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바다

from 2007/01/12 15:45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무서웠다.

무서웠지만 강한 호기심이 일어, 그녀에게로 천천히, 천천히 다가가면서

독사는 한 번 물고 나면 독액이 거의 남지 않는다는 세네카의 말을 생각했다.

가늘고 흰 그녀의 목을, 아주 가늘고 흰 뱀이 감고 있었다.

뱀의 머리는 그녀의 머리단 속으로 들어가있는 듯 했다.

눈은 가볍게 감겨있었고, 입술은 살짝 열려있었다.

가슴 윗부분에는 짙은 보라빛의 멍이 마치 독액처럼 퍼져있었다.

 

나는 그녀의 곁에 살며시 누웠다.

뱀의 빨간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목을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공장으로 가는 길은 무더웠다.

푸른 작업복을 입은 창백한 작업공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분홍색페인트가 부분부분 벗겨진

건물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건물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분홍색건물이 사람들을 꾸역꾸역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옥상 위도 무더웠다.

눈을 한껏 찡그리고 태양을 올려다보면서 담배를 한모금 빨자

갑자기 주위가 서늘해지면서 검은 바다가 떠올랐다.

바다는 건물도, 작업공들도, 작업공들의 목소리더미도, 옥상도 모두 삼키고 공중에 태양만 남겼다.

그 태양은 뜨겁지 않았다.  나는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쉭'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검은바다도, 태양도 사라지고 갑작스러운 밝은 빛속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태양빛은 전보다 더 밝았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전보다 더 커졌다.

나는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린 다음, 발로 밟았다.

고무로 된 신발밑창이 혹시 타지않았을까 한번 확인하고, 주머니에 손을 꽂고,

녹색철문을 어깨로 밀어 건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녀의 하얀 팔이 뱀처럼 내 목을 향해 다가왔다.

눈을 감았다.

 

 

아무도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시대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책을 써야했다.

그러나 팔리지 않는 책이 훨씬 더 많았다.

전달되지 못한 말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녀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대도시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청소부들이 

채 바닥에 떨어지지도 않은 말들을 쓸어담아 소각장으로 가는 차에 실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말들이 쏟아져나오는 시대였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저는 이를 닦을 때마다 구역질이 나요. 무슨 병이라도 난게 아닐까요?"

"저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조깅을 해요. 인생을 저처럼 살면 행복해진답니다."

"담배를 끊고 싶은데 끊을 수가 없어요. 답답한 일이 너무 많아요."

"우리 부장새끼는 내가 개로 보이나보다. 어제는 술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짖어야 했다."

"남친은 제 코가 너무 낮대요. 수술하려면 비용이 얼마나 드나요? 하는 김에 점도 좀 뽑고 싶어요."

"명상을 하세요."

"부시, 미군 이만천오백명 이라크 증파"

"수술 없이 가슴 C컵 만들기.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른발에 채인 "현대차 노조, 파업결의, 사측 법적 대응"을

왼발로 밟아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남겨두고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바쁘게 걸어서 공장으로 들어갔다.

 

나는 단어조립파트에서 일했다.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일이 쉽고 잔업도 없어서 나는 이 일이 좋았다.

글자조립파트에서 보내온 '가'와 '위'를

글자들에 꼭 맞게 만들어진 틀에 넣으면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조임기계가 연결고리를 끼운다음

빠지지 않도록 꼭 조여주는데 3초가 걸렸다.

 

문장조립파트에서는 

명사를 줄줄이 배열하거나 명사에 조사를 끼우거나

연결된 명사와 조사에 가는 철사로 다른 명사를 연결하기도 하고 동사나 부사를 연결하기도 했다.

문장조립파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장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들이다. 

공장에서 가장 오래 일한 송할아버지는 하루에 200개씩 문장을 만든다고 한다.

 

만들어진 문장들은 차곡차곡 가지런하게 종이상자에 담겨 물류센터를 거쳐 전국으로 배송된다.

 

나는 가끔 불량품들을 주워와서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녀는 찌그러져서 알아볼 수 없게된 단어나 문장들, 혹은 글자들을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즐거워했다.

그녀의 옷장에는 옷대신 불량품들이 가득 들어찼다.

그 사이에 흰 뱀이 수호신처럼 또아리를 틀고 잠을 잤다.

