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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20
    베트남에서 호강하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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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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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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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2/20
    첫날, 구로카와 온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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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2/20
    우리 엄마, 박정숙 여사(1)
    오리-1

베트남에서 호강하기

파리에서 베트남으로 왔다. 1달 여의 잔차 여행이 꿈처럼 흘러간다. 오랜 잔차 여행에 심신이 지친 우리는 베트남 항공의 스탑오버 시스템을 적극 활용해서 베트남 바닷가에서 죽치고 놀기로 했다. 베트남도 잔차로 여행을 다닌다지만 우리는 바닷가 한 곳에 걍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잔차를 패킹한 박스 그대로 공항 수하물 보관센터에 맡겼다. 물론 돈은 내야 한다. 그리고 택시로 호시민 시내로 이동했다. 젤 먼저 한 일은 환전.

 

>> 한국에서 미리 달러 TC를 준비해 갔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1000동에 대략 70원쯤 했던 것 같다. 그러니 그리 큰 돈을 바꾼 것도 아닌데 아주 지폐가 다발이다. @.@

 

그리고 은행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팜응우 라오라는 여행자 거리로 향했다. 버글거리는 도시보다는 바닷가를 선호했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 날 바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으면 탈 요량이었다. 다행히 밤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어서 그 때까지 밥도 먹고 거리 구경도 하면서 놀기로 했다.

 

>> 팜응우 라오 여행자 거리의 모습. 베트남엔 진짜 오토바이가 많다. 근데 이 오토바이들 완전 폭주족들이다. 우리는 처음에 이렇게 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들에 적응을 못해서 고생했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토바이 사이를 유유히 걸어다녔다. 나름의 질서가 있겠고 큰 사고도 없다고 하니 함부로 넘들 사는 모습을 폄하하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 정말 오토바이는 그 소음과 매연... 증말 뷁~이다.

 

>> 불교 국가인 베트남에는 채식식당이 많다. 우리는 론리에 소개된 채식식당 중 한 곳에 들어가서 몇 가지 음식을 시켰다. 모두 아주 맛이 좋았다.



저녁에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무이네 바닷가로 향했다. 호치민 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해변이다. 여행객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한적한 곳이란 론리의 설명이 우리의 행선지 결정을 도왔다. 호치민 시에서 무이네 바닷가까지는 채 300km가 안된다고 하는데 저녁 7시 경에 출발한 버스는 자정이 되서야 무이네 바닷가에 내렸다. 너무 늦은 시각이고 해서 대충 내린 곳 근처에 있는 숙소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 날은 론리에서 봐둔 숙소로 이동을 했다.

 

>> Full Moon Beach라는 곳인데 여기서 우리는 일주일을 묵었다. 원래는 3~4일 경 있다가 호치민으로 다시 돌아가 메콩델타 투어를 하려고 했으나 숙소와 여기 바닷가의 분위기가 넘넘 맘에 들어 하루 종일 밥먹고 수영하고 술마시고 수다떨고 했다. 론리에도 소개되어 있는 곳이다. 별로 큰 규모의 숙소는 아니나 작은 수영장이 딸려있고 바로 옆이 바닷가라 운치있고 편리한 곳이다.

 

>> 우리가 묵은 방. 패밀리룸이다. 더블침대가 두개 있어 extra bed를 한 개 놓아주었다. 자그만 홈바, 화장대, 티테이블 등이 소박하게 놓여있는 곳이었다. 화장실이 오픈인 것이 에러였으나 그것두 나름대로 재미를 주었다. ^^*

 

>> 여기 숙소에서 먹었던 베지테리언용 식사들. 이 숙소 레스토랑에도 채식 메뉴가 따로 있었다. 역시 아주 맛남. 아침은 숙박비에 포함되어 나오고 점심과 저녁을 사먹었다. 아침은 부페식으로 나오고 주문을 하면 오믈렛이나 바나나팬케잌 등도 먹을 수 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매일매일 좋아하는 물놀이를 하고 가람이가 준비해온 방수팩에 디카를 넣어서 수중촬영 놀이도 했다. 공도 구해다가 바닷가에서 공놀이도 했는데 그것도 잼있었다. 밤마다 맥주와 칵테일을 홀짝거리면서 수다떠는 것도 좋았다. 볕이 너무 뜨거울 때면 바닷가에 놓인 썬텐배드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다 졸기도 했다. 같이 여행간 친구들 사이에 친밀도도 더욱 높아졌다. 행복했다. 물론 찍어놓은 사진은 많으나 수영복 차림이 참으로 거시기 하여 패쓰~

 

>> 하루는 근처 유명하다는 모래언덕(Sand Dune)에 반나절 놀러갔다. 어떻게 이런 모래언덕이 생겼을까 싶을 정도로 희안한 곳이었는데 현지인들은 이 곳을 웨딩사진 찍는 장소로 많이들 활용한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도 마침 1쌍의 부부가 웨딩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저 모래언덕이 이런데 진짜 사막이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 동아시아 쪽 나라들 관광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풍경을 여기서도 볼 수 있었다. 어린 꼬마에서부터 1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까지 모두 모래언덕에서 모래썰매(비료푸대)를 타라고 거의 강제로 사정을 하고 있다. 사진을 같이 찍어주고 돈을 달라고 한다. 안타겠다고 하면 끝까지 따라오면서 혼자 고즈넉하게 풍경을 감상할 수 없게 만든다. 하도 사정을 하길래 썰매를 탔는데 생각지도 않은 큰 돈을 달라고 한다. 줄 수 없다고 하니 어떤 아이는 울고 어떤 소년은 불같이 화를 낸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슬픈 풍경이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이제 이번 여행의 막바지로 접어들려고 한다. 정겨웠던 무이네 해변을 뒤로 하고 우리는 출국하기 하루 전 날 호치민 시로 돌아왔다. 그래도 전쟁박물관 정도는 봐야하지 않을까 해서...

 

>> 팜응우 라오 지역 한 숙소에 짐을 풀고 우리는 전쟁박물관으로 향했다. 베트남 하면 씨클로인데 한 번 타보자 해서 숙소에서부터 전쟁기념관까지 씨클로를 이용해서 갔다. 걸어서 가도 그리 먼 거리는 아닌 듯.

 

>> 전쟁박물관의 전시물들. 베트남 전쟁의 잔혹성을 사진과 설치물들로 표현해 놓고 있었다. 미군의 잔혹한 전쟁 범죄와 피해자들의 끔찍한 사진이 아주 많았다. 단두대는 실제로 사용되던 것이라고 한다.

 

>>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만찬. 역시 채식요리들.

 

생전 처음 베트남이란 곳에 여행을 갔는데 이렇게 놀다와도 되는건가 싶었다. 다음 번엔 이런 관광지가 아니라 진짜 베트남의 모습을 보러 다시 오고 싶다.

 

이렇게 나와 친구들의 40일 간에 걸친 대장정은 끝이 났다. 글로 사진으로 다 쓰고 담지 못한 고민과 느낌들은 온전히 내 몫으로 남기겠다. 아무래도 총명탕을 지어먹어야겠다. 이제 보니 나이 먹으면서 내가 극복해야 할 것은 떨어져가는 체력이나 고집불통의 성격이나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니라 아차 하는 건망증이란 맨날 뭔가를 흘리고 다니는 칠칠맞음이었던 것이었다. 뮌스터와 파리에서의 사고의 여파가 워낙 커서 이번 여행 베스트를 정리하긴 쉽지 않지만 좋은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진 것을 꼽고 싶다. 여행 중엔 서운하고 섭섭하고 징글징글 하다는 생각이 없진 않았으나 내 맘을 더 활짝 열어놓고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긴 것 같아 기쁘다. 다음 여행은 또 어떤 모험이, 어떤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내 안에 쳐진 금 중의 하나인 혼자 여행하는 프로젝트도 조만간 호흡을 깊이 들여 마시고 실천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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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파리, 파리

우여곡절 끝에 드뎌 파리 도착이다. 벨기에에서 어떻게 저떻게 프랑스 국경을 자전거로 넘기는 했으나 달라진 자전거 표지와 퍼붓는 비로 프랑스 북부 릴르에서 기차로 이동하기로 전격 결정, 기차로 파리에 도착했다.

 

>> 파리 북역의 모습.

 

대부분의 유럽 여행자들이 최고의 여행지로 꼽는다던 곳, 따뜻한 크로와상과 진한 커피 한잔, 카페테리아 앞에서 수많은 인파를 포커스 아웃 시키며 진한 키스를 나누던 연인들의 사진으로 기억되는 그 곳. 드뎌 파리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이번 여행의 일정 중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해 머물기도 한 곳이다. 그리고... 그리고... 나에게는 막판 끔찍했던 여행지로 기억되는 그 곳. 일기장도 홀랑 잃어버려 가물가물한 기억을 붙들고 이제부터 기록 시작이다.

 

>> 다리 이름이 머였더라... 암튼 이 다리를 건너면 루브르 박물관이다. 다리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거리의 화가. 멋있어서 걍 찍어 보았다.

 

>> 세느강의 모습. 여행자들이 유람선들을 많이 타나보더라. 우리는 못 타봤다. 일몰 때 유람선을 타면 멋지다고 하더군. 야경도 이쁘고. 한강이 참 큰 강이란 생각이 들었다.

 

 


 


>> 우리 파리 여행의 길잡이 르네 아저씨

 

어차피 항공기 일정이 프랑크푸르트 인 파리 아웃으로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지만 르네 아저씨가 없었다면 감히 맘 편히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르네 아저씨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지부인 Union Pacifiste(평화주의자 연합 쯤?)에서 활동하고 계신 활동가이다. 르네 아저씨와는 제작년 한국에서 있었던 국제세미나에서 만나 얼굴을 익혀논 터였다. 여행 초반 참석했던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국제회의에서 르네 아저씨는 파리 여행에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회사와 집 연락처를 알려주시고 파리에 도착하면 꼭 연락하라고 당부하셨다.

 

>> 에펠탑이 보이는 다리에서 한 컷. 저녁 늦은 시간에야 물어물어 캠핑장을 찾아갔기 때문에 파리에 도착한 첫 날은 이 곳의 정취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다음날 화장한 파리의 공기를 가르지르며 캠핑장에서 물어물어 세느 강변에 도착했을 때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보고 드디어 우리가 파리에 오긴 왔나보구나 하고 느꼈다.

 

파리에는 캠핑장이 딱 한 군데 있다. 파리 서쪽에 위치한 블로뉴 숲을 가로질러 가면 나온다. 이름도 블로뉴 캠핑장이다. 꽤나 대형화되어 있는 캠핑장인데 아주 사람들이 버글버글 했다. 캠핑장 안에는 각종 편의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다. 캠핑장 내 수퍼에서 아침마다 굽는 크로와상 냄새로 기억되는 곳이다. 파리 시내에서는 꽤 떨어진 곳이라 매일 아침과 저녁 꽤 긴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이동을 해야 했다. 블로뉴 숲에는 밤이면 밤마다 호객행위를 하는 성매매 여성들을 볼 수 있었다.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씁쓸한 풍경이다.

 

>> 퐁네프(Pont Neuf) 다리에서 친구들과. 정확히 말하면 네프 다리. 퐁(Pont)이 불어로 다리라는 뜻이란다. 우리에게는 퐁네프의 연인들이란 영화가 히트하면서 괜히 파리에 놀러가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실제 퐁네프는 세느강의 여러 멋진 다리 중 그저그런 다리였다. 그래도 온 기념으로 사진 한 장!

 

한 달을 멀쩡하던 내 자전거가 파리에 도착하고 나서 이상해졌다. 덜덜거리는 게 승차감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기어이 세느강변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와중에 타이어가 터져 버렸다. 튜브에 펑크가 나고 바람이 빠진 정도가 아니라 꽤 큰 소리를 내며 타이어 한 쪽이 터져 버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일단 점심을 먹고 근처 잔차가게를 알아보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겨우겨우 잔차를 끌고 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나동 자전거 바퀴에 펑크가 났다. 그래... 이럴 때를 위해 밤마다 르네 아저씨가 우리 꿈에 나타났던 게야. 친철한 르네 아저씨의 도움으로 아저씨 차에 나와 나동의 잔차를 싣고 아저씨 집으로 향했다.

 

>> 아저씨 집으로 가는 길에 근처 보쥬광장(Place des Vosges)에 들렀다. 북적거리는 보쥬광장 바깥과는 다르게 안은 굉장히 고즈넉하고 조용한 정원이었다. 건축가인 르네 아저씨는 이 곳 광장이 완벽한 대칭구조로 되어 있는 건축적으로도 아주 유명하고 유서깊은 곳이라 설명해 주셨다. 빅토르 위고의 집도 여기 어디에 있다고 한다. 보쥬광장 입구에서 르네 아저씨와 한 컷!

 

>> 보쥬광장 잔디에서 잼있는 사진찍기 놀~이!

 

>> 사진찍기 좋다고들 하는 보쥬광장에서 넘들은 예술 사진도 많이 찍더라만은 나는 걍 나동 찍어준 사진으로 대체. 정대칭 보쥬광장의 면모를 아주 살짝 엿볼 수 있다.

 

타이어가 타진 관계로 나랑 나동만 르네 아저씨의 멋진 빨간색 차를 얻어타고 다른 친구들은 차 뒤에서 열나 잔차를 타고 보쥬광장을 비롯한 마레지구 일대를 살짝 돈 후에 르네 아저씨 집으로 향했다. 르네 아저씨는 리퍼블리끄라는 전철역 근처에 살고 계셨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최근 리퍼블리끄 근교 바와 카페들이 멋진 언니, 오빠들로 아주 지대로 물이 좋다고 한다.

 

>> 뒤로 보이는 물은 생 마르땡 운하(Canal Saint Martin). 아저씨 집은 운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걍 지나치지 못하고 또 한 컷!

