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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28
    use of articles(2)
    나르맹
  2. 2008/11/27
    2008/11/27(2)
    나르맹
  3. 2008/11/26
    2008/11/26
    나르맹
  4. 2008/11/24
    2008/11/24
    나르맹
  5. 2008/11/19
    영어공부
    나르맹
  6. 2008/11/16
    2008/11/16(1)
    나르맹
  7. 2008/11/14
    학원가는길(1)
    나르맹
  8. 2008/11/12
    Armistice Day
    나르맹
  9. 2008/11/12
    내 여친
    나르맹
  10. 2008/11/11
    라이스 푸딩(1)
    나르맹

use of articles

영작문을 하면 가장 쥐약 중에 하나가 바로 관사를 붙여야 되나 말아야 되나, 붙이면 a/the 중에 뭘 붙여야 하는 거다. 예외들이 많다곤 하지만 헷갈리는 건 이참에 여기에 적어놓고 볼 때마다 기억을 해야겠다.ㅎㅎ

He works in the insurance industry. / He works in insurance.
I went for a walk in Alexandra park. /  I went for a walk in the park.
in the near future / in future
If you think you're getting the flu,
We had been at school together.

오늘 수업 시간에 지리적인 맥락이나 특별한 목적과 연관되는 경우가 아니면 관사를 붙이지 않는 명사의 예로 'school, hospital, prison, church' 의 예를 들었는데, 선생님 말이 이 단어들이  'institution'의 범주에 드는 것들이란 얘기를 했다. 푸코가 규율의 공간으로 학교, 병원, 감옥을 얘기했을 때 원서에는 'institution'이라는 단어가 쓰였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불어에도 그런 단어가 있으려나.. 아무튼 영영 사전에서 찾아본 뜻 중에는 'A place for the care of persons who are destitute, disabled, or mentally ill' 이란 뜻이 마지막에 나와있더라. 영어에서 관사를 붙이지 않는 이 단어들이 같은 범주에 들게 된 이유가 푸코가 지적했던 사회적 배경과 연관이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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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7

오늘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2차 대전 종료 이후 영국이 군사적인 개입에 연루되지 않은 적이 단 2,3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공식적인 전쟁이든 비공식적인 무력 행사 모두를 합해서 말이다. 여기 모병 광고를 보면 되게 얼핏 그럴듯한 멘트들을 날리는데 'power, money, career' 등의 가치를 내거는 것 같다. 실제론 흔히 말하는 '인생의 loser' 들이 마지막 선택으로 입대를 많이 한다고. 입대하면 첫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 훈련 중간 중간에 한달 정도씩 쉬는 텀이 있는데 그 기간 중에 할일 없는 직업 군인들이 술이나 마약에 많이 중독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11월 11일이었나, 얘네 remembrance day에 기념하는 건 양대 세계 대전이라고 한다. 2,3년의 기간을 제외하곤 수도없이 파병을 하고 군사분쟁을 겪으면서 죽은 군인이 적지 않을텐데 그들은 기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대 대전은 영국 사회에서 명예로운 전쟁으로 기억되지만 예컨대 한국 전쟁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나에겐 흥미로운 발견이었던 게, 양대 대전에 참전한 군인은 모두 징병된, 하지만 국가를 위해 명예롭게 죽어갔기 때문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모병제로 바뀌고 갈수록 영국 군대는 (특히나 아프리카에서) 일종의 용병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이 죽거나 다쳐도 사람들은 그냥 당연한 일이려니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들은 월급도 충분히 받았으니 죽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식의 논리랄까. 모병제가 운영되는 사회의 멘탈리티를 일부나마 맛본듯한 느낌이다.


* 왠지 이 화두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이리저리 혼자서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예전에 전쟁수혜자 모임에서 읽었던 정유진씨 글이 떠올라서 파일을 찾아냈다. 여전히 나에겐 완벽히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지만, 이번에 다시 읽으니 좀 더 이해가 된 듯한 느낌도 든다.


