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벽 너머

from 2001/10/01 15:10
그들이 근처에서 우리를 찾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의 흐름이 약간 달라졌고, 온도도 조금 내려갔다.
다시 어디로 움직일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며칠 전부터 모두들 말이 없다.
말을 해봤자 공포감만 늘어날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게 된 것이다.
그 대신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완전히 남에게 맡긴 사람의 처절한 기대감이 가득하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 밖에 없다.
운 좋게 표면까지 올라간다고 해도, 발 아래를 볼 수 없는 상태로 이동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다.
바닥까지 내려간다고 해도, 단지 좀 더 시간을 끌 수 있을 뿐이지만, 어쩌면, 건물밖으로 통하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닐 가능성이 더 높지만, 그런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

내려간다. 바닥 쪽의 철망을 뜯고 아래 층으로, 우리는 일주일 동안 그 아래 층을 구경만 해왔었다.
기시감. 사실 이런 상황은 진정한 기시감이 아닐 것이다.
한 층을 내려올 때마다 기시감과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 건물에는 바깥을 볼 수 있는 창문이 없다.
물론 바깥에서도 우리를 볼 수 없으니, 도망치기에는 비교적 좋은 조건이다.
그러나 어디까지?
창문도 없지만, 문도 없다. 들어올 수도 없지만, 나갈 수도 없다.
맨 아래층에, 문이 없다면, 우리는 더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된다.
25. 새로 내려간 층에 칼끝으로 숫자를 새긴다...

그렇게 한 층 한 층 내려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그 층에는, 유리벽이 있었다.
유리벽의 바깥에는 흙과 나무와 꽃과 새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23호는 유리와 바닥의 모래를 할퀴다가 손톱이 모두 빠져 버렸다.
그의 피가 물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듯 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우리는 유리벽에 뺨을 대고 웅크린 채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멀리에서 둔탁한 움직임이 몸안으로 다가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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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01 15:10 2001/10/01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