 

르네 아저씨는 우리 아빠뻘 되시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활동가이시다. 파리지엔답게 파숑도 아주 세련되셨다. 자극적인 음식이나 카페인을 못드신다. 현재 여자친구인 실비와 함께 살고 계신데 실비도 union pacifiste의 회원이다. 파리에서는 정말 이 커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거의 매일 저녁을 사주시고 전철표도 끊어주시고... 먹을 것에 걸신들린 우리들 때문에 아마 돈도 수억 깨졌을 거라 짐작된다. (-_-;;)

 

>> 르네 아저씨 집 베란다에서. 집 내부. 운하. 그리고 운하 다리에서 바라본 르네 아저씨 집. 캠핑장에서 파리 시내까지 너무 멀어서 캠핑장에서 며칠 지내고는 염치 불구하고 르네 아저씨 집에다 둥지를 틀었다.

 

>> 그 날 저녁은 근처 레바논 식당에서 아주 배가 터지도록 맛난 음식들을 대접받았다. 열 몇가지 음식이 차례로 나오는데 이런 중동음식에 익숙치 않은 우리들은 눈이 휘둥그레 가지고 열심히 먹어댔다. 먹느라 정신이 팔려 미처 사진으로 다 남기지는 못했다.

 

저녁을 먹고는 펑크난 자전거들을 르네 아저씨 집 지하 창고에 맡기고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캠핑장으로 갔다. 다음 날 실비가 근처 잔차가게에 우리는 데려다주기로 했다. 참, 파리 지하철은 전차가 멈추면 수동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

 

>> 바스띠유광장. 프랑스 대혁명에서 숨진 사람들을 기념하는 탑이라고 한다. 실비의 도움으로 잔차를 고치고 근처 바스티유 광장에서 놀았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파리 구경의 시작이다. 꼼꼼한 르네 아저씨가 파리에서 볼만한 곳의 스케쥴을 짜 놓으셔서 ㅋㅋㅋ 알짜배기 여행이 될 듯 하다. 그 첫 시작은 유명한 루브르 박물관

 

>> 루브르 박물관의 외관 모습. 루브르 박물관의 출입구인 유리 피라미드가 보인다. 최근 다빈치코드라는 책과 영화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해진 곳이다.

 

루브르에 가니 놀랍게도 한글로 된 관람 안내 팜플릿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 많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인지... 낮시간에는 사람도 디지게 많고 값도 비싸고 해서 입장료가 할인되는 오후시간(3시 이훈가 그렇다... 정확히는 기억이...)에 관람했다. 박물관이 워낙 커서 며칠이 걸려도 다 못볼만큼 크더라. 나중에는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해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관람을 하였다.

 

>> 입구인 유리 피라미드에서 길은 3갈래로 갈라진다. 프랑스 조각과 이슬람 미술을 전시해 놓은 리슐리관, 중세의 부르브를 비롯해서 루브르의 역사를 전시해 놓은 쉴리관, 그리고 11~15세기 이태리 및 스페인 조각들과 로마 지배 하의 이집트, 고전기 이전의 그리스 등의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는 드농관이다. 세 관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사진은 과거 요새였던 루브르 박물관의 과거를 엿볼 수 있는 해자이다. 어두워서 사진이 좀 흔들렸다.

 

>> 쉴리관 지층에서 루브르 역사를 관람하고 1층을 올라오니 바로 파라오 시대 이집으를 테마별로 관람할 수 있는 코스를 만날 수 있었다. 정말 방대한 양의 전시물들... 입이 딱 벌어졌다. 그 중 몇 장.

 

>> 당최 어떻게 돌아야 효과적으로 전시를 볼 수 있는지 모르겠고 타고난 길치라 방위도 어떻게 되는지 몰라 걍 되는대로 돌았다. 이 조각들은 파라오 시대 이집트를 돌아 고대 그리스를 돌아 16~19세기 이태리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던 곳인 것 같다. 아님 말구... (-_-;;)

 

>> 고대 그리스 조각들. 잘은 모르지만 팜플릿에도 소개된 것으로 보아 유명한 것들인가 보다. 보르게즈의 검투사, 사모트라케의 니케상이라 이름 붙여져 있다.

 

>> 역시 파라오 시대 이집트 전시물들. 오른쪽 아래로 보이는 것이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법전이다.

 

>> 리슐리관 1층에 전시되어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전시물들과 프랑스 조각들. 폐장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제대로 관람하지는 못했는데 메소포타미아 전시물들은 그 크기에서 오는 웅장함에 절로 기가 죽는다.

 

선사시대부터 19세기까지 유물들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놓았다는 루브르 박물관이지만 이러한 유적들이 모두 과거 제국주의 시기 약탈에 의한 것일거라 생각하니 약간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간이 없어서 찬찬히 돌아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밀로의 비너스 진품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지만(솔직히 그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더라만 머 진품을 보았다고 더 좋은줄은 잘 모르겠더라) 그 외에도 모든 소장품이 다 훌륭했다.

 

>> 온틍 회색빛인 파리는 야경이 유명한 도시이다. 루브르에서 다리가 붓도록 뛰어 다니고 나오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돌아오는 길 구경한 에펠탑의 야간 버전도 참 멋있었다. 관광객을 위한 것인지 밤이면 에펠탑에서 레이저도 쏘고 삽시간에 불이 붙은 듯 번쩍번쩍한 조명도 쏴준다. 에펠탑 꼭대기에서 보는 야경도 멋있다고 하던데 그 값도 만만찮아서 포기했다. 대신 걸어서 무료로 어느 정도까지 입장할 수 있게 해주는데 그 줄도 엄청 길어서 것두 포기! 어차피 고소공포증 땜에 높은 곳에서의 전망을 그닥 좋아하지 않으므로.

 

>> 담 날 우리가 찾은 곳은 뷔뜨쇼몽 공원(parc des buttes-chaumont)이다. 쓰레기 하치장으로 쓰이던 곳을 공원으로 개조한 것이라고 하던데 참으로 한가하고 이뻤다. 파란 하늘, 뭉게 구름, 초록색 잔디가 어우러진 곳.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거나 책을 보는 파리 시민들. 부럽당. 공원의 한 나무에서 나동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람은 그렉. 우리 파리 여행의 실질적인 가이드 역할을 해주었다. 역시 Union Pacifiste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다.

 

>> 뷔뜨쇼몽 공원에서 노닐다 우리가 찾은 곳은 뻬르 라쉐즈(Pere Lachaise) 묘지. 쇼팽이나 발자크 최근 짐 모리슨까지 유명인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꽃이 놓여져 있는 묘지가 짐 모리슨의 묘이다. 또한 여기는...

 

>> 파리 꼬뮌 전사들의 벽. '꼬뮌의 죽은 이들에게 1871년 5월21~28일'이라 적혀 있다. 누구는 이 묘지에서 오월 광주와 망월동 묘역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지만 우리는 묘지 문 닫아야 한다는 묘지 관리인의 성화에 꼬뮌 당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어볼 시간도 없이 달려나와야 했다. 흑.

 

>> 그리고 저녁에는 Union Pacifiste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 했다. 르네 아저씨가 진행하는 이 방송은 프랑스 및 전 세계의 평화운동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란다. 내가 한국말로 가람이가 영어로 다시 르네 아저씨가 불어로 말을 이어가며 최선을 다해 평택의 상황을 소개하고 연대를 호소했다. 이 스튜디오는 Union Pacifiste 말고도 다른 활동 그룹들이 빌려서 자체 방송을 한다고 한다. 우리가 방송을 끝내고 나오니 성소수자 운동 그룹에서 바로 이어서 방송을 하였다.

 

>> 방송을 마치고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모여 식사를 했다. 왼쪽 파이프를 문 아저씨는 Union Pacifiste 대표인 모리스 아저씨,  아침, 날맹, 르네, 실비, 서있는 사람은 왼쪽이 이 레스토랑 주인이신 분(역시 Union Pacifiste 회원이라고 한다), 파스칼(제작년 한국 회의에 르네 아저씨와 함께 참석했었다), 나, 나동, 가람, 그리고 파스칼의 여자친구. ㅋㅋ

 

>> 르네 아저씨의 말로는 파리는 채식하기 썩 좋은 곳은 아니라고 한다. 파리에서 우리가 먹었던 음식들, 디저트들.

 

>> 밤마다 이런 음식을 우리한테 대접하시느라 정말... 눈물이...

 

>>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럽다.

 

>> 담날 일정은 퐁피두 센터에서 시작되었다. 짓다 만 것같은 외관을 하고 있는 이 곳은 파리의 문화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고 한다. 르네 아저씨가 여기에 굉장히 좋은 전시가 있다고 해서 들렀다.

 

>> 뷜렘이란 카투니스트의 전시였는데 전쟁과 현대문명, 특히 현대 미디어에 관한 날카롭고 유머러스한 비판의식이 엿보이는 작가였다. 글 중 몇 컷!

 

 

>> 담날 우리 일정은 노트르담 성당이었다. 이번 유럽 여행에서 본의 아니게 자주 들렀던 곳이 이런 성당이었는데 날나리(?) 천주교 신자인 아침은 가끔씩 들른 이런 성당에서 영성을 듬뿍 충천하고 기뻐하기도 하였다. 규모가 엄청 큰 성당이었다. 우리가 들렀던 시간도 사람들이 예배를 보고 있었는데 성경이라고는 한 줄도 읽어본 적이 없지만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경건해지더라.

 

>> 노트르담에서 자전거를 달려 들른 이 곳은 파리 식물원(Jardin des Plantes). 여기도 역쉬 거의 폐관을 할 때쯤 도착해서 느긋하게 갖가지 식물들을 둘러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쉬우나마 예쁜 꽃 한 컷! 그렉의 정면 모습도 볼 수 있다.

 

>> 저녁에는 모리스 아저씨와 르네 아저씨를 다시 만나 저녁을 먹고 근처에 있는 Union Pacifist 사무실을 찾았다. World citizen이란 단체와 함께 쓰는 사무실은 아담했다. 사무실에 처음 놀러간 기념으로 우리는 꽃 시장에서 산 화분을 선물!

 

>> 담 날 아침,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잔차 가게에서 몇 가지 자전거 용품과 타이어를 사가지고 우리는 오늘 여행의 목적지, 그리고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소매치기의 기억이 있는 몽마르뜨 언덕으로 향했다. 몽마르뜨 가는 길에 있는 파리의 대표적인 극장식당인 물랭루즈에 멈춰 한 컷!

 

>> 이렇다할 높은 산이 없는 파리에서 꼴랑 해발 130m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 언덕은 거의 산의 수준이라 한다. 이 산의 정상에 우뚝 서 있는 사크레 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e-Coeur).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관광객들이 너무너무 많아서 속세의 삶을 거부하고 낭만을 추구했다던 파리 예술가들의 정취를 지대루 느끼기에는 살짝 힘겨울 듯.... 게다가...

 

>> 내 왼쪽 다리 아래로 살포시 놓아둔 겉옷과 힙쌕이 보인다. 저 사진 찍을 때까지는 얌전히 그 자리에 있었는데... 잉잉...

 

나의 이번 여행에서 사단은 바로 몽마르뜨 언덕에서 였다. 물론 여행 초반에 영은이 팔에 금이 가고 자전거가 계속 고장이 나는 등의 사건사고가 많기도 했었지만... 몽마르뜨에서 본 시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카메라에 담긴 내 모습을 구경하고 어쩌구...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던 거 같은데 그새 감쪽같이 잠깐 내려놓았던 힙쌕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채고 황급히 근처를 뒤졌으나 범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렉의 말로는 몽마르뜨에서 상주하는 쓰리꾼들은 아주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라 찾을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첨엔 당황해서 그 안에 뭐뭐가 들어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근처 경찰서에서 신고를 하면서 하나둘씩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넘들 힙쌕보다는 큼직한 그 안에 여권, 지갑, 뱅기표 등등이 들어있고 가장 중요한 내 여행일기, 용량이 모자란 디카를 대신해서 사진들을 저장해둔 MP3 등등 내 여행의 추억이 몽땅 들어있었다. 여행 중간중간에 사 모았던 엽서랑 기념품도 몽땅... 그렇다. 난 순식간에 내 여행의 추억들을 몽땅 도둑맞은 것이었던 것이었다. 잉잉... 독일 뮌스터 캠핑장에서 캠핑카를 들이받은 사건, 이번에 쓰리 당한 사건 등으로 넘들은 경험하지 못했을 각국 경찰서를 덤으로 구경하는 행운(-_-;;)까지... 지 버릇 개 못준다고 여행을 가서까지 경찰서를 전전하는 내 신세야... 그래도 지금은 여행 중 일기에 고백했던 내 헛된 욕심과 욕망, 못된 성질 모두를 유럽에 두고 왔다(?)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일종의 살풀이인 셈이다. 여기서 잠깐의 여행 팁! 여행을 그닥 많이 다녀본 것도 아니지만 장기간 여행이나 어디 위험한 곳에 여행을 갈 경우에는 여행자 보험을 들고 가는 것이 좋겠다. 영은이랑 가람이의 팔과 코의 부상, 내가 저지른 사고들(캠핑카 수리비, 소매치기 물건)은 한국에 돌아와서 다 보상을 받았다. 단, 사고치면 반드시 경찰서에 들러서 공식적인 폴리스리포트를 작성하고 받아와야 한다.

 

경찰서에서 하루 종일 진을 뺀 우리들은 근처 시장과 차이나타운 등을 울적한 기분으로 돌아보고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잃어버린 TC와 비행기표를 다시 발급받고 어쩌구 하는 절차들이 복잡할 거고 파리 여행을 놓칠 수도 없고 등등의 이유로 르네 아저씨가 남은 파리 일정을 자신들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주셔서 우리는 걍 염치불구하고 메르시~를 외쳤다.

 

>> 아침에 일어나서 짐을 싸고 체크아웃 하고 르네 아저씨 댁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개선문에 들러서 잠깐 찰칵~! 개선문 위에도 전망대가 있어서 파리 시내를 귀경한다던데... 다들 왜 그리 높은 곳을 좋아하는지 원...

