시경관과 파편화된 인간관계로부터 회피하면서 오키나와를 아름다운 섬으로, 오키나와 사람들을 친절한 사람들로 대상화하려는 '식민주의적 무의식'이 드러나고 있다고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일까. 문제는 서울의 길거리를 거닐다가 어느 방송사에서 카메라를 들이밀며 내게 "제주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묻는다면 ... 제주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로서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참 아름다운 섬이고 사람들도 좋다"는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을까하는 불안한 예감이 밀려든다는 사실이다.

 

많은 오키나와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미군기지 반대운동에 회의적이라고 한다. '경제논리'는 그토록 무서운 것일까.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오키나와 젊은이들을 재단하는 것 또한 의문스럽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던 도미야마의 물음에는 피억압자를 온전히 대변/재현하는 것이 가능하느냐는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거기엔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동시에 담겨 있다고 본다. 어설프게나마 약자를 대변하는 일에 발을 들여놓아 볼 예정인 나로서는 누군가처럼 '약자들이 자신들을 대변하는 것을 가로막는 요소들과 싸워나가는 것이 문제이지 대변/재현 그 자체에 불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없다. 다만 약자를 대변하고자 하는 운동은 끊임없이 그 대변/재현의 불가능성에 대한 사고와 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지금으로서의 내 생각이다. 약자를 대변/재현하고자 하는 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시선이 '제국의 눈'을 닮아있지 않은지 자문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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