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나의 것

from 영화에 대해 2002/07/10 14:15
[복수는 나의 것]
- 하드보일드, 아! 하드보일드

[하드보일드(hard-boiled)]

원래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의 형용사이지만,
전의(轉義)하여 ‘비정 ·냉혹’이란 뜻의 문학용어가 되었다.
개괄적으로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로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이 수법은...

- 야후! 백과사전 참조 -


내가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래의 우리 영화에서
무언가를 표방하고 실제로 그 무언가를 보여준 영화는
아마도, [복수는 나의 것]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류승완 감독의 펄프 느와르가 아직 명확한 장르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잔혹극(?)'정도로 불릴 애매한 장르라면...

어쨌건, [복수는 나의 것]은 너무나 '하드보일드'하여
심히 괴롭게 만드는 장난아닌 영화였다.
장르적 완성도가 영화의 완성도와 결합해서, 아, 새로웠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듯
각각의 주인공에 빠져들어 그 갈등과 고통을 맛보되
결코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는 영화.

고도로 이성적이어서 치밀하게 계산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박찬욱 감독에 대해서 생각했다.
[JSA]를 봤을 때만 해도, "흠...참 계산적인 영화로군.."했던 것 같다.
관객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계산해서
잘 끼워맞춘 퍼즐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감독이로군...했는데...

역시 그런 감독일 뿐만 아니라
자기 세계가 있는 감독이었던 것이다.

감독이 놀라웠던 만큼 배우들의 연기도 대단했다.
아역, 조연, 주연 모두 흠잡을 데 없어서,
지체부자유자로 나오는 류승범은 못알아볼 뻔 했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복수는 운명이면서 동시에 운명에 대한 거부이다.
선과 악이라는 기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수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복수하는 사람들,
주어진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어떻게든 복수해야하는 사람들.

복수하는 사람들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반항하는 사람들이다.
이 영화에서 착한 사람들로 불리워진 두 복수자들은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부조리할 수 있는가! 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그 부조리의 끝을 보기 위해 극단까지 치닫는다.
세상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서로를 죽이면서 이야기한다.
'넌 착한 사람이니까, 나와 같은 사람이니까
왜 내가 이 부조리의 끝을 봐야하는지 알거야...'라고.

세상에 비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영미(?)의 실천들, 혹은 이야기들은
거대한 세상에 비해 너무 왜소하고
복수자들은 모두 실패한다.

그러나 감독은 말한다.
'복수는 나의 것!'

[복수는 나의 것]은,
구약 성서의 '복수는 신의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므로 로
인간은 복수를 해서는 안된다'라는 의미의 문장이라는데
나는 이 문장에서 오히려 '시지프스'를 떠올렸다.

신이 뭐라고 해도 나는 복수한다.

우스운 것은 복수자의 최후다.
'그런 식으로는 복수가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결말.

당신의 복수도 세상 부조리의 일부야.
누구도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세계.
주인공 류는 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송강호는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족은, 하나의 단위이다.
그들은 거대한 부조리의 세계 속에서 작은 단위의 부조리에 집착했을 뿐.

제대로 복수한 것은 아마도 영미 정도가 아니었을까...
마지막에는 조직도 남기고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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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10 14:15 2002/07/10 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