 

>> 르네 아저씨네 짐을 풀고 본격으로 피크닉에 나섰다. 샌드위치와 과자, 과일 차를 싸들고 우리가 처음 도착한 곳은 건축박물관(? 정확한 명칭이 기억나지 않음). 무료라서 더욱 사랑스러운 이 박물관은 파리라는 도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사진처럼 파리 시내의 축소모형도 전시가 되어 있어 살짝 방향치, 길치인 나에게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파리 어디쯤인지 알수도 있었던 시간이었다.

 

>> 그리고 우리가 들른 곳은 아랍문화원. 파리에서 손꼽히는 현대건축물이라고 한다. 건물 외관이 마치 카메라 렌즈 조리개와 같은 기계창치로 되어 있는데 빛의 세기에 따라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고 한단다. 건물의 꼭대기에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까페를 차려 놓았다. 꼭대기에서는 세느강과 시테섬의 전경을 볼 수 있다.

 

>> 옥상에서 기념사진 한 컷. 앞줄 오른쪽에 앉으신 분이 실비다.

 

>> 다음 우리의 여행지는 파리의 상점가 골목(Passage) 였다. 건축가인 르네는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국 재래시장의 통로들이 파리의 이 곳과 비슷해 무척 신기했다는 얘기를 하였다.

 

세느 강변 어디쯤에 자리를 펴고 샌드위치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으니 너무나 한가롭고 세상 부러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즐거웠고 여유로왔다. 이 날의 일정은 지금은 병역거부로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된 인욱씨 친구들을 만나 수다떨고 맛난 음식들을 먹은 것으로 끝!

 

>> 인욱씨가 불문학을 전공해서 친구들이나 선배들 중 꽤 파리에 와서 유학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한다. 고맙게도 인욱씨가 배고픈 잔차 여행자들에게 맛있는 거 사주라며 거금을 부쳤다고 한다. 덕분에 맛난 프랑스 요리를 먹었고 한국 유학생들의 생활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 베트남 항공에서 디지게도 전화를 안 받는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베르사이유다. 여기는 기차를 타고 가야 하기 때문에 오전 중에 베트남 항공에 들러야만 했다. 하도 전화를 안 받아서 걍 베르사이유로 출발을 했다. 베르사이유 가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위에서 소개했던 파스칼의 직업이 정원사라서 프랑스식 정원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베르사이유를 직접 가이드 해주고 싶다 했는데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지도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 것이었다. 파스칼을 기다리다 오전 시간을 다 허비하고 우리는 겨우겨우 베르사이유로 향했다. 기차역에 내려 파스칼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보면서 혹시 모르니 베트남 항공에도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다. 받는다. 직원 왈, 파리에서 다시 티켓팅을 해야지 안그러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한다. 장난하나. 그럼 전화를 좀 받던가. 더 열받았던 것은 우리가 파스칼을 기다렸던 오페라하우스 근처에 베트남 항공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일행은 모두 베르사이유로 가고 나는 다시 기차를 타고 베트남 항공사로 향했다. 그 다음부터 나의 여정은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베트남 항공 측에서는 현재 남은 티켓이 없고 낼 출발하는데다 편도요금에 할인 가격을 적용해 줄 수 없다고 한다. 걍 잃어버린 티켓으로 발권이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수수료 떼고 다시 리펀드를 해준다고 하지만 티켓값이 자그마치 200마넌 가까이 된다. 눈물을 머금고 아침과 날맹에게 빌린 신용카드로 결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두 카드 모두 한도가 너무 작아서 한꺼번에 결재가 안되는 것이 아닌가. 일단 아침의 카드로 티켓값의 반 정도를 긁고 나니 더 이상 안된다. 직원왈 근처 은행가서 현금인출 해오라고 한다. 겨우 물어물어 ATM 기계에서 현금인출을 하려고 하니 이게 한 번에 100유로씩밖에 인출이 되지 않는다. 그것도 50유로 한장 10유로 3장 이런 식으로 소액환으로다가... 뒤에 줄은 긴데 아주 돌아버리겠다. 뽑은 지폐들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으며 계속 인출을 하는데 중간에 한도가 넘어버렸는지 날맹 카드가 먹통이다. 아침 카드는 이미 한 번 긁었는데... 이러다가 영영 파리에서 못 떠나나 싶었다. 다행히 아침의 카드가 도와주어 필요한 현금을 모두 인출해 베트남 항공 사무실로 다시 돌아갔다. 직원에게 바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구겨진 돈다발을 내놓으니 황당한 지 웃는다. 그 날 하루는 너무 길었고 그렇게 흘러갔다...

 

>> 파리에서의 마지막 만찬. 우리가 하도 르네와 실비에게 신세를 많이 져서 파리에서 출발하기 전날 아침에 한국식 카레를 만들어 대접을 하였다. 르네는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을 했고 실비와 그렉이 한국식 카레의 맛을 봤는데 살짝 매콤하다 느껴지는 카레를 실비는 잘 먹지 못했다. 그렉은 맛있다고... 우리의 조촐한 만찬과 대조적으로 그날 저녁에 르네는 우리는 파리에서 아주 유명하고 대중적이라는 대규모 식당에 데려가서 각종 치즈며 와인, 음식 등을 대접해 주었다. 고마운 양반... 흑...

 

말고 많고 탈도 많았던 파리에서의 시간들. 파리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캠핑장 숙소, 느린 이동수단인 자전거와 두 다리... 덕분에 넘들이 다 구경하고 온다는 파리의 명소들을 다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기억에 많이 남는 여행이었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꼭 다시 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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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의 세계화

>> 회의장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비까지 쏟아부었다. 그냥 여행길이었다면 근처 어디서 쉴 었다 갈 수도 있었겠지만 도착하기로 정해진 시간이 있어서 걍 빗속을 뚤고 달려달려 회의장에 도착했다. 무사히 도착한 기념으로 사진도 한 장 찰칵!

 

>> 비가 그치고 나타난 무지개, 조짐이 좋다!

 

여행 기간 중 참석했던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국제회의는 내가 몰랐던 세상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번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평화주의, 반군사주의자들은 모두 저마다 활동공간에서의 고민들을 가지고 와 국제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려 하였다. 물론 영어를 더 잘 했다면 더 많은 정보와 논점들을 챙겨들을 수 있었겠지만 앞으로 차차 알아갈 수 있을 거라 위안해본다.

 

>> 회의 장소에 도착한 후 너무 배가 고파 바로 저녁식사를 했다. 회의 참가자들 중 베지테리언들이 많아서(국제회의 참가신청서에 이에 대해 묻는 문항이 있었다) 베지테리언용 식사도 매우 훌륭했다. 동양인들은 많이 먹지 않을 것이란 편견을 깨고 우리는 엄청난 식성을 발휘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 식사가 끝나고는 텐트를 쳤다. 텐트에서 자느냐 이 곳 숙소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참가비가 다르게 책정이 된다.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텐트를 쳤다. 텐트족 말고도 걍 자연과 함께 담요 한 장으로 노숙(?)을 하시는 참가자도 있었다.

 

>> 회의가 그리 빡빡하지 않아 충분한 시간을 갖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잠도 자고 오카리나도 불고 나와 영은은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에 대해 발표할 자료도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밤마다 열렸던 바에서 술도 마시고 춤도 추면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전에 만났던 반가운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들이 앞으로 내 활동에서 든든한 동지이자 동반자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특히 작년 한국에서 있었던 회의에도 참가해서 이미 낯이 익은 르네 아저씨는 우리가 파리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갖은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고 우리 여행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르네 아저씨와 함께 한 우여곡절 파리여행은 다음번에...


>> 밤마다 열렸던 바에서는 각국의 참가자들이 모여 함께 노래도 하고 춤도 함께 추었다. (맨 왼쪽에 반쯤 잘렸는데) 노래를 부르시는 분은 이스라엘에서 오신 분으로 음악으로 데모하시는 양반이다. 개인적으로는 별음자리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미에서 온 친구들은 발군의 춤실력을 발휘했고 몇몇 친구들은 실력보다는 걍 열심히 추는 데 의의를 두고 나름대로의 해방춤을 선보였다. 한국에서 온 우리들의 춤실력도... ㅋㅋ 상상에 맡기겠삼.


>> 첨엔 그저 서먹하고 어색해서 한국 사람들끼리 놀기도 하였으나 마지막 밤에는 남미와 스페인에서 온 참가자들과 서로서로 데모할 때 추는 춤을 갈켜주면서 광란의 밤(?)을 보내기도 하였다.



>> 개막식 풍경. 젤 왼쪽에 서계신 분은 이번 국제회의 통역을 맡아주셨고 WRI Women's Working group 멤버이기도 하다. 파란 옷을 입고 머리가 하야신 양반이 이번에 새로 WRI Chair로 선출된 하워드 클락.

 

>> 회의장 내부 풍경. 이렇게 쭉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DFG-VK는 이번 국제회의를 호스트 했던 독일 단체 중의 하나. 우리도 한 쪽 구석에 자그맣게 자리를 잡고 평화를 택하라 팩을 팔았다. 팩을 판 수익금은 독일에 망명해서 활동하고 있는 에리트리아 병역거부자들의 활동지원금으로 드렸다.

 

>> 중간에 문처럼 뻥 뚤린 곳 안쪽으로는 평화서점이 문을 열었다. 평화, 비폭력, 직접행동 관련한 갖가지 책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도 회의 끝나면 한국으로 부칠 요량으로 책을 좀 샀는데 결국 요금이 너무 비싸서 여행 내내 싸짊어지고 다녔다. -_-;;

 

>> 본격적으로 개막식이 시작되기 전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는 참가자들. 오른쪽으로 똑같이 흰색 티셔츠에 반바지를 맞춰 입고 얘기 나누는 사람은 환경, 기술, 비폭력 등 여러 가지 논문들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인 브라이언 마틴(왼쪽)과 이번에 새로 WRI Council 멤버로 선출된 스텔란 빈타겐이다.

 

>> 회의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는 이번 회의 기간동안 매일매일 진행될 주제별 그룹들의 홍보부스가 차려져 참가자들을 모으고 있었다. 나와 영은 날맹은 '살상하지 않을 권리(Rfight to refuse to kill)' 주제그룹에 참여하였고 가람, 나동, 아침은 '무기상인들(War Profiteers)' 주제그룹에 참여하였다. 그 이외에도 '경제세계화 속의 군사주의', '군대주둔', '시민들의 비폭력적 개입', '비폭력 전략과 세계화', '초보자를 위한 비폭력트레이닝', '비디오 액티비즘' 등 다양한 주제그룹이 활동하였다.

 

>> 이번 회의는 영어, 불어, 독어, 스패니쉬 4가지 언어로 동시통역 되었다. 통역부스 모습.

 

>> 부스 한 켠에 붙어있던 포스터. 예쁘다.

 

>> 회의장 밖의 모습. 한 참가자의 제안으로 이 곳 어디쯤에서 아침마다 요가 워크샵이 열렸다. 하지만 한 번도 못가봤다. -_-;;

 

>> 회의장 건물 바깥에 이렇게 염손지 산양인지가 뛰어놀고 있었다.

 

국제회의 개막을 선포하다.

 

개막식은 마이켄 쇠렌센(Majken Soerensen)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의 새로운 의장이 될 하워드 클락(Howard Clark)과 독일 DFG/VK(Deutsche Friedensgesellschaft/Vereinigte Kriegsdienstgegnerinnen, 독일 평화회/전쟁저항자연합)의 현 대표인 위르겐 그래스린(Jürgen Grässlin), 그리고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현 의장인 조앤 쉬헨(Joanne Sheehan)이 첫 전체 모임의 발언자로 나섰다. 하워드의 발언은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레바논 혹은 아직 진행 중인 이라크와 같이 세계에 전쟁이 자꾸자꾸 발생되는 시기에 이 회의의 절박한 필요성과 대안적 견해를 계발할 필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
또 다른 한편으론 처음으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국제회의에 참석한 나이지리아, 짐바브웨, 수단 그리고 한국의 참가자들에 대해 매우 기쁘다는 인사말도 덧붙였다.
위르겐 그래스린은 DFG/VK의 역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DFG/VK는 4,500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독일에 존재하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7개 지부들 중 가장 탄탄한 단체라고 한다. DFG/VK는 1892년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와 알프레드 프리드(Alfred H. Fried)에 의해 설립되었다. DFG/VK의 설립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프로이센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것이었고 1927년 최대 30,000명의 회원들과 함께 20세기 르네상스를 목격하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카를 폰 오시츠키(Carl von Ossietzky)와 쿠르트 투홀스키(Kurt Tucholsky)와 같은 지식인들도 있었다. 그렇게 확장되어 가던 조직의 규모는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던 시기 5,000명으로 감소하였다.
60년대 DFG/VK는 독일의 재군사화와 베트남 전쟁에 저항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독일의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차별적인 재판을 바로잡은 것은 DFG/VK의 큰 성과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DFG/VK는 독일 연방군(Bndeswehr)의 역외개입(out of area-interventions)에 저항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들의 장기적인 목표로 남아있는 군대를 없애는 것은 군사지출을 연간 5% 줄이는 것과 같은 작은 걸음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그래스린은 설명하였다. 이러한 전술에 대해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에서는 매우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으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래스린은 오늘날 42개의 진행 중인 전쟁이 있다고 계산했고 미국-이라크 혹은 인도-파키스탄과 같이 민족국가 간의 전통적인 전쟁보다는 내전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스린은 여전히 나토의 해산을 주장하고 있다. DFG/VK는 무기거래 반대 캠페인, 특히 독일 헤클러 & 코흘 G3 전투소총과 같은 소형무기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전투소총은 최근 다푸르(Darfour)/수단과 같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나라들의 시민들을 상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스린은 비록 빈곤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전쟁을 끝장낸 집단의 능력에 대해 지적하였는데 이것의 매우 성공적인 사례가 소말릴랜드(Somaliland, 동아프리카해안지역)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 평화로운 소말릴랜드가 유엔에 의해 인정되고 있지 않다.
그래스린은 죽은 이스라엘 사람 30명 당 300명의 레바논사람이 죽고 있다고 계산하였다.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시민이다. 그래스린은 레바논뿐만 아니라 가자지역과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도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해야 함을 명확히 요구하였다.
조앤 쉬헨은 세계화에 대한 이번 회의 주제가 참가자들 사이에 새로운 연결과 행동주의 네트워크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표현하였다. 그녀는 반세계화운동의 뭄바이 회의에서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의 감동적인 연설을 상기시켰다. 그녀는 또한 그녀가 만났던 인도 여성의 사례를 들면서 세계화의 귀결로서 가정폭력과 강간이 국가 차원이 핵실험과 연결되어 있음을 얘기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우리의 차이에 대해 반추하면서 비폭력 혹은 페미니즘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같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다.
전체모임 말미에는 재밌는 게임을 했는데 이것은 서로가 질문을 하고 교환을 함으로써 참가자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워드 클락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쉽게 대답할 수 없는 16개의 질문이 담겨있는 인쇄물을 참가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유용하고 재미있는 질문들은 서로가 친해질 수 있도록 했으며 재미있는 반응들을 끌어내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독일이 승리하길 바라는 사람을 찾아라.”

