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from 2001/07/01 17:22
날짜와 지명, 상호명, 이름 등을 기억 못한다는 것이 내 제멋대로인 기억력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부분이다.
대부분의 알리바이가 날짜와 지명, 상호명, 이름 등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내가 무언가 잘못한 일들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기억이 없이는 거짓말도 잘 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살인사건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그런 상황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그 기억력을 보충하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거나 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나는 내가 그곳에 갔던 때가 어느 해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늦은 봄, 혹은 초여름이었다.
나는 매우 이른 새벽에, 동해안의 어느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렸다.
검은 하늘이었지만, 주황색 가로등 불빛 때문에 주변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다.
어쩌면 밝았던 것도 같다. 가로등 불빛도, 흰색이었는지 모른다.
버스에 사람이 많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이른 새벽이어서, 터미널 바깥의 대로에는 택시들만, 한가하게 줄지어 있었다.
택시 운전사 아저씨들은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던 것 같다.
나에게도 물었을 테지만, 아닐 수도 있다.
일반시내버스가 다닐때까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택시를 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터미널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졸았거나, 가져온 책을 뒤적이거나, 아니면 터미널 밖의 거리를 걸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시내버스가 다니게 된 시간에 나는 어떤 버스를 타게 되었다.
목적지를 정하고 탄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 버스를 어떤 이유로 선택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버스에서 나는 잠이 들었을 수도 있다.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나는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곳은 버스가 지나왔고 앞으로 지나갈 좀 넓은 도로와 버스가 지나가는 차선쪽으로 뚫린 다른 길이 만나는 곳이었다.
새벽이라서 아무도 없었다. 길은 하?R다.
공중도 하?R다. 안개가 가득 했다.
그곳에서 내가 내린 이유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즈음에서 잠이 깨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안개때문이거나 혹은 길이 구부러져서 일 수 도 있지만, 어쨌든 끝이 보이지 않는, 버스가 다니지 않는 길로 걸어들어갔다.
그 길에 대해서도 나는 거의 기억하고 있지 않다.
어느 순간, 내 키보다 좀 더 큰 둔덕이 내 앞을 길게, 그리고 끝없이 가로막고 있어서, 나는 잔뜩 물에 젖은 풀섶을 헤치고 둔덕을 넘었다.
그리고 그곳에,

바다가 있었다.

바다도 하?R다.
바다위의 공중도 하?R다.
파도소리만이 바람과 함께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바다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다를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거대하고 물컹한 그 덩어리는 나와 하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는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왔을 것이었다.
바다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향하던 나는, 아주 긴 시간 후에, 혹은 아주 짧은 순간 뒤에 하얀 공중을 젖히고 드러난 검은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언뜻, 뒤를 돌아본 나는 둔덕을 향해 미친듯이 뛰었다.

그렇게 뛰어 버스정류장까지 돌아왔을 때, 길은 어느새 태양빛으로 가득차 길양쪽으로 반짝이는 초록숲이 나타나 있었다.

홀로 바다에 다가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나는 앞으로 다시는 홀로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가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히, 나는 또다시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혼자 가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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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01 17:22 2001/07/01 1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