"모병제 추진 논의는 군사화 과정에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는 고통의 문제를 사회 구성원들이 고통을 둘러싼 관계에 개입하여 교섭하기보다는,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간주되는 그들’에게 군대와 관련되는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논의는 자업자득이라는 미명아래 책임을 전가하는 측면을 스스로 간과하거나 묵인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때의 간과와 묵인은 군사력에 의존한 국가안보에 대한 암묵적 동의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묵인은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고통에 개입하여 문제를 공론화/정치화하기 보다는 고통을 개인적인 선택의 결과로 격리시키는 기제가 되고 있습니다. 제도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사회 구성원간의 관계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베트남전에 미군의 정신과 의사로서 참전했던 스코트 펙은 “특정 집단을 ‘전문 살상 집단’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우리가 전쟁을 통해 누군가를 꼭 죽여야만 한다면 사회구성원이 ‘떳떳하게’ 자기 자신을 개입시켜 그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병제 보다는 징병제가 전쟁 억지 효과가 있다, (군대를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군대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면 복무기간을 대폭 줄이고 남녀 모두 참가하는 (전문화되지 않는 형태의)군대제도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1)

 “만약 우리가 징병제를 실시하여 의원들과 행정부 관리들의 자녀가 위험한 장소에 가게 된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대통령과 행정부는 결코 이라크를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미 의회 세입위원회 위원장 찰스 랭겔 의원의 발언2)이나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에서 마이클 무어가 국회 의사당 앞에서 의원들을 향하여 “당신의 자녀들을 군대에 보내라”라고 입대 원서를 들이대자 의원들이 황급히 도망치는 장면에서, 왜 관객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는지에 대해 좀 더 세심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징병제가 모병제보다 전쟁 억지 효과가 있다는 스코트 펙의 지적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지만, 고통을 사회적인 것으로 제기하면서 구성원들이 그 고통과의 관계의 끈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그의 성찰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않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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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6

* 여기 한국 학생 중에 군대를 다녀온 부산 출신 남학생이 한 명 있다. 내가 지난 여름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을 때 막 코스를 시작했던 학생인데, 처음 보자 마자 영어로 내 나이를 물어보던 사람이다. 초면에 나이부터 물어보는 전형적인 예비역 냄새가 나서 그닥 별로 말을 트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유머센스가 있고 바탕은 선한 사람처럼 보여서 그럭저럭 잘 지내온 것 같다. 덕분에 프리즌브레이크 파일도 전해받고 말이다.
오늘 수업 시간 중에 자기 의견을 말하는 speaking task가 있었다. 여러 주제들이 있었는데 역시나 그 분은 숱한 주제 중에서도 military service를 고르셨다. 그 사람이 말을 시작하면서 뒷골이 살짝 땡기기 시작했다. 어쩜 그렇게도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토씨 하나 다름없이 똑같은 말들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군생활은 참으로 지루했다, 밤에 보초를 설 때면 2시간씩 나눠서 4시간밖에 못자곤 했다, 무릎에 무리가 오기도 했다, 하지만 군생활을 마치고 나니 참으로 보람있었다, 남자로 인정받는 느낌이었다('become a man'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지만 내가 그들을 위해 나라를 지키고 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등등. 입대를 하기 전에는 군대가 무섭고 피하고만 싶었는데, 아버지 왈 자신이 군복무를 안 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 힘든 일을 해야한다고 하셔서 기꺼이 입대를 했다는 말도 했다. 사실 이런 얘기를 듣는게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물건너에서도 이런 지겹고 똑같은 얘기를 하는 사람을 보게 되다니 문득 소름이 다 끼쳤다. 한국 군대의 위대함이란!

* 열심히 런던으로의 이주 준비를 하고 있다. 아일랜드에 가서 어떻게 하면 숙박비를 좀 더 줄여볼 수 있을까 요리조리 알아보는데 쉽지가 않다. 공항에서 총 두 밤을 자려고 했는데 왠지 춥고 몸 삭을 것 같은 두려움에 하룻밤만 지샐까 고민중이다. 푸훗.






