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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와 이른바 스티로폼 사건(?)을 계기로 (사실 그 전부터 간간히 진보블로거들 사이에서) 폭력과 비폭력에 관한 논의들이 진척되고 있는 거 같다. 참 잘되었다 생각했다. 서로 쓸데없는 인신공격만 오가지 않는다면 모든 토론은 다 좋다.
나는 평소에 비폭력이 인간적이고 또한 여성적인 투쟁의 방식이기 때문에 선호하고 좋아라한다. 내 평상시 밥 먹듯이 욕을 즐겨 사용하여 지인들에게 엄청 쿠사리를 먹는 처지지만(-_-;;)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폭력이 사용되는 집회에서 나는 한 번도 내가 그 집회의 주체라는 생각을 해보질 못했다.
촛불집회에 첨 참가했을 때 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비폭력을 외치고 별것 아닌 폭력이긴 하지만 깃대로 전경을 때리는 시민 한 명을 뒤로 빼는 광경을 보고 참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었다. 비폭력의 외침은 우리 쪽이 비폭력적 행동을 유지했을 때 저쪽에게 도적적 우위를 점할 수 있으며 요구할 수 있을 것이기도 하고 그랬을 때 그들의 폭력적이 훨씬 더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예전에 부산에서 열렸던 아펙 집회에 경찰폭력감시단으로 참가했던 적이 있었는데 경찰폭력을 감시하려 우리 감시단이 집회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는 순간, 비슷한 조끼를 입은 아저씨들이 목장갑을 낀 손으로 쇠파이프를 땅에다 퉁퉁 치면서 우리를 환영(?)해 준 적이 있었다. 그 순간 바로 조끼를 벗고 감시단을 나왔다. 내 누구의 폭력을 감시하겠단 말이냐...)
내가 생각하기에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대상에 고통을 가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다 비폭력의 범주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예전에 평화캠프에서 비폭력트레이닝을 진행하면서 반세계화 시위 도중 한 시위대가 세계화의 상징인 맥도날드의 유리창을 부쉈다면 이것을 비폭력행동으로 볼 수 있겠냐는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내 기억으론 과반수 이상의 참가자들이 생명에게 해를 끼친 것이 아니므로 비폭력 투쟁으로 볼 수 있다고 했고 몇몇 친구들은 아닐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만약 그 투쟁으로 맥도날드 본사가 아니라 그 맥도날드 쥔장(만약 반세계화 시위를 찬성하는 양반이었다면?)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라 했던 거 같다.(이게 아니었다면 지송... OTL)
어차피 군대, 경찰을 비롯해 모든 폭력적 기제들을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이상 아무리 100만이 모이고 1000만이 모여도 물리력으로는 절대 싸움이 되지 않는다. 설사 부분적으로 승리를 할 수 있었다고 할지언정 그게 결과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어떤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난 솔직히 믿지 않는다. 폭력 투쟁은 소수의 사람만이 참여 가능하고 조중동, 2MB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등 부작용이 많다. 하지만 비폭력 투쟁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고 그 상징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부정의한 상황에 대해 잘 알려낼 수도 있고... 내가 생각하기에 비폭력 투쟁은 부작용은 별로 없고 장점이 아주 많은 투쟁의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비폭력 투쟁의 무기는 물리력이 아닌 기발함, 발랄함, 상상력, 유머러스, 허를 찌름 등등으로 대표될 수 있겠다(아, 물론 절절하고 절박한 투쟁이 필요하고 꼭 필요한 상황은 았다).
그렇게 봤을 때 스티로폼을 놓고 명박산성을 넘어가려 했건 다른 어떤 퍼포먼스를 하려 했건 그건 폭력 시위로 매도되어 지탄받을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상황을 폭력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그것은 그 퍼포먼스가 폭력투쟁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 촛불시위 분위기가 무언가를 주도하려는, 특히 운동권, 특히 다함께(?)에 지독한 알레르기 반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불편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제발 스트로폼 퍼포먼스를 가지고 폭력, 비폭력 투쟁 노선의 문제로 비화해서 논의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램이다. 나도 그 날 그자리에 있었고(물론 뭔 얘기가 오가는지는 들을 수가 없었다. 광장이 워낙 넓고 사람들이 많으니 가까운 거리에 있었는데도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그 날의 토론회를 주도했던 사람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전혀 누군가를 선동하려거나 어떤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선동하는 것처럼 들렸다는 분들도 있었는데 누구든 앞에서 발언을 하고 토론이 치열하게 오가는 상황 속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이해될 수도 있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누군들 다 손석희같을 쏘나..) 나같이 이 분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음향시설도 좋지 않아서 뭔 얘기가 오가는지 잘 들리지 않았고 촛불집회에서 계속되었던 구운동권들의 찌질한 선동방식에 질려했던 집회 참가자라면 충분히 이에 대해 오해했을 개연성도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오해는 오해이므로 풀면 된다. 그것때문에 개인의 폰번호까지 공개되어서 곤욕을 치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사족 하나, 그래도 스티로폼 퍼포먼스는 별로 재미없었을 거 같다. 이미 명박산성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시키자는 운동을 추진하자는 말이 나올만큼 전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된 이상 명박산성은 그 자체로 이명박식의 찌질함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명박산성을 타고 넘자는 자기희생적이고 절절한 투쟁방식은 별다른 상징성을 보여줬을 거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는 명박산성에 흰 천을 씌워놓고 식코를 보자고 했던 어떤 네티즌의 생각이 더 잼있었다.
사족 둘. 이것은 철저히 내 생각이므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명박산성을 타고 넘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절대로 막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이미 한겨레 신문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
사족 셋. 나도 선동하려고 하는 운동권들을 매우 싫어하지만 촛불시위에서는 어떤 면에서 순수한(?) 시민 대 불순한(?) 운동권의 공식이 너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거 같아서 안타깝다. 물론 이것도 운동권들의 자업자득이라면 할 말 없지만. 이 기회에 운동권들도 좀 반성을 하고 시민들도 노여움을 좀 거두시면 좋겠다. 사실 저 구도 정말 이상하다. 운동권은 시민 아닌가. 황우석과 디워에 열광했던 사람들과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 변화가능성을 믿기를 절대 거둬서도 안되지만 지나친 열광... 어쩔 때는 좀 불편하기도 하다.
사족 넷. 대항폭력에 대해서는 음... 생각이 좀 다르긴 하다. 과거처럼 집회 전에 물리력을 미리 준비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면 전경이 휘두르는 방패나 물대포를 맞고 눈 돌아가지 않을 사람이 없을테니까 말이다.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안했으면 좋겠다. 대항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걍 꾹 참고 안해주셨으면 좋겠다. 일부러 전경들을 도발하는 것은 더더욱 싫다. 이런 대규모 집회에서,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는 오해를 사기 쉽상이고 어떤 조중동같은 악마적 언론에서는 이런 꼬투리를 절대 놓칠리 없다.
사족 마지막. 광장에서 자그맣게 비폭력트레이닝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서로가 시위대가 되고 전경이 되고 지나가는 시민이 되어 각자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서로 이해하고 보다 효과적인 투쟁의 방식을 고민하는 상상을... 주변의 어떤 도발에도 꾹 참을 수 있는 내공을 훈련하고 어떤 대응이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을 분명히 드러내고 뻘쭘하게 만들 수 있을지, 그래서 경찰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일고 명바기의 명령에 과감히 혹은 표간호사 식으로 간접적으로라도 저항하는 개인이 출현할 수 있게 할 수 있을지... 재미없을까? ㅋㅋ
오랫만의 블질이다.
우하하... 이번엔 타투다. 지난 달 초에 김완의 소개루다가 훌륭하신 타투이스트 한 분을 만나 한쪽 날개쭉지에 떡하니 나비문신을 하나 했다. 1시간 동안 치과 치료 받을 때 그 소름돋는 굉장한 소리와 상당한 고통을 참으니 아주 멋진 그림이 완성이다. 손발에 땀이 잘 나지 않는 편인데 손발이 척척할 정도로 진땀이 났다.
