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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5/17
    각종 발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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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5/09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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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5/09
    판단력 비판(칸트랑 완전 무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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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참함과 유토피아 사이의 노동 앙드레 고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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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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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0/04/16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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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4/16
    슬라보이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일부 발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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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4/16
    4월6일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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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을넘어선자본1편-이진경 선생님 책보고 요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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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0/03/29
    잔인한 바르셀로나 대학 도서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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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발췌

당신의 목표는 임금노동의 노예?

-로날트 블라쉬케의 라이너 로트의 조건없는 기본소득 비판에 대한 반비판 진보평론 39호 2009년 봄호

 

시민적이고 정치적인 권리에 대한 국제조약 3부8조(1966)

누구도 강제노동 혹은 의무노동을 하도록 강제되어서는 안된다.

 

 

국제노동기구의 강제노동 혹은 의무노동에 대한 협정91930)

누군가에 의해 그 어떤 처벌위협으로 요구되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에 맡겨지지 않은, 모든 노동 혹은 서비스는 강제노동 혹은 의무노동으로 간주된다.

 

 

임금노동은 소외되지 않고 자유로운 연합과 협력에 근거한 인간의 자기활동의 반대이다.

소외되지 않은 따라서 인간의 자기활동의 본질은 칼 맑스에 의하면, 자기활동의 자유로운 선택성, 활동의 목적에 대한 그리고 활동을 위해 필요한 수단에 대한 자유로운 이용가능성이다. 더 나아가서 노동 저편의 활동들은 물질적 필연성과 외적 합목적성과 독립적으로 실행된다.

 

 

맑스의 경철수고에서 발췌

만약 그가 부자유스러운 활동으로서의 그 자신의 활동과 관계한다면, 그는 다른사람에 대한 굴종, 강제, 지배하에 있는, 예속의 활동으로서 그 자신의 활동과 관계하는 것이다......그가 그 자신의 활동을 자신에게서 소외시키는 것처럼, 그는 낯선 자가 그 사람에게 본래적이지 않은 활동을 제 것으로 하도록 한다.

 

우리는 물론 사적소유의 운동의 결과로서의 국민경제학으로부터....외화된 노동 개념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 개념의 분석에서 만약 사적 소유가 외화된 노동의 원인으로, 근거로 나타난다면, 사적 소유가 오히려 외화된 노동의 결과라는 것이 드러난다. 마치 신들 역시 원래 인간의 이성오류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것처럼 말이다. 후에 이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바뀐다.

 

 

 

따라서 소외된 노동과 이에 조응하는 종속관계들은 자본과 자본관계들에 대한 근본적 전제이다. 그것들은 맑스에 의하면 단순히 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임금노동관계들, 자본관계들은 그들이 매일 그들의 행동을 통해 재생산하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들이다. 단순 소유로서 그리고 임금정치적이자 협정임금정치적 문제로서의 이러한 관계들의 ‘사물화’는 인간들의 관계에 대한, 따라서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한 실제로적 해방적인 문제제기를 소실시킨다. 그리고 어떤 이들을 위해서는 최저임금으로 구체적인 임금노동조건들을 단순히 개선하고, 다른 이들(시장-예비군 지위에 있는 임금노동자들)을 위해서는 국가의 강제와 결합된 최저소득으로 빈곤-상태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접근은, 임금노동관계들/자본관계들 너머를 가리키지 못한다. - 그것은 사람들을 이 종속관계들에 고정시킨다. 종속적인 고용활동자를 위함 최저임금과 실업자를 위한 최저소득은 반자본주의적 접근이 아니다.

 

 

 

인간은 다름 아닌 대상적 세계의 가공속에서 비로소 현실적으로 자신을 유적 존재로서 증명한다. 이 생산은 그의 활동적인 유적 생활이다. 이 생산에 의하여 자연은 인간의 작품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현실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노동의 대상은 인간의 유적 생활의 대상화이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그의 생산의 대상을 빼앗음으로써 그의 유적 생활, 즉 그의 현실적인 유적 대상성을 빼앗고, 동물에 대한 그의 장점을 단점으로 변화시켜 그의 비유기적 몸, 즉 자연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경철수고 박종철 출판사 79페이지

 

 

 

맑스의 혁명적 사고-자본이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방식을 드러냄으로서 역사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변증법을 보임

맑스의 한계-노동을 인간의 본질이자 역사의 본질로 보는 노동중심주의적 사고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근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함

 

 

 

맑스의 네 가지 소외

1. 노동자는 낯선 물건과 관계를 맺듯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과 관계를 맺는다. 그 생산물은 노동자 위에 서 있으며, 독립된 힘으로 노동자와 대립한다.

2. 노동자는 생산이라는 활동 자체에서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자는 그의 일을 그의 진짜 삶의 일부로 여기지 못함으로 해서 편안함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3.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조화로운 노력들이 배제된 노동에서 그의 유적 생명, 그의 사회적 본질을 박탈당한다.

4. 인간은 다른 인간들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의 소외로 인해, 맑스가 아래 인용문에서 쓰고 있듯, 노동은 역설적으로 존재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국민경제학은 노동자와 생산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서 노동의 본질 내부의 소외를 은폐한다. 이 점은 틀림없다. 노동은 부자들을 위해서는 기적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궁핍을 생산한다. 그것은 궁전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움막집을 생산한다. 그것은 미를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불구를 생산한다. 그것은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지만 노동자의 일부를 야만적인 노동으로 되던지며, 또 다른 일부를 기계로 만든다. 그것은 정신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정신박약과 백치병을 생산한다.

경철수고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박종철출판사 75페이지

 

 

예컨대, 가정 내의 일과 같이 우리가 사적 영역에서 행하는 자활노동(work for oneself)은, 따라서, 임금노동과 동일시 될 수r 없다. 왜냐면, 자활노동은 자기 자신의 유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이 형성한 생활공동체의 사람들을 위해서만 봉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은 사회의 필요의 영역에 종속되지 않을때에 한해, 사회적 관계의 시스템을 지탱하거나 재생산하기 위해 사회적 노동의 과정속으로 들어가지 않을때에 한해, 적실하고 내재적인 의미를 유지할 수 있다. 사적 영역의 의미는 자신의 삶과 뜻을 사회의 목표에 종속시키지 않아도 되는, 서로 특별한 사람들로서 존재하는 개인들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앙드레 고르, 『capitalism, socialism, ecology』53-54 chris turner(london verso1994)

 

 

경제적 이성에 의한 합리적 이유들 때문에 임노동wage work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서로를 위한 진정한 노동work을 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사회를 위한 밑바탕이 된다는 것이 고르의 판단이다.

노동을 모든 가치의 척도로 정의함으로써 정치경제학의 탄생을 알린 사람은 스미스였고, 그것이 모든 가치를 생산하는 가치의 원천이라고 말한 사람은 리카르도였다. 또 이러한 노동 개념을 확장하여 절대정신의 활동에까지 적용한 사람은 헤겔이었다. 맑스의 인간본질은 노동이라는 명제는 이러한 영향하에서 이루어졌다.

 

스미스는 노동을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인 척도로서 간주한다. 그것은 부를 표상하는 여러 가지 척도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부를 비교하고 평가하게 해주는 단일한 척도이며, 주관적인 가치평가에 좌우되는 표상의 일종이 아니라 표상의 외부에 있는 객체적이고 불변적인 척도인 것이다. -국부론, 스미스, 김수행역, 상권 동아출판사1992 36쪽이하

 

 

 

리카르도는 여기서 좀더 심층으로 밀고 들어간다. 즉 노동은 가치를 측정하는 절대적 단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상품의 가치를 결정해주는 원천이다. 생산활동으로서 노동이 바로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가치는 부를 표상하고 표시하는 기호가 아니라, 노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생산물이 되었다. 노동은 척도에서 기원과 생산의 차원으로 그 위상을 바꾼다. 노동은 모든 가치의 기원이며 생산자라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제 분석의 중심은 교환에서 생산으로 이동한다. 그 결과 시장이나 교환을 다루는 유통이론에 앞서 가치의 생산을 다루는 생산이론이 일차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스미스와의 이러한 차이는 보통 스미스의 지배노동가치설과 투하노동가치설이라는 말로 표시된다. 즉 리카르도는 스미스의 가치개념이 어떤 생산물이 시장엣 지배할 수 있는 노동량이라고 보는 것을 비판하면서, 어떤 생산물에 투하된 노동량이 상품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함으로서 상품간의 상대적 비교관계에서 가치 개념을 독립시켜 절대화한다.

리카르도-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정윤형 역 비봉출판사 1992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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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4장 우울증과 행동에서 일부 발췌

 

 

결여는 상실과 다르다.

 

결여는 원래부터 없던 거고, 상실은 있던 것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자는 자기 증상의 원인이 결여가 아니라 상실이라고 착각한다.

우울증자의 욕망의 대상은 공허한 결여에 불과할 뿐 그 자체는 실존하지 않는 순전한 왜상적 실체에 불과하다.

 

 

조르조 아감벤은 우울증과 애도를 대비시키면서 우울증이 어째서 애도작업의 실패, 즉 대상이라는 실재에 고집스레 집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이기도 한지 강조해 왔다.

“대상의 상실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것을 미리 내다보고 한발 앞서 애도하고자 한다는 점에 우울증의 역설적인 성격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울증의 책략이다. 즉 우리가 이전에 결코 가져본 적이 없었던, 애초부터 상실된 상태였던 어떤 대상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수중에 넣고 있는 어떤 대상을 마치 그것이 이미 상실된 것인양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증자는 애도 작업을 완수하는 것에 대한 거부를 그와 정반대의 형식으로, 즉 아직 대상이 상실되지도 않았을 때조차 그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애도를 표하는 거짓장면을 연출하는 방식으로 하게 된다.

 

 

집시에 대한 오래된 인종차별적 농담

비가 오면 집시들은 즐거워한다. 비가 그치면 언제나 태양이 비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날이 좋으면 그들은 슬퍼한다. 햇살이 비친 다음에는 언젠가 비가 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요약하자면 이렇다. 애도하는 자는 대상의 상실을 상징으로 만듦으로서 그것을 ‘두 번째로 죽인다.’ 이에 반해 우울증자는 단순히 그 대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인 것이 아니라, 대상이 상실되기도 전에(이미 상실된 것으로 취급함으로써)[그 또한]대상을 두 번 죽이는 자라고 해야 한다.

 

우울증자는 상실한 대상에 고착되어 있어 애도작업을 수행할 수 없는 주체가 아니라, 차라리 대상을 소유하고 있는, 그러나 그 대상을 욕망하게끔 만들었던 원인이 철회되어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욕망을 상실해 버린 주체이다.

 

지젝은 글은 가끔 당혹스럽고 대체로 재미있고 항상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젝의 글은 현란한 수사구로 무장되어 있지만 결론이 없어.

 

난 결론을 내지 않아서 지젝이 좋다. 내지 못하는게 아니라 결론을 유보하고,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논의를 더 풍성하게 하려고 하는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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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력 비판(칸트랑 완전 무관.....ㅋ)

 

나는 무슨무슨 주의자야----난 이런 사람이야---넌 이래--- 라고 단정하는 것의 의미. 그 정체,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정말 자신이 그러하다고 스스로 믿고 싶은걸까? 아니면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 오지마. 그냥 날 .....주의자 정도로만 인식해줘. 벽을 치는걸까?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무지한데서 오는 당혹감을 벗어던지기 위해 스스로를 규정하려는 걸까. 마치 검은 안경을 끼고 있으면 검은색만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보려고 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오목거울과 볼록거울이 교차하는 매직미러앞에 서면 내가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나는 난쟁이가 되기도 하고 키다리가 되기도 한다.