베니스에서,,그 땐 무지 더워서 싫었는데 지금처럼 추우니 또 그때의 땡볕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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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4

* 지금 하우스메이트는 체코에서 2주간 공부하러 온, 두 아이를 둔 아저씨이다. 나이를 듣고 나서 전혀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인상 좋은 아저씨이다. 19살 먹은, 아마 한국 나이론 20살이나 21살일 딸은 'floor hockey'(?) 국가대표급 선수라고 한다. 7살 연상의 부인과 결혼을 했고, 자신을 닮은 틴에이저 아들을 두고 있다.

그렇게 인상이 좋아보이는데 자신은 공산주의가 싫다고 말한다. 내가 그동안 만난 사람중에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은 다들 꼴통보수에 얼굴도 greedy하게 생겼기 때문에, 이 체코 아저씨가 하는 말은 자뭇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무슨 맥락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1988년에, 이 아저씨의 표현에 따르면 'revolution against communism' 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곧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갈라졌고. 이 아저씨는 그 당시에 직장에 갓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 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바로 월급이 100파운드에서 400파운드로 올랐다고 한다. 우와, 아저씨 그럼 생활이 무지 넉넉해졌겠네요, 했더니 월급이 오른 만큼 생활물가도 무진장 올라서 실상 생활에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저씨가 공산주의보단 지금이 낫다고 말하는 이유는 뭘까.
'spy' 라는 표현을 썼다. 영어가 무척이나 서툰 편이어서 자신의 의사전달을 정확히 하는 편이 아닌데, 아저씨가 스파이란 말을 했을땐 바로 무슨 얘긴지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나서 스파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freedom'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그리고 'holiday'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말을 했다.
'idea of communism'은 좋다고 아저씨가 말했다. 하지만 흔히 들어왔던 것처럼, 실제로 당간부들의 삶과 뭇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달랐다고 한다. 이런 저런 맥락으로 볼 때 아저씨는 그 상황이 너무나 싫었던 것 같다. 차라리 대놓고 빈부의 격차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겉으론 민중이니 정의니 말하면서 실제론 간부들만 살찌우는 그런 시스템을 긍정하기는 쉽지 않을게다. 예전에 러시아 학생을 만나서 들었던 얘기와 비슷하게, 체코에도 자본주의가 본격화되면서 이런 저런 문제들이 나오고 그에 따라 나이 많은 사람들 중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들도 사회적으로 묻어나오는 것처럼 들렸다. (문득 오늘 호스트맘이 말하던 'the grass on the other side is greener than here.' 이 문장이 떠올랐다.)

아저씨가 말한 얘기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건, 법/질서에 대한 뭇 사람들의 멘탈리티에 관한 얘기였다. 처음엔 아저씨가 자꾸 'order' 얘기를 하면서 비유를 들어서 못 알아들었는데, 나중엔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요지인 즉은, 공산주의 하에 있던 시절 사람들 사이에서 당의 결정에 대한 불신이 워낙 극에 달해서 뭔가 법이나 질서가 만들어지면 그걸 무시하는 게 일상적이었는데, 그런 마인드가 시스템이 바뀐 지금에도 여전히 남아있어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아저씨의 얘기를 들으며,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부정부패를 떠올렸는데 얼추 아저씨의 얘기의 맥락에 부합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저씨는 그렇게 당의 질서에 저항(?)하는 것이 당시엔 자랑스러운 일로 여겨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의 그러한 습속이 남아있어서 문제가 된다는게 아저씨의 의견이었다.

이런 저런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유드리'와 '근대성'은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 같다. 유드리는 푸근한 정이 될 수도 있지만 무원칙으로 여기지기도 한다. 한편 근대성은 질서정연하고 모든 것이 예측가능하지만 대신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오래된 나라일수록 차갑고 딱딱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게다. 일본 한 캠핑장에서 일주일 전에 받아야 하는 허가를 못 받았다고 아무도 없는 텅 빈 캠핑장을 뒤로 한채 나왔을 때의 그 기분이 떠오른다. 흥미로운 건, 전근대성이 대개는 가부장적 질서와 연결된다는 점이랄까. 그래서 더욱더 근대성에 대한 고민을 할때면 이런 저런 생각이 겹치곤한다.