문화연대를 비롯한 몇몇 문화단체와 교수, 활동가들이 타투 법제화(cafe.daum.net/artistgun)를 위한 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고 제작년인가? 이를 위한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문화연대 활동가들이 자신의 몸에 근사한 투쟁의 이미지를 새기기도 했었다. 나는 이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걍 나비로 ㅋㅋ 문신해준 치후씨가 물어봤다. 왜 하시는 거예요? OTL 오리 왈, 걍 이쁜 걸루 하구 의미는 나중에 갖다 붙이려고요.
위 아래 근사한 사진은 토리가 학교 스튜디오에서 찍어주었다. 역시 사진작가는 머가 달라도 다르다. 감동 먹었다. 모델이 별루라서 그렇지... ㅋㅋ
리우스 님의 블로그를 타고 나도 한 번 해보았다. 근데 질문문항이 상당히 아리까리한 것들이 많더라. 체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거의 서너번에 한 번은 망설였던 것 같다.
어케 난 모든 심리테스트가 이리 수치가 낮다냐... 그래도 젤루 높은 게 평화주의자네. 아침, 나 완벽주의자 아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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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진보넷 블로그가 무섭기도 하고 좋기도 한가보다. 어떤 블로거들의 눈에는 채식과 관련한 나름 열띤 논쟁이 그저 말싸움인 것처럼 비치기도 하는가 보지만 나는 마지막이라는 EM님의 글을 보고 있으니 괜시리 미소가 띄어졌다. 소중하고 좋은 문제제기라고 생각한다.
'냄새가 난다'는 표현을 사용했던 사람으로서...
그건 누군가의 말걸기를 넘겨짚거나 검열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채식가로 5년째 살면서 채식에 관한 질리도록 많은 비판을 들었었고 대부분 그런 비판의 요지는 '운동'이 아닌 '취향'으로 (여기서 말하는 운동과 취향은 EM님이 사용하시는 운동과 취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예요. 채식가로서의 취향이 존중되는 것이 개인성의 확대이자 진보라는 EM님의 말씀에 동의. 여기서 말하는 취향과 운동은 지극히 개인적인 실천으로 별반 중요하지 않은 취향 VS 보다 상위의 거룩한(지송, -_-;; 제 한계이옵니다) 운동) 폄하하려는 시도였다. 지극히 부르주아적이고 적들에게 전혀 타격을 줄 수 없는 유약한 운동방식이다 등등. 처음 EM님의 글을 접했을 때 그런 느낌을 팍 받았었다. 채식가 특유의 예민함(혹은 맨날 비판받는 입장에서의 자격지심 -_-;;)이 그 안에 작동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운동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운동의 크기(혹은 선후, 혹은 권력관계, 혹은 헤게모니 -_-;; 역시 지송...)로 봤을 때 EM님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그렇게 읽을 수 있는 맥락이 있다고 본다. 늘 먼저 말걸기를(많은 경우 돌을 던지는 시도를) 하는 쪽은 정해져 있다(있었다). 물론 EM님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알겠다. 훌륭한 말걸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비판의 맥락은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내용들과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생각이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서 인간이 하는 모든 운동은 어딘가 모순적이고 모두가 인정하고 긍정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진리란 없으며 조금씩 모자라고 조금씩은 허술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기에 marishin님이 글 1번에 쓰셨던 내용도 모든 운동이 다들 그렇고 그런 것인데 왜 유독 채식에 관해서만 딴지를 거시나 라고 말했다기 보다는 인간이 하는 운동 모두가 그렇다는 것, 그것 자체가 당위이고, 그것 자체가 보편타당하다는 얘기라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지송... -_-;;) 하기에 일정한 "보편타당성"을 기반으로 남에게 "강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EM님의 생각은 나와 같은 운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도 않는(혹은 일부에게만 존재하는) "보편타당성"을 향해 가도록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된다. marishin님이 사용하신 근본주의자 혹은 환원주의자라는 표현은 계급모순으로의 환원주의 혹은 근본주의가 아니라 그것이 계급이 됐건 무엇이 됐건 완벽한 운동을 상정해 두고 끊임없이 그것을 향해 가야 한다는 이런 운동의 경향성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것도 아니라면 또 지송... -_-;;)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운동과 애초부터 다른 레일에 서 있는 분들과는 운동을 개념화하고 비판해서 더 나은 대안을 찾기가 힘들다.
기존의 운동에 대한 비판과 더 나은 대안을 위해서 나는 무엇보다도 개인성에 기반한 자유로운 사고와 실천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운동에 대해 성찰하고 진지하게 고민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가를 가르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몫이다. 토론이나 논쟁을 많이 해보지는 않았지만 사실 모두가 합의하는 결론을 내 본 기억이 없다. 나의 토론 능력이 딸리기 때문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아직도 그렇다고도 일면 생각하지만) 애초부터 다른 레일에 서 있는 사람들끼리는 어떤 결론에 도출하기 힘들다, 그런 토론은 무의미하다, 운동을 위해서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채식이란 실천을, 병역거부란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이런 비협조, 불복종이라는 실천의 방식이 일반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방법론적인 운동을 강조하는 방식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지점이 없는지를 고민하고 성찰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운동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보넷 블로그에서 요즘 채식에 관한 논쟁이 한창인가보다.
처음 블질할 때의 그 열정이 요즘엔 많이 식은지라(그래서 아는 사람들의 몇몇 블로그만 가고 있다는... -_-;;) 꼼꼼히 그 논의를 따라가보지 못했다.
그래도 EM님의 글은 어딘가 냄새가 난다. 그것은 채식가들이 보통 느끼는 과도한 예민함일 수도 있겠지만 체질적으로 고기나 생선을 먹지 못하거나 건강상의 문제로 채식을 시작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름 정치적인 이유로 고기나 생선을 멀리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종종(아니 자주) 가해지는 그렇고 그런 비판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나는 EM님이 뭐하러 과도하게 그런 식으로 '운동'으로서의 채식과 '취향'으로서의 채식을 나누려고 열심인지 모르겠다. 물론 주변에 평택미군기지확장에 찬성하면서 채식을 열씨미 실천하는 분이 계셔서 그런지 몰라도 내가 아는 채식가들은 먹는 것만 중요하고 다른 소비생활은 자본주의적으로 살아도 좋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없기 때문이다. 왜 하필 채식인가 왜 먹는 것 같고 그러느냐는 것으로 보이는 EM님의 글은 채식가들을 존중하신다는 여러 번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걍 애초에 이런 말걸기는 왜 하신 걸까 하는 고갯짓을 하게 만든다.
물론 채식을 한다고 모두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자전거를 탄다고 모두 진보적이거나 좌파적인 것은 아니다. 충분한 비판이 필요한 것도 맞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채식이나 자전거타기 등으로 일상의 소소한 실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폄하해선 안된다. 내 보기엔 최대한 검소하게 살며 분리수거 열심히 하려고 하는 우리 엄마의 소박한 실천들이 집회장 맨 앞줄에 앉아계신 분들보다 훨씬 위대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채식을 하자"는 것과 "육식과 마찬가지로 마음껏 채식을 즐길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것은 따로 갈 수 있는 구호가 아니다. 다만 전자의 경우 말로 떠든다고 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스킬(?)들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주변에 채식가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일상에서 소소하게 채식가들의 존재가 늘어가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나 또한도 내 주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채식가들의 영향으로 육식과 환경에 관해 고민해 봐야 한다는 자극을 받게 되었고 실천하게 되었으니까.
에고... 걍 끄적거릴라 했는데 잡설이 길어졌다. 아래 링크는 예전에 한겨레21에 기고했던 채식에 관한 글이다. 또 그 호에 여러 가지 채식에 관한 소개가 되어 있어서 혹시나 해서...