 

다양한 선배들이 서로 옷을 사주겠다고 난리들이다. 하지만 난 그 옷이 어떤 옷인지 보다는 옷을 선물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본다. 결국 내가 고른 옷, 아니 내가 고른 선배는 맑스라는 브랜드의 옷을 사온 ‘말쑥하고 점잖으며 지적인 듯 보이는 사람’이다. 난 어려서부터 쭈욱 그 옷만 입게 되었다. 다른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내 선택에 대한 무지와 오류를 고백하는 것이며, 그 선배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아닌 것이다. 하지만 내 키는 커가는데 반해 그 옷은 늘어나지가 않는다.

내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 선배가 사준 옷을 내가 감사히 잘 입었다는 것. 하지만 지금은 작아져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든 아니면 늘려 입던 것두 아님 집에 고이 간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옷에 익숙해진 '나'에 대한 부정, 그리고 그 선배에 대한 거절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당췌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우리는 이차원적 인간이 아니다. 4차원적인 좌표평면위에서 우리의 연속성이 이루어진다.

 

 

‘수많은 종속변수를 다 고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전제하에서 말하자면.....그 모델은 이러이러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경제모델에서 이러한 도식으로 이야기할 때마다 비웃으면서 난 이렇게 얘기한다.

결국 다 고려하지 못하니까 그것은 현상을 온전히 파악하는 과학이 아니라 제안에 불과한거 아냐? 사회적 담론들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에 불과한거 아니냐고?

 

 

경제모델만 그러할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선형적 인과성만으로 우리의 행위와 선택을 설명하려는 것은 오히려 무지한 것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계기들과 환경들, 관계들이 뒤섞인 진흙탕속에서 우리의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결정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그러한 다양한 종속변수들은 모조리 외면되고 제일 그럴듯한 한 가지 인과성만이 그 이유로 포장된다. 바로 이러한 간극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오해는 태어나고 자기기만 또한 시작된다.

 

 

넌 다 좋은데 일관성이 없어.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비일관성을 논리적으로 변호하려고 해. 그러한 태도는 아무리 세련되게 꾸민다고 해도 결국 어린아이의 땡깡과 다를바 없는 태도야.

 

이 말을 누구한테 듣던 내 반응은 과연 동일할까? 물론 아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객관적으로 내용만을 보는게 아니라 ‘누가’ ‘어떤 맥락에서’ ‘왜’ 그 내용을 말하는지도 함께 고려한다는 것이다.

 

 

 

시퀀스1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가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한다.(애정어린 목소리리로) 넌 다 좋은데 일관성이 없어.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비일관성을 논리적으로 변호하려고 해. 그러한 태도는 아무리 세련되게 꾸민다고 해도 결국 어린아이의 땡깡과 다를바 없는 태도야.

 

 

내 대답: 휴우...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일관성이라는 걸 선택하는 순간 수 많은 가능성과 수 많은 동지들을 적으로 돌릴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상황상황에 대처하도록 절 이끌고 있네요. 맥락이라는 녀석을 받아들인 후부터는 경계라는 걸 만들기가 참 어렵네요.

 

 

 

시퀀스2

내가 재수없어하는 말많은 선배놈을 만났다. 그 넘이 술쳐먹고 나한테 씨부린다. 넌 다 좋은데 일관성이 없어.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비일관성을 논리적으로 변호하려고 해. 그러한 태도는 아무리 세련되게 꾸민다고 해도 결국 어린아이의 땡깡과 다를바 없는 태도야.

 

 

내 대답: 너나 잘해 게쉑히야....

 

 

결론....

판단할 때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자. 일단 컨텐츠를 먼저 엄밀하게 살피고 그에 대한 1차 판단을 내린후에 맥락과 발화수행자를 살피자. 그러면 좀 더 공정한 판단이 가능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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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함과 유토피아 사이의 노동 앙드레 고르

앙드레 고르가 쓴 Arbeit zwischen Misere und Utopia라는 책의 2장 1-3절까지의 번역입니다.

 

The Latest Forms of Work

 

 

POST-FORDISM

 

 

포드주의적 성장이 끝나면서 기업들은 스테그네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가지 시도를 했다. 그들은 첫째, 시장 점유율을 늘리거나 둘째, 제품의 범위를 보다 빠른 속도로 갱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식이 되도록 만든 상품들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시장 점유율을 늘리는 것에 말하자면, 상대적으로 미개척된 시장에서는 전망이 밝았다. 따라서 기업들은 신흥국가들에서 거점을 마련하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금방 구식화하는 방식에 관해서 말하자면, 혁신과 관련된 보다 강렬하고 지속적인 노력뿐 만 아니라, 보다 낮은 단위비용으로 보다 소량을 생산할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그 두 가지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포드주의 생산 방식과의 결별을 수반했다. 경쟁력은 대량생산으로 달성된 규모의 경제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었다. 경쟁력은 도리어 점점 더 짧은 시간 안에, 보다 적은 양을, 보다 낮은 가격에, 얼마나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가에 의해 달려있다. 과거에 성장이 양적이고 물질적이었다면 지금에 와서 성장은 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이 되었다. 곧 이미지와, 참신함, 상징적 가치가 제품을 파는 힘이 되었다. 경쟁력은 새로운 제품을 디자인하고 생산해 내는데 있어서 최대한의 유동성과 가변성과 신속성을 요구했다. 기업들은 끊임없이 임기응변의 능력을 가져야만했다. 즉, 기업들은 일시적 유행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알고 있어야 하며, 그 유행에서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했다. 사실상 포화상태의 시장에서, 유일한 성장의 방식은 기호나 유행을 다양하게 하고 그리고 유행이 변화시키는 속도를 빠르게 하는 방식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단지 증가하는 변덕스러운 소비자의 요구에 기업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기업들은 평범한 것들에 반해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려고 변덕스럽고 주기가 짧은 유행을 예견하고 강조하고 창출해야만 했다. 평범한 것은 수요를 억제하는 경직성의 한 요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수요는 놀랍고 기대하지 못했던 것들의 공급에 의해서만 촉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경직성이든지 떨쳐버려야 할 족쇄가 되었다.

 

 

포드주의적 생산방식에서 이러한 경직성이 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포드주의 생산방식에서는 노동은 표준화된 제품의 대량생산을 위해 고안된 긴 조립라인에서 수행되는 세분화되고 비숙련적인 업무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것은 노동력의 세분화(narrow specialization)와 생산조직의 경직성 때문에 새 제품을 계획하고 계발할 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드주의에는 경직되고 준군사적인 위계가 있었고 노동자를 감시하는 많은 감독관들이 있었다. 각자의 작업장에서 고립되어 있는 노동자들을 감독관은 그들이 부과하고 조직한 파편화된 분업을 동시에 그리고 공동으로 작업하도록 감독했다. 생산목표와 각 분업에 할당된 시간은 내부 경직성의 원인이 되었고 한 작업장의 연체는 모든 공정라인에 충격을 미쳤다. 게다가 기업노동력의 1/4가까이를 차지하는, 하지만 직접적인 생산에는 참여하지 않는 많은 수의 관리자가 있었고 재고 및 창고관리비용 도 높은 수준을 차지했다.

 

 

 

1950년대 미국의 한 사회학자가 보았듯이, 경영은 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확립하려는 노력에 너무나 정신이 팔려 있어서 기업의 진정한 목적을 상실한다. 우연히 공장을 방문한 이는 공장의 목적이 생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놀랐을 것이다. 확실히, 묘사된 몇가지 룰을 강화하는게 가능했다면..., 결과는 생산의 점진적 감소였을 것이다.

 

 

이런 통제에 대한 강박은 대량생산의 기술적 요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테일러가 명시적으로 말했듯이, 그것은 ‘당연히’ 소극적이고 멍청한 것으로 간주되는 노동력에 대한 경영의 근본적 불신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는 모든 자발적 결단을 제거한 강제의 시스템에 노동자를 감금시켜서 가능한 한 최대로 착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기업이 사용하는 조직이나 기술은 노동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려는 자본의 결단을 보여준다. 그것은 나태, 빈둥거림, 규율 없음, 반항하려는 경향들과 싸우기 위한 것이었다. 공장은 감독관의 감시의 눈초리로부터 추가 생산력(최대 20%)의 상당한 여지를 숨기기 위해 요령을 피우는 비숙련노동자와의 끊임없는 국지전의 장이었다. 노동자의 모든 기술과 창의성은 그들의 자율성을 숨기는데(추가생산력의 여지) 쓰여졌다.

 

 

기업의 목표가 점점 증가하는 반항적 노동력을 로봇으로 대체함으로써 인간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인 한, 공장자동화는 비싸긴 하지만 실망스러운 것들의 원천 인채로 남아있었다. 이와 관련해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1980년대 초의 카시노의 피아트 공장이다, 그곳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발전되고 자동화된 공장이었다. 테일러주의적으로 훈련받은 기술자들의 전형적인 제품이 되기 위해, 피아트 공장은 공장자동화를 중앙집권적 감시 및 작업의 순서와 시간에 대한 정밀한 프로그램화와 결합시키려고 애썼다.

 

 

일본인들은 다른 회사를 인수하거나 합작기업을 운영했고, 동시에 ‘앞으로 세상을 바꾸게 될’ 린 생산방식을 미국에 소개했다. 예를 들어 마쓰시타사가 시카고에 있는 모토로라 TV공장을 인수했을 때, 직접 생산에 참여하는 근로자를 제외한 모든 관리직을 해고했다. 일본 의 한 경영자가 설명했듯이, ‘미국인들’은 노동력을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육체노동자가 동시에 정신노동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전 직원의 절반만 있으면 된다. 2년이내에 마쓰시타는 시카고에서 TV생산량을 두 배로 증가시키면서 인원은 최종적으로 처음 조정하려던 인원보다 50배나 감축했다.

 

 

캘리포니아 프레몬트에서 도요타와 제네럴 모터스의 합작기업의 최고책임자로 있는 코스케 이케부치는 2100명의 생산직 근로자들은 작업현장에서 하루 8시간씩 시간을 보내는데 반해 엔지니어들은 단지 3시간씩만 작업장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도요타의 철학을 요약했다. 그 결과, 엔지니어들의 주요한 역할은 생산직 노동자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생산직 노동자들의 아이디어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 외 다른 어떤 태도도 막대한 자원낭비에 불과하다고 이케부치는 주장한다.