아저씨의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그리고 언어적 장애로 인해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지 못한 대화였지만, 아저씨의 이야기가 나에겐 전근대적인 가치(법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를 무기로 전근대적으로 운영되던 공산주의를 붕괴시켰다는 말로 들렸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글로 막상 쓰고 나니 나의 이런 느낌이 어떤 유의미한 맥락을 더 이상 파생시키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암튼 아저씨가 지금 체코 사람들의 가치관을 말하면서 문제라고 했을때, 공무원들을 못 믿는 한국 사람들의 분위기도 떠오르고 한편으론 법치주의를 끊임없이 반복해대는 경찰, 법무부, 정부 등등의 모습이 떠올랐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공산주의 시절의 빈부격차보다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빈부격차가 그래도 더 낫다고 말하는 아저씨의 얘기를 들으며 무언가 반응하고 싶은 욕구가 꿈틀하는데 그게 정확히 무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소비할 자유에요 아저씨, 하고 말하기엔 아저씨 경험의 무게 앞에서 내 생각이 한갓 머릿 속의 불면 휙 날아갈 가벼운 관념처럼만 느껴졌다.

한국에선 갈수록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했더니 아저씨가 그럼 주변 나라에서 구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을 했다. 난 그동안 한국으로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나 영국 등 소위 1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변국 출신 노동자들만 떠올렸지 나 자신을 이주노동자로 위치지어본 적은 없었기에 아저씨의 그 말에 꽤나 자극을 받았다. 한국에서 직장을 구하기 힘들면 유럽에 와서 구하면 되지 않냐고, 내가 유럽은 너무 멀다고 그랬더니 그럼 주변국인 일본이나 중국에서 구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물론 나 자신이 일주일에 5일씩 일하는 보통의 직장에 취업할 생각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아저씨가 말하는 게 바로 이주노동자들의 삶 아닌가싶은 생각. 예컨대, 이란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노동자는 이주노동자라는 개념틀에 적합해보이지만, 영국에서 한국으로 영어를 가르치러 온 사람은 흔히 말하는 이주노동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고 나니 한국이 세계 경제규모 10위(11위?)의 1세계국가인거구나생각이 든다.

불과 약 20-30년전까지만 해도 영국에 '통금시간' 비슷한 법이 잇었다고 한다. 펍에서 요일마다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보통은 밤 10시 반, 금요일은 11시면 모든 펍이 문을 닫아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문닫기 5분 전인가 30분 전에는 펍마다 종을 치며 문닫기 얼마 전이니 마지막 주문들을 하라는 광고를 하곤 했다고. 이 통금시간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건 일요일이었는데, 그 이유인 즉은 사람들이 다음 날 출근을 하는데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초기 자본주의 형성 과정의 역사에 관한 책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가 불과 30년전까지 존재했던 셈이다.

얼마전에 켄 로치 감독의 <자유로운 세계>를 봤는데 런던에 즐비한 수많은 동유럽 노동자들의 모습이 나온다. 온갖 규율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질서가 성공적으로 잡힌 국가의 자본들은 싼 노동력을 찾아 소위 말하는 3세계 국가로 이동을 한다. 그리고 3세계 국가의 노동자들은 거꾸로 1세계 국가로 목숨을 걸고 넘어온다. 이게 무슨 아이러니인걸까. 그런데 이렇게 웃기게 돌아가는 자본주의가 세계적 불황이라며 위기라고 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면, 200년을 갓 넘겼을 법한 자본주의도 곧 종말은 언제쯤 올려나. 이런 왠지 사치스럽고 추상적인 고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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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부

*"you could have left me there, in jail."
"could have or should have?"
"Maybe both."