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6/04/021003000200604040604060.html
파리에서 베트남으로 왔다. 1달 여의 잔차 여행이 꿈처럼 흘러간다. 오랜 잔차 여행에 심신이 지친 우리는 베트남 항공의 스탑오버 시스템을 적극 활용해서 베트남 바닷가에서 죽치고 놀기로 했다. 베트남도 잔차로 여행을 다닌다지만 우리는 바닷가 한 곳에 걍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잔차를 패킹한 박스 그대로 공항 수하물 보관센터에 맡겼다. 물론 돈은 내야 한다. 그리고 택시로 호시민 시내로 이동했다. 젤 먼저 한 일은 환전.
>> 한국에서 미리 달러 TC를 준비해 갔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1000동에 대략 70원쯤 했던 것 같다. 그러니 그리 큰 돈을 바꾼 것도 아닌데 아주 지폐가 다발이다. @.@
그리고 은행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팜응우 라오라는 여행자 거리로 향했다. 버글거리는 도시보다는 바닷가를 선호했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 날 바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으면 탈 요량이었다. 다행히 밤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어서 그 때까지 밥도 먹고 거리 구경도 하면서 놀기로 했다.
>> 팜응우 라오 여행자 거리의 모습. 베트남엔 진짜 오토바이가 많다. 근데 이 오토바이들 완전 폭주족들이다. 우리는 처음에 이렇게 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들에 적응을 못해서 고생했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토바이 사이를 유유히 걸어다녔다. 나름의 질서가 있겠고 큰 사고도 없다고 하니 함부로 넘들 사는 모습을 폄하하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 정말 오토바이는 그 소음과 매연... 증말 뷁~이다.
>> 불교 국가인 베트남에는 채식식당이 많다. 우리는 론리에 소개된 채식식당 중 한 곳에 들어가서 몇 가지 음식을 시켰다. 모두 아주 맛이 좋았다.
저녁에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무이네 바닷가로 향했다. 호치민 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해변이다. 여행객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한적한 곳이란 론리의 설명이 우리의 행선지 결정을 도왔다. 호치민 시에서 무이네 바닷가까지는 채 300km가 안된다고 하는데 저녁 7시 경에 출발한 버스는 자정이 되서야 무이네 바닷가에 내렸다. 너무 늦은 시각이고 해서 대충 내린 곳 근처에 있는 숙소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 날은 론리에서 봐둔 숙소로 이동을 했다.
>> Full Moon Beach라는 곳인데 여기서 우리는 일주일을 묵었다. 원래는 3~4일 경 있다가 호치민으로 다시 돌아가 메콩델타 투어를 하려고 했으나 숙소와 여기 바닷가의 분위기가 넘넘 맘에 들어 하루 종일 밥먹고 수영하고 술마시고 수다떨고 했다. 론리에도 소개되어 있는 곳이다. 별로 큰 규모의 숙소는 아니나 작은 수영장이 딸려있고 바로 옆이 바닷가라 운치있고 편리한 곳이다.
>> 우리가 묵은 방. 패밀리룸이다. 더블침대가 두개 있어 extra bed를 한 개 놓아주었다. 자그만 홈바, 화장대, 티테이블 등이 소박하게 놓여있는 곳이었다. 화장실이 오픈인 것이 에러였으나 그것두 나름대로 재미를 주었다. ^^*
>> 여기 숙소에서 먹었던 베지테리언용 식사들. 이 숙소 레스토랑에도 채식 메뉴가 따로 있었다. 역시 아주 맛남. 아침은 숙박비에 포함되어 나오고 점심과 저녁을 사먹었다. 아침은 부페식으로 나오고 주문을 하면 오믈렛이나 바나나팬케잌 등도 먹을 수 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매일매일 좋아하는 물놀이를 하고 가람이가 준비해온 방수팩에 디카를 넣어서 수중촬영 놀이도 했다. 공도 구해다가 바닷가에서 공놀이도 했는데 그것도 잼있었다. 밤마다 맥주와 칵테일을 홀짝거리면서 수다떠는 것도 좋았다. 볕이 너무 뜨거울 때면 바닷가에 놓인 썬텐배드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다 졸기도 했다. 같이 여행간 친구들 사이에 친밀도도 더욱 높아졌다. 행복했다. 물론 찍어놓은 사진은 많으나 수영복 차림이 참으로 거시기 하여 패쓰~
>> 하루는 근처 유명하다는 모래언덕(Sand Dune)에 반나절 놀러갔다. 어떻게 이런 모래언덕이 생겼을까 싶을 정도로 희안한 곳이었는데 현지인들은 이 곳을 웨딩사진 찍는 장소로 많이들 활용한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도 마침 1쌍의 부부가 웨딩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저 모래언덕이 이런데 진짜 사막이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 동아시아 쪽 나라들 관광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풍경을 여기서도 볼 수 있었다. 어린 꼬마에서부터 1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까지 모두 모래언덕에서 모래썰매(비료푸대)를 타라고 거의 강제로 사정을 하고 있다. 사진을 같이 찍어주고 돈을 달라고 한다. 안타겠다고 하면 끝까지 따라오면서 혼자 고즈넉하게 풍경을 감상할 수 없게 만든다. 하도 사정을 하길래 썰매를 탔는데 생각지도 않은 큰 돈을 달라고 한다. 줄 수 없다고 하니 어떤 아이는 울고 어떤 소년은 불같이 화를 낸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슬픈 풍경이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이제 이번 여행의 막바지로 접어들려고 한다. 정겨웠던 무이네 해변을 뒤로 하고 우리는 출국하기 하루 전 날 호치민 시로 돌아왔다. 그래도 전쟁박물관 정도는 봐야하지 않을까 해서...
>> 팜응우 라오 지역 한 숙소에 짐을 풀고 우리는 전쟁박물관으로 향했다. 베트남 하면 씨클로인데 한 번 타보자 해서 숙소에서부터 전쟁기념관까지 씨클로를 이용해서 갔다. 걸어서 가도 그리 먼 거리는 아닌 듯.
>> 전쟁박물관의 전시물들. 베트남 전쟁의 잔혹성을 사진과 설치물들로 표현해 놓고 있었다. 미군의 잔혹한 전쟁 범죄와 피해자들의 끔찍한 사진이 아주 많았다. 단두대는 실제로 사용되던 것이라고 한다.
>>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만찬. 역시 채식요리들.
생전 처음 베트남이란 곳에 여행을 갔는데 이렇게 놀다와도 되는건가 싶었다. 다음 번엔 이런 관광지가 아니라 진짜 베트남의 모습을 보러 다시 오고 싶다.
이렇게 나와 친구들의 40일 간에 걸친 대장정은 끝이 났다. 글로 사진으로 다 쓰고 담지 못한 고민과 느낌들은 온전히 내 몫으로 남기겠다. 아무래도 총명탕을 지어먹어야겠다. 이제 보니 나이 먹으면서 내가 극복해야 할 것은 떨어져가는 체력이나 고집불통의 성격이나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니라 아차 하는 건망증이란 맨날 뭔가를 흘리고 다니는 칠칠맞음이었던 것이었다. 뮌스터와 파리에서의 사고의 여파가 워낙 커서 이번 여행 베스트를 정리하긴 쉽지 않지만 좋은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진 것을 꼽고 싶다. 여행 중엔 서운하고 섭섭하고 징글징글 하다는 생각이 없진 않았으나 내 맘을 더 활짝 열어놓고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긴 것 같아 기쁘다. 다음 여행은 또 어떤 모험이, 어떤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내 안에 쳐진 금 중의 하나인 혼자 여행하는 프로젝트도 조만간 호흡을 깊이 들여 마시고 실천해볼 생각이다.
우여곡절 끝에 드뎌 파리 도착이다. 벨기에에서 어떻게 저떻게 프랑스 국경을 자전거로 넘기는 했으나 달라진 자전거 표지와 퍼붓는 비로 프랑스 북부 릴르에서 기차로 이동하기로 전격 결정, 기차로 파리에 도착했다.