 

두 가지 운동이 함께?

 

제24차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국제회의는 우리 모두가 지지하는 두가 운동이 함께 모일 수 있었다. 반세계화운동(혹은 “다른 종류의 세계화를 위한 운동”)과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로 대표되는 비폭력운동이 그것이다. 첫 번째 운동은 “운동들의 운동(movement of the movements)”으로 불려왔는데 왜냐하면 G8 정상회담 공격 혹은 이라크 전쟁 반대 등과 같은 반전캠페인을 조직할 때 대안운동, 인종차별반대운동, 페미니즘운동, 아나키스트운동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노동자운동(1995년 프랑스 파업과 2006년 학생-노동자 시위)까지도 함께 묶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화를 위한 이러한 운동들 내에서 아주 다양한 비폭력직접행동이 있어왔으나 전체로서의 운동은 스스로가 비폭력적이 되는 것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인원이 많기 때문에 저항방법의 다양성을 고려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 더 적합하다. 다른 운동, 즉 세계적인 비폭력운동은 보다 오래된 운동으로 세계적 차원의 캠페인을 조직했던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으나 이 운동은 스스로를 반세계화운동의 일부로 여기로 있지는 않다.
함께 만나는 것의 첫 단계는 우리의 적은 누구이고 세계화 시대에 권력과 지배의 상황이 어떻게 변화 되었는가를 적절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최근 세계화 과정에서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마리아 미스(Maria Mies)는 인도에서 여성운동에 참여했던 그녀의 경험을 끌어 설명하였다. 1997년 다자간투자협정(Multinational Agreement on Investments, MAI)에 반대하는 반신자유주의 캠페인에서부터 시애틀 세계무역기구 총회 시위까지 그녀는 이 모은 움직임이 성공적이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코소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이러한 새로운 전쟁들, 그리고 이러한 전쟁들과 세계화와의 연관성에 대해 분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그녀에게 세계화의 단 하나의 행위자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인 거대 초국적기업들이다. 그래서 무역과 경제는 더 이상 평화적이지 않고 전쟁은 이러한 경제를 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초국적기업들은 기업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곳에서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권리, 어떠한 국가적 간섭 없이 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권리로 세계화를 정의한다. 이것이 우리가 국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제와 싸우는 이유이다. 우리는 세계경제전쟁 안에 살고 있고 그 곳에서는 시민사회와 전쟁사회 사이에는 아무런 국경이 없다. 세계화는 소규모 상인, 소농들, 많은 나라들의 생존능력을 파괴하는 거대 초국적기업의 자유를 뜻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테러리즘을 본다면 그것은 적에게 어서오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테러리즘은 전쟁조직을 계속 가동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국경 없는 전쟁이다. 유럽에서 우리는 평화로운 삶을 사는 척 할 수 없다. 유럽 헌법은 이전의 군사적 개입을 기술, 경제, 그리고 성장과 같은 분야와 별개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래서 마리아 미스는 프랑스 사람들이 그러한 헌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민투표를 할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해 매우 기뻤다고 하였다.
그녀는 우리가 우선 평화로운 사회가 어떨 것인가 생각하기 전에 이러한 현실을 봐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긍정적인 세계화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그녀의 슬로건은 세계화대신 지역화를!
마리아 미스는 오랫동안 다른 세계화운동에 참여해왔으며 특히 인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성운동에 함께하고 있다. 현재 그녀는 쾰른(Cologne)에 살고 있으며 퇴임한 사회학 교수이자 세계화에 관한 페미니즘과 생태주의 저서들의 저자이다.
주제별 그룹과 워크샵이 끝나고 오후 기조연설에서는 사이몬 하락(Simon Harak, 미국)과 앤 펠트햄(Ann Feltham, 영국)이 그들의 주제별그룹 주제이기도 한 “민간안보회사(private security enterprises)와 무기상인들”에 대한 분석을 이어갔다.
앤 펠트햄은 민간안보회사들이 국가경제의 역할을 점점 떠맡게 되는 것을 지적하며 민영화 전술을 비판했던 마리아 미스의 발언을 이어갔다. 무기거래에서 그것은 점점 더 그들의 이윤전략을 정부에게 지시하는 경향이 있는 록히드(Lockheed, 미국),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EADS, 프랑스, 독일), BAE 시스템(BAE-System, 영국) 사(社)와 같은 거대 기업들이다.
사이몬 하락은 최종적으로 정부를 기업들의 단순한 도구, 사적인 용무의 부속물에 불과하다고 얘기하였다. 그는 방위를 위해 1985년에 설립된 미국위원회(US-comittee)의 민간회사 로비스트들의 약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글자 그대로 180억 달러의 이익이 얼마만큼 인지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보여주려 애썼지만 그래도 실패하였다. 그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많은 돈이었다. 과거 초국적기업들이 전쟁 바깥에서 이윤을 만들어 욕을 먹었으나 오늘날, 하락이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는 거대 기업들이 이윤을 위해 전쟁을 만든다.
대부분의 발언자들이 초국적기업들의 지배적 역할에 대해 강조를 했고 그것과 비교해서 다른 것들은 매우 부차적으로 취급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세계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단순한 초국적기업의 마리오네트처럼 평가한 것은 매우 전형적인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단순화는 르완다 대량학살, 밀로세비치의 세르비아 민족주의, 이라크의 후세인과 같이 지역독재자들이나 군대의 대량학살 등에 대해 간과하고 지나칠 수 있다. 세계화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고 그것에 대한 저항은 초국적기업, 군대, 경찰국가화 추세, 지역 군벌 등 매우 다양한 적들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락이 테러와의 전쟁과 이라크에 대한 군사개입을 고찰한데 반하여 펠트햄은 유럽에 집중하였다. 사이몬 하락은 윤리학 교수이자 ‘전쟁저항자연맹(War Resisters League, WRL)’의 반군사주의 책임자이다. 그는 “죽음의 상인을 저지하라”는 이름의 캠페인에 집중하고 있다. 앤 펠트햄은 영국 ‘무기거래반대캠페인(campaign against arms trade, CAAT)’의 활동가이다.

 

세계적인 비폭력행동

 

이 대규모 운동은 비폭력직접행동의 훌륭한 실천을 다양하게 보여주는데 성공하였다. 거기에서 우리 모두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초국적 협력과 연대행동은 새로운 연결과 네트워크를 창조하였다.
팔레스타인의 비폭력활동가 시린 알-아잡(Shireen Al-Ajab)은 영국 주재 독일대사관에 의해 비자가 오래 거부당했었는데 다행히도 결국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를 테러리스트라고 추측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는 전체모임에서 이 여행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었다.
유감스럽게도 독일 당국이 소말릴랜드의 사미라 자마 엘미(Samira Jama Elmi)의 비자를 승인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가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날의 전체 모임은 원래 계획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사미라와 소형무기에 대해 발언할 예정이었던 폴 루스만(Paul Russmann) 대신 힐랄 데미르(Hilal Demir)와 안드레아스 스펙(Andreas Speck)이 터키의 빈군사주의 캠페인에 대한 발언을 하였다.
오전 모임은 바깥에서 온 평범한(?) 뉴스로 시작되었다. 레바논 전쟁이 400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 중 380명이 레바논 시민이라는 것이다. 해서 군사주의와 전쟁이라는 환경 아래서 어떻게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것인가 라는 주제는 더 없이 긴급한 것이었다.
터키 이즈미르에서 온 비폭력트레이너인 힐랄 데미르는 먼저 터키 병역거부 운동의 역사를 소개하였다. 1989년 첫 선언으로 시작하여 19세기 초반 세계병역거부자 회의(International Conscientious Objectors' Meeting, ICOM)까지. 터키에서 최초로 공개적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오스만 무랏 울케(Osman Murat ϋlke)가 박해를 당하던 1996~99년 국제연대는 절정에 달했다. 병역거부운동 연합인 ISKD는 강연회와 비상네트워크를 조직했고 터키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오스만이 풀려난 후 ISKD는 서로 다른 목표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 해산했다. 이 과정에 대해 힐랄은 그들이 다뤄야할 일종의 “군사주의”라며 한탄했다. 남성지배 때문에 여성들은 2년 간 따로 만나서 해결방안에 대해 논의했고 그 이후 그들은 운동에 젠더적 관점이 필요함을 얘기하고 토론을 요구하였다. 터키 운동에는 현재 많은 여성병역거부자들이 있다. 비록 여성에 대해 징병제가 실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군사주의에 대한 거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다고 한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활동가인 안드레아스 스펙은 터키 정부에 병역거부를 인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 유럽인권법원(European Human Rights Court)의 판결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터키에서는 사회적으로 병역거부에 관한 법을 도입하는 것에 관해 심각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국제연대캠페인 동안 상호 기대치와 능력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언어의 문제가 발생해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터키 여성 병역거부자에 대한 책을 출판할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하워드 클락은 병역거부자들의 존재가 터키 군대와 쿠르드 노동자당(PKK) 사이의 전쟁을 실제로 예방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킴으로서 포괄적인 긍정적 평가를 줄였다. 더욱이 스펙 또한 오늘날 병역거부자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군사주의 운동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오후 전체 모임의 초점이었다. 이 전쟁은 이전에 실행되었던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비폭력직접행동을 무색하게 하였다. 특히 비폭력직접행동과 장벽건설에 반대하는 국제적 활동, 그리고 이스라엘과 펠레스타인 간의 모든 다양한 종류의 대화를 위한 그룹들의 활동들 말이다. 이러한 활동들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의 사례들로서 고려될 수 있다.
몇몇 국제연대행동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명령전략(dictating strategy)이라고 비판받아왔다. 국제적 그룹과 지역 운동가들 사이에 만들어진 관계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첫 번째 발언자는 앤지 첼터(Angie Zelter)로 국제여성평화봉사(International Women's Peace Servie, IWPS)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이었다. 그녀는 먼저 중세 이후 유대인과 무슬림 공동체 사이 평화적 공존의 세기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강조하였다.
3, 4년 동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는 뉴프로파일(New Profile), 분리장벽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Anarchists Against the Wall), 블랙런드리(Black Laundry, 게이, 레즈비언, 성전환자)와 같은 새롭고 젊은 다양한 비폭력 그룹들이 많이 생겼다. 그들은 국제연대운동(International Solidarity Movement, ISM)의 지원을 받고 있다. 비록 이러한 연대가 도움이 되는가 사실 방해가 되는가에 대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그룹들 사이에 토론이 있긴 했지만 그들의 행동과 자유행진은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이러한 초국적 네트워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만나고 함께 행동그룹들을 만들 수 있는 안전지대를 제공했다.
두 번째 발언자였던 도로시 나오르(Dorothy Naor)는 뉴프로파일이라는 반군사주의그룹의 활동가이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맞서는 많은 비폭력직접행동에 참여해왔다. 그녀는 보다 회의적이었는데 평화운동이 여전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주변부라고 강조하였다. 그녀에게 점령은 1967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유엔이 이스라엘에게 영토의 55%를 배분한 194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 비율은 겨우 6~8%였다. 그녀는 모든 여성의 50%가 징집되는 지구상 단 하나의 국가인 이스라엘을 군사화 된 나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군사화 된 사회를 시민적, 진정으로 시민적 사회로 바꾸는 것이 평화운동의 목표라며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 발언자는 팔레스타인인인 시린 알-아잡이었다. 몇 년 동안 그녀는 이스라엘과 아랍사람들이 함께 구성한 그룹에서 활동해왔고 나중에는 독일연합에서 활동하였다. 시린은 예루살렘에서 평화와 분쟁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고 최근에 영국에서 두 번째 학위를 공부하고 있다. 그녀는 팔레스타인 여성으로서 비폭력 운동의 전망에 대해 얘기하였다. 그녀가 비폭력에 대해 실천하는 근거는 3가지이다. 첫째 무슬림 여성으로서 그녀의 신념은 살상을 금하고 있다. 둘째 사실상 그녀는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총을 쏠 수도 없다. 그리고 그녀는 적과 닮아가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저항의 도덕률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다.
시린은 또한 1936년 영국 위임통치에 저항하여 6개월 파업을 벌였던 Ez Eddeen Alquassam 운동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했던 비폭력저항의 사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그러한 전통과 반대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폭력사용을 옹호하였다. 세상에 의해 이러한 전통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폭력은 첫 번째 인티파다(1987~1991) 기간에 나타났다고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첫 번째 인티파다는 마드리드 평화회의에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소련 멸망과 걸프전쟁 이후 오슬로 평화협정은 마드리드과정(madrid process)으로 대체되었다. 시린에게 오슬로는 그들의 땅에 대한 일종의 자동분할로 큰 실수였다. 이후 1993년부터 이스라엘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각종 장애물과 검문소를 이용해 압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비안간화 과정은 11명의 살아있는 목숨을 대가로 한다. 팔레스타인 자살폭탄이라는 현상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로 봉쇄에 대한 반응으로 1993년 처음 시작되었다.
심지어 시린의 시각에서 두 번째 인티파다의 첫 한 달은 폭력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억압적으로 무기와 폭탄을 사용한 전술을 강화했다. 서구 나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모든 기반시설은 다시 파괴되었다. 종종 곧바로 복구되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또한 국제연대캠페인을 방해하고자 했다. 가장 최근의 법률 중 하나는 전 세계에서 온 방문자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다. 시린에게 팔레스타인은 미국에서 인디언을 위한 정부지정보류지에서 토착 미국인들이 살았던 것과 같은 삶의 형태인 것이다.
레바논 전쟁에 저항하는 우리의 대응행동으로 그녀는 남아프리카의 사례에서 성공적으로 실행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보이콧을 유럽인들에게 요구하였다. 그녀는 그녀의 이해에 근거해서 거의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비폭력저항을 실천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살폭탄은 개인적인 실천이며 팔레스타인 집단적인 저항으로 봤을 때 중요한 게 아니다.
세 발언자들은 모두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지역에서 비폭력그룹들의 상황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에 관해 보여주었다.
토론에서 시린은 조금 있으면 두 국가 해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얘기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팔레스타인 국가는 원래 영토의 단지 22%만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필연적으로 팔레스타인 주류는 한 국가 건설이라는 결론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인티파다가 진정으로 비폭력적이었던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녀는 이스라엘은 심지어 언어폭력 등 어떤 것도 폭력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함께하는 그룹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폭력의 행위자가 아니라 항상 스스로를 피해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실지적 전쟁을 마주하고 있는 시린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이 있는 독일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보이콧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들이 나왔다. 차라리 이스라엘에 독일 무기를 공급하는 공급원에 대한 공격 등의 다른 방법과 전술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전략을 찾아!