<프리즌 브레이크>에 나오는 석호필과 마혼의 대사 덕분에 이 문법은 이제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마혼이 <다크 나이트> 초반부에 나온 걸 보고 퍽이나 반가웠던 기억이 문득 든다. 개인적으로 마혼을 만나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뭔가 동네 아는 사람을 티비에서 봤을 때 놀라는 반응과 비슷하달까.ㅎ

* 고등학교 시절 여러번 독파한 맨투맨 영문법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문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성검사를 하면 이과적성이 문과적성 수치보다 근소하게 높게 나오기도 했고, 고3때 좋아했던 영어선생님이 다른 친구 한명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 친구는 문과적인 냄새가 나는데 나는 이과적인 기질이 더 두드러진다고 얘기를 했을때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던 기억이 난다. 여기 와서 영어 공부를 썩 열심히 한건 아니지만 문법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예전에 맨투맨을 볼 때의 느낌들이 떠오르곤 한다. 특정 문장 구조들을 분석해 들어가면서 뭔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을 즐기는 걸 보면 내가 정말 이과 체질에 더 가까운 걸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나에게 수학은 가장 꺼리는 과목 중에 하나였는데,,

* 한 학기에 약 15주 정도 되는 대학 수업도 들쑥 날쑥 제멋대로 다니던 내가 여기 와선 매일 아침 9시부터 똑같이 반복되는 26주의 시간을 꾸역꾸역 어찌됐든 결석도 별로 안 하며 잘 다녔다. 이 짧지 않은 기간동안 뭘 배웠냐는 질문을 받는다면,,몇 가지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하나는 부가의문문,,여기 말로는 tag question. 미국 영어를 배울땐 무조건 문장 뒤에는 'right'을, 상대 말에 반응할 때는 'really'라는 말을 붙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여기 와서 보니 그것만으론 2%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 예컨대 "It wouldn't be possible, would it?"와 같은 문장이나  "I've decided to do it"/"have you?" 와 같은 반응들. 한국 말에서 "그치?"라고 할때의 느낌을 담아낼 수 있는.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줄 때 내가 경청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데 특히나 더 빛을 발하는 정말 유용한 언어인 것 같다. isn't it?
또 하나 여기 와서 확실히 알게 된 건 "will" 과 "be going to"가 다른 맥락에서 쓰인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동안 이 두 가지 표현이 똑같은 의미인 줄만 알았는데. 이것과 관련해서 하나 더. 예전에는 곧이 곧대로 문법을 적용해서 "i'm going to go to London"이라고 말을 해야만 하는줄 알았는데 이제는 단순하게 "I'm going to London" 이라고 말한다.
또 생각나는 건..이제는 "more cheap" 혹은 "more easy" 대신에 "cheaper/easier" 라고 말하는 빈도가 더 많아졌다는 거...?!

* 대학 들어가서 처음 영어교육 전공 수업을 들으며 너무나 질려버렸던 기억이 난다. 아직 교사의 꿈을 가지고 있을 때이기도 했고 그래서 더욱더 기능교육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기 힘든 영어교육을 쓰레기 취급하곤 했다. <공산당 선언>을 읽고 세미나를 하며 뭔가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던 나에게 영어교육은 도무지 '혁명을 위한 교육'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 당시 나에겐 선과 악에 대한 가치판단이 너무나 확고했다. 입시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자가 갖는 남성적 자신감이 자기 운동에 대한 자신감으로 표출되었다고나 할까.

나에게 대학 졸업장이 어떤 의미일까를 고민할 때 들었던 생각 중에 하나가 현실적인 문제의 차원에서 과연 이 재미없는 과에서 당장 졸업논문 주제라도 떠올릴수 있을까 하는 거였다. 그런데 여기 와서 내가 어떻게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지 내 두뇌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떠올리는 게 흥미로울 때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영어공부를 할 때 전형적으로 직면하는 어려움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이런 건 한번 연구해보면 재밌겠단 생각도 들었다. 이 변화의 원인은 도대체 무얼까. 내가 유순(?)해져서인걸까 아니면 여기 영어교수법이 더 나에게 동기부여를 많이 하기 때문인걸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 밤이다.. 슬슬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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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6












































런던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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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가는길




여기 생활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요즘 계속 해서 드는데, 사진을 남겨 놓은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아침에 학원가는 길에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이 동네엔 언덕이 참 많다. 여기 와서 중고 자전거를 하나 구해서 타볼까 생각했다가 관둔 핑계 중에 하나이다.









