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달아이

from 2001/06/20 15:59
어느날, 누군가에게 쪽지가 와서...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나에 대해 스스로 표현하기를, '살아있는 시체'라고 하였다.
밤이고 해서...'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라는 영화제목도 생각나고 해서
농담한 것인데...상대방은 좀 끔찍하였던지...정색을 하고 묻는다.

'무슨 일 있어?'

그에게는 농담이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나는 살아있는 시체이다.
기형도처럼 나도 이미 '일생 몫의 삶을 다했다.'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많은 시간을 언니네에서 뒹굴수 있겠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번다거나 하고 있을 시간에...)

아마도 오래 전의 일일 것이다.
국민학교 6학년때 즈음이었을까?
비가 쏟아붓고, 가끔은 천둥과 번개가 치는 밤이었다.
오래된 일이라...날짜같은 건 잊었지만,
그 때의 상황이나 내 옷차림, 주변의 사물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다.
(혹자 : 그럴리가 없자나! 너 스스로 너는 기억력이 없다고 해놓고...역시 너는 거짓말장이임에 틀림이 없어. 여러분, '좋은 기억'을 읽어보세요...)
혹자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만큼 중대하고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비가 오고 있었다.
가끔씩 빗줄기가 가늘어지면, 지붕을 때리던 빗소리도 사그러들어
방안을 채우고 있던 라디오 소리가 한뼘 정도씩 부풀어 올랐다.
방안에는 내가 사용하는 1인용 침대와 작은 책상이 있었고,
책장이 있었고, 바닥에는 책이 잔뜩 깔려있어서
침대와 방문을 연결하는 길이 책 사이로 뚫려있었다.

그 애는, 비를 흠뻑 맞은 채로 내 방에 들어왔다.
아니, 들어와 있었다.
눈을 떠보니 그 애가 침대 발치에 흥건하게 물흔적을 퍼뜨리며 앉아 있었다.
수달처럼 생긴 아이였다.
아마도 비를 맞아서 그렇게 보인 것이리라.
뙤약볕에서 거리낄 것 없이 뛰어놀면서 받은 햇살 냄새와
비냄새가 마구 뒤섞여서 건강하게 느껴지는,
독립적이고 용감한 아이일꺼라고 생각하게 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강하고 독립적이고 용감한 수달 아이.

[난 너의 생명을 먹으러 왔어.]

당시의 나는, 어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아주 잘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

[바보. 수달같이 생겨가지고는...]

나는 뜬금없는 친근감에 농담이라는 걸 했다.

[넌 진지하지 않아.
너 같은 아이는 자라면 사회부적응자가 되고,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너 스스로 너의 삶을 정당화시켜야 하게 될거야.]

[......]

[한마디로, 인간 쓰레기가 된다는 것이지.]

내가 비교적, 공부를 매우 잘 하는 편이기는 했으나,
그런 말은 경험해보지 않고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말이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모두 맞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사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내 생명을 먹고, 나는 살아있는 시체가 되었다.
살아있는 시체 쓰레기.
그것이 인간 쓰레기와 다른 점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있는 시체라는 것을 안다는 점 뿐이다.
결국에 나는 사회부적응 살아있는 시체가 되었다.

수달 아이는 내 침대 머리맡에 놓인 티슈 한장을 뽑아,
젖은 바지주머니에서 꺼낸 지우개 아저씨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지우개 아저씨는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소리를 들었다.
그러면서 내 가슴을 슬쩍 만지기 까지 했다.
그래봤자 국민학교 6학년의 가슴이지만 기분 나쁜건 기분 나쁜 것이다.
그리고나서, 지우개 아저씨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이용하여,
내 심장 위에 덮인 피부를 지워냈다.

[이제 너의 생명을 먹을꺼야. 당장은 아프지 않아.
언젠가는 좀 아프겠지만...
넌 왜 그런지 모를테니까, 진짜 아픈 것만큼 아프게 느끼지 못할꺼야.
그러니 걱정할 건 없어.]

옳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린 나에게 수달아이의 어려운 말은 너무나 설득력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 가끔은, 매우 설득력있는 것이다.

지우개 아저씨는 수달아이의 젖은 바지주머니 속으로 아쉬운 듯 돌아갔고,
나는 잠이 들었다.

어쨌든, 그 날, 수달 아이는 내 생명을 먹었고,
나는 내 일생몫의 경험을 끝냈다.
나는 죽음속에서 산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뭐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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