 

 

사실상 ‘도요타’나 ‘오노(발명자의 이름을 딴)’ 시스템은 일본기업가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서구산업에서는 이제야 부닥치는 문제에 대해 이상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오노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 문제는 다음과 같다. 즉, ‘생산해야 할 양이 늘어나지 않을 때,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그러나 오노의 대답은, 산업화의 역사가 계급투쟁의 역사와 완전히 일치하는 서양사회에 있어서는 문화적인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필수 원칙 중 한 가지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자기 관리의 폭넓은 허용은 최대치의 유용성과 생산성, 기술계발의 속도 및 생산을 수요에 맞추는 속도 둘 다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테일러주의에서 자기조직화와 노동자의 창의성 및 재간은 반란과 무질서의 원천이기에 물리쳐져야할 것이었다면, 도요티즘에서는 이런 것들이야 말로 발전되고 이용되어야 할 하나의 자원이었다. 노동자의 개성에 대한 총체적이며 억업적인 지배는 이제 개성을 활성화(mobilization)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노동자들에게 부과된 경직되고 고정된 기술은 쓸어내버려졌고 이제 그것은 노동자들 스스로가 제조공정에서 지속적 조정과 개선을 담당하게 하는 ‘Kaizen'으로 대체되었다. 공식적인 지시가 그렇게 없어짐으로써 자발적이고 유연한 생산적 협동이 생겨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생산에서의 유연성과 최적의 시간관리가 가능해졌고, 생산과정의 각 단계가 그 앞 단계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 즉 ’Kan-ban‘이 가능해졌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그들은 생산과정 전체와 시스템을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 그들은 그 시스템을 ‘소유’ 하고, 통제해야하며, 시스템의 작동을 장악한다고 느껴야 한다. 그들은 생산의 개선과 합리화를 위한 방법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시스템의 총체적인 조직과 절차에 대한 가능한 개선책을 항상 숙고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은 조언을 듣고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즉 노동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책임에 대해 질문하고, 학습하고, 발전할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한다.

 

 

벤자민 코리아트가 쓴 바에 의하면, 노동자는 동시에 생산자이자, 기술자이자,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 일정한 공정범위에 대한 책임자이자, 다양한 기능을 하는 개인이자, 노동 수단의 한 단위로서의 개인으로, 각각의 노동자는 자기가 속한 그룹의 구성원들과 접촉해야 하고, 생산 공정의 상하라인을 담당하는 다른 그룹과 접촉해서 공동노력의 총체적(collective)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생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노동은 이제 노동자들의 다양한 노동 중 한 측면에 불과하다. 그것은 더 이상 가장 중요한 측면이 아니라, 단지 생산품, 비물질적인 것의 물질적 적용과 지속, 지적인 노동, (즉 생각, 협의, 정보 교환, 관찰과 지식의 수집)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지적노동은 생산의 맥락에서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것 만큼이나 노동 전에도 수행되는 것이다. 요컨대, 생산적 노동은 노동자들로부터 ‘일반적general 사회 지식’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생산성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생산의 직접적 힘’으로 생산과정에 들어간다. 우리는 다음 단계에서 이 ‘일반 지성’에 대해 다시 논할 텐데, 대부분의 맑시스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일반지성’은 비물질적 활동에 지배를 받는 경제에서는 노동력의 지배적 형식이 되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이것은 포스트 포디즘 기업의 이상적 모델이다. 그러한 기업에서 조직의 패러다임은 상호교차적인 흐름들의 네트워크, 즉 자체 조직된 집단들(그중 어떤 집단도 중심을 차지하지는 않는다.)에 의해 그 흐름들의 교차점에서 조정되는 네트워크의 패러다임으로 대체된다. 서로 다르게 조직된 시스템(마치 포드주의 모델처럼)대신에, 우리는 중심이 없는 자기 조직 시스템(이것은 신경계와 비슷하다.)을 가지고 있다. 이는 즉 상호교차적인 네트워크가 모방하려는 모델이기도 하다. 이 개념이 노동자의 힘에 전례 없는 여지를 열어주는지 , 그리고 그 개념이 노동 안에서 그리고 노동으로부터의 가능한 해방 양 쪽 다를 예고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또는, 오히려 그 개념이 노동자들에게 경영의 역할과 경쟁의 명령 둘 다를 맡기면서, 또 회사의 이익을 그들의 건강 및 생명까지를 포함한 모든 것보다도 우선시하게 하면서 노동자를 새로운 단계에 예속시킬 것인가? 그 개념은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 새로운 봉건제(노동자는 회사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과 동일시하라는 의무를 지는 자랑스러운 가신이 되는 그러한 봉건제)를 도입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인가? 혹은 그 개념은 그 안에 노동자 -이들은 회사의 자본적 소유를 한물가고 기생된 구조로 보게 될 것이다.- 에 의한 힘의 총체적 장악이라는 씨앗을 품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후기 포디즘의 원칙들이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적용 되는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맥락에 광범위하게 의존한다. 후기 포드주의 원칙이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적용되는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맥락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벤자민 코리아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겪고 있는 획기적인 전환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조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이다. 포디즘의 위기와 붕괴 그리고 포디즘의 특정한 타협은-심지어 오늘날에도- 힘의 균형이 피고 용자와 그들의 대리인에게 불리한 조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업들에게 혁 신적 과정에 착수하도록 하는 동기를 거의 주지 못한다. 그 동기란 너무나 작은 것이어서 이미 하 고 있는 것만을 더 확고하게 할 뿐이다. .....

 

 

그리고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적 방식이 사라진 모든 곳에서는, 포스트 포디즘은 노동자에 의한 노동의 재전유를 예고하는 것으로도 나타나며, 노동자에 대한 예속과 노동자의 가신화로의 퇴행으로도 나타난다. 그러한 양 측면은 언제나 나타난다. 포스트 포디즘의 해방적 성격은 노동자가 요구하는 개입이 노동조합(역사적 패배에 의해 아직 약화되지 않은)에 의해 타협될 수 있는 드문 경우에만 얻어질 수 있다.

 

 

 

 

uddevalla

 

 

이러한 케이스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볼보의 우데발라 공장이다. 이 공장의 구상과 창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노동조합이었다. 그 노동조합은 테일러주의에서 경영자를 제거하고 노동자들에게 작업분배 및 시간 관리를 포함한 노동조직에 대한 진정한 통제권을 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 노동조합은 고텐부르그 학자들(최적의 노동조건을 지닌 조합단위를 구상할 책임이 있는)이 충족시켜야 할 4가지 요구사항을 정했었다.

 

 

 1. 노동은 지정된 노동 구역에서만 행해져야 한다.

 2. 작업속도에 대한 규제가 없어야 한다. 그 의미는 노동자는 중앙에서 프로그램화된 규칙 적인 속도에 의해 흘러가는 라인에 의해 부과된 속      도    (칼마에서 여전히 그런 것처럼)가 아니라, 자기 속도대로 일하고 움직일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3. 작업 사이클은 최소 20분은 되어야 한다.(칼마에서 4분, 독일공장에서 2분인데 반해서) 그것은 각 노동자들이 자기 작업벨트위의 작업의 다양하고 복잡한 세트에 책임이 있다는 걸 의미 했다.

 

4. 대개 감독자나 기술자에게 부과되는 간접 노동은 노동자들의 작업에 통합되어야 한다. 그러한 간접노동은 그 중에서도 자재조달, 부품이나 장비들의 준비 및 조직화, 질에 대 한 통제, 최종 점검과 조정, 신입사원의 훈련, 그룹 리더쉽 등을 포함했다.

 

 

그 목적은 ‘자기 자신의 노동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제품과 기계의 디자인에 대해서도 역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생산결정에 의견을 내고 궁극적으로 생산결정을 경제적 우선권과 소비모델에 대한 노동조합의 생각에 종속시키려 하는 노동조합에게는 특히 중요했다.

 

 

우데발라는 8명의 조립 노동자와 판매점을 이어주는 한 명으로, 즉 9개의 강력한 노동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원들의 적성과 희망에 따라, 각 그룹은 전체공정에서 1/4, 1/2, 3/4, 또는 전체의 조립을 담당할 수 있다.(전체를 조립 하는데는 총 열 시간이 필요하다.) 보너스 제도는 노동자들이 전체 차를 조립하는 방법을 익히도록 동기를 제공했다. 한 팀의 8명 각각은 다른 멤버와 한 팀을 구성하면서 다른 멤버와 교체됨으로써 노동을 더욱 다양하게 하기 위해 적어도 공정과정의 1/4은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그룹은 어떤 이유로 구성원 중 한 둘이 빠졌을 때에도 돌아가야 했다.

 

 

작업장의 조직은 특별히 ‘자발적 유연성’에 대한 여지도 허용했는데, 이는 곧 그룹의 각 구성원들은 사전에 동료들과 조정을 했을 경우 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하루당, 주당 혹은 한 주에서 다음 주까지 노동의 작업속도를 다양하게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한 달별로 정해진 표준도 다양화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각 그룹은 옴부즈맨 제도도 가지고 있었는데, 옴부즈맨은 그와 연관된 훈련을 받은 모든 멤버들이 차례로 거치는 자리이다. 각 그룹의 모든 구성원들은 역시나 차례대로 탈의실에서 멤버들의 작업복을 세탁하는 일을 했다.

 

이런 방식으로 노동과 생산품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고, 노동의 소외를 초월하기 위한 세가지 조건이 부분적으로 충족되고 있는 중이다.

그 세 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노동자 스스로에 의한 노동의 자기 조직화, 거기서 노동자는 생산적 협업에서 스스로 능 동적 주체가 된다.

 

2. 노동과 협업 방식; 모든 사람들이 수행하는 동시에, 자기의 능력과 기술을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자율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 그런 노동과 협업 방식.

 

3.생산품을 통한 노동의 물질화(materialization); 즉 노동자는 제품을 자기 행위의 수단과 목표로 인정할 수 있다.

 

 

주로 이 마지막 지점과 관련해서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 계속되었다. 무엇을 생산할지 정하는 생산 결정만은 유일하게 자본의 대리인의 손아귀 안에 남아있었다. 제품의 질은 전례 없는 정도로까지 노동자 집단의 개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그러한 개입(그 개입이 비록 조건적이고 타협된 것이긴 해도)은 여전히 생산결정에 종속돼 있었다. 노동자나 시민/소비자들이나 그 생산결정에 대해서 논의한 적은 없다. 노동의 목표는 노동자들에게 부과되고, 노동자들에게는 은폐된 노동의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런데 그 목표와 의미는 결국은 자본의 안정화인 것이었다. 따라서 필립 자리피안이 주장한 것처럼, 포스트 포디즘 노동자들의 노동은 각각의 노동자들이 ‘그 행위에 선행하는 맥락을 파악할 수 있고’ 그 맥락을 통해.....소비자들에게 종속된.....‘생산체계’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알아차릴 수 있다는 사실의 결과로서 완전한 의미를 띤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성급한 것이다. 사실 가능한 가장 좋은 관점을 취하자면, 그 생산체계는 구매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개인적 필요를 위해 고안된 상품의 개인 사용자들에게 종속되어 있다. 늘 그렇듯이, 이것은 대중교통체계의 발전을 배제하는 타협이며, 더 일반적으로는 집단적 수단에 의해 집단적 수요의 비물질적 충족을 배제하는 타협이다.

 

 

이제 자본과 살아있는 노동간의 적대적 정치관계는 생산결정의 층위에 놓여있다. 그 층위는 욕구의 내용과 욕구 만족의 방법이 결정되는 층위이다. 정치적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생산의 사회적 이용과 목적을 결정하는 힘이다. 즉 이것은 곧 그 힘이 목표하는 소비양태와 그 소비 양태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적 관계이다.