내가 없을 때는 그녀도 흰 뱀 옆에 쪼그리고 잠을 잤다.

 

나는 공장에서부터 집까지 매일 두근거리면서 달려왔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버스안에서도 달리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을 달려 연립주택의 유리문을 열고

5층까지 성큼성큼 한번에 세칸씩 계단을 뛰어올랐다.

문을 열면,

그녀가 내 발소리를 듣고 이미 장농에서 나와 문앞에 앉아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어 그녀의 팔이 내 목을 감는 것을 느끼고,

내 뺨에 와 닿는 그녀의 따듯한 귀를 느끼고,

내몸을 향해 둥글게 휘어지는 그녀의 허리를 느낀다.

신발을 벗고 그녀 위로 넘어지면, 검은 바다가 펼쳐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 앞에 앉아 함께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글자들을 분해하거나 조립하기도 하고

밥을 지어 김치와 먹기도 했다.

 

처음 그녀가 온 날은 맥주를 마시면서 바다 위의 하늘에 잡지를 찢어 붙였었다.

처음에, 우리는 심각하게 잡지들을 노려보면서 예쁜 것과 예쁘지않은 것을 신중하게 골라냈는데

맥주를 세캔째 따면서부터는 잡지를 붙이는 것보다 웃느라고 바빠졌다.

너덜너덜한 하늘을 보고 웃고, 예쁘지 않은데 붙여진 부분을 보고 웃고,

빨개진 상대의 얼굴을 보고 웃고, 웃는 걸 보면서 또 웃었다.

웃어도 웃어도 끝이 나지 않아서 우리는 꼭 껴안고 계속 웃으면서 잠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누군가가 내 귀에 "그가 죽었다"고 속삭였다.

"몸에 불을 붙이고 골리앗위에서 뛰어내렸다"고 다른 누군가가 속삭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문틈에 "몸"자가 끼어있어서 나는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가슴이 두근거려 금새 잊었다.

 

그녀는 불량품들을 연결해서 장신구들을 만들었다.

읽을 수 없는 글자나 문장의 요소들이 귀걸이나 목걸이나

특이하게 디자인된 란제리가 되어서 그녀를 예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찌그러진 이응을 살짝 치우고 그녀의 젖꼭지를 입술로 물었다.

그 이응은 어쩌면 히읗에서 떨어져나온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불량품들로 꾸며진 그녀의 몸이 너무 좋았다.

 

어깨에 걸쳐진 조각들을 흘러내리게 하자 온 몸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팔목에 돌돌 감긴 흰뱀만 남아서 빨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불량품들 속에 들어가 앉아 귀를 핥고 목을 쓰다듬고 어깨를 물고 입을 맞췄다.

 

 

그 날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10만개나 만들어야 해서,

공장의 모든 작업공들이 철야를 해야했다.

하루종일 '죽음'이라는 단어를 조립하면서 나는 집에 있는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도 언젠가 죽는다.

라고 생각해봤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빨리 만들기 위해서 나는 생각을 멈추고 기계아래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새벽 6시에 우리는 철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두근두근 하는 가슴으로 버스에 올랐다.

하얀 입김이 버스안을 가득 채웠다.

 

어둑어둑한 공중에 어둑어둑한 안개가 자욱해서 나는 안개를 젖히면서 힘껏 달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죽은 것 같았다.

입술은 화장이라도 한것처럼 붉은 물이 들어있었다.

붉은 물이 그녀의 어깨까지 흘러 머리칼을 적시고 있었다.

가슴에는 검은 멍이 여러개 들어있었다.

목에는 흰 뱀이 감겨있었다.

 

그녀 옆에 살며시 누웠다.

뱀의 빨간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목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흘러서 나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찢긴 옷 위에 내 작업복을 걸쳐주었다.

 

흰 뱀은 독사가 아니었다.

물면 구멍이 두개 뚫려서 무척 아픈 이빨이 두개 있었지만, 잘 물지도 않았다.

나는 흰 뱀이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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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떻게 되는걸까? 개토야, 일해.

호흡을 잃는 것이 무서워서 나는 글을 끊지 않는데, 일을 안해서, 정말 불안해서, 글을 끊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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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2 15:45 2007/01/12 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