 

활동가들은 비폭력직접행동에 어떤 전술을 취할 수 있을까? 그들은 “다른 세계화”를 위한 운동의 구조에 함께 해야 할까 아니면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할까?
오랫동안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운동은 세계은행(World Bank)이나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국제금융기구들에 도전해왔다. 이러한 운동들은 세계적으로, 대륙별로, 그리고 지역 사회포럼의 자체적인 구조들을 창조해왔다. 오전 전체모임에서 전 트라이던트 보습만들기(Trident Ploughshares) 활동가이며 현재 스웨덴의 고텐부르그 평화와 개발연구소(Gothenburg Peace and Development Research Institute)에 있는 스텔란 빈타겐(Stellan Vinthagen)은 위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우리는 “전쟁” 전술과 “용병술”을 개발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들로 능력을 길러 세계사회포럼에 함께해야 한다.
빈타겐에 의하면 이러한 “운동들의 운동”은 세계사회포험에서 사실상 힘을 가지고 있으며 무장투쟁조직과 마찬가지로 정당 정치인들도 참여가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누구도 세계사회포럼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이 운동 내에는 다양한 운동들의 연합이 있다. 비폭력행동은 그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1976년 시브룩(Seabrook, 핵발전부지를 비폭력적으로 점거하는 경향을 만들었던 직접행동. 그 행동에서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 방법이 개발되었다)에서 개발된 원형은 시애틀 반세계화 활동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조제 보베(Jose Bove)는 비폭력행동을 옹호하고 있으며 지구적민중행동(People's Global Action)도 비폭력전통에 의존하고 있다.
빈타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캠페인들은 너무나 자주 폭력적 충돌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상기하며. 왜 그랬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빈타겐은 활동가들의 일부가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새로운 운동 내에 오래된 평화운동가들의 참여 부재가 원인이라 주장한다. 그것이 이 운동의 약점이라는 것이다. 빈타겐은 이어 그들이 기댈 수 있는 대안들은 어디에 있는가? 세계사회포럼 구조 안에서 누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가? 무슬림들, 아프리카인들, 동유럽활동가들은 어디에 있는가? 질문을 던졌다.
세계적인 비폭력운동이 여기에 참여해서 이러한 약점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것의 의미가 바로 비폭력의 세계화이다. 그러나 빈타겐은 오래된 운동은 그것의 실천과 목표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하였다. 요즘에도 국가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어떠한 세계적 기구도 유독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정부 없는 세계적 가버넌스가 있다. 대신에 민간기구들이 힘을 가져가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빈타겐은 세계적 규모의 투쟁뿐만 아니라 지역적 투쟁을 제안한다. 다차원적 접근, 협력관계 구축,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기구 개발. 간디가 말했던 것처럼 경제적 대안을 개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현재는 기술이 발달한 시기(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공정무역 등)이기 때문에 비폭력 활동가들은 그들의 활동방법들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토론에서의 반응들은 그의 전술적 사고에 대해 전폭적 지지를 보내는 것에서부터 이러한 전술들이 진정으로 비폭력에 대해 관심이 있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매력이 있는지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들까지 다양했다. 이러한 것들이 투쟁과 캠페인을 위한 수단으로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되는 것으로서 거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토론 시간에 제기된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운동들에 비폭력적인 성격을 강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다국적 회사들의 권력구조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이러한 관계에 있어서 시민불복종은 얼마나 중요할까? 전쟁무기상인들에 맞서 우리는 어떤 행동들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떤 목표들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비폭력혁명을 달성하기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단순히 항의하는 것을 넘어설 수 있을까?
오후 전체 모임은 평상시와 다른 방법으로 개최되었다. 아쉽게도 초청된 발언자인 펠릭스 콜브(Felix Kolb)와 시안 존스(Sian Jones)가 참석하지 못해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의장인 조앤 쉬헨이 전 세계사회포럼 주최자인 자이 센(Jai Sen)과 함께하였다. 진행자인 하워드 클락은 생생한 토론을 위해 전형적인 발표대신 두 발언자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이 성공적인 운동을 하고 싶은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쉬헨은 시브룩과 같은 과거 성공적인 운동에 대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그것의 조직모델(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은 전쟁저항자연맹 활동가들이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회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쉬헨은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이 여성회의를 시작하던 1975년으로 초점을 옮겨갔다. 그 회의에서 페미니즘과 비폭력에 관한 토론이 시작되었고 1992년 유명한 방콕 여성회의를 이끌었다. 그리고 쉬헨은 몇몇 서적들과 사회적 방어에 관한 국제회의를 인용했다. 그녀는 빈타겐이 제안했던 캠페인 계획과는 약간 의견을 달리했고 지역적 요구와 의식과정에 집중했고 풀뿌리 차원의 사례연구가 보다 많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다함께 하는 전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뭄바이 세계사회포험의 공동주최자인 인도의 자이 센은 “다른 세계화를 위한 운동”주류의 문제가 있는 발전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이 중산층에 의해 점점 더 지배되는 시민사회를 상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빈타겐과 대조적으로 자이 센(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생각하는)은 대규모 행동과 보다 활동적인 참가자들의 연합을 위해 열려있는 전술을 옹호했다. 그는 트레이너들이 혹은 주최자들이 어떻게 활동할지, 그래서 그것으로 지역 공동체 사람들이 힘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공식화했다. 그는 나아가 어떻게 국가 구조가 진정으로 민주화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토착주민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사회의 주변부라고 보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은 그들의 힘을 만들어낸다. 주변화라는 이러한 서술(“궁핍한 사람들”)은 정말로 북반구 부자들의 시각이다. 자이는 세계사회포럼 구조 안에서 무장그룹의 활동가들이 토론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토론이 점점 더 독단적이 되어 가고 있으며 자유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포용력이 줄어들어가거나 혹은 새롭게 대안적인 사회포럼이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이 센은 세계사회포럼에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이 참여하는 것을 옹호한다.
토론에서는 두 명의 참가자가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의 세계사회포럼 참여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였다. 한 여성은 지난 아테네 유럽사회포럼(European Social Forum, ESF)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그곳의 많은 대표자들이 더 이상 반군사주의자들이 아님을 참가자들이 인지해줄 것을 원했다. 그녀는 반제국주의 그룹들뿐만 아니라 많은 트로츠키 그룹들이 아테네 회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 곳에서의 시위도 서로간의 물리적 충돌까지 갈 뻔했다고 한다. 칠레의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지부에서 온 페라오 까발로(Pelao Cavallo)는 카라카스 사회포럼에 대해 비판했다. 소위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혁명에 대해 축하하는 잔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 정부가 사회 안에서 주요한 군사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식적으로 칠레의 병역거부는 인정이 되지만 실지로 거부당한다. 준군사조직들이 국가통제주의자 차베스의 하부구조에서 다시 부흥하고 있다. 카라카스에서 있었던 사회포럼의 경험이 목격했던 것처럼 보다 넓고 자유로운 공간과 관용을 믿는 사람들과 반대되게 차베스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차베스의 군사주의에 대한 비판은 세계사회포럼과 베네수엘라 당국자들에게는 파시즘과 같은 것이다. 점점 더 활동가들이 차베스를 지지해야 할 것인가 반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적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고 페라오 까발로는 말했다. 그래서 모든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의 평화주의, 반군사주의, 반군사주의 페미니스트, 비폭력 아나키스트 참가자들도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적 캠페인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의 국제비폭력운동과 다른 세계화를 위한 운동, 이 두 가지 운동이 서로 함께하는 것이 가능했던가? 첫째 날, 우리는 함께 활동하는 것의 실제적 가능성에 대해 토론하는 것으로 모임을 시작하였다. 무엇이 이러한 연대를 가로막고 있는가? 세계화 시대에 어떻게 권력구조, 자본주의, 가부장제가 구성되는가? 둘째 날은 세계적 규모의 비폭력행동에 대해 분석하는 것에 할애되었다. 최근 들어 다른 세계화 운동에서 비폭력행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세계적 규모의 비폭력행동을 전파해왔다. 셋째 날, 이러한 분석은 세계화 시대 비폭력저항의 전략에 대한 실질적 토론으로 이어졌다.
전체 회의기간 동안 매일 반복해서 만났던 주제별그룹(theme group)의 활동 결과 발표와 토론에 의해 이러한 전략들은 보다 단단해졌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러한 결과들은 다가오는 해 펼쳐질 활동들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이번 회의는 네트워킹 행사였다. 만약 워킹그룹들이 만나고 반전캠페인들이 시작된다면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이러한 회의 사이에서만 오로지 존재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국제적 캠페인은 레바논 전쟁을 끝장내기 위해 필요할 것이다. 견고한 세계적 거부행위야말로 오로지 살상을 저지하고 뚫고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군대를 철수시킬 수 있다.


>> 국제회의 3일째 되는 날, 뜻밖의 손님들이 회의장을 찾았다.


>> 자전거를 타고 벨기에에서 모스크바로 평화순례를 하고 있는 'Bikers for Peace' 였다. 그 면면도 굉장히 다양했는데 이제 한 5살 정도밖에 안보이는 꼬마아이에서부터 다리 한 쪽을 잃은 아저씨까지. 참, 한국사람도 있었다. 독일에 살고 계신 분이었는데 집 앞으로 'Bikers for Peace'가 지나가는데 너무 멋있고 좋아 보여서 그 길로 자전거를 타고 따라나섰다는 분이다. 평화를 택하라 팩도 사주시고 우리를 격려해 주시기도 하였다.

 

>> 'Bikers for Peace'의 무대. 석유를 위해서 전쟁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모두 자전거를 타자고 외쳐서 참가자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 회의가 끝나고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텐트를 걷었다.

 

>>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소나기와 함께 우박도 내려서 우리는 하루 더 이 곳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이 곳 회의장에는 실내 수영장도 있고 탁구대도 있어 탁구도 치고 수영도 하며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저녁엔 텐트를 치기가 너무 귀찮아서 우리도 하루 노숙을 경험해 보기로 하였다. 잼있었다.


>> 다음 날 길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치고. 근데 회의 기간 동안 친해진 외국 친구들이 부득이하게 먼저 간 사람들 식권을 걷어서 우리에게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돈 안내고 공짜로 하루 점심을 해결하고 또 광란의 밤을 보내면서 친해진 남미와 스페인 친구들이 몰래몰래 음식들을 싸들고 와서(회의 기간 동안 식사는 부페식으로 운영되었다) 길떠나는 우리를 응원해 주었다. 고마운 친구들이다.

 

>> 헤어지는 아쉬움을 사진으로. 서있는 사람들 왼쪽부터 스페인에서 온 츄치, WRI 런던 사무국의 안드레아스, 터키에서 온 힐랄, 아침, WRI Chair로 선출된 하워드, 나, 나동, 가람. 아래 줄 앉은 사람도 역시 왼쪽부터 오랫동안 평화운동 여성운동을 해온 WRI Women's Working group의 조앤, 미국에서 온 페트릭, WRI 런던 사무국의 하비엘, 스페인에서 온 요안나, 칠레에서 온 페라오.


>> 이번 회의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참가자도 여럿 있었는데 느므느므 귀여웠다. 젤 왼쪽에 서 계신 분은 미국의 'Veterans for Peace(평화재향군인회)'에서 오신 분인데 한국의 평택에서 근무하신 적이 있는 분이다. 평화를 택하라 팩을 달고 계셨는데 때문에 우리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셨다. 과거 군인이었을 때 본인은 정말 바보같았다고 하시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평택의 얘기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 하비엘, 요안나와 함께 한 컷 더! 하비엘은 칠레에서 왔고 요안나는 스페인에 살고 있다. 둘 다 모두 스패니쉬와 영어에 능통하다. WRI 활동이 남미에서도 활발한데 이런 분들의 도움으로 남미 쪽과는 꾸준하게 연대를 해오고 있다.

 

>> 역시 하비엘, 요안나와. 요안나는 스페인의 'Women in Black'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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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캠핑장


>> 라인강변 가이젠하임이라는 마을에 위치한 캠핑장. 라인강을 따라 쭉 이런 캠핑장이 많다. 여기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캠핑장인데 우리도 원래는 좀 더 유명한 뤼데스하임 캠핑장에 묶을 예정이었다. 예상치 않게 영은이가 자전거에서 떨어져 팔을 다치게 되어 근처 캠핑장에 짐을 풀었다. 저녁거리를 사러 가면서 뤼데스하임 캠핑장을 슬쩍 스쳤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규모가 크고(수영장도 있다) 북적북적해 보였다. 이에 비해 가이젠하임 캠핑장은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여서 좋았다.