>> 파리 북역의 모습.
대부분의 유럽 여행자들이 최고의 여행지로 꼽는다던 곳, 따뜻한 크로와상과 진한 커피 한잔, 카페테리아 앞에서 수많은 인파를 포커스 아웃 시키며 진한 키스를 나누던 연인들의 사진으로 기억되는 그 곳. 드뎌 파리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이번 여행의 일정 중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해 머물기도 한 곳이다. 그리고... 그리고... 나에게는 막판 끔찍했던 여행지로 기억되는 그 곳. 일기장도 홀랑 잃어버려 가물가물한 기억을 붙들고 이제부터 기록 시작이다.
>> 다리 이름이 머였더라... 암튼 이 다리를 건너면 루브르 박물관이다. 다리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거리의 화가. 멋있어서 걍 찍어 보았다.
>> 세느강의 모습. 여행자들이 유람선들을 많이 타나보더라. 우리는 못 타봤다. 일몰 때 유람선을 타면 멋지다고 하더군. 야경도 이쁘고. 한강이 참 큰 강이란 생각이 들었다.
>> 우리 파리 여행의 길잡이 르네 아저씨
어차피 항공기 일정이 프랑크푸르트 인 파리 아웃으로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지만 르네 아저씨가 없었다면 감히 맘 편히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르네 아저씨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지부인 Union Pacifiste(평화주의자 연합 쯤?)에서 활동하고 계신 활동가이다. 르네 아저씨와는 제작년 한국에서 있었던 국제세미나에서 만나 얼굴을 익혀논 터였다. 여행 초반 참석했던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국제회의에서 르네 아저씨는 파리 여행에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회사와 집 연락처를 알려주시고 파리에 도착하면 꼭 연락하라고 당부하셨다.
>> 에펠탑이 보이는 다리에서 한 컷. 저녁 늦은 시간에야 물어물어 캠핑장을 찾아갔기 때문에 파리에 도착한 첫 날은 이 곳의 정취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다음날 화장한 파리의 공기를 가르지르며 캠핑장에서 물어물어 세느 강변에 도착했을 때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보고 드디어 우리가 파리에 오긴 왔나보구나 하고 느꼈다.
파리에는 캠핑장이 딱 한 군데 있다. 파리 서쪽에 위치한 블로뉴 숲을 가로질러 가면 나온다. 이름도 블로뉴 캠핑장이다. 꽤나 대형화되어 있는 캠핑장인데 아주 사람들이 버글버글 했다. 캠핑장 안에는 각종 편의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다. 캠핑장 내 수퍼에서 아침마다 굽는 크로와상 냄새로 기억되는 곳이다. 파리 시내에서는 꽤 떨어진 곳이라 매일 아침과 저녁 꽤 긴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이동을 해야 했다. 블로뉴 숲에는 밤이면 밤마다 호객행위를 하는 성매매 여성들을 볼 수 있었다.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씁쓸한 풍경이다.
>> 퐁네프(Pont Neuf) 다리에서 친구들과. 정확히 말하면 네프 다리. 퐁(Pont)이 불어로 다리라는 뜻이란다. 우리에게는 퐁네프의 연인들이란 영화가 히트하면서 괜히 파리에 놀러가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실제 퐁네프는 세느강의 여러 멋진 다리 중 그저그런 다리였다. 그래도 온 기념으로 사진 한 장!
한 달을 멀쩡하던 내 자전거가 파리에 도착하고 나서 이상해졌다. 덜덜거리는 게 승차감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기어이 세느강변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와중에 타이어가 터져 버렸다. 튜브에 펑크가 나고 바람이 빠진 정도가 아니라 꽤 큰 소리를 내며 타이어 한 쪽이 터져 버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일단 점심을 먹고 근처 잔차가게를 알아보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겨우겨우 잔차를 끌고 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나동 자전거 바퀴에 펑크가 났다. 그래... 이럴 때를 위해 밤마다 르네 아저씨가 우리 꿈에 나타났던 게야. 친철한 르네 아저씨의 도움으로 아저씨 차에 나와 나동의 잔차를 싣고 아저씨 집으로 향했다.
>> 아저씨 집으로 가는 길에 근처 보쥬광장(Place des Vosges)에 들렀다. 북적거리는 보쥬광장 바깥과는 다르게 안은 굉장히 고즈넉하고 조용한 정원이었다. 건축가인 르네 아저씨는 이 곳 광장이 완벽한 대칭구조로 되어 있는 건축적으로도 아주 유명하고 유서깊은 곳이라 설명해 주셨다. 빅토르 위고의 집도 여기 어디에 있다고 한다. 보쥬광장 입구에서 르네 아저씨와 한 컷!
>> 보쥬광장 잔디에서 잼있는 사진찍기 놀~이!
>> 사진찍기 좋다고들 하는 보쥬광장에서 넘들은 예술 사진도 많이 찍더라만은 나는 걍 나동 찍어준 사진으로 대체. 정대칭 보쥬광장의 면모를 아주 살짝 엿볼 수 있다.
타이어가 타진 관계로 나랑 나동만 르네 아저씨의 멋진 빨간색 차를 얻어타고 다른 친구들은 차 뒤에서 열나 잔차를 타고 보쥬광장을 비롯한 마레지구 일대를 살짝 돈 후에 르네 아저씨 집으로 향했다. 르네 아저씨는 리퍼블리끄라는 전철역 근처에 살고 계셨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최근 리퍼블리끄 근교 바와 카페들이 멋진 언니, 오빠들로 아주 지대로 물이 좋다고 한다.
>> 뒤로 보이는 물은 생 마르땡 운하(Canal Saint Martin). 아저씨 집은 운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걍 지나치지 못하고 또 한 컷!
르네 아저씨는 우리 아빠뻘 되시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활동가이시다. 파리지엔답게 파숑도 아주 세련되셨다. 자극적인 음식이나 카페인을 못드신다. 현재 여자친구인 실비와 함께 살고 계신데 실비도 union pacifiste의 회원이다. 파리에서는 정말 이 커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거의 매일 저녁을 사주시고 전철표도 끊어주시고... 먹을 것에 걸신들린 우리들 때문에 아마 돈도 수억 깨졌을 거라 짐작된다. (-_-;;)
>> 르네 아저씨 집 베란다에서. 집 내부. 운하. 그리고 운하 다리에서 바라본 르네 아저씨 집. 캠핑장에서 파리 시내까지 너무 멀어서 캠핑장에서 며칠 지내고는 염치 불구하고 르네 아저씨 집에다 둥지를 틀었다.
>> 그 날 저녁은 근처 레바논 식당에서 아주 배가 터지도록 맛난 음식들을 대접받았다. 열 몇가지 음식이 차례로 나오는데 이런 중동음식에 익숙치 않은 우리들은 눈이 휘둥그레 가지고 열심히 먹어댔다. 먹느라 정신이 팔려 미처 사진으로 다 남기지는 못했다.
저녁을 먹고는 펑크난 자전거들을 르네 아저씨 집 지하 창고에 맡기고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캠핑장으로 갔다. 다음 날 실비가 근처 잔차가게에 우리는 데려다주기로 했다. 참, 파리 지하철은 전차가 멈추면 수동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
>> 바스띠유광장. 프랑스 대혁명에서 숨진 사람들을 기념하는 탑이라고 한다. 실비의 도움으로 잔차를 고치고 근처 바스티유 광장에서 놀았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파리 구경의 시작이다. 꼼꼼한 르네 아저씨가 파리에서 볼만한 곳의 스케쥴을 짜 놓으셔서 ㅋㅋㅋ 알짜배기 여행이 될 듯 하다. 그 첫 시작은 유명한 루브르 박물관
>> 루브르 박물관의 외관 모습. 루브르 박물관의 출입구인 유리 피라미드가 보인다. 최근 다빈치코드라는 책과 영화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해진 곳이다.