 

 

우데발라 공장은 1984년에서 1988년 사이에 계획되고 세워져서 완전고용시기인 1989년에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 시기에 볼보는 생산성과 제품의 질에 대한 관심에서, 여전히 젊고 잘 훈련되고 높은 동기를 가진 노동력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우데발라 공장은 1993년에 폐쇄되었다. 그 사이 경제적 상황은 바뀌었고 사회적 힘의 균형은 역전되었다. 즉 스웨덴 실업률은 1990년 1.8%에서 1992년 7%, 1994년에는 10%를 넘어섰다. 1960년대에 30%를 넘었던 이직률은 1990년에는 11.5%로 낮아졌고 1993년에는 5%에 이르렀다. 노동력을 유지하고 노동자들의 개입을 보장해 주기 위해 매력적인 노동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비록 우데발라의 생산성이 칼마보다 높았고 전통적인 공장에 비하면 훨씬 높았으며, 제품의 질도 다른 공장에서 생산된 것보다 훨씬 훌륭하긴 했지만, 경영자 측이 결국 폐쇄하기로 한 것은 발전의 전도사였던 바로 그 모범적인 공장이었다.칼마도 이듬해 문을 닫았다. 장 피에르 듀란드는 이 결정에 두 가지 설명을 제공한다.

 

우데발라에서 사라졌던 반복적인 업무 때문에, 그 공장은 보다 철저한 자동화로 나아갈 수 없었다. 반면 겐트 공장에서는 린생산방식을 유지한 공장과 마찬가지로, 반복적인 업무는 여전히 존재했고, 이것은 이후에 완전한 규모의 로봇화로 발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조립라인의 규정 속도와 중앙 프로그램을 폐지함으로써, 우데발라 공장의 유연한 작동은, 다른 어떤 것 보다도, 노동력의 개입과 헌신에 의존했다. 그들은 더 이상 어떤 위계적 통제 및 힘에도 종속되지 않았고, 다른 공장들(노동자들을 미리 프로그램화된 요소를 가진 시스템에 종속시키는)에서 노동자들에게 부여하는 제약에도 종속되지 않았다. 요컨대, 생산에 미치는 노동자의 힘은 결국 의미 없이 위험하게 확대된 것으로 보였다.....세계화와 실업이 자본으로 하여금 분리되지 않은 권력을 다시 되찾게 했다. 이것이 그들이 수행하게 되어있는 역할이었다.

 

 

 

 

Subjection

 

 

코리아트가 표현했듯이, 문제는 포스트테일러주의의 해방적 잠재력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넘어서는 움직임에 의해서 실현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본은 어떤 포스트테일러주의의 원칙을 적용한다. 그 원칙 중 하나는 자본이 노동자들이 그들에게 허용된 제한된 힘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비했었다는 것이다. 일본, 미국, 그리고 유럽에서 린생산방식의 원칙들-혹은 그 원칙들의 일부-을 채택했던 기업들은 노동조합 가입전력이 없는 젊고, 매우 신중하게 미리 뽑은 노동자들만 고용한다. 특히 영국에서는 고용계약 때 한 가지 약속을 강요하는데, 그것은 해고의 고통이 있더라도 결코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회사가 만든 어용 조합 외에는 가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한 마디로 말해, 그들이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은 노동자에게서 계급정체성을 박탈하고 보다 넓은 사회에서의 위치와 보다 넓은 사회에서의 소속감을 박탈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대신에, 기업들은 그들의 젊은 노동자들에게 기업문화에서 파생된 정체성을 제공한다. 기업문화는 여러 다른 층위에서 각각의 다른 기업들에 의해 개발되는 상징주의이다. 예를 들어그 기업의 직업 훈련의 품질, 특정한 내부용어와 행동 양식, 특정한 드레스 코드, 즉 일본에서 특히 선호하는 기업 유니폼에 근접한 드레스 코드 등이다.

 

 

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사회통합에 대한 추구는 계속적으로 좌절된 그런 해체된 사회에서는, 기업이 심어놓은 ‘기업문화’나 ‘기업에 대한 충성도’가 젊은 노동자들에게 보다 넓은 사회의 소속감에 대한 대체물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것은 불안감의 일종의 도피처가 된다.

 

기업은 그들에게 수도원이나 종파, 작업공동체가 제공하는 것과 같은 안정을 제공한다. 회사는 젊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몸과 마음을 회사에 바치기 위해 모든 것-다른 어떤 형태의 충성, 개인적 이익, 심지어 개인적 삶까지-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그 대가로 회사는 그들에게 정체성, 사회적 위치, 개성, 그리고 그들이 자랑스러워할 직업을 제공할 것이다. 그들은 ‘대가족’의 구성원이 된다. 회사와 노동집단과의 관계가 유일한 사회적 관계가 된다. 그것은 노동자의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인간 전체를 움직이게 한다. 따라서 언젠가 더 이상 그 노동자가 회사의 신뢰와 팀 동료들의 배려(이 두 가지는 노동자가 작업 수행을 개선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를 받지 못한다면 그는 자기 가치를 완전한 상실하게될 위험을 내포한다.

 

 

따라서 포스트 포디즘 노동자들의 노동 안에서의 실질적인 해방은 강화된 사회적 통제에 수반된다. 그러한 통제는, 코리아트가 말하듯이, 오스트라시즘(도편추방제)이라는 특정형태를 띤다. 이는 곧 개인이 그룹의 순응주의적, 전체주의적 압력에 종속되는 것을 뜻한다. 통합된 공장, 즉 합작회사라는 개념은 준봉건적 방식으로 보아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다. 그 방식은 회사가 노동과 충성의 공동체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그 공동체 안에서는 사회적 적대나 이익의 충돌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그러한 회사는 공동의 이익 및 모든 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게 되어있다.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문제는 모든 관계자들의 주의 깊은 조사를 바탕으로 합의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

 

포디즘과 비교해보자면 여기에는 명백한 퇴보가 있다. 즉 도요티즘은 현대적 사회관계를 전근대적 사회관계로 대체한다. 포디즘은 사실 살아있는 노동과 자본의 각각의 이해관계의 특수함 및 그 둘간의 적대감을 인정하는 한에서 사실상 현대적이다. 기업과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적대적 관계였고 이해당사자들에게서 계속적으로 검토되는 타협을 요구했다. 노동자는 기업에 속하지 않았다. 노동자는 기업에게 노동계약에서 정해진 시간, 기간, 조건으로 규정된 노동에 대한 의무만을 지고 있다. 그들은 기업에게 업무완수를 위해 자신을 내주어야할 의무가 있는데, 그 업무란 관련된 특정 목적에 헌신하지 않으면서도 수행할 수 있는 그런 업무일 뿐이다. 그 목적의 수행은 미리 정해진 작업 절차에 의해 보장되었는데 이런 작업절차들은 작업자의 의도, 개성, 호의와 무관한 결과를 낳도록 디자인된 것이었다. 그러한 결과는 그 노동자들 개인에게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은 작업하는 노동자들의 주관적 개입을 요구하지 않았고 요구한다 해도 그것은 우연일 뿐이었다.

 

주체로서 그들의 소속감, 즉 노동조합이나 계급이나 사회에 대한 소속감은 기업에 대한 속속감보다 더 강했다. 사회적 정치적 시민의식에 내재한 권리는 그들의 노동, 능력, 그들의 사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노동자로서의 권리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그들은 에너지의 상당부분을 그 자신을 위해 유지했고, 그 상당부분은 생산의 도구화 즉 착취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되었다. 그들은 공동행위와 타협 그리고 노동법의 한정된 영역에서는 소외를 조건적으로 수용했다. 포디즘의 생산관계의 갈등의 역동은 자본이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더 제한하고 착취의 범위 역시 보다 크게 제한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포스트 포디즘에서 첫 번째로 중단되고 역전된 것이 바로 이러한 역동이었다.

 

 

경쟁의 필요라는 명목으로, 포스트 포디즘은 포디즘 기간 동안 생산을 담당해야했던 기반사업을 되찾았다. 그것은 노동법이나 단체교섭 합의서의 조항들에 점점 더 큰 구멍을 만들었다. 피고용자는 계급이나 사회에 충성하는 것보다 회사에 더 많이 충성해야 하고,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권리는 사회 경제적 시민권에 의해 부여된 권리보다 훨씬 더 커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기업은 기업의 목표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인격적인 헌신을 요구했고, 언어 능력, 학습, 예측, 분석력을 갖춘 온전한 인간을 회사의 목표를 위해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시켰다. 기업은 우선 개인 자체와 그들의 헌신을 샀고, 그런 다음에야 그들의 추상적 노동에 대한 능력을 발전시켰다. 개인의 형체를 만들고 길들였으며 ‘그들의 시야를 공장에만 머물게 했다. 공장에서 펼쳐지는 주체성은 자유로운 주체성의 반대편에 있었고, ’사물들의 세계‘에 등을 돌린 채로 있었다. 그것은 노동자라는 주체의 생활세계는 기업 체계의 목표와 가치에 둘러싸여져 있기 때문이다......기업논리에 점령되지 않은 어떠한 신체적 심리적 공간도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추상적 노동의 왕국을 영영 떠났는데, 추상적 노동은 피고용자와 사용자의 인격과 무관한 비인격적 업무로 수행되기 때문에 맑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본주의 이전의 개인의 복종 관계에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우리는 인격화된 ‘봉사’로 되돌아왔는데, 그것은 공식적인 용어로 묘사해 계약의 형태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파울로 비르노가 표현하듯이, 인격화된 봉사는 보편적인 개인의 의존을 바탕으로 노동자의 사용주에 대한 관계를 두 가지 의미에서 재정립한다. 첫 번째 의미는, 노동자는 익명의 강제력을 지닌 규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개인에게 의존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의미는종속되는 것은 전인격, 즉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한 마디로 유적 존재로서의 개인인 것이다.- 그 결과는 전반적인 굴종의 노동 즉, 총체적 예속이다. 어느 누구도 타인과의 관계 또는 그의 언어능력이 유급노동의 상태로 환원되는 사람만큼 불쌍하지는 않다.

 

 

이런류의 분석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즉 전인격의 완전한 종속은진취성, 창조성, 자율성과(노동자들이 공동작업에 전인격을 바치면서 함께 바치는 특성들)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 조사하고 숙고하고 계획하고 토의할 것을, 즉 생산의 자율적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자본은 노동자로 하여금 정해진 한도 내에 자신의 자율성을 가두고 노동자들의 자율성이 이미 정해진 목표를 향해가도록 명령한다. 마우리조 라자라토는 이러한 모순을 다음과 같이 아주 잘 요약한다. ‘ “능동적 주체가 되어라”는 오늘날 서구 사회에 울려퍼지는 새로운 명령이다.....너는 자신을 표현해야하고 말해야하고 소통해야하고 협력해야 한다.......그러나 의사소통적 관계는 내용과 형식 두 가지 면에서 이미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사소통능력은 기호화된 정보가 특정 속도로 순환되어야 하는 기술체계의 역할(봉사에 있어서의 도구-서비스의 도구)을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라자라토가 보듯이, ‘주체는 단지 암호화되고 해독화되는 장소이다.....이런 의사소통 관계는 주체의 고유성을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특성을 제거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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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사

 

뭐라도 해야돼....

 

불안해...

 

그래서 가만 내버려 두지 못하는 거야

 

너 말이야 !!!