 

유럽의 캠핑장은 좋다. 암튼 좋다. 특히 암스테르담이나 파리의 캠핑장처럼 대형화되어 있고 복잡한 곳보다는 라인 강변에 조그맣게 자리한 캠핑장이나 안트베르펜의 저렴하고 소박한 캠핑장들이 훨씬 좋았던 것 같다. 텐트를 치게 되면 시멘트나 벽돌로 만든 집보다 훨씬 자연과 가까이 만날 수 있다.



또 가까운 수퍼에 가서 비싸지 않은 먹거리들을 사다가 식사를 해결하면 적은 돈으로도 푸짐하게 배를 채울 수 있어서 좋다.

 

>> 우리는 한국에서 각자 일주일 분의 쌀과 가루카레, 채식주의 라면을 싸가지고 갔다. 첫 일주일은 그 덕분에 별로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음식 땜에 향수병에 시달리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었다.

 

>> 유럽에는 ALDI나 colruyt 등의 큰 수퍼들이 많이 있다. 말하자면 한국의 이마트와 같은 곳. 이곳의 식재료들은 엄청 싸다. 세계화된 세상 속에서 분명 이렇게 싼 식재료들이 공급될 수 있는데는 여러 가지 인권적 문제점이 존재할 것이지만 걍 우리는 눈 딱감고 가난뱅이 자전거 여행자의 모드로 쭉 살았다. -_-;;


>> 종종 냉동피자를 수퍼에서 사서 저녁을 때웠다. 물론 맛있는 맥주나 와인을 곁들여서 말이다. 캠핑장에는 오븐이나 전자렌지 시설이 되어 있는 곳은 없기 때문에(내가 가 본 곳에서는) 점심쯤 냉동피자를 사가지고 밤중까지 자전거에 매달고 다니면 저녁 해먹을 때쯤에는 코펠에다 잠깐만 데워도 될만큼 알맞게(!) 녹아있다. 유럽의 냉동피자는 종류도 다양하고 베지테리언용 피자를 따로 팔아 선택의 폭이 넓었다.


가끔씩 만들줄도 모르는 서양식 음식도 만들어 먹었는데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맛도 있었다. 같이 여행했던 친구들이 대부분 채식가들이라 그것도 함께 여행하는 데 스트레스를 덜 하게 했다.

 

>> 우리가 저녁으로 자주 애용했던 내 맘대로 만드는 파스타. 토마토 페이스트, 양송이 버섯, 다양한 색깔의 파프리카만 있으면 준비 끝이다. 가끔 치즈를 뿌려 먹거나 반찬처럼 함께 먹기도 했다.

 

>> 또띠야. 이 음식이야말로 우리 유럽여행에서의 주식이었다 감히 말할 수 있다. 수퍼에서 파는 갖가지 채소(주로 피망, 양배추 등의 단단한 채소)를 볶다가 랩소스와 모짜렐라 치즈를 넣어 같이 볶는다.

 

>> 다 만들어진 속을 이렇게 또띠야에 말아서

 

>> 한 입에 쏘~옥! 그래 이 맛이야!!!

 

>> 파스타, 또띠야와 함께 우리의 주식 중 하나였던 야채국(?). 한국으로 치자면 머 즉석국같은 건데 푸슬푸슬한 밥에다 말아서 주로 아침에 많이 먹었다. 이 역시도 야채로만 만들어진 것이 있어 잘 애용하였다.


>> 이것들이야말로 우리의 주식! 다양한 맥주를 맛보고 싶었으나 금전적인 관계로 주로 싼 술을 전전했다. 와인도 가격이 무척 싸서 자주 애용하곤 하였다.


>> 안주로는 주로 냉동식품이 애용되었다. 난 생선을 안 먹기 때문에 맛보지 못했으나 맛은 걍 그랬던 모양이다. 나동, 지대로 썩소를 짓고 있다.

 

유럽의 새벽은 무척 춥다. 그리고 서유럽 쪽 여름은 비가 계속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잘 때를 대비해서 두꺼운 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내가 가 본 캠핑장은 전부 뜨거운 물 샤워를 제공하고 있었고 브뤼헤의 캠핑장을 제외하곤(이 곳 캠핑장은 만원이어서 결국 그 동네 천사아주머니의 정원에서 텐트를 쳤다. 친절하게도 잘 곳이 없어 헤매고 있는 불쌍한 우리를 위해 정원도 제공해주시고 와인도 한 병 주시고 아침엔 따끈한 커피까지 끓여주셨다) 특별히 예약하지 않아도 작은 텐트 3개쯤은 칠 수 있는 공간이 언제든지 있었다(유럽의 캠핑장은 대부분 캠핑카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어떤 캠핑장은 아예 텐트를 허락하지 않는 곳도 있다).


>> 코블렌츠의 캠핑장은 라인강과 모젤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시설은 별로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조용하고 편했다. 가람의 셀카 샷이지만 캠핑장의 분위기를 살짝 엿볼 수 있다.


>> 쾰른의 캠핑장. 쾰른 중심가에서 5km 정도 떨어져 있다. 역시 가람의 셀카 샷이나 살짝 캠핑장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 프랑스 릴르의 캠핑장에서 본 일몰. 프랑스 릴르에는 캠핑장이 많이 있으나 전부 도심에서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고 시설 또한 훌륭한 편은 아니었으나 사람이 거의 없어 한적했다.


>> 유럽의 캠핑장들은 대부분 캠핑카들이 중심이다. 몇 달씩 캠핑카를 세워놓고 쉬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마치 별장처럼 캠핑카를 애용하기 때문에 캠핑카와 그 주변을 정말 잘 꾸며놓았다.


 

>> 캠핑장에서 이렇게 가끔 낮잠도 즐겨 주시고...


>> 춥고 배고픈 우리에게 선뜻 자신의 집 정원을 내주신 천사와 함께 사진 한 컷! 우리는 별로 드릴 것이 없어서 평화를 택하라 팩과 두레방에서 만든 엽서셋트를 선물로 드렸다.

 

>>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근처에 캠핑장을 찾지 못했을 때는 가끔 유스호스텔을 이용하였다. 캠핑장에 비하면 엄청 비싼 가격이지만 그래도 심신이 지쳤을 때 우리에게 달콤한 휴식을 제공하였다. 비 오는 날 텐트를 치는 것은 정말 뷁이었다.

 

캠핑장에는 세탁과 건조를 할 수 있는 세탁실, 갓 구운 빵과 음료, 맥주, 와인 등을 파는 가게 등이 대부분의 캠핑장에 갖춰져 있고 수영장이나 테니스장 등의 시설이 갖춰진 캠핑장들도 있다.

 

>> 뮌스터 캠핑장 안에 있던 까페에서. 꽤 규모가 되는 캠핑장에는 이렇게 캠핑장 안에 바나 까페가 있다.


>> 캠핑장마다 있었던 놀이기구. 애들을 위한 놀이기구일텐데 아마 우리가 타서 스프링이 뿌러지지 않았나 모르겠다. 하지만 엄청 잼있었다.


>> 헤이그 캠핑장은 캠핑장 중간에 커다란 테니스장도 있고 옆에 이렇게 다양한 놀이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애들 타는 놀이기구일텐데 우리가 하도 가지고 놀아서 애들이 손가락 빨면서 옆에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 역시 애들타는 놀이기구. 쯔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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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자전거 타기

 


>> 왼쪽과 같은 모양으로 자전거 앞뒤 바퀴를 풀고 핸들도 풀고 페달도 풀고 해서 자전거나라에서 얻은 박스에 담에 뱅기에 실어왔다. 풀었던 차례를 생각하며 다시 오른쪽처럼 낑낑대며 조립했다. 그 모양이 신기했던지 사람들이 많이 와서 구경도 하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도 보고 그랬다.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에어프랑스에서 파는 자전거박스를 이용했다. 그 박스는 커서 자전거 앞바퀴만 빼면 너끈히 자전거가 들어가 편했다.

 




>> 당초 계획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마인츠까지 자전거로 가는 것이었으나 공항에서 물어보니 고속도로밖에 없어서 자전거로는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마인츠로 갔다. 공항에서 자전거 조립하느라 너무 오랫시간을 지체해서 기차 안에서 빵으로 밥을 대신하였다. 가능하면 자전거로 모든 도시를 이동하고자 하였으나 크고 작은 사고로 인해 국경을 넘을 때는 거의 기차를 이용하였다.

 

>> 자전거에 많은 지식이 없었던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하나하나 많은 것들을 알아갔다. 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동의 자전거(아테네)는 뒷바퀴 스포크가 맛이 갔고 결국 벨기에서 아예 휠을 바꿔야했다.

 

>>유럽의 기차는 대부분 이렇게 자전거를 실을 수 있도록 따로 칸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국에는 물론 없다.

 

>> 독일에서 네덜란드 가는 기차에서 대강 저녁을 때우며 맥주도 한 잔!

 

>>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넘어갈 때도 여러 우여곡절 끝에 자전거로 못가고 뮌스터에서 기차를 타고 암스테르담까지 이용했다. 네덜란드 국경의 어느 도시에서 기차를 갈아탔어야 했는데 갈아타는 시간이 워낙 길어서 대합실에서 잠을 청했다. 중간에 관리인이 오셔서 나가 달라고 얘기했지만 사정사정 해서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었다. 덕분에 하루 숙박비도 굳었다.

 

>> 파리 북역. 벨기에 겐트에서 파리의 북부 도시인 릴르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어찌어찌 도착했으나 열악한 기상상황과 형편없는 자전거 도로때문에 릴르에서 파리까지는 다시 기차를 이용했다.

 

유럽의 자전거 도로는 정말 신기했다. 특히 네덜란드는 고속도로 옆에다가도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어 놓아서 정말 기운만 받쳐준다면 자전거를 타고 네덜란드 전역을 여행하는 것이 자동차를 끌고 여행하는 것만큼 편할 것 같았다. 또 자전거 도로용 표지판도 굉장히 잘 되어 있어 여행하는 내내 아주 감탄을 연발했다. 한국처럼 생색낸답시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자전거 도로가 중간중간 끊긴다든가 턱이 있어서 중간에 내려 자전거를 들어야 하는 열 받는 시츄에이션이 없어 토탈 점수를 매긴다면 98점쯤?? 하지만 아무리 이런 유럽이라 할지라도 암스테르담이나 파리 같은 곳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만큼 힘들었다. 차가 너무나도 많고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여유도 없어보였다. 서울만큼 빨리빨리 걷는 사람들 속에서 특히 여행자로서 느긋하고 천천히 자전거를 즐기며 돌아다닌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하도 욕을 먹다 못해 자전거를 두고 걸어 다니니 이제야 편하다는 얘기를 서로 나눌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추천하고픈 코스는 강이나 운하를 따라 가는 코스다. 우리가 가 본 코스는 독일의 라인강 코스와 벨기에의 브뤼헤에서 겐트 사이의 운하를 따라가는 코스였는데 일단은 경치가 아주 끝내주고(라인강 코스에는 강변 양 옆으로 야트막한 언덕이 보이고 언덕 위에 고성이 아주 멋지게 자리잡고 있다. 브뤼헤 겐트 운하코스는 아주 한적으로 고즈넉했다) 강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길을 잃을 걱정하지 않아서 좋다.


>>라인 강에는 다리가 정말 없다. 미관상의 문제, 환경의 문제 때문에 가능하면 다리를 놓지 않고 가끔 이렇게 배로 양쪽을 왕복한다고 한다. 배를 기다리면서 한 컷!

 

>> 라인강변에 위치한 고성. 40도를 오르내리는 무척 더운 날씨였지만 강변을 따라 달리니 힘든 줄도 몰랐다. 라인강변에는 이런 멋진 고성이 계속 이어진다.


>> 라인 강변엔 정말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다.

 

>> 헤이그 캠핑장으로 들어가는 길. 여행 초반부터 팔을 다친 영은을 위해 날맹이 기사 역할을 선뜻 자청하였다.

 


>> 네덜란드 델프트. 헤이그에서 로테르담 가는 길에 있는 작은 운하도시다. 자전거 타고 가는 내내 이런 이쁜 운하들을 볼 수 있어서 기분 좋게 달렸던 곳 중 하나!

 

>> 결국 나동의 뒷바퀴가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 국경의 어느 도시에서 나동은 결국 자전거로 벨기에까지 이동하기로 결정. 나머지는 우는(?) 나동을 떼어놓고 벨기에로 향했다.

 

>> 벨기에 브뤼헤에서 겐트 가는 길. 이 운하를 따라서 쭉 가면 겐트다. 어찌나 가는 길이 한적하고 고즈넉하던지 MP3를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천천히 기분을 만끽하며 라이딩을 하였다.

 

>> 벨기에의 자전거도로 표지판. 벨기에 뿐만 아니라 독일과 네덜란드 모두 이렇게 자전거도로는 따로 전용 표지판을 마련해 두었다. 프랑스는 파리에만 있어서 그런지 자전거도로가 있긴 있었지만 잘 되었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 세느 강변에서 자전거 타는 아침. 세느 강변은 자전거 도로가 없다시피 했다. 그래도 기분 좋게 달렸다.

>> 네덜란드에서 본 자전거. 이렇게 네덜란드에는 생활형 자전거들이 아주 잘 보급이 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전거 도둑도 만만치 않다고. 해서 유럽 나라 자전거들은 걍 굵은 쇠사슬로 자전거들을 묶어 놓는다.


>>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미술관같은 데를 들어갈 때면 가져간 자전거 열쇠들을 다 동원해 이중삼중으로 이렇게 묶어 놓았다. 신기하게도 한 번도 우리 자전거는 도난당한 적이 없다.

>> 로테르담 델프스하븐에 위치한 한 저전거 가게. 간판이 하도 예뻐서 한 컷 찍어보았다.