루브르에 가니 놀랍게도 한글로 된 관람 안내 팜플릿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 많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인지... 낮시간에는 사람도 디지게 많고 값도 비싸고 해서 입장료가 할인되는 오후시간(3시 이훈가 그렇다... 정확히는 기억이...)에 관람했다. 박물관이 워낙 커서 며칠이 걸려도 다 못볼만큼 크더라. 나중에는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해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관람을 하였다.
>> 입구인 유리 피라미드에서 길은 3갈래로 갈라진다. 프랑스 조각과 이슬람 미술을 전시해 놓은 리슐리관, 중세의 부르브를 비롯해서 루브르의 역사를 전시해 놓은 쉴리관, 그리고 11~15세기 이태리 및 스페인 조각들과 로마 지배 하의 이집트, 고전기 이전의 그리스 등의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는 드농관이다. 세 관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사진은 과거 요새였던 루브르 박물관의 과거를 엿볼 수 있는 해자이다. 어두워서 사진이 좀 흔들렸다.
>> 쉴리관 지층에서 루브르 역사를 관람하고 1층을 올라오니 바로 파라오 시대 이집으를 테마별로 관람할 수 있는 코스를 만날 수 있었다. 정말 방대한 양의 전시물들... 입이 딱 벌어졌다. 그 중 몇 장.
>> 당최 어떻게 돌아야 효과적으로 전시를 볼 수 있는지 모르겠고 타고난 길치라 방위도 어떻게 되는지 몰라 걍 되는대로 돌았다. 이 조각들은 파라오 시대 이집트를 돌아 고대 그리스를 돌아 16~19세기 이태리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던 곳인 것 같다. 아님 말구... (-_-;;)
>> 고대 그리스 조각들. 잘은 모르지만 팜플릿에도 소개된 것으로 보아 유명한 것들인가 보다. 보르게즈의 검투사, 사모트라케의 니케상이라 이름 붙여져 있다.
>> 역시 파라오 시대 이집트 전시물들. 오른쪽 아래로 보이는 것이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법전이다.
>> 리슐리관 1층에 전시되어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전시물들과 프랑스 조각들. 폐장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제대로 관람하지는 못했는데 메소포타미아 전시물들은 그 크기에서 오는 웅장함에 절로 기가 죽는다.
선사시대부터 19세기까지 유물들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놓았다는 루브르 박물관이지만 이러한 유적들이 모두 과거 제국주의 시기 약탈에 의한 것일거라 생각하니 약간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간이 없어서 찬찬히 돌아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밀로의 비너스 진품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지만(솔직히 그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더라만 머 진품을 보았다고 더 좋은줄은 잘 모르겠더라) 그 외에도 모든 소장품이 다 훌륭했다.
>> 온틍 회색빛인 파리는 야경이 유명한 도시이다. 루브르에서 다리가 붓도록 뛰어 다니고 나오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돌아오는 길 구경한 에펠탑의 야간 버전도 참 멋있었다. 관광객을 위한 것인지 밤이면 에펠탑에서 레이저도 쏘고 삽시간에 불이 붙은 듯 번쩍번쩍한 조명도 쏴준다. 에펠탑 꼭대기에서 보는 야경도 멋있다고 하던데 그 값도 만만찮아서 포기했다. 대신 걸어서 무료로 어느 정도까지 입장할 수 있게 해주는데 그 줄도 엄청 길어서 것두 포기! 어차피 고소공포증 땜에 높은 곳에서의 전망을 그닥 좋아하지 않으므로.
>> 담 날 우리가 찾은 곳은 뷔뜨쇼몽 공원(parc des buttes-chaumont)이다. 쓰레기 하치장으로 쓰이던 곳을 공원으로 개조한 것이라고 하던데 참으로 한가하고 이뻤다. 파란 하늘, 뭉게 구름, 초록색 잔디가 어우러진 곳.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거나 책을 보는 파리 시민들. 부럽당. 공원의 한 나무에서 나동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람은 그렉. 우리 파리 여행의 실질적인 가이드 역할을 해주었다. 역시 Union Pacifiste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다.
>> 뷔뜨쇼몽 공원에서 노닐다 우리가 찾은 곳은 뻬르 라쉐즈(Pere Lachaise) 묘지. 쇼팽이나 발자크 최근 짐 모리슨까지 유명인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꽃이 놓여져 있는 묘지가 짐 모리슨의 묘이다. 또한 여기는...
>> 파리 꼬뮌 전사들의 벽. '꼬뮌의 죽은 이들에게 1871년 5월21~28일'이라 적혀 있다. 누구는 이 묘지에서 오월 광주와 망월동 묘역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지만 우리는 묘지 문 닫아야 한다는 묘지 관리인의 성화에 꼬뮌 당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어볼 시간도 없이 달려나와야 했다. 흑.
>> 그리고 저녁에는 Union Pacifiste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 했다. 르네 아저씨가 진행하는 이 방송은 프랑스 및 전 세계의 평화운동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란다. 내가 한국말로 가람이가 영어로 다시 르네 아저씨가 불어로 말을 이어가며 최선을 다해 평택의 상황을 소개하고 연대를 호소했다. 이 스튜디오는 Union Pacifiste 말고도 다른 활동 그룹들이 빌려서 자체 방송을 한다고 한다. 우리가 방송을 끝내고 나오니 성소수자 운동 그룹에서 바로 이어서 방송을 하였다.
>> 방송을 마치고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모여 식사를 했다. 왼쪽 파이프를 문 아저씨는 Union Pacifiste 대표인 모리스 아저씨, 아침, 날맹, 르네, 실비, 서있는 사람은 왼쪽이 이 레스토랑 주인이신 분(역시 Union Pacifiste 회원이라고 한다), 파스칼(제작년 한국 회의에 르네 아저씨와 함께 참석했었다), 나, 나동, 가람, 그리고 파스칼의 여자친구. ㅋㅋ
>> 르네 아저씨의 말로는 파리는 채식하기 썩 좋은 곳은 아니라고 한다. 파리에서 우리가 먹었던 음식들, 디저트들.
>> 밤마다 이런 음식을 우리한테 대접하시느라 정말... 눈물이...
>>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럽다.
>> 담날 일정은 퐁피두 센터에서 시작되었다. 짓다 만 것같은 외관을 하고 있는 이 곳은 파리의 문화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고 한다. 르네 아저씨가 여기에 굉장히 좋은 전시가 있다고 해서 들렀다.
>> 뷜렘이란 카투니스트의 전시였는데 전쟁과 현대문명, 특히 현대 미디어에 관한 날카롭고 유머러스한 비판의식이 엿보이는 작가였다. 글 중 몇 컷!
>> 담날 우리 일정은 노트르담 성당이었다. 이번 유럽 여행에서 본의 아니게 자주 들렀던 곳이 이런 성당이었는데 날나리(?) 천주교 신자인 아침은 가끔씩 들른 이런 성당에서 영성을 듬뿍 충천하고 기뻐하기도 하였다. 규모가 엄청 큰 성당이었다. 우리가 들렀던 시간도 사람들이 예배를 보고 있었는데 성경이라고는 한 줄도 읽어본 적이 없지만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경건해지더라.
>> 노트르담에서 자전거를 달려 들른 이 곳은 파리 식물원(Jardin des Plantes). 여기도 역쉬 거의 폐관을 할 때쯤 도착해서 느긋하게 갖가지 식물들을 둘러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쉬우나마 예쁜 꽃 한 컷! 그렉의 정면 모습도 볼 수 있다.
>> 저녁에는 모리스 아저씨와 르네 아저씨를 다시 만나 저녁을 먹고 근처에 있는 Union Pacifist 사무실을 찾았다. World citizen이란 단체와 함께 쓰는 사무실은 아담했다. 사무실에 처음 놀러간 기념으로 우리는 꽃 시장에서 산 화분을 선물!