 

바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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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넘어선 자본 읽기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일부 발췌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생산과정에서 노동력과 생산수단은 자본을 구성하는 핵심적 수단이다. 그래서 이 양자의 비율을 자본의 구성이라고 부른다. 자본의 구성을 표시하는 방법에는 크게 세가지가 있다.

☆소재적 측면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량의 비를 표시하는 자본의 기술적 구성

☆가치의 측면에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를 표시하는 자본의 가치 구성

☆기술적 구성을 가치량으로 표시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유기적 구성이 증가한다는 것은 가변자본에 비해 불변자본의 비율이 더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 노동자에 비해 기계의 비중이 더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과 같은 정보혁명시대에는 불변자본의 비율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자본이 축적되고 생산성이 상승하면서 이처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승하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는 일반적 법칙이다. 이를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적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자본주의적 축적 그 자체가 상대적으로 과잉인(즉 자본의 평균적인 자기증식욕에 필요한 것보다 더 큰 규모의)노동인구를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자기 스스로 축적하면서 지속적으로 과잉인구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잉인구는 자본이 손쉽게 구할수 있는 노동인구가 된다. 즉 노동력에 대한 추가적 수요에 대비한 일종의 산업예비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과잉인구의 존재양상을 그 처지와 조건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한다.

1. 유동적 과잉인구-산업부분에서 고용되었다가 해고되어 다시 고용되기를 기다리는 노동자

2. 잠재적 과잉인구-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따라 도시로 나와 노동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로 자본주의 초기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과잉인구

3. 정체적 과잉인구- 불규칙하고 불완전한 고용, 임시 고용, 가내노동이나 날품팔이 노동등과 같이 현역노동자와 산업예비군에 동시에 속하는 하층민들

4. 과잉인구의 최저 침전층으로 부랑자나 극빈민, 고아, 불구자등 대부분 고용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상대적 과잉인구의 창출

 

여기서 맑스는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을 경제학적 법칙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인구학적 법칙이라고 해야할 기이한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이,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치법칙의 전제조건임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의 축적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비상품화하는 방식으로 상품화하며, 노동을 탈가치화하는 방식으로만 노동을 가치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의 권력이란 노동하지 않는 삶을 죽음이란 극한값을 향해 수렴하게 하며 작동하는 권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에 스스로를 판매함으로써만 생산수단을 이용할수 있는, 반대로 그렇지 못하다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그런 조건 위에서만 작동한다. 노동력을 상품화하는 조건과 동일한 이런 조건은 그대 서구의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창출된 것이다.

 

 

 

 

실업화의 압력

 

김수행 자본론 1권 873p

실업자들의 압력은 취업자들로 하여금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며, 따라서 일정한 정도까지는 노동의 공급을 노동자의 공급과 무관한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토대위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수요 및 공급의 법칙의 작용은 자본의 독재를 완성ㅎ나다.

 

 

 

김수행 자본론 1권 881p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을 언제나 축적의 규모및 활력에 알맞도록 유지한다는 법칙은 헤파이스토스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결박시킨 것보다도 더 단단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결박시킨다.

 

 

 

자본론 1권 653p

자본주의적 착취의 욕구를 항상 충족시켜주기 위해 비참한 상태에 묶어두고 있는 산업예비군이라는 괴물은 [어떤 종류의 노동이라도 할 수 있는]개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즉 부분적으로만 발달한 개인[그는 다만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기능의 담지자일 뿐이다]은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그에게는 각종의 사회적 기능은 그가 차례차례로 행하는 각종의 활동방식에 불과하다]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노동하는 동물 homo faber

 

자본의 요구, 노동자의 욕망

 

 

자본론1권 883p

맑스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말을 인용한다

노예제에서는 사람들을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근면하게 하는 폭력적 방법이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욕망의 노예이기 때문에 노동(즉,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무상노동)을 강요당한다.

노동의 판매는 인간의 자유의사다. 왜냐면 내가 아니어도 자본을 위해 충성할 ‘과잉인구’가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의 강제적 압제는 개인의 실존적 선택으로 그 양태를 변모시킨다. 자본의 요구는 노동자의 욕망이 되는 것이다.

 

자본과 노동의 적대→노동자들간의 적대

 

사르트르- 지옥이란 바로 타인들이다.

 

 

정보혁명이후의 자본의 착취

새로운 양상의 결합노동을 만들어내고 있음.

가령 소비활동을 통해 대중의 감각과 취향을 착취하는 것은, 소비와 결부된 욕망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그와 결부된 활동의 창조성이 크면 클수록 유리하다.

예)휴대폰을 쓰는 구세대와 아이폰을 쓰는 신세대

따라서 자본은 대중의 자율성과 창조성이 확장되는 것을 이용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일정한 한계안에 가두고 통제해야 하는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

 

 

생산이 공장의 범위를 넘어 전사회적 범위로 확장되는 것, 생산이 노동없이 가능하게 되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이제 노동없이 살수 있게 되었음을, 노동한다는 생각없이 진행되는 일상 자체가 생산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바로 노동이다.!!!

 

 

 

S.Aronowitz 아르노비츠 = 과거에 생산성을 추구하는 경제적 팽창은 좀더 많은 일자리의 증가와 임금의 상승을 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전지구적 고도기술경제에서는 노동자는 이른바 경제적 재구조화에 의해, 그리고 레이저, 로봇, 수치제어기계, 전자통신장비 및 워드프로세서 등과 같은 컴퓨터화된 기계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post work, 42p)

 

 

 

제레미 리프킨-노동의 종말

대다수 산업국가의 노동력이 75%이상이 단순반복작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런 작업은 자동기계나 로봇, 컴퓨터에 의해 수행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기계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하면서 레온티예프(W.Leontief)의 말을 인용한다. “보다 정교한 컴퓨터의 도입으로 인해 마치 농경시대에 말의 역할이 트랙터에 의해 감소되고 제거된 것처럼,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로서 인간의 역할이 감소하게 될 것이다. -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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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이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일부 발췌

 자신의 오빠를 예를 갖춰 매장하는 것이야말로 안티고네에게는 최고로 중요한 문제였고 이를 위해 다른 모든 세속적 욕구는 포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포기한 것들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기는 안티고네는 숭고함의 정형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물학적 생을 넘어서 존엄성 자체마저도(안티고네에게는 있었으나 여기서는 가질수 없는) 희생을 강요당할 때가 그러하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배반으로 모든 것이 무가치해져버린 인간은 세속적 쾌락조차 즐길수 없게 된다. 152p

 

진정한 영웅은 자신의 행위가 이후 사태에서 반역으로 매도되고 그로 인해 자신은 제거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불가피한 타협을 실행한 사람이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공헌이자 안티고네를 넘어서는 비극인 것이다.

 

 

엘리엇의 시 [대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Gathedral]

“모반의 최고형식, 그릇된 이유에서 올바른 일을 하는것, -네가 올바른 일을 할때조차, 너는 그 반대의 것을 노리고, 그러니까 네 바탕의 사악함이라는 진정한 본성을 감추기 위해 그 일을 한다. ”

 

 

니콜라스 말브랑슈

나는 주관적으로 덕이 많을 수 있지만 그것이 신의 시선아래서 나의 객관적인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는 결코 보장할 수 없다. 나의 구원을 결정할 하나님의 은총내리심은 전적으로 객관적인 법칙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물리적 자연법칙에 비견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스탈린주의하의 공개재판도 이와 유사한 객관화의 또다른 판본이다.

나는 주관적으로 결백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당의 은총의 손길을 받지 못한다면 내가 쌓은 모든 윤리적 고결함은 공산주의적 대의에 반하는 프티부르주아적 휴머니스트의 그것에 지나지 않을것이므로 나는 주관적 결백성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객관적인 죄인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에 전체주의의 참된 비극이 숨어있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의 문제가 공산주의적 대의에 대한 냉혹하고 자기말소적인 헌신에 있으며 이것이 사람들을 괴물스런 윤리적 자동기계로 변모시켜 인간의 공통적 감정과 정서적 동감을 망각하게끔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에 저항해야만 한다. 사정은 그런주장과 정반대이다.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의 문제는 그들의 윤리적 태도가 충분히 순수하지 못했다는데 있으며 그들이 도착적인 의무의 경제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나도 잘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나의 의무인 것을.....’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

이는 윤리적 엄격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어이다.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반드시 해야하므로! Du kannst, denn du sollst!'

이것은 의무를 다하는 것에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는 문장으로 귀결된다.

의무를 수행하는데 변명거리가 되어주는 의무의 참조근거는 위선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제거되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선생의 체벌-나라고 애들 패는게 좋은 줄 아쇼? 그게 내 의무인걸 어쩌겠소

 

여기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자신의 큰 타자의 의지를 위한 순수한 도구로 자리매김하려는 도착적 태도 바로 그것이다.

그 일은 내책임이 아니오. 나는 보다 높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오. 그래서 나는 책임으로부터 면죄되어야 하오.

책임은 내가 지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마음껏 고통을 가할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칸트 윤리학이 금지하는게 바로 이 것이다. 주체가 단지 외부에서 부과된 것을, 즉 객관적인 필연성을 실현했을 뿐이라면 그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칸트의 답은 객관적 필연성을 주관적으로 추측해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 그에게 부과된 것으로부터 쾌락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그는 유죄다.

 

 

레닌의 위대성

멘셰비키가 역사의 발전법칙이라는 실증적 논리가 만사를 포괄하는 근본적토대라고 여기며 객관적 법칙을 신봉한데 반해, 볼세비키는 ‘큰 타자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카치가 찰나포착이라 불렀던 기예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요구를 순화해 체제에 포섭하기 전에 그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예이다. 루카치 주장의 요점은 행동을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환경들로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립적인 객관적 조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인 판사 슈레버의 편집증에 대한 분석에서 프로이트는 우리가 보통 광기(주체가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다고 편집증적으로 믿고 있는 음모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이미 일종의 회복의 시도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완전한 정신적 와해 이후에 나타나는 편집증적 구성은 주체가 자신의 세계에 모종의 질서를 재구축하려는 즉 인식적 지도그리기를 가능케 하는 어떤 준거의 틀을 다시 세우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가 지적한 바 있듯이, 현실사회주의는 그것의 참상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지배에 효과적인 위협을 가함으로써 적어도 지난 몇십년간 자본주의의 대변자들이 겁을 집어먹고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이게끔 만들었던 유일한 정치세력이었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하듯, 오늘날의 모든 공산진영은 그 참상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해방된 영토이다.