여기 와서 처음 학원에 가던 날, 이 길을 보고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너무나 조용하고 한적한, 야트막한 산자락(?) 사이에 있는 학원이라니.





학원 들어가는 입구...






학원 건물의 모습..지은지 꽤 됐다고 들었다. 학원이 70년대에 문을 열었다고 하니, 적어도 30년은 됐을 법한 건물이다.





잔디밭..배구코트와 배드민턴코트가 있었는데 가을 지나고 날씨가 늘 흐리고 젖어있어서 다 철거해버렸다. 따뜻할 땐 밖에서 점심을 먹곤 했는데, 지금은 너무 추워서 어림도 없다.





학원 내부의 모습.. 적당히 아담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지금 속해있는 반이 쓰는 강의실의 모습.




창이 크고 바깥 경치가 보여서 딴 생각을 할 때면 늘 바깥을 바라보곤 한다.





너저분한 책상의 모습..ㅎㅎ



여기 떠나는 한국 학생들을 보면 평소엔 학원 사진 같은건 생각도 안해보다가 대부분 마지막 주에 사진을 열심히 찍곤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좋건 싫건 어쨌든 매일같이 들락날락 했던 곳이니.. 그나마 일주일 넘게 햇볕을 못 보다가 어제 오늘 날이 좋아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너무나 한적하고 조용해서 오히려 가끔은 지루하다고들 말하는,,너무 작은 동네라 덕분에 알바도 못 찾고 좌절했지만 그만큰 또 돈 쓸일도 거의 없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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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istice Day

초등학교 6학년때였던 것 같다.  현충일. 공휴일이라 자전거를 타고 동네 근처 어딘가를 놀러가다가 아침 10신가 11시 정각에 싸이렌이 온 동네에 크게 울리기 시작하자 자전거를 멈추고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했었다. 반공교육의 끝자락에 걸쳐있는 세대이기도 했지만, 워낙에 학교 선생님의 말을 철썩처럼 믿고 따랐던 그 소년은 싸이렌이 울리자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하던 일을 중단하고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을 했던 것이다.

오늘 오전에 학원에서 바로 그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게끔 하는 일이 있었다. 11월 11일은 이 동네 말remembrance day, 이런 날이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비비씨 뉴스에서 armistice day 라고
부르는 이 날에 대한 설명을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았다.

"Armistice Day
is the anniversary of the symbolic end of World War I on 11 November 1918. It commemorates the armistice signed between the Allies and Germany at Rethondes, France, for the cessation of hostilities on the Western Front, which took effect at eleven o'clock in the morning — the "eleventh hour of the eleventh day of the eleventh month"."
-http://en.wikipedia.org/wiki/Armistice_Day

1차 대전의 종전 협약(the armistice)이 발효됐던 시점인 11월 11일 11시에 맞춰서 영국 전역에서(그리고 참전했던 모든 국가에서, 그러고 보니 독일에서도 같은 날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2분간의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런던 중심가에 있는 cenotaph에서 여왕과 베테랑 등등이 참여하는 가운데 식이 거행된다. cenotaph를 검색해봤더니 한국으로 치면 국립묘지쯤 되지 않을까 싶다. 트라팔가 스퀘어 가기 전에 whitehall street에 있다는데 담에 지나갈 일이 있으면 한번 가서 분위기가 어떤지 한번 봐바야겠다.

여기에 와서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집단적인 감성이나 움직임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집단주의의 냄새를 맡아본 것 같다. 11시에 다들 1층으로 내려와서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는 거다.  무슨 애국조회도 아니고.. 그 공지를 10시 반 쉬는 시간 시작할 때 받고 나서 11시까지 30분간 수많은 생각들이 스치기 시작했다. 흥미로웠던 건 일본 친구의 반응이었는데, 왜 내려가서 그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반쯤 대놓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거다. 나는 평소 성격대로 이 의식과 암묵적으로 연관될 수 있는 전쟁에 대한 찬양이나 국가주의적인 발상과 같은 자뭇 진지한 주제들을 가지고 복잡해지기 시작했는데, 이 일본친구는 90년 전씩이나 된 일이 뭐가 지금 중요하냐면서 입을 뾰족 내밀었다. 일본엔 이런 날이 없냐고 물었더니 8월 15일에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떠올리며 전쟁의 참상을 상기하는 날이 있긴 한데 그 친구 말에 따르면 전 국가적으로 이렇게 특정 시간에 특정 행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스쳐지나가는 날이라는 식의 뉘앙스로 말을 했다.