>> 여기는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자전거 가게. 각종 자전거 용품들이 잘 구비가 되어 있다. 아침저녁으로 펑크나는 바퀴를 견디다 못해 가람은 여기서 두껍고 튼튼한 타이어를 샀다. 유럽에는 꽤 괜찮은 자전거샵들이 도시마다 몇 개씩 있었다. 필요한 공구들이 잘 갖춰져 있어서 무슨 나사를 하나 잃어버리면 통째로 새로 사야하는 우리 실정과는 다르게 필요한 재료들을 그때그때 잘 공급받을 수 있었다. 가격은 글쎄... 대충 한국과 비슷하다. 하지만 자전거를 수리할 줄 모른다면 따로 수리해주는 사람에 대한 요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가격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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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기

왜 여행을 떠나는가? 모르겠다. 왜인지. 벌여놓은 일 때문에 몸도 무겁고 돈도 없고 여행을 다녀와서는 다시 일상모드로 돌아오는 데 고달프기도 하지만 늘 여행은 내게 백 권의 책보다 더 큰 깨달음을 주는 시간인 것 같다. 뭐랄까 일상에서 금 거 놓은(사회적으로 그어놓은 것일 수도 있고 또 간혹 내 스스로가 그어 놓은 것일 수도 있는) 선을 눈 딱 감고 넘어가는 기분이랄까. 30살로 접어들 무렵 매년 여행(일주일 이상의 긴 여행)을 다녀야지 결심했고 올해로 6번째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매번 여행에는 늘 가족이나 친구가 함께 했었는데 이번 여행에는 평생 오랜 친구로 남을 동지들 5명이 내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 네덜란드 로테르담 델프스하븐(Delfshaven)에서 이번 여행을 함께한 친구들과, 델프스하븐은 17세기 로테르담 도시의 모습을 보존해 놓은 지역이다.



이번 여행은 내 6년 여행의 역사(?)에서 비용 면이나 준비 면에서 굉장히 큰 프로젝트였다. 유럽 여행은 내 오랜 꿈 중의 하나이다. 물론 처음부터 자전거로 다녀봐야지 했던 건 아니었고 3년 전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꿈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쯤 그 꿈이 현실화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입버릇처럼 얘기했던 '조금만 더 시기를 넘기면 기력이 떨어져서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라는 조바심이 내 꿈을 어거지로 현실화시킨 셈이다. 또 마침 병역거부운동으로 2001년부터 꾸준히 연대를 해온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의국제회의가 독일에서 있을 예정이어서 이보다 더 근사한 계획이 있을 수 없겠다 싶었다.


>> 여행 내내 우리의 훌륭한 다리 역할을 해준 자전거들. 한국에서 패니어 가격이 넘 비싸고 종류 또한 다양하지 않아 걍 큼직한 가방으로 짐가방을 대신 했다. 패니어 달고 폼 나게 여행다니는 외국인들을 볼 때마다 부러워 했다는... 머 꼭 패니어가 있어야 하냐고도 할 수 있지만 패니어가 있으면 확실히 편하고 안전하다. 일단 균형을 잡기가 더 쉽고 매번 가방을 짐받이에 끈으로 묶었다 풀렀다 하는 수고도 덜 수가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대략 만족! 그리고 자전거는 RCT나 아테네처럼 로드용 하이브리드보다는 엠티비나 내 것과 같은 철티비가 좋다. 나동의 아테네는 짐무게를 견디지 못한 뒷바퀴 스포크가 나갔고 가람의 얇은 바퀴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펑크가 났다.

 

티켓은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장 싸면서도 대한항공과 마일리지 교환을 하고 있는 베트남 항공(775,000원)을 택했다. 게다가 한 번 베트남에서 스탑오버까지 허용하기 때문에 정말 가격대비 최강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베트남항공이 유럽에 취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프랑스 파리 편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여행 루트는 티켓을 구입한 순간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이번 여행에는 자전거 초보들도 함께여서 가능하면 오르막이 적은 서유럽 쪽으로 올자고 했었기 때문에 독일 라인 경변을 따라 국제회의 장소인 게세케(Geseke)까지 갔다가 네덜란드로 넘어와서 암스테르담, 헤이그, 로테르담을 쭉 돌고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브뤼셀, 브뤼헤를 거쳐 파리에서 아웃하는 일정이 세워졌다.

 

>> 베트남항공의 채식 기내식과 음료. 채식 기내식을 티켓팅할 때 미리 주문을 했으나 베트남항공 쪽의 착오로 주문이 접수되지 않아 갈 때 좀 애를 먹었다. 음료는 블러드메리라는 칵테일이었는데 맛은 별루... 베트남항공이 저렴해서 그런지 기내식과 음료 이외에 별다른 서비스는 없었다.

 

날짜

 

 

7월 12일

출국

 

13일

프랑크푸르트(Frankfrut Am Main) 도착

마인츠(Mainz)까지

오전 6시 반

42㎞

14일

마인츠 여행

휴식

15일

마인츠 → 뤼데스하임(Rüdesheim)

47㎞

16일

뤼데스하임 → 코블렌츠(Koblenz)

73㎞

17일

코블렌츠 → 본(Bonn)

82㎞

18일

본 → 쾰른(Cologne)

28㎞

19일

쾰른 → 뒤셀도르프(Dusseldorf)

39㎞

20일

뒤셀도르프 → 도르트문트(Dortmund)

78㎞

21일

도르트문트 → 파더본(Paderborn)

81㎞

22일

도착

 

23일

WRI Seminar

 

24일

WRI Seminar

 

25일

WRI Seminar

 

26일

WRI Seminar

 

27일

WRI Seminar 출발 →

 

28일

→ 

 

29일

→ 

 

30일

→ 암스테르담(Amsterdam)

323㎞

31일

암스테르담 여행

 

8월 1일

암스테르담 여행

 

2일

암스테르담 → 헤이그(Hague)

63㎞

3일

헤이그 여행

 

4일

헤이그 → 델프트(Delft) / 델프트 여행

14㎞

5일

델프트 → 로테르담(Rotterdam)

14㎞

6일

로테르담 여행

 

7일

로테르담 → 안트베르펜(Antwerpen)

104㎞

8일

안트베르펜 여행

 

9일

안트베르펜 → 브뤼셀(Brussel)

52㎞

10일

브뤼셀 여행

 

11일

브뤼셀 → 브뤼헤(Brugge)

96㎞

12일

브뤼헤 여행

 

13일

브뤼헤 →

 

14일

→ 

 

15일

→ 

 

16일

→ 파리(Paris)

316㎞

17일

파리 여행

 

18일

파리 여행

 

19일

파리 여행

 

20일

파리 여행

 

21일

파리 여행

 

22일

파리 여행 / 파리 → 호치민

오후 2시

23일

호치민 도착 → 무이네

오전 6시 32분

24일

무이네

 

25일

무이네

 

26일

무이네 → 호치민

 

27일

메콩델타

 

28일

메콩델타

 

29일

호치민

 

30일

호치민 → 인천

새벽 12시 45분 → 오전 6시 50분

>> 이번 여행 일정표. 거의 비슷하게 여행했는데 안트베르펜에서 브뤼셀로 가지 않고 브뤼헤, 겐트를 거쳐서 파리로 바로 들어가는 일정으로 바뀌었다. 베트남 일정도 메콩델타는 가보지 못하고 걍 무이네 바닷가에서 죽쳤다.

 

극기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에 너무 많은 거리를 달리지 않는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 평상시 관심있었던 장소는 적극적으로 가본다, 가능하면 잠은 텐트에서 이동은 자전거로 밥은 해 먹는다 정도의 원칙만 가지고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 비행기에서 바라본 하늘. 구름이 예쁘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좀 있기 때문에 비행기 타는 게 디게 무섭다. 이착륙시 젤루 심하다. 그래도 일단 구름 위로 올라가면 괜찮다.

 

준비물은 대강 이랬다.

 

1. 공동물품

- 텐트3개(오리, 날맹, 영은), 코펠 5인용 1세트(강돌), 버너(현지구입), 모기향(현지구입), 스위스칼(오리)

- 의약품(연고, 밴드, 맨소래담, 지사제, 감기약, 소화제)

- 펑크패치(영은, 한 개 더 구입), 드라이버, 육각렌치(날맹), 스패너, 체인오일 1개, 펌프, 지도(미리 출력), 목장갑 2컬레, 걸래 2장

- 손톱깎기(오리), 전자사전(영은), 바느질도구(아침), 청테이프2개(나동)

- 카레가루, 라면

 

2. 개인물품

- 기능성 티셔츠, 바지, 속옷 등등, 썬크림, 스킨, 로션, 세면도구(수건, 치약, 칫솔, 면도기, 샴푸), 엠피쓰리, 충전기, 배터리, 다카, 필기도구(노트, 펜), 매트리스, 침낭, 컵, 샌들(슬리퍼), 운동화, 양말

- 자전거 분해하고 바퀴 축에다 끼울 막대기(?, 1인당 4개), 자전거 담을 박스, 스패어튜브, 앞랜턴, 헬멧, 선글라스(렌즈, 안경 등등), 자전거 짐받이, 배낭, 자전거장갑, 허리색, 물병, 시계, 잡주머니, 침낭 묶을 끈, 짐받이용 줄, 한국 친구들 연락처/주소록

- 국제전화카드(아이비전 국제로밍플러스카드, 3만원), 여권, 비행기표, 여권 사본, 여벌사진, 여행자수표 복사본

- 쌀 7끼

 

- 옵션 : 방석, 복대, 국제 학생증(가람의 친구꺼 만들어 빌려감.)

 

** 현금과 여행자수표(아멕스)로 골고루 바꿔감. 생각보다 아멕스 사무소가 도시에 별로 없어서 환전할 때 고생을 좀 했다.

** 여행자 보험(제일화재 단기 여행자보험)

** 선물들(안티월드컵 캠페인 티셔츠, 평택 평화를 택하라 팩)

 

예산은 대강 이랬다.

 

숙박비 30만원

  (독일에서 8천원*11일 = 88,000원

   네델란드에서 1만원*11일 = 110,000원

   벨기에에서 5천원*7일 = 35,000원

   프랑스에서 7천원*6일 = 42,000원 

   275,000원 + 알파)

식비 40만원

문화관광비 10만원

베트남 20만원

예비비 10만원

이렇게 110만원

 

이밖에

회의 참가비 15만원 + 각자의 용돈(담배 피는 사람은 담배값, 술 마시는 사람은 술값, 선물살 사람들은 선물값 등등)

 

<여행가기 전에 유용하게 참고했던 싸이트들>

http://mappy.com : 인터넷 유럽지도 서비스로 명소, 음식점, 교통상황, 캠핑 등등 거의 모든 정도를 담고 있다. 심지어 PDA에 지도를 저장할 수도 있다.

www.prettynim.com : 유럽 전반의 유용한 정보가 가득. 추천 개인 사이트를 통해 다른 사이트들의 다양한 정보도 접할 수 있다.

www.train4world.com :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다양한 나라의 정보를 접할 수 있다.

http://uhmssi.netian.com/ : 우리 계획과 루트가 다르기는 해도 정말 환상적인 자전거 여행 싸이트

http://bicycletour.cafe24.com/ : 2004년 5월부터 6개월간 다녔던 유럽 자전거 여행 에코토피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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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후쿠오카


 

후쿠오카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지났다. 최미례가 근처에 또 맛있는 라멘집을 알아놨다고 그리고 데리고 간다. 유명하긴 유명한 집인가보다. 줄이 길다. 난 식탐이 별로 없는 편이라 서울에서도 줄서서 뭘 먹어보지 못했는데 여기와서 그 짓을 해본다.

 


 

유명하다는 라멘. 테이블 별로 절인 생강, 숙주나물 무침, 한국 김치 비스무리한 야채 등이 반찬으로 제공되어 있고 마늘과 마늘 빻는 기계도 놓여 있어 입맛대로 넣어 먹을 수 있게 되어있다. 거기 메뉴가 몽땅 고기가 들어간지라 나는 공기밥을 시켜서 반찬과 먹었다. 일본은 공기밥에도 보라색 뭔가를 뿌려준다. 이쁘다.

 


 

식사를 마치곤 숙소에 짐을 풀고 본격적으로 시내 구경에 나섰다. 먼저 들른 곳은 우리 숙소가 있는 하카타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캐널시티이다. 캐널시티는 극장, 백화점, 식당 등 여러가지 건물이 모인 복합상업시설인데 건물들 사이로 긴 인공운하를 만들어 놓았다. 

 


 

일본의 자전거들. 일본 사람들 정말 자전거를 많이 타더라. 하기사 나같아도 자전거를 탈 수밖에 없겠는데 뭔 놈의 교통비가 그리 비싼지 정말 입이 딱 벌어진다. 나중에 일본에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자전거를 가져와야겠다. 그게 남는 장사란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선 한국처럼 비싸고 화려한 자전거복장을 빼입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양복을 입은 사람, 치마를 입은 사람, 장바구니를 든 사람... 생활 속에 자전거가 단거리 이동수단으로 자리를 잡은 듯 했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따로 자전거 도로가 별로 만들어져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보행자 도로로 씽씽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가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캐널시티 근처에 있는 수미요시 신사에 들렀다. 사람도 별로 없고 고즈넉한 신사. 몇몇 일본인들이 절을 올리고 돈통에 돈도 넣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사 구경을 마치고 최미례랑 종훈이는 종훈이 친구가 여기 살고 있어 만나러 갔고 나랑 엄마는 텐진 구경을 하고 니시진으로 가기로 했다. 공기밥 한 그롯으로 점심을 때웠기 때문에 배도 많이 고프고 또 일본에 와서 일본 채식식당도 한 번 구경을 해보고 싶어 구글검색을 해서 니시진에 있는 '부키초'라는 채식식당을 봐두었다. 여기서부터 비극의 시작이었다. 텐진 구경을 하고 지하철로 니시진 역에 도착해서 사람들에게 위치를 물어보면서 식당을 찾기 시작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편의점으로, 부동산으로, 꽃집으로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는데 친절한 일본인들이 엉뚱한 식당을 가르쳐주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니시진 바닥을 샅샅이 훓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결국 9시가 다 될때까지 돌아다녔지만 식당을 찾진 못했다. 짧은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을 그렇게 흘려 보낸 것이다. 배도 너무 고프고 다리도 너무 아파서 니시진 역 근처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서 그림을 보고 두부가 들어간 요리를 시켰다. 역시나 고기가 들어가 있었지만 건져서 엄마를 주고 허겁지겁 먹었다. 맛은 괜찮았다.