 

 

 

203페이지부터

지젝의 노동에 대한 관점이 드러남

의미의 장 그 자체의 좌표를 변경시키는 개입, 즉 라캉이 누빔점이라 부른 것의 한 사례로서 노동의 개념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노동(물질적이고 산업적인 생산)은 공동체와 연대성의 특권적 지점으로서의 노동인 것이다. 이러한 이상에서는 노동은 단지 그 자체로 만족을 가져다주는, 생산을 위한 집단적 노력에의 참여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적인 문제들까지도 소속된 노동 집합체 안에서 토론될 때 비로소 올바른 관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노동을 제의화된 공동체적 행동으로 보는 전근대적 일의 개념이나 과거의 산업적 생산방식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찬양과는 혼동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의 이상에서 생산 집단은 자신들의 문제를 이성적으로 토론하는 근대적 개인들의 집합체이지, 제의화된 고대적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지각 방식속에서는 섹스가 아니라 노동 자체(상징적 행위들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육체노동)가 대중들의 눈앞에서 가려져 있어야 할 외설적 추잡함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노동과정을 지하나 어두운 동굴속에 위치시키는 이러한 전통은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혹은 브라질의 부품조립라인에 이르는 제3세계의 노동현장에서 땀흘리는 무수한 익명의 노동자들이 ‘비가시성’영역으로 가려져 있는 오늘날에 이르러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그렇기에 서구에서는 사라지는 노동계급이라는 헛소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디서나 쉽사리 노동의 자취들을 찾아볼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통이 노동을 죄와 등치시킨다는 점이며, 고된 일로서의 노동은 원래부터 대중들의 눈앞에서 감춰져야만 할 추잡스럽고 죄스런 행동으로 치부한다는 점이다.

 

 

209페이지

이러한 조건하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이라는 맑스의 용어를 되살려 보자. 생산력의 변화가 우리의 사회적 존재 전체, 즉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우리의 실천과 경험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맑스는 생산과정의 혁명적 변화들을 곧잘 정치적 혁명과 대비시키곤 했다.

해체주의적 흐름들(생산에서 상징적 행위로의 이전)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거꾸로, 즉 상징적 교환에의 참여와는 대립되는 것인 물질적 생산에로 초점을 되돌려 놓는일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개념적 재배치라는 과제를 앉고 있다.

 

정치적 전체주의란 아도르노가 주장했듯이 도구적 이성의 원리, 즉 기술에 의한 자연착취의 원리들이 사회로까지 확장되었을 때 사람을 신인류로 변형되어야 할 원자재로 취급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전체주의의 뿌리가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정치적 테러, 즉 전체주의가 정확히 말해 물질적 생산의 영역이 그 자율성을 부정당하고 정치논리에 종속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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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6일 수업

안드레스 아른트, 칼 맑스

제목 karl Marx 222p-226p

4.6 Andeutungen der Ökonomie des Sozialismus/Kommunismus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암시

 

 

 맑스의 방법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노동운동의 형태와 목적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소멸시킨다는 구체적 서술을 포기하도록 이끈다. 사회주의 체계를 정립하는데 어떠한 의견도 명확하게 정립된 것은 없다. 이것은 시민사회의 발전과 사회적 생산의 자연법칙적 발전에서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데, 한편으로는 계급투쟁의 발전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파리코뮌의 경험에 중점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추론을 할 수 있다. 맑스 논의의 불충분함은 그 양쪽을 분리해서 함께 고찰해야 그 의미가 고정이 될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더 많은 예시들이 나타나는 절들이 있는 『자본』에서 어떤 경제적 발전인지와 어떻게 시민사회의 계급투쟁의 요소가 나타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맑스의 서로 다른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통치관계의 재생산은 자본주의 안에서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면에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대립에서 알수 있으며, 따라서 정치영역을 통한 것은 부차적인 것이라는 것이 직면된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정치영역의 계급투쟁은 경제관계에서 초래한 혁명안에서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관계의 조건은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이론의 결함이 맑스 이론안에서 해명되는 것을 통해 유지된다. 경제관계의 재생산과 발전이 정치형태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는 처음부터 유효하다. 경제적 관계가 사회적 개인의 의식적 연관을 표명하는 사회안에서, 정치에 대한 고려는 유효하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사회적 노동력으로서 개인의 노동력이 지출되고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는 것을 통해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자본3권에 상응하는데, 눈먼 권력이 자연을 규제하는 것 대신에 공동의 통제아래 자신의 신진대사를 자연을 이용해 합리적으로 규제할 때 인간적 자연을 가치있고 적합한 조건아래서 최소한의 수고로 보전하게 된다.

이성과 공동의 통제로서 자기의식은 인간을 넘어선 인간의 정치권력을 확정하지 않고 어떻게 그리고 어떤 형식안에서 공동의 통제가 실천되는가의 문제를 설명한다.

 

 

 맑스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경제학의 문제를 풀지 않고도 정치의 적절한 형식의 전제를 경제적 영역의 문제 내부에서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정치경제학은 사회적 생산을 지향하는 욕구위에서 욕구의 총량과 그 본성을 넘어서는 논의를 하는데, 그것은 직접적인 욕구 자체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욕구에 따라서 사용가치로서 부를 생산하는 것은 생산의 목표이다. 목적 그 자체로서 객관적인 부의 생산의 확대가 무절제함으로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명백한 판단위에서 생산의 확대를 구체적으로 단념하는것으로 생산의 지배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을 위한 결말에서 기술의 포기는 산정할 수 없거나 부정적으로 산정될 것이 명백하다; 자유로운 여가를 위한 필연적 부로서 일반적인 생산의 제한이다. 그것을 위한 전제조건은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는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의 역사적 권력을 넘어서서 욕구의 발전을 제한하는 것은 객관적 부의 방향으로 노동원칙을 세밀하게 형상화하는 것이다.

 

 

 맑스에 의하면 참된 부가 실현되는 공산주의적 생산양식의 자유의 왕국에서는 개인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부이며, 그것은 필요 노동이 최소한으로 할당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욕구의 양을 넘어서는, 일반적으로 더 많은 노동은 항상 있어야한다. 노동하는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기 전에, 사회적 총생산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첫째 생산수단의 대체, 둘째, 확대재생산의 수단, 셋째 자연재해등과 같은 상황에 대한 예비 기금이나 보험 기금의 마련, 그 외에도 넷째로 생산에 있어 관리비용의 절감, 다섯째 욕구의 사회적 만족에 대한 규정, 여섯 번째 노동무능력자 등을 위한 기금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과 다른 한편으로 공동체적 생산을 하는 개인들의 욕구가 공동체적 필요노동을 규정해야 하며, 맹목적 생존을 보장하는 필요의 만족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필연성에 근거를 두어야 하고, 그것은 공동체적인 필요로 인식되고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항상 상대적 욕구이다. 구체적 필요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지고, 필요노동의 단축 수단으로서 생산력의 증가가 이루어 질 것이다. 자유의 왕국은, 항상 필연의 왕국에 머무르는 물질적 생산의 영역을 넘어서 처음 시작된다. 그것이 자유를 위한 물질적 기초이며 전제조건이다; 이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점이 지향되어야 하고, 공동의 통제아래로 도달되어야 한다. 경제적 과정 안에서는 자본주의 이후 공동체로의 이행도, 역동적 구조로서 내부의 기능연관도 사유할 수 없다. 필연과 자유는 절대적 필연안에서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긴장관계안에 머물러야 한다. 공산주의는 선형적 역사진행의 종결점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창조하고 책임지는 최고의 단계에서 인간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다.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의 발전 때문에 그러한 구조가 가능함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화의 조건은 아니다. 보편적 필연성이 단번에 건너뛸 수 있는게 아닌한, 필연의 왕국안에서 구체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것은 실천적으로 실행되고 통제되는 사회적 실험이라는 조건하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러한 전제조건은 우선 공산주의 사회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즉 적절한 토대위에서 서서히 진전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자본주의적 사회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사회의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 면들과의 연관속에서, 즉 그러한 모태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전체노동의 구성요소로서 개인의 노동이라는 본질적인 차이가 경제적 지속의 토대로 존재한다. 다시말해, 의식에 의해, 계획에 따라 분배된다. 개인에게 분배되기 전에, 전체생산물의 일부를 분배할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개인적 소비를 위한 생산물의 분배는 노동시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등가교환의 법칙이다. 즉 가치법칙이다.

 

 

맑스는 여기서 분배의 올바른 통제기능만 생각해서, 상이한 사회적 관점과 개인욕구의 상이한 측면 때문에 생기는 갈등은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권리는 추상적,일반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시민의 동등한 권리이며, 각 개인들의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그러한 이유로 불평등하다. 따라서 가치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분배는 구체적 사회적 욕구, 다시 말해 차이가 인정되는 개인들간의 욕구를 지향하는게 아니라 욕구의 보편적 기준과 욕구충족의 수단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행기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개인적 욕구의 총량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시민의 권리지평은 생산과 분배의 연관에 대한 (기술적 경제적 통치학으로서)독립적인 지식이 직접적인 생산자사이를 분리시키는 조건아래에서 처음 위배된다. 정신적 육체적 노동의 정립이 사라진, 노동의 분리아래서 개인의 노예적 종속을 넘어서서 자신의 신진대사를 연합된 생산자들이 공동으로 통제하면서 그 조건은 폐지된다. 맑스가 말한 코뮨사회의 고차국면의 전제라고 불리는 이러한 측면은, 사회적 통제와 생산과 분배의 규제는 판단과정에서 생산자의 참가가 아니라 오히려 지적 통찰을 토대로 생산의 물질적 조건에서 생산자의 통치가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것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언급된 맑스의 인식은 어느정도 불명확한데, 한쪽 측면이 물질적 생산의 규정안에머무르는 필연의 피안으로서 자유의 왕국이라면, 다른 측면은 생활을 위한 수단으로서 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공산주의의 실현에서 삶의 욕구 자체로 노동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첫 번째 부분은 공산주의에서 경제적으로 조건지어지는 정치기구의 이론을 위한 공간을 만들게 하고, 두 번째 부분은 개인이 직접적으로 보편화의 준거로서 개인의 욕구와 사회적 판단이 합치하는 물질적 인륜성의 범주안에서, 사회를 사유하게 한다. 실제로 맑스의 이러한 성찰은 경제적 해방의 전제로서 미규정된 정치의 영역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러한 이론으로부터 공통의 양식으로 공산주의의 직접적인 경제적 조건이 추론되어지는게 아니라면 그것은 물질적 생산에 연관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개인적 욕구에 상응하는 생산력 발전의 가능성에 대한 명확한 윤곽인데, 거기는 욕구를 넘어서는 지배가 지양된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

 

 

 

 

자본3권 48장

Ⅶ. Abschnitt·Die Revenuen und ihre Quellen

48. Kapital·Die trinitarische Formel(828p)

 

 

 사회의 현실적 부나 재생산과정의 끊임없는 확대의 가능성은 잉여노동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잉여노동의 생산성과 그 생산조건의 풍부함이 많은가 적은가에 따라 이루어진다. 자유의 왕국은 외부적 편의와 총합이 규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의 행위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그 본성상 진정한 물질적 생산의 영역을 넘어서 존재한다.

이러한 영역에서 자유는 오로지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가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며, 그 신진대사가 장님을 인도하는 권능으로 그들을 지배하는 것 대신에 그 신진대사를 사회적 통제 아래로 가져온다. 그 신진대사를 최소한의 수고로 그리고 인간적 자연에 알맞고 적합한 조건아래서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필연의 왕국에 머문다. 그것을 넘어서야만 자기목적 자체로서 인간적 능력, 즉 진정한 자유의 왕국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은 필연의 왕국을 자신의 토대로 해야만 꽃피울수 있다. 노동일의 단축은 그 기본전제이다.