>> 담 날 아침,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잔차 가게에서 몇 가지 자전거 용품과 타이어를 사가지고 우리는 오늘 여행의 목적지, 그리고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소매치기의 기억이 있는 몽마르뜨 언덕으로 향했다. 몽마르뜨 가는 길에 있는 파리의 대표적인 극장식당인 물랭루즈에 멈춰 한 컷!
>> 이렇다할 높은 산이 없는 파리에서 꼴랑 해발 130m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 언덕은 거의 산의 수준이라 한다. 이 산의 정상에 우뚝 서 있는 사크레 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e-Coeur).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관광객들이 너무너무 많아서 속세의 삶을 거부하고 낭만을 추구했다던 파리 예술가들의 정취를 지대루 느끼기에는 살짝 힘겨울 듯.... 게다가...
>> 내 왼쪽 다리 아래로 살포시 놓아둔 겉옷과 힙쌕이 보인다. 저 사진 찍을 때까지는 얌전히 그 자리에 있었는데... 잉잉...
나의 이번 여행에서 사단은 바로 몽마르뜨 언덕에서 였다. 물론 여행 초반에 영은이 팔에 금이 가고 자전거가 계속 고장이 나는 등의 사건사고가 많기도 했었지만... 몽마르뜨에서 본 시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카메라에 담긴 내 모습을 구경하고 어쩌구...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던 거 같은데 그새 감쪽같이 잠깐 내려놓았던 힙쌕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채고 황급히 근처를 뒤졌으나 범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렉의 말로는 몽마르뜨에서 상주하는 쓰리꾼들은 아주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라 찾을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첨엔 당황해서 그 안에 뭐뭐가 들어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근처 경찰서에서 신고를 하면서 하나둘씩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넘들 힙쌕보다는 큼직한 그 안에 여권, 지갑, 뱅기표 등등이 들어있고 가장 중요한 내 여행일기, 용량이 모자란 디카를 대신해서 사진들을 저장해둔 MP3 등등 내 여행의 추억이 몽땅 들어있었다. 여행 중간중간에 사 모았던 엽서랑 기념품도 몽땅... 그렇다. 난 순식간에 내 여행의 추억들을 몽땅 도둑맞은 것이었던 것이었다. 잉잉... 독일 뮌스터 캠핑장에서 캠핑카를 들이받은 사건, 이번에 쓰리 당한 사건 등으로 넘들은 경험하지 못했을 각국 경찰서를 덤으로 구경하는 행운(-_-;;)까지... 지 버릇 개 못준다고 여행을 가서까지 경찰서를 전전하는 내 신세야... 그래도 지금은 여행 중 일기에 고백했던 내 헛된 욕심과 욕망, 못된 성질 모두를 유럽에 두고 왔다(?)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일종의 살풀이인 셈이다. 여기서 잠깐의 여행 팁! 여행을 그닥 많이 다녀본 것도 아니지만 장기간 여행이나 어디 위험한 곳에 여행을 갈 경우에는 여행자 보험을 들고 가는 것이 좋겠다. 영은이랑 가람이의 팔과 코의 부상, 내가 저지른 사고들(캠핑카 수리비, 소매치기 물건)은 한국에 돌아와서 다 보상을 받았다. 단, 사고치면 반드시 경찰서에 들러서 공식적인 폴리스리포트를 작성하고 받아와야 한다.
경찰서에서 하루 종일 진을 뺀 우리들은 근처 시장과 차이나타운 등을 울적한 기분으로 돌아보고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잃어버린 TC와 비행기표를 다시 발급받고 어쩌구 하는 절차들이 복잡할 거고 파리 여행을 놓칠 수도 없고 등등의 이유로 르네 아저씨가 남은 파리 일정을 자신들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주셔서 우리는 걍 염치불구하고 메르시~를 외쳤다.
>> 아침에 일어나서 짐을 싸고 체크아웃 하고 르네 아저씨 댁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개선문에 들러서 잠깐 찰칵~! 개선문 위에도 전망대가 있어서 파리 시내를 귀경한다던데... 다들 왜 그리 높은 곳을 좋아하는지 원...
>> 르네 아저씨네 짐을 풀고 본격으로 피크닉에 나섰다. 샌드위치와 과자, 과일 차를 싸들고 우리가 처음 도착한 곳은 건축박물관(? 정확한 명칭이 기억나지 않음). 무료라서 더욱 사랑스러운 이 박물관은 파리라는 도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사진처럼 파리 시내의 축소모형도 전시가 되어 있어 살짝 방향치, 길치인 나에게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파리 어디쯤인지 알수도 있었던 시간이었다.
>> 그리고 우리가 들른 곳은 아랍문화원. 파리에서 손꼽히는 현대건축물이라고 한다. 건물 외관이 마치 카메라 렌즈 조리개와 같은 기계창치로 되어 있는데 빛의 세기에 따라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고 한단다. 건물의 꼭대기에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까페를 차려 놓았다. 꼭대기에서는 세느강과 시테섬의 전경을 볼 수 있다.
>> 옥상에서 기념사진 한 컷. 앞줄 오른쪽에 앉으신 분이 실비다.
>> 다음 우리의 여행지는 파리의 상점가 골목(Passage) 였다. 건축가인 르네는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국 재래시장의 통로들이 파리의 이 곳과 비슷해 무척 신기했다는 얘기를 하였다.
세느 강변 어디쯤에 자리를 펴고 샌드위치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으니 너무나 한가롭고 세상 부러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즐거웠고 여유로왔다. 이 날의 일정은 지금은 병역거부로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된 인욱씨 친구들을 만나 수다떨고 맛난 음식들을 먹은 것으로 끝!
>> 인욱씨가 불문학을 전공해서 친구들이나 선배들 중 꽤 파리에 와서 유학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한다. 고맙게도 인욱씨가 배고픈 잔차 여행자들에게 맛있는 거 사주라며 거금을 부쳤다고 한다. 덕분에 맛난 프랑스 요리를 먹었고 한국 유학생들의 생활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 베트남 항공에서 디지게도 전화를 안 받는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베르사이유다. 여기는 기차를 타고 가야 하기 때문에 오전 중에 베트남 항공에 들러야만 했다. 하도 전화를 안 받아서 걍 베르사이유로 출발을 했다. 베르사이유 가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위에서 소개했던 파스칼의 직업이 정원사라서 프랑스식 정원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베르사이유를 직접 가이드 해주고 싶다 했는데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지도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 것이었다. 파스칼을 기다리다 오전 시간을 다 허비하고 우리는 겨우겨우 베르사이유로 향했다. 기차역에 내려 파스칼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보면서 혹시 모르니 베트남 항공에도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다. 받는다. 직원 왈, 파리에서 다시 티켓팅을 해야지 안그러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한다. 장난하나. 그럼 전화를 좀 받던가. 더 열받았던 것은 우리가 파스칼을 기다렸던 오페라하우스 근처에 베트남 항공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일행은 모두 베르사이유로 가고 나는 다시 기차를 타고 베트남 항공사로 향했다. 그 다음부터 나의 여정은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베트남 항공 측에서는 현재 남은 티켓이 없고 낼 출발하는데다 편도요금에 할인 가격을 적용해 줄 수 없다고 한다. 걍 잃어버린 티켓으로 발권이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수수료 떼고 다시 리펀드를 해준다고 하지만 티켓값이 자그마치 200마넌 가까이 된다. 눈물을 머금고 아침과 날맹에게 빌린 신용카드로 결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두 카드 모두 한도가 너무 작아서 한꺼번에 결재가 안되는 것이 아닌가. 일단 아침의 카드로 티켓값의 반 정도를 긁고 나니 더 이상 안된다. 직원왈 근처 은행가서 현금인출 해오라고 한다. 겨우 물어물어 ATM 기계에서 현금인출을 하려고 하니 이게 한 번에 100유로씩밖에 인출이 되지 않는다. 그것도 50유로 한장 10유로 3장 이런 식으로 소액환으로다가... 뒤에 줄은 긴데 아주 돌아버리겠다. 뽑은 지폐들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으며 계속 인출을 하는데 중간에 한도가 넘어버렸는지 날맹 카드가 먹통이다. 아침 카드는 이미 한 번 긁었는데... 이러다가 영영 파리에서 못 떠나나 싶었다. 다행히 아침의 카드가 도와주어 필요한 현금을 모두 인출해 베트남 항공 사무실로 다시 돌아갔다. 직원에게 바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구겨진 돈다발을 내놓으니 황당한 지 웃는다. 그 날 하루는 너무 길었고 그렇게 흘러갔다...