 


 

짧은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바다와 섬들.

 


 

엄마에게 재미있는 여행이었을지 모르겠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아주 멋진 일몰을 볼 수 있었다. 보고 있으니 괜시리 맘이 센치해진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에게 짐이 되는 가족들도 많지만 난 가족이 있어 많은 힘을 받는다. 영원히 내 편이 되어줄 사람들일 것 같다는 느낌. 이들이 없는 난 상상할 수 없다. 올 5월이면 조카가 태어나고 가족이 1명 더 는다. 첫조카가 그리 이쁘다고 사람들이 얘기해주는데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원래 아이들과 별로 친하지 않은 난데 조카라고 더 이쁨을 느낀다면 정말 혼란스럽고 내 자신에게 실망할 거 같다. 모쪼록 순산하길... 엄마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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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유후인


 

둘째날, 유후인. 일반 여행자들에게는 유명한 온천지역이지만 이 계통의 업종(?)에 종사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미군기지와 기지촌으로 더욱 유명한 곳일게다. 기지와 관련한 인권문제에 관해서는 한국의 활동가들과도 꾸준한 교류가 있어왔던 것으로 알고 있고 나도 지난 2002년 서울에서 열렸던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여성네트워크 국제회의에서 유후인 해바라기회의 마츠무라 마치코 상을 만나서 깊은 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녀는 일본의 유후인에서 ‘군대없는 마을 만들기’를 실천하는 평화운동가다. 95년 오키나와에서 일어난 미군의 소녀 성폭행 사건 이후 일본정부가 오끼나와에 집중돼 있던 미군기지를 본토 다섯 곳으로 분산했는데 그 중 한 곳이 유후인이다. 이 곳 단체에서는 '매향리'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미군기지의 문제를 지역의 현안으로만 사고하지 않고 지역과 국경을 넘어선 인권과 평화의 문제로 사고하는 주민들의 시각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유후인에서 미군훈련은 2월 1달 동안 행해진다고 하는데 이 시기 주민들은 훈련장이 잘 내려다보이는 밭을 대여해 작은 오두막을 짓고 미군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고 한다. 또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군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지역 만들기의 일환으로 지역통화를 만들어 사용한다고 한다. 그녀는 지역통화가 지역에 뿌리내려 생활기초가 튼튼해지면 정부의 경제적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는 군사시설이 필요없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 거라는 소박한 희망을 드러내었다. 국가, 제국, 군대라는 폭력 앞에서 주민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미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상식이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을 걷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평소에도 꼭 한 번 휴우인을 방문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지만 이번 여행은 효도관광에 그 목적이 있으므로 이에 충실하기로 한다.

 


 

유후인 관광의 시작은 이곳 JR유후인역에서부터이다. 인포메이션에서 한국말로 된 지도 등 각종 정보를 받을 수 있고 위 사진(유후인 역을 등지고 찍은 거리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거리 양쪽으로 각종 가게며 기념품을 파는 숍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머 말하자면 유후인의 번화가쯤 되겠다.

 


 

일단 짐부터 풀기로 하고 예약을 해두었던 숙소로 향했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플로라하우스라는 곳으로 온천열을 이용해 예쁜 온실을 가꾸면서 숙박업도 겸하는 곳이다. 가격도 다른 곳에 비해 저렴하고 또 엄마가 꽃도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에겐 아주 적당한 숙소였다.

 


 

플로라하우스 온실에서 찍은 각종 꽃들.

 


 

짐을 풀고 일단 점심을 먹기로 했다. 최미례가 이 근처 유명한 우동집을 검색해 왔다고 해서 그리로 갔다. 모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지만 반응은 정말... 너무 짜다 였다. 이 집으로 인도한 최미례는 욕을 바가지로 먹었따.

 


 

짠 우동맛을 가시기 위해 들어간 편의점. 맥주가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길래 일본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찍어보았다.

 


 

본격적으로 거리 구경에 나섰다. 번화가의 상점들은 딱히 뭘 사지 않아도 아기자기하게 볼 거리들이 많아서 눈이 즐겁다.

 


 

일본 전통술을 파는 가게도 보이고

 


 

귀에 익은 음악을 따라 가보니 '토토로의 집'도 보였다. 토토로 말고도 미야자키 하야오 에니메이션의 각종 주인공들이 가게 안에 가득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상품들 뿐만 아니라 가게 자체도 참 예쁘다. 사진 아래 B라는 간판이 보이는 곳은 B-Speak이란 빵가게인데 롤케잌이 유명하다고 한다. 일본의 거리엔 이렇게 케잌을 파는 곳이 참 많다. 일본 사람들 단걸 엄청 좋아하는 모양이다.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예쁜 케잌과 맛있는 센베.

 


 

거리 구경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찍은 유후다케 산의 모습. 낮에 유후인에 도착했을 때만도 산봉우리까지 선명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구름이 봉우리를 가렸다. 더 이쁘다. 유후인은 사방이 이렇게 높이 1,000m 급의 높은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인데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긴린코 호수로 인해 일교차가 커 아침 무렵이면 마을전체가 안개로 가득찬다고 한다. 그래서 유후인을 안개의 마을이라 부른다.

 


 

저녁은 숙소에서 만들어 먹기로 했다. 사먹는 게 사실 먹을 게 없고 비싸기도 하고... 술도 사고 과자도 사고 라멘도 사고 오뎅꼬치도 사고 두부도 사고 해서 한 상이 근사하게 차려졌다.

 


 

플로라하우스의 조식.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식사로 낫또가 나왔다. 내가 원래 콩요리는 좋아하지만 청국장을 싫어하는 관계로 낫또가 내 입맛에는 별로였다. 실처럼 쭉쭉 늘어지며 미끄덩거리는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다.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후쿠오카로 출발하기 전 찍은 거리 풍경. 간이역과 인력거. 유후인은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도는 것이 흔하다고 하는데(우리는 엄마가 자전거를 못타는 관계로 관뒀다) 자전거를 못타는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인력거도 다니고 관광택시도 다니고 마차도 다니고 한다. 이제 후쿠오카로 다시 간다. 우리의 마지막날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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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구로카와 온천


 

우리 여행의 첫 날은 구로카와 온천이다. 구로카와 온천은 해발 700미터, 아소산 중턱에 자리잡은 소규모 온천지역으로 일본의 다른 유명한 온천의 큰 호텔식 료칸이 아니라 소규모 전통 료칸이 좁은 계곡을 따라 나란히 서 있는 아주 매력적인 곳이다. 구로카와 온천은 후쿠오카 공항에서 차로 2시간 30여분 가량 걸리는데 구로카와로 가기 전에 스에다테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면서 찍은 스에다테의 모습.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이 약간 이지러져 보인다.


 

구로카와에 내려서 찍은 모습. 차길을 따라 이렇게 조그만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계속 양 옆으로 조그만 전통 료칸들이 보인다.

 

 

우리가 묵은 곳은 이코이 료칸(いこい旅館)으로 이곳 온천이 미백효과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곳이란다. 최근 자전거 여행 부작용으로 부쩍 늘어난 기미, 주근깨, 다크써클로 고민하던 나로선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맨날 보는 얼굴이라 잘 모르겠지만 오늘 보는 사람마다 좋아보인다 하니 일본까지 날아가 온천에 퍼질러 앉아있던 효과를 보는 것인지...

 


 

우리가 묵은 방 내부와 방에서 본 바깥 풍경이다. 다다미가 깔려 있고 가운데는 티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다.

 


 

티테이블 위에는 꽃무늬가 예쁜 통이 놓여져 있었는데 뚜껑을 여니 쟁반, 쟁반을 들추니 곱디 고운 차세트가 나왔다. 너무 예뻐서 한 컷~!

 


 

일본 전통 옷인지 뭔지를 입고 한 컷. 나랑 내 동생 최미례다. 5월 출산을 앞두고 있어 남산만한 배를 흔들며 이곳저곳을 신나게 다녔다. 나랑 엄마는 잠깐 온천만 해도 어질어질하고 지루하던데 쟤는 누굴 닮아서 그렇게 온천을 좋아하나 모르겠다.

 


 

일본 양말. 게다를 신기 편하게 이렇게 앞이 쪽 갈라져 있는데 신고 있으면 약간 어색하다. 하지만 게다를 신기엔 아주 그만인 양말. 재밌다. 양말, 집에 들고 왔다.

 


 

한바탕 온천을 하고 나니 저녁을 먹으란다. 아침과 저녁, 간식은 료칸 이용요금(1인당 13000엔이 조금 넘음)에 포함이 된다. 일본 요리는 정말 화려하고 아기자기하고 인간적으로 쬐끄맣다. 밤이라 사진이 흔들려 보인다.

 


 

왼쪽 맨 위에 보이는 것이 구로카와 온천 지역 한정의 향토맥주인 '유아가리 비징’(湯上り美人)'이다. 평상시에도 카스, 라거, 하이트를 구분 못하는 나로서는 특별히 맛있는 지는 잘 모르겠더라. 하지만 맥주병의 그림이 너무 깜찍하고 예뻐 찍어보았다. 메인으로는 철판요리가 나왔는데 고기는 동생을 주고 야채를 볶아 먹었다. 맛있었다.

 


 

동생과 동생 남편이다. 음식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온천을 한 판 하고 방에 돌아오니 간식이 놓여져 있었다. 단팥죽인데 일본식 단팥죽은 말간 국물에 팥알이 둥둥 떠 있고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크기의 납작한 새알심이 떠 있다. 보통 젓가락으로 새알심을 건져 먹고 국물은 마신다. 한국 것보다는 더 달다. 단팥죽 접시 아래 보이는 것은 일본 매실짠지인 우메보시. 무척 시다.

 


 

아침식사다. 뚝배기 단지엔 두부가 끓고 있었다. ^^ 일본사람들은 전부 밥을 그릇째 들고 먹어선지 밥상에 밥과 국을 놓을 곳이 없다.

 


 

낸 돈이 아까와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또 온천을 했다. 이곳 료칸들은 체크아웃이 오전 10시라 온천을 마치고는 짐을 싸가지고 카운터에 맡기고 근처 산책을 했다. 사진의 모습은 이코이 료칸 외부 모습인데 온천물에 삶은 달걀도 보이고 오뎅탕이 끓고 있는 솥단지도 보인다. 이것들을 사가지고 불가에 모여앉아 도란도란 얘기 나누면서 먹는 모양이다. 사먹어보지는 못했다.

 

 

그 옆으로는 족탕도 만들어 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난다.


 

여기 옥수수가 많이 나는지 다른 료칸에도 곳곳에 말린 옥수수를 걸어놓았다. 색깔이 이뻐서 한 컷~!

 


 

여기는 구로카와 온천지역에서 슈크림으로 유명하다는 빵집이다. 빵도 빵이지만 인테리어도 너무 예뻐서 사진에 담아 보았다. 여행을 오기 전에 혈당치가 너무 높아서 이번 여행에서 단 것은 금물이라 했는데 최미례는 정말 단 걸 잘도 먹는다.

 


 

빵집에 진열되어 있는 빵들. 정말이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그 중 슈크림이 단연 맛있었는데 너무 달지도 않았고 특히 슈크림 빵 자체가 한국에서 먹었던 것과 다르게 엄청나게 바삭바삭하다는 것!

 


 

거리 양쪽으로 온천장들이 죽 늘어서 있다.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강을 중간에 두고 약 24곳의 온천여관이 늘어서있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료칸들이지만 각기 다른 수질의 다양한 탕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 해서...

 


 

이곳 구로카와 온천지역에는 온천여관조합 ‘카제노샤()'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 곳에서 판매하는 1,200엔짜리 입탕어음 ‘데가타’를 구입하면 3곳의 료칸을 이용할 수 있다.

 


 

‘신사(神社)’의 나라인 일본은 곳곳에 신사가 있다. 구로카와에서 본 자그마한 신사.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한 기념품 가게 앞에 놓여있는 개 공예품이 예뻐서 한 컷 찍어보았다.

 


 

이제 다음 여행지인 유휴인으로 떠날 시간이다. 온천지역 계곡을 조금만 올라가면 유후인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참, 구로카와로 들어올 때 유후인으로 들어갈 때 풍경이 참 예뻤다고 엄마가 그러는데 버스만 타면 세상 모르고 잠이 들어버려서 아까운 구경거리를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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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박정숙 여사


 

우리 엄마, 박정숙 여사. 올해 환갑을 맞았다. 평생 늙지 않을 것 같던 엄마의 얼굴엔 주름도 자글자글, 흰머리도 수북히 내려앉았다. 첨보는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어떻게 하다 삶이 이렇게 꼬였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그 때마다 부모님, 특히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거 같다고 대답하였다. 우리 부모님은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하셨지만 지극히 상식 선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시는 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싫다는 거 강요받아 본 적도 없고 하지 말라고 닥달 받아본 적 없다. 그래서 우리 사이엔 늘 비밀이 없었다. 대학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접한 것도 전라도 강진, 장흥 출신인 부모님의 아웃사이더 기질(우리 부모님은 한겨레신문 창간 때부터 독자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때문이었다 믿고 있으며 공부보단 데모를 전공하게 된 것도 최루탄이 난무하던 거리에 자식과 함께 참가했던 그분들 때문이었다. 결혼도 안하고 별다른 벌이도 없이 늙어가는 딸내미를 챙기면서 가끔 생각날 때마다 툭툭 결혼 얘기, 공부 얘기를 꺼내지만 병역거부 무죄판결이 났을 때도 젤 먼저 축하를 해준 것도 엄마였다. 나는 그런 엄마가 자랑스럽다. 

 

이번 여행은 평소 별로 효도도 못하고 살았기 땜에 환갑을 빙자해서 가족여행을 가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첨엔 근처 온천이나 제주도로 여행가자고 했던 것이 판이 커져서 일본 행으로 낙찰, 준비에 들어갔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후쿠오카 행을 결정했고 3박 4일 간의 온천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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