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from 2001/07/13 17:45
점심시간, 회사 근처의 분식집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너무 놀라서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K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분식집의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널부러진 나를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안쪽 구석에 앉아 분식집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열심히 스포츠 조선을 읽고 있었다. 혹시 내가 넘어져서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고 해도, 어쩌면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벌써 5년전의 일이고, 우리는 단 한 번 만났을 뿐이다.
그런 것을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그가 사라진 직후 그의 얼굴을 완전히 잊었었고, 그렇게 갑작스럽게 마주친 그를 내가 알아보았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분식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마치 카메라 줌인으로 그에게 다가가 포커스를 맞춘 것처럼 그가 내 눈에 확 들어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많이 놀랐지만, 라면과 김밥을 시키고 그것들을 먹으면서 신문에 빠진 그를 바라보고 있자 조금씩 진정이 되면서 이 것 저 것 관찰하고 생각할 여유도 생겼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그는 훨씬 작았다. 1미터 70센티 정도가 될까 말까 한 키에 몸집도 왜소했다. 반 팔 와이셔츠와 감색 양복바지를 입었고 손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근처의 회사를 다닐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냉면을 먹고 있었는데, 젓가락 질 보다는 신문에 더 관심이 많아서 냉면이 줄어드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덕분에 나는 그를 충분히 편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편하게? 의외로 마음이 편했던 것은 왜일까? K와 내가 주어진 음식을 다 먹고 물을 마시고 휴지로 입술을 닦을 때까지도 그는 냉면그릇을 끄적거리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점심시간마다 스포츠 신문을 읽는 것은 그의 커다란 즐거움 중 하나일 것이다.
계산을 하고 분식집을 나와 좀 살 것이 있다는 말로 K를 먼저 사무실로 보냈다. K는 비교적 말이 없는 사람이어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회사로 돌아갔다. 분식집 건너편의 쟈뎅이라는 커피전문점 창가 자리에서 분식집 출구를 바라보고 앉아 30분쯤 기다렸을 때 그가 예의 그 스포츠 신문을 들고 나와 고개를 숙인 채 어디론가 움직였다. 1시 10분이었다. 회사사람들은 아마도 스타크래프트로 아이스크림 내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30분쯤 늦어도 문제될 것은 없다.
나는 너무 그에게 집중하여, 내가 왜 그를 쫓는지 조차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느 길을 걷고 있는지도 살피지 않았다. 그는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내가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어서 뒤돌아보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자신을 따라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척 느리게 걸어서, 목적지 같은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바닥이 목적지지만, 어차피 도착할 수 없다는 투로, 무심하게 바닥만 바라보면서 그는 걷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내가 다시 놀란 것은,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 멈추어 섰을 때였다. 아주 익숙한 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도, 수위아저씨도, 바닥과 벽과 천장도, 너무 익숙해서 그와 내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 회사 건물이었다.

그가 나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힘입어 (그는 바닥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가 내린 층에서 함께 내렸다. 내가 일하는 층보다 2층 아래인 5층이었다. 각 층의 구조는 똑같아서, 엘리베이터 바로 곁에는 남, 녀 화장실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열어두었다. 문 바로 앞에 커다란 거울이 있어서 나는 거울로 반대편 화장실을 볼 수 있었다. 이를 닦던 여자가 나를 못마땅한 듯이 쳐다보았지만, 문을 닫는 대신 입을 행구고 나가버렸다. 그녀가 나가고 나자 이번에는 화장실 안에서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다른 여자가 나와서 손을 씻다말고 문을 쳐다보더니 젖은 손으로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황급히 문을 다시 열고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한 가치 꺼내어 담배 피우는 곳으로 갔다. 그 곳은 화장실에서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모두 볼 수 있는 통로 안쪽에 있어서 그가 화장실에서 나와 어느 회사로 들어가는지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층은 5개로 나뉘어진 방을 3개의 회사가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르르 담배를 들고 나왔다.

[한 대 피우시죠.]
[예, 좋은 담배 피우시네요.]
[아, 내가 좀 더 빨리 공격했어야 하는데.]
[근데, 그 디자인은 언제쯤 완결이 될까요?]
[맨날 그런 소리 하면 뭘 해.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승기씨도 뭐 얼마나 잘한다고 그래요.]
[글쎄, 아직 정확한 기획이 나오지 않아서 말씀드리기는 힘들 것 같고, 어쨌든 일정에는 맞춰야죠.]
[좀만 도와줬으면 이길 수도 있었는데. 내가 다시는 상현씨랑 하나봐라.]
[그럴 수 있을까요? 그래 주시면 저희는 정말 감사하죠.]
[워낙 잘 하신다고 하시니까 뭐 잘 되지 않겠어요?]
[아뇨, 뭘...]
...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는데, 그는 아직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1시 30분.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는 아마도 큰 일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매우 느리게 처리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 때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라졌었던 것일까?
한 무리의 남자들이 담배를 모두 피우고 어색하게 사무실로 쓸려간 뒤에, 나는 담배를 한 대 더 피웠다.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문질러 끄면서, 나는 그가 내 1미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잠시 부딪혀 내가 그것을 인식했을 때, 그의 몸은 이미 벽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가 다시 돌아와 나를 확인할까봐 조금 겁이 났다. 내가 그를 보기 위해 복도로 나서는 순간 그가 나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서고 있어서 나와 마주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차라리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가 돌아온다면, 일단 모른척하자. 그리고 여기서 나가 아무 사무실로나 들어가...아니, 혹시 그 사무실이 그의 사무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내가 같은 회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화장실로 들어가서 손을 닦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 서는 것이 좋겠다. 여자 화장실은 보통 붐비니까, 그냥 급해서 내려왔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화장실 쪽으로 나가면서 복도 쪽을 흘끗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가 복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약간 당황해서 텅 빈 복도에 그냥 서있었다. 그가 나를 알고 있고, 내가 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복도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는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나를 잊었을 것이다.