>> 파리에서의 마지막 만찬. 우리가 하도 르네와 실비에게 신세를 많이 져서 파리에서 출발하기 전날 아침에 한국식 카레를 만들어 대접을 하였다. 르네는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을 했고 실비와 그렉이 한국식 카레의 맛을 봤는데 살짝 매콤하다 느껴지는 카레를 실비는 잘 먹지 못했다. 그렉은 맛있다고... 우리의 조촐한 만찬과 대조적으로 그날 저녁에 르네는 우리는 파리에서 아주 유명하고 대중적이라는 대규모 식당에 데려가서 각종 치즈며 와인, 음식 등을 대접해 주었다. 고마운 양반... 흑...
말고 많고 탈도 많았던 파리에서의 시간들. 파리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캠핑장 숙소, 느린 이동수단인 자전거와 두 다리... 덕분에 넘들이 다 구경하고 온다는 파리의 명소들을 다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기억에 많이 남는 여행이었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꼭 다시 와보고 싶다.
레이님의 [[테스트] 당신이 연애에 실패하는 이유는? (2nd)] 에 관련된 글.
며칠 전 레이랑 나눈 얘기도 있고 해서... 걍 재미삼아 해봤다. 머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근데 몇 번을 해봤는데 질문 문항이 조금씩 달라 의존성과 자기애는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특히 의존성은 차이가 꽤 많이 나는 걸? 결론은 똑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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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자는 내게 특별한 영화다. 머 관련한 활동을 하기 때문이고... 영화 속 계상처럼 감옥에 있는 친구들을 많이 둔 탓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계상과 비슷한 미소(물론 그런 꽃미남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서두 ㅋㅋ)를 가진 친구들 생각이 났다.
얼마 전 보았던 우행시보다 대략 1.5배 정도는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아마 극장을 나서는 많은 사람들이 '어머 쟤는 강지환 왕 팬인가봐...' 하면서 수근댔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눈물을 쏟아냈던 장면은 계상의 법정진술 장면에서도, 철창을 사이에 두고 계상과 형(근데 극중 이재록 이름이 머였더라?)이 만나는 장면도 아니다.
법정을 들어서는 계상 어머니의 처연한 표정. 글쎄 딱히 어머니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좋아서였다기 보다도 법정에서 만났던 많은 병역거부자들의 엄마들이 생각나서였을 것이다. 특히 최근에 군산으로 용석이 면회를 갔을 때 뵈었던 용석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선한 눈매에 평생 누군가에게 해로운 일이라곤 해보지 않으셨을 것 같은 분이셨는데 뎅과 용석을 만나는 내내 우시던 그 모습이 화면 속 어머니랑 많이 겹쳤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엄마... 엄마... 그냥 이름을 불러보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온다... 엄마에 관해서는 할 말도 쓰고 싶은 얘기도 많은데... 그게 참 말처럼 잘 안된다...
그리고 정말 거시기 하게도 젤 마지막 장면, 관악산 부근 어딘가 약수터에 있는 무장공비가 무기를 은닉했다던 장소에 세워진 '(여기는 무장공비 아무개가 무슨무슨 무기를 은닉했던 장소이고 회사원 누군가를 포섭해서 그 작자도 간첩으로 암약했다는 대략 그런 내용의) 표지판' 을 자신의 신발과 함께 묻고는 맨발로 꽉꽉 밟는 장면. 눈물이 펑펑 났다. 계상을 만나기 전 형은 그 표지판이 불만이었지만 그저 그 구덩이 속에 오줌이나 갈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계상을 만난 이후 삶이 달라지게 되고 자신의 아들과 함께 감옥에 있는 계상을 찾아가 '이제는 형이 널 꺼내줄께'라 말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 표지판을 땅 속에 묻어버린다. 그리고 속이 시원하게 꽉꽉 밟는다.
왜 그 장면에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그는 약속대로 감옥안 계상을 꺼내준 것이다. 12월 1일 국회 앞에서,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영등포 교도소 앞에 모여서 촛불과 피켓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지금 감옥에 갖혀 있는 1,000여 명의 평화수감자들을 꺼내준 것이다.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세상의 불평등함과 자신의 양심의 소리 사이에서 고민하고 고뇌하고 작은 행동이나마 실천에 옮기는 모든 이들은 전 세계 평화수감자들을 감옥에서 꺼내준 것이다.
이들이 있기에 세상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부조리한 세상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불손한(?) 양심과 행동 때문에 감옥에 갇히기도 하겠지만 또 그러면서 힘든 한 걸음을 내딛는 이들...
이들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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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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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으로 추천버튼눌렀당. 여옥이랑 그날 새벽에 산성(?)쌓는거 보고그랬지..무시하는게 최고니까 여의도로 향해서 국회점령하고 지역별대표를 뽑아서 탄핵해버리는게 어떨까?하고...아무래도 지역별대표는 아랫집에서처럼 가위바위보로 정해야겠지?부가 정보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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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너 타투에 누르지 않았냐? ㅋㅋ부가 정보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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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투에서 누를라그랬는데 이미 메인에 걸려있어서 그런가보다했지... 가위바위보는 역시 3등 걸리는게 젤 아슬아슬하니 재밌지? 아무래도 나 가위바위보해본지 100년되었나보다. 얼렁 캠프를 해야 그 재미를 다시 느끼지...부가 정보
칸나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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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간만에 메인 걸렸네...암튼 글 재밌고 유용하게 잘 읽었네...나도 이런 말들을 해보고 싶었는데...부가 정보
la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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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폭력을 자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는 오해를 사기 쉽상' 이며 '조중동같은 악마적 언론에 ...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면 너무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방식 아닐까요?우리가 대항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비폭력을 외쳐야 하는 이유중에 저러한 것이 있다는 것이 슬프고 갑갑합니다. 언론의 현실이 갑갑하다기 보다는, 시위중에 "조중동에 꼬투리 잡히니 하지마세요!"라는 것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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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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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야 발제준비는 잘 하고 있냐? ㅋㅋlaron님, 대항폭력을 자제해 주셨으면 하는 건 걍 제 바램이죠. 그렇다고 없어지진 않을테지만요. 또 대항폭력이라 했을 때... 사실 말이 무시무시 하고(대항몸짓... 정도로 할까요? 것두 이상하긴 하지만...)또 어디까지 그것으로 봐야할지 의견이 분분할 거라 생각해요. 꼬투리 잡힐 일 첨부터 하지 말자는 거 살짝 억울한 거긴 하지만 그 정도에서 합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적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대동적(?)으로 합의를 볼 수는 없을테지만 그렇다고 집회들에서 저도 적극적인 주체이고 싶은데 그런 모습 때문에 회의가 들 때도 있고 해서요. 제 개인적으로는 그런 상황이 집회에서 꼭 드러내고 싶은 부분을 흐리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종종 있었고... 결과적으로 별로 남는 게 없는 거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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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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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어떤 상황에도' 이길수없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역사 공부를 더 하셔야 할꺼 같습니다. 모든 폭력은 다 동일한 심급을 가지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왜 투쟁과정에서 폭력을 사용하는것이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쳐도 그런 전술은 국가가 본색을 드러낼때마다 폐기되어온 전술이지요.부가 정보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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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님의 그러한 평가는 광주항쟁에서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던 사람들을 모욕하는것이기도 하지요. 혁명사를 돌아보면 소위말하는 임박한 파국의 시기에 대중,민중의 물리력이 국가의 물리력을 압도하는 경우를 종종볼수있습니다. 그러나 광주는 그런 경우가 아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총을 들었지요. 님의 주장은 광주에서 무기를 반납하라는 수습위원들의 사고방식과 유사합니다부가 정보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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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사용하는 집회에서 여성이 느끼는 무력감에 대해서는 이해할수있지만 그걸 그런식으로 풀려고 하시는건 별로 생산적인것 같지는 않네요. 혹시나 기분상하게했다면 사과드립니다.부가 정보