암튼 막상 11시가 되자 그냥 강의실에 남아있으려다가 얘네는 어떻게 '의식'을 치루는지 문득 궁금해져서 내려가봤는데 1층에 있는 티비를 틀어놓고 런던 cenotaph에서 벌어지고 있는 ceremony를 관람하며 침묵을 하고 있었다. 한국처럼 싸이렌이 있는건 아니었고, 그래도 심지어 이 시골에 있는 조그만 학원에서 모든 사람이 모여서 같은 시간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의식을 치루는게 나에겐 뭔가 찝찝하게만 느껴졌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역사란 것이 집단적 기억의 산물이기에 특정한 사건이 누구의 어떤 관점에 의해서 어떻게 선택되고 배제되느냐 하는 문제가 후대에게 남겨진 과제 중에 하나일텐데, 오늘 나에겐 영국의 현충일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하면서 자뭇 이 동네의 전쟁에 대한 기억의 방식이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그리고 아마도 습관처럼 매년 이 날 오전 11시에 2분간의 침묵을 갖는 여기 사람들은 이 의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너무 궁금했다. 궁금한만큼 급한대로 일단 학원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면서 이 얘기를 해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적어도 내가 오늘 만난 사람들은 나처럼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괜히 성질 급하게 물었다가 민감한 부분이라도 건드릴까봐 주눅이 들기도 했고.(뭣보다 이런 주제를 말할라치면 더욱더 버벅대는 영어가 주저함의 주된 이유중 하나). 사실 한국에서도 야구장 가면 애국가 부르는 것에 대해서 진지한 문제제기 이전에 단순한 의문이라도 던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여기도 그런게 아닐까 성급한 생각도 든다.  종전을 기념하며 죽은 사람들을 기린다는데 내가 너무 씨니컬하게 받아들인 걸까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래서 더 여기서 얘기가 통할만한 사람과 이 날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기린다는 죽은 사람들 목록에 민간인은 없을거란 짐작이 들지만,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의심을 품고 봐서 그런지 몰라도 오늘따라 유심히 지켜본 비비씨 뉴스에서는 매시간 헤드라인에 이 날 벌어진 행사를 다루고 있고 한국으로 치면 재향군인회(?ㅋ) 쯤 되는 사람들 인터뷰도 나오고 그런다. "in honour of those who fought and died for freedom" "victory of the war" 일종의 국영(공영?)방송인 비비씨라 더 그런 거겠지만 이런 표현이 여러번 들린다. 오늘 런던에서 열린 행사에는 지금 살아 있는, 다들 이미 100세를 넘긴 '참전용사' 3명이 참가해서 더욱 뜻깊었다고들 말하는 것 같다. 문득 그들이 목표로 하고 싸웠다는 'freedom'은 어떤 의미였을까 혹은 지금 어떤 의미로 정의되는 걸까 궁금해진다.

혹시나 한국에서 국기경례맹세를 반대했던 것처럼 여기에도 이 전쟁기념(전쟁기념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내 자의적인 정의는 아닐까 계속 검열하게 된다)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는지도 궁금해졌다. 정확히 매치하자면 한국에선 현충일 행사에 반대했던 공식적인 움직임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높으신 분들을 제외하곤 현충일은 그냥 휴일일뿐이니..아 집집마다 조기를 게양하긴 하는구나..  그냥 장님 코끼리 만지듯 훓었던 1차 대전의 역사도 문득 궁금해지고,, 이래 저래 머리를 많이 쓰는 하루다. ㅎ