 

 

 

 

 

고타강령비판

Kritik des Gothaer Programms 20-21p

 

 

 

공산주의 사회는 스스로 현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전제로 하여 등장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회의 초기모습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낡은 잔재들이 여전히 들러붙어 있다. 공산주의사회에서 개별생산자는 자신이 사회에 제공한 노동량에 따라 자신의 몫을 제공받는다. 상품교환이 같은 가치물의 교환인 한, 여기에는 상품교환을 규제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가 지배한다. 하지만 그 내용과 형식은 변하는데, 그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동이외에는 어떤 것도 줄 수 없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 소비수단 이외에는 어떤 것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이러한 평등한 권리는 내용과 형식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르주아적 평등의 권리이다. 여기서 평등의 요체는, 평등한 척도인 노동으로 측정된다. 여기서 문제는 어떤 사람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거나 더 많은 시간동안 노동할 수 있다. 그런한에서 노동이 척도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불평등한 노동에 대해서 불평등한 권리로서 평등한 권리이다. 즉 그것은 내용상으로는 불평등한 권리인 것이다.

불평등한 개인들(만일 불평등하지 않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개인이 아닐 것이다.)이 동일한 척도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이 동일한 관점아래 놓이는 한에서, 즉 특정한 측면에서 파악되는 경우이고, 그것은 바로 그들이 노동자로 간주된다는 것이며,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도외시된다. 어떤 이는 결혼을 했고, 어떤 이는 자식이 많다...이러한 다양한 경우에 동일한 노동을 하고 동일한 몫을 분배받아도 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부유해지거나 가난해진다. 이러한 폐단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권리는 불평등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폐단은 코뮨주의 저차단계에서는 불가피하다. 권리는 사회의 경제적 형태와 이 형태가 제약하는 문화 발전보다 더 높은 수준일 수 없다.

코뮨주의 고차국면에 이르르면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도 사라지며, 노동이 생활수단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생활의 욕구가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사회적 부가 흘러 넘치면 그 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단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는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 사회가 실행될 것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Grundrisse-그린비출판사 김호균 옮김

자본에 관한장-고정자본과 사회의 생산력 발전 373-383p

 

 

생산과정에서 자본의 가치증식은 살아있는 노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가치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구별이었다. 하지만 가치의 증식은 자본의 발전단계에서 보자면 단지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 자본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생산과 유통의 교대를 통한 통일’ 자체가 하나의 운동이자 과정이며, 이 운동의 주체가 자본이다. 모든 자본은 원래 유통하고 있는 자본이며, 유통의 산물임과 동시에 유통을 생산한다. 유통과정 자체가 자본의 특수한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가치증식과정 자체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유통하는데, 여기서 ‘유통’은 단순히 ‘상품의 순환과정’으로서 유통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운동전체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고정자본은 유통하고 있지 않은, 즉 생산과정에 머무르는 자본이다. 그런 한에서 고정자본은 자본의 진행에 있어 하나의 과정, 하나의 단계이다. 자본이 생산과정에 머무르는 한, 그 자본은 유통할 수 없다. 자본이 유통 중에 머무르는 한, 그 자본은 생산할 수 없으며, 잉여가치를 낳을 수 없고, 자본으로서의 과정에 참여할 수 없다. 자본이 시장에 던져 넣어지지 않는 한, 그 자본은 생산물로서 고정되어 있다. 자본이 시장에 머물러야만 하는 한, 그 자본은 상품으로서 고정되어 있다.

 

생산과 상품의 순환 자체가 자본이며, 이 단계중 하나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고정자본이다. 자본은 항상 고정되거나 유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유통단계에 머물러 아직 회수되지 않은 부분은 그런 의미에서 ‘고정 자본’이다. 생산 수단이 고정자본인 것과 마찬가지 의미에서 말이다.

 

하지만 생산과 유통의 두 규정으로의 자본의 분해는 자본의 가치증식경향에 모순되므로, 자본은 고정 상태에 있는 국면을 줄이기 위해 애쓰게 된다. 이렇듯 자본의 가치증식 경향에 위배되는 자본의 고정성이야말로 자본을 더 많은 생산으로 몰아가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정’자본과 ‘유통’자본의 구별은 구체적인 운동의 과정, 즉 본래의 유통과정인 생산국면 외부의 자본운동을 취급할 때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본의 교대되는 형태는 이제 생산수단(고정자본)과 가변자본과 원료와 보조재료(유동자본)이라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존재양식으로 드러난다.

 

 

고정자본과 사회의 생산력 발전을 살펴볼 때, 핵심적인 문제는 노동 수단으로서 기계장치 또는 기계체제의 발달이다. 노동수단이 기계화되면 대상화된 노동은 살아있는 노동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며, 현실적 생산과정에서도 살아있는 노동을 자기 아래로 포섭하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대상화된 노동은 직접 생산물로, 노동수단으로 사용되는 생산물의 형태로 그리고 생산력 그 자체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제 사회적 생산력인 지식과 숙력의 축적은 노동에 대립해 자본에 흡수되며, 따라서 자본의 속성으로서, 고정 자본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기계 장치는 고정 자본의 가장 적합한 형태로 나타나며, 또 고정자본은 자본 그 자체의 가장 적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제 고정자본의 발전으로 기계장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정도를 측정하는 척도로 기능한다. 원래 생산물은 사용가치를 지니면서 동시에 교환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생산수단으로서 기계는 직접적으로 교환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즉, 생산 수단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 시간의 증가는, 상품 생산을 위한 노동시간이 생산시간 중 일부에 의해서도 충분하다는 것이 입증해 주는 것이다. 잉여노동시간이 필요노동시간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고정자본의 생산에 사용되는 노동시간은 생산물의 직접적인 생산 시간에 좌우된다. 즉, 생산과정에 사용된 노동시간의 성과가 상대적으로 더 커서 이제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 직접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상대적 잉여인구와 잉여생산이라는 것이다.

기계의 발전이 인간 자신이 수행하는 직접적 노동이나 인간이 노동하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에 독자적인 일반적 생산력의 전유가 생산과 부의 커다란 기초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사회는 가치법칙이 소멸해야 하는 사회이다. 이것은 자본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인간 노동의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때문에 노동해방의 조건이 된다. 이러한 고정자본의 비율확장은 유동자본이 자신의 상이한 국면들을 통과해 잉여가치의 감소를 초래하면서 필연적으로 증가한다. 요컨대 대공업의 생산력 발전에 비례해서 증가하자마자, 생산과정의 중단-고정자본의 미작동-은 자본 가치의 감소로 작용한다. 고정 자본은 대규모로 발전하자마자 생산과정의 연속성의 외적 강제조건이 된다.

여기에서는 노동자의 노동능력이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살아있는 노동의 활동이 기계의 활동이 된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노동을 흡수하던 자본은 이제 노동자에게 맞서게 된다.

 

 

살아있는 노동과 대상화된 노동의 교환, 즉 자본과 임노동의 대립형태로의 사회적 노동의 정립은 가치관계와 가치에 입각한 생산의 마지막 발전이다. 이것의 전제는 부의 생산의 결정적 요소로서 직접적인 노동시간의 양이다. 하지만 대공업의 발전으로 실제적 부의 창조는 직접적인 노동시간과 비례관계에 있지 않은 작동체들의 권능에 의존하고, 오히려 과학의 일반적 상태와 기술 진보 또는 과학의 생산에 의존한다. 노동은 더 이상 생산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생산 과정 자체에 감시자와 규율자로 관계한다.

 

수정된 자연 대상을 대상과 자신 사이에 매개고리로 삽입하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는 그가 산업적 과정으로 변환시키는 자연과정을 자신의 제어하에 놓여 있는 무기적 자연과 자신 사이에 수단으로 삽입한다. 그는 생산과정의 주행위자가 아니라 생산과정 옆에 선다. 이러한 변환에서 생산과 부를 지탱하는 커다란 기둥은 노동량도 아니고, 노동시간도 아니며, 사회적 개인의 발전이다. 직접적인 형태의 노동이 부의 위대한 원천이기를 중지하자마자 노동시간이 부의 척도이고 따라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의 척도이기를 중지해야 한다. 따라서 교환가치에 입각한 생산은 붕괴하고 직접적인 물질적 생산과정 자체는 불가피성과 대립성의 형태를 벗는다.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의 조건이 등장하고 여기에는 모든 개인들을 위해 자유롭게 된 시간과 창출된 수단에 의한 개인들의 예술적 과학적 교양등이 조응한다.

 

 

자본의 운동은 노동을 부의 유일한 원천으로 정립하면서 동시에 노동시간을 단축하려는 모순의 진행이다. 따라서 자본은 필요노동의 형태를 감소시켜 잉여노동을 증대시키려 한다.

 

자본은 한 측면에서는 부의 창출을 노동시간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온갖 과학과 자연의 힘을 이용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렇게 창출된 방대한 사회력들을 노동시간으로 측정하고자 하며, 이미 창출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한계 안에 이 사회력들을 묶어두고자 한다.

사회적 개인의 발전의 상이한 측면인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는 자본에게서 수단으로만 나타나지만, 실상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들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고정 자본의 발전은 부 일체의 발전 정도 또는 자본의 발전정도를 가리킨다. 고정자본, 즉 생산수단을 생산하려는 생산은 직접적으로 실현가능한 교환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따라서 갈수록 더 큰 부분이 생산 수단의 생산에 사용되는 것은 이미 달성된 생산성의 정도에 좌우된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고정자본으로서 기계의 발전이 가지는 자본의 자기파괴적 지양성이다.

유동자본의 경우 재생산은 유통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고정 자본의 경우 유통은 고정자본이 생산에서 사용가치로 소모되는 시간에 의해서, 즉 고정 자본이 재생산되어야 하는 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기계장치가 발전하면 할수록(내구성이 좋아지면 질수록) 고정자본의 회수율은 점점 더 오래 걸리게 되고, 이것은 유동자본의 회전수를 더 빨리 필요로 함을 알게된다. 유동자본이 회전되지 않는 것은 잉여가치의 창조가 잠시 중단됨에 불과하지만, 고정자본의 중단은 사용가치의 단순한 중단이 아니라 고정자본의 원래적 가치의 파괴이다. 따라서 고정자본의 발전에 따라 자본개념에 조응한 생산 과정의 연속성이 자본의 보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정립되고, 따라서 소비의 연속성과 지속적인 성장도 마찬가지로 정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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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넘어선자본1편-이진경 선생님 책보고 요약정리

자본을 넘어선 자본 강추입니다...ㅎ 물론 이진경 선생님의 견해에서 대해서는 가타부타 얘기하고 싶지 않구요...

정말 글을 쉽게 쓰시는거 같아요....자본(강신준 역)볼때는 잘 이해안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그부분들을 이해하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되더군요....ㅎㅎ

글구 제가 이해한 식으로 예시나 표현들을 바꿔 썼슴다....좀 허접하게 느껴진다면 제 이해도와 표현력의 문제이지 이진경 선생님이

이렇게 쓰신건 아니니 오해마시길..........

 

 

 

1. 상품

상품-인간의 온갖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물건/직접적인 대가를 받고 팔기위해 만들어진 물건

 

상품은 어떤 사물의 성질이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교환의 관계속에서만 상품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애인을 위해 부르는 노래는 상품이 아니지만 미사리 카페에서 부르는 노래는 상품이 되는 것이다. 노래는 노래일뿐이다. 특정한 조건아래서만 노래는 상품이 된다. 하지만 사물이 교환관계에 포섭되기 위해서는 유용성, 즉 사용가치가 있어야 한다. 아무 쓰잘데기 없는 사물이 상품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용성이 있다고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용가치가 있는 사물을 대가를 지불하고 교환하는 한에서 그 사물은 상품이 되는 것이다. 유용성 만땅인 공기는 사용가치가 있음에도 대가를 지불하지는 않지 않는가!!! 따라서 상품의 속성은 질적인 측면인 사용가치와 양적인 측면인 교환가치를 지닌다.

