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내가

from 2001/06/15 12:32
내가 나를 쫓아 다니기 시작한지 벌써 열흘째이다.
어제도 나는, 그녀의 집에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비난하고 창피주고 웃음거리가 되게 하였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나는, 사실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더 이상 나를 쫓아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더 이상 쫓아다닌다면 미쳐버릴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망쳐버린다.

처음 내가 나타난 곳은 내방의 작은 욕실이었다.
내 방 밖에서의 삶은 나를 너무나 피로하게 하지만, 방에 돌아와 샤워를 하면 난 그 모든 것들을 씻어 내릴 수 있었다.
나로 인해서 이제는 그것조차 불가능해졌다.
그 날, 몸에 온통 비누칠을 하고 머리에 샴푸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가 나타났다.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당황한 나를 바라보았고 밭에서 무우라도 뽑듯이 아주 간단하게 약간의 힘을 들여 수도꼭지를 뽑아버렸다.
순식간에 나는 공간없는 어둠 속같은 절망감에 휩싸였고, 그 반대편에서 나는 멋진(!) 옷을 입고 팔짱을 끼고, 가는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비웃었다.

나는 나와 아주 다르다.
나는 영화 속에 나오는 흑인들의 거대한 곱슬머리에 하얀 레이스 블라우스와 꼭 붙는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오는 남성용 타이즈와 구두를 신고있다.
요즈음에는 그런 차림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나는 헐렁한 면티셔츠와 감색 면바지를 가장 좋아하며 항상 머리를 짧게 깎고 있다.
머리나 옷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아주 다르다.
나는 긴 눈과 높은 코, 긴 입술을 가졌다.
그런 얼굴은 정말, 사람을 비웃기에 아주 적당한 얼굴이다.
나는 그저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눈에 적당한 코에 보통 입술을 가졌다.

내가 나타났을 때, 내가 나와 아주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나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에만 나타난다. 특히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과 함께 있을 때만 나타난다.
나는 나의 절망감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나는 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나에게 절망감을 주는 것을 즐기고 있다.

내가 나에 대해서, 나의 절망감에 대해서 방어할 수 있는 길은 잠을 자는 것 뿐이었다.
나는 욕실에 내가 나타난 날부터 이틀동안 계속 잠을 잤다.
깨어나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깊이 깊이 잠의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이틀 후 깨어났을 때, 나는 나에 대한 일들을 모두 잊었고,
세상은 밝은 빛과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했다.
거짓된 희망...
늘상 하던 대로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책상 맞은 편에 내가 걸터앉았다.
풍족한 잠으로부터 힘을 받은 나는 내가 두렵지 않았다.
내가 없는 것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나는 나의 힘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금새 깨닫게 되었다.
나의 시선은 내 글을 쥐가 쏠 듯이 갉아먹어 버렸다. 한 글자도 써 내려갈 수가 없었다.

글과 함께 잠도 사라져버렸다. 공기가 멈춘 사막처럼 고요하고 적막한 삶이 지속되었다.
끝없는 모래와 극단적인 태양, 극단적인 추위.

이틀 전, 그녀가 집에 왔을 때, 나는 내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 그러나 만족스러운 듯 깔깔거렸다.

어제 그녀의 집에서, 누군가 나의 글에 대해서 논평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말했다.
[싸구려 글이죠.]
사람들 모두가 웃었다.
내 친구 중 하나가 "그가 가진 재능은..."이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나는 또 말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근거 없는 자존심뿐이죠.]
사람들은 또 웃었다.
조금 후에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서 오늘은 일찍 집에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쉽게 나에 대한 증오와 비웃음을 전염시킨다.
그녀 역시 나를 비웃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지, 어째서 나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갖지 않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있고 난 이제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더 이상 나에게 내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소중한 것들을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빼앗기만 하고 그 자체를 즐긴다.
겨우 열흘 동안, 나는 내 모든 것들을 잃었다.
나는 나를, 내가 방해할 수 없도록 아주 깊은 잠에 빠질 생각이다.
깨어날 수 없어서, 나를 깨울 수도 없는 깊은 잠.
새 수도꼭지를 사다가 욕조에 물을 받아두었다.
나는 오늘, 따뜻한 물 속에서 잠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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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15 12:32 2001/06/15 1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