도리야에즈,,,
오늘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4 파일을 여기 있는 다른 한국 학생한테 받았다. 호호호. 영어공부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봐야겠다.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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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친




학원에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듣는 스페인 친구 한 명이 오늘 입고 온 티에
위에 붙여놓은 이미지가 새겨져 있었다. 처음엔 그냥 스쳐 지나갔는데
다시 봤더니 꽤나 흥미로워서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을 해봤는데 역시나
여기 저기 많이 검색이 되더라. 남성이 갖게 되는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가부장적 잣대를 거꾸로 매치시킨 그림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
스페니쉬 친구에게 한국에서 이런 티가 존재한다면 아마 그림이 반대로
매치가 되어있을 거라고 얘기를 했다. 그런데 지금 또 생각해보니,
정희진쌤이 얘기했던 것처럼 '현모양처'라는 양립불가능한 논리가 여성에게
강요되듯이 '내 여자친구'에게도 섹쉬함과 정숙함 모두를 요구하는 게
뭇 남성들의 욕구이기도 하니..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때,
여성에 대한 '성녀와 창녀'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를 처음으로 깨우치고선
뭔가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스페니쉬 친구는 지난 달에
에딘버러 놀러갔다가 사입은 티셔츠를 우연히 입고 왔을뿐인데,,
난 그 그림 하나를 가지고 하루종일 생각을 해버렸다. 심지어 막판엔,
지금 학원에서 일하고 있다면 이 그림을 가지고 토론 주제로 들고가도 재밌겠단
생각도 잠시 들었다.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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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스 푸딩



*지금 아래층에서는 조나단이 열심히 새로운 곡 연습을 하고 있다. 비틀즈의 스트로베리 필즈를 자기만의 색깔을 넣어서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는 셈인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덩달아 괜히 흥겨워진다. 뭔가에 열심히 몰두하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포스랄까. 위에 링크 걸어놓은 곡은 조나단이 직접 쓴 'champagne'이란 곡. 오늘에서야 처음 들은 곡인데 듣자 마자 푹 빠져버렸다. 이쯤 되면 정말 '원스' 남자 주인공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실력이지 않을까 싶다.ㅎ

*스페인에서 오리를 만나서 라이스푸딩에 대한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 저녁 디저트가 라이스 푸딩이었는데, 오늘은 홈스맘에게 한국에선 sweet 한 rice 는 안 먹는다고 얘기를 해주었다. 나름 난 여기 와서 달달한 밥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다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우유까지 부어 먹는 거다. 속으로 어찌나 식겁했던지. ㅎㅎ 왜 흔히 밥에 우유 말아먹는 사람이란 비유가 비위 강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처럼.. 가장 큰 문화 충격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흐흐 정말 비위 좋은 영국 사람들..

*오늘에서야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폴메카트니의 부인이었던 린다 메카트니가 영국에서 베지테리안 음식을 공급하는 사업을 했다고 한다. 듣고 보니 은근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 여기도 단풍이 한창 들긴 했는데 도무지 해가 나는 날이 하루도 없이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춥거나 하다가 3시부터 어둑해지기 시작해서 5시면 오밤중이 되는 곳이라 한국처럼 단풍 구경할 낭만은 없는 것 같다. 물론 한국도 갈수록 단풍이 예전 맛을 잃어가는 것 같긴 하더라만. 단풍을 처리하는 방식은 한국과 사뭇 다른게 한국에서처럼 아침마다 열심히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단풍을 쓸어담는 사람이 전혀 없다. 한국에선 무슨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도 아니고 날마다 열심히 단풍을 쓸어 쓰레기통에 담아내는 미화원 분들이 대단하단 생각도 들고 헛수고를 한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여기서는 사방에 흩어진 단풍잎들을 보고 있자니 좀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정돈이 안 된듯한 느낌도 받았다. 녹지의 비율이 여기가 훨씬 높기도 하지만, 날마다 단풍잎을 줍는 높은 강도의 노동이 여기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어서 한국과는 자뭇 다른 모습이 보이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냥 이런 저런 생각들,,

아 어느 새 11월도 삼분의 일을 넘어가는구나,,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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