(왜 교환가치가 양적이냐면 얼마를 받느냐가 교환의 핵심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

 

 

상품의 생산

상품 탄생의 두 가지 종류

1-단순상품생산/소상품생산=상품으로 생산하게 아닌데 이후 그 생산물이 상품이 되는 경우.

ex)농부가 농사짓는 것은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쌀값이 폭락해도 농사는 짓는다. 하지만 밥만먹고 살지는 않으니까 먹고 남은 쌀을 시장에 ‘상품’으로 판매함으로써 나머지 생필품을 획득한다.

 

2-상품=걍 첨부터 팔려고 만든 상품으로의 상품생산

이것도 종류를 구분해야 하는데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이 그중 하나일 것이고, 방망이 깍는 노인의 방망이가 또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구분을 하는 이유는 자본주의적 상품은 양화된 화폐가치만 중요하기 때문에 결과만 중시하는데 반해 방망이 깍는 노인은 행위 자체에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에 과정을 중시한다.

 

 

가치와 노동

앞서 보았듯이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교환의 등가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교환을 비교할 척도가 필요한 것이다. 남극에서 싸구려 난로를 하나 사기위해 최신형 에어컨 100대를 지급한다해도 그것은 성립된다. 물론 적도부근의 열대지방에서는 고물에어컨 하나를 사기위해 최신형 난로 100대가 지급될 수도 있다. 여기서는 기후에 의해서 유용성이 결정되고 이것이 교환의 척도로서 기능한다.

이렇듯 교환을 위해서는 ‘교환가치의 등가성’을 결정해줄 척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담 스미스의 핵심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스미스는 상품들의 가치를 결정해줄 척도로서 노동시간을 제시한다. 근데 문제는 노동시간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되는데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된다. 두 가지 명제가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거를 설명하기 위해 스미스는 ‘사회적 평균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사회적 평균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균형가격이 교환의 사회적 척도로 등장하는 것이다. 리카아도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노동가치투하설을 제시하며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근데 리카아도 식으로 하니까 이제 현실사회에서 가격이 결정되는 양태를 설명하는데 애로사항이 생긴다. 어쨌든 모든 상품의 가치 척도, 즉 기준을 노동량이라고 보고, 노동만이 가치의 원천이라고 보는 것을 노동가치론이라고 한다. 후에 맑스는 이 가치론을 더욱 더 발전시켜서 ‘잉여가치’개념을 추가하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노동가치론을 발전시킨다. 자 이 골치아픈 문제는 난중으로 일단 패스하고 계속 간다...

 

 

가치개념의 발생

일단 앞서 나온 내용을 토대로 문제제기를 하나 해보자. 상품의 등가성 원리로서 교환의 척도를 노동시간으로 양화시켜서 설명할 때 요거 골때리게된다. 내가 견문을 넓히고자 겨울에 로마에 널러갔다. 거기 바티칸 박물관에 구경가면(이 띱때들이 일본어 오디오 가이드는 비치하고 한국 오디오 가이드는 비치안해놨다..) 시스티나성당이랑 연결시켜놨는데(고로 시스티나 성당만 따로 들어갈수는 없다.) 시스티나 성당 천정은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이고 벽화는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다. 졸라 크고 졸라 장엄하다..그리고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 가면 벨라스케스의 그 유명한 ‘하녀’그림이있다.(얼마나 유명하냐면 피카소가 자신의 기법대로 이 하녀그림을 재해석한 그림만 수십개일정도다.)

자 둘다 가격을 매길수 있나? 어떤게 더비싸나? 노동가치설대로 하면 당빠 미켈란젤로게 더 비싸것지.

그럼 미친듯이 그림을 그려낸 고흐의 그림은 노동시간이 쬐금 들어갔으니 싸구려인가?(고흐는 ‘광인’이라는 평가를 받을정도로 기록적인 수의 작품을 쏟아냈다.)

이렇듯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가치’개념은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제조건하에서만 발견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하에서 ‘가치’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제 맑스의 네 가지 가치형태론을 통해 자본주의의 가치메커니즘을 낱낱이 파헤쳐보자. 팍팍....

 

 

1. 단순한 가치형태-볼펜×1개=연필×2개

이거는 연필 두 개는 받아야 볼펜 한 개를 주겠다는 개념이다. 즉 볼펜은 연필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맑스에 의하면 이 관계는 ‘아직 양적인 관계로 환원되지 않은 가치’의 표현적인 관계이다. 여기서 볼펜은 자기의 가치를 연필로 표현하며, 연필은 이러한 가치표현의 재료가된다. 여기서 좌

변인 볼펜항은 상대적 가치형태이고 우변인 연필항은 등가형태이다. 우변이 좌변의 값어치를 표현하는 등가물의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등가는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양적인 개념의 등가가 아니라 질적인 개념의 등가이다. 즉 사용가치 간의 비교인 것이다. 이진경 선생님의 표현에 의하자면 여기서 등호는 영어의 be동사처럼 주어와 술어를 이어주는 논리적 등호인 것이다. 즉 양적 동일함(등가성)을 표시하는 수학적 기호가 아니므로, 수학적 습관대로 양변을 바꿀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남자다.와 남자는 나다.는 같은 문장이 아닌 것이다. 즉 아직 이 형태는 질적 형태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근데 스미스씨는 여기서 양적 관계를 끄집어낸다. 기회비용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볼펜 한 개를 만들때 연필 두 개를 만드니깐 둘은 양적으로 같은 개념이라는 비약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물건을 양적으로 비교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일한 단위로 환원한 뒤라야 비로소 양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고 맑스는 비판한다. 양적인 가치개념을 증명하기 위해 양적인 가치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순환의 오류가 아닌가!!!

결론: 핵심은 이 도식에서 좌우가 바뀌면 곤난하다는 거!!!!!!!!!!!!!!!

 

 

2. 확대된 가치형태-볼펜×1개=연필×2개

                                                    =바지×3개

                                                    =가방×4개

                                                    =책상×5개

                                                    =수저×12개

(여기서 볼펜의 값어치가 왜이리 높냐고 물으신다면 황금볼펜이라 말하겠어용~~부끄~~~)

 

자 여서 상대적 가치형태인 좌변항 볼펜은 자신의 값어치를 표현할 표현물을 다양하게 확장시키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변항들 각각은 오로지 좌변항과만 관계를 맺고 있지 지네들끼리는 관계를 맺는게 아니라는 거다. 왜? 서로를 양적으로 비교할 척도는 아직 없으니까.....질적으로 비교할려면 또 다른 바지의, 가방의, 책상의, 수저의 도식이 새롭게 필요한 것이다.

 

 

3. 일반적 가치형태

연필×2개

바지×3개

가방×4개 = 볼펜×1개

책상×5개

수저×12개

 

이 도식은 확대된 가치형태의 좌우변만 바뀐듯이 보이나 여기에는 엄청난 비약, 즉 사기와 구라가 넘실대고 있다. 물론 이 도식에서도 좌우변의 관계는 서로 바뀔수 있는게 아니다. 아직 양적으로 교환될 척도는 여전히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 가치형태의 이 도식은 확대된 가치형태 도식과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확대된 가치형태에서 하나의 생산물이 자신의 사용가치를 표현할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반대로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오직 하나의 등가물로만 자신의 가치가 변화된다는 엄청난 변화가 발생한다. 드디어 우변의 볼펜이 모든 ‘가치’를 통일적으로 표시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황금볼펜~~두둥~~)

이것은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러도 될만큼의 전복적 상황이다.

이제 하나의 등가물이 등장함으로써 이전에 중요했던 사용가치들의 다양성은 스뤠기가 되고 오로지 양적인 척도에 의해서만 좌변항들의 가치를 표현하게 되었다. 확대된 가치형태까지는 좌변항이 우변항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일반적 가치형탱에서는 우변항(일반적 등가물)에게 채택되지 않으면 상품이 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가수가 수만이형과 계약을 맺는게 아니라 수만이형이 계약을 맺어줘야 가수가 되는 것처럼......이제 be동사 역할을 하던 논리적 등호는 수학적, 양적 등호로 바뀌었다.

 

 

4. 화폐형태

화폐형태는 일반적 가치형태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자리를 화폐가 대체하여 차지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반적 가치형태에서 일반적 등가물인 우변항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양적 가치를 통해서 좌변의 ‘상품’들을 표시한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이제 일반적 등가물의 자리를 화폐가 차지하면서 화폐형태의 도식은 완성된다. 즉 화폐형태와 일반적 등가물의 도식은 본질적으로 같다. 차이가 있다면 일반적 등가물이 가진 모호성을 화폐형태는 해소했다는 것이다. 이제 화폐형태는 동질적인 양적 가치를 표시하는 단일한 척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화폐가 상품의 가치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물이 등가물과 교환가능성을 얻을 때만 가치를 갖는 상품이 되므로 이제는 상품이 화폐의 가치를 재현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면에서 화폐는 모든 상품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상품세계의 신이 된 것이다.

 

 

5. 화폐와 물신주의

생산물의 가치가 등가물에 의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로 인해 생산물이 가치를 부여받고 상품으로서의 생명을 부여받는 것처럼 나타나는 이 신비한 역전현상, 이것을 맑스는 fetishism이라 부른다. 이것은 타자와의 관계맺음이라는 노동의 본질적 능력이 노동생산물의 자연적 성격으로 보이게 되는 상태를 지칭한다. 이제 화폐는 교환이라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수단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목적이 되고 말았다.

 

 

6. 확대된 가치형태에서 일반적 가치형태로의 비약

앞서 제기된 거대한 비약을 이제 설명할 차례이다. 맑스는 이러한 비약을 설명하기 위해 화폐의 기능(자본 1권의 3장)을 논의로 끌어들인다. 논리적으로 봤을때는 화폐의 발생은 상품유통, 즉 교환의 유용성을 양화시켜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맑스는 화폐가 유통수단 이외에도 축장수단, 지불수단, 세계화폐의 용도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것은 유통수단으로 등장한 화폐의 용도가 다양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전부터 이미 화폐는 다양한 목적을 위해 존재해왔으며, 정치경제학에서 화폐의 논리적 발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통수단, 즉 등가물로서 화폐의 발생을 논리적 필연인 것처럼 끼워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화폐는 그 이전부터 유통수단 이외의 수단으로(예를 들면 조공이나 지불수단으로)널리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유통수단으로 ‘등장한 화폐’는 인과성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화폐는 경제학적 발전과정에서 그 필요에 의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것을 마치 필연적 발전과정에 의해 등장한 것처럼 사기를 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비약이자 위대한 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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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바르셀로나 대학 도서관

 

 

 

정말 잔인하다......

 

얘네들은 공부하다가 코도 맘대로 못판다.....

 

멍때리는 것도 부담스럽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볼수 있는 구조기 때문에....공부나 될까....

 

나처럼 남 눈치 많이 보고 부끄럼 많이 타는 사람들은 어케 공부하란 소린지....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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