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

from 2001/06/20 14:44
[조명과 그림자는 전체 장면 안에서 사물과 사물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사물들의 위치를 결정지어준다. 위치와 빛과 그림자의 강도는 이미지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 극사실일러스트레이션기법, 버트 먼로이-

두 개의 문장이 떠오른다.

'너의 가슴을 만지고 있으면, 안타까워져.'

'난 어렸을 때 세상이 대단한 건줄 알았어. - 나도 그래.'

적어놓고 보면, 아무런 특징없는 두 문장.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거대한 어둠속에서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어떤 구멍을 찾아 더듬거리는 것과 같다.
어느 순간, 이를테면, 그가 나에게 첫번째 문장을 이야기했을 때, 나는 갑작스럽게 그 구멍에 빠져들어가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살게 된 것이다.
그 순간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미 그 구멍안에 들어가 있는데 계속 더듬거리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그러나 그 순간에 대해서 해석해 볼 수는 있다.
그 해석이 얼토당토 않은 것이라 해도, 어차피 사랑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누군가 잘 못 될 일은 거의 없지 않을까?
사실은, 해석해 보고 싶은 것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안타깝다'라는 [말]은 나에게 두 사람을 갈라놓은 끝없이 깊은 심연을 연상시켰다.
그 심연을 가로지르는 '안타깝다'라는 [말]이 있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한 것처럼, 그 [말]이 있었다.
'죽음까지 파고 드는 삶'이라는 바타이유의 표현처럼,
에로티즘이라는 것을 그 때, 그 '안타깝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그가
그 심연을 딛고 내게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삶에는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 처럼.
두번째 문장에서 '난 어렸을 때 세상이 대단한 건줄 알았어.'의 부분은
내가 그에게 나의 빛과 그림자를 표현한 것이었고,
'나도 그래' 의 부분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나도 그래'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대낮에 보이지 않는 어떤 통로를 통과하는 것과 비슷하다.
길을 걷는다. 어디론가를 향해서, 커피숍을 지나고 술집을 지나고 팬시전문점을 지나고 좌회전하여 길을 건너고...
이미 나는 그 통로를 지나쳐왔다.
어디에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그리고 다시는 그 구멍 속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는 내게 내 눈이 아름답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은 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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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0 14:44 2001/06/20 1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