1시 50분,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 대리가 흘끗 쳐다보았고, K도 나무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별 이야기는 없었다. 6시 정각, 나는 사무실을 나와 회사건물 건너편의 횟집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저녁식사를 시켜먹으면서, 같은 사무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를 기다렸다. 나중에는 술도 한잔 해야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10시까지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혼자 술과 안주를 시키니, 서빙 보는 아가씨가 [손님 기다리시나요?] 하고 물었다. [아뇨. 그냥 혼자 먹을 거에요.] 하고 대답하자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밤 10시가 되었을 때, 그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나는 음식값을 모두 선불로 계산해 버려서 그를 보자 마자 바로 횟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바닥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잠실 행 2호선 지하철을 타고 그와 나는 겨우 30센티미터 떨어져서, 사람들 틈 사이에 끼어있었고, 그는 그 좁은 틈에서 스포츠 투데이를 8분의 1크기로 접어 읽고 있었다. 잠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나는 문가에 기대어 섰다. 그는 처음에 섰던 자리에 그대로 서서, 이번에는 4분의 1크기로 신문을 접어 읽기 시작했다. 신문을 사람들 머리 위의 짐 두는 곳에 던져놓고 그는 건대입구 전철역에서 내렸다. 물론 나도 따라 내렸다.
10시 30분, 그는 현란한 대학가 술집들을 무심히 지나쳐 느리고 피곤하게 걷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만이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저 두 사람을 내가 그냥 뚫고 지나간다 해도 그들은 내가 지나갔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아야! 이봐요. 앞 좀 보고 다녀요!]

나는 그들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위에 놓여있었다. 사실, 앞을 보지 않은 것은 그들이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만 보면서 걷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똑바로 보고 그들에게 다가섰던 것이다. 나는 잠시 그 생각을 하느라 그를 놓칠 뻔했다. 그가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골목은 좁았고, 어두웠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까지 나는 내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이 그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지만, 이내 그라는 것을 알고 안심하였다. 나는 왜 그를 쫓고 있는가? 이제 와서 나는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려 하는가? 나는 그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나는 약간 조바심이 났다. 꽤 오래 걸었고, 그는 금방 어디론가 들어가 버릴 것이다.

조그만 구멍가게가 있었다 지저분한 유리창을 통해 희뿌연 빛이 흘러나오는 허름한 문을 열고 허리를 굽혀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냈다. 그가 이어폰을 끼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었다. 그가 뭐라고 중얼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나는 우선 멈추어 서서 길 한 켠에 기대었다. 조금 후에 그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나오면서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는 것이 보였다. 담배나 음료수 같은 것을 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길은 조용했다. 11시가 다되었고, 그 동네 사람들은 일찍 잠이 드는 모양인지, 혹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것인지, 어쨌든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만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너무나 그에게 집중해 있었다.
집 한 채라고 해봤자 정말 작은 집이었겠지만, 어쨌든 한 집이 사라진 공터가 있었다. 그는 그 앞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어서 이제 손을 뻗치면 그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공터에는 돌이 있었다. 사람 머리보다 좀 작은 돌이었는데, 나는 그 돌을 들고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억.]하고 그가 쓰러졌다. 나는 한번 더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돌을 공터에 내려놓고 나는 잠시 서 있다가 나의 그림자를 보았다. 달빛에 겨우 어둠과 구분되는 긴 그림자가 늘어져 있었다.

다음 날 출근해서 점심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나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머리 한구석에 걸리적거리는 뭔가가 뛰쳐나오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일에 몰두하자 금새 그 뭔가는 사라졌고, 그 뒤로는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건물 안은 여전했다.

한 달쯤 뒤에 J로부터 전화가 왔다. 결혼한다고 했다. 자신의 결혼 소식을 이야기하다 말고 그는, 나더러 문학동아리에 든 적 없냐고 물었다.
[그 왜, 깃발인가 하는 그 동아리 있잖아. 내 기억에 니가 거기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신입생일 때 그 동아리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가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술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 뒤로는 찾아가지 않았다.
[아니, 나는 동아리 활동같은 것 하지 않았어.]
[그래? 나는 그냥, 니가 책도 많이 읽고 해서, 왠지 그 동아리 일 것 같았는데. 아닌가? 어쨌든, 그 동아리 사람 하나가 죽었대.]
[그래?]
[근데, 그게, 살인이래. 돌에 맞아 죽었다나봐. 나도 며칠 전에 들었는데, 별 일이 다 있지?]
[그렇네.]
내가 시큰둥해하자 그는 금새 말을 돌려 자신의 결혼식에 꼭 오라고 당부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 후에야, 나는 내가 착각하여 그 동아리에서 한 번 보았던, 나와 아무 상관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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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13 17:45 2001/07/13 1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