에밀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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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 / 에.. 뭐 오리님이 직접 말씀하시겠다싶기는 합니다만, 제 알기로는 광주는 유래없이 국가가 직접적으로 물리력을 사용한 몇 안 되는 예로 알고 있습니다만서도 ^^; 입장이나 시각에 따라서 좀 틀린가봐요 이런 것도? 사실 학교에서도 이 논쟁이 치열해서리 크 ^^; (명박산성 관련 논쟁이요 ^^;) 머 저야 오리님 생각에 동조하니 ^^;부가 정보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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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광주 공수부대의 예가 너무 적은 경우라서 그렇다면 상시적으로 구사대의 폭력의 위협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사업장 동지들의 예는 어떤가요? 거기서도 심지어 대항폭력도 하지않는게 좋겠다는 말이 먹혀들어가고 또 먹혀들어거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부가 정보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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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일 답답한것은 정세를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관점들, 예컨대 결국은 폭력으로는 국가를 이길수없다는식의 몰역사적인 주장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활동가의 입에서 나온다는것이지요.부가 정보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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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님, 아 저는 모욕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서 광주에서 시민군이 총을 버려야만 승리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당시에도 머 갖가지 주장들과 토론이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역사적 사건들에 관해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비폭력적 원칙을 사용해서 승리(?)를 거둔 경우를 전복님이 아시는 폭력을 사용한 역사적 투쟁의 사례 만큼은 알고 있지 않을까 싶군요... 물론 무엇을 승리로 볼 것인가에대해서는 또 논쟁의 꺼리가 되겠습니다만... 비정규직 사업장 분들의 투쟁에 관련해서는... 제가 쓴 이 글이 혹 전복님이 읽으신 대로 읽히지나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제가 그 투쟁에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저는 이 분들의 투쟁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이 전혀 없고 또 그럴 처지도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비폭력은 결국 원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떤 맥락에서 어떤 관계에서 제기되고 합의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에밀리오님,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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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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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오리님을 모욕하려는 생각은 없지만 제가 접하고 읽은 문건, 책 등에 근거하면 광주에서도 오리님과 같은 논리로 무기를 반납하고 불필요한 희생을 줄여야 한다는 수습위원 측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항쟁파들이 대립하였습니다. 도청에 공수부대가 들어오기 며칠전부터 수습위원들이 그 '논리'를 들이대며 무기를 개별 시위자로부터 회수하기 시작하자 당시 항쟁파를 이끌던 사람이 총을 공중에 쏘며 당장 나가라고 일갈한적도 있었던것으로 압니다.부가 정보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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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의 촛불집회가 5월 광주와 유사하고 따라서 우리도 총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것은 아닙니다. 저는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빠이를 휘두르지는 않습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구요 다만 저는 "정치적 자유와 계급투쟁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폭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고전적인 맑스주의의 견해의 동의합니다.부가 정보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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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복님의 블로그 가서 글을 읽어보니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기도... 저는 이랜드 노동자들의 홈에버 점거투쟁을 폭력투쟁이라 보는 것이 아닌데요... '비폭력=합법선 안에서만의 투쟁'을 얘기한 것이 아니어요~부가 정보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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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인 목적으로는 폭력을 사용하면 안된다고 주장하셨다면 저도 흥분하지 않았을텐데 방어적인 목적으로도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게 좋다고 주장하시니 제가 조금 흥분한것 같습니다.부가 정보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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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재주가 없어서 잘 이해하지 못하신거 같네요.임박한 파국의 시기에 폭력으로 국가를 이길수 있냐 없냐의 논쟁은 접어두고서라도 일상적인 시기에 다시 말해서 당면한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면 이기기 위한 수단도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것인지 물어보고 싶었던겁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오리님이 주장하신것, 국가를 이길수없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은 점거를 계속 유지할수 없으니 점거를 해서 뭐하느냐는 식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여 홈에버 매장투쟁의 예를 언급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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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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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이긴다, 승리한다에 대한 생각이나 상이 전복님과 제가 다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점거는 유지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이랜드 사측의 비민주성, 인권침해, 부당성,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진면목을 사람들에게 잘 드러낼 수 있으면 하루 있다 끌려나오나 이틀 있다 끌려나오나 목적한 바를 달성한 것이니 저는 그거면 된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점거가 가장 효과적인 행동이냐 다른 어떤 더 효과적인 투쟁의 방법이 있느냐에 대해서는 또 토론의 여지가 있을 거지만요.(<-요거 홈에버 점거를 두고 한 말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점거라는 방법을 사용할 때 말씀드리는 거여요)부가 정보
la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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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아이고. 대답이 늦었습니다. ^^
최소한의 공유지점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형성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 더 생각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대항폭력이라기 보다는... 화풀이, 감정분출, 심하게 말하자면 남성호르몬 분출(?)스러운 짓거리도 많이 한 저로서는 비폭력의 힘에 감화되어 몇일을 생각하다가도, 막상 또 일이 터지고 어떠한 stance를 요구받으면... 에구 민망. ㅠㅠ
'대중들의 생각이 이러하다.'는 뭉뚱그림보다는 최소한 나 스스로의 선이라도 꾸려보고 싶은데 잘 되지 않네요. 그리고 하나의 강렬한 느낌은 폭력/비폭력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폭력/비폭력을 이야기 할 수록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희석되어감을 느낍니다. 저는 폭력과 비폭력은 도구 중에서 '핵심적인 도구'라는 것에 방점을 두고 싶어요. 무엇을 짓고 싶은가? 거기에 따라서 연장이 선택되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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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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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에 대한 상뿐만 아니라 점거전술에 대한 상도 많이 다른거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홈에버 노조가 점거전술을 선택한것은 매장운영에 타격을 주자는 의미가 더 강했던것으로 아는데 머 당사자가 아니라서 단정지어서 말을 하지는 못하겠네요.부가 정보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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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ron 님, 전복 님, 많은 조언과 말씀 감사드립니다. 특히 폭력/비폭력에 대한 얘기가 부정적 방식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것, 거기에 저의 고민도 있긴 한데요... 또 무엇을 짓고 싶은가... 저도 더 고민해 봐야 할 부분인 거 같아요. 더 얘기도 나누고 싶긴 하지만 지면에서는 한계가 있으니 다음 번 또 얘기나눴으면 좋겠어요. 안녕계셔요부가 정보
레이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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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들어왔다 좋은 글 봤네. 이 글을 보니까 예전에 우리가 했던(사실 제대로 해보지도 않았지만) 폭력/비폭력 논쟁이라는게 얼마나 언어에 갇혀있었던 건지 어렴풋이 알거 같음. 굳이 표현한 내용의 세밀한 지점들을 잡으면 할 말이 많아지겠지만 정작 중요한건 그게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과 오리씨가 바라는 비폭력의 상이 무엇인지겠지. 이런 분위기의 글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읽으니 반갑소. ㅎㅎ+ 언니의 애장품이 될 그것은 아직 내방에 잘 있소. 주변이 소란스러웠던 관계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는데 조만간 연락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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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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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진짜 레이년이네. 애장품 고맙소. 하지만 난 레이트어답터가 절대 아니야. 얼리어답터라 불러다오. 호호호 오리, 드디어 노트북의 시대를 열다. 짜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